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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사사키 아타루 『이 나날의 돌림노래』, 여문책 2018

‘문학’의 ‘종언’에 대한 인류사적 비판과 위로

 

 

이정숙 李貞淑

현대문학 연구자 punky525@hanmail.net

 

 

사사끼 아따루(佐々木中)는 자유롭고 신선한 말투로 유명하다. 그의 책 어느 페이지를 편다 해도 빨려들어 읽게 된다. 그러니까, 그의 생각에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즐거운 전복성이 있다. 우리가 흔히 근대문학의 역사를 말할 때 쓰는 백년이라는 시간성을 간단히 전복하는 점만 봐도 그렇다. 일본인이 운율을 맞추지 않은 기간은 나쯔메 소오세끼(夏目漱石)부터 1980년대 일본어 랩 등장까지 기껏해야 백년에 지나지 않으니까, ‘문학’의 역사는 그만큼 짧으니까 벌써 지쳐서 ‘종언’ 따위를 붙이는 태도는 한창 열심히 글을 쓰는 후배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일이라고 말이다. 이런 거침없는 단호함도 매력이지만, 저자가 일본의 지성계와 사상계의 신성으로 떠오른 데는 엄연한 이유가 있다. 우리에게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2008, 한국어판 자음과모음 2012)로 알려진 저자는 푸꼬, 라깡, 들뢰즈 그리고 그의 스승인 르장드르를 거쳐 종교사학을 공부했고, 인류 최초의 혁명인 12세기 중세해석자혁명과 루터의 종교개혁을 ‘문학’적 파급력으로 재해석한 바 있다. 그 덕분에 긴긴 인류사적 상상력으로 예술을 바라보고 발언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책 『이 나날의 돌림노래』(この日々を歌い交わす: アナレクタ2, 2011, 김경원 옮김)를 읽는 사이 나도 모르게 밑줄을 긋고 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떨리는 손끝이 차가워진다. 이 책은 대학과 서점에서의 강연, 그리고 문학과 음악, 건축 분야의 지인들과 나눈 대담이어서, 온전히 저자 자신의 문체로 채워진 것이 아님에도 문체가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점이 신기하다. 저자는, 대담자 중 한 사람인 『TOKYO 0엔 하우스 0엔 생활』(2011)을 쓴 사까구찌 쿄오헤이(坂口恭平)의 말처럼 워낙 솔직하고 올곧게 얘기하는 스타일이다. 지사적인 풍모조차 느껴지는데, 시종일관하고 있다면 지루할 법도 하지만 열정적인 태도로 독자를 향해 웅변하는 문장이 여러번 반복해서 들을수록 마음에 착착 쌓인다.

사사끼 아따루를 읽고 있노라면 두가지가 떠오른다. 그가 가진 사유의 힘이 힙합문화의 저항성과 창조성에서 다져지고 있기도 하지만 뭔가에 열중해서 의미를 만들어내고야 말겠다는 태도를 ‘힙합과 비보잉에 영혼을 바친 젊은이들’로 은유한다는 점. 그리고 일본 저자들이 쓴 ‘아들러 심리학’ 번역본이 도서가판대를 점령했던 한 시기가 증거하듯 한국이나 일본이나 저마다 불안을 앓는 독자들이 넘쳐난다는 점이다. 마침 이 책에 실린 가장 묵직한 대담은 일본어 랩과 힙합의 문화적 동향과 세대론적인 형성사를 다룬 이소베 료오(磯部凉)와 나눈 이야기다. 이소베 료오라면 73년생인 사사끼 아따루보다도 다섯살 아래로, 일본공업도시 카와사끼의 어둠과 다문화를 그 지역 출신 래퍼들의 존재양상과 연결하여 조명한 『르뽀 카와사끼(ルポ川崎)』(2017)의 저자다. 두 사람이 힙합에 대해 세련되고 깊이있게 예술론적 언어를 생산해내는 장면을 보고 있으니, 애정 어린 심정으로 자신이 살던 집을 반추하는 자의 절절함이 묻어난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담은 하나의 독립된 주제이지만 저자가 이 책에서 역설하는 개념들과 두루 연결돼 있다. 저자는 번역이란 철저한 독서라고 거듭 말한다. 말이, 생각이, 최대한 옳게 갱신해서 번역되지 않으면 안 되며, 그것이 옮겨온 토양에서 생질변화를 하면서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란, 새로움(new)이라는 가치에 결박당한 전체주의적인 열등감이 아니라, 신선함(fresh)이 생산한 이러한 재탄생을 의미한다. 힙합이 바로 그것을 증거하는 장르인 셈이다. 사사끼 아따루는, 힙합은 아버지 세대가 남겨준 레코드판을 오따꾸적으로 듣고 만든 은둔형 외톨이의 문화지만, 세계를 향해 폭발적으로 열려 있다는 점, “인생 시나리오를 몰수당한”(151면) 젊은이들이 사회를 향해 언어를 만들어내고 있으니 인류사적으로 건전하고 건강하다고 역설한다. 이 때문일 것이다. 독자들이 불안에 잠식되는 와중이구나 하고 적잖이 놀랐던 기억은 사사끼 아따루를 통해 환기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필요로 했던 위로란 사실은 우리가 집단적으로 잃어버린 것, 고로 회복되어야 하는 것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처방은 요컨대 필생을 다해 쓰고, 제대로 읽으라는 것이다. 의미를 온전히 알기 어려운 외국어 사이를 가로지르며 의미를 건져내려 애쓰는 동안 자신의 무의식과 마주치는 번역자의 운명처럼, 독서란 타자성을 아는 것이고 텍스트의 역사성을 아는 것이다. 읽는다는 것은 이렇게 단어가 탄생한 뿌리에 흠뻑 젖어보는 것이며, 읽으면서 생각을 고쳐가는 것, 결국 전투이자 전쟁이고 종국에는 (자기)혁명에 이르는 것이다. 사사끼 아따루가 문학으로 혁명이 가능하다고 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이 점을 증거하기 위해 그는 무수한 시인과 작가들을 오마주하면서 언급한다. 그들의 공통점은 패배를 벗 삼아 글과 싸웠다는 점이므로, 우리 모두가 후보군인 셈이다.

사실 그 자신도 후보군 중 한 사람으로, 그는 소설도 썼지만 좁은 방에서 『천개의 고원』을 붙들고 포스트잇을 잔뜩 붙여가며 몇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는 점이 소소하게 ‘밝혀진다.’ 또 푸꼬의 후기 강의록은 초급 프랑스어를 뗀 수준이라면 읽어나갈 수 있을 정도로 명료하니 꼭 원전으로 읽으라고 권유하는데, 요즘은 찾기 드물지만 선생의 가장 좋은 역할인 이같은 적소의 오지랖이 신뢰를 더한다. 이런 점들로 인해 『이 나날의 돌림노래』로 사사끼 아따루를 처음 접한 독자라 할지라도 앞선 저작들 역시 관심을 갖게 만드는 연동이 일어난다.

사사끼 아따루의 세번째 저서인 『제자리걸음을 멈추고』(2011)의 한국어판(여문책 2017) 서문을 보니 촛불혁명을 목도한 선망과 동지애가 말 그대로 뜨겁게 녹아 있다. 문화적 자본이라고는 일절 없는 일본 최북단의 깡촌 출신임을 강조하면서 힙합문화를 스스로 잉태했다는 점이 신비스러운 한편 다소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왠지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근대 초기 프롤레타리아끼리 열매 맺어보려다 좌절한 사해동포주의조차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은 공감의 감흥이 밀려온다. 사사끼 아따루가 일본사회의 모순뿐 아니라 한국사회의 모순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다만, 문학에 대한 학술적 논의가 숫자적으로 과잉된 탓에 오히려 쟁점을 형성하지 못하는 지금의 역설에서, 그의 말들이 마니아들만의 향유로 남겨질 것인지 공론장의 소통구조에서 비평적 감수성을 일깨울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렸다. 그의 다음 책인 들뢰즈-과따리론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