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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최은영 崔恩榮

1984년 경기 광명 출생. 2013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 등이 있음. euni153@naver.com

 

 

 

일년

 

 

처음 사흘은 날이 맑았다. 창밖으로는 멀리 고가도로와 고가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가 보였다. 고가도로 앞으로 아파트와 상가건물, 다세대주택,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있었고 가끔 새들이 푸른 하늘을 무리 지어 날았다. 그녀는 피와 진물을 받아내는 주머니를 몸에 달고 링거를 맞으며 병실 침대에 누워 그 풍경을 바라봤다. 겨울이었다.

사흘 뒤부터 그녀는 바퀴가 달린 링거 지지대를 끌고 병동 복도를 걸었다. 누워만 있으면 회복이 더디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부터였다. 그녀는 천천히 걷다, 중간에 휴게실 의자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봤다. 텔레비전을 건성으로 보면서 환자와 환자의 보호자, 방문객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종종 문병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멀리 사는 이모가 수술 전 입원부터 수술 직후까지 곁에 있어줬고, 그후로는 간간이 아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녀와 별다른 정이 없는 큰아버지 부부가 찾아와 통성기도를 해주고, 찬송가를 불러줬다. 회사 동료들 몇몇이 찾아와서 안부를 물어주기도 했다.

그녀에게 그런 방문들은 뜻밖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다정했고, 그녀가 겪은 고통을 위로했다. 그녀는 잠시였지만 그들에게 정성껏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했다. 그 느낌은 수술 후 그녀의 혈관을 흐르던 모르핀처럼 부드럽고 달았고, 그녀는 덜 아플 수 있었다. 그들이 한때 누구보다도 그녀를 아프게 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다희를 만난 건 수술한 지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8층 복도를 걷고 있을 때, 검은색 트레이닝복 차림의 여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왔다.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그녀는 그 여자가 다희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다희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선배.

다희씨.

여기 왜……

다희는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수술받았어요. 다희씨는 왜……

엄마가 입원해서요.

다희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부스스하게 머리를 묶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어디 잠시 앉을까요? 다희가 물었다.

그럴까요?

둘은 휴게실로 천천히 걸어갔다. 텔레비전에서는 저녁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고, 몇몇 사람들이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 다희를 우연히라도 다시 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기에 그녀는 조금 당혹한 채로, 휴게실 의자에 앉았다. 조도가 낮은 휴게실에서 다희는 어머니의 상황에 대해 말했다. 어머니가 유방암 수술을 앞두고 있어서 오늘 입원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는 사이 복도의 조명이 몇개 더 꺼졌다. 그녀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슬리퍼를 신은 다희의 발에 시선을 뒀다.

그녀도 자신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했다. 병을 알게 되고,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과정을 짧게 정리해 말했다. 다희는 그녀의 말 중간중간에 네, 그렇죠, 그랬어요?라고 응답했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다희와 대화하는 동안 그녀는 익숙한 편안함을 느꼈다.

그녀의 말이 끝나고, 둘은 서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조금 어두운 조명 아래로 다희의 긴 눈썹이 보였다. 다희가 말할 때면 이리저리로 움직이던 눈썹. 미간을 찌푸리며 웃고 있는 다희의 얼굴 위로 긴 눈썹이 곡선을 그렸다.

 

*

 

그녀가 다희를 만난 건 스물일곱, 지금으로부터 팔년 전의 일이었다. 그녀는 입사한 지 삼년 차 사원이었고, 다희는 일년 계약 인턴이었다.

풍력발전기 공사가 막바지에 다다른 무렵이었다. 공사 시일이 빠듯해 현장에서 늘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현장 사무실과 현장 감독이 따로 있었지만 현장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본사 직원이 직접 가서 확인하고 본사에 보고하는 일이 필요했다.

다희가 인턴으로 입사하기 몇달 전부터 그녀는 그 일을 했다. 매일 공사장에 들러 발생하는 문제와 민원을 수집했고, 팀장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현장에 머물기만 할 때도 있었지만 일주일에 몇번은 본사에 가서 보고하고 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이런 번거롭고 고된 일을 선호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녀가 일을 맡기 전에도 몇번이나 직원이 바뀌었다. 그런 일에 그녀가 지원했을 때 사람들은 놀라면서도 안도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자주 늦은 시간까지 일했다. 혼자서 하기에는 많은 양의 일이었지만, 그렇게라도 자기 존재를 사람들에게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시기였다.

일을 끝내고 운전해서 집으로 갈 때면 스물일곱밖에 되지 않은 자신이 다 늙어버린 노파처럼 느껴졌다. 입사하기 전의 기억은 아주 멀리 있었고, 그때의 자신은 온전한 남처럼 기억됐다. 잠을 줄여가며 공부하고 그 많은 시험에 통과해서, 그렇게 노력해서 도착한 곳이 간척지 공사장, 자신에게 소리치는 사람들 앞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간척지 위에서 커다란 풍력발전기 세대만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간척지를 오갈 때, 그녀는 인안대교를 건너야 했다.

대교 양옆으로는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멀게는 작은 섬들의 군락이 보였다. 대교의 바닥은 포장이 잘되어 있어서 진입할 때면 바퀴가 바닥에 부드럽게 닿아 미끄러져가는 느낌이 좋았다. 그럴 때면 차체의 소음이 조금 감소했고, 바퀴가 부드러운 표면을 달리는 일정한 소리가 났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면 차체가 심하게 흔들리기도 하고, 가끔은 공중에 걸린 기다란 길을 달리고 있다는 생각에 겁이 나기도 했지만.

일몰 전후의 대교는 아름다웠다. 대교에 달린 전구와 가로등 불빛이 때로는 붉은빛으로, 때로는 보랏빛으로 물든 부드러운 하늘 속에 길을 내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지고 멀리 이어진 대교를 볼 때면 자동차들이 허공 위를 달리는 것 같았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 어릴 때 그녀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발명될 미래에 대해 들었다. 하늘은 구름과 새의 집이 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어지러운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어린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이제 완성된 풍력발전기가, 그 많은 이점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나는 새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도살 기계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인안대교를 건널 때면 그녀는 늘 그런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반쯤은 몽롱하고 반쯤은 또렷한 정신이 이리저리 섞이며 그녀가 마주한 현실에서 그녀를 몰아냈다.

 

다희는 인턴생활 한달 만에 그녀의 어시스턴트로 일을 시작했다. 중국어에 상당히 능통해서 중국인 기술자와 협력업체 직원들 지원 명목으로 현장에 파견됐다. 그러나 다희는 운전을 하지 못했고, 공사장까지 이동할 수 있는 대중교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조수석에 인턴을 태우고 달리는 길이 온전한 쉼이 될 수 없어서 처음에 그녀는 마음이 무거웠다.

처음으로 카풀을 한 날, 숱이 많은 단발머리를 잘 정돈한 다희는 재질이 좋은 얇은 코트를 입고 깨끗한 구두를 신고 있었다. 차에 타서는 검은색 백팩을 무릎에 얹고 전에도 타던 차를 타는 것처럼 자연스레 앉았다.

고마워요, 선배님. 제가 운전을 배웠어야 했는데.

다희는 백팩에서 귤을 꺼내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차내에 금세 귤 향기가 퍼져나갔다. 다희는 그릇 모양으로 벗긴 껍질 위에 귤 알맹이를 하나하나 올려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귤 몇개를 집어 입에 넣고, 괜찮으니 자기에게 더는 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다희는 백팩에서 계속 귤을 꺼내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인턴 교육을 받을 때의 일, 그녀와 같이 일을 하게 된 사정, 회사 밥이 맛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건 꽤나 특이한 경험이었다. 아무리 낯가림이 없고 사교적인 성격이라 하더라도 회사 선배와 처음으로 단둘이 가는 길에서, 그렇게 귤을 까먹으며 허물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 다희를 보며 그녀는 입사 초기의 자기 모습을 떠올렸다. 회사 사람들에게 애써서 최선을 다하려 했던 자신의 모습을, 그 뒤의 낙담을.

그렇게 입고 가면 추울 거예요. 허허벌판에 바람도 많이 불어서.

저, 중학교 때 중국 선양에서 지내서, 웬만하면 추위 안 타요.

그래도 바람은 달라요. 머리 울리고 아파요.

그럼 어쩌죠.

저기, 차 뒷좌석에 얇은 침낭 있어요. 이따 힘들면 그거라도 둘러요.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그녀는 양모로 뜬 털모자를 쓰고, 다희는 파란색 얇은 침낭을 어깨에 두르고 차에서 내려 걸었다.

아무것도 없는 간척지와 커다란 풍력발전기는 언제나 그녀를 압도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다 살아 있는 존재들 같았다. 땅도, 발전기도, 바람도 그랬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는 그 소리가 사람 목소리로 들렸고, 퇴근하고서도 환청으로 들리곤 했다. 하얀 발전기는 바람개비를 높이 든, 흰옷을 입은 사람처럼 보였다.

다희는 별말 없이 발전기를 올려다봤다. 흥미있는 대상을 유심히 관찰하는 얼굴이었다. 1호기부터 3호기까지 발전기를 둘러보는 내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처음 간 곳에서 현장 관계자들과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눴다. 다희는 사람들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 사이로 잘 섞여 들어갔다. 큰 눈에 감정이 그대로 비쳤고, 말할 때면 긴 눈썹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짧은 시간에도 여러 표정을 지었고, 웃음소리가 아이 같았다.

다희는 스스로를 낮추는 식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지 않았다. 실수를 해도 자신이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깨끗하게 사과할 뿐, 자학하듯 자신을 깎아내리지 않았다. 매사에 눈치를 보고 저자세로 일관하는 그녀에게 다희의 그런 태도는 그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했다. 누구보다도 앞장서 스스로를 질책하고 과도하게 몰아세우던 자기 모습을. 이상하게도 다희와 함께 있으면 그녀는 자기 자신을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녀는 회식 자리에서 처음으로 다희와 인사를 나눴다. 가볍게 맥주 몇잔을 마시는 자리였는데 다희의 얼굴이며 목이 온통 울긋불긋했다.

억지로 안 마셔도 돼요.

그녀의 말에 다희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다희가 그녀와 같은 나이라는 것, 오래 방송국 피디 시험을 준비했으나 잘되지 않아서 작년에 포기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후로도 여러 기업에 원서를 냈지만, 끝까지 통과한 건 이 기업의 인턴 자리밖에 없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런 정보를 스스럼없이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다희를 보면서 그녀는 다희가 솔직하지만 아직 미숙하여 경솔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곳에서 상대에게 미리 자기가 지닌 패를 보일 필요는 없었다. 다희는 인턴 중에서도 나이가 가장 많은 축에 들었고, 여자였다. 그런 경솔한 행동이 득이 될 리 없는 위치였다. 술을 마셔 나른해진 얼굴로 말하는 다희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는 불안해 보였다.

다희의 솔직함은 그러나 사람들에게 흠만 잡힐 경솔함이 아니었다. 솔직하되 자기를 비하하거나 부정하지 않았고, 웃고 말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워서 부담스럽지 않았다. 다희와 같이 통근하고 일하게 되면서 그녀는 다희에 대한 우려가 기우였다는 걸 조용히 깨달았다.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농협이 나왔고, 다희는 언제나 그 앞에 서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 가만히 귤을 까서 그녀에게 건넸다. 맑은 날에도, 눈이 오는 날에도, 비가 오는 날에도 다희는 귤을 먹는 것이 무슨 의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일 그 일을 반복했다.

집에서 귤농사 지어요?

엄마 친구가 지으세요. 십년 전인가 제주도로 내려가셨거든요.

다희는 한 손으로 귤을 주무르면서 말을 이었다.

이거 노지 귤이에요. 보면 흠이 많고 껍질도 두껍고 예쁘지도 않고, 맛도…… 솔직히 말하면 신맛이 강하잖아요. 처음에는 맛없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이걸 먹다보면 다른 귤이 맛없어지더라구요. 손바닥 대보세요.

다희가 귤 몇점을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 그 이모가 제 자취방으로 귤 박스를 보낸 거예요. 냉장고도 없는데. 난감해서 방 한쪽에 귤 박스를 두고 있다가 할 수 없이 하나씩 먹었어요. 왜 이런 걸 보내느냐고 막 화를 내면서요.

그래서요?

그렇게 며칠을 귤만 먹었는데, 귤이 이런 맛인 줄은 몰랐어요. 한 박스를 다 먹고 나서는 입맛이 돌더라구요. 그 이모도 참, 제가 자기 친조카도 아니고, 친구 딸일 뿐인데 그렇게 마음을 써요.

다희씨 어머니랑 가까우신가봐요.

젊었을 때 같이 일했대요. 각자 결혼하고는 가까이 살지 못해서 실제로는 자주 본 사이도 아닌데, 그 마음이 뭘까 궁금했어요.

다희는 자신의 엄마와 그 이모와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날 이후로 이야기는 여러갈래로 뻗어나갔고, 그녀는 라디오를 듣듯이 다희가 하는 이야기에 자연스레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다희의 할머니에 대해, 부모님에 대해, 다희의 중국생활과 다희가 만났던 사람들과 동물들에 대해서도 들었다. 돌이켜보면 다희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분명 슬프고 외로웠을 법한 일조차도 그녀는 가볍고 웃기는 이야기로 전했다.

다희씨 참 웃겨요. 그녀가 말했다.

다들 처음에는 그렇게 말해요. 너 참 재밌다, 웃기다.

다희는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소리가 작아지자 목소리 자체가 다르게 들렸다.

그러다가, 실망하는 거죠. 전 언제나 그 사람들 기대만큼 밝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아, 너 이런 애였니? 이러고 가버리는 거예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렇게 말하고 다희는 힘없이 웃었다.

그래서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잃고 싶지 않으니까 무리를 하게 돼요.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어서.

다희의 목소리에 실린 감정이 그녀의 마음에도 가까이 느껴졌다.

그랬더니 이런 사람도 있었어요. 다희 너는 깊이가 없어, 얕아, 그래서 좀 질려.

침묵 속에서 자동차가 지면을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그 순간 다희가 직장 동료로서의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다.

선배 차에 타면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와서…… 다희가 말했다.

아니에요.

죄송해요.

괜찮으니 마음 놓아요. 전 좋아요, 이렇게 얘기하는 거.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자기 마음을 의심했다. 괜찮다고 했지만 정말 괜찮은지, 좋다고 말했지만 좋기만 한지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경계를 허물어준 다희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희의 순진한 마음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농협 앞에서 다희를 태우고, 둘은 서쪽으로 갔다. 시내를 통과해 아파트단지와 상가들을 지나서 고속도로를 타고 이동했다. 중간중간 터널을 통과해 마지막 터널을 지나면 인안대교가 나왔다. 인안대교를 지나 작은 마을을 지나 더 서쪽으로 가면 간척지가 나왔고, 세대의 발전기가 보였다.

 

그녀와 다희는 발전기가 시험 가동될 때 그 첫 모습을 함께 지켜보았다. 둘은 가깝게 서서 풍력발전기가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봤다. 발전기에 달린 발광체에서 레몬색의 빛이 나왔고, 날개가 돌아가는 소리와 바람 소리가 섞여 일정한 리듬을 지닌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그 소리는 마음을 압도하면서 두렵게 다가왔지만, 한편으로는 시원하고 자유로운 느낌도 줬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다희는 커다란 기계가 주는 안도감이 있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기계는 감정이 없고, 그래서 기쁨도 슬픔도 불안도 느끼지 않고, 변덕을 부리지 않고, 누굴 속이지도 않고, 자기 모습을 감추거나 매번 변형시키지 않고서도 훼손되지 않는 단단한 존재라고, 그래서 발전기를 보고 있을 때면 알 수 없는 안도감 같은 것이 든다고 말했다.

다희는 어느 일년 동안, 사랑하는 이들을 여럿 잃었다고 말했다. 피디 시험을 준비한 지 이년 됐을 때의 일이라고 했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도 나름대로 살아보겠다고 참으면서 스터디에도 나가고 공부도 하고, 그러다 집에 와 혼자 울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때 기억은 좀 나요? 그녀가 물었다.

아뇨, 그냥 드문드문. 언론고시 스터디를 하고 있었는데 스터디에 빠지려면 불참 사유를 말해야 해서 일이 생길 때마다 솔직하게 말했어요.

거기까지 말하고 다희는 고개를 숙인 채로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침묵하다 다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스터디 사람들도 저를 위로해줬어요. 안됐다고. 그러다 그해 겨울에 저랑 삼년을 같이 산 고양이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그러는 거예요. 다희씨, 어떻게 다희씨 주변에는 이런 일들이 이렇게 잦아요? 어떻게 매번 누가 죽어요?

다희가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코를 풀었다.

공채 시즌이어서 다들 예민해졌을 때였어요. 스터디원이 빠지면 모두가 피해를 보는 구조였으니까요. 스터디에 빠지고 싶어서 제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나봐요. 사람들 앞에서 슬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그렇게 노력했었는데, 사람들은 그런 제 모습을 보고 제가 의심스러웠나봐요.

다희씨.

다희는 그녀 쪽을 보고 웃었다.

이렇게 말하니 좋네요.

다희는 귤껍질을 벗겨서 그녀의 손에 귤 몇점을 올렸다. 귤은 아주 시고 달았다. 귤을 다 먹고, 그녀가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저도…… 작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거기까지 말하고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여기서 한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고작 그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눈물이 나와 놀랐다. 그녀는 눈물을 참으면서 한참을 더 운전했다.

저를 키워주신 분이었거든요. 저도 다희씨처럼, 회사에서는 웃다가 이 차 안에서 많이 울었어요.

그 말을 하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외할머니라고 휴가가 하루밖에 안 나온 것도, 부모상이 아니니까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사람들이 가정하는 것도 마음에 남았어요.

선배.

다희가 그녀의 팔에 손을 얹었다.

자동차 안에서 다희에게 했던 이야기들은 오래도록 그녀 안에서 아우성치며 밖으로 나가기를 바랐던 것처럼 그녀를 밀어붙였다. 그녀는 정제된 언어로, 자신이 이미 정리한 시간들을 이야기했지만 그 말을 하는 자신의 몸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땀이 나고, 심장이 빠르게 뛰고, 머리가 아프고, 때로는 그날처럼 눈물이 고이기도 했다.

한시간 남짓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서로의 이야기에 몰입하는 동안 그녀와 다희는 선후배도, 친구도, 애인도, 우연히 지나치는 사람도 아니었다. 자동차에서 내려 일터로 나가면 둘은 동료가 되었다가, 자동차에 올라타면 다시 서로의 이야기에 몰두하는, 알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유일하게 대화가 끊기는 순간은 인안대교를 건널 때였다. 자동차가 인안대교에 진입하면 둘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다가도 중단하거나 대교가 보일 무렵이면 대화를 정리하는 식이었다. 자동차가 인안대교를 지날 때, 다희는 오른쪽 창으로 고개를 돌려 바깥을 유심히 바라봤다. 매일 보는 풍경인데도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다희는 바다와 작은 섬들을, 밝은 하늘을, 일몰을, 어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시간을 지나며 그녀의 마음은 두갈래로 갈렸다.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는, 자신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마음이 하나였고, 다희와 계속 그렇게 이야기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다른 하나였다.

다희와 이야기할 때면 따뜻한 바닷물에 들어가 수영하는 기분이 들었다. 몸에 부드럽게 감기는 물처럼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다희와 만나고 그녀는 지금껏 그녀가 알았던 대화가 사실은 대부분 서로를 향한 독백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을 메우기 위해, 혹은 최소한의 사회적인 관계를 위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했던 말들이 어른이 되고 나서 그녀가 알던 대화의 전부였으니까. 그제야 그녀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자기 방에서 온전히 혼자가 되기를 바랐던 마음,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듣기 싫었던 마음 안에도 사람과 이야기 나누고 싶은 자신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할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다희가 물었다.

초등학교 이학년 때 소풍 가서 보물찾기를 했는데, 제가 찾은 쪽지에 이층 필통이 나왔어요. 그래서 그걸 받고 집에 가려는데 어떤 남자애가 자기 필통이랑 바꾸자는 거예요. 싫다니까 저를 발로 차고는 필통을 뺏어 갔죠. 버스 타고 학교에 도착했는데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할머니에게 가서 일렀어요. 쟤가 나 때리고 내 거 가져갔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그 남자애랑 그 남자애 엄마에게 막 걸어가는 거예요.

그래서요?

처음엔 좋게 말했죠. 그런데 그 남자애 엄마가 자기 아들이 그랬을 리가 없다고 그래요. 그랬더니 할머니가 거짓말하지 말라고,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당신 아들 가방 열어봐라, 거기 필통 두개 있다, 뺏어 간 필통은 이러이러하게 생겼다, 이러면서. 가방을 열어보니 그 필통이 나왔어요. 남자애 엄마가 저에게 돌려주고 떠나면서, 어쩜 노인네가 저렇게 못되게 늙었대? 말하고 쳐다봤어요. 벌레 보듯이. 그랬더니 저희 할머니가 이러는 거예요.

뭐라고 하셨어요?

너 같은 사람들 때문에 이렇게 늙었다, 왜! 이…… 씨발년아.

그 말을 하고 그녀는 작게 웃었다.

그때 할머니 모습이 잊히질 않아요. 말로 일격을 가하고 싶으면서도 겁먹은 게 제 눈에는 보였거든요. 씨발년아,라고 할 때는 목소리가 작아지면서 꼭 울 것 같았어요. 욕도 못하는 사람이 최대치의 욕을 한 거죠. 할머니 생각하면 그 기억이 자주 떠올라요. 저를 지키려는 매 순간순간이 무서웠을 것 같고, 용기를 냈어야 했을 것 같고. 세상 소심한 사람이 막, 씨발년이라는 말도 해야 하고.

선배.

네.

고마워요, 선배. 말해줘서.

 

발전소 개소식은 아침 열한시, 풍력발전기가 멀리 보이는 공터에서 시작됐다. 음향시설과 연단, 의자들을 실은 트럭이 도착한 건 아홉시쯤이었다. 맑은 하루가 되리라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바람이 심하게 불었고 하늘에도 짙은 구름이 떠 있었다. 접이식 의자를 펴서 세워놓으면 넘어지기도 했고, 본격적으로 비라도 내린다면 행사 진행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었다. 별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녀와 직원들은 의자가 쓰러지면 다시 펴서 세워두는 식으로, 그 바람이 지나가기를 바랐다.

그녀가 속한 팀 직원들과 인턴들이 개소식을 준비했다. 행사와 식사를 겸할 수 있는 장소를 섭외하고, 초대장을 만들어 부치고, 보도자료를 쓰고, 플래카드와 당일 나갈 홍보물을 만들고, 전문통역사, 사진작가, 영상작가를 섭외했다. 손님들이 타고 이동할 관광버스와 야외행사에서 쓰일 비품들을 준비하기도 했다.

손님들로 국회의원, 시장과 고위직 공무원, 시의원, 단체 임원들이 들어섰고 신문사 방송사 기자들이 왔다.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일렬로 나란히 서 있는 동안 인턴들이 테이프 커팅식에 쓰일 리본을 단 봉을 양쪽에 설치했다. 오색 리본이 일자로 펴진 순간, 치마 정장을 입은 가장 어린 여자 인턴 둘이 양쪽에서 스테인리스 쟁반을 들고 걸어와 모두에게 가위를 나눠 줬다.

그 장면을 보면서 그녀는 신입사원이었던 자기 모습을 떠올렸다. 여기 여직원들 중에 막내가 누구지? 새로운 신입사원이 들어오기 전까지 그녀는 행사 때마다 꽃다발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사람들은 그런 일을 하는 신입을 ‘꽃순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자신의 진실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자기감정이 조금이라도 표정으로 드러나, 어른스럽지 못하고 사회인답지 못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열한시에 시작해서 열두시에 끝나야 했을 행사가 열두시 반에도 끝나지 않았다. 중요한 사람들이 차례로 나와서 자기 감상을 말했는데, 마이크가 잘 듣지 않을 때면 이거 왜 이래?라고 직원들이 있는 쪽을 보고 반말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쩔쩔매는 직원들 사이에 서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직원들에게 소리치거나, 반말을 섞어 쓰는 사람들을 그녀는 자주 보았다. 그러나 그만큼이나 피로한 건 그런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무의미하고 진부한 말들이었다. 왕년에 자신이 얼마나 진보적인 활동을 했는지, 혹은 현재 자신이 얼마나 이 세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자랑하는 말들. 자기가 느끼는 감정을 얼굴에 다 드러낼 수 있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라면 생각나는 대로 다 할 수 있는, 자기 권리를 과시하는 사람들.

호텔로 이동해서 오찬이 이어졌다. 직원들은 행사장 뒤처리를 하는 팀과 호텔 레스토랑에서 손님들을 의전하는 팀으로 나뉘었다. 그녀는 행사장 뒤처리를 하고, 뒤늦게 호텔로 이동했다. 레스토랑 입구에서 그녀는 다희와 김상무가 서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봤다. 가까이 다가가니 김상무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다희에게 자기가 한 말을 중국어로 통역하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문장은 죄다 불편한 유머였다. 김상무는 자신이 다희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김상무에게 다가가 행사장 정리를 마쳤다고 보고했다.

여기 다희씨, 지수씨 팀 인턴이죠?

네.

아주 재미있는 친구네. 우리 여자 인턴 중에 나이가 가장 많지, 아마?

다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절히 원해야 하는 거예요. 대충대충 해선 안 돼.

알겠습니다.

다희는 김상무 앞에서 과도하게 상냥해 보였다. 김상무에게 당신이 그런 말을 해줘서 진심으로 고맙다는 듯이 연기하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인사권자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려고 애쓰는 다희의 모습이 그녀는 불편했다.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마음이었다.

그럼 수고들 해요.

김상무가 자리를 떠나고, 그녀와 다희는 창가로 가서 행사장에서 남은 생수를 마셨다.

김상무님 말,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그녀가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희가 웃으며 답했다.

다희는 창밖을 보며 립스틱이 지워져 테두리만 남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지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멀리 수평선이 보였다.

팀 선배들이 하는 얘기 들었어요. 김상무님이 선배 예뻐한다는 말요.

다희가 무슨 뜻으로 그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그녀는 마음이 무거웠다.

사람들이 또 무슨 얘기 하는데요.

선배, 일 잘하고 똑 부러진다고, 그래서 어른들도 선배 좋아한다고.

그녀는 멀리 보이는 수평선에 시선을 두고 사람들이 자신과 김상무를 두고 어떤 태도로 이야기했을지 어림해봤다.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온종일 이어진 행사가 피곤했는지 다희는 평소와는 다르게 집으로 가는 차에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서 길가 나무들의 가지가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쓰레기가 공중에 날렸다.

저…… 아까 한 말이 마음에 남아서요. 다희가 말했다.

뭐가요.

사람들이 뒤에서 선배 얘기했다는 거, 정말 생각 없이 한 말이었어요.

그게 뭐가 어때요.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잠시 망설이던 다희가 입을 열었다.

선배와 김상무님은 전혀 다른 사람이에요.

알아요.

같은 인턴들도 그렇고 선배들도 다 지수 선배 좋은 사람이라고 해요.

다행이네요.

자동차가 인안대교에 진입하자 다희는 고개를 돌려서 어둠 속에서 점점이 보이는 작은 빛들을 바라봤다. 그녀는 멀리까지 이어진 인안대교의 불빛에 시선을 두고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은근한 따돌림이 있었을 때도 동료들은 그녀에게 친절했다. 아침이면 밝은 얼굴로 출근 인사를 했고, 엘리베이터나 화장실에서 만나면 반가운 내색을 했다. 점심을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하기도 했다. 공적인 일에서 그녀를 배제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몇몇 분명한 순간들은 있었다. 모두가 받은 동료의 청첩장을 받지 못했을 때, 회사 내 메신저로 조금이라도 개인적인 감정을 나누고자 했지만 답이 오지 않았을 때, 아주 사소한 주제라도 그녀와는 사적인 대화를 이어가지 않으려는 기미가 느껴질 때, 어떤 말도 없었지만 그녀와 함께 있어서 버겁고 불편하다는 분위기가 감돌 때, 우리의 세계에 온전히 소속될 수 없는 당신을 나는 안타깝게 여기지만 도울 생각은 없다고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을 볼 때.

그녀는 그런 상황에 체념한 채로, 그 모든 일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고통스러웠지만 살아졌고, 그녀는 살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살아진다. 그러다보면 사라진다. 고통이, 견디는 시간이 사라진다. 어느 순간 그녀는 더이상 겉돌지 않았고, 그들의 세계에 나름대로 진입했다. 모든 건 변하고 사람들은 변덕스러우니까. 그러나 그후에도 그녀는 잠들지 못하거나 질이 낮은 잠을 끊어 자며 아침을 맞았다. 가끔씩 스스로에게 벌을 주듯 폭음을 하고는 환한 대낮의 사무실에서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했다.

 

인안대교를 다 건널 무렵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그녀는 와이퍼를 켰다.

다희씨에게 따로 얘기한 적은 없지만 내가 직장에서 좀 겉돌았어요. 많이 서툴렀어요, 사람들 사이에서.

다희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봤다.

내가 뭘 잘못했지…… 오래 생각했어요. 많이 나아졌다지만 지금도 그런 생각 해요.

왜 선배 잘못일 거라고 단정해요? 다른 사람들이 나빠서일 수도 있지.

그런가요.

입사 초기 무렵, 그녀는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던 회사 사람들을 어두운 마음으로 바라봤다. 좋은 사람들에게 거절당한다는 경험은 고통이었으므로, 그녀는 차라리 나쁘고 냉혹한 인간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을 택했다. 그들이 자신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그들을 거부할 이유를 발견하는 서사가 덜 아팠으니까. 그들은 가치 없는 인간들이어야 했다. 네가 뭐라고 날 무시해? 그녀는 회사 사람들의 얼굴, 목소리, 몸짓, 혹은 그들의 존재 자체에서 그들을 혐오할 수밖에 없는 혐의를 발견해냈다. 자기 속이 얼마나 망가졌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녀는 그 일을 매일 반복했다.

입사한 지 일년 정도 됐을 때, 엘리베이터에서 김상무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그녀가 그와 같은 대학을 나온 걸 알고 있었다면서 다정한 말투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지수씨 같은 신입은 억울할 거야. 고졸 특채들이랑 같이 신입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들어왔으니.

그는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겉으로는 같은 입사 동기지만, 다 형식적인 거고, 우린 걔네 후배로 생각 안 해. 그러니까 걱정 마요.

그가 내리고, 그녀는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봤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김상무의 그런 말에 억지로라도 웃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 말을 했을 때 그녀는 분명 안도했고, 그런 식으로라도 자기 존재를 인정해주는 그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차별하는 사람의 입장에 설 수 있게 한 그의 말에 위로를 느꼈다. 거울에서 그녀가 본 건 기쁨과 안도가 스민 진짜 웃음이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자신의 그런 추한 가능성을 알아보았는지도 몰랐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날 이렇게 만든 건 다 당신들 탓이야. 모두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생각은 자기 자신조차 설득할 수 없었다.

그때의 자신의 모습을 그녀는 다희에게 말하지 못했다.

 

발전소가 문을 열고부터, 다희와 그녀는 다른 일을 맡게 됐다. 그녀는 발전소 관련 자료집을 펴내는 일을 맡았고, 다희는 에너지 박람회 준비팀에 보조 인턴으로 참여했다.

다희는 마다했지만, 그녀는 개소식 후로도 출퇴근 시간에 다희를 태우고 운전했다. 다희는 차에 올라타서 과일이나 떡, 견과류, 빵 같은 것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려줬다.

그 무렵 다희는 주중에 출근하고 주말에 도서관에 가서 취업 준비를 했다. 인턴생활이 끝날 무렵, 회사는 자체 시험으로 인턴의 삼분의 일을 신입사원으로 채용했다. 세명 중 한명이에요. 다희는 그 말을 농담처럼 종종 하곤 했었다. 세명 중 한명. 떨어질 확률이 더 높지만 희망을 주는 조건이었다. 그녀는 다희가 그 셋 중의 하나가 되기를 빌었다.

다희가 그녀처럼 사년 전 이 회사에 지원했더라면 어렵지 않게 합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희는 더 어려운 선택을 했고, 그동안 취업 조건은 더 까다로워졌다. 다희는 지난 사년 동안 무리할 정도로 최선을 다했지만 그 시간은 그녀가 상황 판단을 잘하지 못했다는 인상만을 남길 것이었다. 별다른 실패 없이, 매번 똑똑한 선택을 하여 최대한 빨리 기업에서 요구하는 모든 것을 갖추어도 좋은 일자리를 얻기 어려운 세상이었다. 자신이 어느 정도의 부담감으로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지 다희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날, 터널을 지나며 다희가 말했다.

어릴 때는 터널 지날 때 숨을 참았어요.

왜요?

숨을 참고 터널 다 지나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해서요.

무슨 소원 빌었어요?

모르겠어요. 잊어서.

그녀는 잠시 고개를 돌려 다희를 바라보았다. 터널 조명이 다희의 얼굴을 스치며 얼룩을 내고 있었다.

숨 참느라 힘들었던 것만 기억나고 억울하네요.

지금은요?

이제 저를 위해 빌지는 않아요. 저에게 바라는 건 있지만, 그 무언가에게 빌지는 않아요.

터널을 빠져나갈 무렵 다희가 말을 이었다.

선배가 행복하길 바라요. 그리고 건강하길.

고맙다고 말하고 그녀는 앞만 바라보며 운전했다. 나도 그렇기를 바란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어서 입을 다문 채로.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다희는 잠에 빠져 있었다.

다희가 일하는 박람회 준비팀의 총책임자는 충동적인 사람이었다. 매번 마지막 순간에 결정을 번복했고, 자기가 개입하지 않아야 할 일까지 개입해서 잘 마무리된 일을 엉클어놓았다. 수습은 인턴들의 몫이었다. 그녀는 책임자가 인턴들의 불안한 상황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이라면 응당 할 수 있는 실수에도 다희는 예전과 다르게 초조해했다. 다희는 좋게 말해서 신중해졌지만, 어떻게 보면 계속되는 체념 속에서 자기 빛을 잃고 있었다. 가끔 멍한 표정으로 사람들 속에 서 있는 모습을 그녀는 멀리서 바라보곤 했다. 분위기를 맞추려고 따라 웃고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다희라는 사람의 껍데기만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다희에게 그녀는 무리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일을 융통성 있게 해야지, 다른 사람들 일까지 떠맡아서 할 필요 없다, 그러다보면 다희가 그렇게 일하는 것이 고마운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 되는 거라고. 몇번 그런 이야기를 할 때쯤 다희가 웃으며 말했다.

선밴 인턴이었던 적 없죠.

장난스러운 말투에 숨겨진 진심이었다. 그 말을 하고 다희는 창밖을 내다보는 시늉을 했다.

다희가 자주 야근을 하면서 그녀는 혼자 집에 돌아가는 날이 많아졌다. 다희는 같은 팀 인턴들과 빠른 속도로 친해졌고, 야근이 없는 날에도 저녁에 같이 어울리곤 했다. 출근은 매일 같이했지만 다희는 아침에 차에서 자주 졸았다.

그 무렵부터 그녀는 다희에게 회사에 관한 것이라면 자잘한 불만도 털어놓지 않았다. 자신이 순전히 운이 좋아 이런 직장을 구했다는 것을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다희와 같은 위치였다면, 다희가 자신보다 훨씬 더 유리한 입장이었으리라는 것도. 불안해 보이는 다희를 볼 때면, 그녀는 자신의 편안한 처지에 옅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녀의 팀 사람들은 인턴들이 없을 때 인턴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직 일해본 경험이 없어서 오히려 일을 만드는 경우도 많고, 일을 습득하는 속도도 느리다는 말이었다. 그런 불만들은 ‘그래도 인턴을 챙겨야 한다’는 시혜적인 말로 끝나곤 했다. ‘우리’가 그들을 도와야 하고, 이끌어야 한다는 식이었다. 팀 사람들은 그녀에게 다희와의 관계에 대해서 묻곤 했다. 어차피 떠날 확률이 더 높은 사람에게 왜 그렇게 잘 해주느냐고. 그녀는 그저 통근하는 경로가 비슷해서 같이 차를 타고 다니는 거라고만 답했다. 대졸 공채 출신 정규직 사원과 친밀하게 지냈더라면 그런 질문을 받을 일도 없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다희를 만나고 얼마 후, 그녀는 회사 내의 대학 동문 모임에 초대받아 참석한 적이 있었다. 몇 기수 위 선배가 인트라넷 메시지로 동문들을 비밀리에 초대했다. 그 자리에 가서 그녀는 인간이 배타적인 공동체에서 얻는 끼리끼리의 저급한 쾌락을 읽는 동시에 어린 여자인 자신이 그들의 ‘진짜 우리’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더이상 그들의 ‘우리’에 관여하고 싶지도 않았다. 왜 그 모임에 다녀와서 기운이 없고 울고 싶었는지 그녀는 다희와 대화하며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모두 같은 목소리로 저마다 방백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람회가 이틀 남은 날, 다희는 야근을 했다. 박람회에서 나갈 팸플릿에 오자 두개가 발견되어서 스티커 처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 피디에프 파일을 인쇄소에 보낸 것이 다희였기에 그 일은 다희의 책임이 됐다. 원고를 수정한다고 마지막에 손을 대 부정확한 정보를 쓴 팀장은 그 책임을 전부 다희에게 돌리고 퇴근했다. 인턴 몇이 남아서 팸플릿 오백장에 스티커를 붙여야 했다.

다희를 돕고 싶었고, 그녀 자신도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녀는 잔업을 하며 다희를 기다렸다. 지하철역까지가 아니라 집까지 데려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희는 열한시쯤 일을 끝내고 그녀의 사무실로 왔다.

선배.

다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웃는 특유의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렇게 기다릴 필요 없었는데. 고마워요.

나도 할 일 있었어요.

더 늦게 끝날 수도 있었는데, 그럼 제가 너무 미안해지잖아요.

다희는 진심으로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인턴들 보기에도 좀 그래요. 제가 무슨 특별대우 받는 것처럼.

알았어요. 앞으론 그냥 갈게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웃으며 사무실을 나왔지만 씁쓸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다희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기다려서 오히려 부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녀는 다희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서운하다는 감정에는 폭력적인 데가 있었으니까. 넌 내 뜻대로 반응해야 해,라는 마음. 서운함은 원망보다는 옅고 미움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그런 감정들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다희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싶지 않았다.

자동차는 어둠 속을 천천히 달렸다.

선밴 안 피곤해요?

다희는 그녀의 손바닥 위에 초콜릿을 올려놓았다. 민트 맛이 나는 다크초콜릿이었다.

한달 뒤에 인턴이 끝나요.

그렇죠.

오늘 야근하면서…… 내년 이맘때쯤에 제가 어디 있을지 생각했어요.

다희는 그렇게 말하고 백팩에 얼굴을 기댔다.

인턴 셋이 작업을 했는데, 내년에 우리 셋 중 둘은 여기 없겠지…… 그런 생각이 들면서 아, 그 하나가 내가 되어야 한다고 정말 간절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누구나 그럴 거예요. 그녀가 답했다.

선배.

네.

가끔은…… 제가 커다란 스노우볼 위를 기어다니는 달팽이 같아요. 스노우볼 안에는 예쁜 집도 있고, 웃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선물 꾸러미도 있고, 다들 행복해 보이는데 저는 그걸 계속 바라보면서 들어가지는 못해요. 들어갈 방법도 없는 것 같고.

그녀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다희씨 합격하겠지만, 아니더라도 더 좋은 곳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말을 뱉었을 때, 그녀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변명을 하고 싶어 망설이는 동안 다희가 입을 열었다.

선배는 빈말 안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빈말 아니에요.

저한텐 그렇게 들렸어요.

그랬다면 미안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는 다희의 반응도 심했다고 생각했다. 무책임한 말이긴 하지만, 행운을 빌어주고, 조금 마음을 놓으라고 말해준 것인데 그렇게까지 딱딱하게 말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늦은 시간까지 기다려서 집까지 태워다주는 자신에게 다희가 그런 식으로 말해선 안 되는 것 아닌가.

있잖아요, 선배.

자신을 부르는 다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다희는 한참을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며칠 전에 선배가 다른 선배랑 제 얘기 하는 거 들었어요.

언제요?

다희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희가 말하는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기억할 수가 없었다.

저는요, 선배. 우리가 그냥 가는 방향이 같아서 같이 통근했다고만 생각하진 않았어요.

그녀는 사람들의 말에 대답하던 자기 모습을 떠올렸다. 방향이 같아서 같이 다니는 것뿐이에요. 네? 아니에요. 별 사이 아니에요. 그러게요, 언론고시가 워낙 어렵다고들 하잖아요. 그런가요? 나이가 많아서 아무래도 불리한 부분은 있겠죠. 그래요? 그 친구가 워낙 어른들한테 싹싹하잖아요. 그저 다른 사람들의 말에 사무적으로 답한 것뿐이었지만, 다희가 그 말을 어떤 식으로라도 들었다면 달라지는 이야기였다.

다희씨, 전……

이해해요. 여기 회사잖아요. 제가 선배 입장이어도 그렇게 말했을 거예요.

다희는 손등으로 얼굴 위의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왜 그 사람들에게 우리 이야기를 해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목이 따끔거릴 뿐, 그녀는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녀가 그렇게 망설이는 동안 자동차가 마지막 터널을 빠져나왔다. 사실 그녀는 다른 식으로도 말할 수 있었으니까. 다희씨랑은 말이 잘 통해서 친해졌어요. 아, 다희씨 없는 데서 다희씨 이야기하고 싶진 않은데요. 그렇게 말하면 따라붙을 질문이 귀찮고, 어색해질 공기가 두려워 그녀는 그렇게 말하지 못했던 것이었으니까.

그날 그녀는 다희에게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하지 못했다. 적극적으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다희의 상처를 덜어내는 방법이었을까 뒤늦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성의 없는 변명을 하느니 깨끗하게 사과하는 편이 나았으리라는 판단은 달라지지 않았다. 다희의 상처를 자기 관점으로 다희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다희씨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다희씨가 제일 잘 알 거예요.

그녀는 다희의 집 근처에 와서 그렇게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오늘 피곤해서.

다희는 그렇게 말하고 미소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 서운하다,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나, 상처받았다, 예전의 다희라면 그렇게 말했으리라는 걸 그녀는 알았다. 애정이 상처로 돌아올 때 사람은 상대에게 따져 묻곤 하니까. 그러나 어떤 기대도, 미련도 없는 사람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마음을 걸어 잠근다. 다희에게 그녀는 더는 기대할 것 없는 사람이었다.

다희가 출근하던 마지막 한달 동안, 둘은 그날의 일을 화제에 올리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으며 대화했다. 그것이 그녀는 슬펐는데, 다희도 그런 마음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희가 마지막으로 퇴근하던 날, 그녀는 다희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둘은 그날이 다른 날과 다를 것 없다는 듯이 능청을 떨며 대화했다. 그녀는 다희에게 시험 잘 보라고, 계속 카풀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고, 다희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어요, 우리 카풀. 다희가 말했다.

그래요.

선배.

네.

우린 말이 참 잘 통했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가 저 아껴준 거 알아요. 전 선배한테 아무것도 해준 것도 없는데.

다희씨는…… 그녀는 머뭇거리면서 말을 골랐다. 저는……

선배.

전…… 다희씨 좋아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조금은 좋아하게 됐어요.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에요.

그 말을 할 때 자동차가 인안대교에 들어섰다. 그곳에서, 둘은 언제나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득 그녀는 말하고 싶었다. 다희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다희의 눈썹. 다희가 얘기할 때 눈썹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에게 눈썹이라는 게 있었구나, 눈썹이라는 것이 꼭 마음과 통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그리고 사실 그녀는 귤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말도. 그렇게 껍질을 까서 하나하나 손바닥에 올려주던 마음이 고마워서 그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고, 결국엔 귤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다희가 더 깊은 이야기를 할까 한편으로는 두려워했다는 말도. 사람들은 때로 누군가에게 진심을 털어놓고는, 상대가 자신의 진심을 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상대를 증오하기도 하니까. 깊은 이야기를 할수록 서로에게 가까워진다는 것을 그녀는 애초에 믿지 않았다는 말도. 그렇지만 다희가 그녀로 하여금 말하게 했다고, 그 사실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말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떠나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는 사실도.

인안대교를 지날 무렵, 가는 눈발이 차창에 내렸다. 둘은 아무 말도 없이 앉아서 조금씩 굵어지는 눈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첫눈이네요. 그녀가 말했다.

자동차에서 내려 백팩을 메고 분주한 걸음으로 걸어가던 다희를 그녀는 어둠 속에서 물끄러미 바라봤다. 다희는 끝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병원에서 우연히 만난 후로 다희는 몇번 그녀를 보러 병실에 왔다. 가끔은 한시간을 머물다 가기도 하고, 가끔은 오분을 앉았다 가기도 했다.

선배.

병실 커튼 밖에서 다희가 그녀를 불렀다. 저녁을 다 먹고 해가 질 무렵이었다.

들어가도 돼요?

들어와요.

다희에게서는 차갑고 신선한 겨울 공기 냄새가 났다. 다희는 보조 침대에 걸터앉았다. 치마 정장을 입고, 검은 구두를 신고 머리를 뒤로 묶은 채였다. 예전에는 숱이 많아 고민이었던 다희의 정수리 부분이 조금 비어 있는 모습을 그녀를 지켜봤다. 직장에서 바로 온 것 같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앉아 다희에게 티슈를 건넸다.

주스 마실래요? 토마토 주스하고 오렌지 주스 있어요.

다희는 고개를 저었다.

물은요.

그녀는 컵에 물을 따라 다희에게 줬다. 다희는 물 한잔을 단숨에 마시고 티슈로 얼굴을 닦고, 코를 풀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서로를 향해 앉아 있었다. 창밖에서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났다.

많이 아팠나요. 다희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수술한 지도 꽤 돼서, 이제 괜찮아요.

남 얘기하듯 말하는 건 여전하네요. 이런 일에도 선밴 그저 담담하기만 해요.

그래요.

이런 일에도 아프다고 안 하면 선밴 언제 아프다고 해요?

모른다는 말을 하려는데 말이 잘 나오지 않아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곧 나으리라고, 회복되리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괜찮을 거라고, 이 시간도 곧 지나갈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녀 자신도 자신에게 그렇게 이야기해왔다. 조금만 참아. 의사 말대로 해. 다 끝날 거야.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아프냐고 물어보지 않아서였을까.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도 아프냐고 묻지 못한 것이었을까.

많이 아팠나요. 다희가 다시 물었다.

그녀는 다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팔에 자기 손을 가만히 올렸다. 그런 다희를 보며, 그녀는 왜 자신이 팔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일들을 떠올리곤 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다희와 주고받던 이야기들 속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내던 마음이라는 것이 있었으니까. 아무리 누추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서로를 마주 볼 때면 더는 누추한 채로만 남지 않았으니까. 그때, 둘의 이야기들은 서로를 비췄다. 다희에게도 그 시간이 조금이나마 빛이 되어주었기를 그녀는 잠잠히 바랐다.

 

*

 

그녀가 퇴원하기 전날에도 다희는 그녀 곁에 머무르다 갔지만, 다희도 그녀도 서로의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 그녀는 다희의 삶에서 비켜나 있었고, 다희 또한 그녀에게 그랬다. 퇴원하던 날은 눈이 많이 내렸다. 그녀는 안방 창가에서 내리는 눈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창에 달라붙은 눈은 금세 작은 물방울이 되었지만 바닥까지 내려간 눈은 지상의 사물들을 흰빛으로 덮었다. 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녀인 채로 살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