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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박상영 朴相映
1988년 대구 출생. 2016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가 있음. sang783@hanmail.net
우럭 한점 우주의 맛
1
밤새 마감하느라 늦잠을 자버렸다. 대충 세수만 하고 가방을 들었다. 엄마는 아마도 짜증을 꾹꾹 눌러가며 병실에서 성경을 읽고 있을 터였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엄마와 함께 올림픽공원을 산책하는 것이 일상이 된 지 벌써 오래되었다.
계단을 내려오다 습관처럼 흘끗 우편함을 바라봤는데, 서류봉투가 꽂혀 있었다. 꺼내서 만져보니 두툼한 서류뭉치였다. 발신인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뭐지 하는 마음에 서류봉투를 뜯어보았다. 누렇게 바랜 종이뭉치가 나왔다.
그것은 오년 전 그에게 던지듯 건넸던 나의 글, 일기였다.
나체로 전신 거울 앞에 선 것 같은 기분으로 첫 장을 읽기 시작했다. 검은색 펜으로 휘갈겨 쓴 일기 위에 빨간 펜으로 교정기호며, 매끄럽지 못한 문장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내가 쓴 일기의 교정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닷새도 아닌 오년 만에. 나는 종이뭉치를 세게 쥐었다. 뭔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기분이 들었다. 그에 대한 기억들이, 격렬한 감정들이 홍수처럼 쏟아져들어왔다. 아직도 내 집 주소를 기억하고 있었단 말이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이뭉치의 마지막 장은 내가 아니라 그가 휘갈겨 쓴 쪽지였다. 그의 필체로 적힌 빨간 글씨들이 눌어붙은 핏자국처럼 느껴졌다.
오랜만입니다. 형이에요. 작가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원래 이름에 ‘제’ 자가 들어갔던 것 같은데, 맞죠? 예명을 쓰나봐요.
누굴 놀리나. 아무리 예전 일이라도 그렇지 일년도 넘게 만났던 사람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 못하다니.
살이 많이 쪄서 사진으로는 못 알아봤어요.
됐다. 두번 볼 것도 없다. 넌 그냥 쓰레기통행이다 생각하며 쪽지를 찢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음 문장.
엄마 건강은 좀 괜찮으신지 모르겠네요. 그땐, 미안했어요. 여러모로. 다.
남자들은 도대체 왜 자꾸 내게 미안하다고 할까. 그냥 미안할 짓을 안 하면 될 일인데. 그는 여느 때처럼 일방적으로 자신의 용건을 적어놓았다.
그간 몇번이고 연락을 할까 했지만 아무래도 사정이 있어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몇년이고 시간이 흘렀고 전화번호가 바뀌어버렸더군요. 이렇게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합니다. 제가 일정이 빠듯해서 그럽니다. 월요일에 급하게 출국하게 되었어요.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아예 안 돌아올지도 몰라요. 괜찮다면 이번주 일요일, 예전에 약속했던 시간에 약속했던 장소에서 만나요. 꼭 주고 싶은 게 있습니다.
편지의 마지막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이번주 일요일이면, 이틀 뒤였다. 이 남자는 도대체 무슨 염치로 나에게 또 만나자고 하는 것일까. 줘야 할 물건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우리 사이에 더 주고받아야 할 건 욕밖에는 없었다. 서류봉투째로 쓰레기통에 처넣고 싶은 마음과, 누구의 손도 닿을 수 없는 곳에 소중히 보관해놓고 싶다는 마음이 교차했다. 결국 봉투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길을 걷는데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그로 인해 이렇듯 격렬한 신체반응이 일어난다는 사실이 소름 끼치게 자존심이 상했다. 여느 때처럼 나는 핸드폰의 메모장 앱을 켰다. 그리고 한 문장을 적었다.
오년 전, 나는 그를 엄마에게 소개하려 했었다.
*
다행히 엄마는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곧장 곯아떨어진 것 같았다. 나는 발소리를 죽여 보호자용 침대에 앉았다.
엄마의 입원이 장기화되자, 병실에 엄마의 물건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냉장고에 담긴 반찬통과 과일, 서랍 속 과도, 박하사탕 한봉지,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작은 액자 하나. 열한살의 나와 서른아홉의 엄마가 나란히 찍힌 사진이었다. 사진 속 엄마는 학사모를 쓴 채 정체 모를 형상의 동상 옆에 기대 서 있고, 엄마 다리맡의 나는 데님으로 된 멜빵바지를 입은 채 잔뜩 인상을 쓰고 있다. 그 무렵 찍힌 내 사진을 보면 모두 미간에 깊은 주름이 져 있었다. 더러운 성격은 아마도 기질상의 문제인 것 같았다. 사진 옆에는 올해 출간된 내 책 두권이 놓여 있었다. 책은 병문안 온 손님들을 위한 물건이었고, 정작 엄마는 내 책을 읽지 않았다. 그녀는 내 책뿐만 아니라 내가 쓴 모든 글을 강박에 가까울 만큼 철저히 읽지 않았는데, 노안 때문에 글씨가 아지랑이처럼 너울거려서 못 보는 것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스무살 때 대학신문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을 받은 적이 있다. 당선되면 백만원의 장학금을 주는 대회였는데, 마침 신문사에서 수습기자로 일하는 동기가 경쟁률이 낮다는 얘기까지 해줬다. 언제나 술값이 모자랐던 그때의 나는 별수 없이 학력 콤플렉스가 심해 방송통신대 학위를 두개나 따고 난 후 자식의 교육에 모든 것을 투신하는 오십대 여성의 이야기를 썼는데, 그것이 당시의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얘기이기 때문이었다. 던지듯 출품했던 내 첫 소설은 생동감 있는 인물 묘사가 돋보인다는 평을 들으며 당선됐다. 엄마는 어디선가(아마도 모든 소문의 원흉인 교회에서) 그 소식을 주워듣고는 내 당선작이 나온 대학신문을 구해다 읽었다. 그리고 사흘 밤낮을 울었다. “네 마음이 그렇게 아팠다니, 내가 그렇게도 너를 그렇게 착취해왔다니……” 안방 문을 넘어올 만큼 큰 소리로 통곡을 하는 그녀에게 “엄마, 소설은 그냥 소설이야. 다 지어낸 거라고”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들릴 턱이 없었고 그후로 엄마는 내가 쓰는 그 어떤 글도, 심지어는 바닥에 떨어진 리포트나 메모조차도 읽지 않는 몸이 되었다.
—명희가 네 책 재밌다더라. 지금까지 나온 건 죄다 사 봤대. 걔가 우리 중에서 제일 똑똑하잖니. 숙대도 나오고. 네 글 보더니 애가 아주 착하게 큰 것 같대.
지난 삼년 동안 쓴 소설이라고 해봤자 술 먹고 물건을 훔치고, 군대에서 계간(鷄姦)을 하고, 성매매를 하고, 바람피우는 사람들 얘기가 전부였는데 도대체 뭘 보고 착하다는 건지. 두번만 착했다간 사람도 죽이겠네. 아무튼 교회 아줌마들의 립 서비스는 알아줘야 했다. 엄마가 특유의 골골대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더니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다고 했다. 항암 치료를 시작한 뒤로는 통증 때문에 잠을 자기도 힘들다고 얘기하며 연신 하품을 해댔다. 엄마가 하도 코를 골아서 엄마와 같은 방을 쓰던 환자가 두번이나 병실을 옮겼다. 결국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벌써 두달 가까이 이인실을 혼자 쓰는 중이었는데, 옆에 사람이 있을 때는 뭐가 마음에 안 든다 난리더니 막상 아무도 없으니 밤에 저승사자가 너무 쉽게 데려갈 것 같다는 둥 사십년 차 기독교인답지 않은 샤머니즘적 발언으로 다채롭게도 사람을 미치게 했다.
—엄마 사과 깎아줘?
—입이 쓰다. 그냥 사탕이나 까줘.
생전 단것을 먹지 않다가 암수술을 한 뒤로는 계속 박하사탕을 찾았다. 어떤 날은 밥도 먹지 않고 사탕만 물고 있어 억지로 뱉게 한 적도 있었다. 소화기관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나는 병실에서 풍기는 병자 특유의 콤콤한 냄새를 감추기 위해 이불과 침대에 섬유탈취제를 뿌렸다.
육개월 전 엄마의 암이 재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수년 동안 잠잠하기는 했으나, 어쨌든 언젠가 벌어질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비극도 희극도 너무 길어지면 하나도 좋을 게 없어서 이 모든 패턴이 지긋지긋하기만 했다. 나는 장례 말고는 암환자의 가족이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겪었다. 어쩌면 이제 겪어보지 않은 마지막을 준비해야 될 때가 온 것일지도 몰랐다.
*
엄마의 몸에서 처음으로 암이 발견된 게 벌써 육년 전이었다.
당시에 나는 이십대 중반의 인턴이었다. 육개월에 걸친 인턴 기간의 막바지였으며, 정규직 전환 심사를 앞두고 있었다. 열명이었던 인턴 중 최종까지 남은 사람은 셋. 그중 한명만이 정규직으로 전환된다는 소문이 돌았으며 그것이 유일한 남성인 내 차지가 될 확률이 높다는 소문도 함께 돌았다. 오십대 남녀의 정치적 성향과 건강의 상관관계 조사 연구 보고서 팀에 보조 연구원으로 투입되어, 백명도 넘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있던 찰나였다. 공교롭게 오십대 중도 우파 성향의 여성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평소처럼 두번 그녀의 전화를 거절했으나, 그녀는 포기를 모르는 여자였다. 별수 없이 회사 내선번호로 그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코리아……
엄마는 환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엄마 암이래! 자궁암! 할렐루야다.
하도 호들갑을 떨어 복권이라도 당첨된 듯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보름 전 배 속에 진달래꽃이 만개하는 꿈을 꾼 후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아’ 건강검진을 받게 되었고 자궁암이라는 결과를 받아 들었다. 인맥관리 차원에서 교회 사람들에게 들어놓은 여러개의 암보험에서 진단비만 이억이 넘게 나온다고 했다. 그 돈이면 지금 우리 모자가 살고 있는 잠실 아파트의 남은 대출금을 얼추 다 갚을 수 있었다. 거기다가 실손보험에서 수술비가 나오고, 수원과 안양의 상가에서 나오는 임대료로 그럭저럭 우리 두 모자가 살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엄마는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엄마는 외할머니도 엄마도 둘째 이모도 모두 암에 걸렸으니 너도 백 퍼센트 암환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며 내 명의로 암보험 두개를 더 계약하자고 했다.
퇴사 의사를 밝히는 내게 차장이 말했다.
—우리 회사보다 더 좋은 곳에 붙은 건가?
그게 아니라 홀어머니가 암에 걸려서요. 간병할 사람이 없어서 때려치웁니다,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는 못했다. 엄마는 남들에게 굳이 비밀로 하지 않아도 될 것까지 비밀로 하곤 했는데, 그 이유는 대부분 ‘남세스럽다’는 것이었다. 대찬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언제나 묘한 포인트에서 수치심을 느끼곤 했던 그녀는, 자신의 병을 몹시 수치스럽게 여겼다. 엄마는 이십년이 넘도록 관리해왔던 회원들에게는 안식년을 맞아 성지순례를 간다고 휴직 선언을 했으며, 친구들뿐만 아니라 이모들에게조차도 병을 알리지 않았다. 나로서는 아픈 게 뭐 대단한 흉이라고 저 난리일까 싶기는 했으나, 순순히 엄마의 비밀에 동참했다. 그 때문에 나는 애매하게 웃으며 차장에게 퇴사 후 글을 쓸 거라고 해버렸다. 평생 꿈꿔왔던 일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꿈 그거 좋지. 그러나 이거 하나는 기억하게. 기회는 기차와도 같아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지.
기차는 매일 매시간 돌아오는데 도대체 무슨 개 같은 소리일까 생각하며, 그렇게 나의 첫번째 회사생활을 정리했다. 보름 후 엄마는 자궁암 명의가 있다고 소문난 강남의 한 종합병원 수술대에 누워, 예수의 고통에 동참하고 싶다며 수술할 때 마취를 하지 말아달라 의료진에게 요청해 산부인과뿐만 아니라 정신과 진료도 함께 받게 되었다. (드디어.)
사진상으로 대단할 것이 없으리라 추측되었던 엄마의 암은 막상 열어보니 꽤 심각한 상태였다. 임파선으로 전이 소견이 있으며, 간의 상태도 좋지 않아 오랜 시간을 들여 여러단계의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자궁 적출 수술 후 육개월 동안 몇번의 방사선 치료가 이어졌음에도, 엄마의 암세포는 완벽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를 처음 만난 게 바로 그 무렵이었다. 한 인권단체에서 주최하는 인문학 교양 수업에서였다. 많고 많은 강의 중 ‘감정의 철학’ 수업을 수강한 것은, 당시에 내가 정말로 내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취업준비생의 덕목에 맞게 영어 점수를 만들고, 각종 회사의 인적성 시험을 준비하는 것도 모자라, 엄마의 병수발을 들며 엄마의 간절하고 강압적인 요구에 의해 하루에 한번씩 산책까지 시켜줘야 했다. 몸과 마음이 골고루 병든 병자를 종일 들여다보고 있자니 나까지도 초 단위의 감정기복을 반복하는 일이 잦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알기 위해, 또 얼마간은 엄마라는 불행의 진원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나는 일주일에 한번씩 아카데미에 갔다. 수업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중심으로 롤랑 바르뜨의 『밝은 방』과 『사랑의 단상』을 부재로 삼아 인간에게 존재하는 감정을 나노 단위로 쪼개 분석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첫 수업 때 ‘재야의 철학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강사는, 강의력이 부족한 많은 강사들이 그러하듯 수강생들에게 자기소개를 강요했다. 인권단체에서 주최하는 수업이라 그런지 열다섯 남짓의 수강생 중에 반수 정도가 사회단체 활동가였다. 그들은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자신이 속한 단체나 믿고 있는 신념, 성적 지향 같은 것을 밝혔고, 내 차례가 다가왔을 때 나도 중도좌파에 남성 호모섹슈얼,이라고 고백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살짝 사로잡혔으나, 그냥 본명을 말하고 대학생이라고 소개를 했다. 조바람님, 제임스님, 셀리님, 맙소사님, 가을의 전설님, 유타님…… 국적과 출처를 알 수 없는 활동명과 닉네임이 줄줄 이어졌다. 모두가 소개를 마칠 때쯤 한 남자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키가 몹시 커 문에 닿을 듯했고, 그래서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던 남자. 기십년은 된 듯한 이스트팩 백팩에는 태극기가 오버로크되어 있었고, 낡은 후드를 입은 그가 내 옆자리에 앉아 숨을 헐떡였다. 후드를 벗었는데 목과 손가락에 길게 문신이 이어져 있는 게 보였다. 파충류의 꼬리 같은 것. 저 무늬를 타고 올라가면 어떤 모양이 그려져 있을지, 문신의 끝이 어디일지 궁금해졌다. 그의 몸 구석구석을 훑다보니 나도 모르게 침을 크게 삼켜버렸다. 갑자기 남자가 내 옆에 바싹 다가왔다. 귀부터 발끝까지 털이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남자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 죄송한데, 커피 한모금만 마실 수 있을까요?
남자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내 앞에 놓인 일회용 커피잔의 뚜껑을 열고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남자의 움직임이 슬로우모션처럼 한 장면 한 장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남자는 (아마도 몹시 뜨거웠을) 내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얼음까지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었다. 자기소개의 마지막 순서였던 남자는 자신을 ‘창작하는 사람’이라고 짤막하게 소개했다. 작곡을 하는 것도, 미술을 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창작을 한다고 하는 그 문장이 이가 시릴 정도로 쿨해서 나는 단번에 그에게 불길한 관종의 기운을 느끼고야 말았다. (예감은 언제나 틀리는 법이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난 후 남자가 내게 다가와 커피를 사주겠다고 했다. 아까 마신 커피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처음 보는 사람의 음료를 허락도 없이 마시질 않나 남자의 말투며 눈빛 같은 게 아무래도 낌새가 좋지만은 않아, 나는 손사래를 쳤다. 남자는 꼭 은혜를 갚고 싶다고 거듭 말했다. 그와 아카데미 근처의 스타벅스로 향하게 된 것은 도의적인 차원에서 그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는 아니었고 실은 그가 너무너무 내 스타일이기 때문이었다. 저음에 또렷한 목소리, 툭 튀어나온 눈썹뼈에 속내를 종잡을 수 없는 작은 입술, 선크림 따위 생전 한번도 닿지 않은 듯 군데군데 기미가 낀 피부까지. 성격은 이상한 것 같지만 그냥 얼굴이나 실컷 보다 와야지 하는 마음이 불길한 예감을 뛰어넘어버렸다. (그러는 게 아니었다.)
남자와 계산대에 나란히 섰는데 나보다 머리통 하나 정도가 훌쩍 컸다. 누군가를 올려다보는 것은 평균보다 조금 더 큰 키인 내게는 좀체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나란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고 테이블에 앉았다. 자기가 커피를 마시자고 해놓고는 별말도 없이 그냥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이 남자. 결국 내가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목이 많이 마르셨나봐요.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침묵. 당시의 나는 (정규직 전환을 꿈꾸는) 비정규직의 쇼맨십을 온몸에 품고 있었으므로 (아무도 그러라고 한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먼저 나서서 저는 대학생이고, 불문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요즘 재밌게 본 드라마는 무엇입니다, 취미는 독서이고, 이 수업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계속 하나 마나 한 말을 떠들어댔다. 그는 나를 훑듯이 쳐다보았고 불편한 마음이 들 때쯤 입을 열었다.
—말을, 예쁘게 하시네요.
뭐래는 거냐 이 남자, 지금 나 끼스럽다는 거지. 게이인 거 티 난다고 하는 거 맞지. 그냥 하는 소리인가? 내 피해의식인가? 나는 괜히 기분이 복잡해져버렸고, 그래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또다시 침묵. 아메리카노 잔의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어색한 시간이 흘렀을 때 그가 뜬금없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어머니가 알코올중독이에요.
—네…… 네?
—그래서 어머니를 치료소에 입원시켰는데 몇번이나 도망쳤다가 이번에 폐쇄 병동으로 들어가셨어요.
—아…… 네.
—치료 방법을 바꿔봐도 도저히 차도가 없어요. 계속 숨겨놓고 술을 마셔요. 침대 옆에도 술병이 있고, 가방 안에도 있고. 미치겠습니다.
이 남자, 처음 보는 나에게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걸까.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지.
—심지어 요즘은 알코올성 치매 초기 증상까지 와서 대하기가 영 녹록지가 않네요. 그래서, 엄마를 잡으러 다녀요, 사나흘에 한번꼴로.
뭐야, 돌았나. 갑자기 내 쪽에서도 거창한 가족사를 말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들었다. 우리 가족은 그냥 평범한 중산층이고, 아버지는 평범한 중산층의 가장답게 죽도록 바람을 피워 열한살 때 이혼을 했으며, 엄마는 대한민국 중노년층 사망 원인 1위인 암환자랍니다, 말해야 하나. 아니면 더 대단한 사연을 지어내기라도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그냥 이렇게 말해버렸다.
—저희 어머니도 아프세요. 자궁암. 수술받고 요양병원에 계셔서 요즘 제가 돌보고 있어요.
—아,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우리 공통점이 많네요.
엉겁결에 엄마의 투병 사실을 공개해버리고 나서야 타인에게 엄마의 병에 대해 털어놓는 게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가 내게 말했다.
—그런데 여기 수업 듣는 거 처음이시죠?
—네,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여기서 열리는 인문학 철학 수업 거의 다 들었거든요. 아예 처음 보는 얼굴이길래. 이렇게 귀여운 얼굴을 기억 못할 리가 없지.
그 말을 했을 때의 그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누구보다도 여유로운 것처럼 굴었지만 자신감 없이 떨리는 눈빛, 머뭇거리는 입술의 움직임이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 경우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농담으로라도 나에게 귀엽다는 말을 해준 사람은 정규교육 과정을 시작한 이후로는 한번도 없었다. 누가 봐도 전혀 귀엽지 않은 게 그나마 내 귀여움의 포인트인데. 그런데 이 아저씨 뭐지. 이쪽 느낌은 아닌데. 노골적인 플러팅인가. 어쭙잖은 작업질인가. 아냐 그럴 리 없지. 나도 집에 거울이 있는데 내가 일부러 커피를 사줘가면서까지 작업 걸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건 너무 잘 알고 있다고. 하도 당황스러워 무슨 말을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내가 떨고 있다는 것,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하고 있으며 그것을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는 것만은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가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뒤에 별일 없으시면 앞으로도 수업 끝나고 밥이나 같이해요.
그렇게 우리는 수업이 끝나고 아카데미 근처를 돌아다니며 함께 밥을 먹는 사이가 되었다. 그 주변의 지리며 맛있는 식당을 훤히 알던 그가 나에게 맛집(이라 불리는 가정식 백반집과 기사식당 등의 꼰대적 취향의 음식점)을 소개해주는 식이었고 나는 그의 내밀한 일상 공간에 초대받은 것 같은, 과장된 자의식에 젖어 있었다. (나중에는 그가 그냥 다른 사람에게 아는 척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와 함께 있을 때의 나는 평소보다 말수가 적고 밥을 적게 먹는 사람이 되었다. 대신 그를 관찰하는 데 온 신경이 쏠려 있었는데 손질되지 않은 짧은 머리와 웃을 때 이 사이로 새어나오는 입김, 쑥스러울 때면 한쪽만 올라가는 눈썹과 시옷 발음이 새는 습관 같은 것들을 속속들이 내 속에 담았다. 밥을 먹고 난 후에는 언제나 앞만 보고 빠르게 걷는 그를 따라가기 위해 그보다 10센티는 짧은 다리로, 열심히 속도를 맞추며 걸었다. 그렇게 숨이 가쁜 채로 지하철역에 도착하면, 그가 한번도 내 쪽을 바라봐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고 연유 없는 절망감 같은 것에 사로잡혔다.
그를 만나고 난 후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를 보고 있으면 자꾸만 생각이 많아졌다. 그라는 사람이 궁금했고, 그보다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고, 그보다 그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내 감정을 휘저어놓는지 궁금했다. 내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감정들이 자꾸만 떠올라 초당 수천 미터는 뻗어가는 것 같았고 생전 느껴보지 못했던 그 에너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곤혹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수업을 위해 마련해놓은 대학노트를 일기장 삼아, 그의 일상을, 나아가 그를 통해 변화하는 나 자신의 감정을 기록하고 탐구하기 시작했다.
기록의 양이 늘어날수록 나는 그에 대해 더 알 수 없어졌다.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극도로 말을 아꼈으나, 어쨌든 출퇴근을 하지는 않았고, 만나는 사람이 거의 없어 보였다. 그는 시시때때로 별다른 용건이 없는 문자를 보내왔으며(오늘은 산책하기 좋은 날씨입니다) 노인들처럼 암에 좋은 음식이나 면역력을 높여주는 식품에 대한 기사를 보내오기도 했다. 일단 대화가 시작되고 난 후엔 하나도 특별할 것이 없는 자신의 일상이며(오늘은 칸트를 읽고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었습니다) 모친의 알코올의존증 치료 상황과(어머니가 병원을 탈출해 술을 마신 뒤 택시 기사와 싸움을 벌였습니다) 하다못해 매일 별다를 게 없는 일인분의 식사까지 찍어 보냈다(고등어찜을 먹었습니다). 나는 그런 그의 메시지에 간신히 아, 네, 힘드시겠어요, 밥 맛있게 드세요,와 같은 하나 마나 한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 쓸데없는 말이나마 끊어질라치면 그는 괜히 웃는 이모티콘이며 뚱뚱한 고양이 스티커 같은 것을 보내 어색한 대화를 이어나가려고 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의미없는 메시지를 보내다보면 갑자기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모든 게 다 부질없어지곤 했는데, 그가 나에게 (어떤 의미에서든)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벽에 대고서라도 무슨 얘기든 털어놓고 싶을 만큼 외로운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그런 외로운 마음의 온도를, 냄새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2
토요일 오후, 요양병원에서 힐링 요가 수업을 마친 엄마가 산책을 가자고 나를 채근했다. 평소와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산책길이었으나 평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가 보내온 종이뭉치가 내 일상을 통째로 다른 것으로 바꿔놓았다. 나는 마치 오년 만에 돌아온 기차를 잡아탄 것처럼 초 단위의 감정기복을 반복하고 있었다. 도저히,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감을 일주일 정도 늦추겠다는 메일을 보냈다.
나는 엄마와 함께 공원으로 향했다. 병원에서 길만 건너면 올림픽공원이었다. 엄마가 기대듯 내 팔을 잡았고 우리는 팔짱을 낀 채 천천히 횡단보도를 건넜다. 멀리서 보면 우리는 아주 사이좋은 모자처럼 보일 것이었다. 여느 때처럼 십분쯤 걷다 호수 앞의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재발한 암일수록 생존율이 낮다고 했다. 모든 것이 두번째였기 때문에 포기도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암이 전이된 간의 일부와 담도를 적출한다고 했을 때도, 다섯번의 항암 치료를 더 하게 되었을 때도, 일년 이상 생존할 확률이 20퍼센트가 넘지 않는다는 결과를 들었을 때도 우리 모자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나는 또다시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팀장은 사정이 나아지면 언제든지 돌아오라고 말했지만, 서른한살은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순진한 나이는 아니었다.
새로 옮긴 요양병원은 집에서 도보로 십오분 거리였다. 경기도 외곽의 요양병원에 반년 가까이 입원해 있다 엄마와 가깝게 지내던 동갑의 폐암 환자가 죽은 뒤 급하게 이곳으로 옮겼다. 집 근처의 병원은 요양병원이라기보다는 호스피스에 가까운 곳이었고, 병실도 부대시설도 모두 호텔처럼 깨끗했다. 전문 간병사와 치료사들이 의학과 대체의학을 넘나드는 치료와 처치를 해주어, 이곳에 오고 나서부터 내가 할 일이 부쩍 줄었다. 내 월급을 훌쩍 뛰어넘는 병원비를 생각하면 형편에 맞는 선택은 아니었지만 할 수 있는 한 가장 편한 곳에 있게 해주는 것이 엄마와 내가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더이상의 항암 치료를 포기한 채 요양병원에서 진행되는 통증을 경감해주는 한방 대체요법이나 힐링 요가, 마음을 다스리는 긍정의 명상법 같은 프로그램을 성실히 수행했다. 그 와중에도 암세포는 착실히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엄마의 암세포조차 엄마를 닮아 몹시도 성실했고 통증의 범위와 형태는 다채롭게 변해만 갔다.
엄마가 화장실에 가겠다고 했다. 나는 엄마를 부축해 공중화장실의 장애인 칸으로 들어갔다. 엄마를 좌변기에 앉혀주고 고개를 돌렸다. 최근에 방광 부근까지 암세포가 전이된 이후로 용변을 볼 때마다 부쩍 통증을 호소했다.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기침을 하는 등 복압이 높아지는 상황에서는 몸을 가누기가 힘든지 번번이 나를 찾았다. 나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엄마가 힘없이 오줌 누는 소리를 들었다. 몇번을 겪어도 적응이 안 되는 순간 중 하나였다. 엄마는 다 죽어가는 마당에 부끄러울 게 뭐가 있느냐는 듯 당당한 손길로 내가 건네준 휴지를 턱 받아들어 닦더니 속옷을 올리고 얼른 자신의 바지를 추켜올려라, 몸을 일으켜 세워라 난리였다. 내가 눈을 질끈 감고 마지못해 뒤처리하는 것을 보고서는 못마땅한 목소리로, “역시나 딸을 낳는 거였다”라고 삼십년은 늦은 후회를 했다. 그리고 어이없어하는 나를 내버려둔 채 누구보다 호방한 자세로 앞으로 걸어갔다. 방금 전까지 혼자 용변조차 제대로 못 보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씩씩하게. 산책로가 떠나갈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건강박수를 쳤으며, 공기가 상쾌하다고 난리였다.
—미세먼지 수치가 100이 넘는데 상쾌하긴 뭐가 상쾌해. ‘매우 나쁨’이래.
확실히 암세포가 호흡기에는 전이되지 않은 거 같았다. 엄마가 내 시큼털털한 표정을 보고 또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지 똥 기저귀까지 빨아가며 키워놨구만, 그게 뭐 대수라고 난리 법석을 떨어대는지. 하긴 너한테 내가 뭘 바라겠니. 너 외할머니가 암 걸렸을 때도 그랬어. 걷지도 못하는 갓난쟁이가 쪼르르 기어가서는 누워 있는 저희 할머니 뺨을 때리고 그랬다. 떼어놓으면 또 기어가서 뺨을 때리고, 문을 닫아놓으면 밀고 들어가서 때리고. 그랬던 애다, 네가. 그때부터 싹수가 노랬어.
—아 정말, 도대체 언제까지 그 얘기 할 거야?
—죽을 때까지 하려고 그런다. 왜.
사망 카드가 먹히는 것도 한두번이지 기백번 똑같은 말을 듣고 있자니 이러다 내가 먼저 죽겠다 싶은 마음까지 들 지경이었다. 엄마는 “얼마 남지도 않은 에미한테 좀 잘하라고, 다 너 생각해서 하는 소리다!”라고 죽을 날을 받아놓은 사람답지 않게 우렁찬 목소리로 첨언했다. 한번 시작한 타령을 끝낼 생각이 없는지 또다시 결혼 얘기를 끌고 들어왔다. 누구네 아들은 벌써 애가 둘이라느니, 총각 때는 순 망나니였던 애가 결혼하고 나서 판교에 아파트를 샀다느니, 매일 부르던 돌림노래를 또 부르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한 결혼타령이지만 뭐 이해 못할 것은 없었다. 그녀가 평생 동안 나를 먹여 살려왔던 일이 그런 것이었으니.
내가 막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엄마는 상습적으로 바람을 피우는 것도 모자라 사업을 말아먹기까지 한 부친과 이혼을 과감히 단행했다. 순식간에 가장이 된 엄마는 당시에 막 한국에 진출해 인력난에 시달리던 북유럽계 결혼정보 회사에 취직해 커플매니저가 되었다. 구십년대 말 개인사업자(AKA 마담뚜)가 성행했던 결혼업계에 북유럽계 회사의 선진 시스템은 소소한 파란을 일으켰다. 엄마가 가방 가득 넣어 다니는 차트의 앞면에는 회원의 학력과 직업 재산, 키와 몸무게, 외모의 수준(?)을 점수화해 등급이 책정되어 있었으며, 뒷면에는 애니어그램과 MBTI 등의 심리검사 문항이 있었다. 사회적 조건이나 개인의 기질상으로 가장 적합한 짝을 찾아주는 나름대로 체계화된 시스템이었다. 금융위기 이후 강남 송파 바닥에 영원한 재고로 남을 뻔한 남녀들이 본격적으로 결혼이라는 제도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자 시장에 활황이 찾아왔다. 엄마는 특유의 서글서글한 성격과 마당발적 기질, 영리하고 재바른 눈치 덕분에 업계에 소문난 커플매니저가 되었고, 삼년이 채 되지 않아 개인사업자로 독립할 수 있었다. 이후 그녀는 업계 최고의 전문가로 거듭나겠다며 방송통신대 심리학과에 진학했으며, 이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사용하던 차트를 무단으로 도용해 그것에 새로운 심리진단 문항을 추가해 디자인과 배열만 살짝 바꿔 새로운 차트를 개발했고, (주)코리아 하트필트,라는 독일계 심리학자의 이름을 딴 비등기 회사를 설립해 상담 심리 전문가,라는 공인되지 않은 직함을 단 명함을 팠다. 어릴 적 나는 일하는 엄마의 뒤에서 빈 차트에 줄을 치며 놀다 등짝을 맞곤 했다. 강남 바닥의 미혼 남녀들이 호텔에서 커피와 홍차, 스테이크와 파스타를 먹고 마시는 동안 나는 뼈와 살을 착실히 늘려가며 자라왔다. 그 시절 엄마와 나는 우리 가족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다보면 등급표의 최상위권에 안착해 누구보다도 북유럽적으로 아름다운 삶을 이룩할 것이라는 믿음에 푹 빠져 있었다.
먼저 그 꿈을 발로 차버린 것은 나였다. 2차 성징이 시작된 이후 내가 기독교적 가족 형태에 편입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건이 하나 있었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 두살 연상의 이과생과 키스를 하다 엄마에게 들킨 것이다. 장소는 (진부하게도) 놀이터였다. 가로등 불빛이 스포트라이트처럼 내리쬐는 그네에서 반삭의 남고생 둘이 입을 맞추고 있었고, 그 장면을 바라보는 중년의 여성 한명이 있었다. 바로 사십년 차 기독교인인 우리 엄마. 너무 정통으로 들켜버려 뭐라 변명할 처지가 못 됐다. 엄마는 드라마 속 인물처럼 놀라 가방을 떨어뜨리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울지는 않았다. 대신에 아무렇지도 않게,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고개를 돌려 아파트의 현관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그녀는 나를 문책하거나 혼내는 대신 자신의 빨간 마티즈에 태웠다. 그리고 경기도 양주의 한 정신병원에 나를 입원시켰다. 싫다고 돌아서는 내 손목을 강하게 붙잡으며 누구보다도 따뜻한 눈빛으로 말했다.
—엄마가 아무리 봐도, 네가 가슴속에 분노가 많은 것 같다. 걱정 마라. 엄마가, 그렇게 두지는 않을 거다.
그렇게 나는 폐쇄 병동에 입원했다. 나는 매일 오전 혈액검사를 포함한 각종 검사를 받았으며, 매 끼니마다 여덟알이 넘는 약을 복용했다. 오후 시간의 대부분은 집중적인 상담 치료를 받았다. 오래된 병원의 냉방시설이 시원치 않아 사타구니며 겨드랑이에 자주 땀이 찼으나 데오도런트나 샤워젤이 없어 내 몸에서 풍기는 냄새를 그대로 맡고 있는 날들이 많았다. 나와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던 48세 김복동씨의 경우 분노조절 장애와 조현증 진단을 받았는데, 깨어 있을 때는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친구들에게 뭔가를 계속 떠들어댔으며 잘 때는 코를 심하게 골았다. 게다가 약의 부작용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수시로 방귀를 뀌어 다른 사람보다 청결에 조금 민감한 편인 나를 질리게 만들었다. 오래돼 구멍이 성긴 방충망으로 자주 모기가 들어와 매일 밤잠을 설쳤다. 힘겹게 선잠이 들어도 꿈을 꾸느라 바빴다.
꿈에는 언제나 한 여자가 나왔다. 머리를 정수리까지 올려 묶은, 빨간 마티즈를 모는 여자. 여자는 눈을 감은 채 차를 몰고 있었다. 여자가 모는 차의 속도가 갈수록 더 빨라졌다. 갈 길이 멀어 보여, 당신. 너무 바쁘구나.
자고 일어나면 마치 내가 밤새 운전을 한 것처럼 피곤했다. 보름 동안 여러 검사와 지속적인 상담 끝에 의사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내가 전후 피해자와 같은 강도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임상심리 치료사의 소견도 그와 유사했다. 나는 십육년(그러니까 평생) 동안 엄마의 인생의 대리물로서, 나 자신의 심리적인 욕구를 억압하고 살아왔다고 했다. 우리 모자 사이에 일어났던 몇가지 일화를 들은 전문의와 임상심리 치료사는 내가 아니라 엄마가 치료가 시급한 상황인 것 같다고 결론지었다. 보호자를 호출하는 선에서, 나는 간신히, 정말이지 간신히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날, 엄마는 마티즈 안에서 내게 쪽지 한장을 건네주었다.
레위기 20장. 반드시 죽여야 하는 죄: 13절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네가 마음에 분노가 많은 것 같다.
—내가 아니라 엄마가 아픈 거래. 의사가 그랬어.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나와 이과생과의 모든 것이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원래 내가 썼던 핸드폰은 폐기되었으며 새로 산 핸드폰의 주소록에는 엄마의 번호만이 저장되어 있었다. 알아서 다 처리해놨다,라고 말하는 엄마에게는 업무를 대하는 사회인의 사무적인 태도가 서려 있었다.
집 근처의 종합병원에서 2회차까지 치료를 받은 뒤 엄마는 상담과 약물 치료를 모두 거부했다. 상담자를 바꿔준다는 병원의 제안도 거절했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자신은 이미 죄 사함을 통해 구원받은 상태이며, 따라서 더이상의 문제는 없다고 했다. 의사에게 그 말을 전해 듣고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엄마는 단지 허공을 바라보듯 아무런 가치판단이 없는 시선으로 나를 흘긋 보고 말 따름이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라. 남부끄러운 일이니.
도대체 뭐가 부끄러운 일이라는 건지. 두살 많은 형과 키스를 한 것? 그 때문에 여름방학 동안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 나온 것? 미친 여자의 아들로 태어나 십육년이 넘도록 그녀를 버티며 살아온 것? 그중에 어떤 것을 비밀로 하라는 건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고, 그래서 그냥 그 모든 것을 비밀의 영역에 두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침묵의 방식으로 포기와 체념을 배운 나는 방학이 끝난 후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에 복귀해 평범한 입시생이 되어 살아갔다. 남들이 보기에는 썩 평범한 삶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으나, 속으로는 누구보다 시꺼먼 독기를 품고 있었다. 나와 같은 지붕 아래 잠든 저 여자가 늙고 병들면 경기도의 외진 숲에 내다버리고 말리라, 그래서 산 채로 미친 들짐승의 먹이로 만들 것이다.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며 그 시절을 버텼다.
그 결심을 무너뜨리는 게 아니었다.
간밤에 꿈자리가 사나웠나. 오늘따라 결혼타령이 정말 길고도 길었다. 건수를 잡으면 물고 늘어지는 엄마의 습관은 옆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 참 좋았다.
—어쩜 너는 서른몇살이 되도록 집에 여자 하나 데리고 오는 법이 없니?
—만나는 사람이 없으니까.
—누구 만나는 사람 있다며, 저번에.
—그게 벌써 오년 전이야, 엄마. 지금은 없어.
엄마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한때는 내 곁에 있었지만 지금은 아예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그. 오년 만에 연락이 온 건 또 어떻게 알고 느닷없이 그 얘기를 끌어오고 난리였다.
엄마, 뚜쟁이 말고 무당을 하지 그랬어, 그럼 상가가 아니라 건물을 샀을 텐데.
*
감정의 철학 수업 중 네번째 강의의 주제는 ‘무언가에 한없이 열중하는 마음’이었다.
그날 그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아카데미 근처의 횟집이었다. 회를 사줄 테니 술이나 한잔하자고 했다. 술과 생선을 거절하는 법이 없는 나로서는 너무 감사한 제안이었다. 나는 그의 저의를 알기 전까지는 절대로 내 설레는 마음 같은 것을 들키지 않으리라 다짐한 채 그와 마주하고 앉았다. 그의 단골집인지 주문을 하기도 전에 광어와 우럭에 매운탕이 포함된 중자 세트가 나왔다. 내가 소주 두병을 추가했다. 남자의 뒤에 수족관이 여러대 놓여 있었다. 고기가 다 팔려나갔는지 텅 빈 수족관에 기포만 꼬르륵 올라오는 광경이 꽤 웃겼다. 그는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디가 굵은 손가락에 뱀의 꼬리 같은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털이 별로 없는 손목과 이두, 삼두가 적당히 발달한 팔뚝, 작은 귓불과 뾰족한 귓바퀴와 각진 턱선을 샅샅이 훑다 그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나는 황급히 눈을 돌리고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것을 물었다.
—그런데 철학 수업을 왜 그렇게 많이 들으셨어요?
—세상 돌아가는 원리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요.
—창작을 하시는 분다운, 거시적인 관심이군요.
그리고 침묵. 긴장한 탓에 아무 말이나 했는데, 너무 무례한 말투였나 싶어 후회가 됐다. 하지만 그는 내 말투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고 그저 한참을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 대단한 비밀을 공개하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은 저 철학서 만들어요.
—네?
—철학서 만드는 출판사 편집자예요. 원래는 회사 다니다 지금은 외주로 일하고 있어요.
—아…… 그러셨구나.
남자가 생각보다 너무 정상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실례일 정도로 놀라버렸다. 돌이켜보니 태극기가 오버로크된 백팩에 언제나 종이뭉치와 빨간색, 검은색 플러스펜과 잘 깎인 연필이 든 오래된 필통을 넣어 다니는 것이 누가 봐도 출판 편집자의 가방이잖아. 하긴 깨달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뒤늦기 마련이니까.
—예전부터 우주의 원리에 관심이 많기는 했어요. 궁금하잖아요. 세상이 왜 이렇게 생겨 있는지. 나는 왜 이런 꼴인지. 이 크고 넓은 세상에 별은 또 얼마나 많으며 나란 존재는 얼마나 하찮은가, 뭐 그런 생각.
—그렇죠. 인간은 하찮죠. 하찮기 그지없죠.
개중 가장 하찮은 게 그의 개똥철학 같기는 했지만. 그는 깊게 한숨을 쉰 후 사뭇 진지한 음성으로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한없이 외로워져요.
한없이 외롭다고 말하는 그의 눈이 정말 너무 외롭고 공허한 감정에 잔뜩 취해 있는 것 같아 나는 도대체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앞에서는 스물다섯해 동안 내가 습득해온 사회적 기술이 다 무력해지는 느낌이어서, 정신없이 젓가락을 놀려대며 전투적으로 광어와 우럭 살점을 집어 먹을 수밖엔 없었다. 남자는 젓가락을 입술에 댄 채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이에 뭐가 꼈나, 왜 남 먹는 걸 보고 웃고 지랄이야, 싶은 생각이 들 때쯤 남자가 말했다.
—지금 먹고 있는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광어죠. 아니, 우럭인가? 제가 사실 생선을 잘 구별 못해요. 그냥 비싼 건 다 맛있더라고요.
—맞고 틀려요. 당신이 맛보고 있는 건 우럭, 그러나 그것은 비단 우럭의 맛이 아닙니다. 혓속에 감도는 건 우주의 맛이기도 해요.
—네? 그게 무슨 (개떡 같은) 말씀이신지……
—우리가 먹는 우럭도, 우리 자신도 모두 우주의 일부잖아요. 그러니까 우주가 우주를 맛보는 과정인 거죠.
—아……
—우리 모두가 우주이고 우주의 일부로서 생동하며 관계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지 않나요?
그러고 보니 남자의 눈빛이 약간 맛이 간 것 같기도 했다. 정체불명의 종교단체에 속한 사람인가? 언젠가 사설단체의 수업이나 아카데미에는 온갖 어중이떠중이 쓰레기들이 다 흘러든다는 말을 들었던 게 떠올랐다. 여차하면 도망치려고 가방 끈을 꽉 잡고 있었는데 다행히 이상한 곳에 끌고 갈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대화의 주제가 우주나 존재까지 넘어가고 나니 더 할 말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다시 남자의 손가락 문신을 빤히 바라보았는데 남자가 황급히 소매를 내려 그것을 가리려 했다. 당연히 가려지지 않았다.
—문신이 예쁘네요. 처음 뵀을 때부터 궁금했어요.
—사실 고등학교 때 오토바이 타다 사고가 나서. 흉터를 가리려고 한 문신입니다.
—네, 그러시구나.
—또 막 놀고 그랬던 건 아니에요.
—많이 노시지는 않았구나.
그리고 또다시 침묵. 우주보다 무거운 어색함을 견디기 힘들었던 나는, 별수 없이 시켜놓은 소주를 혼자서 다 마셔버렸다. 남자는 내 술이 모자라다고 생각했는지 계속 내 잔을 채워주었고 우리는 결국 회 한점에 술 한잔을 곁들이며 금방 얼굴이 벌게져버렸다. 남자가 조용히 중얼댔다.
—더 투명한 쪽이 광어입니다.
—네?
—둘 중에 살점이 더 투명한 쪽이 광어다, 생각하면 구별하기 쉬울 거예요. 더 쫄깃한 쪽이 우럭.
—그럼 오늘부터 저를 우럭이라고 부르세요. 쫄깃하게.
술 취한 나는 인간도 아니다, 방금 무슨 말을 내뱉은 거야, 정말 돌았군, 하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남자가 또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요, 광어라고 부르겠습니다. 속이 다 보이거든요.
술 취한 남자는 가뜩이나 느릿느릿한 말투가 더 느려져 조금 더 귀여워져 있었다. 나는 남자의 귀엽고 어눌한 목소리를 듣다가, 광어인지 우럭인지 모를 투명한 회를 한점 먹는 것을 반복했다. 금세 알싸하게 취해버린 나는 왜인지 엄마를 떠올렸다. 암 확진 판정을 받은 뒤로는 날것을 먹는 게 금지돼, 벌써 육개월 가까이 그 좋아하는 회를 먹지 못하고 있는 그녀. 수술이 끝나고 완치가 되면 같이 와야겠다는, 나답지 않게 효자 같은 생각까지 했다. 그리고 이미 다 헤집어진 꽁칫살을 뒤적이며 혼잣말을 했다.
—엄마가 생선 가시는 진짜 잘 발라줬는데……
그가 갑자기 생선 가시를 바르기 시작하더니 두툼한 꽁칫살을 내 밥공기에 슥 얹어놓았다.
—아이고,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아이고, 죄송해라.
—좋아하는 거 같습니다.
—저도 좋아해요. 꽁치 맛있죠.
—꽁치 말고. 당신이라는 우주를요.
나는 마시던 소주를 그의 얼굴에 뿜어버렸다.
스피노자가 구별했던 감정의 종류는 48개. 그중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욕망일까, 기쁨일까, 경탄일까, 당황일까. 그가 나에게 느끼는 감정은? 호기심에 기초한 경멸일까, 욕망일까?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누구보다 열심인 표정으로 꽁치를 바르고 있었다. 용암을 뒤집어쓴 폼페이의 연인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주 뜨거운 것이 나를 덮쳤고 순식간에 세상이 멈춰버렸다. 지금 내 감정은 욕망, 기쁨, 경탄, 당황 중 무엇일까. 나는 감정의 철학 수업에서 배웠던 몇개의 키워드를 떠올리며 정신없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수족관의 푸른 조명 탓인지 그의 얼굴이 더 창백하게 보였다. 그늘진 그의 얼굴이 누구보다도 귀여워 보인다는 생각을 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늦어버린 뒤였다. 그의 얼굴이 점점 더 크게 다가왔고, 나는 그만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해버렸다.
그의 입술에서 이전까지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맛이 났다. 비릿하고 쫄깃한 우럭의 맛. 어쩌면, 우주의 맛.
그날 밤 우리는 함께 그의 집으로 향했다.
*
불 꺼진 방에서 그를 안고 누웠다.
하루 종일 모자를 쓰고 있어 잔뜩 눌린 머리카락과 빳빳하게 굳은 목과 다른 곳보다 온도가 낮은 등의 문신 자국을 만졌다. 그도 나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우리는 작은 빈틈도 없이 서로를 꽉 안은 채로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비로소 나의 몸이며 가슴의 형태, 팔의 길이 같은 것이 그와 맞아떨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고, 내 가슴에 닿아 있는 그의 따뜻한 머리통이, 이마가 마치 우주를 안고 있는 것처럼 거대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피부로 느껴지는 그의 체온과 귓가에 울리는 호흡에 집중하다보니 어느새 나는 나 자신을 잊어버렸다.
나는 내가 아닌 존재로, 아무것도 아닌 채로 순식간에 그라는 세상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
섹스를 마치고 난 후 그가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스피노자는 폐병에 걸려서 죽었어요.
—수업에서 그런 말도 나왔어요? 결핵 같은 거에 걸린 건가?
—책에서 읽었어요. 가난해서, 렌즈 깎는 일을 하다 폐에 유리 가루가 들어가서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사람이 학자들 사이에서는 왕따였대요. 그래서 교단에도 못 서고. 일용직만 전전하다 결국 그렇게 됐다고.
—안타까운 얘기네요.
—사실은 나도 그래서 안정적인 일 하는 거예요. 예술이, 신념이 인간을 망치는 걸 너무 많이 봐왔으니까.
예술이 도대체 뭐 얼마나 대단하게 인간을 망쳐놨길래. 그리고 스피노자는 예술이 아니라 철학을 한 거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가 몹시 심각한 표정으로 하나도 안 궁금하고, 안 중요해 보이는 얘기를 줄줄 이어나갔고 나는 그것을 귀 기울여 듣는 척했다. 그 와중에도 침대맡에서 공기청정기는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말했다.
—여기 공기는 깨끗해서 다행이네요.
그의 투룸 빌라는 반지하에 암막 커튼이 쳐져 있어 동굴처럼 어두웠다. 공간은 넓었으나 너무도 많은 물건들이 빼곡히 차 있어서, 답답해 보이기도 했다. 커다란 책장에는 이름 모를 철학자들의 전집이 가득했고, 두개뿐인 방에는 공기청정기와 제습기, 에어컨이 각각 놓여 있었으며 인체공학 의자와 북유럽식 소파 테이블 세트, 새것처럼 보이는 러그가 깔려 있었다.
—뭔가 집이 너무나 엄청나네요. 좋은 물건도 많고……
—사실은 저희 어머니가 ‘쟈스민 블랙’이었어요.
—그게 뭔데요.
—백화점에서 돈을 아주 많이 쓰면, 붙여주는 칭호 같은 것? VIP죠.
—아…… 네. (이토록 투명한 자랑은 실로 오랜만이네.) 많이 유복하신가봐요.
—한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저번에 말씀드렸죠? 어머니가 알코올중독이라고. 어머니 주사가 쇼핑이거든요. 여기 에어컨이랑 제습기도 두대씩 있어요. 책장이랑 소파도 다 엄마가 술 먹고 산 거예요.
—대단한, 술버릇이네요. 제가 술 취해 소리 지르고, 남자한테 키스하는 건 약과였군요.
내 딴엔 농담이라고 한 거였는데 또다시 암흑보다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그래서 집이 망했어요. 태어나서 대학 다닐 때까지 쭉 압구정동에 살았는데 이제는 여기서 이러고 사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그래도 이 정도면 먹고살 만하신 거 아닌가요, 암에 걸려 죽을 위기인 것은 아니시잖아요, 한때 압구정에 사셨다니 다행입니다, 할 수도 없고. 인간이 성장 배경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난 또 습관처럼 이 정도 집 크기에 압구정동 출신에 프리랜서 편집자면 몇점쯤일지 차트의 기준에 맞춰 계산을 하게 됐다. 결과는? 입회가 불가능하세요, 회원님. 다시 태어나셔야겠군요. 하긴 그러는 나도 그저 그런 사년제 대학 불문과를 졸업한 백수에 불과하니 우리는 정말 환상의 탈락조 커플인 것 같았고, 그조차 괜히 운명처럼 느껴지는 게 역시나 내가 맛이 갔구나 싶었다.
그렇게 그를 안은 채 숨소리를 듣다가 설핏 잠이 들었다. 내가 잠이 깰 때쯤에 그 역시 눈을 뜨고 몸을 뒤척였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세를 고쳐 누워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형, 내가 이쪽인 줄 알고 있었어요?
—네, 처음 본 순간부터 알고 있었는데요.
—우리가 이렇게 될 것도 알고 있었어요?
—네, 그것도 처음부터.
도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세상천지에 가장 남자답고 매력적인 사람이며, 나는 그냥 게이스러운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게 있다면 그것이) 몹시 티 나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꼰대 디나이얼 게이 같은 점이 소름 끼치게 싫었지만 그런 그에게 정신없이 빠져드는 내 마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를 알기 위해, 나아가 그에게 빠져드는 나 자신의 마음을 알기 위해, 그 모순을 해석하기 위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하는 모든 것들을 속속들이 관찰했고 기록했다. 천년만년 학위논문을 쓰는 대학원생처럼. 절박하고 가련하게.
*
그 여름, 나는 완전히 미쳐 있었다. 돌았고, 사로잡혔다.
새벽이면 어김없이 그의 전화가 걸려왔고, 나는 병실에 잠든 엄마를 내버려둔 채 정신없이 택시를 잡아탔다. 올림픽대로의 가로등 불빛이 도장을 찍듯 내 얼굴을 비추었고, 나는 라식수술 부작용 때문에 생긴 흐릿한 빛 번짐을 꿈결처럼 느끼며 가로등을 오백개쯤 지나쳤다. 만오천원이 넘는 돈을 내고 택시에서 내리면 그의 집이 보였고, 철문을 두드리면 녹슨 경첩에서 우는 것 같은 소리가 났으며, 그리고 비로소, 나보다도 10센티는 큰 그가 문을 열고 나왔다.
—왔어요?
쑥스러운 듯한 목소리. 어두운 데서 보니 눈이 푹 파이고 입술이 톡 튀어나온 얼굴이 참을 수 없이 귀여워 나는 현관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그의 얼굴을 만지고 쓰다듬었다.(그는 질색했다.)
그날 밤 우리는 매운 닭발에 소주를 시켜 먹었다. 둘이서 소주 세병을 다 비우지도 못했는데, 그는 얼굴이 벌게진 채로 내 다리를 베고 누웠다.(내 경우는 술이 좀 모자랐다.) 그는 느릿느릿 자신의 가족에 대해 이야기했다. 압구정동의 부유한 집안 태생이었으나, 알코올중독인 어머니를 견디지 못해 아버지가 일찍이 가정을 떠났고, 누나는 이른 나이에 재미교포와 결혼해 버지니아에 살고 있다고 했다. 대학 때부터 쭉 어머니와 둘이 살다 그녀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난 뒤 독립을 했다. 나는 점점 더 뜨거워지는 그의 목덜미며 뒤통수를 느끼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 역시도 엄마의 병 수발을 들고 있는 처지라 할 말이 많았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포악해지는 성질머리며 초 단위의 감정기복을 감당하기가 힘들다는 게 우리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한참을 신나게 떠들던 그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싶었는데 눈을 감은 채 잠들어 있었다. 뭐야, 콩순이 인형이야? 이렇게나 갑자기 잠든단 말이야? 그는 갑자기 몇번 경련을 하더니 엄마,라고 중얼거렸다. 눈에서 눈물 한줄기가 떨어져내렸다. 잠꼬대조차도 참 신속하고 요란하게 한다 싶었고 다 크다 못해 노화가 시작된 나이대의 남자가 엄마를 부르며 운다는 사실이 웃겼다. 나는 잠자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자꾸 자신의 가족에 대해, 자신의 성장 배경에 대해 얘기하는 게 불편하면서도, 좋았다. 가족 얘기를 할 때면 자기감정에 취해 마치 연극배우라도 된 것처럼 구는 게 좀 웃겼고, 등가교환의 법칙처럼 내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은 불편했지만 그의 삶을 알게 되는 것은 좋았다. 숱한 밤 동안 그의 얘기를 하염없이 듣고 싶었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그라는 존재의 퍼즐을 완벽히 맞추고 싶었다. 내가 모르는 그의 인생, 내가 모르는 그의 습관, 내가 모르는 그의 호흡까지도 오롯이 재구성해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토록 치열한 나의 내적 고민 따위는 알지 못한 채 그는 내 다리에 쥐가 날 때까지 늘어지게 자다가, 누군가 이름이라도 부른 것처럼 화들짝 눈을 떴다. 한참을 숨을 고르던 그에게 말했다.
—침 흘린 거 알아요?
그는 누구보다도 귀여운 얼굴로 입을 슥 닦았다. 느릿느릿하게 일어나 (아마도 그의 어머니가 사들였을) 조형적으로 완벽한 나이트 스탠드를 켰다. 은은한 조명이 그의 몸을 비추었고 나는 그의 몸을 덮고 있는 문신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손가락 끝에 그려진 뾰족한 날은 꼬리가 아니라 뿌리였다. 그의 가슴과 등을 타고 팔다리까지 커다란 나무가 그려져 있는 거였다. 『어린 왕자』의 한 페이지에서 본 듯한, 작은 행성을 뒤덮는 규모의 나무였다.
—바오바브나무인가요. 『어린 왕자』에 나오는 그건가.
—아뇨. 생명의 나무예요.
—그게 뭔데요?
—별 뜻이 있는 건 아니고요, 제가 공부했던 우주의 구성 원리를 담은 겁니다.
남자는 우주가 하나의 커다란 나무로 구성되어 있다는, 동서양의 성수(聖樹) 신화를 조합해 만든 개똥 같은 철학을 읊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계절이나 죽음과 재생 같은 단어를 떠들어댔으나, 내가 볼 때는 그냥 소싯적에 좀 놀았던 흔적을 딴에 그럴듯해 보이는 그림으로 덮은 것 같았다. (그리고 기실 별로 그럴듯하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커다란 나무 사이사이에 흐릿하게 귀신의 형상과 빨간 장미, 연꽃과 용이 그려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쪽이 조금 더 오래된 미완의 이레즈미 흔적으로 보였다.
—그냥 이레즈미 문신 위에 나무를 덧칠한 거 아니에요?
—우와 귀신이네. 어떻게 알았어요?
—눈이 있으니까요……
그는 고등학교 때 일본에서 건너온 ‘아는 형님’(그는 사회 각계각층에 아는 형님이 있었다)에게 이레즈미를 받게 됐다. 문신을 끝내지 못한 채 그 형님이 징역을 살게 됐고, 결국 미완의 형태로 남게 된 것을 최근에서야 보완했다고 설명했다.
—근데 요즘 애들도 이레즈미를 알아요? 우리 때 유행이었는데.
아는 형님에, 요즘 애들이라니. 단어 선택이 퍽이나 꼰대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대화를 좀 나누다보니 나랑 띠 동갑의 나이라고 했다. K대학교 95학번. 76, 용띠.
세대 차가 느껴지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 열두살의 무지막지한 터울에도 불구하고 그를 좋아하는 마음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그가 수염 난 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렇게 불을 끄고 방에 있으니까요.
—네, 형.
—우주에 우리 둘만 남겨져 있는 기분이에요.
—아, 형, 제발요.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눌 때면 마치 그리스비극이나 부조리극, 아니면 팔십년대 영화의 대사를 낭독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곤 했는데 그가 존재나 우주 철학 같은 주제를 얘기하는 것을 좋아해서도 그렇거니와 서로 존댓말로 대화를 나누어서 더더욱 그랬다. 그게 싫지는 않았고 실은 그런 우리의 모습이 꽤 귀엽다고 생각했다. 한심하게도.
해가 뜰 때쯤 그와 나는 우는 듯한 소리를 내는 그의 집 대문을 열고 나왔다. 그의 집 옆 건물 상가에는 세탁소가 있었다. 이른 아침, 세탁소가 열려 있을 때면 그는 내 두발자국 뒤에서 걸었고, 닫혀 있을 때면 내 새끼손가락을 잡고 걸었다. 손을 잡고 길을 걷는 게 좋아 일부러 집에서 일찍 나설 때도 있었다. 그렇게 큰길까지 나간 우리는 버스정류장에서 첫차가 올 때까지 어깨를 맞대고 앉아 있었다. 내가 버스를 타면 그가 내 등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버스의 맨 뒷자리에 앉아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로 그가 계속 손을 흔드는 것을 보았다.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 틈에서 고개를 돌릴 때마다 손을 흔드는 그의 모습은 점점 작아졌다. 버스가 코너를 돌아 완벽히 사라져버릴 때까지, 내 뒷모습이 그의 시야에서 완벽히 없어져버릴 때까지 계속해서 내게 손을 흔드는 그. 내 뒷모습을 그렇게까지 오래 바라봐준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나는 한동안 언제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그가 나의 뒤에서 손을 흔들고 있을 것 같다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그런 달뜬 감각에 사로잡힌 채로 일상에 도착한 나는 막 청소를 마쳐 티끌 하나 없는 병원 복도를 지나 발소리를 죽인 채 오줌통을 비웠고, 밤새 잠을 설쳤다며 짜증을 부리는 엄마의 목소리로 하루를 시작했다.
*
십이주 동안의 아카데미 수업이 끝난 후에도 나와 그의 관계는 계속되었다.
그를 만나는 시간은 새벽의 몇시간에 불과했으나 나의 하루는 그 짧은 시간으로 말미암아 완벽히 재편되었다. 그를 만나지 않는 나머지 시간 동안에도 나는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생각했다. 엄마의 짜증을 받아내며 병간호할 때에도 취업 자소서를 쓰기 위해 되지도 않는 이야기를 꾸며 쓰는 동안에도 나는 그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만번은 더 걸었던 거리를 걸을 때에도 나는 그를 생각했다. 그의 눈으로 내 일상의 공간을 바라보고 싶어져 발끝을 들고 걸으며 그의 시선으로 거리를 내려다보기도 했다. 그가 관심 가졌을 만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며, 또 그와 함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남들보다 한껏 예민한 상태로 세상의 모든 자극을 받아들였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쳤을 갭 매장으로 들어간 것도 그런 탓이었을 것이다. ‘원 플러스 원’으로 판매하는 티셔츠가 눈에 밟혔다. 같은 모양의 투엑스라지와 엑스라지 사이즈의 티셔츠를 사서 가방에 넣었다. 그의 매끄럽고 차가운 등에 내가 사준 티셔츠가 닿는 장면을 상상하며 얼마간은 미소를 지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날 밤 그의 집에서 티셔츠를 꺼냈다. 같은 모양의 색깔만 다른 티셔츠를 받아든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했다.
—이런 건 입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아, 아무래도 똑같은 티를 입는 건 좀 그렇죠. 그럼 집에서라도……
—그것도 그렇지만, 성조기가 그려져 있어서요.
—네?
—영씨, 저는 이런 무늬가 있는 옷을 입지 않아요. 평소에 보면 영씨는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그런 상징들을 입고 다니시는 것 같아요. 전범국의 국기 같은 것들. 미국을 많이 좋아하세요?
—아, 그게, 딱히 그런 것은 아닌데요.
—음악 들으시는 거 봐도 그렇고.
—저는 그냥 디바를 좋아하는 거예요. 게이들 다 그렇잖아요. 브리트니랑 비욘세 싫어하는 게이가 어딨어.
—그게 누구죠?
—우와……
그는 미국의, 미제의 모든 것들이 불편하다고 했다.
—미제요?
—네, 미제국주의요.
제국주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처음 듣는 단어 앞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저 당황한 채로 그의 단호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큰 실수를 저지른 것 같았고 내 티셔츠나 모자에 박힌 성조기가 처음으로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나의 정치적인 무지가 부끄러웠다기보다는(그딴 걸 부끄러워해본 적은 없으므로) 그가 멍청하고 생각 없는 내 본연의 모습에 질색할까봐, 그래서 다시는 나를 봐주지 않을까봐 두려웠다. 당시의 나는 어떡하면 그가 나를 좋아하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고, 필요하다면 나의 가치관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날 우리는 처음으로 섹스를 하지 않는 밤을 보냈다. 아무것도 나눠 먹지 않았고 대화는 겉돌았으며 서로의 사이에 흐르던 거리감은 좁혀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평소와 같은 점이라면 그가 해가 뜰 때까지 나에게 미국이 세계에 끼친 해악에 대해 시시콜콜 알려주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경제와 문화 전반에 걸쳐서 미국이 세계를 장악하고 있다며, 신자유주의나 문화사대주의 같은 사회 교과서에 나오는 단어들을 늘어놓았다. 나로서는 그런 것들 따위 별 상관도 없었고, 다만 그냥 그를 안고 싶을 뿐이었고, 그에게 안겨 서로 아무 말도 필요 없는 상태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내 온몸으로 그의 촉감이며 심박 같은 것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는 그런 내 마음은 알지 못한 채 마침표를 찍듯 이렇게 말했다.
—영씨는, 내가 어떤 세상을 살아왔는지 상상도 못할 거예요.
그러는 당신도 내 세상을 알지 못하잖아요. 알고 싶어하지도 않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 말을 하지는 못했다. 그런 종류의 말이 당시의 우리에게는 꽤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것은 그와 나의 육체적 거리를 더욱 멀어지게 만들 뿐이기에.
*
내가 그에게 빠져 있던 시간 동안 엄마는 ‘암의 완치’라는 목표에 사로잡혀 그것을 위해 특유의 성실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두번의 크고 작은 수술을 거치는 동안 엄마는 (자신의 머릿속에서만큼은) 세상 누구보다도 뛰어난 암 석학이 되어 있었다. 시판하는 암 관련 서적을 모두 독파하였으며 인터넷 커뮤니티에 가입해 암과 관련된 최신 정보들을 업데이트했다. 유방암은 삼성의 누구, 자궁암은 아산의 누구, 간암은 누구, 하는 명의의 목록을 줄줄 꿰게 되었으며 나는 소싯적 나의 입시 커리큘럼을 짜주던 엄마의 활기찼던 모습을 잠깐 떠올렸다. 동시에 내 수능 성적표를 받아든 후 절망적으로 바뀌었던 표정도 떠올랐다. 시원찮은 성적표를 본 후 칼같이 나에 대한 기대를 저버렸던 것과 같이, 엄마는 림프절까지 암이 전이돼 추가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길 것이라고 했다.
신의 뜻은 기묘한 구석이 있어서 일전의 수술들과는 달리 3차 수술은 예후가 좋지 않았다. 담도가 막히고 적출부에 염증이 생겨 열이 사십도까지 올랐고, 보름 동안 먹은 것을 토하고 또 토하느라 몸무게가 45킬로까지 내려갔다. 엄마의 수발을 들던 나 역시 덩달아 살이 빠졌고, 십분 단위의 토사곽란을 겪으며 삶이란 병실에서 또다른 병실로 옮겨가는 것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하는 깨달음에 도달하게 됐다. 반 강제로 엄마의 곁에 하루 종일 붙어 있다보니 도통 그와 만날 틈이 나지 않았다. 가끔 통화를 할 수 있을 따름이었고, 그마저도 그가 늘어놓는 형이상학적인 헛소리를 듣느라 바빴다. 그의 답 없는 고민을 들으며, 현실적인 문제는 다 밀어놓은 채 저 너머만 바라보는 삶의 태도가 어쩌면 매일 술을 처먹고 물건을 사들이는 모친의 기벽에서 온 무기력증의 일종이 아닌가 하는 정신분석까지 하게 됐다. 역시 고난은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내 거지 같은 현실을 달랬다.
엄마의 경우는 신체적인 고난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추가 수술 이후 분리불안증 수준으로 나에게 집착했다. 눈을 뜰 때마다 나를 찾았고, 내가 먹여주지 않으면 음식을 먹으려 들지 않았다. 나는 엄마에게 밥을 먹이고, 엄마를 부축해 용변을 보게 하고, 엄마가 쏟아놓은 토사물을 닦고, 보호자 침대에 앉아 하루에 오천자에서 만자씩 ‘자소설’을 썼다.
엄마가 일반 병실로 옮기고 난 후, 간병인을 고용했다. 더이상 엄마를 견뎠다가는 엄마보다 내가 먼저 신의 품에 안길 것 같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도,
그를 만지고 싶었다.
꼬박 보름 만에 그를 만났을 때 나는 뛸 듯이 행복했다. 그렇게, 만난 지 육개월 만에 우리는 처음으로 사람이 많은 대낮의 거리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했다. 대낮의 그는 밤에 볼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보습이 잘 안 된 그의 피부는 태양빛 아래에서 푸석해 보였으며, 길쭉한 눈의 일부인 줄만 알았던 눈꼬리가 실은 깊숙이 파인 눈가의 주름이었다는 것은 작은 문제(?)에 불과했다. 대낮의 많은 사람들 속의 그는 어딘가 모르게 구부정했고 몇대 얻어맞은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티내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그가 나와 함께 걷는 것을 몹시 불편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그의 태도에 섭섭한 마음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한 나의 열정이 달라지거나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형태를 달리해 애달픔이나 애잔한 동정의 마음으로 번져갔다. 스물여섯의 나와 서른여덟의 그는 강남대로를 나란히 걸으며 이따금 우연인 척 새끼손가락을 스치며 그러나 절대 서로에게 고개를 돌리지는 않고, 다만 곁눈질로 서로를 바라보며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 그렇게 나름의 로맨스에 젖어 있는 찰나, 누군가 나를 불렀다. 전 회사의 (나 대신 정규직이 된) 동료였다. 나는 (속으로 쌍욕을 하며) 그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잘 지내? 나는 똑같지 뭐…… 그는 나와 동료의 두발짝 뒤에 서서 운동화로 땅바닥을 긁고 있었다. 곁눈질로 그를 가리키며 누구냐고 묻는 동료에게 선배,라고 대답했다. 동료와 나와 그 모두가 다소 불편한 자세로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어색하게 헤어졌다. 동료가 떠나간 후 우리 사이에 깊은 침묵이 감돌았다. 스물여섯의 나와 서른여덟의 그가 도대체 어떤 선후배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꽤 복잡해졌지만, 복잡해지려고 하면 얼마든지 복잡해질 수 있는 게 인생이므로 생각을 멈추자, 마음먹었다.
또 이런 날도 있었다. 병실에 간병인이 오자마자 택시를 잡아탄 나는 곧장 올림픽공원으로 향했다. 그는 평소처럼 검은 모자에 백팩을 메고 있었지만, 팔뚝까지 접어올린 흰 셔츠와 백탁이 심한 선크림 때문에 목과 색깔이 다른 그의 얼굴이 데이트에 대한 기대감을 보여주고 있었고, 나는 그게 너무 귀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평일 오전, 올림픽공원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나는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얼른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손을 얼른 빼내며 왜 이래요, 말했지만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다만 불안한 기색만은 숨길 수가 없어서 우리는 15센티쯤 거리를 둔 채 나란히 걸었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벚꽃 아래를 함께 지나쳤고, 바람이 불 때마다 눈처럼 꽃잎이 떨어졌다. 인공호수는 잔잔했고 미세먼지 같은 건 없었고 사위는 고요했으며 이따금 젊은 부부가 유모차를 밀며 지나가거나 노부부가 손을 잡고 산책로를 거닐었다. 그는 화단에 가까이 서더니 개나리꽃 줄기를 따다가 셔츠 가슴팍의 포켓에 꽂았다. 거의 어버이날의 학부형이나 할 것 같은 행동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자기,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형이 한 짓이 더 부끄럽다고요.
—이렇게 달라붙지도 말고요. 우리가 (게이라고) 떠들고 다닐 일 있어요?
—이미 온 우주가 알고 있는 사실인데요?
별것도 아닌 걸로 토라진 나는 그와 세발짝쯤 떨어져 걸었다. 그는 자기 앞주머니의 개나리를 내 귀에 슬쩍 꽂아놓고는 아이폰으로 내 사진을 찍었다. 나는 사진을 보는 척하며 장난으로 그를 안았고, 그는 진심으로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펄쩍 뛰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상심하다가 귀여워하다가 짜증이 나 있다가 초 단위의 감정기복을 반복했다. 그래도 봄의 올림픽공원만큼은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워서 나는 이 말도 안 되는 감정기복이 날씨 때문인가, 하루 종일 환자만 들여다보고 있다보니 나까지 어디가 고장났나, 뭐 그런 생각을 하며 풀잎 같은 걸 괜히 귀에도 꽂아보고 남들이 하는 천진난잡한 짓거리를 다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우뚝 멈춰 섰다. 먼발치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중년의 남녀였다. 마치 포박을 하는 것처럼 깊게 팔짱을 껴서 거의 한 몸으로 들러붙은 것처럼 보이는 그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와 그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가 몹시 당황한 얼굴로 모자를 벗어 꾸벅 인사를 했고,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얼핏 듣기로 중년의 남녀는 그의 국문과 선배인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의 두발짝 뒤에서 운동화로 바닥을 긁으며, 호수의 끄트머리를 바라보며, 그들의 지루한 대화를 견뎠다. 학생회의 누구는 진보정당의 공천을 받아 시의원에 출마할 예정이며, 누구는 정치 대중서를 써 종편의 패널이 되었다. 요즘 우리 부부는 조깅하는 취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하루끼를 읽고 있다. 너는 아직도 니체를 좋아하니. 박근혜가 대통령이 됐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니. 여보, 나는 울었잖아. 우리 운동할 땐 이천십년대에 이런 세상 오리라고 정말, 정말 상상도…… 그나저나 요즘 너희 기수는 안 모이냐, 빠져가지고는. 회장인 네가 구심점이 돼야지. 여보, 왜 그래. 다들 사는 거 바쁘잖아. 요즘 애들이 그렇지 뭐. 너 아직도 출판사 다니냐. 사상서 만드는? 아 예, 뭐 그렇죠, 형. 나는 도대체 대화인지 문책인지 알 수 없는 일련의 고문과도 같은 말을 들으며 그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부부 중 남자인 쪽이 나에게 물었다.
—거기 서 계신 분은 누구?
—아, 저는 후배입니다.
—학교 후배? 그럼 우리 후배이기도 한데, 너 몇학번이니?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학교는 아니고, 그냥 동네 후배인데……
—아아 그렇구나. 강남 사는 후배?
—네, 뭐…… (어디 사는지 알아서 뭐하게.)
—근데 학생은 이명박근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또 이런다, 진짜. 못 들은 걸로 하세요.
—아니 왜. 못 물어볼 거 물어본 건 아니잖아. 요즘 애들은 박근혜 좋아해?
—그냥 뭐…… 오래된 사람이죠.
—오래됐다라…… 신선한데 이거?
도대체 뭐가 신선하다는 건지. 박근혜가 옛날 여자인 건 전세계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인데. 왜 나이 든 꼰대들은 자기보다 어린 사람만 만나면 자기가 아는 사람의 이름을 백명쯤 불러대고, 자신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어젠다를 천개쯤 대며,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는 걸까. 알아서 뭐하게. 알면 뭐가 달라져. 비슷한 것을 알고 있고, 비슷한 생각을 하면 나이 차이가 줄어들기라도 해? 다른 생각을 하면 어쩌게. 역시 애 같은 생각을 하는군, 내가 살아온 세월이 헛되지 않았군, 여기며 엉망진창이 된 얼굴이며 몸 같은 것들을 자위질해대려고? 남자가 내 불편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 “강남 살아 박근혜 좋아하나보다. 돈 많으면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화내지 마요. 농담이야. 우리도 요 앞에 아파트 살거든.” 부부는 뭐가 웃긴지 서로를 보며 깔깔깔 웃어댔고, 나는 그의 선배라는 족속들을 호수에 떠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의 얼굴이 밀가루 반죽처럼 하얗게 말라갔다.
—그런데 지금 시간에 여기 어쩐 일이야. 너 회사에 있을 시간 아니냐?
—아, 오늘 좀 볼일이 있어서요.
그는 누가 봐도 거짓말하는 사람 같은 얼굴로 눈알을 좌우로 굴려대고 있었다. 부부 중 여자 쪽이 눈이 동그래져서 말했다.
—에, 남자 둘이 여기서 볼일이? 이 꽃 피는 좋은 날에?
—아 예.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둘이 사귀는가보지.
남자가 여자에게 툭 던지듯 말했다. 여자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요즘은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된대, 여보.
—어째서? 나 동성애 그…… 퀴어? 찬성한다고. 그럴 수 있다고 봐.
—무슨 소리. 그거 미제의 악습 아니야?
두 부부는 서로를 잡고 밀치며 깔깔대고 웃었고, 나는 도대체 무슨 알아들을 수도 없는 좆같은 소리일까, 늙으면 참 별게 다 웃기구나 생각하며 얼른 자리를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식사 전이면 오랜만에 점심이라도 같이하는 게 어때. 거기 후배 몫까지 내가 살게.
머뭇대는 그를 대신해 내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희 밥 먹었어요.
—열한신데 벌써?
—브런치 했어요.
세상이 두쪽이라도 난 것 같은 표정을 짓는 둘을 내버려둔 채 나는 그의 팔을 부여잡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도 얼떨결에 다음에 뵙죠 형들, 인사를 하고는 나에게 질질 끌려갔다. 나는 몇걸음 걷지 않아 그의 팔을 잡고 택시를 잡아탔다.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고, 그게 왜인지 그의 집이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나였지만 세상 누구보다도 그가 불편해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가장 편한 곳으로 가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왜 그랬어요.
—네?
—도대체 왜 그랬냐고요. 형들 앞에서 브런치라니. 그러면 내가 뭐가 돼요.
—뭐가 되긴요. 후배가 되지.
그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거리고 있었다. 한번도 그가 화내는 것을, 아니 그렇게 심한 감정적인 동요를 일으키는 것을 본 적이 없는 나는 다소 황당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 역시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그 사람들 도대체 누구예요?
—선배들이죠. 운동하던 형들.
—그럼 별것도 아닌 사인데 왜 그렇게 절절매요. 그냥 대충 눙치고 나오지.
—형들이니까. 선배니까.
부부 중 남자 쪽의 경우 대학 시절 총학생회장이었고, 몇번 구속된 적이 있으며 현재는 무슨 역사단체의 연구교수이고, 부인 쪽의 경우 운동을 했던 얘기를 소설로 써서 참여계 문학가들에게 주는 상을 수상했으며, 유명한 저자(느)님이 되셨다고 했다. 건너 건너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며, 계속 볼 사람들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아니, 그 사람들 눈치를 그렇게까지 봐야 해요? 학생회장이면, 작가면 뭐? 순 거지 같은 소리만 늘어놓고 입만 떼면 은근히 형을 깔아뭉개던데요? 옆에 있는 제가 다 짜증났는데요? 왜 그런 사람들을 견디고 있어요. 그 사람들이 누굴 어떻게 보든 그게 뭐가 중요해요. 오히려 나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같이 밥이라도 먹으면 어쩔 뻔했어요. 사회운동한다는 사람들이 인권의식은 왜 그 모양이래. 아무튼 그런 것들이 입으로만 진보니 뭐니,
—그런 식으로……
—네?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그가 나에게 반말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나대로 기분이 상해 입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그리고 조용히 가방을 싸서 집을 나와버렸다. 그가 나를 잡으러 나와주기를 바랐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슬프다기보다는 화가 났고 화가 난다기보다는 절망적이었다. 아마도 그날이 그가 마중 나오지 않은, 내 등을 바라보지 않은 첫번째 날이었을 것이다.
이틀 뒤 새벽,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취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지금 만나자고 했다.
—술 마신 사람이랑은 별로 할 말 없는데.
—말이 짧다?
—형도 짧은데.
—오라면 좀, 와.
—싫어. 내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개야?
—제발 와줘.
나는 개가 맞았다. 그의 방으로 쪼르르 달려갔을 때 그는 상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낙지며 우럭이며 소주를 펴놓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내 얼굴을 보더니 다짜고짜 키스를 했다. 입에서 비린내가 풍겨 그를 확 밀어버렸다.
—아, 진짜 뭐 하는 거예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내 옷을 벗기며, 계속 나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복숭아 같은 머리통을 보며 식은 만두처럼 생긴 귀여운 얼굴을 보며 별수 없이 그를 안아주었다.
섹스를 한 후 그는 내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했다.
—저 사실은 허리가 좀 안 좋아요. 옛날에, 수감됐던 적이 있거든요.
—마약 사범이셨어요?
—아뇨, 운동하다가 몇번 잡혀갔어요.
그는 아주 날을 잡고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이십대의 삶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입에서 풍기는 비린내 섞인 술 냄새를 맡으며,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그의 얘기를 들었다.
대학 시절 그는 문과대 학생회장이었다고 했다. 학생회장,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그의 많은 것들이 설명되었다. 누군가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언제나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앞만 보고 걷는 습관이며 지나치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듯한 태도, 조용히 침묵을 지키다 제일 마지막에 한마디를 얹어 모든 일의 결정권자처럼 느껴지게 하는 말버릇도. 그는 자신이 한총련 사태를 겪은 마지막 운동권 세대이며, 대학 졸업 후 잠시 노동운동에도 몸담은 적이 있다고 했다. 효순이 미선이 사건과 국가보안법 폐지 시위, 안티조선 운동, 광우병 시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구치소에도 몇번 들어갔다 나왔다고 했다. 수감되었을 때 허리와 목이 안 좋아져 아직까지도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자세히 들어보니 세번 도합 72시간 정도 구치소에 머물렀는데, 고문을 당하거나 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장판이 깔린 옥사에서 누워 있다 나온 거였다. 그것만으로 만성 질환을 얻었다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지 않은가, 그저 좋지 않은 자세로 오래 앉아 있어 생긴 병이 아닐까 싶기는 했지만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감옥에서 나올 때마다 몸에 새로운 문신을 새겼다거나,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때면 그 문신을 다시 새로운 문신으로 덮었다는 얘기를 들을 땐 우주를 표류하는 것처럼 아연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의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핸드폰으로 그가 졸업한 학교의 학생회를 검색해보았다. 강성 NL계열의 학생회로 유명하다는 평이 달려 있었다. 반지하 방에서 섹스를 한 뒤 전직 운동권 학생회장의 후일담을 듣는 내 모습이 지독히도 팔십년대 소설 같아 나는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저 지금도 아이폰만 쓰잖아요. CIA도 아이폰의 보안을 못 뚫는대요.
그가 자신의 손에 비해 너무 작은 아이폰4를 꼭 쥐고 말했다. 자신도 한창 운동을 하던 시절 경찰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고, 통화기록을 감청당하고, 미행까지 당해봐서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이야기가 거기까지 흘러가자 나는 정말 이게 뭔가, 하는 기분에 사로잡혔고 그러고 보니 그가 카카오톡이나 다른 국내 메신저가 아닌 아이메시지로만 대화를 고집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해외에 서버가 있는 메신저들이 안전하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요즘도 누군가 자꾸만 저를 감시하는 거 같아서 불안해요.
—요즘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그는 세상 누구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도청을 당하는 사람이 있어요. 사회운동을 하다 죽는 사람이 있고요.
—네, 알죠.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이 죽고, 투쟁하고 그러죠. 그건 알죠.
그런데 그게 형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못 믿겠다는 것은 아니고, 안 믿겠다는 것도 아닌데, 다만 형이 그렇게 중요한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형이 과거에 학생회장이었는지, 뭐 얼마나 대단한 운동을 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하루 종일 방구석에 처박혀서 저자 욕이나 하며 맞춤법을 고치는 별볼일없는 남자잖아요. 나만큼이나 보통의 사람이잖아요. 형은 그냥 나한테나 중요한 사람인 거 같은데, 그래서 나한테 이런 헛소리를 할 수 있는 거겠죠. 압구정동 출신에 학생운동에 투신해 도청을 당하는 이십대를 살았으며 지금은 죽은 철학자의 글을 읽고 고치는 당신의 뇌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걸까. 엉망진창 낙서장이 되어버린 당신의 등과도 꼭 닮아 있지 않을까. 그런 당신을 좋아하는 나는 어떻고. 뭐 이런 말들을 정신없이 쏟아놓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고, 다만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해버렸다.
더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
그해 가을의 올림픽공원은 전에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엄마의 항암 치료가 마지막 스테이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엄마는 동난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없는 식욕을 끌어올려가며 밥을 먹고, 억지로 산책을 했다. 꾸역꾸역 음식을 밀어넣어도 얼굴은 자꾸만 해골처럼 말라갔다. 엄마는 낙엽 하나를 주워다 만지며 내게 말했다.
—요즘 들어 너 고등학교 다닐 때가 자꾸 생각난다.
—뭔 소리야.
—그때 아팠던 너를 잘 보살펴주지 못한 게 왜 이렇게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아픈 건 내가 아니라 엄마였지. 그때 엄마가 보살펴주지 못했던 건 엄마 자신이고.
엄마는 내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화단 쪽으로 걸어갔다. 어머, 이런 게 있네. 엄마가 허리를 숙이고 주의 깊게 보는 건 꽃배추였다. 생긴 건 배추 모양인데 보라색이며 붉은빛을 띠는 게 조금 생경하게 느껴졌다.
—아 뭐야, 징그럽게 생겼어. 만지지 마.
—내가 한동안 이 꽃을 엄청 싫어했잖니.
—왜? 엄마는 풀이라면 다 좋아하잖아.
—나 대학 떨어지고 나서 처음 본 게 이 꽃배추였어. 합격 명단에 이름이 없는 걸 확인하고 교문을 나서는데 길가에 온통 꽃배추더라? 보라색 꽃을 보는데 미식거리면서 체기가 올라오더라고. 얼마나 속이 상하던지. 그때 인생이 다 끝난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여직까지 살아서 이러고 있네.
—그 시절에도 꽃배추가 있었구나.
—있지. 요즘 있는 건 그때도 다 있지.
나는 언제나 있는 것들을 생각하며 엄마를 부축해 병원으로 돌아왔다.
*
그 가을의 끝자락 합정의 출판사에 외주 원고를 넘기고 왔다는 그와 만났다. 홍대의 실비집에서 술을 마시다 조금 싸웠는데, 그는 술을 절제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누군가(아마도 자신의 엄마)를 떠오르게 한다고 했다. 무슨 얘기를 하든 자신의 학생운동 시절이나 모친에 대한 얘기로 귀결되는 게 어이가 없어서, 형은 대화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 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게 분명하며 마더콤플렉스까지 있는 것 같다고 톡 쏘아버렸더니, 그건 너도 마찬가지라고 응수를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고, 틀린 말이 아닌 소리들이 그러하듯 서로에게 꽤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으며 결국 큰 싸움으로 번졌다. 당초에 예상했던 화기애애한 술자리는 온데간데없고 밤늦도록 서로에게 못할 소리를 해버리고야 말았다. 그렇게 감정이 상한 채로 술집에서 일어난 우리는 택시를 잡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사람들이 얼굴에 피칠을 한 채 돌아다니고 있었다. 슈퍼 히어로 분장을 한 사람들도, 죽은 군인의 옷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핼러윈,이라고 했다. 젠장, 기분도 좆같은데 택시 잡기까지 힘들겠군, 생각하고 있는데 그는 상한 것을 먹은 것 같은 표정으로 미제의 명절인 핼러윈을 반대한다고 말했다. 기원도 모르는 채 서양의 명절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세태에 대해 논평했고 나는 다 지겨워져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신나 보이는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그러다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좀비 복장을 한 남자가 자신과 친구들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나는 웃으며 그의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받아들고 좀비며 드라큘라, 원더우먼 무리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는 우리의 사진도 찍어주겠다며 둘이 나란히 서라고 했다. 어색하게 서 있는 그의 겨드랑이에 내가 슬쩍 팔을 끼웠다. 사진 속 그와 나는 엉거주춤하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사진이 찍히자마자 그가 얼른 한발짝 멀어져 팔을 뺐다. 나는 그에게 사진을 갖겠느냐고 물었고 그는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결국 작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내 지갑 속에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것이 우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
그해 겨울, 그의 등 뒤에 그려진 생명의 나무는 시들시들해졌고, 그 너머에 그려진 이레즈미 풍의 귀신은 더욱 희미해져버렸다. 살이 찐 탓인 거 같았다. 그는 일주일에 세번은 나가던 운동도 그만두고 외주 철학서 작업을 두어개 더 맡아 하기 시작했다. 미간의 주름이 깊어졌고 잔신경질이 늘었다. 그에게서 인생의 힘든 지점을 지나는 사람 특유의 뒤틀린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라고 해서 뭐 다를 건 없었다. 만성 비염을 얻었으며, 총 48개의 기업으로부터 죄송합니다만,으로 시작되는 거절의 메시지를 받았다. 병원의 보호자 침대에서 서너시간씩 쪽잠을 자며 노트북을 무릎에 올려놓고 콧물을 훌쩍이며 또다시 내가 아닌 나 자신을 지어내며 인생을 견디고 있었지만, 도무지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십대의 젊음이 무색하게 매일 지쳐만 갔다. 처음에는 마치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던 대낮의 데이트도 금세 시들시들해졌고, 어느새 우리는 서로를 일상의 권태로 여기기 시작했다.
권태의 끝자락, 마지막으로 그의 방으로 향했던 날을 기억한다.
우리는 그의 방에서 탕수육에 소주를 시켜 마시며 영화를 보았다. 외주 고료를 받아 샀다는 텔레비전에서는 동구권의 스파이가 나와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나는 진행이 느린 영화가 몹시 지루하게 느껴졌는데 그는 몹시 집중해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내가 먼저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영화가 끝나 있었다. 그도 소파에 누워 자고 있었다. 무방비 상태로 너부러져 있는 그를 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할 일이 없어져버린 나는 그의 책상 앞에 앉았다.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창에 의미없는 것들을 검색하다가, 그와 내 이름을 쳐보다가, 즐겨찾기 목록을 열었다. 온갖 기사와 인문학 전문 블로그를 갈무리해놓은 것들이 마구잡이로 즐겨찾기 되어 있었다. 그중 제목에 동성애,가 들어간 문서가 있어서 무심코 클릭해보았다.
이남사회에는 갈수록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되고 있습니다. 외국인노동자 문제, 국제결혼, 영어만능적 사고의 팽배, 동성애와 트랜스젠더, 유학과 이민자의 급증, 극단적 이기주의의 만연, 종교의 포화상태, 외래자본의 예속성 심화, 서구문화의 침투 등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민족의진로』 2007년 3월호.
이게 뭐지, 하는 생각에 흘끗 그를 돌아보았다. 이불을 걷어찬 채 나신으로 잠들어 있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누군가 낙서를 해놓고 도망친 것 같은 문신은 여전했고, 이따금 규칙적으로 코 고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모니터 속 갈무리된 기사를 읽었다. 이남사회며, 외래자본 같은 단어들이 한번에 들어오지 않아 여러번 봤다. 아무리 반복해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그가 나에게 비슷한 단어를 써서 말했던 적이 있던 것 같기도 했다. 뭔가 끈적끈적한 것을 뒤집어쓴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파일을 몇개쯤 더 읽어보다 창을 꺼버렸다. 그 문서들은 모두 동성애라는 질병 혹은 징후에 대한 갖가지 원인들을 담고 있었다. 인터넷 창에 등록된 읽은 페이지 목록과 열어본 파일 목록을 모두 삭제한 후 모니터를 껐다. 이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지내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항상 아무것도 모르는 편을 택하는 데 익숙한 나니까. 나는 그의 옆에 누웠다. 망친 낙서로 가득한 것 같은 그의 등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나는 손으로 그 자국을 일일이 쓰다듬어보았다. 미끄럽고 차갑게만 느껴졌다. 바닥에 처박힌 이불을 들어 우리의 몸에 덮어봐도 으슬으슬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그를 등진 채 몸을 웅크리고 있는데 갑자기 사과를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로부터?
아무 데나 동성애를 갖다 붙이는 등신 같은 자들에게? 이딴 말도 안 되는 쓰레기 같은 구절을 모으며 자신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못난 그에게? 별로인 남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좋아해버리고, 단지 그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의 컴퓨터를 마구 뒤지며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는 나에게? 어쩌면, 그 모두에게. 아니,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좀 받고 싶어졌다. 딱 한번이라도, 미안하다는 말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럴 일은 없겠지. 그럴 일은 아마 영영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잠시라도 사과받고 싶은 마음을 품은 나 자신이 우스워졌고 얼른 가방을 싸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코를 골며 잠들어 있는 그를 내버려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동이 트기 전에 홀로 그의 집을 나섰다. 미제의 문물, 자본주의의 산물이 된 채로.
*
그 무렵 인턴을 했던 전 회사의 차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무런 발전도 없이 인생의 되돌이표만 찍고 있는 나와는 달리 그는 어느덧 팀장으로 승진을 한 상태였다. 그가 맡고 있는 팀이 북미지역 백억짜리 건을 수주하게 되어 급하게 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바로 정규직 사원으로 채용해줄 수는 없으나, 파견직의 형태로 고용한 뒤 추후에 경력직 사원으로 채용해주겠다고 제안을 해왔다. 정규직 전환이 팀장의 감언이설에 불과하며 썩은 동아줄이 분명하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으나, 내게는 썩어빠진 줄이나마 절실했다. (눈에 보일 리도 없는데) 전화기에 대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첫 월급을 받던 날, 나는 그에게 조선호텔에 가자고 했다.
—호텔이요? 둘이서요?
—자는 거 말고요. 근사한 식당에 가요. 스테이크도 썰고, 파스타도 먹고 그래요.
—저는 그런 거 부담스러운데.
—걱정 마세요. 제가 살게요, 취업 턱으로.
그는 고개를 저으며 고기를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다. 그럴 리가. 둘이서 고기를 구워 먹은 게 기백번인데. 구워 먹는 것만 좋아하고 스테이크를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다. 그럼 파스타 같은 것을 먹자니 그런 것 말고 그냥 해물찜을 먹자고 했다. 조개구이나 아니면 간장게장이나.
—아, 진짜 형. 해물에 미쳤어요? 전생에 상어였어요?
—그치만 이상하잖아요.
—뭐가요?
—남자 둘이 파스타 먹는 거.
그날 그렇게 시작된 싸움은 생각보다 크게 번졌다. 이상할 것도 더럽게 많다, 남자 둘이 같이 걸어 다니면 지구가 둘로 쪼개지냐, 같이 숨은 어떻게 쉬냐, 말이 나와서 말인데 너는 길에서 너무 스킨십이 잦은 것 같다, 길바닥의 누구도 형을 신경 쓰지 않는다, 아직도 학생회장인 줄 아는 거냐, 착각 좀 그만해라, 너는 좀 게이인 게 티가 많이 나는 편이다, 대혈투가 벌어졌다.
—지금 제가 부끄럽다는 거죠?
—네, 맞아요. 부끄러워요. 아무 데서나 눈치 없이 팔짱을 끼고. 자기라고 부르고. 도대체, 도대체 다른 사람의 눈이라는 것을 생각이나 하는 건지.
—저도 형이 부끄러운 건 마찬가지인데요. 백날천날 벙벙한 면바지에 다 늘어난 티셔츠에 낡아빠진 백팩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다 들어 있고. 요즘은 무장공비도 그러고 다니지는 않아요.
그는 거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봄날 햇살은 따사로웠고, 그는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순식간에 완벽한 뒷모습이 되어버린 채로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무섭게 완벽히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내가 큰 실수를 한 것인가.
그날이 내가 그의 뒷모습을 본 첫날이었다.
그리고 침묵.
그와 완벽히 연락이 끊겼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고 문자도 읽은 뒤 답하지 않았다. 그와 만나는 동안 이토록 철저한 외면의 상태를 겪은 것은 처음이었다. 입술이 마르고 심장이 타들어갔다. 나는 권태를 딛고 또다시 그에게 내 일상의 지분을 모두 내어주게 되었다. 눈을 뜨면 핸드폰을 든 채 그에게서 연락이 올까, 최선을 다해 기다렸으며 핸드폰을 베개맡에 둔 채 눈을 감아도 그의 꿈을 꿨다. 오직 단 하나의 질문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는 누구이며, 우리는 무슨 관계일까.
그와 만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삶을 알아갈수록 그가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연했다. 애초에 그는 나와 뭔가를 맞출 생각이 없었고 다만 아무도 없는 칠흑 같은 밤마다 순진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어린애인 나에게 뭔가를 가르쳐주고 나와 몸을 섞는 것을 즐거워할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나를 바꾸고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여겼으나, 불행히도 나는 누군가에 의해 쉽게 바뀌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에 젖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많았다. 꼬박 일주일 만에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잘 지내지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고 일방적인 연락이었다. 화가 나기보다는 왈칵 반가워하는 내 마음이 싫었지만 그 마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눈물이 고였다. 그가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될수록 나는 더 그가 알고 싶어졌고, 그를 가지고 싶어졌다. 숨 쉴 수도 없을 만큼 그를 옥죄고 싶어졌다.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는 그에게 꼭 나여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를, 그의 삶을 내 마음대로 쥐고 흔들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대단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를,
엄마에게 소개하겠다.
그에게는 아주 어렵게, 그러나 매우 심상하고 아무렇지 않은 일인 것처럼 가볍게 말을 꺼냈다. 소주에 아귀찜을 먹고 있을 때였다. 그가 정신없이 살을 발라 먹는 중에 기습적으로 물었다.
—우리 엄마 볼래요?
그는 살다 별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그냥…… 날이 좋잖아요. 같이 올림픽공원 걷고 그러면 좋을 거 같아서…… 그냥요.
그는 한참 동안이나 콩나물 더미에서 아귀 살을 찾다가 실패한 후 말했다.
—그래요. 그럼, 제가 올림픽공원으로 갈게요.
—네, 형. 일요일에 같이 산책이나 해요. 커피나 마시고, 그래요.
—그래요, 뭐…… 그럽시다.
뭐야, 맥 빠지게 쉽잖아.
*
추가 수술일이 다가오자, 엄마는 매일 꿈자리가 사납다며 난리를 쳐댔다. 또 시작이구만. 일도 자식교육도 뭣도 매사에 호들갑인 여자였다. 암세포는 이미 다 제거된 후였고, 막힌 담도를 뚫어 염증을 완화하는 간단한 시술에 불과했다. 뭔가 잘못되려야 잘못되기가 힘든 수술이었다.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수술을 마쳤을 때, 질병으로부터 완벽히 벗어나 두번째 삶을 막 시작했을 때,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에 대한 감사, 우주에 대한 애정이 가득 차 있을 딱 그때,
폭탄을 터뜨리자.
엄마와 그와의 미래를 위해, 남은 ‘우리’의 삶을 위해 용기를 내보자. 그래, 눈 꼭 감고 한번 뛰어들어보자. 문을 열고 나가보자.
아산병원으로 향하는 요양병원의 승합차에 엄마를 인도한 후, 나는 병실로 돌아왔다. 협탁 위에는 사진 한장이 놓여 있었다. 폴라로이드 사진.
나는 사진을 집어 들었다. 내 칠칠치 못한 성격(과 낡고 늘어난 가죽지갑) 탓에 사진을 어딘가에 흘려버리고 만 것 같았다. 그것을 협탁 위에 올려놓은 것이 누구인지, 엄마인지 간병인인지, 다른 누군가인지 분간이 가지를 않았다. 아니 분명히 엄마인 것만 같았다. 언제 어디서 사진을 흘린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굳이 수술 날짜에 누구라도, 그러니까 내가 단번에 발견할 수 있을 만한 이런 위치에 남자 둘이 어깨동무한 사진을 올려놓고 홀연히 사라지는 것은 지독히 엄마다운 행동이었다.
내 기억 속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언제나 모든 걸 다 알고 모든 것을 들여다보는 사람.
IMF 때, 집을 말아먹은 당사자인 아빠가 갑자기 사라져버렸을 때에도 엄마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아들아, 짐 싸라. 아빠 잡으러 가자. 엄마와 나는 빨간 마티즈를 타고 인천의 한 임대주택 단지에 도착했다. 계단이며 복도에 거미줄이 너무 많아 온몸으로 거미줄을 헤치며 302호의 문을 두드렸다. 한참을 부서질 듯 두드려봐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복도로 난 창문을 통해 집 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우리 모자는 결국 아빠(와 그의 내연녀) 색출에 실패하고 다시 마티즈에 올라탔다. 차를 돌려 집으로 향하려는 순간, 아파트 뒤편의 공터에서 아빠를 발견했다.
—엄마, 저기 봐.
아빠는 자그마한 중년의 여자와 함께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아빠와 아빠의 내연녀는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서로 얼굴이 닮아 있었고, 짝이 맞는 퍼즐처럼 조화로워 보였다. 심지어 아빠는 엄마와 함께 살 때는 한번도 보인 적이 없던 고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엄마와 내가 선량한 두 남녀 주인공을 처단하러 온 악인이나 빚쟁이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때 그들을 바라보던 엄마의 표정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세상천지가 다 멎어버린 듯한 그 얼굴은 48개의 감정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임에 분명했다. 절망이나 고통 따위로는 단순화할 수 없는 감정의 결을, 아빠와 아빠의 내연녀와는 조금 다른 형태의 고요를, 뭔가를 꾹꾹 눌러 담는 형태의 감정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배웠다.
수술을 마친 후 엄마는 복부에 피 주머니와 관을 줄줄이 꽂고서도 새벽 다섯시에 득달같이 일어나 침대에 앉았다. 협탁에 촛불을 켜놓고 삼십분이 넘도록 손을 모으고 기도를 했다. 배며, 다리가 접히는 게 환부의 회복에 좋을 리 없는데도 구태여 그런 습관을 반복했다. 기도를 마친 후에는 병실 침대의 책상을 펴서 하루에 몇장씩 성경 구절을 써내려갔다. 나는 그녀의 집요한 필사가 구도자의 고행을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본의 아니게 일어난 불행에 대해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머리를 쥐어뜯고 소리를 지르는 대신 엄마는 모나미 볼펜으로 공책에 꾹꾹 성경을 눌러쓰는 방식을 택한 것이겠지. 마취조차 거부했던 엄마에게 그것이 유일한 삶의 방편이었기에 그녀에게 있어 필사는 일종의 호흡 같다는 생각을 했다.
들숨에 한 글자, 날숨에 한 글자.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지난 시간 동안 앓았던 열망과도 닮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상에 대한 열망? 대상에 사로잡혀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한 열망?
그래, 한없이 나 자신에 대한 열망.
예수를 사랑하고 누구보다 열렬히 삶에 투신하는 자신에 대한 열망. 어쩌면. 한때 내가 그를 향해 가졌던 마음. 그 사로잡힘. 단 한순간도 벗어날 수 없었던 그 에너지도 종교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새까만 영역에 온몸을 던져버리는 종류의 사랑. 그것을 수십년간 반복할 수도 있는 것인가. 그것은 어떤 삶인가. 어떤 형태인가.
사랑은 정말 아름다운 것인가.
한번은 오줌 줄이 빠지는 걸 모르는 채로 그러고 앉아 있길래, 부아가 치밀어 소리를 쳤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냐고. 그게 엄마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될 것 같냐고.
엄마는 기적이라는 단어를 썼다. 기적이 일어났다고 했다. 꼬박 천일 동안 성경을 옮겨 쓴 말기 암의 자매님에게 치유의 은사가 내려졌다고. 자신 역시 그런 기적을 겪게 될 것이라고 했다. 엄마가 직접 아는 사람은 아니고 권집사의 질부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권집사의 질부라.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이 끝나는 것 만큼이나 멀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경우 굳이 기적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다고도 덧붙였다. 완강한 그녀 앞에서 나는 간호사를 호출해 오줌 줄을 달고 시트를 갈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시절 오로지 통증과 병만이 남아 있는 그녀의 삶에 있어 기도하고 성경을 옮겨 쓰는 활동 말고 다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어 보였다. 실제로 그랬을 것이다. 그녀는 거울을 보지도 밥을 먹지도 누군가와 연락을 하지도 않은 채 그저 자기 자신만 남은 채로 묵묵히 문자를 써내려갔다. 나는 그것을 (동성애라는) 악습을 끊지 못한 나에 대한 시위, 혹은 그토록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게 내린 병마에 대한 저항, 삶에 대한 열정, 혹은 그 모두가 섞인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항의의 메시지로 읽었다. 나는 결국 엄마에게 그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일요일, 그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전화는 꺼져 있었고 내가 보낸 문자에 답은 없었다.
나는 엄마와 둘이서 호숫가를 걸었다.
몇번이고 뒤를 돌아봤지만 당연히 그는 없었다.
그날의 산책은 짧았다.
*
사흘 뒤,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친한 형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겨서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미안하다는 말도 고명처럼 곁들여져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친한 형. 급한 일.
그래 그랬겠지. 급한 일이 있었겠지. 바빴겠지.
그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우리는 예전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화를 나누었다.
*
엄마는 일년 반 만에 암 완치판정을 받았다. 엄마를 담당했던 의료진의 경우 엄마의 완치를 선진 시스템에 기반한 지속적이고 적절한 치료의 효과로 여겼고, 내 경우는 지극한 간호의 힘으로, 엄마의 경우는 신의 뜻이자 기적으로 여겼다.
엄마의 퇴원을 사흘 앞두고,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 집에 찾아왔다. 야외에서 함께 있는 것을 불편해하는 그를 위해 집에서 같이 밥을 먹기로 했다. 대낮이었고 그의 방문에 나는 잔뜩 들떠 있었다. 내가 자라난 공간에서 내가 만든 음식을 나눠 먹는 그의 모습이라니. 생각만 해도 설렜다. 약속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한 그는 현관에 얌전하게 백팩을 벗어놓은 뒤 누가 봐도 손님 같은 자세로 실례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거실을 대충 훑어보더니, 집이 참 좋네요,라고 했다. 그리고 곧장 내 방으로 가서 마치 국립도서관 사서 같은 자세로 꼼꼼히 책장을 둘러보았다. 그가 내 침대에 앉았다. 그라는 존재가 내 침대에 앉아 있는 게 새삼스럽고, 새삼스럽게도 기뻐서 나는 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양말을 벗고 내 침대에 내 체취가 묻은 이불에 누워 있는 그에게 입을 맞추려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이불 커버를 가리키며 한소리를 했다. 미치코런던 이불 커버였다.
—여기 이불에도 또 유니언잭이 그려져 있군요.
—아, 그렇네요.
—영씨는 역시 서양 국가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딱히. 거기 붙어 있는지도 몰랐어요. 오히려 형이 국기에 진짜 집착하는 거 아시죠?
—또, 또 그렇게 공격적으로 말하죠.
—그냥 말한 건데요.
순식간에 싸해져버린 분위기에 나는 얼른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 밥을 해주겠다고 했다. 메뉴는 그와 한번도 함께 먹지 못했던, 파스타. 나는 주방으로 가 면을 삶고, 마늘을 썰고, 팬에 올리브유를 둘러 페퍼론치노와 바지락을 볶았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며 나는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에 취했다. 내 손으로 만든 음식이 그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이 기뻤다. 일단은 그 만족감이면 됐다는 생각으로, 커다란 접시에 파스타를 담아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정작 그는 한젓가락도 제대로 먹지 않은 채 젓가락으로 면을 뒤적이기만 했다. 그러다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고 탁자 유리 밑에 깔려 있는 내 아기 때 사진을 보고 있었다.
—이 사진을 보니까 말이에요, 어머니께서 영씨를 정말 사랑하는 게 느껴지네요.
—그런가요.
—네. 사랑받는 사람의 얼굴은 뭔가 다르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찍는 사진도 뭔가 다르고요. 그러니까 말인데요, 영씨.
—네, 형.
—영씨도 이제 좋은 남자 만나야죠.
—지금 뭐라고 했어요?
—아니면 좋은 여자를 만나라고 해야 하나?
파스타 말고 회나 먹으러 가요, 말하는 것처럼 가벼운 어조였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하는 그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는 없었다. 내가 좋아한, 나 자신의 모든 것을 투신해버릴 정도로 좋아했던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나. 나는 정말이지 모든 것이 알 수 없어져버렸고,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의 내 모습은 엄마가 내연녀와 배드민턴을 치는 아빠를 바라봤을 때의 모습과도 같았을까. 갑자기 왜. 아니, 갑자기가 아닌가. 혹시 내가 자신의 컴퓨터를 보고 그의 일상을 뒤지고 비밀을 캐고 그의 모든 것을, 그의 삶을 뒤집고 헤집으려 한 것을 눈치챈 것일까.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그가 한숨을 쉬며 내게 물었다.
—우리가 무슨 관계인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대답 없이 일어나려는 그를 잡았다. 이대로 그를 보낼 수는 없었다. 나는 엄마가 아니니까. 연신 나를 뿌리치려고 하는 그를 꽉 붙들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측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죠?
나도 모르게 그의 뺨을 후려쳤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그를 식탁에 눕힌 채로 목을 조르고 있었다. 나보다 10센티는 큰 그가 얼굴이 벌게진 채로 내 손을 꽉 붙들고 있었다. 그의 충혈된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내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렀다. 나는 손에 힘을 풀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일까 깨달았을 땐 이미 모든 게 늦어버린 뒤였고, 그는 몇번 헛기침을 한 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식탁에서 몸을 일으켜 특유의 느릿느릿한 자세로 겉옷을 입었다. 그리고 나를 내버려둔 채 오래된 백팩을 메고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를 잡지 못했다. 대신 그가 문을 나섰을 때 나는 곧장 베란다로 달려갔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 그의 뒷모습을 보고, 또 보았다. 그 모습이 정말로 마지막이 될 것만 같아서. 그가 완벽히 사라질 때까지, 하나의 점이 되어버릴 때까지 계속해서 그의 모습을 내 눈에 담았다.
며칠 뒤 그의 집에 찾아가보았지만 아무리 인터폰을 눌러도 대답이 없었다. 우는 것 같은 소리를 내던 그의 집 대문은 내내 굳게 닫힌 채로 열리지 않았다.
그의 집 우편함에 편지를 꽂아놓았다. 말이 좋아 편지지, 그를 만나는 내내 내가 써왔던 일기를 찢어다놓은 것에 불과했다. 서른장도 넘는 일기장에는 그를 만날 때마다 끓어넘치던 과잉된 나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썼는지 알지 못했다. 그와 내가 어떤 관계였는지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일기의 마지막 장에는 우리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달라고, 연락을 기다리겠다고 썼다. 나는 마치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던지듯 그에게 내 날것의 마음을 던졌다.
*
보름 만에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작가가 돼보는 게 어때요.
다시 생각해달라는 내 물음에 대한 답은 없었다.
그 사람은 끝까지, 정말이지 끝까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고, 내게 뭔가를 가르치려 들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를 위한 선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눈을 감고 그의 번호를 지웠다. 눈꺼풀에 인두로 지져놓은 것처럼 그의 번호가 선명히 떠올랐지만 언젠가는 이것조차 기억에서 지워지리라 생각했다.
결국에 우리는 함께 따뜻한 파스타 한접시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다.
대신에 나는 농약을 마셨다. 차가운 아메리카노에 농약을 부으며, 이 커피조차도 그에게는 미제의 산물이자(이름이 아메리카노이기까지 하니) 제삼세계 노동착취의 결과물로 보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게 웃겨서 한참을 웃다가 눈을 감았다.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중환자실이었다. 공교롭게도 엄마가 입원해 있던 아산병원이었다. 위세척을 마친 뒤, 혈액 투석을 하고 있는데 발치에 엄마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내가 바랐던 얼굴은 아니었다. 내가 아는 우리 엄마는 이런 상황에서 눈물을 찍어 삼키거나 소리를 지르며 나를 때리거나 냅다 울어버리거나, 주님,으로 시작하는 기도의 형식을 띤 한탄을 시작하거나 일단은 뭐가 됐든 아침 드라마처럼 감정을 터뜨리고 보는 사람이었는데, 그날의 엄마는 그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너무 애쓰지 마. 어차피 인간은 다 죽어.
그게 엄마가 할 말이냐고, 묻고 싶었다. 왜 이렇게 됐는지 묻는 게 순서가 아니냐고, 사실은 내내 내게 묻고 싶은 말이 있지 않았냐고, 물어봐야만 할 게 있지 않냐고, 묻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묻고 따지고 싶었지만 목구멍으로 인공호흡기가 삽관이 돼 있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한동안은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말을 하는 게 싫었다. 특히 동성애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들은 그게 누구건 무슨 내용이건 이유 없이 패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다 똑같은 사랑이다, 아름다운 사랑이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뿐이다……
사랑은 정말 아름다운가.
내게 있어서 사랑은 한껏 달아올라 제어할 수 없이 사로잡혔다가 비로소 대상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추악하게 변질되어버리고야 마는 찰나의 상태에 불과했다. 그 불편한 진실을 나는 중환자실과 병실을 오가며 깨달았다.
3
그와 헤어진 이후로 꼬박 오년의 시간이 지났다. 서른한살의 나는 딱 삼십대처럼 보일 만큼 나이가 들었고, 작가가 되었으며, 더이상 그의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않는다. 아니 실은 일상의 많은 것들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일에 치여 살고 있었다.
또다시 일요일이 되었고, 나는 그의 편지를 떠올리며 무농약 사과를 깎고 있었다. 내 앞에는 몸무게 48킬로의 한 중년 여성이 고린도전서 3장 절을 필사하고 있었다. 엄마에게 사과의 꼭지 부분만 따서 넘겨주자, 먹기 싫다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내가 사과 싫다고 하지 않았니. 위가 쓰리다.
—위는 원래 시고 쓰리라고 있는 거야. 얼른 먹어야 간이 생겨.
—늙으면 간도 잘 안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 엄마가 의사도 하고 목사도 하고 다 해라.
엄마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엄마도 나도 의사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었다. 엄마가 사과를 먹는 대신 호수를 보고 싶다고 했다. 휠체어를 챙길까 했지만 엄마가 화를 내서 그만두었다.
막상 산책을 시작한 지 십분도 채 지나지 않아 엄마는 몹시 지쳐했다. 방금 전까지 호기롭던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어디라도 좀 앉자고 아우성이었다. 우리는 여느 때처럼 몽촌호 앞의 벤치에 앉았다. 엄마가 심호흡을 하며 내 허벅지에 손을 턱 얹었다. 우리 아들 다 컸네. 주사를 많이 맞아 혈관이 툭 불거진 엄마의 손이 보였다. 피부가 마른 골판지 같았다. 엄마의 모든 것들이 낙엽처럼 바스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주머니에서 쪽지 하나를 꺼냈다.
네가 너를 바라듯 주도 너를 바라고 있다.
잠시도 불쌍해질 틈을 주지 않는 재주가 있는 여자였다, 엄마는.
호수를 도는 동안 계속 주변을 살폈다. 엄마가 자리에 멈춰 서 숨을 고를 때마다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게 됐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자세히 훑었다. 산책하는 내내 그러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해 웃기다가, 막상 그가 나타나면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엄마에게 소개를 해야 하나. 반갑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모르는 척 지나가버려야 하나. 다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산책로에 190센티 가까이 되는 남자가 서 있다면, 놓쳤을 리가 없겠지.
작가가 되고 난 후 핸드폰 번호를 바꾸었다. 뭐 대단한 결심이 있어서는 아니었고 그냥 이전까지의 내 삶과 조금은 달라졌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클릭 몇번을 통해 내가 알지 못하는 번호가 되어버렸다. 그의 생각이 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010 81로 시작하는 그의 번호 뒷자리는 이제 희미해져버린 지 오래였으나, 나는 내내 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망각조차도 내게는 일종의 부자유스러운 상황으로 진입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동안 나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기다리고 무엇을 꿈꾸었던 것일까.
기이하게 생긴 조각들이 모여 있는 잔디밭의 벤치에 앉았다. 오년 전, 그와 만나기로 했던 그 장소, 조각 공원이었다. 그러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계속 뒤에 뭔가가 밟혔다. 고개를 돌리면 언제고 그가 서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 바보같이 왜 이러는지 나 자신조차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자 문득 등에 멘 가방 속에 두꺼운 봉투가 있다는 것이 떠올랐고, 그것이 종이뭉치가 아니라 벽돌이나 아령처럼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도 숱하게 많은 남자들을 만났었다. 가랑비에 아스팔트가 젖는 사랑, 뜨거운 사랑, 하룻밤 만에 사그라든 급한 사랑, 숱한 종류의 감정과 맞닥뜨리면서도 그만큼 깊게 빠져든 대상은 맹세코 없었다. 그보다 더 나은 사람들, 객관적인 기준으로 그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들을 만나도 언제나 변죽만 울리는 관계들을 이어갔다. 그가 나의 가장 뜨거운 조각들을 가져가버렸다는 사실을, 그로 말미암아 내 어떤 부분이 통째로 바뀌어버렸다는 것을 후에야,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엄마가 갑자기 벤치에서 일어나 언덕으로 천천히 걸어올라갔다. 나도 엄마를 뒤따라 걸었다. 낮은 언덕의 꼭대기까지 간 엄마는 갑자기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을 저녁의 올림픽공원. 마른 낙엽의 향긋한 냄새가 내 코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도 가방을 벗어 던지고 엄마의 앙상한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마치 다섯살짜리 꼬마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엄마 왜 맨바닥에 그냥 앉아. 잔디밭에 앉으면 유행성출혈열 걸린다고 엄마가 그랬잖아.
—내가 언제?
—나 열한살 때. 엄마 두번째 방통대 졸업식 날. 여기서 학사모 쓰고 엄마가 그랬어. 잔디밭에 맨살이 닿으면 온몸 구멍이란 구멍으로 피가 줄줄 나오는 병에 걸린다고. 쥐똥에 병균이 많아서 그렇다고.
—얘 좀 봐. 또 이런다. 내가 언제 그렇게 심한 말을 했다 그래.
—진짜야. 엄마는 잘 기억 못하잖아. 난 다 기억해. 그때 엄마가 그렇게 말해서 클 때까지 잔디밭을 엄청 무서워했다고. 풀에 닿지 않으려고 언제나 보도블록 쪽으로만 걸어 다녔어.
—정말? 나도 참. 애한테 별소리를 다 했구나.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우리 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잔디밭에 앉아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았다. 엄마가 지는 태양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아름답구나, 저무는 것들은.
—그런가?
—아들아, 나는 내가 되게 대범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뭔 소리야.
—예전부터 내가 좀 남자 같고 그랬잖니. 간도 크고 후회 같은 건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너를 낳고 보니까 그게 아닌 걸 알겠더라. 아기 때, 너를 안고 있으면 막 지갑이 뚱뚱한 것처럼 배가 부르고 행복하고 그랬어. 그래서 자꾸만 겁이 나더라. 다치거나 부서지거나 없어질까봐.
—뭐래.
—너 유치원 다닐 때였나, 한번은 너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 애가 유치원이 끝날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 집에 오지 않더라. 전화해보니 유치원 버스에도 타지 않았다고 하고. 친구 집에 간다고 했대. 난리가 났지. 신발만 대충 꿰어 신고 나와서 유치원에서부터 허겁지겁 너를 찾는데 멀리 네 뒷모습이 보였어. 나는 가만히 네 뒤를 따라갔다. 네가 두발쯤 걷다 자꾸만 멈춰 서기에 뭐 하나 봤더니, 거리에 있는 모든 가게 앞에 서서 일일이 보고 관찰하고, 때로는 만져도 보고 그러고 있더라.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그 모습을 뒤에서 보는데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덜컥 무섭더라. 네가 더이상 내가 아는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에. 네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네가 걷고 싶은 길을 너의 속도로 걷는 게, 너만의 세계를 가진 아이라는 게, 그렇게 섭섭하고 무서웠다.
—그때부터 산만했나봐, 나.
—그래서 너를 많이 괴롭혔던 것 같네. 간이 작아서. 너를 간장 종지처럼 좁은 내 품 안에 가둬놓고 싶었나보다.
엄마는 반쯤 잘려나가고 없는 간 부분을 만지며 씨익 웃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미소였다.
암이 재발하고 난 뒤, 엄마가 죽는 꿈을 자주 꿨다.
꿈에서 엄마의 차는 더이상 빨간 마티즈가 아닌 미국산 볼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차. 현실과 다른 것은 차뿐만이 아니었다. 엄마는 다 죽어가는 지금의 모습 대신 사십대의 팔팔하고 열정적이었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미국산 볼보를 탄 채 벼랑 끝으로 달려가는 엄마. 결국엔 낭떠러지로 추락해 산산조각이 난 자동차. 부서진 창밖으로 삐져나온 엄마의 손목. 엔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고, 불타는 차를 맹수들이 둘러싼다. 마치 고기라도 구워 먹는 것처럼. 차 안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삐져나온 그녀의 몸 위로 순식간에 꽃이 핀다. 푸른곰팡이 꽃. 꽃이 만개해 엄마의 몸을 뒤덮고 결국엔 모든 게 가려진다. 절벽 위에서 이 모든 것들을 바라보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나. 울었나. 웃었나. 아니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나.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나면 어김없이 새벽 다섯시. 나는 내 덩치에 비해 턱없이 좁은 엄마의 책상에 앉아 허리를 구부린 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에 실이 달린 것처럼, 마치 뇌가 없는 것처럼, 끝을 모르고 달리는 나의 문장. 그러다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훅 끼쳐들었다. 빨간 마티즈처럼 끝을 모르고 뻗어나가던 나의 문장들이 잠시 멈춰 선다.
그녀에게 나의 글쓰기가 어떤 의미가 될 것인가 생각하면 언제나 절벽 아래를 바라보는 것처럼 막막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나는 벌써 서른한살이고, 성인이 된 지도 벌써 십년이 넘었고, 그녀가 내 삶을 지연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누구보다도 성실히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한명의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 정도로 성장했다. 그녀는 그저 그녀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 나를 옥죌 의도가 없었고, 나 역시 그저 나로 존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똑같은 인간에 불과하다. 다만 운이 나빴을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며 암이나 곰팡이처럼, 지구의 자전이나 태양의 흑점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우주의 현상이다. 이런 것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자꾸만 그녀가 내 모든 문제들의 원인인 것만 같다. 살가죽만 남은 채 다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나 자신이 혐오스럽지만 그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온몸에 피를 쏟으며 죽어갈 것을 걱정하는 열한살의 나와, 엄마의 얘기를 써서 돈을 벌었던 스무살의 나, 그리고 내게 친절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에게 읽히고자 이렇게 끊임없이 원한에 사로잡혀 글을 쓰고 있는 서른한살의 내가 오늘 이 순간에 엄마의 앞에 앉아 있었다. 석양을 바라보는 엄마의 뒷모습만큼은 단단하고 아름다웠던 예전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불현듯 엄마가 그간 내가 발표한 소설을, 글을 모두 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엄마가 감상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를 안고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는데.
병이라는 것은 인간을 통째로 바꿔놓는다. 누구보다도 강건하고 언제나 앞만 보고 걷던 그녀가, 간지러운 소리라고는 할 줄을 모르던 그녀가 노을을 보며 저런 소리까지 하게 만든다. 그래서 자꾸만 나도 뭔가를 털어놓고 싶게 만들어버린다.
—엄마 있잖아, 그런데……
나도 모르게 입을 뗐는데, 다음 말을 차마 내뱉을 수가 없었다. 할 말이 너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는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이야, 엄마 있잖아,
단 한번이라도 내게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때 내 마음을 짓밟은 것에 대해서. 나를 이런 형태로 낳아놓고, 이런 방식으로 길러놓고, 그런 나를 밀어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에, 무지의 세계에 놔두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서, 제발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게 엄마의 본심이 아니었다는 것도, 누군가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알지만, 나는 엄마를, 당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
—뭘?
—정말 미안한데, 아마도 영영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얘가 갑자기 뚱딴지같이 뭔 소리래.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화장실.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멨다. 그리고 얼른 화장실 쪽으로 뛰어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습관처럼 장애인 화장실에 들어와 있었다. 나는 변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가방을 벗었다. 그 속에서 서류뭉치를 꺼내 손에 쥐었다. 종이 위에 삐뚤삐뚤한 내 글씨와, 그의 빨간 글씨가 겹쳐져 보였다. 손에 들린 종이뭉치를 두개로 나눠 찢었다. 종잇장 하나하나를 낱낱이 찢어 변기에 집어넣었다. 글씨가 물에 닿아 빨갛게 번졌다. 물을 내렸다. 종이들이 파문을 그리며 검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를 안고 있는 동안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았는데.
마치 우주를 안고 있는 것처럼.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울지 않았다. 그동안 울 시간은 충분했다. 종이가 모두 없어질 때까지 물 내리기를 반복한 나는 숨을 고른 뒤 빈 가방을 다시 둘러멨다.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엄마는 아예 잔디밭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을 보는 그녀의 표정은 누구보다도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어쩌면 내 앞에서 노을을 바라보는 저 사람도, 48킬로에 쉰아홉살의 그녀도 나와 비슷한 마음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라는 존재로 말미암아 인생이 예상처럼, 차트의 숫자처럼 차곡차곡 정리되지는 않으며, 오히려 가장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핏줄이 연결된 것처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존재가, 실은 커다란 미지의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인생의 어떤 시점에는 포기해야 하는 때가 온다는 것을.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생각을 멈추고, 고작 매일 지고 뜨는 태양 따위에 의미를 부여하며 미소 짓는 그녀를 그저 바라보는 일. 그녀의 죽음을 기다리는 일.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죽어버리기를 바라는 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