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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비평혁명의 정치사

 

 

프랜시스 멀헌 Francis Mulhern

영문학자, 문학비평가. 저서 『‘검토’지의 순간』(Moment of ‘Scrutiny’), 『현재는 오래 지속된다』(The Present Lasts a Long Time: Essays in Cultural Politics), 『문화/메타문화』(Culture/Metaculture) 등이 있음.

 

* 이 글의 원제는 “Critical Revolutions”이며, 『뉴 레프트 리뷰』(New Left Review) 2018년 3-4월호에 발표되었다. ⓒ Francis Mulhern 2018 / 한국어판 ⓒ 창비 2018

 

 

옮긴이의 말

이 평론은 북아일랜드 출신의 문학비평가인 프랜시스 멀헌이 조지프 노스(Joseph North)의 최근 저서 Literary Criticism: A Concise Political History(2017)에 대한 서평의 형식으로 쓴 글이다. 노스는 20세기 이후 영미권 문학연구가 혼란에 빠져 있고 좌파 대부분이 이를 오판해왔다는 일견 과격해 보이는 관점에서 현대 문학연구의 정치사를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본다. 멀헌은 이 책의 논점을 정리하고 논평하는 가운데 서구 비평의 위기를 진단하고 이를 극복할 실천적 방안을 모색하는 노스의 논의를 더 진척시키고자 하는데, ‘학문연구’가 문학연구를 지배하게 된 것이 문제이며 비평의 복원이 시급하다는 노스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면서도 학문연구와 비평의 이분법에는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는 가운데 지금까지의 진보적 문학연구의 패러다임을 어떻게 혁파해나갈 것인지, 그를 위한 문학적·사회적·실천적 조건들은 무엇인지 치밀하게 논증하려고 한다. 멀헌의 구체적인 논지에 대한 동의 여부는 독자의 몫이나, 비평이 기성 학문체제의 일부로 편입되어가면서 빚어지는 문제는 영미권에 국한된 현상은 아닐 것이다. 이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는 이 평론이 비평의 자리와 역할을 새롭게 사유하고자 하는 우리 평단의 과제에 의미있는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김영희(KAIST 교수)

 

이런 주장을 생각해보라. 지난 세기 대부분, 70년가량의 오랜 기간, 영미권의 전문적 문학연구의 역사적 자기이해는 근본적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지적 계보들이 왜곡되고 귀중한 인적자원들이 도외시되었으며, 우선순위를 오판하고 제휴관계를 오독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분야의 좌파 대부분이 이 역사적 상황 전체에 대해 잘못된 평가를 내려왔다. 조지프 노스는 그의 저서 『문학비평』에서 이렇게 주장하는데, 이 훔쳐온 제목에서부터 인습타파의 취지가 드러난다. ‘문학비평’은 불과 60년 전(원문에는 ‘ 40년 전’으로 되어 있으나 착오로 보아 바로잡는다 —옮긴이) 신비평(New Criticism)의 두 선도적 주창자가 출간한 ‘약사(略史)’의 제목이었고 지금도 그렇다.1 ‘간략한 정치적 역사’라는 부제에서 천명한 대로 이번 새 책의 다른 점은 ‘정치적’이라는 데 있으며, 따라서 이 책에서 제공하는 설명은 통상적인 지성사의 기준에서는 ‘빈약’하거나 심지어 뼈만 앙상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전략적 역사”를 자임하며, 그 작전지구인 “감수성의 지형”의 “주된 세력선들”(lines of force)을 밝히고자 한다. 이 책의 목적은 발본적 재구축을 염두에 두면서 “지난 세기부터 대다수 영어권의 학술적 문학비평을 지배해온 기본 패러다임들을 개괄적으로 신속하게 살펴보는” 데 있다.2

I. A. 리차즈(Richards)와 존 크로우 랜섬(John Crowe Ransom),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과 이소벨 암스트롱(Isobel Armstrong)에서부터 이브 쎄즈윅(Eve Sedgwick)과 프랑꼬 모레띠(Franco Moretti)에 이르기까지 이 문학적·정치적 풍경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백년 동안 3세대에 걸쳐 수행된 영미권 문학연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업에 관여한 인물들 반열에 손꼽힌다. 그러나 여기는 아무리 간략하게라도 개별 저작들에 대한 균형 잡힌 논의를 시도할 자리가 아니다. 노스가 거론하는 인물들은 “진정한 분석대상인 더 큰 패러다임들의 편리한 표상들”인데, 이런 표현은 독자들을 무장해제하는 만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노스의 선례를 따라 이 표상적 인물들이 그의 역사적 구도 속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주목할 뿐, 그의 논지의 기본 전제들의 성패와 직결된다고 보이는 한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들 개개인의 작업과 노스의 설명에 대해 더 논의하지 않을 작정이다.

노스는 두개의 담론 구성체와 1920년대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3부의 시퀀스를 식별해낸다. 두 구성체란 그가 말하는 패러다임들로, 즉 ‘학문연구’(scholarship)와 ‘비평’(criticism)이다. 이 중 ‘학문연구’는 충분한 역사적 근거가 있는 명칭이지만, 전문적 학술연구(specialized learning)라는 포괄적 관념과의 그릇된 연관은 떨쳐낼 필요가 있다. ‘학문연구’ 활동의 목표는 새로운 지식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문화에 관한 지식 생산으로서의 문학연구(literary study)”로, 그 계보는 문헌학자 키트리지(George Lyman Kittredge, 1860~ 1941, 하바드대학에 재직하며 문헌학 전통 속에서 셰익스피어, 초서, 민담 등을 연구했다 —옮긴이)와 1910년경 하바드대학에서부터 1980년대 신역사주의 및 그 후속 경향들까지 이어진다.3 이에 비해 ‘비평’은 개입적(interventionist) 실천이다. 그것의 목적은 감수성의 함양으로, 지배적 사회질서에서 자연스럽게 선호되는 것보다 “더 깊은 존재양식”을 열어감으로써 문화에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표상적 인물을 하나 꼽자면 F. R. 리비스(Leavis)일 것이다(또 한명은 노스의 역사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라이오널 트릴링Lionel Trilling이다). 두 패러다임에는 각기 다양한 내적 편차가 있었고 지금도 있지만, 문학연구의 근본적인 전략적 쟁점은 이 둘 사이의 대립이며, 제1차세계대전 이후 이 학문분야의 여정에서 세 시기를 구분 지어온 것도 바로 이 관계의 가변성이다.

첫번째 시기는 편의상 1914~45년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시기 학문적 문학연구의 지배적 양식은 문헌학이었고, 다시 이것은 명망과 권위를 누리던 고대언어 연구에서 영향을 받았다. 현대토착어 연구 주창자들은 대개 이(이상화된) 학문적 엄밀성의 전범들에 비추어 자신의 제안을 정당화해야 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자본주의의 국제적 위기 국면이어서, 새로이 부상하는 대조적 양식의 주장들이 우호적인 국지적 조건들에 힘입어 공명을 얻기도 했는데, 이 대조적 양식은 문화적으로는 참여적이며 기질적으로는 ‘과학적’이되 이 ‘과학성’은 문헌학적 실증주의의 통상적 절차와는 거리가 멀었다. 1920~30년대에 하나의 학문 형식으로 비평이 탄생했다. 이어서 전후 수십년의 장기 호황기에 대학교육이 크게 팽창하면서 비평이 제도적 정통성을 획득하고 문학연구는 비공식적 공동통치령이 되었다. 마찰이나 간헐적인 소규모 접전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제 학자(scholar)와 비평가는 공존하며 간혹은 혼종적 형태를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대 말경에는 이미 이 케인즈식 질서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신자유주의가 워싱턴과 런던에서 처음 대내적으로 정치적 승리를 거두며 모든 영역에서 사회적 관계의 시장화를 승인하는 새로운 헤게모니의 부상(浮上)을 알렸고, 이른바 대학의 자율성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1980년대는 일반적으로 ‘이론’(Theory)의 10년으로 기억되니, 새로운 개념과 방법의 열혈 추종자들이 본토의 본거지들을 에워싸거나 때로는 휩쓸고 다니기도 했는데, 대개 프랑스가 원산지인—푸꼬(M. Foucault), 데리다(J. Derrida), 부르디외(P. Bourdieu)가 3폭 제단화(祭壇畵)에 새겨진 세 인물이다—이 개념과 방법들은 새롭게 ‘정치적인’ 학문 실천의 최첨단으로 널리 환영받았다. 그러나 당시의 거대한 변화는 그 성격과 효과에서 완전히 달랐다. 새로 떠오른 패러다임은 각양각색의 “역사주의/맥락주의”적 실천으로, “문화에 관한 지식 생산으로서의 문학연구”의 우선성을 재천명하는 동시에 비평으로서의 문학연구의 소명에 힘을 불어넣었던 특유의 미학적 주장을 철회하였다. 그리고 종국에는 ‘꼼꼼히 읽기’(close reading)라는 핵심 실천도 도전을 받게 된다. 1920년대(혹은 더 오래전) 이후 처음으로 문학연구라는 학문은 그 양식에서 실질적인 단작(單作)체제가 되었다. 학자들이 승리한 것이다.4

 

 

케임브리지 학맥

 

이 역사 시퀀스에 대한 노스의 무대 설정은 간단치가 않고 간단할 수도 없다. 그의 무대배경은 어떨 때는 영국이고 어떨 때는 미국이다. ‘영미권’에 대한 그의 일반화는 뒤로 갈수록 대서양의 서쪽 해안(미국 동부지역 —옮긴이)에서 시작했다가 거기서 끝나든가, 그렇지 않더라도 그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특별히 두드러지는 곳이 하나 있는데, 단순히 ‘표상적인’ 것 이상의 힘을 가시적으로 보여준 그 지역의 두 정신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케임브리지는 익히 알려진 대로 이른바 ‘비평혁명’(Critical Revolution)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데, I. A. 리차즈가 맡은 배역은 지금은 그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지적인 면에서 결정적인 혁신가의 역할이다.5 리차즈는 노스 논의의 정신적 중심에 자리한다. 노스가 바라보는 리차즈는 이해관계를 벗어난 자족적 객체들의 영역이라는 칸트적 미학 개념을 거부하는 동시에 그에 상응하여 미적 경험과 여타 인간적 경험의 연속성을 강조한 사람이며, 따라서 읽기와 그 맥락을 관심의 중심에 두면서—향후 문학연구의 중심 절차로 일반화될—읽기의 진단과 처방으로 ‘실제비평’(Practical Criticism)을 고안해낸 사람이다. 실제로 그의 중요성은 역사적이자 잠재적이라고 노스는 주장한다. 리차즈는 “예술의 가치”를 지향하는 일종의 “응용심리학”을 전략적 출발점으로 삼았는데 이 사실은 잊힌 채, 신비평의 칸트적 계율들과 정전성에 대한 리비스적 고착이 미학적 이성 그 자체의 요체(要諦)로 간주되게 되었다. 물론 나중에는 이것들 또한 바로 이런 이유에서 거부당하게 된다. 그러나 리차즈의 이 출발점은 여전히 새로운 비평적 전환을 위한 하나의 영감으로 남아 있다.

두번째 정신인 레이먼드 윌리엄즈(Raymond Williams)는 익숙한 존재인데 이 책에서는 낯선 모습으로 그려진다. 노스가 그에게 맡긴 배역은 새 패러다임의 선구자 역할이다. 즉 문학연구를 엄밀한 역사주의적·맥락주의적 관점에서 원칙적으로 미학 이데올로기에 거리를 두며 문화적 지식 추구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윌리엄즈는 “해체 불가능한 역사적인 사회적 총체”의 실체성을 주장하였다. 이것이 그의 『맑스주의와 문학』(Marxism and Literature, 1977)의 큰 주제로, 미학이란 그 과정으로부터 비합법적으로 관념화하는 추상이라고 보며 부정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윌리엄즈도 얼마 후 『정치와 문학』(Politics and Letters)에서 『뉴 레프트 리뷰』 대담자들한테 답하는 가운데 글쓰기의 역사적 영역 가운데 ‘미학적’인 것으로 받아들여도 합당한 가시적 차이와 연속성들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한 적은 있다. 그러나 이는 이렇다 할 결과가 수반되지 않은 일과성 발언에 그치고, 무조건적 거부가 선진적 입장의 표준이 되었다. 이런 ‘지역적’ 실천을 한걸음 더 밀고 나간 윌리엄즈는 리차즈의 실제비평을 리비스의 과장된 ‘판단의 장면’을 통해 소급적으로 읽게 되었고, 이렇게 오독하면서 ‘비평’ 또한 단연코 거부되어야 마땅하다고 결론지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역사학이자 이론이자 사회학이되 비평은 아닌 “문화분석으로서의 문학연구”를 재구성해냈다. 우파와 좌파 모두 공유하는 통상적 설명에 따르면 이런 주장들이야말로 “20세기 중엽 비평의 엘리트주의에 대한 국지적 승리”를 만들어낸 한 진보주의운동의 전위적 표현이었다. 그러나 노스는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라고 주장한다.

 

1970년대 후반 및 1980년대 초반에 이루어진 현재의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신자유주의 시기에 일어난 좌파의 광범위한 퇴각의 징후이자 따라서 우파의 전반적 승리의 작은 일부분이었다.6

 

새 질서의 급진주의는 대체로 말에 그쳤고 허장성세인 경우도 많았다. 바람직한 변화를 위해 감수성 영역에 개입하려는 야망은 “관찰” 내지 문화적 증후학의 작업에 밀려났고, 노스의 리카르도(Ricardo)풍 표현으로는 “처방” 없는 “진단”에 머문 셈이다. 새 패러다임은 신자유주의적 대학에서 가장 쉽게 다룰 수 있는 유형의 산출물에 맞추어졌으니, 다름 아닌 실증적 지식으로, 이 지식은 간혹 정량화되기까지 하며, ‘급진적’일지는 몰라도 비평적이지는 않다.

 

 

역사주의·맥락주의를 넘어서?

 

그 모든 급진적 자세에도 불구하고 역사주의·맥락주의란 갈수록 경직되어가는 대학 환경에 대한 방어적 적응이라는 것이 노스의 견해인데, 가차없는 판단임은 분명하나 또한 근본적으로 한정적인 판단이기도 하다. 이렇게만 말하고 만다면 여기에 작동하는 인과성이 표현적 인과성이 아니라 우발적 인과성이라는 점과 학문연구 패러다임 특유의 해법이 오늘날 문학연구의 충동을 다 담아내지는 못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스는 이 시기의 공통감각을 뒤로하고 그 “비평적 무의식”(critical unconscious)으로 넘어간다. 이런 식으로 프레드릭 제임슨의 대표 주제(제임슨의 1981년 저작 『정치적 무의식: 사회적 상징 행위로서의 서사』 Political Unconscious: Narrative as a Socially Symbolic Act에 대한 언급 —옮긴이)를 변용하고 지배적 문화구성체, 잔여적 문화구성체, 부상하는 문화구성체라는 윌리엄즈의 구분을 방법적 영감으로 삼으면서, 그는 현재 위세를 떨치고 있는 역사주의의 칼날을 역사주의에 되돌려주면서, 역사주의 내부의 다종다양한 비판적 경향들을 되짚어보는 가운데 새 출발의 조짐을 찾는다. 그는 크게 세가지의 이반(離叛) 흐름을 구분해낸다.

‘신미학주의’(New Aestheticism) 내지 ‘신형식주의’(New Formalism)와 연관된 한 흐름은 새 패러다임에서 평가절하된 비평적 가치들, 즉 식별(discrimination)의 포괄적 가치이자 규범인 미학과 미학적 경험의 내재적 요소인 즐거움을 다시 강조하고자 하는데, 과거의 향수에 불과한 경우도 많지만 진정으로 새롭고 도전적인 경우도 있다. 이소벨 암스트롱의 ‘급진적 미학’(radical aesthetic)이 그 모범적인 예다. 첫번째와 겹치는 두번째 흐름은 지배적인 읽기 관행—‘징후적’, ‘편집증적’, 혹은 노스가 선호하는 표현으로는 ‘진단적’ 읽기—에 불만을 표명하면서, 더 친밀하고 긍정적인 참여 방식, 즉 ‘복구적’(reparative) 읽기나 새로 갱신된 협동적인 ‘꼼꼼히’ 읽기를 주창하고 또한 문학적 경험에서 정동(情動, affect)의 계기에 제대로 주목할 것을 주장한다. 이브 쎄즈윅, D. A. 밀러(Miller), 로런 벌란트(Lauren Berlant)가 각기 이 대안들을 제안한다. 끝으로, 학문연구 패러다임 자체의 심장부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보이는 경향이 있는데, 노스는 점점 더 큰 규모의 역사적 척도로 혹은 점점 더 먼 시간대들을 한데 포괄하는 역사적 척도로 역사주의적 야망을 실천하려는 집단적 충동을 보여주는 일군의 사례를 제시한다. 노스는 이 경향을 “확장을 향한 야망”이라고 부르며 그 예견된 순환적 성격을 지적하는데, 곧 이것이 탈주보다는 좌절을 드러내는 현상으로, 갈수록 심각한 전문화를 자초하고 있는 이 학문분야에 과거 비평에서 보여주었던 일반론의 대체재 역할을 할 뿐이라는 말이다. 이 점에서 이 흐름은 미학과 읽기의 새 경향들의 몸짓을 되풀이하는 셈이다. 이것들이 수행하는 국지적 비판과 수정 역시 징후적이니, 지배적 패러다임 전체에 대한 불만을 안전하게 돌려 표출하는 것이자 쓸 만한 비평 프로그램의 역사적인 상실을 드러내는 징후이다.

비평 프로그램의 상실을 부추기는 일반적 조건은 영미 대학에서 신자유주의의 부상이었고, 어떤 방식의 복원이든 복원의 가능성 역시 자본의 윤리적·정치적 질서의 근본적인 세력관계에 따라 촉진되거나 제한되거나 할 것이다. 노스는 향후의 가능한 조건과 가능성들을 추정하면서 책을 끝맺는다. 그는 신자본주의의 교조적 도취 국면은 이미 끝났다고 주장하면서도 자본주의로부터의 우발적 탈출은 물론이고 포괄적 복지주의로의 복귀라는 전략적 선택지도 배제한다. 그 숙명적 귀결은 앞으로 어떤 목표를 내세우더라도 교양교육(liberal education)의 역사적 근거, 즉 “충성스러운 반대파”(loyal opposition, 야당)로서의 인문학에 상당한 사회적 투자를 할 정당성은 영구히 대폭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평적 사명의 갱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최악의 사태로는, 학문연구 패러다임이 문학연구에 대한 지배를 완성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더 개연성이 높은 것은 대학의 이해관계들의 현재 균형상태를 그만하면 괜찮은 우선순위의 질서로 받아들이게 될 가능성이다. 곧 노스의 주목할 만한 표현으로는 “동원” 없는 “근대화”이다. 동시에, 씁쓸한 역설이지만, 다름 아닌 자본에 의해 제시된 눈에 띄는 기회들이 있다. 즉 때가 되면 착취할 먹잇감으로 자본 쪽에서 기분 좋게 권장하는, 그러나 다른 용도들로 전환될 수도 있는 “집단경작지”인 커먼즈(commons, 사적 소유의 대상이 아닌 공공재로의 문화적·물질적 자원 —옮긴이)라든가 일종의 구식 교양교육의 미덕이라는 틈새상품 공급에 대한 신진 기업 엘리트들의 수요가 있는데, 이것들은 이런저런 종류의 “발판”이 될 수도 있다. 이것들이 정말 기회라면 이 기회들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어낼지는 도덕적이고 실천적인 또다른 종류의 자원, 즉 “이 분야 바깥의 좌파와의 제휴”에 달려 있을 것이다. “문학연구에서 비평을 살려내는 운동은 궁극적으로 더 전반적인 전진 운동의 더 광범위한 성패에 달려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7

 

 

지식의 위상

 

노스의 책은 별로 익숙하지 않은 사례에 대해 익숙한 판단을 내리도록 촉발하며, 그 점에서 전체적으로 볼 때 동종의 책 가운데 전범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의 상황을 그 역사적 구성 속에서 이해하고 새로 부상하는 개연성들을 현실주의적이자 진정으로 비평적인—즉 비실용적인—견지에서 평가하는 데 철저히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좌파 문화정치의 모범적인 기도(企圖)다. 또한 그 솔직 간명한 태도에서도 모범적이니, 종종 이 학문분야의 전문적 글쓰기의 언술을 망가뜨리는, 내부자끼리만 통하는 의무적인 수사(修辭)를 시원하게 떨쳐낸다. 이 책은 역사주의·맥락주의에 따른 저작이면서—그러면서도 역사주의·맥락주의를 비판하는 것을 역설적이라 볼 필요는 없다—이 부류의 두가지 기본적 약점, 즉 과잉 전문화와 특정 유형의 학계 ‘정치’라는 사이비 행동주의에서 용케 벗어난다. 문장의 이런 특징들은 축복이지만 필수요건이기도 하다. 『문학비평』은 그 제목에서 자임하듯, 오늘날 문학문화의 정치학에 진지한 실천적 관심을 가진 학계 안팎의 모든 사람이 읽고 숙고해보아야 할 매우 일반적인 함의를 지닌 책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책은 논쟁적 지점이 풍부한 저작이기도 한데, 그것은 전문가적 기득권을 위기로 몰아넣기 때문만이 아니다. 노스의 논의는 문학연구의 성격과 역사에 관한 몇몇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을 건드리는데, 이 문제들은 모두 이런저런 형태의 지식의 위상과 관련된다. 첫번째 문제는 그의 분야에서 일어난 ‘문학연구’에서 ‘문화분석’으로의 역사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제기된다. 여러차례 반복되고 그 자체로는 논쟁적이지 않아 보이지만 이것이야말로 노스의 설명을 받쳐주는 근본 인식 중 하나, 더 정확하게는 하나 같은 둘이다. 이 전환은 단순 단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상의 변화에 주목 방식의 변화가 수반되니, 문학은 문화 속으로 녹아들고, 그 과정에서 진정한 지식 대상—축소된 엄밀한 의미의 징후—의 위상을 공유하게 된다. 이런 발상들의 연쇄가 노스 담론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바람에 명백한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그 요소들을 결합하는 것이 무엇이든 논리적 필연성은 아니라는 점 말이다. 어느 요소도 다른 요소들에 필연적으로 따라오지 않는다. 그리고 이때 두드러지는 것은 이 작은 무리의 가능성들 가운데 빠진 요소인데, 한가지 가능성이(역사적) 사실 내지(강령적) 가치로서 미리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문학분석’ 혹은 문학적인 것의 지식으로서의 문학연구가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런 지식은 지나치게 ‘문학적’인 지식이 아니겠냐고 혹자는 말할 것이다. 실제로 운율학(prosody)과 수사학 연구가 지난 수십년간 ‘문학분석’의 대명사가 되어왔으며, 좀더 뒤에 나온 구조주의 전통의 널리 알려진 빼어난 사례로는 제라르 주네뜨(Gérard Genette)의 ‘서사 가능성 체계’ 규명을 꼽을 수 있겠다.8 그러나 역사주의·맥락주의 연구 가운데 일견 그들과 완전히 대조적인 유형의 작업들 또한 ‘문학분석’에 철저히 초점을 맞춘 것이랄 수 있다. 마샤두(Machado, 1839~ 1908, 브라질 소설가 —옮긴이)의 『동 까즈무후』(Dom Casmurro)에 대한 호베르뚜 슈바르스(Roberto Schwarz)의 ‘변증법적’ 연구가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저 브라질에서 나온 또 하나의 징후가 아니라 다른 소설, 나아가 새로운 소설이다.9 여기에는 분명 문학적 지식주장들이 담겨 있으며, 이런 것들이 자신의 목적에 중심이 된다고 여기지 않는 진지하고 유능한 ‘비평’이란 상상하기 어렵다. 심지어 감수성의 함양과 관련된 목적이라 해도 말이다. 그리고 실증적 학문의 차원에서 전제되는 모든 것들—폭넓은 저작물에 대한 지속적 관심이라든가 우리가 ‘독서’로 줄여 부르는 복합기술적 활동의 실천—을 수반하는 문화 해독력의 훈련과 분리된 비평적 목적이란 상상하기 어렵다. 리비스의 저작처럼 전문학술적인 면이 가장 덜한 경우에도 비평은 그 주창자들이 인정하고 싶어하는 것 이상으로—사전(辭典)에서부터 시작되는—학문연구의 노동에 의존해왔으며, 리비스라는 이름의 소환이 우리에게 또한 상기시키듯, 문화 징후학은 ‘학자’들만의 완전한 독점물도 아니었다. 적어도 이런 만큼은 지식은 비평적 전진의 필수 기반이지 장애물이 아니다.

 

 

학자-비평가

 

영문학 연구의 집단적 삶, 자원과 의무를 공유하는 동시에 각축하는 목표와 수단을 지닌 하나의 작업집단으로서 그것의 역사 또한 좀더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노스는 3부 시퀀스를 설정한다. 1부는 문헌학적 노력의 구세계로, 두 세계대전 사이 기간에 새로운 스타일의 비평의 도전에 봉착한다. 1945년 이후로는 30년간의 공동주권기가 이어지고, 그리고 1970년대 후반 이후에는 역사주의·맥락주의 패러다임이라는 새로이 부상하는 학문 경향이 형성되어 오늘날까지 주도하고 있다. 이같은 역사 구성을 지지할 말은 많다. 그러나 조금만 시각을 바꾸어도 평가가 달라진다. 학자들이 승리했다고 노스는 딱 잘라 공표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약화된 적은 한번도 없는 지배력을 갱신했다는 상대적 의미에서만 그렇다. 지식의 패러다임은 내내 지배력을 유지해왔으니, 이는 PMLAELH나 『영문학연구 리뷰』(Review of English Studies)의 파일들을 훑어보기만 해도 금방 확인될 일이다.10 노스의 ‘편리한 표상들’ 모음에서 빠진 가장 의미심장한 사례를 하나 든다면 프레드릭 윌스 베이트슨(Frederick Wilse Bateson)인데, 잠시 그를 떠올려보면 역사 읽기가 어떻게 달라질지 짐작할 수 있다.11 편의상 기점을 잡자면 1951년 정초(正初)로, 이때 베이트슨은 새로운 문학연구 학술지 『비평집』(Essays in Criticism)을 창간했다. 제목은 아놀드(M. Arnold)를 연상시키지만(19세기 영국의 문학비평가인 매슈 아놀드가 1885년과 1888년에 출간한 저서 제목과 같다 —옮긴이), 베이트슨의 기획의 특수한 목적은 그가 “학자-비평가”(scholar-critic)라 부른 혼종적 전문가 이상형의 작업을 북돋는 것이다. 이는 『검토』(Scrutiny)지 및 그 주역인 F. R. 리비스와 확연하게 대비되는데, 그는 15년 전 처음으로 리비스와의 차이를 분명히 한 바 있다. 그러나 베이트슨의 명명 순서에는 단호한 뜻이 담겨 있었으니, 좋은 학자-비평가는 무엇보다도 우선 좋은 학자여야 했다. 좋은 비평가-학자는 매우 드물었다.

그후 몇년 안 되어 『검토』지는 침몰했고(이 계간지는 1932년 창간되어 1953년 폐간되었다 —옮긴이), 『비평집』은 영문학연구의 일반적 주류에서 평판이 높은 학술지로 긴 여정에 올랐다. 이 대조적인 두 운명이 상징하는 바는 명백해 보인다. 『비평집』은 근대화 기획—‘비평혁명’의 통제된 흡수—이자 학문연구의 오래된 방식으로 사태를 수습하는 복구기구였다. 이런 사태전환은 이때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일이 30년 후 다시 벌어지니, ‘이론’의 소동이 가라앉기 시작하고 신역사주의가 출현하였다. 반세기 간격을 두고 일어난 두차례의 갈등 국면마다 당대의 학문 규범들이—‘비평’, 그다음에는 ‘이론’에 의해—공격을 당하고 그 해법은 광의의 문학사, 즉 학문연구의 실증적 지식을 기본값으로 설정하는 것이었다.

이런 지식이 20세기 내내 문학연구에서 조사연구(research)의 요체가 되어왔고, 이 분야에서 각축하는 선택지들을 가늠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되는 경우도 잦았다. 이 시금석은 많은 경우 혼란스럽게 해석되고 보수적인 사회적 이해관계에 공감하는 가운데 폐쇄적으로 적용되었지만, 진보적 출발의 공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20세기 이래 문학연구의 수십년의 시간들과 제도적 공간들 모두에서 그 누적된 기록은 매우 다종다양하고 어지러워, ‘지식’이라는 단수명사부터가 이미 오해를 낳는다. 베이트슨이 리비스와 주고받은 언쟁에서 입증되듯12 학문연구와 비평이라는 뚜렷이 다른 활동들은 양극화될 때도 있지만, 정반대로 평안하게 생산적으로 공존한 경우들도 있다.13 두 패러다임 모두, 내부 갈등이 최소한 양자 간의 갈등만큼 중요했고 그 전반적 의미는 더 컸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에서 현상을 교란하는 선제공격은 좌파로부터 나왔다.

‘지식’ 패러다임 내부부터 보면, 1930년대 처음으로 표출된 좌파 최초의 도전은 맑스주의의 도전이었다. 그러나 사회적 지식 영역 전체를 재구성할 것을 주장했다는 그 객관적 위상에도 불구하고 이 이론적·정치적 존재는 노스의 설명에서는 이상할 만큼 가벼운 족적만 남긴다. 이는 한편으로는 영미 학자들이 읽고 가르치던 것을 배제한 채 그들의 출판물에만 주목하는 절차에서,14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 구성의 원리로서 ‘패러다임’이 갖는 동질화 경향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어쨌든 그 덕분에, 이 분야에서 이루어진 맑스주의의 선제공격의 시점을—레이먼드 윌리엄즈의 경우에는 25년씩이나—실질적으로 늦춰 잡을 수 있게 된다. 노스의 설명에 등장하는 윌리엄즈는 본질적으로 『맑스주의와 문학』의 저자이다. 그러나 이 책은 상대적으로 뒤늦게 나온 총괄작업으로, 그 핵심적인 이론적 관심은 1950년대 후반 및 『장구한 혁명』(The Long Revolution, 1961)까지, 나아가 『비평집』의 편집자로 다름 아닌 베이트슨과 협업을 시험해본 더 이전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윌리엄즈는 『비평집』 창간 초기인 50년대 초반에 편집진에서 활동한 바 있다 —옮긴이)

윌리엄즈의 ‘역사주의·맥락주의’로의 전환은—그런 성격의 전환이었음은 분명하다—전쟁 시기에 씨앗이 뿌려진 문제들에 대해 일찌감치 이론적·역사적 작업을 재개한 것으로, 대서양 문화권 전반의 신자유주의적 전환보다 거의 한 세대 앞선 50년대 말에 첫번째 주요 발언을 선보였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유능하고 일관된 사적 유물론으로의 전환이었으니, 정치적으로 공산주의자를 자임하고 정규대학 바깥에서 성인교육에 힘써온 문필가에 의한 개입이었다. 그리고 이는 또한 비평적 전환이었으니, 기성의 지식 질서에 대한 함의에서도 그렇지만, 노스의 리차즈 옹호를 읽는 모든 독자나 좀더 근자의 비(非)칸트적인 ‘급진적 미학’ 주창자들도 공감할 만한 각도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장구한 혁명』은 ‘창조적 정신’이라는 제목의 장(章)으로 시작하며, 이 장에서 예술적이든 아니든 “특별한” 혹은 “특권적인 보기〔視覺, seeing〕”는 없다는 명제에 집중한다. 모든 보기는 “일상적”이며 어떤 보기도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보는 방식”은 의사소통과 배움의 과정에서 형성되고 재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메타이론적 고찰은 모든 종류의 매체를 포괄하는 문학사·문화사를 걸쳐(총 8편의) 소설 집필 및 지적 저널리즘 등 빼어나게 실천적인 활동들에까지 펼쳐진 그의 작업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 위치한다. 반대편 끝에 빽빽이 들어선 작업으로는 일간지 『가디언』(The Guardian)에 기고한 200여편의 서평과 BBC 방송국의 주간지 『리스너』(The Listener)에 연재한 60편의 월례 TV 칼럼이 있다. 이런 작업 기록에는 고립된 학문연구도 없고 전문적 활동을 정치로 윤색해 부르는 습관도 없다. 맑스의 정신에 따라 작업한 윌리엄즈는 지식이 그 자체로 정치적 개입은 아니지만 지식 없이는 올바른 판단에 입각한 전략이나 전술이 있을 수 없음을 잘 알았다. 이 지식은 실증적이기도 하고 사변적(speculative)이기도 하니, 유토피아소설 및 미래소설에 대해 70년대 후반에 쓴 중요한 평론들이 증거하듯,15 문학 비평가와 학자 모두 ‘상상력’이라 불러온 것까지 망라한다. 이 윌리엄즈, 스스로를 『맑스주의와 문학』의 추상화된 저자보다는 그저 ‘쓰는 자’(writer)로 여긴 윌리엄즈야말로 노스가 지금 요청하고 있는 급진적인 지적 실천의 적절한 표상이 될 만하다.

 

 

미학적 회피

 

물론 이는 한가지 중요한 점에서는 그릇된 선택이 될 것이다. 윌리엄즈는 미학 개념에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데, 노스에게는 이 개념이야말로 감수성의 차원에, 급진적 비평이 작업에 임하는 지반에 필요한 요소—어쩌면 필수적인 요소—이다. 가장 중요한 단어들은 그 성격상 정의(定義)를 거부한다고 F. R. 리비스는 말하곤 했는데, 적어도 이 점에서 노스는 그를 따른다. ‘미학’(aesthetics)이라는 용어는 그의 색인에서 가장 긴 기입 세목을 거느리고 있지만, 본문 어디에서도 확연하고 안정된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다. 그는 리차즈가 개략적으로 보여주었던 유형의 비(非)칸트적인 ‘유물론적’ 미학을 주창하는데, 사용된 교육 자료가 예술적 자료임을 인정한다는 단순한 의미라면 모르겠으나 그 점 말고는 그 ‘응용심리학’이 어째서 ‘미학’에 해당되는지가 불분명하다. 문학적인 것과 연결 짓는 강한 연상은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그런 읽기의 근거는 종종 생각하는 것만큼 명백하지는 않다. “미적 교육”의 성격을 잠깐 지나가면서 거론하는 대목에서는 자기인식의 함양과 아울러 낯익은 정서유발 성향이 슬쩍 암시된다. 한 대목에서 잠시 노스는 “이 모든 몸짓들이 얼마나 그저 몸짓에 불과한지” 인정하기도 한다.16 전반적인 논의의 전개과정을 보면, 미학 범주는 용처가 없는 잉여적 개념으로 사실상 전락하였으되 그 오랜 연상들의 흔적 속에서, 그리고 지난 시기의 잔재에 해당하는 ‘잔여적’ 용어가 계속 논의 속에 남아 있게 해주는 지속적인 신망 덕분에, 계속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노스의 겸손은 과도하다. 여기서 이런 연상들을 통합하는 특질은 지식과의 대조, 즉 이제는 일차적으로 문학연구의 이론적·경험적 지식주장이 아니라 ‘허구’(fiction)라 불리는 일반적인 현상의 특징을 이루는 지식과의 관계다. 변신에 능한 해묵은 ‘문학’이나 좀더 엄밀한 ‘시적인 것’—이것이 아마도 언어에서 ‘미적인 것’의 심급에 가장 근접한 것이리라—보다는 ‘허구’야말로 노스가 추구하는 종류의 실천, 다시 말해 발견에 헌신하며 또한 주관성에 차이를 만들어내는 데 헌신하는 실천의 골간적 범주가 되어야 할 것이다. 비모순율을 유예하는 가운데 인식론적 탈구(epistemological dislocation)를 빚어낸다는 점에서 하나의 담론 양식으로서 허구성은 합리적 문화의 타자이되, 생기론(生氣論, vitalism, 생명현상은 자연법칙이나 물질적 요인과 다른 독자적 요인을 지닌다는 설 —옮긴이) 등의 반지성적 주장들을 결코 용인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설적인 사구논리(四句論理, tetralemma, 고대 인도의 논리학에서 각 명제에 네가지 가능태를 설정한 것 —옮긴이)의 실현으로 볼 수도 있다. 이 논리학의 격(格, figure)에서 진술은 ⑴참 ⑵거짓 ⑶참이자 거짓 ⑷참도 거짓도 아님일 수 있으며, 이 네가지 상태의 실질적으로 무한한 조합이 원칙적으로는 동시에 일어난다.

이런 논리를 구현하는 텍스트 형식들이란 ‘문학적인 것’의 특징적 현상인데도 교양 프로그램이 이것들을 분석하고 해석할 능력을 독자에게 갖춰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결함을 지닌 프로그램이며 ‘감상’이라는 교양인의 표지 획득 과정의 최신판에 불과하다. 사실 그러한 분석과 해석 능력이야말로 비평교육에서 개발될 다른 능력들 못지않게 ‘꼼꼼히 읽기’의 목적임이 분명하니, ‘꼼꼼히 읽기’의 기본 함의 가운데 하나는 그야말로 기울여야 할 주목을 기울이는 일이다. 비평의 문제를 ‘허구적인 것’의 공간의 중심으로 끌고 오는 것은 ‘감수성’에 대한 작업의 가치를 깎아내림이 아니라, 타당한 지식이든 아니든 지식이 모든 문화에서 차지하는 불가피한 역할을 비평적 상식의 대세에 반하여 강조함이다. 허구들이 수사로 작동하는 방식과 맥락을 역사 속에서 이해하는 데 사용되는 개념적 도식들뿐 아니라, 허구들 자체의 창안들과 그 허구들이 제시하는 성찰들 속에 의도된 개념적 도식들도 지식인 것이다.

 

 

실천적 의제?

 

새 비평 패러다임의 기본원칙들 및 그것과 기성의 지배적인 학문연구와의 관계를 둘러싼 모든 논란 너머에는 실행의 문제가 자리한다. 노스는 과감한 출발, ‘급진적’이라고 불릴 만한 출발을 고대한다. 그러면서도 그 필연적으로 실천적인, ‘행동주의적’ 면모 또한 강조하니, 이것이 결여된 선제공격이란 현실세계의 주체성 정치에서 효력 없는 또 하나의 몸짓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서 세번째 요망사항으로 그는 현실주의적 사태 판단을 지향한다. “비평의 미래”에 대한 그의 결론적인 생각을 보면, 애당초 형성되거나 길게 지속되리라 기대하기 힘들 만큼 아주 예외적인 여건에서라면 몰라도, 하나의 응집된 구도 속에서 이 세 요건을 모두 존중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설령 문학 교수들이 노스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덜 각양각색이거나 실리적이고 그래서 교육과 연구의 모든 상충되는 우선사항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망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더 많다 하더라도, 새 패러다임이 제대로 날아오르기 어렵게 만드는 일반적인 강력한 이유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하나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 시기부터 물려 내려온, 그리고 제대군인원호법이나 20년 후(원문에는 ‘ 10년 후’로 되어 있다 —옮긴이) 영국의 로빈스(Robbins) 개혁과 같은 조치들(1944년 미국의 제대군인원호법은 제대군인의 중고등교육 경비 지원을 통해, 1963년 로빈스 보고서는 고등교육 확대를 통해 대학교육의 저변을 넓혔다 —옮긴이)에 의해 더 민주화되었던 교양교육 처방이 권위를 상실했다는 점이다. 1945년 이후 수십년 동안 선호된 정책들에서 목적성과 타성의 비율이 어땠는지는 이견의 여지가 있지만—노스는 목적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같다—1980년대부터 대학의 변화를 추동해온 의식적 개편의 힘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늘날 대학의—이미 자리 잡지 않은 곳에서도 분명히 형성 중인—기풍은 자유로움 없는 자유주의의 기풍이며, 여기서 문학연구와 인문학은 전반적으로 그 역사적 근거를 아직 전부까지는 아니라도 대부분 상실했다. 시장이 잠식해오는데다 시장이 주장하는 필수요소들을 교수진에게 해석해주는 관료화된 경영진이 결합되면서, 교수진을 보호해주던 틈새 영역이 줄어들고 있다.(이 시기 주된 예외는 문예창작학Creative Writing으로, 많은 조롱을 받은 ‘연성’ 인문학이지만 실은 ‘경성’이니, 꿈의 거래는 수익성이 높기 때문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필사적인 희망처럼 노스는 인문학의 고급품시장 공급이 그가 촉구하는 것 중 적어도 일부에는 구제책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피력하나, 이런 공급은 조종되고 그 수요는 주로 특권의 표지들—품격에 대한 인습적 인식, 오래된 벽돌건물의 고색창연함, 낭만적·몽환적 매력(stardust)—에 치중될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이런 귀결은 아이비리그라든가 다른 나라의 유수한 대학들에는 쓸 만할지 모르나, 현금과 지원의 만성 결핍에 시달리는 공립대학들의 예산삭감과 폐쇄를 막는 데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할 것이며, 실제로도 아무 한 일이 없다.

역사적 개연성들을 예측하고 점검할 때 노스는 공급 측면의 제도적 특권에는 아무런 무게를 두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들에서 그는 대학에서 “엄밀한 의미의 비평을 위한 패러다임과 같은 것이 발판을 마련하게 되”고 새로 부상하는 정치조건들이 좀더 많은 기동 공간을 여는 상황을 상상할 제도적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현재 “문학연구가 영어권에서 엄밀한 의미의 좌파가 제도적 발판 같은 것을 갖고 있는 상대적으로 드문 몇 장소 가운데 하나로 여전히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이같은 현재 상황을 앞서 말한 발판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 급진성은 대개 수사에 불과하며 지적 승리도 실속 없는 승리일 뿐이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급진적인 형태의 비평 패러다임이 발판을 얻게 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 노스는 이 비평이 다뤄야 할 넓은 범위를 강조하며, 그리고 “엄격한 새 교수법과 함께 명료하고 일관된 리서치 프로그램”, 지금 나타나는 “대항적 흐름들”의 새로운 “지적 종합”, ”다양한 학문적 거점들과 자원들의 창조 혹은 방향전환” 등 기본적인 필수요건들을 열거하는 것을 보면 그의 기획이 요구하는 것은 ‘발판’ 이상임이 분명하다. 그러니 발판 속의 발판을 마련하는 정도로는 더더욱 부족한데, 사실 이것만 해도 아직은 하나의 목표이지 성취된 시작이 아니다. 결국 필요한 것은 문학연구의 재정립이고, 저처럼 발판 마련만 반복하는 것은 그것대로 퇴행적 기미가 있다. 그의 사업설명서에는 계산보다는 희망이 더 많이 들어 있으며, 그마저 두어 단락 사이에 더 어두운 색조로 바뀐다. 노스가 “자유주의적이기보다 진정으로 급진적인 주체형성기획이 만일 조금이라도 광범위하게 확립된다면 자초하게 될 반응”을 상상하면서 색조가 달라지는 것이다. 새 패러다임에서 “어떤 것이든 진정으로 저항적인 과업”에 성공할 조건은 “더 폭넓은 전진 운동과의 강력하고 유연한 절합(節合)”일 것이라고 노스는 말하는데, “정말로 그런 것이 이루어진다면”이라고 덧붙인다.17 다시 한번, 담대하고 명쾌한 개입주의 실천의 전망이 확 타올랐다가 이내 스러지고 만다. 의지의 낙관주의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리비스의 교훈

 

‘필사적 낙관주의’(desperate optimism)는 『검토』지 말년에 그들 그룹에서 통용되던 준(準)그람시(Gramsci)적 표현으로(그람시의 『옥중수고』에 나오는 “나는 지성에서는 비관주의자지만, 의지에서는 낙관주의자다”라는 말에 대한 언급이다 —옮긴이), 리비스적 ‘비평’의 양가적인 선례가 노스의 역사 속에 불안하게 떠돈다. 리비스나 그와 함께 사유한 사람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감수성의 훈련을 위해 긴 전쟁을 벌였고, 이 싸움을 문자문화의 중추적 제도들로 가지고 갔다. 그 제도들에는 언론이라든가 가장 성공을 거둔 중등학교들이 포함된다. 그러나 대학들 자체에서 이 운동은 과도하고 불필요한 소수파적 열정, 아류 양성소를 넘어서지 못했다. 리비스의 아우라 넘치는 존재가 이 운동에 학문적 울림을 더해주었지만, 대학의 ‘리비스파’(Leavisites)들에게 가능한 것은 모방뿐이었다.(이들을 가리키는 이 집단적 호칭이 스스로 붙인 것이 아니라 폄하하는 말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자유주의적이되 그 안에 좌우의 다양한 편차를 아우르고 있던 이 비평도 교수진 전반의 호감을 얻지 못했다면, 덜 우호적인 제도적 환경에서 단호히 좌파적인 기획이 갖는 전망은 어떠할까? 그렇다, 좋지 않다. 그러나 노스의 사업설명서는 어쨌든 더 겸손하고 대상고객이 다르다고 봐야 한다. 현재 지배적인 학문연구 질서는 문학연구가 문화의 징후적 분석으로 기능하는 그런 질서라는 그의 거듭되는 주장에는 얼마간 아이러니가 담겨 있다. 그 자신의 대안은—문학적인 것(영화는 제외?) 그리고 연구(study, 창작은 제외?)로 아무리 엄밀하게 규정된 것이라도—문학연구가 문화혁명의 전반적인 목적들을 매개하는 그런 질서이다. 그가 상기시키듯 차이는 세상을 해석하는 것과 변화시키는 것의 차이인데, 이 점에서 기획과 제도적 상황 사이의 근본적 불일치가 분명해진다. 이 둘을 일치시키는 것이라곤 여분의 읽고 쓸 시간을 지닌 일부 정년보장직 교수 개개인의 습관적 재량뿐, 그보다 더 무게있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기획은 응집된 윤리적·정치적 행위주체도, 필요한 제도적 지렛대도 없는 기획이다.

어디서 실행되든 노스가 촉구하는 비평이—대학 등 기성 현실세계의 세력권과 동일한 외연을 갖지 못하고 주로 그 자율적인 지적·정치적 헌신에 의해 규정되는—소수파적 경향 이상이 되기를 기대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여기서 다시 리비스의 선례를 떠올리게 된다. 1940년 말에 리비스는 나중에 『교육과 대학』(Education and the University, 1948)이 될 주장과 제안들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니, 곧 전략적인 성격의 “영문학부를 위한 스케치”(sketch for an English School, 『교육과 대학』의 부제이자 한 장(章)의 제목으로 사용된 표현 —옮긴이)였다. 여기서 그는 대중문명의 돌진에 대한 소수의 저항을 최적화하도록 고안된 인문교육 프로그램의 관제점이 되는 문학비평의 구상을 상술하였다. 이 구상은 케임브리지를 포함한 모든 곳에서 수포로 돌아갔고, 저 책이 나올 무렵 리비스는 『검토』지를 계속 낼 수 있는 것만도 행운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깨달아가고 있었다. 여기에 교훈이 담겨 있다. 오늘날 배울 바가 더 많은 것은 더 야심만만하나 무산된 스케치보다는 저 행동주의적 계간 비평지(a quarterly review, 『검토』지의 부제 —옮긴이)의 사례이니, 스스로 연계를 만들어내며 자기 세력의 경계선을 그려내는 대항-제도적 실천,18 대학을 넘어서서 비슷한 생각을 가진 협력자와 청중에게 다가가고, 강경하고 강력한 관계당국이 내려보낸 의제 속에서 몇군데 기회를 발굴해내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의제를 설정하는 실천이다. 그리고 이제는 더 폭넓은 유효한 가능성들이 곁에 있다. 이 모든 것이 조지프 노스에게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겠다. 그러나 자유로운 대학(liberal academy)이라는 이념은 완강하고 그 급진적 형태도 그 완강함이 덜하지 않아서 그의 논지에까지 자국을 남기고 있으니, 지난날 ‘비평혁명’의 쇠퇴기로부터 이끌어낸 이런 경계(警戒)가 비평의 이념에 과감히 헌신하는 이 책에 영 생뚱맞은 소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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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oseph North, Literary Criticism: A Concise Political History, Cambridge, MA and London 2017; W. K. Wimsatt and Cleanth Brooks, Literary Criticism: A Short History, New York 1957.
  2. North, viii, ix, vii면.
  3. 같은 책 231면.
  4. 같은 책 3면.
  5. T. S. 엘리엇(Eliot)은 부록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는데, 20세기 초 최초의 비평가이자 이후 나타난 비평가들에게 중요한 참조가 된 시인으로 등장할 뿐, 새로운 노선의 창시자로는 사실상 등장하지 않는다. 이 부록은 “원래 각주였지만 나중에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노스는 흐뭇한 어조로 전한다.(213면)
  6. 같은 책 3면.
  7. 같은 책 211면.
  8. Genette, Narrative Discourse, London 1980. 원래는 그의 저작 Figures 제3권으로 출판되었다.
  9. Schwarz, Two Girls and Other Essays, London 2013.
  10. Publications of the Modern Languages Association(1884년 창간)과 English Literary History(1934년 창간)는 각기 약칭으로만 알려져 있다. 신비평은 대학 등 전문학자들의 중심지에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1940년대와 50년대 내내 『케년 리뷰』(Kenyon Review)에서 활동한 존 크로우 랜섬과 훨씬 오래된 『스와니 리뷰』(Sewanee Review)에서 40년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앨런 테이트(Allen Tate) 등 시인-비평가들이 주도하는 무게있는 문예지들을 통해 꽃을 피웠다.
  11. 필명은 ‘F. W.’, 그밖에는 프레디(Freddy)라는 이름을 사용한 베이트슨(1901~78)은 옥스퍼드와 하바드에서 수학했다. 그는 오랜 기간 『케임브리지 영문학 서지(書誌)』(Cambridge Bibliography of English Literature)를 편집했다. 학문연구 작업에는 콩그리브(Congreve)와 포프(Pope) 판본 작업이 포함된다. 그는 또한 1946년 레프트 북 클럽(Left Book Club)에서 출간된 공저 『사회주의 농업을 향하여』(Towards a Socialist Agriculture)를 편집했다.
  12. Mulhern, The Moment of ‘Scrutiny’, London 1981, 158~59, 297~301면 참조.
  13. 르네상스학자이자, 비평가, 이론가, 편집자, 서평자로 활동한 프랭크 커모드(Frank Kermode)의 이력은 그 다양성과 폭에서 모범적이다.
  14. 여기서도 몇줌의 단행본보다는 PMLA나 『대학 영어영문학』(College English)과 같은 학술지의 전체 논문 목록이 이 분야의 실질적 모습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15. “Utopia and Science Fiction,” Problems in Materialism and Culture, London 1980(현재 Culture and Materialism, London 2005으로 나와 있음) 및 “The Tenses of Imagination,” Writing in Society, London 1983. 두편 모두 1978년에 발표되었다. 리처드 호가트(Richard Hoggart)의 『문해력의 효용』(The Uses of Literacy)에 대한 서평 “Fiction and the Writing Public”도 참조. 이 글은 베이트슨의 저널 『비평집』 제7권 제4호, 1957년 10월호에 실렸고, 지금은 윌리엄즈의 『내가 도달한 입장』(What I Came to Say, London 1989)에 수록되어 있다.
  16. North, 109면(강조는 노스).
  17. 같은 책 212면.
  18. 대항-제도적이고 초(超)-제도적이되 반(反)-제도적이지는 않으니, 헛된 낭만적 미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