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경위
만해문학상 운영위원회는 2018년 6월 7일에 회의를 열고 김성규 송종원 장이지(이상 시 부문) 강경석 차미령 천운영(이상 소설 부문) 백영경 이남주(이상 비문예 부문)를 예심위원으로, 권여선 김기택 신형철 한기욱을 본심위원으로 위촉해 심사진을 구성했다.
예심위원들은 7월 6일까지 각 부문에서 그 성취가 인정되는 대상작을 선정하여 심사를 진행했다. 만해문학상 규정에 따라 등단 10년 이상 또는 그에 준하는 경력을 가진 이의 최근 2년간의 한국어로 된 문학적 업적을 대상으로 한 예심에서 시집 6종, 소설 6종, 비문예물 3종(총 15종)을 본심 진출작으로 선정했다.
이어서 4인의 본심위원들은 8월 3일 1차 본심을 열고 다음 7종을 최종심 대상작으로 결정했다. 김해자 『해자네 점집』, 이원 『사랑은 탄생하라』, 장석남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이상 시), 김애란 『바깥은 여름』, 안재성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정미경 『새벽까지 희미하게』, 조해진 『빛의 호위』(이상 소설).
9월 21일 가진 2차 본심(최종심)에서는 더 본격적인 논의를 이어갔다. 최종심에 오른 7편의 작품들이 저마다 개성적이고 의미있는 문학적 성취를 이루고 있어 한 작품을 선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심사자들은 이원 장석남의 시집과 김애란 조해진의 소설이 각기 보여준 성취에 감탄하면서도 다음 작품에서 더 무르익기를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또한 정미경 소설집은 개별 수록작들의 밀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한권의 단행본으로서는 조촐해진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김해자 시집과 안재성 장편을 놓고 심도있는 토론을 이어간 끝에 심사진은 김해자 시집 『해자네 점집』을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이 시집에서 작중 화자가 무당처럼 각양각색의 민중으로 빙의하여 그 고해를 자유자재의 발성으로 풀어내는 가운데 노동하는 몸의 감각과 민중적 정서로 시적 쇄신과 발상의 전환이 일어난다는 데 심사위원 전원이 흔쾌히 합의했다.
심사평
권여선(權汝宣) 소설가
소설 쪽 얘기를 먼저 하자면, 삶을 직시하기 위해 천천히 들어올린 이마처럼 은은한 빛을 내뿜는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이나 단단하고 알차면서도 언제나 머뭇거리는, 앞모습보다 옆모습으로 기억되는 조해진의 『빛의 호위』 모두 뛰어난 소설집이다. 더구나 놀라운 건 이들이 만해문학상 후보에 오를 정도의 이력까지 갖추었다는 점인데, 이렇게 잘 쓰는 젊은 작가들이 이력까지 착착 쌓아가고 있으니 나로서는 적잖이 불안하고 적이나 기쁠 따름이다. 안재성의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는 체험을 소설로 옮기는 일, 다시 말해 기록을 문학적으로 등재하는 일의 지난함을 생각하게 만드는 장편이다. 삶의 무게를 재는 일이란 이토록 고단하고 품이 들건만, 그 고됨이 작품의 한계가 아니라 그 한계를 돌파하는 역동으로 끌어올려지는 감동의 순간이 있어 먹먹하다. 고 정미경의 『새벽까지 희미하게』는 작고한 작가의 깊은 호흡이 짙게 느껴지는 수작들이 담긴 소설집이다. 중대한 비약을 앞두고 있는 순간의 고요한 숨고르기에서 나온 듯한, 안타까운 일별처럼 짧은 이 소설집은 그가 비상하려던 드넓은 하늘을 더 마음 아프게 그려보게 한다. 오래 손에서 놓지 못했다.
시 쪽으로 넘어가서, 이원의 『사랑은 탄생하라』는 내게 이원의 진면목을 다시 보게 해준 시집이다. 딱딱하고 우아한 슬픔의 각도와 현실을 대하는 시인의 지극한 수행적 자세에 매료되어 읽고 또 읽었다. 읽을수록 접힌 페이지가 늘어났고 책의 각도도 달라졌다. 장석남의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는 내가 좋아서 추천사까지 쓴 시집인데 다시 읽어도 역시 좋았다. 이보다 더 빈 그릇 같은 경지가 또 있을까 싶은데, 그 비어 있음이 허하지 않고 고요히 빛나며 미세하게 충만하다. 이제 뭐 다 이루었네 싶지만 시인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또 기다릴 생각이다. 김해자의 『해자네 점집』은 왜 우리에게 시인이, 꼭 김해자라는 시인이 필요한지를 절절히 깨닫게 해주는 시집이다. 점(占)이 삶의 행로를 읽어내는 일이라면 김해자만 한 점쟁이는 없다. 길은 비틀리고 걸음은 절뚝이고 사위는 어두운데, 차근차근 그 행로의 걸음마다 밴 눈물과 웃음, 분노와 상처를 짚어내는 시인의 점괘는 어찌 이리 명료한 사랑으로 환한가. 참여시니 뭐니 두말할 것 없다. 경계를 밀어내고 마침내 여기 도달한 시들이 그런 덧없는 구분들을 무화시킨다. 『해자네 점집』을 읽은 사람들은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김해자 시인이 이렇게 늦게야 만해문학상을 받는다니 놀랍지만, 나는 그가 바로 이 시집으로 이 상을 받으려고 그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진심으로 축하한다.
김기택(金基澤) 시인
최종심까지 오른 후보작은 일곱권이었지만, 이 중 세 시집을 한권으로 좁히는 일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장석남 이원 김해자의 시집들은 오늘의 우리 시단의 큰 세 줄기의 흐름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진경인데다 이전의 성과를 더 밀고 나가는 힘도 있어서 어느 하나도 내려놓기가 어려웠다.
장석남의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는 다 읽어서 친숙해진 것처럼 보이면서도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 같은 낯선 새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 힘은 이미 다 써놓은 것 같은 세계, 다 말한 것 같은 것들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다 겪지 못한 일들과 새로 맞닥뜨리게 함으로써 이미 겪은 미적 경험들을 지속적으로 갱신한다. 그래서 언어로 끝내 포섭되지 않는 느낌의 세계는 얼마나 광활하며 거기서 삶은 또 얼마나 자주 새롭게 태어나는가를 새삼스럽게 체험하게 된다. 이원의 『사랑은 탄생하라』는 사물과 현상들이 스스로 시로 들어와 내가 사물을 본다는 의식을 깨고 사물과 세계가 새로 생겨나는 듯한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 늘 보던 시선, 늘 생각하던 방식이 깨지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다시 실감하게 된다. 김해자의 시는 앞의 두 시인의 시에 비해 다소 덜 새롭다고 생각했는데, 『해자네 점집』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통쾌하게 깨지는 즐거움을 누렸다. 이 시집은 삶의 지독한 굴곡들이 만든 내면의 사건들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사건들이 교차하고 얽히고 섞이면서 움직이는 커다란 사회적인 생명체를 만들어내고 있다. 시인은 타인들에게 빙의하고 육화되어 사라지고 시 쓰는 자의 자리를 기꺼이 타인들의 목소리에 내어줌으로써 그 목소리들이 스스로 시적 공간을 형성하도록 하고 있다. 시인의 주관적인 감정과 사고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힘겹게 살아온 삶들에게 기꺼이 제 목소리를 내주어 울림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개별 시편도 뛰어나지만 그 목소리들이 한권의 시집에 모여 구축한 다성악적인 화음과 입체적인 삶의 모습은 더욱 감동적이다.
다행스럽게도 여러 심사위원이 김해자의 ‘재발견’에 한뜻으로 공감하였기에 나도 김해자의 수상에 기쁘게 동의하였다. 수상작과 마지막까지 논의된 안재성의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는 한 빨치산의 비극적인 삶을 복원한 기록문학으로서 선 굵은 이야기의 힘에 빨려 들어가는 즐거움이 컸다. 다시는 말할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수많은 삶의 간절한 이야기들을 누가 들어주고 그 침묵을 누가 대신 말해줄 것인가 하는 질문도 묵직하게 다가왔다.
신형철(申亨澈) 문학평론가
의미있는 소수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몫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심사에 참여했지만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모두가 수상작감이라고 생각한 작품을 나 역시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거니와 오히려 내가 더 적극적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당연하게도 결국 ‘만해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데 정답이 있는 것이었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 정답을 받아 적었다.
먼저 세권의 소설에 대해서. 『새벽까지 희미하게』에서 정미경은 자본주의라는 훈육의 시스템이 한 인간의 욕망을 키우고 또 죽이는 미묘한 과정을 드러내는 데에 탁월한 작가였음을 새삼스럽게 입증한다. 그의 마지막 소설들의 주인공인 ‘금희’(「못」)나 ‘송이’(「새벽까지 희미하게」)는, 그들을 쉽게 유형화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내면의 복잡성을 품은 채로 어딘가에서 그렇게 내내 삶을 버텨낼 것만 같은 인상적인 캐릭터들인데, 이들은 작가 자신과 더불어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바깥은 여름』에 실린 김애란의 근작들은 ‘과도기의 진정성’이라는 표현을 불쑥 떠올리게 했다. 그는 지금 ‘잘 쓰는 것’과 ‘쓰고 싶은 것’과 ‘써야만 하는 것’이 하나인 그런 작가적 상태로 자신을 밀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든 도약의 과정이 그렇듯 이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그는 또 해낼 것이다. 조해진의 단편 목록에서 빛나는 분기점이라 할 수 있는 2013년, 그해의 소설 두편인 「동쪽 伯의 숲」과 「빛의 호위」가 실려 있으니 『빛의 호위』는 말할 것도 없이 좋은 작품집이다. 이 책의 전언 중 하나는 ‘개인이 세계에 앞선다’는 것인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으나 문학에서만큼은 (윤리적으로든 미학적으로든) 그래야 한다는 뜻으로 나는 이해했고, 그래서 기꺼이 동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권의 시집에 대해서. 이원의 언어들에는 생래적이라고 해야 할 탄성(彈性)이 있고 그것은 어떤 소재와 만나도 약화되지 않는 그의 미덕이다. 『사랑은 탄생하라』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이 세월호의 상처를 품고 있는 4부의 시들인 이유는 거기서 그의 본질적인 탄성이 무거운 비극과 아슬아슬하게 만나고 있기 때문이고 그 탄성 덕분에 시들이 더 아파졌기 때문이다. 고전주의적 균제미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각 시편들의 구조가 좀 성글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그것은 탄성이 발생하려면 불가피하게 있어야 하는 여백이라는 답이 또한 가능하리라. 한편 장석남의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에는 내가 엉성하나마 해설을 써 붙인 터라 그 글의 논지를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만해문학상 심사 자리에서 이 시집을 다시 만나고 보니 해설에서는 사정상 언급할 수 없었던 「사랑에 대하여 말하여주세요」 같은 시가 다시 환해 보이기도 했다. 그것을 두고 불교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과연 이 시인의 몸에는 만해의 어조가 잠겨 있다. 여기에 ‘침묵하는 님’에 대한 절박함이 더해진다면 어떻게 될까. 이제 그에 대한 내 기대는 그런 것이 되었다.
아무래도 다음 두 작품이 올해 만해문학상 수상작으로는 더 어울리겠다는 것이 모두의 공통된 소감이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는 한국전쟁 희생자의 옛 수기를 소설가 안재성이 지금의 결과물로 이룩해낸 경우인데, 이 작품이 두 세대에 걸친 고된 협업의 산물임을 생각하는 일이 독서의 감동을 배가했다. 그러나 수기에 근거한 작품이라는 점은 이 작품의 장점만이 아니라 단점에도 관계하는 듯했다. 원본이 다다른 곳을 존중하자는 작가의 취지였을까, 이 정도 소재라면 더 깊이있는 인간학이 개진될 수도 있었을 텐데 싶었다.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당신을 보았습니다」)라는 만해의 일절(一節)을 생각해본다면, 저 “찰나”에 대한 핍진한 기록이기는 하되 이 소설이 보고 있는 “당신”은 ‘휴머니즘’이라는 제한된 얼굴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었다.
『해자네 점집』은 아프고 가난하고 선량한 사람들에게 제 목소리를 빌려주는 시인의 시집이다. 이런 시집들은 대체로 옳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옳은 시집이 그대로 좋은 시집인 것은 아니다. 이런 윤리적 복화술의 시학이 뜻밖에도 안이한 미학에 이르는 경우가 적지 않고 이 시집에도 그런 시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격이 다른 성취다. “나는 가끔 다른 사람 아무도 없이/온통 나뿐인 세계로 도망친다 그제서야/나는 그 모든 사람이 되어 나온다”(「다른 사람」)와 같은 구절에서 얼핏 드러나는 치열한 존재론이 바탕에 놓여 있기도 하고, “나는 서정시인이 되기에는 너무도 소질이 없나봐요/(…)/당신의 얼굴과 소리와 걸음걸이와를 그대로 쓰고 싶습니다”(「예술가」)라고 쓸 때의 만해의 태세를 연상케 하는, 세간의 얄팍한 미적 기예들을 숙연하게 만드는 미학도 가세하고 있어서다.
모두에게 흔쾌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시인에게도, 심사위원들에게도, 그리고 만해와 우리 시대의 ‘님’에게도.
한기욱(韓基煜) 문학평론가
올해 최종심에는 시, 소설 부문의 작품들만 올라옴으로써 본상과 다른 장르의 작품에 주는 특별상을 수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최종심에 오른 작품들이 우리 문학의 다양해진 기량과 치열한 예술정신을 유감없이 보여주어 특별상 부재의 아쉬움을 달래줬다.
소설 부문에서는 고 정미경의 소설집과 안재성의 장편소설을 특별히 주목했다. 정미경의 최근작들은 오늘날 젊은이들의 척박한 삶을 살아 있는 인물의 내부로부터 실감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못」에서 “다음. 다음이란 건 없어”(44면)라는 금희의 단호한 발언이 이 시대 청년들의 불안한 삶을 날카롭게 긋는 못처럼 느껴지고, 「새벽까지 희미하게」에서 썬글라스를 쓰고 모과나무를 껴안고 있는 송이가 “충전 중”(100면)이라고 할 때 그게 무슨 퍼포먼스가 아니라 고갈된 생명력을 실제로 충전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임을 실감한다. 이 지점에서 정미경은 비범한 리얼리스트다. 갑작스러운 타계로 인해 다섯편만 수록된 소설집은 작가의 무르익은 기량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안재성의 장편은 한국전쟁 전후의 역사 속에서 틀 지어졌던 한 실존인물의 험난한 삶의 궤적을 면밀히 추적한다. 전쟁 상황과 주요 실존인물들의 행적이 기술된 전반부뿐 아니라 주인공 정찬우가 체포된 이후의 삶, 즉 포로수용소와 형무소에서의 수형생활이 전후 분단체제의 맹아를 보여주는 바가 있어 주목을 끈다. 그렇기에 이 소설이 남북 간의 적대를 넘어 새로운 차원의 화해와 통합으로 나아가는 지금의 상황에 시사하는 바가 크지만, 이런 현재적 의미를 최대한 끌어내려는 예술적 노력—언어적·기법적 혁신—이 미흡한 것은 아쉽다.
최종심에 오른 세권의 시집은 각각 고유한 지향성과 어법을 지니고 있어 한결 다양해진 우리 시단의 현재를 잘 보여준다. 이원의 시들이 대체로 미지의 영역 속에서 시의 새길을 찾으려는 치열한 언어적 실험의 현장을 보여준다면 장석남의 시는 정교한 언어 운영과 섬세한 감수성을 통해 한가닥 명징한 성찰을 벼려내는 듯하다. 각각의 뚜렷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미학적 추구와 지적 성찰이 민중적 삶과 거리를 벌리는 지점에서 살짝 아쉬움도 있었다. 얼핏 거친 듯 보이는 김해자의 시는 화자가 무당처럼 각양각색의 민중으로 빙의하여 그 고해를 자유자재의 발성으로 풀어낸다. 특히 실감나는 사투리의 사용과 입말의 운율, 노동하는 사람들의 몸의 감각과 민중적 정서가 기득권 지식인 중심의 관념의 언어와 발상을 뒤집는 장면에서 새로운 시적 쇄신과 발상의 전환이 일어난다. 이렇듯 언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일이 현실의 삶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약자들과 함께하려는 노력과 동행하는 예를 보는 것도 반갑다. 한 맺힌 사연을 대신 풀어놓고(「맥아더 장군 보살」) 외국인노동자의 처연한 삶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기록하며(「몰랐다」) 서러운 알바 청년의 일상을 랩처럼 노래하기도 한다(「시간을 알약처럼 삼키며」). 심지어 벌레와 동물의 심정으로 지구에서의 모진 삶을 들려주기도 한다(「밤 속의 길」 「어쨌든 살아 있으면 된다」). 전작 『집에 가자』에 이어 김해자는 이번에도 민중의 고해 같은 삶을 부둥켜안아 형형색색의 노래와 이야기가 꽃피는 화엄의 시를 빚어 만들었다. 심사위원들은 그의 시집 『해자네 점집』을 수상작으로 정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땅의 원주민이자 이 시대 약자들의 무당인 김해자 시인에게 깊은 축하를 보낸다.
수상소감
김해자 金海慈
1961년 전남 신안 출생.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 시집 『무화과는 없다』 『축제』 『집에 가자』 『해자네 점집』, 민중 구술집 『당신을 사랑합니다』, 산문집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다 이상했다』 『시의 눈, 벌레의 눈』 등이 있음. 전태일문학상, 백석문학상, 이육사시문학상, 아름다운작가상 등 수상.
엄마가 왕사탕 1개 주면서 10리길/신부름 갔다 오라고 했다/비가 왔다/우산이 없어다/엄마가 비료포대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씌웠다/숨을 쉴 수가 없었다/숨을 쉬려면 비닐이 얼굴에 달라붙었다/사탕 1개로 나는 죽을 번했다(김종숙 「왕사탕」)
은행동 직물공장에서 3일 낮밤을 실을 꼬고 감았다./소사에서 포리 가는 버스를 타면 봄볕에 세상이 멍해졌다.//정신을 차리고 집에서 내려야지 했는데/깜빡 잠이 들었다./종점이었다. 다시 그 버스 타고 집으로 출발했다/정신 바짝 차리고 내려야지 했는데/반대편 종점이었다./분명 아침에 퇴근했는데 집에 가니/저녁을 먹은 후였다.(김경애 「집으로 가는 길」 부분)
문해(文解)수업을 통해 이제 막 문맹에서 탈출 중인 어머니들과 석달째 시쓰기를 하는데, 일흔 여든이 기본인 이분들이 맹렬하게 쓰시는 걸 보고 매번 놀라고 열등감도 더러 느낍니다. 띄어쓰기 맞춤법 틀려도 괜찮고, 경험하고 보고 느낀 것을 좀 짧게 쓰면 되는 시가, 별거 아닌 시시한 거라는 걸 알게 된 다음부터 두편은 기본이고 서너편씩 현장에서 연필로 즉각 쓰니까요. “밥을하다가 잘못해서 호랑이 아주머니가 연탄 찍개로 떼렸다/울며불며 우니까 더 떼렸다/무서워서 몰래 연탄 광에 드러가 곤해다”는 열살 소녀와 “아모래는 동물성이고 한국 화장품은 식물성이라서 물에 잘 풀려요. 쌤플도 많이” 준다며 “고개고개 넘어 이름도 모르는 대로/집만 보이면 찾아갖다”는 ‘화장품 에판원’ 새댁이 시로 재현됩니다.
망원동 돌공장에서 짜구로 돌을 조샀다/벽돌공장 가서 김이 무럭무럭한 네모난 돌 말여서/머리에 이고 여날랐다/벽돌공장 가서 날새기를 하고 나면/아침에는 한 발도 걸을 수 없었다/하지만 그만두면 돈도 주지 않았다/두 사람이 양쪽에서 나를 붙들고 일어나 공장 갔다(이연아 「날새기」 부분)
시집가서 남편이 군대갔다/시집 식구가 12명이라서 살기가 힘들었다/방아다리 성냥 공장 가서 됫성냥을 한관 사가지고/머 나 먼 시골 동네을 갔다//어느집을 갔더니 거진줄 알고 쌀을 한 공이 가지고 나와서주 셔서 뒤돌 아 설 때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언덕을 네려 오는데 눈이 네려서 쫄 딲 미끓어 졌다/누가 볼까봐 두리번거리다가 툭 툭 털고 잃어났다//또한 집을 갔더니 밥을 먹고 있었다 성냥 사세요 하니까/새 댁 이리 와서 밥 점 먹고 가요 해서 나는 그냥 감격했다/감사하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나왔다/네살 멁은 애기를 두가 가서/빨리 집으로 돌아 왔다.(최원예 「됫성냥」)
호롱불 아래서 “여름날에는 홑 적삼에/홑 치마와 홑 고쟁이/겨울에는 합바지와/솜 동방에 솜 버선 깨매”고, “눈 송이 같은 목화 따다/티 가리고 씨를 빼고/활줄 팅겨 솜 만들고/수수강에 고추 말아/물레 돌려 실을 뽑아/배틀 차려 북장단에 무명 배 짜 냇”고, “육요때 죽은 친구가 나타나서 배고프다고 밥 달라 했다”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이야기들이 걸어 나오는데, 온갖 금칠한 문명사와 문학사와 제가 쓴 시들이 돌쩌귀 빠진 어처구니 없는 맷돌인 줄 알겠습니다. 어쩌면 문학적인 것은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문학 밖에 존재하며, 문학이 수행해줬으면 하는 절실함 또한 그러한지 모르겠습니다. 이 갈수록 극악무도해져가는 불평등과 생명체들의 멸절을 목도해야만 하는 독생대(獨生代) 인류세(人類世)를 통과하는 한 사람으로서, 말 못하는 약자들의 분노와 절망감을 적어도 실감은 하며 살고 싶었고, 나아가 그들의 목소리를 조금이나마 대변해주는 사람이었으면 바라며 시를 썼습니다. “외쪼 엄지 손고낙 짤려서도 보상도 못바닷다”, 공장에서 “글을 몰라 일지를 못쓰고 많이 울었다”는 몸으로 수행한 시 앞에서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 느끼겠습니다. “민적이 없는 자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 능욕하는 자들의 말과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영원(永遠)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겠습니다(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 저에게 시를 받아 적게 한 ‘시 안 쓰는 시인들’과 동료 문인들과 이 귀한 상을 나누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