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이재무 李載武

1958년 충남 부여 출생. 1983년 『삶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섣달 그믐』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벌초』 『몸에 피는 꽃』 『시간의 그물』 『위대한 식사』 『푸른 고집』 등이 있음. poet8635@dreamwiz.com

 

 

 

은행알들

 

 

인도에 떨어진 은행알들

 

행인들 구둣발에 짓이겨져

 

구린내 물씬 풍기고 있다

 

굴러다니는 저 질펀한 구린내들은

 

참을 수 없는 절규와 비명

 

씨줄과 날줄로 엮어

 

스크럼 짜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밤을 밝히는 가등의 심정처럼

 

쫄깃하고 알싸한 맛 감싸는,

 

저 구린내들은 얼마나 숭엄하고 위대한가

 

둥근 모성들 함부로 짓밟는,

 

난폭한 구두들이여

 

저 구린내들은 얼마나 어질고 지극한가

 

 

 

잿빛 토끼 한마리

 

 

여의도 샛강 생태공원 걷다 해후한, 풀숲에서 불쑥 뛰쳐나온 잿빛 토끼 한마리

들킬세라 발소리 죽여 우회하면서 힐끗, 곁눈 주니 앞발 가지런히 모아

앙증맞게 주둥이 문지르다 말고 구면인 듯 멀뚱멀뚱 나를 맞바라보는 것 아닌가

저자는 섬 태생은 아닐 것이니 필시 여기로 유배온 자일 것이다

용궁이 어디인지, 다래넝쿨이며 머루와 딸기 지천으로 열리는 첩첩산중도 모르고 살아왔겠지

어릴 적 오일장 가는 어미를 따라가서 잿빛 털이 고운 앙고라토끼 한쌍 사다가

장에 넣고 길러서 새끼들 낸 후 내다 팔아 가용에 보태 쓰던 일과 폭설 내린 다음날 수업 작파한 전교생 학교 뒷산 에워싸 몰이하던 일 등속

두서없이 떠올라 머릿속 자욱하게 흰 연기 피어오르는데

그걸 알 리 없는 토선생께서는 빗물 고인 분화구 같은 눈망울 안에

새털구름 몇점 띄우고는 때마침 땅의 문 열고 나온 부드러운 새순들 오물오물 입속에 넣으며 오후 한때를 평화롭게 저작하고 있었다

저자에게는 내가 지녀온 궁색한 살림과 치약거품 같은 치욕과 미래에 대한 까닭 없는 불안 따위는 없을 것이었다

물정 모르는 그가 상경 27년 차인 나보다 세상을 더 관대하게 살고 있었던 셈

섬은 의식하는 자에게는 유폐이고 고립이고 단절이겠지만 천지 분간을 모르는 자에게는 세계의 전부일 수 있고

자유를 국량함도 이것과 비례할 수 있다는 소견을 되새김하며 쓸쓸히 먼지 이는 길 걸어 철망 씌운 장 같은 집으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