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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공광규 孔光奎
1960년 서울 출생. 1986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대학일기』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지독한 불륜』 『소주병』 『말똥 한덩이』 등이 있음.
kkkong60@hanmail.net
담장을 허물다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살던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느티나무 그늘 수십평과 까치집 세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은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방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꽃이 하얗게 덮은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성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 영주가 되었다
사철나무 아래 저녁
오래된 사철나무 꽃이 마당에 우박으로 쏟아지는
뜰과 대숲이 깊은 성북동 수연산방이다
마루에 누워 있는 주름이 가득한 늙은 다탁을
저녁 햇살이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있다
솟을대문 앞 수국은 당신 얼굴로 환하고
화단에는 금낭화가 주렁주렁 팔찌를 걸어놓았다
송판 덮개를 씌워놓은 옛 우물
한지등 눈을 가진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의 당신과
허물어진 성곽 그늘을 지나오면서
당신에게 나를 허문 게 언제였던가를 생각했다
오후를 넘어 저녁 어스름으로 어둑어둑 깊어가는 찻집
찻물처럼 깊어지는 당신
섬돌 위에 앉은 다정한 구두 두켤레에
사철나무 꽃이 점 점 점 꽃잎 자수를 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