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중국혁명, 역사인가 현재인가
이남주 李南周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 본지 편집위원.
허 자오톈 賀照田
중국사회과학원 문화연구소 부연구원. 『인간사상(人間思想)』 중국판 편집장.
이남주(사회) 오는 10월 1일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70주년 기념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는 중국혁명 70주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중국의 5·4운동과 한국의 3·1운동도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2016년 말부터 한국에서는 촛불항쟁이 진행됐는데, 이 항쟁을 혁명으로 규정하는 목소리도 많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혁명이 아주 뜨거운 화두는 아니지만 여전히 중요한 의제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중국혁명의 역사적 실천을 다시 살펴보는 의의가 적지 않은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허 자오톈 선생은 중국혁명과 사회주의 실천 역사에 대해 다방면으로 연구를 진행하며 참신한 시각을 제시해왔습니다. 오늘 대화를 통해 과거 ‘중국혁명’과 현재 ‘중국의 실천’을 잇는 연결고리를 발견해, 한국의 혁명 담론에 새로운 화두를 던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선 한국의 독자를 위해 연구분야와 관심영역을 간단히 소개해주세요.
허 자오톈 소중한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1985년 베이징대학에 입학했는데, 당시 중국 주요 대학의 청년 지식인들은 중국을 이해하는 나름의 역사적 배경이 있었습니다. 1976년 마오 쩌둥(毛澤東)이 사망하고 1977년 8월에 무산계급의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이 중국공산당(이하 중공) 중앙에 의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는 것이지요. 1978년 말 중국은 혁명이 아니라 ‘현대화 건설’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의 새로운 시기로 접어듭니다. 이 전환기의 중심에는 ‘사회주의의 자기개선’이 있었어요. 당시 중공은 기존 사회주의 인식에 문제가 있으니 좀더 올바르고 중국에 더 적합한 사회주의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1980년대 중반부터 크게 변했는데, 특히 청년 지식인들 사이에서 현대화를 낙관적으로 전망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어요.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로, 정치적으로는 ‘민주정치’로, 문화와 사회 건설 면에서는 ‘개인’을 중시하면 중국이 긍정적 방향으로 발전할 거라는 인식이었지요. 그리고 스스로 ‘시장경제’ ‘민주정치’ ‘개인 중시’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혁명에 대한 이들의 태도는 1989년 민주운동을 거치며 달라집니다. 1989년 이전에는 중국혁명을 부정하지 않았고 혁명의 발생은 필요하다고 인식했지요. 중공을 변화시켜 현대화의 이해를 높이는 것이 중점이었고, 많은 청년들이 당을 개조하겠다는 희망을 품고 입당했습니다. 그런데 1989년 이후 상황이 변했어요. 민주운동에 대한 억압 탓에 청년 지식인들이 중국혁명을 부정하고, 혁명이 없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거죠. 저도 대학 때 이런 사조의 영향을 받았고, 1990년대 중반까지 이런 경향을 기본적으로 수용했습니다. 1990년대 후반 중국사회에서 출현한 문제들을 목격하며, 이것들이 상당 부분 방금 언급한 지식계의 인식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지식계의 주류 사조가 형성된 역사와 인식에 대해 연구하고, 이를 통해 더 폭넓게 역사와 현실을 보고자 해왔습니다.
이남주 혁명 실천을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현재 중국 지식인들의 사유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네요. 현재 중국은 매우 관건적 시기에 놓여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40여년의 개혁개방 경험에 기초해 21세기 중엽 ‘사회주의현대화강국’을 건설하는 목표를 제기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중관계에서 전략적 경쟁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했어요. 이 두개의 도전이 서로 다른 문제로 보이지만 실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최근 미국이 중국의 경제능력을 미국 패권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중국에 불공정한 무역관행을 개정하라고 요구하는데, 이러한 요구는 중국의 핵심적 경제전략뿐만 아니라 현재 국가 거버넌스체계의 핵심, 즉 경제 영역에서 당의 영도와 통제도 문제 삼고 있습니다. 서방 국가는 중공이 국가에 대한 영도를 강화하는 추세를 이른바 ‘보편적 가치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미국은 이를 중국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국이 이 도전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문제를 잘 처리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중국혁명이 현재와 미래에 갖는 함의를 잘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개혁개방시기 들어서 ‘고별혁명’ ‘후혁명’ 심지어는 ‘반혁명’ 등 중국이 혁명과 단절해야 한다는 강렬한 열망이 담긴 담론이 표출했습니다. 이러한 주장들이 지나치게 역사를 단순하게 해석한다는 비판은 선생의 연구를 포함해 이미 적지 않습니다. 중국은 중국혁명을 이끈 중공이 여전히 유일한 집권당이고, 지금까지도 당과 혁명과 공산주의에 깊은 믿음이 있던 마오 쩌둥 시대와 계승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중국의 현재와 미래를 중국혁명의 역사와 단절시키거나 대립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혁명은 어떻게 인식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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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주 먼저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개혁개방 이후 중국혁명에 대한 인식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중공의 과거 혁명 역사에 대한 평가는 이렇습니다. 첫째, 마오 쩌둥이 중공의 영도권을 확보한 이후 중공은 올바른 길을 걷기 시작했고, 1956년까지 중공 노선은 옳았다. 둘째, 1957년 이후, 반우파투쟁 중 ‘확대화의 잘못’을 범한 뒤로 좌경모험주의적 경향이 점차 당내에서 주도적 지위를 점하면서 최종적으로 문혁 발발로 이어졌다. 셋째, 문혁은 철저히 잘못된 것이고 역사적 재난이었다.
이 세가지 모두 논란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개혁개방 이후 지식인들은 첫번째 논점에 대해 지속적으로 도전했습니다. 즉 중공의 1956년 이후 노선을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중공이 기본적으로 옳았다고 주장하는 1956년 이전의 노선과 실천도 부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더 나아가 건국 이전 중공의 실천을 문제 삼았습니다. 예를 들어 문혁의 재난은 일부 야심가가 음모활동을 벌인 결과가 아니라 1920~30년대 중공의 지도사상과 실천, 특히 정풍운동(1940년대 초반 ‘당풍’을 개조하기 위해 펼쳐진 당내 정치운동. 중공이 마오 쩌둥 사상을 지도사상으로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초기 가혹한 숙청이 있었다)을 포함한 각종 숙청운동에서 그 조짐을 보였다는 주장도 있었지요. 이렇게 보면 중국혁명 자체가 문제였다는 것이 되고, 개혁개방은 혁명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리 쩌허우(李澤厚)가 쓴 「계몽과 구국의 이중변주」가 이러한 흐름에 속하며, 이를 확산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지요. 반면에 선생은 1949년 이전 중공의 혁명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계몽과 혁명의 이중변주」(『현대 중국의 사상적 곤경』, 임우경 옮김, 창비 2018)를 쓰신 바 있지요.
허 자오톈 우선 왜 지금도 진지하게 혁명을 이해하려는 강한 동력이 저에게 있는지부터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러면 혁명에 대한 이해와 연결시켜 현재 중국의 현실을 인식할 수 있지요. 역사 시기를 나누는 일반적인 구분을 따른다면 개혁개방은 이미 40년간 진행되었고, 매우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 이전 중국이 축적한 것을 소모하며 이룬 성과입니다. 한 통계에 따르면 1990년에는 1%에 불과했던 심리적 질병을 가진 중국인의 비율이 지금은 17%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지면 중국의 고도성장을 지탱해준 중국 ‘사람’의 상황이 크게 변했음을 모두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1980년대의 주류적 이해방식을 따른다면, ‘개인권’에 대한 강조와 보장이 불충분한 탓으로 귀결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여전히 있지만, 1980년대와 비교해 개인권리 공간은 크게 확대되었고 상당히 인정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문제를 개인의 권리문제로만 봐서는 안 되고, 오히려 1950년대 초중반의 빠른 발전 시기에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이 충만하고 편안했다는 사실을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시야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사람에 대한 사유는 전통적인 것으로, 특히 유가 전통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으로 치부되는 현상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가 전통은 전통적인 경제·정치·사회 제도 속에서 작동했던 것으로 현대의 제도 속에서 과거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4~50년대는 이 전통사회를 현대사회로 전환하는 관건적 시기였고, 현대를 향한 추구와 사람들의 상태 면에서 혁명은 특출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여기에는 전통에 대한 응답, 전통의 발전 등에 관한 중요한 경험들도 포함됩니다. 단순히 혁명을 부정하는 기존 사조들은 혁명에 포함되어 있고 오늘날 중국에도 매우 중요한 것, 즉 ‘사람’을 어떻게 인식하고 전통을 어떻게 전환할지에 관한 경험과 사상 자원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중국 자유주의자들은 입헌민주제를 실현함으로써 중국정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계의 민주제도는 오늘날 이미 여러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민주제를 시행하는 나라의 정치인들이 그 가장 중요한 제도인 선거과정에서 민의를 조작하는 다양한 기술을 만들어내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러한 기술은 상당히 교묘해졌는데, 민주제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민주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실천으로 이에 대응하지 못한다면 민주제도는 부작용이 더 클 것입니다. 중국에 적용할 때는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중공은 이미 협소했던 선거공간을 더 축소시켰고 사회적 권리와 언론공간도 계속 줄여나가고 있습니다. 이는 중국사회의 정치적 성숙을 방해합니다. 최소한의 성숙도 없는 상황에서 민주제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선거를 실시하면 사회가 정치인들에 의해 이끌려갈 것이고 이는 재난이 될 수도 있어요. 이러한 문제의식을 안고 중국혁명 당시에 풍부하게 축적된 군중노선(群衆路線, 중국에서 군중은 인민 혹은 인민대중과 같은 의미이지만 당원이나 간부가 아닌 인민을 지칭하기도 한다. 군중노선에서 군중은 후자에 해당된다. 대중노선과 유사한 개념)의 경험과 사유에 주목한다면, 사회가 충분히 이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이상을 가진 정치세력이 사회와 적극적으로 깊게 상호작용하고 사회참여를 촉진해 민주의 진정한 의미를 실현하는 정치적 노력에 중요한 참조자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혁명을 부정해버리면 이러한 과거의 긍정적 경험들을 볼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도 어려워지고 현대 중국이 직면한 문제를 사유하고 미래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도 부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군중노선의 경험과 사유가 중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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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주 한국에서도 ‘대의민주’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촛불혁명은 시민의 직접행동을 통해 대의민주의 한계를 극복하려 한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규모 직접행동의 국면이 지나고 난 후 시민이 정치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러한 점이 제가 ‘군중노선’에 주목한 배경입니다. 혁명을 부정하는 사조 중에는 민주와 혁명을 대립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혁명과 같은 급진적 사회변혁이 사회에 부정적이라고 인식하는 경향도 있지요. 이들은 무술변법(1898)이나 양무운동(1861~95) 같은 위로부터의 개혁이 혁명보다 더 성공적이었으리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는 민주라는 가치만이 아니라 사회개혁의 효용성이라는 측면에서 혁명을 부정한 것입니다.
허 자오톈 저는 18세기 중반 이후 중국의 정치사·사상사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청조를 주도하던 황권, 만주족·몽고족 귀족, 한족 사대부와 관료가 왜 왕조국가를 안정적이고 능력있는 현대국가로 바꿔내지 못했는가, 중국이 안정적이고 능력있는 현대국가가 되기란 왜 어려운가 등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를 연구할 때 사유의 중점을 상층 주도의 개량이 좋은가 아니면 혁명이 좋은가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보다는 개량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이고, 혁명이 성공한 원인은 무엇인가, 이로부터 어떤 경험과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를 탐구해야 합니다. 중국의 전통왕조에서 현대국가로의 전환은 상층 엘리트에 의해 주도된 것이 아니라 엘리트층 내에서 하부에, 중국 기층사회와 더 가까운 위치에 있던 중공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더 진지한 연구와 사고가 필요합니다. 이는 일본이나 터키의 경험과는 다릅니다. 또한 중공의 혁명사를 진지하게 살펴보면, 중공의 사업방식이 변혁의 대상으로 삼았던 개명 인사를 포함해 다양한 사회계층에 의해 잘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공이 가장 성공적이었을 때는 이론을 실제와 연결하고 군중노선도 제대로 실행한 시기입니다. 즉 중국사회가 실제로 직면한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해결하고, 사회 대다수 사람들의 정서 및 가치관 등과 잘 결합되었던 시기예요. 중점은 혁명인가 개량인가, 급진인가 보수인가, 상층엘리트가 주도하는가 사회혁명을 동원하는가 등이 아니라 현실을 정확하고 깊이있게 장악했는가,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중국인들의 정서, 가치관 등에서 건설적인 향상이 있었는가입니다.
이남주 그렇다면 중공과 군중 간에 성공적으로 이뤄진 상호작용은 어떤 게 있었을까요. 중국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마오 쩌둥의 전략전술, 예를 들면 근거지 건설, 유격전, 농촌의 도시 포위 등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같은 정치적 책략에서만 중공의 승리 원인을 찾는 시각은 다소 협소하지요. 군중노선에 대한 논의가 그 이해를 심화하는 주요 키워드가 될 수 있겠습니다.
허 자오톈 군중노선하에서 중공과 군중 간 상호작용의 경험을 이해하려면 계급의식, 계급관점의 도입이 중국에 어떤 의의가 있었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전통 중국은 사농공상으로 구분된 사민(四民)사회였고, 그중에서 사(士)가 도(道), 그리고 정치와 문화를 담당하는 사회의 가장 높은 위치였습니다. 중공의 계급관념에서는 공인(工人)계급이 가장 앞선 위치에 있고 농민, 소자산계급, 자산계급, 지주계급 등의 순서로 이어지지요. 중공의 계급관념에서 도를 중시하고 사익을 억제하고자 한 ‘독서인’은 우월적 위치인 ‘사’로 구분되지 않고 무산계급(공인계급)이나 농민보다 낮은 위치의 자산계급 지식인, 지주계급 지식인, 혹은 소자산계급 등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즉 독서인이 아니라 무산계급이 사회 각 계급에서 가장 앞서게 됩니다. 이는 무산계급이 혁명과정에서 당연히 영도적 위치에 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중공이 스스로를 무산계급 선봉대로 위치 짓고, 무산계급을 대표해 영도할 자격이 있다고 인식했습니다. 사실 중공의 핵심은 독서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전통 중국에서는 황권과 결합해야 했지만 사대부가 자신에게 정치 영도권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혁명적 계급담론하에서 ‘사’는 자신을 무산계급의 선봉대로 전환시키지 않고서는 정치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점할 수 없고 공인계급 등보다 아래에 놓이게 됩니다. 이는 정치적 책임감을 갖는 ‘사’가 레닌식 정당이 필요로 하는 직업혁명가의 기준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중국혁명의 군중노선도 엘리트의 존재를 전제로 하지만, 이 엘리트는 과거의 엘리트가 아니라 맑스-레닌주의의 계급관념의식과 전위정당의식의 요구에 따라 ‘사’의 전통에서 전환한 엘리트였습니다. 이는 중국의 현대국가 전환을 주도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한 이후에는 황권을 정권과 국가제도의 기초로 삼는 것이 아니라 ‘사’의 전통에서 전환한 레닌식 정당인 중공이 기존 ‘사’가 실현하지 못했던 긴밀한 단결과 행동의 통일을 이루고 자신을 정권과 국가제도의 기초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계급관념의식의 도입은 사회의 다수를 구성하는 공인, 농민, 소상인 등에 대한 시각도 변화시켰습니다. 사민 중 농, 공, 상은 직업에 따른 분류인데 공인, 농민, 소상인 등은 직업이나 경제자산 상황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닌 혁명 동력과 에너지 상황에 대한 평가를 포함합니다. 따라서 적절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특정한 역사적 책임의식과 일정한 품격을 갖춘 ‘혁명인’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계급관념의식을 통해 중공의 핵심을 구성하는 독서인은, 당시 마찬가지로 현대의식과 민족책임감을 가졌던 다른 부류의 독서인과 구분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중국의 사회계층은 너무 낙후되었고, 계몽의 세례를 받아야만 중국 현대에 유익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식의 정치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반면 맑스주의 계급관념에 의해 개조된 중공의 독서인들은 개조 이전의 자신을 혁명성이라는 면에서 노동계급만이 아니라 무산계급 선봉대로서의 자산계급 혹은 소자산계급 지식인보다도 낮게 평가했고, 현대 혁명정치를 감당할 수 있는 선봉대로 자기를 변화시키고자 했습니다. 나아가 중국사회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노동자, 농민, 소자산계급, 특히 이 가운데서도 강한 잠재적 혁명성을 지닌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성을 소환하고 이들을 혁명의 주체로 만드는 것을 중요하게 봤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현실의 노동자와 농민이 중공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강한 혁명동력과 자질을 보여주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에 대한 혁명가들의 인식이 불충분하고 동원방식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인식과 이에 기초한 노력 덕에 중공은 중국사회에 대해 다른 정치세력보다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1949년 이전에 중국사회와 좋은 상호작용을 하고 동원과 조직을 잘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 배후에 있던 이러한 계급관념의 함의를 이해하면 군중노선은 중공이 현실문제와 이를 해결할 실천에 대한 적절한 인식에 기초해 군중과의 거리를 좁히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계급관념의식에서 직접 도출된 인식을 상대화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즉 군중노선에서 엘리트와 군중을 나누는 이분법은 실제로는 계급관념의식이 지나치게 이상화할 수 있는 중국사회의 노동자, 농민 등을 다시 현실로 소환하고 자신의 실천방법을 중국 ‘사람’의 현실에 기초하도록 만들었습니다.
1950년대 사회주의 개조와 이중과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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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주 흥미로운 설명입니다. 사실 중공도 처음에는 농민을 낙후된 계급으로 보았는데 1930년대 들어서 그 인식을 바꾸었지요. 물론 그 과정은 꽤나 복잡했는데 마오 쩌둥이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중국 자유주의 사조 내에서는 농민을 낙후된 계급으로 보는 인식이 뿌리 깊었고 그 점이 이 사조가 중국 현실에 자리 잡지 못한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중공은 그후 사회주의 실천 과정에서 여러 잘못을 저질렀고 이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계속 논쟁을 촉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개혁개방 초기에는 신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단계에 대한 관심이 높았습니다. 1930년대 후반 마오 쩌둥은 중국혁명의 성격을 자산계급이 주도하는 민주혁명이나 사회주의혁명이 아니라, 무산계급과 그 선봉대인 중공이 이끄는 민주혁명으로 규정하고 이를 ‘신민주주의혁명’으로 지칭했습니다. 자산계급 소멸이 목표가 아니라 제국주의, 관료자본주의, 봉건주의가 혁명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민족자본가를 연합 대상으로 간주했지요. 건국 이후에도 중공은 신민주주의로 새 국가의 성격을 규정했고 상당 기간 이를 유지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신민주주의체제하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일정한 범위 내에서 계속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렇지만 건국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시작되었고 중앙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지요. 중국 내 2인자였던 류 사오치(劉少寄)의 ‘착취유공론’이 대표적 예인데, 그는 톈진에서 자본가를 독려하기 위해 “착취도 공이 된다”고 했다가 마오 쩌둥의 불만을 샀고 문혁시기 홍위병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습니다. 1953년 ‘과도기총노선’을 발표한 이후에는 사회주의 개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1956년 중공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사회주의 개조의 완성이 선언되었습니다. 이 과정, 특히 농촌 집체화는 소련에 비해 훨씬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이는 당시 마오 쩌둥의 명망을 크게 높였습니다. 그런데 개혁개방이 시작된 이후 지식계는 물론이고 중공 내부에서도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너무 이르고 급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사회주의 개조과정이 평화적이고 민주적이었다는 중공의 주장과는 달리 고압적으로 진행되었다는 비판도 일부에서 제기되었지요. 이러한 논의도 두갈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회주의라는 방향은 맞았지만 개조가 너무 빠르게 추진되었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의 조건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불필요했다는 주장입니다. 후자의 경우 사회주의 가치를 부정하는 함의가 강해 중공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해석이지만 전자는 당 내부에서도 꽤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는 생산력이 담보되지 않은 사회주의 이행이 여러 문제를 낳았음을 스스로 인정했다는 방증입니다. 따라서 생산력 향상이 중국 사회주의가 직면한 과제로 부상했고 개혁개방 때도 경제발전이 기본노선이 되었습니다. 저는 백낙청이 제기한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라는 시각에서 이 전환을 평가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근대는 자본주의세계체제를 의미하며, 이 점에서 이중과제론은 월러스틴(I. Wallerstein)의 세계체제론을 하나의 이론적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월러스틴은 1970년대에 이미 사회주의국가들도 자본주의세계체제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세계체제가 극복되기 이전에 일국(一國) 차원에서 행해지는 자본주의 극복 시도는 달성되기 어렵다고 주장했지요. 반면에 이중과제론은 이러한 객관적 현실이 있더라도 일국에서의 변혁운동이 무의미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세계적 변혁운동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세계체제를 극복하려는 변혁운동은 근대에 적응하는 동시에 근대를 극복하는 동시적 과제로 변혁운동을 추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 중국의 여러 혁명사상에서도 이러한 사유방식을 쉽게 발견할 수 있고, 실제로 이 두 과제 사이의 긴장을 잘 유지했을 때 좋은 결과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1949년 신민주주의혁명의 성공도 이러한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지요. 이중과제론적 시각에서 보면 개혁개방 초기의 이론 전환은 큰 결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일정한 기간 내에서는 경제발전을 하나의 중심으로 사회주의 실천을 추동할 수 있겠지만, 중장기적으로 보면 해결하기 어려운 여러 사회문제를 낳게 됩니다. 실제로 개혁개방이 심화될수록 이러한 문제가 더 뚜렷해졌지요.
허 자오톈 이 주제에 대한 선생의 글(「新民主主義的歷史經驗及社會主義初級段階的理論含意」, 『人間思想』 제3집, 2015)에서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당시에는 자본주의근대성〔現代性〕의 극복과 관련해 이미 사회주의현대화라는 매우 확실한 대안이 있었습니다. 마오 쩌둥도 자본주의가 중국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 게 아니라, 사회주의와 비교했을 때 “빠르지 않고” “사람과 사회에 너무 많은 고통을 준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당시 중공 내의 보편적 인식이었습니다. 1950년대 중공의 인식은 문혁 후와는 달랐어요. 1980년대의 보편적 인식은 사회주의가 사람과 사회에는 좋으나, 사회주의계획경제가 자본주의시장경제보다 경제발전에는 좋지 않다는 것으로 변했습니다. 물론 1989년 이후에 또다른 변화가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적 시장화가 사회주의계획경제보다 우월할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는 사람과 사회 가치 방면에서 자본주의 입헌민주에 미치지 못한다는 인식이 증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1950년대 중공이 적극적으로 사회주의 개조를 추진했을 때와 1980년대 사람들이 사회주의 개조에 대해 평가할 때의 시대적 맥락이 달랐던 것이지요. 한가지 더 특별히 보충한다면, 사회주의 개조시기를 연구할 때 그것이 필요했는가, 필요하더라도 그렇게 급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는가 등을 논의하기보다 당시 사회주의 개조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완성될 수 있었는가, 그것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연구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농업의 사회주의 개조를 예로 들면 1955년 말부터 1956년 상반기의 개조 과정에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합작화문제를 논한다」(1955.7.31 연설. 8월에 수정 후 성·시·자치구 당위원회에 하달되었고, 추가 수정을 거쳐 10월 17일 『인민일보』에 발표됨)라는 마오 쩌둥의 연설과 「중국공산당 제7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의 농업합작화 문제에 관한 결의」(1955.10.11)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문헌의 구상과 요구는 집체화를 1956년에 완성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왜 그렇게 집체화가 빨리 진행되었는가, 그리고 집체화의 빠른 진전으로 인한 단기적 효과(식량 생산 증가)가 중공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등의 문제를 살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개조를 순조롭게 완성한 이후 중국은 매우 큰 후과를 초래한 ‘대약진’ 시기로 접어들었고, 이 시기에는 중공이 가장 강조한 전통, 즉 이론과 실제의 연결 및 군중노선에 위배되는 사태가 출현했기 때문이지요. 그 이전 중공의 사업방식은 특정 단계에서 빠른 발전을 거치더라도, 그 이후 일정 기간 수축·정돈·소화의 과정이 뒤따랐습니다. 그런데 1958년 1월 마오 쩌둥의 「공작방법60조」(초안)에서는 “우리의 혁명은 전쟁과 같아 하나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에는 바로 새로운 임무를 제출해야 한다. 그래야만 간부와 군중이 항상 충만한 혁명적 열정을 갖게 하고 교만한 정서를 줄일 수 있다. 교만해지려고 해도 그럴 시간이 없다. 모든 사람의 마음이 새로운 임무의 완성을 향하기 때문이다” 같은 식으로 ‘계속혁명〔不斷革命〕’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인식의 출현을 어떻게 이해할지가 개조의 속도를 판단하는 것보다 역사적으로 더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남주 당시 중공 지도부는 이중과제적 인식을 갖기 어려웠다는 점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은 이중과제론도, 1980년대를 거치면서 자본주의세계체제를 넘어서는 일의 복잡성을 명확하게 깨닫고 이러한 시야를 역사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습니다. 1950년대의 역사적 상황에서 중공 지도자들이 사회주의 건설을 지나치게 낙관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지요. 그들이 보기에는 더 좋은 모델, 즉 ‘소련모델’이 있는데 굳이 자본주의라는 우회로를 걸을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요. 이와 함께 더 생각해볼 것은, 방금 제기한 말씀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도 있겠는데, 문제가 단지 지도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지요. 당시 중국의 군중도 사회주의 건설에 너무 높은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토지는 인구에 비해 너무 적었고 토지를 분배해준 이후에도 경제상황이 근본적으로 개선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부 개선되기는 했지만 혁명 이후에 큰 기대를 품은 농민들을 만족시키기는 어려웠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들은 집체화가 생산력을 높이고 그들의 생활을 개선하리라는 기대 때문에 매우 적극적 태도를 보였습니다. 대약진까지의 변화는 농민들의 이러한 열의와 지도부 간 상호작용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건국 이후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시기에 군중의 상황이 변화했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건국 전과 1950년대 초반 긍정적 작용을 했던 군중노선이 사회주의건설 과정에서 기대와 반대되는 결과를 낳은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중국사회주의 실천에서의 군중노선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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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자오톈 저는 「계몽과 혁명의 이중변주」에서 ‘중공이 사회를 인식하고 정치감각을 구축하는 데 매우 유력한 방법을 발전시켰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통해 1930년대 후반부터 중국사회 깊숙이 들어가는 데 놀랄 정도로 성공했지요. 그러는 동시에 사회 속에서 공산당원, 해방군 같은 혁명의 주축 역량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는 계속 자기를 확장하는 과정이었습니다. 1952년까지 국가건설을 기본적으로 완료한 이후에 사회와 군중은 이전과 달라졌지요. 특히 사회에 비해 훨씬 강화된 공산당과 국가 앞에서 대다수 군중은 공산당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자기를 표현했고 혁명 이전처럼 실제 모습대로 자기를 표현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 결과 중공이 현실을 잘못 이해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사회주의 개조에 이르러서 상황은 더 복잡해졌습니다. 좀 전에 잘 말씀해주셨는데, 1950년대에 대한 연구에서 많은 군중이 집체화에 높은 기대를 걸었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당시 소련의 성공적 측면만 보고 같은 방법으로 소련만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중국은 당시 1인당 토지 면적이 작았을 뿐만 아니라 그 토지들이 너무 분산되어 있어 필요한 만큼 물을 대기가 어려웠습니다. 집체화 이후에는 토지를 연결해 정리하고 수리사업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남방지역에서는 과거 쌀농사가 어려웠던 곳도 벼를 심을 수 있게 되었고, 일모작만 하던 곳에서 이모작이 가능해졌습니다. 당시 중공은 중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공업발전 속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낙관했습니다. 이에 따라 집체화가 이루어진 이후 공업화는 그 이익을 빠르게 전체 농촌으로 확산시켜 농민들의 적극성을 더 높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농민들은 집체화를 더 적극적으로 상상하게 되었지요. 많은 사례에서 당시 중요했던 두가지 다른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중공이 농촌에서 성공적으로 사업을 해왔고 많은 농민에게 공산당이 하는 일이 잘못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이전에 공산당과 교류해본 경험 덕에 농민들에게 공산당이 요구하는 일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먼저 따를수록 ‘선진분자’가 되어 더 인정받기도 했고요. 이처럼 여러 방면의 요소와 심리가 농민이 농업의 사회주의 개조과정과 대립하지 않고 이를 따르게 만들었습니다.
이남주 사회주의 실천 과정에서 큰 문제를 낳았던 대약진 시기에도 군중을 강조했지요. 마오 쩌둥 역시 아래에서 올라오는 보고에 거짓이 많다는 점을 의식했지만 그는 군중의 적극성에 찬물을 끼얹지 말자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처럼 과거의 중국은 군중 속으로 들어가 실제를 발견하고 문제를 해결해왔는데 이제는 그러한 길이 끊어진 것 같습니다.
허 자오톈 이 문제가 군중노선에 관한 글에서 제가 답을 찾고자 한 바입니다. 1945년 중공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마오 쩌둥은 ‘이론과 실제의 연결’ ‘군중노선’ ‘비판과 자기비판’ 등을 중공의 3대 우수 작풍(作風)으로 들었습니다. 그후에는 이론과 실제의 연결이 군중노선이라는 틀 내에서 이해되었고, 군중노선을 제대로 관철하면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로 보았습니다. 대약진 중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군중노선을 강조했지만 이론이 실제로부터 멀어졌고 군중노선은 이론과 실제의 연결에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졌는지는 다양한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 사회 분위기와 정치현실이었습니다. 자기 생각을 곧이곧대로 말하기는 어려워진 반면 중공의 기대대로 움직이면 혜택이 따랐지요. 따라서 군중의 의견은 실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실제를 잘못 이해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습적인 방식으로 군중노선에 기대어 실제와의 연결을 시도한다면, 오히려 국가를 실제에서 벗어나 광적인 노선으로 이끄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남주 군중노선에 대해 쓰신 글에 군중노선과 군중운동의 양자관계를 잘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대약진부터 문혁까지 일종의 군중노선에서 이탈한 군중운동이라는 문제가 있었다고 개괄할 수 있겠습니다.
허 자오톈 그렇습니다. 그 글에서 이후의 중공 지도자들이 대약진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는지 살펴봤는데 강조하는 바가 조금씩 달랐습니다. 덩 샤오핑(鄧小平)은 대약진은 군중운동이지 올바른 군중노선이 아니었으며 잘 발전하려면 진정한 군중노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총평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마오 쩌둥은 다른 방식의 분석에 이끌렸습니다. 대약진 시기에 대규모 아사가 발생한 원인은 여전히 계급의 적이 많은 기층의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이라는 평가였죠. 이는 신민주주의혁명이 해결하려던 문제가 아직 제대로 해결되지 않아서 이에 대한 보완이 필요하며, 계급투쟁이 이어져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로부터 계급투쟁을 사람들의 의식과 정치실천을 구축하는 방법으로 만듦으로써 중국사회가 수정주의를 극복하는 체질을 갖추게 되고 사회주의의 길을 흔들리지 않고 걷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을 굳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이 마오 쩌둥이 덩 샤오핑처럼 군중노선과 군중운동을 구분하고 진정한 군중노선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하지 않고 더 대규모의 문혁식 군중운동을 선택한 이유였습니다.
이남주 이러한 논의는 매우 중요한데, 1990년대 들어서며 이른바 ‘신좌파’들은 개혁개방 이전의 사회주의 실천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역사해석을 내놓았지요. 기존의 너무 단순한 ‘고별혁명론’식의 역사해석을 교정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역사적 실천은 복잡해서 성공적인 면과 실패의 측면이 서로 교차되기 마련인데 이러한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일부 개념을 그대로 긍정하고 정당화한다는 점이 불만이었습니다. 그들도 군중노선을 중요하게 보았는데 군중노선을 내세우면서 발생한 문제들에 대해 깊이 논의하지 않고 군중노선을 그대로 승인하는 것도 그러한 사례 중의 하나입니다. 신좌파의 역사에 대한 평가를 더 들여다보면 문혁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나타납니다. 문혁 중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고 해서 중국혁명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문제를 외면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문제지요. 문제의 원인들을 깊이 분석하고 그 원인들을 해결할 수 있는 처방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러한 작업이 없기 때문에 신좌파는 문혁을 미화한다는 비판을 초래하기도 하니까요. 오늘 자세하게 논의하기는 어렵겠지만 문혁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 중 중요하지만 소홀하게 다루어진 문제가 있다면 이야기해보았으면 합니다.
허 자오톈 문혁과 관련해 토론할 문제는 매우 많습니다. 제가 강연이나 수업 중에 그중 몇가지를 분석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제가 강조하고 싶은 건 사회주의의 ‘새 사람 〔新人〕을 만들어내고자 한 실천입니다. 이 역시 문혁 발생과 관계가 있습니다. 문혁 이후 비교적 유행했던 마오 쩌둥에 대한 비판은 경제건설에 집중할 시기에 정치를 돌출적으로 강조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진지하게 돌아보면 1960년 린 뱌오(林彪)가 군대에서 정치를 특별히 강조한 사업방식을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이러한 맥락에서 레이 펑(雷鋒)의 사례를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군대 내에서 린 뱌오의 실천은 마오 쩌둥의 관심을 끌었는데, 그는 린 뱌오가 정치를 특별하게 강조하는 방법을 통해 ‘사회주의의 새 사람 만들기’와 ‘사회주의 건설’을 결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며,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린 뱌오 등이 실제로 했던 일을 서술하는 방식이 마오 쩌둥과 문혁 급진파들을 오도했고 문혁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남주 린 뱌오의 자기 경험에 대한 정리에 어떤 잘못이 있었나요?
허 자오톈 긴 시간을 들여 1960년대 『해방군보』와 관련된 자료를 살펴본 후에 이해하게 된 것인데 린 뱌오가 1960년대 군대 내에서 경험한 성공은 실질적인 면을 틀어쥐는 것이 관건이었습니다. 부대 간부가 병사들이 어떤 문제에 부딪혀 불안해할 때 적시에 이를 발견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적절한 방법을 찾도록 요구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군중노선의 실천을 ‘지심(知心)’에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린 뱌오 등이 스스로의 경험을 서술할 때, 당시 당 중앙이 강조하는 계급투쟁의 정치를 특별히 중시하고 모든 사람들이 마오 쩌둥 사상을 열심히 학습함으로써 성과를 거두었다고 강조했습니다. 문혁은 중국을 마오 쩌둥 사상의 학교로 만든다는 목표를 내걸었는데, 이 목표의 배후에 린 뱌오 등의 서술방식이 작용했습니다. 린 뱌오도 확실히 마오 쩌둥 사상의 학습·정치 중시를 계속 강조했지만, 실제 사업은 이러한 주장과 군중노선을 창조적으로 결합해 운영했습니다. 문혁 급진파는 이 중 전자만 이해했고, 후자의 측면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농업의 사례를 하나 들면 중공의 “농업은 다자이(大寨, 중국 산시성의 산촌마을로 농업개발의 모범촌으로 손꼽혔다)의 경험을 학습하라”는 선전과 관련한 최초 보도는 다자이의 성공이 계급투쟁에 의해 도달했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간부들이 생산노동에서 일반 농민들보다 앞장서 희생정신을 보인 것, 지부의 당 서기인 천 용구이(陳永貴)가 농민들을 동원·조직하고 적절히 인사조치한 특출한 능력, 그리고 이를 당시의 생산조건들과 효과적으로 결합시킨 것 등이 성공 요인으로 개괄되었습니다. 그런데 점차 그 성공이 주류정치의 요구에 따라 계급투쟁의 방식으로 생산을 발전시켰다는 서술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성공을 거둔 실제 방식과 거리가 멉니다. 1960~70년대 중국에는 연구나 사유해볼 가치가 있는 여러 창조적 경험이 있는데, 문제는 이러한 경험이 당시에 제대로 표현되지 못하고 상당 부분 급진적 정치논리에 적합하도록 서술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남주 이는 중국만이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당시 외부세계의 좌파들도 중국혁명에 큰 희망을 걸었고 문혁의 일부 현상을 ‘새 사람’의 출현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새 사람이 어떤 상태였으며 어떤 과정을 통해 출현했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문혁 현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이 점이 서구의 좌파운동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지요.
허 자오톈 중국에도 큰 영향을 주었지요. 방금 말한 다자이의 성공적 경험도 계급투쟁적 이해에 따른 정치의 결과로 서술되었지요. 마오 시대에 이처럼 실제와 다른 서술이 확산되며 여러 방면에서 부정적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문혁 후에도 계급투쟁적 이해에 기초한 서술에 따라 다자이 경험을 이해했기 때문에, 즉 다자이 경험을 매우 좌경적·교조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농업 분야에서 실제의 유익한 경험을 계승하거나 발전시키려 노력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냥 전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요. 경험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 것이 갖는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 채 성급하게 현재와 미래를 계획해온 것이 최근 40여년간 중국이 겪어온 다양한 문제의 근원입니다.
이남주 확실히 사회주의 실천 중 배울 만한 여러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이 문혁 중에는 정치논리에 따라 너무 단순하게 이해되어 잘못 활용되었고, 그 때문에 문혁 후에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없어진 셈입니다. 문혁 이전의 사회주의 실천이나 ‘문혁 자체’에 대한 연구는 한편으로는 당시 실천이 범한 오류의 원인을 명확하게 밝히고, 동시에 그러한 경험 중 유익한 것을 잘 처리해서 현재 중국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용한 사상자원으로 삼는 작업을 계속해야겠지요. 건국부터 문혁까지의 사회주의 실천과 관련해서는 이 정도로 해야겠네요. 다만 개혁개방이 시작된 뒤에도 문혁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당시에는 문혁과 개혁개방을 대립시키는 논의가 지배적이었지요. 많은 지식인들은 문혁을 이론적으로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혐오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보기에 중공은 문혁을 매우 신중하게 처리했습니다. 중공은 문혁을 부정하는 것이 중공 권력의 합법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주의했고, 문혁의 잘못을 문혁 4인방과 린 뱌오 일당 등 소수 ‘야심가’의 잘못으로 돌렸습니다. 현실적으로도 문혁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덩 샤오핑도 문혁 시기를 모두 부정할 경우 개혁개방에 중요한 작용을 한 마오 쩌둥의 미중관계 정상화도 부정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문혁을 이렇게 처리한 것은 역사의 진실과 관련해 많은 오류를 만들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유용했습니다. 이는 문혁의 정리가 얼마나 복잡했는지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중공은 문혁의 책임을 주로 4인방, 린 뱌오에게 물었지만 문혁 중 마오 쩌둥의 역할, 마오 쩌둥과 린 뱌오의 관계, 4인방과 린 뱌오의 관계 등 과연 누가 문혁에 주된 책임이 있는지도 여전히 논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선생도 중공의 문혁 처리에 문제가 많다고 인식하고 있지요. 두가지 문제를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오늘 이야기된 군중노선의 처리이고, 다른 하나는 문혁 시기 큰 작용을 했던 이상주의에 대한 처리입니다.
허 자오톈 개혁개방 직후 진행된 ‘판샤오(潘曉) 토론’에 대한 제 글(「당대 중국 허무주의의 역사와 그 관념구조: ‘판샤오 토론’을 중심으로」, 『현대 중국의 사상적 곤경』)이 이상주의 문제를 다루었지요.
이남주 당시 중국의 자유주의 지식인들도 문혁에 대해 토론할 때 이상주의나 군중노선 같은 문제들을 중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문제로 보았지요. 그들은 중국 개혁개방시기의 중요한 전환점이 1989년 민주운동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선생은 시간을 더 앞당겨 문제의 근원을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 사이의 시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지요.
허 자오톈 제가 이 문제에 주목하게 되기까지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 많은 중국인이 심신상태, 생활 등 여러 면에서 큰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고, 노동자와 농민 두 계층이 개혁에 의해 희생되는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1980년대에 우리가 상상했던 미래와 현실은 크게 달랐지요. 그런데 위의 문제들을 발견한 이후 도대체 어떻게 발생한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별로 무관심했던 중국 ‘사람’에 집중하게 된 것은, 제가 열렬하게 상찬한 문학사조에서 사람과 현실 사이에 깊은 내재적 관계가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 발견은 2001년에 쓴 「포스트사회주의 역사와 중국 당대 문학비평관의 변천(『현대 중국의 사상적 공경』)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8~90년대 생활과 지식계 사조의 성찰은 2006년의 「당대사 연구 및 중국대륙의 사상과 정치(当代史研究與当前中國大陸的思想與政治)」로 이어졌고요. 이때부터 마오 쩌둥 시대가 덩 샤오핑 시대로 전환한 것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중국사회의 눈엣가시 같은 문제들은 1990년대 이후의 개혁에서 비롯되었다거나,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후 야오방(胡耀邦) 실각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식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생각이 좀 달랐는데, 많은 문제가 문혁이 종결되고 개혁개방이 시작되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고 봤어요. 그리고 계속된 연구 끝에 ‘이상주의’가 효과적으로 계승·전화되지 못한 문제나, 군중노선의 재구축 등 당시까지 중국 사상계에 인식되지 못했던 일련의 중요한 문제들이 모두 이 시기에 발생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남주 이상주의의 문제는 말씀하신 판샤오 토론에 대한 글을 참조하면 될 것 같습니다. 1980년대 초, 한편에서는 군중노선의 회복을 강조했지만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셈이지요.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났을까요?
허 자오톈 군중노선을 다룬 글에서 그 대목을 매우 자세하게 논했습니다. 군중노선이 중공의 사고와 실천에서 매우 특별하고 핵심적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변하면 필연적으로 여러 방면의 변화를 촉발합니다.
지적하신 것처럼 문혁 후 중공 안팎에서 마오 쩌둥 사상을 부정하는 사조가 있었지만 덩 샤오핑과 천 윈의 주도하에 중공은 공이 크고 과는 부차적이라는 방식으로 마오 쩌둥을 긍정했습니다. 마오 쩌둥 사상은 여전히 중공의 지도사상으로 받아들여지지요. 당시 마오 쩌둥 사상을 새롭게 해석할 때도 군중노선은 마오 쩌둥 사상 가운데 세개의 살아 있는 영혼 중 하나로 긍정되었습니다(나머지는 실사구시와 독립자주). 1982년 중공 제12차 전국대표대회부터 2017년 제19차 전국대표대회에 이르기까지 계속 수정된 당장(黨章, 중공의 당헌) 속에서도 군중노선은 특별히 강조되었습니다. 그렇지만 1979년 이후의 군중노선에 대한 설명에서는 “군중노선은 조직공작 중 근본문제” “인민군중은 반드시 스스로를 해방해야 한다” “당의 영도 공작이 정확성을 유지하는지는 ‘군중으로부터 나오고 군중으로 들어간다’는 방법을 견지하는지 여부로 결정된다”의 세가지 핵심 내용이 삭제됩니다. 이는 중대한 변화입니다. 이렇게 재구성된 군중노선은 우선 당이 군중의 적극성을 동원하는 방법이 됩니다. 그리고 군중의 실제 이익에 관심을 가질 것을 요구하지만 그 실제 이익은 물질이익, 즉 군중의 생활이 편안한가의 문제로만 이해됩니다. 군중노선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1945년의 제7차 전국대표대회나 1956년 제8차 전국대표대회의 그것과 매우 다릅니다.
신좌파 지식인들의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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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주 군중노선을 내세웠지만 군중을 주체화하지 않고 대상화한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군중노선을 올바르게 집행할 때만 당의 영도도 올바를 수 있다”고 한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당의 영도가 절대화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화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어떤 조건과 메커니즘하에서 당의 영도가 정확해질 수 있는가를 더 중요하게 논의해야겠습니다. 이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현재 중공이 국가 거버넌스에서 당의 영도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18년 전국인민대회 전체회의에서 통과된 헌법개정안을 보면 ‘당의 영도’ 원칙이 헌법 조문에 포함되었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당의 영도와 군중노선의 관계를 잘 처리하지 못하면, 당의 영도를 절대화할 가능성이 증가하고 중공이 강조하는 ‘인민민주’가 설 자리를 찾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최근 중국 내 변화에 관한 조금 다른 문제를 제기해보겠습니다. 비록 1989년에 정치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1992년 덩 샤오핑이 개혁개방 가속화를 요구하고 중공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을 수용하면서 시장화와 대외개방이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일부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정치개혁이 지체되는 것을 계속 비판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개혁개방 노선에 대한 공감대가 폭넓게 형성되었지요. 소위 ‘신좌파’ 지식인들은 개혁개방노선을 다른 각도에서 보았습니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원래 중국의 발전노선이 기본적으로 올바르고 개혁개방은 신자유주의적 사조를 수용한 발전노선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당시 신좌파의 개혁개방에 대한 논의는 한국 지식계 내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고 양자 사이에 적극적인 상호작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한국에서는 신좌파의 새로운 경향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즉 과거와는 달리 중공과 국가의 노선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기만 해 비판성을 상실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시 진핑(習近平) 체제 출범 이후 우려가 더 커졌습니다. 후 진타오(胡錦濤)-원 자바오(溫家寶) 시대부터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지요? 한국에서도 그때부터 중국의 신좌파가 중공과 국가를 따라가고 지식인과 당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허 자오톈 신자유주의적 경향에 비판적 태도를 지닌 신좌파 지식인이 국가와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은 후 진타오와 원 자바오가 지도부에 오른 이후가 맞고 시 진핑 체제가 출범하기 삼사년 전에 그 경향이 가장 뚜렷해졌습니다. 2017~18년, 즉 시 진핑과 그 측근 세력이 헌법 개정을 통해 국가주석의 연임 제한을 폐지한 뒤 시 진핑 개인을 과도하게 선전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사회와 언론에 대한 통제가 지나치게 강화된 시기를 전후로 국가에 대한 신좌파의 적극적·긍정적 태도도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제가 관심있게 본 현상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국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던 지식인들의 발언이 줄어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에 대한 의구심으로 인해 신좌파 내에서도 다른 목소리가 나온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고할지가 제게도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저는 신좌파들이 거짓된 좌파로 원래부터 국가주의자였다거나, 과거에는 좌파였지만 지금은 국가주의자로 변절했다는 식의 편의적이고 단순한 규정에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좀더 진지한 검토가 필요할 텐데, 예를 들어 과거 지식계의 주류는 마오 쩌둥 시대에서 덩 샤오핑 시대로의 전환을 ‘발란반정(撥亂反正, 어지러운 것을 다스려 바른 것으로 돌아가다)’으로 규정해왔는데, 2000년대 들어 신좌파 중 일부가 확산시킨 새로운 역사인식, 즉 그 전환이 ‘발란반정’이 아니고 오히려 ‘발정반란’이었다는 주장을 저는 곧 출판될 제 책 『혁명-후혁명(革命-後革命)』의 서문에서 중점적으로 비판했습니다. 그 역사인식은 마오 쩌둥 시대는 본래 좋았는데 덩 샤오핑 시대에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면서 중국사회에 여러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지요. 신좌파의 이러한 인식은 사실상 중국사회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가 외부에서 왔다고, 특히 미국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신자유주의로 인해 발생했다고 간주합니다. 이처럼 ‘본래의 나’는 옳은데, 미국으로 대표되는 외부의 영향을 받은 ‘나의 일부’는 나쁘다는 인식이 형성되면 그 후과가 몹시 큽니다. 중국인의 마음을 ‘적극적 개방’에서 ‘폐쇄적 상태’로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막아내기만 하면, 특히 적극적으로 미국에 반대하기만 하면 국가에 대한 책임을 다한 것이고, 중국 본래의 좋은 ‘나’를 드러내는 것이고, 중국을 사회주의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단순하게 이해하게 만들지요. 더 나아가면 미국의 패권을 뒤집고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체제를 돌파해야만 중국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하지요. 이러한 감각과 사고방식에, 지금의 세계에서는 실력으로 말해야 한다는 인식이 더해지면 미국의 패권을 뒤엎는다는 의미는 경제기술이나 군사력 등의 일부 주요 지표에서 미국을 넘어서는 것이 됩니다. 지금은 미국을 넘어설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렇게만 보면 중국이 미국을 넘보는 실력을 갖게 해준 개혁개방은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중국사회 내부에서 소위 ‘좌파적 가치’를 실현하는 일은 부차적으로 됩니다. 즉 최근 많은 좌파들이 지나치게 자신을 국가와 일체화하고 국가를 변호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좌파적 정신을 배반했기 때문이 아니라 복잡한 중국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남주 중국에서 국가는 물론이고 많은 지식인들이 지금도 외부세계와 바람직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데 매우 유감스러운 상황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와 타자 사이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제국주의와 차별화되는 대국의 역할을 감당하려면 타자를 통해 자신을 다시 인식하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중국의 대외전략에서 이른바 ‘도광양회(韜光養晦)’라는 개념에 불안을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최근 중국이 너무 대외적으로 공세적이었던 점을 비판하면서 도광양회를 강조하는 경향도 있는데 이처럼 자신의 힘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다보면 타자와의 관계를 잘 처리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시 진핑 체제는 어떤 사회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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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주 마지막으로 중국의 최근 변화에 대해 이야기해보지요. 저는 중공 제19차 전국대표대회의 정치보고 중 일부 정신은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특히 여기서는 사회주의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강조했는데, 1980년대의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과 다소 차이가 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예를 들어 1987년에 제출된 ‘사회주의초급단계론’은 고급단계 등 사회주의의 장기적 혹은 최종적 목표는 제기하지 않고 생산력 발전만 중점적으로 강조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개혁개방과 현대화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적 방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중과제론적 시각에서도 평가해줄 만합니다. 사실 중국의 근현대사에서는 이러한 일종의 이중과제 내의 긴장이 무너졌다 복원되는 과정이 계속 출현했습니다. 적극적으로 평가하면 이 과정 속에서 중국은 서구 국가들이 걸어온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황에 부합하는 사회모델을 찾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정치보고에서도 여전히 무엇이 사회주의경제인가, 무엇이 사회주의정치이고 사회주의민주인가 등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때 예상되는 부정적 상황은 사회주의가 고압적인 통치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는 점입니다. 이는 현재 중국의 많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서만이 아니라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에도 부정적 영향을 주게 됩니다.
허 자오톈 중국의 개혁개방 40년은 물론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동시에 많은 문제도 발생시켰습니다. 이러한 문제 가운데는 현재 지식사상계에 의해 의식되지 못한 것들이 있고, 저는 이러한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삼사년 동안 시 진핑 체제의 사업방식이 점차 그 이전과 달라졌고, 심지어는 분명한 단절도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시 진핑의 ‘신시대’와 덩 샤오핑 시대에 어떤 단절이 있는지, 단절의 후과가 무엇인지를 열심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세가지 방면에서 단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덩 샤오핑이 마오 쩌둥 시대의 교훈을 개괄하면서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었다.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면 큰 잘못이 나타나기 쉽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한 것입니다. 덩 샤오핑이 이 문제를 해결한 방법은 집단지도였습니다. 1980년대에는 당의 중앙주석직이 폐지되고 그리 권력이 없는 총서기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총서기, 국가주석,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장,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총리 등을 모두 다른 사람이 맡았습니다. 1989년 중공이 정치적 위기를 겪으면서 덩 샤오핑은 자신이 없으면 당이 분열될 가능성이 있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집단지도체제에서 약간 후퇴해, 장 쩌민(江澤民)이 총서기로 선출된 이후 덩 샤오핑은 중공의 지도자들에게 장 쩌민이 지금 세대 지도부의 핵심이라고 말했지요. 그 핵심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총서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국가주석을 한 사람이 담당하도록 했습니다. 그렇지만 덩 샤오핑은 여전히 과도한 권력집중이 초래하는 문제에 주의를 기울였고 집단지도를 강조했어요. 그런데 시 진핑이 권력을 잡은 이후 그가 관행에 따라 총서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국가주석 등의 직책을 모두 맡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덩 샤오핑이 설계한 집단지도체제를 돌파해 권력을 집중시켰습니다. 둘째, 덩 샤오핑은 역량을 집중시켜 큰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중국체제의 장점으로 보았지만 동시에 이런 방식이 큰 잘못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가 사회에 대한 통제를 완화한 것은 이러한 생각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는 상대적으로 균형있게 중국체제의 장점과 위험성을 평가했고, 그래서 이 체제를 운영하는 데 신중한 설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 진핑 체제는 중국이 역량을 집중하면 더 큰일을 할 수 있다는 장점만 너무 높이 평가하고, 그 위험성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셋째, 덩 샤오핑은 중국은 규모가 크고 상황이 복잡하기 때문에 여러 방면의 적극성을 이끌어내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여러 제도적 설계를 통해 사회의 수준을 올리고 다양한 집단의 적극성을 이끌어내려 했습니다. 톱다운식 설계를 통해 중앙과 일치된 태도를 취할 것을 강요하고, 당과 국가 체제를 통해 사회를 엄격하게 통제하는 지금은 덩 샤오핑 시대의 탄력적인 사업방식과 매우 다릅니다.
이남주 40년은 꽤 긴 시간이고 그사이에 여러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개혁개방 초기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 사이에는 여러 객관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 조정될 필요도 있겠지요.
허 자오톈 저도 동의합니다. 중국은 의식적인 측면과 사업방식 모두 조정이 필요합니다. 앞서 언급한 세가지는 덩 샤오핑 시대 경험에서 신중하게 다루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나열한 것입니다. 선생은 중공 제19차 전국대표대회의 정치보고에 등장한 ‘사회주의현대화강국’이라는 목표와 사회주의 가치 강조를 긍정적으로 보았지만 사회주의경제, 사회주의정치, 사회주의민주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한 점에는 우려를 표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 중국에서 유행하는 더 직접적인 표현을 예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현재 시 진핑 체제는 “마오 쩌둥 시대는 중국을 일으켰고, 덩 샤오핑 시대는 중국을 부유하게 했으며, 지금 관건은 강해지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언설은 매우 흥미로운데, 우선 오늘날 중국에서 당과 국가가 ‘사회주의현대화강국’을 이야기할 때 실제로 강조하는 것은 ‘강국’이지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또한 ‘강함’을 ‘일어남’ ‘부유함’과 연결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의식과 무의식 모두 생각해볼 만한 주제입니다. 중국이 전통에서 현대로 전환하는 과정은 매우 순탄하지 못했고 큰 댓가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을 때 마오 쩌둥은 “중국 인민이 일어났다”고 선포했지만 사실은 이를 위해 필요한 경제적 조건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덩 샤오핑이 중국을 부유하게 만들어 중국의 ‘일어나기’에 튼튼한 기초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빈곤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했습니다. 즉 ‘일어나고’ ‘부유해진’ 중국은 해결하려는 열망과 요구는 컸지만 그럴 만한 조건이 부족했던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제야말로 누적되었던 문제를 해결하고 중국이 활력있게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아야 합니다. 그 속에 강함도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강’에 대한 추구는 양적 지표에서 다른 나라를 앞서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남주 제 생각에는 중공이 이야기하는 사회주의민주, 인민민주 등이 말은 좋지만 이를 구현하는 메커니즘을 구축하지 못한 것이 또다른 중요한 문제입니다.
허 자오톈 이는 몹시 어려운 주제이지만, 인민민주가 군중노선의 경험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다는 점만은 강조하고 싶습니다. 1940~50년대의 군중노선은, 사실 군중을 동원하고 군중을 공공사업에 참여시키는 것이었고 그 참여를 위해 공공조직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경험을 진지하게 연구하면 인민민주를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더 많은 사람들을 공공사업에 참여시키고 이들을 조직할지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지금 시점에서 볼 때 인민민주를 실현하려면 다음의 두가지에 주의해야 할 것 같아요. 첫째, 인민의 공공영역 참여에 대한 의지를 더 이끌어내고, 공공영역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더 잘 배양하고, 공공조직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실천방안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인민군중은 자신이 자신을 해방해야 한다’는 원칙을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구현하고, 사회의 공공조직들에 더 많은 활동과 발전 공간을 제공해야 합니다.
이남주 당연히 두 문제를 함께 연구해야 하겠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과 중국은 모두 민주혁명 과정을 거쳤고 어떤 의미에서는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는 운동의 후유증이 컸기 때문에 중공이 과거 군중노선의 긍정적 측면을 살리기보다는 아래로부터의 자발성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려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현행 민주제도에 대한 여러 불만이 표출되고 있고, 그에 따라 다양한 정치 혹은 사회 운동이 출현했고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운동 이후 어떻게 시민들이 공공영역에서 주체적으로 계속 작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매우 찾기 어렵습니다. 한국과 중국 지식인들이 같이 토론하고 연구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새로운 사유방식을 제시할 수 있다면 양국의 미래는 물론이고 세계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대화를 마무리해주시지요.
허 자오톈 마무리까지는 아니지만 중국의 지식인과 사회, 정치인들까지 여러분의 이중과제론적 사상의식을 받아들일 수 있기 바란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이중과제론은 신중한 태도와 원대한 이상을 포괄하는 사유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근대를 넘어서는 것이 쉽지 않다고 인식한다는 점에서 신중합니다. 중단기적으로 근대 혹은 근대성을 제대로 소화하는 것은 우리가 진지하게 대할 과제입니다. 다른 한편 서방이 발전시키는 자본주의 등이 인류의 영원한 운명이 아니라 극복할 수 있고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원대한 이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유방식이 중국에서 받아들여진다면 지금의 문제점을 다루는 적절한 처방을 제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중국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빠른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에, 중국 지식계의 ‘중국모델론’이나 중공이 특별히 강조하는 ‘네개의 자신(도로 道路자신, 이론자신, 제도자신, 문화자신)’처럼 자신을 긍정하는 사조 안에는 중국이 이미 서방의 현대화를 뛰어넘었다는 낙관론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는 중국이 스스로나 세계를 인식하는 데는 물론이고 현실적으로도 여러 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또한 여전히 적지 않은 중국인들은 서구에서 이미 성숙한 인류의 보편가치를 만들었고 중국이 이를 따라가기만 하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두가지 사유방식은 이중과제론적 사유와 대화를 통해 극복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서구의 현대는 완전무결한 것이 아닙니다. 서구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수용하는 현대 관념에 대한 문제제기가 지속되어왔는데, 어떤 의미에서 이는 서방의 활력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서구에서도 의심의 대상인 ‘현대’가 중국에서 구현될 때 서구에서 나타난 문제만이 아니라 서구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문제까지 함께 초래될 수 있습니다. 후자는 중국인, 중국사회, 중국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중국 사람, 사회, 문화가 완전히 개조되지 않는 한 이러한 문제는 계속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중국과 같이 큰 나라가 완전히 개조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은 자신만의 현대화의 길을 개척해야 하고 이중과제론적 사유가 중국이 자신의 실제에 부합하는 현실과 미래 의식, 자아와 세계의식을 형성하는 데 유익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현실과 미래를 동시에 고려하고 건설적으로 역사를 볼지와 관련해서도 이중과제론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이중과제론적 시각을 활용해 백영서는 3·1운동과 5·4운동을 비교한 바 있고, 선생은 중국의 사회주의 실천을 평가하는 데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중국의 역사를 연구하면 역사를 더 깊이 이해하고 중국의 현재와 미래를 사유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다른 국가, 다른 민족이 이러한 자각에 기초해 함께 노력해가면 더 좋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같이 노력하지요.
이남주 한마디만 더 보태면 역사적으로 볼 때 이중과제론의 가장 진지한 실천도 중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현실에 대해 이런저런 불만과 우려가 있지만 중국의 잠재력을 믿습니다. 오랫동안 대화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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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대담은 2019년 7월 14일 중국 베이징 유이빈관(友誼賓館)에서 진행되었다. 중국어로 진행된 이 대화의 녹취록은 샤 톈(夏天)이 작성했으며, 이남주가 우리말로 번역했다. ⓒ 賀照田·이남주 / ⓒ 한국어판 창비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