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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부풀어 오르는 모녀서사

 

 

전기화 田己和

1990년 서울 출생. 2018년 창비신인평론상으로 등단. 주요 평론으로 「황정은 다시」 등이 있음.

octobervoice@naver.com

 

 

모녀서사의 독법

 

“태후마마 관이 혼전에 계신데 진양이 어찌 높은 집을 생각하겠습니까?”

드디어 좌우로 하여금 낮은 집을 정리하여 상중에 거처하는 움막을 차리고, 거적을 깔고, 흰 띠를 둘렀으니, 궁중과 궁인이 꾸민 것이 한 떼의 흰 구름 같았다. 공주가 상복을 벗지 않고 사시곡읍하니 그 소리가 슬퍼서 사람이 차마 듣지 못할 정도였다. 공주가 반드시 기운이 다 떨어진 후에야 곡하기를 그치고, 한 그릇 미음을 하루에 한 번 마셨다. (…) 공주가 다시는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밤낮으로 눈물을 흘렸다. 시부모가 슬프게 생각하여 친히 이르러서 권유하면 공주가 사례하고 음식을 맛보고 말을 하여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 그러나 시부모가 돌아가면 다시 베개에 몸을 던졌으니 쓸쓸히 돌아가신 모친을 생각하면서 아득히 모친을 따를 것 같았다.(『유씨삼대록』 2, 한길연 외 옮김, 소명출판 2010, 185~86면)

 

조선후기 고전소설 『유씨삼대록』에서 진양공주는 어머니의 죽음을 지극히 슬퍼하며 점차 몸이 쇠약해져간다. 진양공주의 남편과 그의 가족들은 그녀가 마음을 돌이켜 건강을 회복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일 뿐이라며 점차 쇠약해지는 몸을 받아들여 결국 세 아이를 남겨둔 채 25세의 나이에 요절한다. 소설 속 인물들에 의해 대효(大孝)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추앙되는 여성인물, 내리사랑보다 치사랑을 행하며 ‘어머니 됨’보다 더 중요한 것을 추구하는 어머니의 형상은 지금 우리에게 조금은 낯설다. 가족관계를 중심으로 여성을 재현하는 소설에서 ‘딸’이거나 ‘누나, 여동생 혹은 언니’거나, 때로는 ‘아내이며 며느리’이거나, 때로는 ‘어머니’이고 ‘할머니’이기도 한 여성인물이 서사 내에서 어떠한 지배적 관계 정체성을 부여받는지는 통시적 변화를 겪어왔다. 이를테면 18세기에 창작된 소설의 진양공주와 같이, 자신의 세 아이를 남겨둔 채로도 죽음을 통해 어머니에게 효를 완성하는 어머니 형상이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자식을 위해 무엇이든 감내하며 무조건적인 헌신을 보이는 어머니상은 비교적 근래에 한국인들의 심상에 자리 잡은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든다. ‘어머니’에 대한 일정한 통념이 구성되고 자리 잡는 과정에서 그 통념에 어긋나는 다양한 어머니상들은 제자리를 부여받기보다는 인식 너머로 배제되어온 것이 아닌가. 특정한 어머니상이 대표적인 것처럼 부지불식간에 승인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어머니들의 구체적 얼굴과 그 표정을 들여다보려는 노력 역시 너무 방치되어온 것은 아닌가.

여기에서 우리는 근대 이후 모성이 특별히 강조되며 가정 내 여성들이 어머니로 위치 지어지기 시작했다는 논의1)와 더불어, 한국문학사에서 재현된 엄마의 형상을 계보화하고자 한 시도2)를 참고해볼 수 있다. 후자는 모성신화와 결부되며 탈역사화되어온 어머니상에 대한 역사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글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계보의 마지막에 『엄마를 부탁해』(신경숙, 창비 2008)를 배치하며 이 소설을 일종의 ‘종착지’로 설정하는 동시에, 소설 속 엄마 형상을 순수-증여론자로 읽어냈다. 그런데 이 소설의 엄마를 순수-증여론자로 읽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어머니상이 계보의 종착지가 될 수는 없다. 최근의 소설들은 ‘무한한 사랑과 초인적 헌신’의 제공자로서의 어머니상을 재정립할 새로운 계보를 형성하며 더 멀리 나아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지난 십여년간 엄마를 재현하려는 시도들이 지속되는 가운데, 구체적인 육체를 가지고 현실을 대면해나가는 엄마의 형상들은 점차 다양해졌다. 현재 한국문학장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엄마에 대한 재현이 이루어지고 있으며,3) 특히 주목할 만한 모녀의 이야기들이 제출되고 있다. 따라서 지금 여기의 문학장에서 목격되는 여성서사의 폭발 가운데에서도 엄마에 대한 재현에 주목하며 모녀서사를 적절하게 배치해볼 필요성은 다름 아닌 소설들 자체로부터 제기된다. 여자들이 태어나 최초로 관계 맺는 여자, 요컨대 딸과 엄마의 관계는 어떤 모양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낼 수 있을까?

오래간 문학사에서 핵심적으로 다루어져온 아버지와 아들의 세대 문제처럼, 소설 속 어머니와 딸의 관계 또한 세대론적 관점에서 읽혀왔을까?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호명되어온 세대들은 언제나 몰젠더적으로, 남성 중심으로 재현되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과 더불어 모녀서사 속 어머니와 딸이 각각 한 세대를 대표하는 존재로서 읽힌 경우는 드물다는 의심이 먼저 덧붙는다.4) 기실 이러한 의심은 크게 이상하지 않다. 청년세대가 보통 남성으로 재현되어왔으며,5) 부정(否定)하면서도 동시에 계승하여 새롭게 구축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기성세대 또한 남성 가장으로 상정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친살해 신화의 베일을 벗겨내며 부자서사 대신 부녀서사에 주목하는 새로운 독법이 제시되는 국면에서,6) 동시대 문학에 나타난 모녀서사의 양상을 거칠게나마 살피는 일 또한 기왕의 한국문학사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던 결절점들에 대한 새로운 계보화의 가능성을 조망할 수 있게 해주리라 생각한다.

기존의 모녀서사에 관한 독법에서 딸과 엄마란, ‘여성’으로서의 공통 경험에 기반하여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세대별 격차와 무관하거나, 관계가 있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여성’으로서 함께 연대해야 하고 또 연대할 수밖에 없는 관계로 이해되곤 했다. 이를테면 장성규는 2000년대 한국소설에 나타난 가족로망스의 변화 양상을 살피는 과정에서 김애란의 소설을 논하며, 소설 속 딸과 엄마가 이루는 ‘모계 가족’에는 가부장적 규범이 부재하며 여성적 연대가 새로운 구성 원리로 작동한다고 해석했다. 한편 강수환은 박완서와 김애란의 소설 속 딸들이 가부장제 안에서 ‘타자성과 부재’를 경험하면서 엄마와 여성으로서의 공통 의식을 공유하고, 이에 근거하여 가부장제라는 공동의 적대를 만들어낸다고 보았다.7)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혹 모녀서사에 관한 그간의 독법은 서사에 이미 드러나 있는 어머니와 딸의 차이, 그들의 미묘한 긴장과 갈등에 충분히 주목하는 대신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여성들의 유대/연대라는 다소 납작하고 당위적인 해석으로 귀결하지는 않았나. 권력과 자원을 물려받는 자의 위치에 놓인 적이 없으므로 물려줄 수도 없었던 자들—어머니와 딸이 무엇을 주고받으며 어떠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지를 더 천착하여, 그 복잡한 관계를 단순화하지 않고 읽어내야 하는 데 이르지 않았나. 이제는 각기 다른 모녀서사로부터 동일한 패턴을 읽어내는 독법을 넘어, 그 차이를 좀더 섬세하게 식별하며 모녀서사를 ‘역사화’해야 할 때가 아닐까. 모녀서사 속 딸과 엄마가 맺는 복잡한 관계를 해석할 언어가 충분히 주어져 있는가와 무관하게 이미 그 문학들은 우리 앞에 도래했으니, 비평이 할 일이란 그것을 가능한 한 직시하는 일일 테다.

 

 

엄마/세대

 

최근 한국소설에서 재현되는 엄마들은 제각각의 국면들을 마주하고 있는 듯 보인다. 육십 줄에 다다른 어떤 엄마는 자신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 이를테면 자신의 딸이 여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고민하며(김혜진 『딸에 대하여』, 민음사 2017), 이국에서 딸의 육아를 도와주던 어떤 엄마는 딸의 필요와 자신의 쓸모의 격차 앞에서 자신이 누구의 ‘곁’도 되지 못하는 현실을 직면하기도 한다(지혜 「곁」, 『자음과모음』 2019년 봄호). 한편 오륙십대 엄마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삼십대 엄마들 또한 자기 생의 각도를 조금씩 틀어가는 듯 보인다. 어떤 엄마는 잊고 있었던 자신의 아름다움을 새삼스럽게 자각하기도 하고(백수린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 어떤 엄마는 자식과의 관계보다도 자신을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한 여자와의 관계에 몰두하며, 자신이 해독할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 집요하게 추적하게 되는 애증의 대상, 집착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중독의 대상인 그 여자에게 가닿으려 애쓰다 추락하기도 한다(최은미 「보내는 이」, 『자음과모음』 2019년 봄호).

이들 엄마들을 ‘엄마’로 호명하는 일은 충분히 정확하게 느껴지지 않는데, ‘엄마들’로 통칭되어온 집단 내에서도 세대 구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초역사적인 엄마의 형상, 소위 ‘정상적’인 어머니상의 파열이 쉬이 감지된다. 다양한 지점에서 일어나는 파열 가운데에서도, 지금 한국사회의 젊은 엄마, 요컨대 임신과 출산을 계기로 일을 그만두고 육아를 담당하게 된 새내기 엄마 82년생 ‘김지영’이 서 있는 파열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면 어떨까. 한국문학장에서 『엄마를 부탁해』 이후 8년 만에 밀리언셀러를 돌파한 소설이 『82년생 김지영』(조남주, 민음사 2016)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유아차에 아이를 데리고 나와 벤치에서 1,500원짜리 커피를 마시던 김지영은 주변에 있던 직장인으로부터, 일은 안 하고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편하게 커피나 마시며 돌아다니는 ‘맘충’(mom+蟲)이라는 폭언을 듣는다. 소설 속 김지영은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165면)라며 남편에게 묻지만, 이 질문은 사실상 한국사회를 향하고 있다.

남성의 임금으로 한 가족이 먹고사는 가족임금 모델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발맞춰 맞벌이 모델로 대체된 후, 가사와 돌봄노동을 전담하는 여성들은 인정투쟁의 장에서 불특정다수의 혐오 대상으로 방치되었다.8) 2014년 전후로 출현한 맘충이라는 혐오표현이 횡행하는 가운데 2016년 행정자치부에 의해 가임기 여성의 분포도가 ‘출산 지도’로 공개되는 분열적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젊은 여성의 긴장과 피로는, 2016년 출간된 소설 속 김지영의 육체를 경유하며 “산후우울증에서 육아우울증으로 이어진 매우 전형적인 사례”(169면)로 번역되었다. 그러므로 김지영이 기혼-이성애자-엄마 등 한국사회의 ‘정상성’을 체현하고 있으며, 이러한 정상성에 도전하고 불화를 시도하는 페미니즘 문학이 필요하다는 지적9)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에서 재현되어온 엄마 형상을 역사화하는 과정에서 ‘김지영’이라는 ‘엄마’는 반드시 거론될 필요가 있다.10) 신화화된 어머니의 형상은 『82년생 김지영』에서 아이를 낳는 선택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잃는’ 것인지를 분명히 알면서도 그 선택을 감행한 김지영이 ‘맘충’이라는 호명에 수치심을 느끼며 커피를 손등에 쏟고 자리를 피하는 순간 파열된다. 이 파열이란 『한겨레21』의 「전업주부의 종말」 같은 기사, 김영옥의 「경력단절 여성 현황과 정책과제」 같은 학술논문 등이 서사 내부에 얽혀들면서, ‘모성’이라는 거룩한 광채에 휩싸인 어머니상을 지상으로 끌어내려 현실화하고, ‘맘충’이라는 호명 앞에서 무너지는 김지영의 개별 서사를 보편화하면서 가속화된다.

이때 김지영은 소설 안에서 위로는 어머니 ‘오미숙’과 연결되고 아래로는 딸 ‘정지원’과 연결되는바, 혹자는 그녀가 오미숙의 삶을 “반복”하고 있으며 오미숙의 삶에서 “한 치도 나아지지 않았다”11)고 단언하였으나, 이는 재고될 필요가 있다. 김지영은 남동생과의 일상적인 차별에 노출되며 자라왔지만, 그녀의 경험이 오남매 가운데에서 가장 공부를 잘했는데도 여공이 되어 남자 형제들을 당연하게 뒷바라지했던 오미숙의 경험과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요컨대 그녀들은 다른 세대에 속한다. 82년생 김지영을 둘러싼 조건들은 오미숙을 둘러싼 조건들과 다르고, 당시에는 ‘당연’했던 것들이 더이상 당연하지만은 않은 환경 또한 조성되었다. 그러나 소설이 낙관하지 않듯 그 조건들의 개선은 여전히 충분하지 않기에, 김지영의 경험은 오미숙과는 또다른 종류의 여성혐오와 차별로 구성된다. 그렇다면 김지영의 딸, 정지원이 경험하게 될 세계는 어떨까? 정지원은, ‘여자들은 다 그러고 살던’ 할머니 오미숙과, 부당한 상황에서 입을 닫아버리곤 했던 어머니 김지영과는 얼마나 다른 세계를 살아가게 될까?

여기에서 2000년대 이후에 태어난 여성의 경험과 그녀가 삶에 대응하는 방식이 좀더 구체화된 형태로 제시되는 「여자아이는 자라서」(조남주, 『릿터』 2018년 8/9월호)를 통해, 그 세계의 감각을 엿볼 수 있을 듯하다. 『82년생 김지영』과 유사하게 「여자아이는 자라서」에도 할머니-어머니(‘나’)-딸(‘주하’)로 이어지는 삼대의 관계가 설정된다. 소설의 초점은 그 마지막 세대에 해당하는 주하가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남학생들의 성추행을 “그냥 장난”(116면)으로 넘기지 않고, 다른 여학생과 연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한 사건에 맞추어져 있다. 남학생들이 늘 해오던 몰래카메라 장난이 대수롭지 않게 치부될 수 없도록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주하는 친구와 함께 사건을 계획하고 유도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어낸다. 「여자아이는 자라서」에서 딸은 엄마를 반복하지 않는다. 자신이 느꼈던 공포나 수치심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괜찮다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다. 딸은 엄마의 예측 가능 범위를 넘어선 지점에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움직여나가고, 엄마는 뒤늦게야 딸의 ‘공범’이 되는 방식으로 그 움직임에 겨우 연결된다.

「여자아이는 자라서」에서 자라나는 딸은 엄마가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동일화의 대상이 아니고, 엄마는 딸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자신이 딸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자식에게 무엇이든 아낌없이 내어주는 헌신적인 엄마가 되기를 자임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다. 엄마란 딸 앞에서 갈피를 잃고, 딸에게 “한심한 소리나 하는 사람이 됐다”(117면)는 핀잔을 들으며 말문이 막힌 채 울음을 터뜨리는 존재다. 그러니 어쩌면 엄마가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란, 딸이 만들어내는 낯선 움직임을 두려움의 눈길로 서툴게나마 좇는 것뿐일까. 『82년생 김지영』과 「여자아이는 자라서」에서 엄마들이 딸 앞에서 마주하는 곤경이란 이처럼 다각적이며, 이토록 복잡하다. 그렇다면 소설에 재현된 기혼-이성애자-어머니를 그 조건으로 환원하여 ‘정상성’이라고 명명하는 데에서 우리의 독법이 그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계보 짓는 딸, 다시 읽히는 엄마

 

『82년생 김지영』에서 「여자아이는 자라서」에 이르러 더욱 가시화되는 할머니-어머니-딸로 이어지는 여성들의 계보는, 할아버지-아버지-아들 세대 간의 갈등과 화합을 그려온 기왕의 한국문학의 지배적 세대 서사를 비켜나간다. 이와 더불어 여성들의 계보가 등장하면서도 이를 좀더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소설로 『친애하고, 친애하는』(백수린, 현대문학 2019)을 읽어볼 수 있을 듯하다. 소설은 현재 열다섯살 아이의 엄마가 된 ‘나’가 약 십오년 전 할머니 집에서 보냈던 과거의 한 시절을 회상하는 형식을 취한다. 여성인물 ‘나’의 회상을 통해 적극적으로 구성되고 재배치되는 여성들의 ‘삼대’는 한국문학사에서 새롭고도 반가운 것이다. 소설의 화자 ‘나’에게 엄마란, 자신과 공유하는 것이 거의 없으며 성격도 외모도 아주 다른, 말하자면 아주 낯설고 어려운 사람이다. 토목공학과 교수인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기계공학과에 진학했다가 학사경고 끝에 휴학까지 했던 ‘나’에게는, 엄마에 대한 선망과 원망, 자조적인 패배감과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모두 있다. 그런 ‘나’가 엄마와 거의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던 밤, ‘나’는 자신을 낳자마자 유학길에 올랐던 엄마에게 “갓 낳은 아이를 두고 갈 만큼 미국이 좋았느냐”(77면)고 묻고 싶지만, 그 대신 “그래서 미국은 엄마가 상상했던 그대로였어요?”(76면)라고 묻는다.

 

나는 엄마가 미국 생활을 이야기하면 할수록 점점 기분이 상했는데, 그것이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엄마가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엄마가 그곳의 일상을 이야기하며 나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힘들었다든지, 외로웠다는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해주길 바랐다. 그렇다면 나 역시 할머니네 집에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날들을 보내기는 했지만 다른 아이들이 엄마의 손을 잡고 유치원 버스가 오길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볼 때면 기억도 나지 않는 엄마가 보고 싶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77면)

 

딸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엄마에게도 자신의 것과 유사한 모양의 상처가 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질문을 하지만, 엄마에게 그 시기는 그들의 모녀관계에 대해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던 시절로 기억된다. 딸에 대한 그리움은 물론이거니와 ‘엄마’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해내지 못했다는 자책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엄마의 유학 시절은 집안의 넉넉한 후원 없이 유학길에 오른 비(非)백인 아시아 여성이 학문의 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했던 치열함으로 기억될 뿐이다. ‘나’의 기대를 배반하면서도 자신이 그것을 배반하고 있다는 의식조차 없어 보이는 엄마는 ‘나’에게 짐작으로만 서성일 수 있는, 낯선 내면을 가진 여자다. 이러한 어머니상, 요컨대 “단 한 번도 결혼 생활과 육아를 개인의 자아실현이나 사회적 성공보다 우선시한 사람이 아니었”(118면)던 엄마의 출현은 엄마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정체화하는지에 있어 각기 다른 입장을 지닐 수 있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이미 현실에서는 통념과 다른 선택을 하며 제각각의 방식으로 움직여나간 엄마들의 존재를 문학적 재현을 통해 예증한다.12)

그러나 『친애하고, 친애하는』은 ‘엄마’가 지닐 수 있는 다양한 정체성—연구자, 딸, 엄마, 시민 등—가운데 어떠한 정체성을 최우선에 두는가의 문제를 제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간다. 이 소설은 한 여성이 통상적으로 여성의 생애주기와 결부되는 젠더롤을 따르지 않을 때 발생하는 비용, 이를테면 ‘유별난 여자’이고 ‘냉정한 엄마’라는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이나 남편의 외도, 가장 결정적으로는 딸인 ‘나’가 받은 상처 등을 정직하게 그려내면서도, 이에 천착해 엄마의 선택을 일탈, 나아가 실패로 의미화하지는 않는다. 대신 소설은 딸 자신이 겪는 변화들에 따라서 엄마에 대한 해석을 바꿀 수 있도록, 그 거듭된 해석의 여지를 열어둔다. 그 여지 위에서 딸은 엄마의 삶에 대해, 할머니의 딸로서 엄마의 삶과 엄마의 엄마로서 할머니의 삶에 대해서도 다시, 다르게 생각해본다. 『친애하고, 친애하는』을 비롯해 최근 한국소설에서는 젊은 여성이 엄마로 대표되는 윗세대 여성을 자신이 당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로 설정하고, 그녀와 맺는 관계를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서사를 지어가는 장면들이 도드라진다.13) 그리고 그 장면들 속에서 이들은 서로가 만들고 있는 움직임을 멈춰 세워 해명을 요구하는 대신, 그 낯선 움직임을 그 자체로 지지하려 노력한다.

소설에서 ‘나’는 아빠를 경유하여 ‘아빠의 아내’로서 엄마를 바라보기보다는, 할머니를 경유하여 ‘할머니의 딸’로서 엄마를 바라보는 데 집중하는데, 그 결과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할머니 ‘예분’에서 어머니 ‘현옥’, 그리고 딸 ‘인아’로 내려오는 여자들의 계보다.14) 정갈한 문장들로 매끈하게 엮이는 듯 보이는 계보의 실상이란, 사랑 없이 부부가 된 남편에게 가정폭력을 당했던 할머니에게서, 아버지로부터 “우리 딸은 사내아이의 머리를 지녔어!”(71면)라는 말을 칭찬으로 듣고 엄마로부터는 죽은 아들을 대신해 “차라리 네가 죽었어야 한다”(125면)는 폭언을 들었던 엄마에게로, 그리고 “너는 아빠를 닮아서 그 모양이냐?”(47면)는 엄마의 말과 “못생긴 여자애들이 뭐든 열심히 하잖아”(65면)라는 남자 선배들의 말 양쪽에 붙들렸던 ‘나’로 이어진다. 한 여자가 살아가기 위해 일상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언어적·물리적 폭력들, 가능성을 규정짓고 한계 지우는 담론들의 영향에 구속받는 동시에 역으로 이를 대물림하며 영향을 가하는 주체가 되기도 하는 이들은 비단 남성들만이 아니다.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나’ 또한 그 영향에 연루된 존재들이며, 이들은 ‘모자란’ 아내, 엄마, 딸로서 어설프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며 관계 맺고 부대끼다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친애하고, 친애하는』은 남성지배질서의 피해자로 여성을 배치하며 역사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도도히 이어지는 여성수난사를 그리는 데 골몰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여성들이 서로를 쳐다보는 장면, 이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들에 주목하면서, ‘나’가 엄마와 할머니의 역사를 읽어낼 때마다 변화하는 그녀들에 대한 해석의 나이테를 그리는 데 집중한다. 무엇보다도 소설은 여성들의 몸을 관통하는 시대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이들을 역사적 존재로 배치시키려 한다. 기실 소설 속 할머니, 엄마, ‘나’는 각각 한국전쟁 시기, 산업화 시기, 지금 현재의 각 세대에 속하는 인물이기도 하거니와,15) 할머니의 벗인 아가다 할머니 또한 1960년 4월시위의 참여자로서의 서사를 부여받는다. 이 인물들이 특정 세대나 집단을 잘 재현/대표하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겠으나, 그럼에도 이 소설은 시대의 영향 속에서 삶을 살아내며 역사에 연루된 여자들의 몸을 경유하며 다시 쓰인 미시적 한국현대사/여성사의 한 문학 버전이라 이를 만하다. 이 소설을 비롯하여 더 많은 문학적 버전들이, 그 서사들 간의 경합이 요청되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하다. 이렇게 구성될 여성들의 역사는 딸들이 엄마들의 자리로 정확하게 가 앉는 데에서 완결되는 대신, 딸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엄마를 해석하고 자신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재해석할 때마다 새로이 확장될 것이다.

 

 

엄마라는 가장 구체적인 난제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로 촉발되어 범람하게 된 여성서사 가운데 모녀서사가 갖는 의의는 무엇인가. 젊은 여성들에게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해석이 문제화된 데 작용했을 여러 요인들을 추정해볼 수는 있다. 일단 모성신화의 베일을 벗겨낸 뒤 젊은 여성들이 자신의 눈앞에 있는 구체적인 엄마들을 기존의 언어에 의존하지 않고 해석해야 할 국면에 이르렀다는 점, 출산이 여성의 의무가 아닌 선택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스스로가 엄마가 됨으로써 엄마의 경험을 추체험하는 방식이 반드시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 결과적으로 젊은 여성들에게 엄마라는 곤경을 처리하기란 더욱 까다로워졌다는 점 등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요인에 대한 다양한 분석만큼이나, ‘엄마’로 대변되는 윗세대의 여성들을 소환하는 동시에 이에 관한 분명한 자의식에 입각하여 계보화를 시도하면서 자신의 길을 모색하는 여성인물 화자의 출현 자체에 충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잠깐 2000년대 한국문학을 떠올려보자. 이 시기 소설은 딸의 부친 살해 욕구를 표면화하며 가부장제 시스템에 대한 전면적 거부를 드러내거나, 어머니와 딸의 연대를 통해 가부장적 규범이 부재하는 모계가족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그려냈다고 평가된 바 있다.16) 최근의 모녀서사들 또한 이 두 경향에 이어볼 수 있을까? 그러나 근래 소설들은 아버지로 상징되는 가부장제를 적대로 설정하는 데 골몰하지도 않거니와, 설사 아버지가 ‘문제’가 될 경우라도 딸에게 그 문제는 그다지 절실해 보이지 않는다(조남주 「가출」, 『창작과비평』 2018년 봄호). 아버지에 대한 해석이 이루어지는 경우라도 그의 존재 혹은 부재를 어떻게든 해석하여 끌어안으려는 부담을 갖기보다는, 거리를 두고 해석하며 평가하는 쪽에 가깝다. 오히려 딸들에게 보다 중요한, 어쩌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엄마와의 관계로 보이는데, 이들이 엄마와 맺는 관계의 내용이 ‘연대’라는 단어로 충분히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두번째 경향과도 변별되어야 할 것 같다. 딸들에게 엄마라는 이름으로 자신과 관계를 맺는, 세상에 태어나 가장 처음 만나는 여자와의 관계는, 성인이 된 후로도 ‘해결’이라는 것이 영영 불가능한 난제에 가까워 보인다. 생에서 가장 처음, 가장 큰 상처를 준 사람이며, 가장 원하던 것을 주지 않고 기대를 무너뜨렸으면서도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는 사람. 엄마가 자신의 ‘엄마’라는 사실은 딸들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도래하여 끊임없이 재해석을 요구하는 사건에 가깝다. 소설에서도 엄마는 딸의 현실에 지속적으로 끼어들고 어떠한 방식으로든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물로 그려진다. 그러니 딸이 당면해야 하는 이 존재, 이 문제는 과거형이나 완료형이 아닌, 진행형이다.

이를테면 「이완의 자세」(김유담, 『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에서 엄마 ‘오혜자’가 ‘나’의 몸에 새겨버린 흔적은 수십년이 지난 후까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나’는 성인이 된 후로도 이 문제에 대해 엄마에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한 채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일 뿐이다. 소설에서 ‘나’가 어린 나이에 맞닥뜨린 아버지의 죽음을 어떻게 처리해야 했는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 빈자리를 곱씹으며 아버지의 존재를 의뭉스럽게 추상화하는 대신, 이 소설이 전면적으로 내세운 것은 가장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엄마의 몸이다. 어린 딸의 눈에도 관능적으로 보이던 몸, 빨간색 브래지어를 입은 가슴의 골 사이에 송송히 땀방울이 맺힌 몸, 성직자처럼 진지하게 자신 앞에 누운 알몸의 여자를 철썩철썩 쳐내려가는 몸, 젖은 돈을 쌓아두고 한장씩 다리미로 다리며 “도둑년 돈이든, 갈보년 돈이든 들어오기만 해라”(210면)라고 말하는 여자의 몸, 나이가 들어 조금 처진 가슴과 진한 고동색의 유두, 탐스럽게 곱슬한 거웃을 가진 몸.

엄마 오혜자는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사기를 당해 빚을 진 뒤로는, 붉은색 브래지어를 입고 24시만수불가마사우나 여탕에서 십여년 때를 밀고 있는 세신사다. 처음 일을 시작하자마자 때를 미는 일이 당장 손에 익을 리 없으므로, 엄마는 밤마다 어린 ‘나’를 파란색 플라스틱 침대 위에 눕혀놓고 나오지도 않는 때를 밀며 연습을 감행한다. “울지 마. 뭐 이깟 일로 울고 그래? 지금 이건 우리 모녀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야”(201면)라며 호되게 혼나던 그 시간을 ‘나’는 ‘추위와 아픔, 수치와 모멸감’을 견딘 시간으로 기억한다. 매일 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사는데!”(203면)라고 고함을 지르며 어린 ‘나’의 몸이 지닌 물성을 매섭게 확인하던 시간은 엄마의 입장에서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이어가기 위해 거쳐야만 했던 일종의 제의였을지도 모르겠다. 알몸의 여자들이 웅성이는 목욕탕, 그곳에서 유일하게 속옷을 입고 다른 여자들의 몸과 접촉하는 세신사라는 직업이 뿜어내는 구체적 생동감에 가려져 있지만, 엄마가 어린 ‘나’의 몸에 가한 것이 폭력이며 아동학대임은 부정할 수 없다. 소아질염까지 걸렸던 ‘나’는 대학원에 다니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타인의 손길이 몸에 닿을 때마다 온몸에 닭살이 돋을 만큼 경직되는 사람으로 자라난다.

 

엄마는 이십년 가까이 아침마다 냉탕에서 정갈한 의식을 치르듯, 최선을 다해 크게 다리를 움직이며 발장구를 쳤다. 손님이 없을 시간이라 엄마의 발장구 소리는 매우 컸다. 사방으로 물이 튈 정도로 큰 물보라까지 만들어냈다. 엄마는 복근과 허벅지를 단련시키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엄마의 전(全)생애의 무게를 발끝에 실어 어디론가 나아가려는 움직임처럼 보였다. 지금 몸을 담근 곳이 냉탕 욕조가 아니고 큰 바다라면 아주 멀리멀리 내가 없는 곳으로 멋지게 유영해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이야말로 엄마는 누구보다 생생했다. 나는 냉탕에서 놀고 있는 엄마를 볼 때면 냉탕 욕조 바닥에 깔린 파란 타일처럼 마음이 시렸다.(232~33면)

 

여자들의 뭉친 몸이 세신사에게 받는 한두번의 마사지로 쉽게 풀어지지 않듯, ‘나’의 마음에 맺힌 멍울 또한 그러하다. 소설 속 ‘나’가 엄마에 대해 가지는 애정과 증오, 엄마를 이해하면서도 원망하는 마음은 켜켜이 엉키고 뭉쳐 어느 하나로는 간단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엄마는 ‘때밀이인데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돈을 잘 벌고, 자식을 잘 키운 여자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때밀이임을 이들 모녀는 한순간도 잊지 못한다. 남들의 시선을 끄는 몸매를 가진 엄마는 그녀 자신이 지닌 훌륭한 알몸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관리할 뿐 아니라 유용하게 활용할 줄도 알지만, 욕탕 안에서는 언제까지나 ‘때밀이’이며 ‘여탕’으로 호명되는 존재다. 세신사라는, 물리적으로 몸을 쓰는 직업을 가진 엄마는 ‘나’의 무용을 절대적으로 후원하고 지지하는데, 실상 무용 또한 물리적으로 몸을 쓰는 일이다. 그러나 컴컴한 지하에서 때를 밀고 남의 등을 밟아주는 ‘노동’과, 밝은 무대에서 선망어린 눈길을 받으며 박수의 주인공으로 서는 ‘예술’은 선명하게 대별되어 나타난다. 지하에서 무대 위로 딸을 올려 보내려는 계급적 욕망이 그 대별에 결부됨은 분명하며, ‘나’ 또한 이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엄마가 냉탕이라는 좁은 세계에서 만들어내는 ‘움직임’에 마음이 시린 것일 테다.

이 소설의 미학은 역설적인 비틀기에서 마련되는 듯 보이는데, 엄마가 남긴 신체 접촉에 대한 트라우마가 ‘나’가 무용가로서 성취를 이루는 데 결정적인 방해 요인으로 작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엄마의 기대를 좌절시키기 때문이다. 「이완의 자세」는 엄마를 벗어날 수 없는 원초적 폭력의 근원지로 악마화하지 않으며, 엄마의 노동을 신성화하거나 낭만화하지도 않는다. 아니 어쩌면 소설은 이 모두를 해냄으로써 모든 극단으로부터 멀어지며 엄마의 존재를 입체화하고, 엄마에 대한 ‘나’의 감정을 어느 쪽으로도 해석하기 어렵게 만든다. 소설은 이런 것들을 보여준다, ‘나’를 먹여 살렸으며 여전히 ‘나’가 기생하고 있는 엄마의 노동의 시초에 ‘나’가 경험했던 폭력이 놓여 있음을, ‘때밀이 딸’이라는 자의식 속에서 자라온 ‘나’가 결국엔 엄마가 자신에게 건 기대를 배반하는 쪽을 ‘선택’함을, 목욕탕 사물함에 ‘나’의 무용하던 시절 사진을 여전히 붙여놓은 엄마와 자신의 경직된 몸의 연원에 관해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지 못한 채 온탕 안에서 몸을 이완하는 딸을.

 

 

미정(未定)의 세계

 

애증이라는 말조차 너무 단순하게 느껴질 정도로 복잡한 감정의 결들, 돌이킬 수 없는 영향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쌓아온 시간들 위에서, 이제 조남주와 백수린, 김유담의 소설 속 딸과 엄마는 ‘서로’라는 사건에 대해 궁리한다. 수많은 관계에 취약하게 노출되는 인간이라는 조건 속에서도, 지금 그녀들은 하필 서로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 속 엄마와 딸들은 각기 다른 조건 속에서 각기 다르게 상처받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대면하며, 무엇보다도 그 다름에 대한 분명한 인식 위에서 말을 시작한다. 이제 딸에게 엄마란 닮을 수밖에 없는 공통의 운명을 지닌 여자가 아니며, 엄마에게 딸은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위태로운 사회경제적 조건 위에 선 엄마들은 딸들이 움직여가는 세계의 변화를 두려움과 기대를 담아 바라보고, 딸들은 스스로를 발견하고 발명해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발 딛고 선 수많은 조건들 가운데에서도 ‘엄마’라는 조건에 천착한다. 예의 ‘엄마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라는 딸의 목소리 안에 갇힌 엄마란 자세히 들여다볼 것도 없이 부정당해 마땅한 존재였다. 작금의 모녀서사는 이를 좇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적으로 엄마를 긍정하고 화해하며 계승하는 식으로 완성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지금의 모녀서사는 무한히 열려 있다. 딸들이 제 나름의 방식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엄마의 영향을 들여다보고 엄마의 존재를 해석할 때마다, 딸의 서사 또한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열리고 새로워진다. 엄마로 대표되는 윗세대 여성의 서사, 그 여성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서사, 이들 여자들의 서사는 유동하며, 끊임없이 재해석된다.

이제 기존의 독법에서 납작하게 눌렸던 것들이 서서히 부풀어 오른다, 이를테면 몸에 남은 폭력과 마음에 남은 상처, 이해하면서도 이해하기 싫고, 원망하면서도 원망하지 못하는 마음, 가장 가까운 동시에 가장 먼 관계 같은 것들. 거듭된 부정형의 문장들과 모순된 문장들의 중첩을 통해서야 가까스로 설명되는 모녀관계. 소설 속 화자들은 그 관계를 규정하는 ‘모녀’라는 이름에 약간의 의심을 품은 채로도, 그것으로부터 도주하는 대신 현실의 모녀서사의 경계를 넓히는 쪽을 택한다. 그리고 모녀서사 안에서 엄마와 딸들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움직인다. 엄마는 딸의 인식 안에서 재배치되고, 딸은 엄마의 인식 안에서 재배치되면서 서사의 경계는 계속해서 움직인다. 더 멀리 나아가지 못했고, 더 많이 부수지 못했다는 슬픔을 먹고 자란 여자들은 어디까지 나아가 무엇까지 바꾸어낼까.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1. 김혜경 「‘어린이기’의 형성과 ‘모성’의 재구성」, 서울대학교 여성연구소 엮음 『경계의 여성들』, 한울 2013, 91~105면.
  2. 류보선 「‘엄마(를 부탁해)’에 이르는 길」, 『돈암어문학』 30, 2016.
  3. 인아영 「움직이는 기혼 여성들」, 『현대문학』 2019년 6월호; 노태훈 「모든 맘들의 이야기」, 『자음과모음』 2019년 여름호.
  4. 드물게 박완서의 소설들이 세대론의 관점에서 접근된 바 있지만 어머니와 딸의 세계를 대비시키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딸이 ‘진정한 어머니가 되는 도정’에 있다고 해석하거나, 세대론적 관점을 도입하면서 아버지-아들이 아닌 어머니-딸 구도가 지니는 변별점에 주목하지 않는 등 아쉬움이 남는다. 좀더 통시적인 관점에서 모녀서사를 계보화하는 학적 작업이 요청되는 바다.
  5. 배은경 「‘청년 세대’ 담론의 젠더화를 위한 시론」, 『젠더와문화』 8, 2015.
  6. 손유경 「한국문학사의 새로운 가능성」,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9년 봄호 33~35면.
  7. 장성규 「2000년대 이후 한국문학에 나타난 가족로망스의 변화 양상 연구」, 『인간연구』 36, 2018; 강수환 「어머니와 딸 그리고 가부장(제)의 관계 변화의 양상」, 『한국학연구』 48, 2018.
  8. 정은경 「‘돌봄’의 횡단과 아줌마 페미니즘을 위하여」, 『문학은 위험하다』, 민음사 2019.
  9. 허윤 「광장의 페미니즘과 한국문학의 정치성」, 『한국근대문학연구』 19, 2018.
  10. 신샛별은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논의에서 ‘엄마정치’를 거론하며, 여성들의 “더 잘 ‘재현/대표’되고 싶다는 강력한 정치적 욕망”에 주목한 바 있다. 신샛별 「프레카리아트 페미니스트: 조남주, 강화길 소설에 주목하여」, 문장 웹진 2017.7.1. 신샛별이 글에서 소개했던 ‘정치하는 엄마들’의 움직임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관련하여 백운희 「사회는 “애나 잘 키워라”지만 엄마들은 “정치한다”」(일다 2019.4.15, www. ildaro.com/8440) 참고.
  11. 김고연주 「우리 모두의 김지영」,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181면.
  12. 신화화된 모성과 여성을 분리시키는 시도는 오래간 지속되어왔으며, 최근에는 『280일: 누가 임신을 아름답다 했던가』(전혜진, 구픽 2019)와 『나는 아기 캐리어가 아닙니다』(송해나, 문예출판사 2019)처럼 여성들 개개인의 임신 및 육아 경험을 통해 어머니 됨에 대한 담론들을 구체화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13. 관련하여 김초엽의 소설들 또한 함께 읽어볼 수 있는데, 「관내분실」 「스펙트럼」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등의 소설에서는 젊은 여성이 윗세대의 여성을, 예컨대 딸이 엄마를, 손녀가 할머니를, (비혈연) 조카가 이모를 해석하고 의미화하는 장면들이 주요하게 나타난다.
  14. 여자들의 종적 계보에 깃드는 세대 차이와 서로 간의 거리감은, 아가다 할머니와 글로리아 할머니 등 혈연관계가 아닌 다른 여자들과의 횡적 관계망을 통해 채워지기도 한다.
  15. 백수린·김세희 「쓰는 존재 폴링 인 백수린」, 『릿터』 2019년 6/7월호 103면.
  16. 장성규의 논의에서는 이 두가지 외에도 ‘기존 가족 형태로 환원되지 않는 대안적 가족 형태에 대한 모색’ 항목에서 최진영의 소설들이 분석되었으나 이 글에서는 세가지 가운데에서 두가지 경향만을 논한다. 장성규, 앞의 글 12~21면. 실제로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한겨레출판 2010)과 『끝나지 않는 노래』(한겨레출판 2011) 등 최진영의 소설을 포함한, 모녀서사에 관한 좀더 다각적인 계보화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