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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 제26회 창비신인평론상 수상작

 

마음의 리얼리즘

김금희론

 

 

임정균 林貞均

1985년 대구 출생.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재학 중.

wolverine10@naver.com

 

* 이 글은 김금희의 소설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창비 2014), 『너무 한낮의 연애』(문학동네 2016), 단편 「체스의 모든 것」(『현대문학』 2016년 7월호), 「사장은 모자를 쓰고 온다」(『릿터』 2016년 12월/2017년 1월호), 「오직 한 사람의 차지」(『문학과사회』 2017년 봄호), 장편 『경애의 마음』(창비 2018)을 다룬다. 이후 인용 시 작품명과 면수만 명기한다.

 

 

1. 물신화된 마음

 

한국사회는 1997년 IMF 구제금융을 기점으로 감정노동 사회로 급속히 변화했다. 고용의 유연화라는 미명하에 양산된 비정규직과 생산의 자동화로 양질의 일자리는 줄어들었고, 고용은 더욱 불안해졌다. 그 와중에 새롭게 창출된 일자리는 대개가 서비스업이었다. 현재 감정노동이라는 조어가 대체로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은 변화된 우리 사회의 일면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하다. 감정자본주의하에서 감정은 계량화할 수 있고 물질적 가치로 환원할 수 있는 대상으로, 다시 말해 상품(사물)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변화는 양극화로 인한 계급갈등을 부추기기보다는 계급 내 갈등을 더욱 조장했다. 계급 내 갈등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타인에 대한 연민을 불가능케 하고 나아가 연대를 와해시킨다.

이를테면 “고양이에 대해서만 이야기해”(「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너무 한낮의 연애』 242면)라고 말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오랫동안 일해온 가구회사에서 권고사직에 해당하는 인사이동을 당한다. 동료들이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단체행동에 돌입하는 동안 그는 회사의 요구에 순응한다. “회사나 노조위원장이나 동료를 믿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로 치자면 네발을 모두 몸체 밑에 말아넣고 그냥 있음으로써 견뎌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236면) 잘 알기 때문이다. 구조조정이 야기한 이기적 생존주의의 전형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남자의 이야기가 남다른 흥미를 끄는 이유는 그가 가진 색다른 부업 때문이다. 회사 밖에서 그는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주는 일명 고양이 탐정으로 업계의 유명인사다. 그가 고양이 탐정이 된 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과거 그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 그의 자살을 막은 것은 사회적 시스템이나 타인의 관심이 아니라 고양이였다. 마침 길고양이가 마당에 낳아놓고 간 새끼를 보살피느라 그의 삶은 연장되었다. 그로써 고양이는 특별한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고양이를 찾아주고 하루 십이만원의 부수익을 얻음에도 그는 불행하다. 그가 원하는 건 삶의 활력을 주는 육체노동과 그로 인한 안락한 삶이기 때문이다. 고양이를 찾으려면 잃어버린 주인들의 하소연을 들어야 하는데, 하소연은 대개 고양이가 아니라 그들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자에게 그건 일종의 감정노동이다. 그래서 그는 고양이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라고 말한다. 이야기는 순태라는 학생의 고양이를 찾아주는 과정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함께 고양이를 찾는 과정에서 그는 순태 역시 세상에 “부적응”(249면)하고 있다는 동질감을 느낀다. 그 순간 그는 고양이 이외의 타자와 공감하게 된다. 그런데 이 대목이 씁쓸하게 읽히는 것은 이제 인간은 고양이와 같은 매개 없이는 타인과 감정을 교류할 수 없게 되었다는 현실 때문인지도 모른다. 화폐의 물신(fetish)이 시장경제에서 상품교환을 가능케 하듯 감정이 노동상품으로서 가치를 갖게 된 사회에서는 감정 또한 물신화된 매개를 필요로 한다.

감정물신의 모티프는 김금희의 소설에 빈번히 등장한다. 「개를 기다리는 일」(『너무 한낮의 연애』)에서 잃어버린 개는 가족을 유지하던 유대의 끈이자, 그 유대가 얼마나 허약한 것이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상징이 된다. 「사장은 모자를 쓰고 온다」에서는 종업원인 ‘나’와 냉혈한 고용주로 묘사되는 까페 사장이 공통의 관심사라고 할 수 있는 경수라는 인물을 매개로 친분을 쌓아간다. 하지만 그 매개의 실체(진실)를 깨닫는 순간 둘 사이의 관계는 여지없이 깨어진다. 「오직 한 사람의 차지」의 화자는 숯불닭갈비를 팔아 큰돈을 번 장인어른에게 빚을 지고 독립출판사를 차렸다가 실패한 인물이다. 아내는 사사건건 “10평방미터 방을 가득 채워야 할 만큼의 닭갈비를 팔아야 하는 돈”(101면)이라며 ‘나’를 쏘아붙인다. ‘나’는 책이란 닭갈비처럼 계량화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내가 보기에는 6천5백마리의 닭과 등가의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아내의 계산법에 기가 질린 ‘나’는 자신이 출판한 책을 환불받기 위해 찾아온 낸내라는 아이에게 “열패감이 뒤섞인 이상한 동질감”(110면)을 느낀다. 그러나 SNS를 통해 알게 된 낸내의 면모는 둘의 관계가 허상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SNS의 해시태그는 사람들이 분절된 감정의 기표를 통해 접합하고, 감정을 교환하는 일례에 불과하다. 이제 일상적인 방식으로 타자와 만나 감정을 교환하는 일은 점점 드물어지고 있다. 직접적이고 일상적으로 부딪치는 타자의 감정은 상품이 된 감정들이거나, 취향과 같이 기표화된 물신을 매개로 교환될 뿐이다.

 

 

2. 감정교육 2.0 혹은 반감정교육

 

감정이 사물이 된 세계에서 타인을 향한 예민한 감수성은 자본주의적 경쟁에 그리 유리한 덕목은 아닐 것이다. 플로베르(G. Flaubert)의 『감정교육』(1869)이 산업자본주의가 박차를 가하던 시기의 감정교육을 다루었다면, 김금희의 첫번째 소설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이하 「센티멘털」)은 감정자본주의 시대 감정교육의 새로운 판본이다. ‘나’는 재수를 하면서 만나게 된 표의 아이를 임신한다. 표는 수능을 망치고 외국으로 떠나버렸다. 그런데 ‘나’는 표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고, “쿨하게 놔주마”라고 생각한다. ‘나’가 재수생들 가운데 가장 볼품없던 표와 연애를 한 이유는 “일종의 연민”(62면) 때문이다.

이 연민에는 다음과 같은 기원이 있다. ‘나’가 열두세살 무렵, 지하방에는 한 여자가 세 들어 살았는데, 그녀가 갑자기 사라진 방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글씨들이 종이에 적혀 있었다. 그것들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는 ‘나’에게 새아빠인 김은 그 감정이 연민이라고 가르쳐준다. 흥미롭게도 ‘나’는 새롭게 배운 그 감정을 곧바로 연민이라고 받아들이기보다는 “사랑과 비슷했지만 온도는 좀더 낮았고, 덜 비밀스럽고 오래된 듯 느껴”(64면)지는 것이라고 다시 정의 내린다.

사춘기 소녀가 자신의 내부로부터 발생하는 감정적 파장의 정체를 어른으로부터 배운다는 점에서 이 대목은 일종의 교양소설(Bildungsroman)로 읽힌다. 루카치(G. Lukács)에 의하면 주인공의 성장을 서사의 주된 목적으로 하는 교양소설은 인물들의 행동을 하나의 특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의식적으로 통제하여 ‘교육수단의 역할’을 하도록 하며, 이를 통해 주인공은 사회적 삶의 여러 형식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사회에 적응시켜나간다.1 그런데 오래전 연민이라는 감정을 가르쳐주었던 김은 성인이 된 ‘나’에게 이제 “제 나이 때마다 할 일이 있는데 감상적으로 굴지 마라.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이지”(80면)라며 연민을 버리라고 교육한다. 김은 연민을 버리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몸소 보여주듯 지하방에 세 들어 사는 아누차라는 태국인을 냉정하게 쫓아내기까지 한다. 신샛별이 지적하듯 이 소설이 던지는 물음은 “연민이라는 감정과 이대로 이별할 수 있는가”2 이것이 이 시대의 성장소설 혹은 교양소설의 마스터플롯이라면, ‘나’는 김의 교육방침에 따라 연민과 이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시간은 남아 있고,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85면)라며 연민의 폐기를 유보한다.

아닌 게 아니라 김금희의 첫 소설집에 실린 일련의 소설들은 반교양소설 혹은 반성장소설이라 부를 만하다. 초기작 「너의 도큐먼트」와 「아이들」 「장글숲을 헤쳐서 가면」(이상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등은 “IMF 세대의 성장담”3을 주로 다룬다고 평가된다. 성장담이 세대론에 근거를 둔다는 점에서 김금희가 여러 좌담을 통해 세대론적 자의식을 보여왔다는 사실은 그러한 평가의 근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4 하지만 김금희가 세대적 경계를 소설로 쓰는 과정에서 “결국에는 그런 것들을 무화시키는 방식으로 얘기가 막 흘러”5갔다고 토로한 데에서 기존의 성장담과는 다른 결을 엿볼 수 있다. 이 소설들을 단순하게 특정 세대의 ‘성장소설’로만 볼 수 없는 것은 인물들이 성장의 문턱에서 요구받는 선택을 유보하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들의 1인칭 서술자들은 1997년에 유년기를 보낸 후 자신의 이야기를 서사화하는 시점에 막 성인이 되었거나, 20대를 거쳐 서른이 된 인물들이다. 이들은 유사한 정서를 공유하는 듯한데, 그 정서란 “그곳에 모인 아파트 아이들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건 우리가, 우리의 부모가 그 변두리 아파트를 여태껏 떠나지 못했거나 오히려 더 변두리로 밀려나야 했다는 공통점 때문이었다”(「아이들」 125면), “아이엠에프는 아버지 배만 좌초된 게 아니라는 위안을 우리 가족에게 가져다주었다”(「장글숲을 헤쳐서 가면」 208면)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불황기를 살아가게 된 좌절감과 동질감에서 오는 애정이다. 이러한 애정이 다름 아닌 연민임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스토아학파에서부터 니체에 이르기까지 반연민적 전통에 의문을 제기한 누스바움(M. Nussbaum)에 의하면 연민은 세가지 인지적 요소를 갖는다. 심각하게 나쁜 일이 일어났다는 크기에 대한 판단. 그런 일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 끝으로 행복주의적 판단. 여기서 가장 까다로운 조건은 세번째인데, 연민의 대상은 내가 세우고 있는 목표와 기획의 중요한 요소여야 하며, 그 목적은 연민의 대상에게도 좋은 일을 촉진해야 한다.6 김금희의 인물들은 갑자기 닥친 경제적 위기(첫번째 조건을 만족시킨다)에 대해 자신들은 전적으로 잘못이 없다(두번째 조건을 만족시킨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역시 세번째 요소인데, 이 인물들의 행복주의적 목표(경제적 성공)는 자기 세대에만 한정되어 있다.

예컨대 「아이들」에는 갓 스무살이던 때 친구 영주의 꾐으로 다단계에 빠진 ‘나’를 데리러 온 아버지에게 영주가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내는 장면이 있다. “우리는 성공할 거라고요. 아저씨가 뭔데 우리가 하는 일에 사기니 뭐니 하는 거예요? 잘 알지도 못하잖아요.”(127면) ‘우리’라는 표현에서 감지되듯 이 세대에게 연민은 같은 세대의 타자들에게만 한정된 감정이다. 다시 말해 행복주의적 목표에서 아버지 세대를 배제함으로써 배타적 연민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서른이 된 ‘나’는 「센티멘털」의 서술자에게 제기된 것과는 정반대의 문제에 직면한다.

불행한 아버지 세대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는가. 이같은 물음은 배타적 연민의 공동체를 형성한 세대에게 연민의 외연적 확장을 요구한다. 갓 스무살 무렵엔 적개심의 대상이던 아버지는 이제 그의 삶 전체를 지배하던 노동의 현장에서 한쪽 발을 잃게 되었다. 이는 연민의 두 조건을 만족시킨다. 그러나 세번째 요소, 아버지 세대가 가진 규범이 ‘나’가 지닌 행복주의적 목표와 화해하고 타협하기란 쉽지 않다. 무분별한 연민의 감정은 불황기 이후 불어닥친 신자유주의적 질서하에서는 위험한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연민의 폐기는 이미 기성세대가 누차 가르쳐온 자본주의적 생존방식이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어떤 감정들을 포기하거나 선택하는 문제가 자신을 사회에 적응시켜나가는 성장이라고 한다면, ‘나’는 “서른은 생각보다 그리 많은 나이가 아니라”(135면)고 하며 성장 자체를 유예한다.

서른이라는 나이는 성장을 유예한 이들에게 유예의 마지노선일지도 모른다. 「릴리」(『센티멘털도 하루 이틀』)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좀더 밀고 나간다. 이 소설의 인물들 역시 서른이다. ‘나’가 술에 탐닉하는 것이나 룸메이트 계아가 릴리라는 약을 복용하는 것은 타자에 대해 무심해지기 위해서이다. 일찍이 그런 무심함을 체화함으로써 연민의 외연을 축소해야만 생존(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하에서 서른에 다다른 인물들이 약과 알코올에 의존하는 것은 성장의 유예가 낳은 결과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이들은 또한 성장하기를 욕망하고 있다. “섹스는 했지만 애인은 아니었고 애인은 아니었지만 한달에 한두번 꼭 만”(218면)나는 사이였던 영태의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결혼이야말로 오랫동안 성장의 통과의례 중 하나였으므로)는 “알코올에 탐닉하며 과체중의 웹디자이너로 늙어가는”(212면) ‘나’에게 성인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시간만 흘려보냈다는 자의식을 불러일으킨다.

이 소설의 미덕은 성장을 종용받는 인물들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유예의 마지노선에서 성장에 관해 숙고할 수 있는 장면을 담고 있다는 데에 있다. ‘나’가 세 들어 사는 집주인의 아버지가 젊은 시절 운영했던 형제라사에는 인근 공장에서 독한 약품 냄새가 나는 옷을 입고 찾아오는 여공들이 많았는데, 그는 불쾌한 그 냄새를 ‘한겨울의 꽃향기’에 비유하곤 한 것이다. 베르그송(H. Bergson)에 따르면 “경험 그 자체는 우리에게 복합물만을 제공”7한다. 악취를 맡을 수 있어야 꽃향기도 맡을 수 있다. 악취를 제거하자고 모든 냄새를 제거한다면, 모든 꽃은 향기 없는 조화에 불과해진다. ‘한겨울의 꽃향기’는 복잡하게 뒤섞인 연속성의 세계를 복합물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가능한 비유이자, ‘나’가 꿈꿔온 “진짜에 가까운 어떤 형태의 위안”(213면)이 아닐까. 이제 ‘나’는 흩날리는 눈을 보며 “어디서 이렇게 꽃잎이 날리나”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런 차이들이란 내게도 무척 사소한 것이었다”(233면)라며 자신을 반성적으로 인식하기에 이른다.

 

 

3. 재현된 마음과 마음의 재현

 

마음은 감정이 표상되는 장소다. 갖가지 이름으로 명명된 감정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마음의 한 상태에 불과하다. 명명된 감정은 언어가 이미 표상이라는 점에서 재현된 마음이다. 감정을 분류하고 명명하는 것은 감정을 인식 가능하고 이해 가능한 대상으로 바꾸어 통제하기 위한 조건이다. 명명은 연속성을 띠고 복합적으로 드러나는 감정에 동일성의 폭력을 가해 분해하고 몇개의 범주로 묶어버린다. 그건 감정이 발생하는 매순간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역사와 문화, 언어의 차원에서 완결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미성년이 성년이 되어가는 통과의례를 거치며 교육의 형태로 무수히 반복되어왔다.

「센티멘털」에서 연민이라는 감정을 사랑과의 온도차와 시간의 격차로 묘사하는 김금희의 방식은 일견 복합적 감정의 파장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듯 차이를 구분하고, 명명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그런데 두번째 소설집에 실린 「반월」의 청소년 서술자가 어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지각하는 장면을 보면, 감정을 구분하고 명명하는 것에 대한 김금희의 비판적 시각이 드러난다. “이모의 얼굴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감정들이 나부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멈춘 뒤에 최종적으로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121~22면) 십대 소녀의 눈에 감정은 복합물의 형태로 지각되고 있다. 소녀는 복잡하게 뒤섞인 감정들 각각의 이름을 아직 교육받지 않았거나 혹은 전에 느껴본 적이 없으므로 그것을 불가해한 것으로, 사랑과 같은 보편적 감정과의 차이 정도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센티멘털」의 어린 서술자가 굳이 연민을 사랑과의 차이로 다시 정의하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반면, 이모가 자신에게 솟구친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 가운데 어떤 것은 배제해버리고 결국 ‘슬픔’을 선택한 행위는 감정을 구분하도록 교육받은 이에게서나 가능한 일이다.

감정의 재단이 교육의 결과라면, 감정을 연속적인 복합물로서 바라보는 일은 아직 순수한 직관을 소유한 미(비)성년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요컨대 김금희가 미(비)성년 혹은 성장을 유예한 인물들을 1인칭 서술자로 설정해온 것은 그들이 간직한 순수 직관을 통해 감정을 다시 순수한 복합물로 환원하기 위한 시도는 아닐까. 작가 스스로 소설가의 임무를 “감정의 기록자”8라고 언급하기도 했으니, 이러한 시도를 김금희식 마음의 재현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하다. 그러나 이런 인물들이 1인칭 서술자로 설정되어 있는 한 이들의 지각은 주관성을 띨 수밖에 없는 한계 또한 갖고 있다.

여기서 첫번째 소설집과 두번째 소설집 사이의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첫번째 소설집이 대체로 성장의 경계에 있는 혹은 성장을 유예한 인물이 감정을 통제하도록 교육받는 시기를 1인칭 서술자의 시점에서 서사화한다면, 두번째 소설집은 “반성과 되돌아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90년대를 호출”9하는 방식으로 당시의 사건과 감정을 시간적 거리를 두고 반성적으로 관조한다. 이러한 반성은 1인칭 서술자가 가진 주관성을 체험적 자아와의 시간적 거리를 통해 극복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너무 한낮의 연애」(『너무 한낮의 연애』)의 필용이 다니던 회사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인사이동 통보를 받고서 십육년 전 종로의 맥도날드를 떠올리는 것이나, 「우리가 어느 별에서」(『너무 한낮의 연애』)의 선희가 고아원에서 온 편지를 통해 과거의 기억과 감정을 되짚어보는 것들이 이러한 예에 해당한다. 성장의 유예를 선택한 인물들도 결국에는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음에 따라 유예의 임계점을 돌파해 어른의 세계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시간의 격차를 두고 감정을 되돌아보게 되는 때가 필연적으로 도래한다.

가령 「세실리아」(『너무 한낮의 연애』)의 서술자는 회고의 플롯을 통해 과거의 사건을 되짚어보고, 감정을 명명하는 일을 유보함으로써 타자의 감정에 가까스로 공감하게 된다. ‘송년’ ‘자유연상’ ‘할리우드 스타일’ ‘구덩이’ ‘그리고 터틀넥’ ‘리와인드’라는 소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소설은 송년회에서 우연찮게 듣게 된 이름으로부터 시작된 회고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 모든 것을 반성하고 재구성하게 되는 플롯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은 반복의 플롯은 지금까지 살펴본 인물들이 보여준 선택의 유보, 성장의 유예와 유사한 의도를 내포한다. 섣불리 결말에 다다르거나 판단하기보다는 오래도록 숙고해보는 일이 시간적 거리를 두고 반복되는 플롯에 의해 서사화될 때 당시의 감정은 좀더 객관적인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회고는 대학 시절 요트부의 송년모임에서 세실리아의 이름을 듣고서 시작된다. 치운과의 삼각관계 끝에 따돌림당하고 자취를 감춘 세실리아에 대한 기억은 모욕적인 발언들로 점철될 뿐이다. 이후 정은은 설치미술가로 활동 중인 세실리아의 레지던스를 방문해 그녀가 얼음송곳으로 파놓은 구덩이를 보게 된다. 그리고 세실리아와 술을 마시며 사소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에 갑자기 그녀에게 애정을 느낀다. 그 순간 세실리아는 “한 번은 말을 걸 줄 알았지, 한 번은. 넌 울 줄 아는 애니까. (…) 치운이 걔는 쓰레기야. (…) 무슨 얘기인지 알겠어? (…) 너 너무 재밌다. 어떻게 이렇게 재밌어졌어? 하지만 이제는 찾아오지 마”(96면)라며 정은을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불러들인다. 그 이야길 듣는 순간 정은의 마음에는 애정 아래 도사리고 있던 복잡한 감정이 얼굴을 드러낸다. 정은은 “별안간 모든 게 수치스러워서 얼굴을 가리며 걷다가, 소리치며 걷다가, 노래를 하며”(97면) 걷는다.

이 수치심 역시 단순한 수치심이 아니라 수면 아래 감정의 복합물을 숨기고 있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 소설이 기억을 서사화함으로써 어떤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면, 이 수치심은 다시 해석되어야 할 하나의 증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이 순간 정은에게도 복잡한 감정의 상당수를 배제하고 수치심으로 재단한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뒤이어 ‘리와인드’라는 소제목하에 재해석되는 것은 세실리아의 작품이다. 과거 치운과 관련한 기억(성적 폭력)은 “얼음송곳에 찔린 듯”(101면) 세실리아의 내면에 끊임없이 구덩이를 파고 있었고, “파고 또 파고 들어가서”(100면) 더 깊은 구덩이를 파는 일이 지속된다. 구덩이는 매우 천천히 만들어지겠지만, 점차 깊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정은에게 일어난다 하더라도 정은이 느낀 수치심은 즉시 세실리아에 대한 이해나 공감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전이적 공감이 일어나는 순간은 다음 송년모임이 되었을 때 세실리아가 지금은 구덩이를 덮는 작업을 하고 있더라는 말을 듣게 된 이후다. 이 시간적 격차를 겪어낸 후에야 정은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랬구나,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나는 왜 우는지도 모르면서 울었다.”(100면) 이제 정은은 자신의 감정을 명명하지 않는다. 그 복잡한 감정 속에는 수치심과 연민과 분노와 애정 등이 서로 구분되지 않는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감정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면서 얼음송곳은 정은에게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때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릴 것이고, 그에 관한 숙고 또한 계속될 것이다.

 

 

4. 공동의 기록

 

마음을 재현하는 소설적 장치로 순수 직관을 소유한 1인칭 서술자를 이용하는 것이 주관성의 한계를 갖고 있다면, 과거를 회고하는 1인칭 서술자 역시 주관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조중균의 세계」(『너무 한낮의 연애』)와 「체스의 모든 것」은 세명의 인물 관계를 통해 마음의 재현 불가능성 그 자체를 폭로하는 방식을 취한다. 「조중균의 세계」의 서술자인 영주는 문제적 인물인 조중균과 조중균을 문제적으로 바라보는 해란을 한발 떨어진 관점에서 서술함으로써 앞선 소설보다 감정을 기록하는 데 있어 좀더 객관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이야기는 출판사의 수습직원으로 들어가 경쟁하게 된 영주와 해란, 그리고 교정직 조중균이 노교수의 책 출판을 맡게 되면서 시작된다.

이 소설에서는 이름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조중균은 성과 이름에 경칭 ‘씨’를 붙여 호명된다. 그가 이렇게 불리는 까닭은 직급이 없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사랑, 우정, 연민이 열세종이 되어가는 동안 분노, 적대, 모욕이 우세종이 되”10어버린 사회에서 고유명이 아닌 직급으로 불린다는 건 일상화된 분노와 적대와 모욕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직급으로 호명되는 것과 고유명으로 호명되는 것 사이에는 모욕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권력이 존재한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호명은 관계를 표상한다. 그렇다면 해란은 왜 “해란씨”라고 불리는가. 적당한 거리감과 적당한 친분이 뒤섞인 해란씨라는 호명에는 위계와 존중이 교차하는 맹점이 있다. 거기엔 은폐된 모욕이 존재하고 그 모욕을 감추려는, 혹은 모욕을 주었으나 모욕을 주고 있지 않다고 믿게 하는 환상이 드리워져 있다.

두 사람을 호명하는 방식에서 예견되었듯 영주는 해란과 조중균의 상사 노릇을 한다. 표면적으로 영주와 해란은 정규직을 놓고 경쟁하는 동등한 계약직 직원이지만, 호칭을 통해 드러난 위계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유지되면서 결국 해란과 조중균은 해고되고 영주만 남는다. 영주가 마지막에 떠올리는 ‘조중균의 세계’는 조중균이라는 인물의 세계만을 지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해란의 세계이기도 하며, 영주가 남겨진 세계를 되비춘다. “그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그 세계는 ‘나’에게 부정의 형식으로 간신히 포착될 뿐이다. “거기에는 육 인용 테이블이 없었다. 복수를 잊어버린 조중균씨도 없고 빈 시험지에 자신의 이름을 적는 조중균씨도 없었다. (…) 문장과 시와 드라마는 있지만 이름은 없는 세계, 내가 간신히 기억하는 한, 그것이 바로 조중균씨의 세계였다.”(71면) 그러니까 조중균의 세계를 통해 반추된 영주의 세계는 문장과 시와 드라마라는 낭만이 없는, 이름만이 존재하는 메마른 세계이다. 부장으로부터 “영주씨, 영주씨는 무슨 힘으로 사나?”(70면)라는 말을 앞으로 계속해서 듣게 될 그 세계에 영주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것은 왜 하필 서술자인 영주일까. 이 의문에 대한 실마리는 「조중균의 세계」와 유사한 인물 관계와 서술 상황을 갖고 있는 「체스의 모든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1999년의 세기말 분위기”(69면) 속에 대학을 다닌 세 남녀의 이야기를 영지의 시점에서 서사화하는 한편, 시간의 격차를 두고 회고하는 형식을 취한다. 서술자 영지가 보기에 노아는 “동기나 후배들과는 잘 지냈지만 교수나 선배들과는 자주 싸웠”(70면)는데, 이로 미루어볼 때 그는 같은 세대에 대해서는 연민을 갖고 있으나 자신보다 윗세대에 대해서는 적개심을 지닌 인물이다. 그런 노아가 체스의 규칙을 놓고 국화와 갈등을 보이는 동안 “이상하게 분노에 휩싸이지도 속을 끓이지도 않”(78면)은 것을 두고 영지는 겉으로는 국화에게 무심해 보여도 실은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노아의 무심함은 뜨거운 사랑을 숨기기 위한 가장된 쿨함이다.

반면 국화는 세계가 요구하는 무심함을 너무 일찍 체화한 듯하다. 노아와 국화의 무심함에 결정적 차이가 있음이 감지되는 장면이 있다. 콩국수에 어울리는 것이 소금인가, 설탕인가를 두고 노아가 동아리 선배와 다툼을 벌일 때 영지를 포함한 모두가 어쩔 줄 몰라하는 동안 국화는 무심히 국수가락을 넘긴다. 영지는 국화의 무심함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저 무심함은 어딘가 공격적인 데가 있지 않은가.”(71면) 영지에게 국화의 무심함은 피아의 구분도 없고, 사랑이나 적개심 같은 감정조차 배제된 차가운 것이다. 국화는 “부끄러움을 이기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하곤 했는데, 노아에 비해 경제적으로 빈곤했던 국화의 대학생활은 살아남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으며, 삶에 일상적으로 개입하는 모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상태로 그걸 넘어서는 사람, 그렇게 이기는 사람”(81면)이 될 필요가 있었다.

겉보기에 영지의 회고는 무심함을 요구하는 세계에 나름의 방식으로 대응해온 노아와 국화의 실패기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몇년이 흐른 뒤 영지는 노아와 국화를 각각 재회한 이후 그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그리 순탄치만은 않은 삶을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 노아는 결혼에 실패했고, 예전보다 더욱 심한 우울증에 빠졌으며, 국화는 빚에 시달리다 자살을 결심한 순간 “주민등록번호가 뭡니까”(85면)라고 물어온 사회적 시스템의 비정함에 이겨낼 수 없는 모욕을 느꼈다. 이 소설에서 주목할 것은 이같은 실패기가 다른 누구도 아닌 영지에 의해 서술된다는 점이다. 영지는 마치 처음부터 그들을 지켜보고 회고하기 위해 만들어진 서술자처럼 보이지만, 그녀 또한 세계가 요구하는 무심함을 체화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다가올 시대를 맞이할 수 없는 무력한 개인일 뿐이다. 그럼에도 영지가 국화와 노아처럼 세계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까닭은 정작 그녀가 자신에 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재회한 노아가 여전히 국화를 떠올리며 체스에 관해서는 자기가 틀렸었다고 말할 때 영지는 겉으로는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지만 속으로는 독한 말을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삼키듯”(89면) 밀어넣고 있다. 영지 스스로가 자신의 삶에 관해서는 거의 서술하지 않기 때문에 영지의 태도는 독자에게 다소 의문스럽게 다가온다. 사회적 요구에 어떤 식으로든 적극적으로 반응해온 노아와 국화에 비해 적정 온도의 무심함을 체화한 것은 오히려 영지가 아닐까. 오랜만에 만난 노아에게서 영지는 “눈앞의 전골이 우리보다 더 높은 온도로 끓고 있는 것이 아닐까”(87면) 생각할 정도로 자신의 감정이 식어버린 것을 의식한다. 영지가 노아와 국화를 내적으로 차갑게 끊어냈다는 것은 세 인물 가운데 영지만이 세계가 요구하는 비정한 규범을 내면화한 유일한 인물이라는 뜻은 아닐까.

여기에서 우리는 김금희식 리얼리즘의 요체라고 할 만한 것의 윤곽을 어렴풋하게나마 만져볼 수 있다. 「조중균의 세계」의 서술자 영주와 마찬가지로 다소 수동적인 영지를 통해 「체스의 모든 것」이 재현하고자 하는 세계는 어떤 모습인가. 「조중균의 세계」에서 영주의 서술을 통해 드러나는 실상은 조중균이 속한 세계가 아니라, 바로 영주가 속한 세계였다. 그 세계야말로 보통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이지만, 실상은 알고자 할수록 멀어져서 ‘조중균의 세계’를 통해 반추해봄으로써만 겨우 인식될 뿐이다. 마찬가지로 「체스의 모든 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체스의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할수록 체스가 아닌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고, 그럴 때에야 겨우 알게 되는 종류의 것이다. “그것을 절실히 느끼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가 없고,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소리가 새어나가 버려서 도저히 그럴 수는 없고 그것 외의 것들을 말함으로써 그것의 위치를 지정하는 방식”11을 통해서만 겨우 드러나는 소설 속 공동(空洞)이란 다름 아닌 충분히 말해지지 않은 서술자 영지의 세계이다.

요컨대 김금희의 리얼리즘은 재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전체(全體)와 비전체(非全體)의 구도로 재현한다. ‘체스의 모든 것’(전체)은 소설 속에서 말해진 노아와 국화의 관계를 표상하지만, 말해지지 않은 것, 즉 체스의 모든 것 외의 다른 모든 것(비전체)은 서술자 영지의 삶(영지의 모든 것)과 관련된 것이다. 영지의 관점에서 문제적으로 보이는 노아와 국화에 관한 서사는 정작 영지를 문제적 개인으로 재조명한다. 세계가 요구하는 것을 체화했다는 점에서 영지는 「조중균의 세계」의 영주와 마찬가지로 ‘살아남은 자’이며, 세계의 총체성을 자신의 내면성으로 확립한 개인이다. 그런데 전체와 비전체의 구도로 드러나는 소설 속 세계의 총체성이란 살아남은 자들인 서술자가 텍스트의 위상에서 비전체성을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끝내 완결될 수 없고 도달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영지는 텍스트의 서술적 차원에서는 비전체를 점유하고 있으나, 표상된 소설의 세계 속에서는 세계에 융화되어 도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역설적이게도 전체를 점유한다. 이와 같은 역설은 김금희가 재현하고자 하는 것의 실체가 가진 역설이기도 하다.

 

 

5. 마음의 동역학은 가능한가

 

앞의 두 소설이 여전히 1인칭 서술자를 택하면서도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선택한 소설적 장치는 다른 두 인물과의 상호주관적인 관계를 통해서였다. 그 방식은 김금희가 재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윤곽만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었다. 그건 소설 장르의 한계일까, 혹은 대상 자체가 가진 속성일까. 『경애의 마음』에서는 상호주관적 관계를 3인칭 서술자를 통해 서술함으로써 마음의 재현을 더욱 객관화하려는 듯하다.

일종의 ‘오피스로맨스’물인 이 소설은 회사에서 만나게 된 경애와 상수 두 인물 사이의 초점 이동을 통해 플롯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 인물에 초점화된 서술은 다른 인물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되비춘다. 그러나 ‘경애의 마음’에 비친 상수는 결코 초점화되어 서술되는 상수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경애 또한 마찬가지다. 초점의 이동을 통해 드러나는 미묘한 불일치는 이 소설의 테마이기도 하다. 독자들은 이러한 서술방식을 통해 한 인물의 내면에 다각도로 접근하여 좀더 온전한 한 개인을 구성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렇게 해서 드러나는 이야기는 ‘오피스로맨스’물의 표피를 두르고 있으나, 속살은 가까스로 견디는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경애는 1999년에 있었던 화재사건과 구조조정이 야기한 파업과 정리해고의 광풍 후에도 가까스로 살아남았다는 자의식을 갖고 있다. 이런 의식은 “사람이 어떤 시기를 통과한다”거나 “‘나아간다’라는 느낌”(268면)이 아니라 견뎌내는 것에 가깝다. 계속해서 살아남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폐기하는 차가운 태도가 요구되는데, 그 차가움은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한 온도”(315면)로 묘사된다. 이 마음의 온도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 낙하산으로 입사한 상수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것일 수도 있지만, 상수 역시 자신의 위치와 조건에서 여러모로 견뎌야 하는 삶을 살아내고 있다.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 곧 생존과 직결되는 비정한 세계임에도 이 소설이 보여주는 희망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여전히 타자와 공감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상수는 SNS에서 ‘언니’라는 페르소나를 매개로 타인들과 교류한다. 그 과정에서 경애가 이제는 유부남이 되어버린 과거의 애인에게 여전히 마음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상수는 “사랑이라거나 연애라거나 하는 것에 복무하는 이들이 일종의 노동자에 불과하다는 사실”(153면)을 경애에게 알려주고 싶어한다.

이 대목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상수가 사랑을 권력의 위계로부터 발생하는 위치에너지의 방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를 자각한 것은 오래전 상수가 재수학원에 다닐 무렵으로, 그 학원에는 생활조교라는 사람이 있어서 그의 생활을 마구 조종해나갔는데 “그가 양손을 허리춤에 얹고 ‘실시’ ‘그만’ ‘복창’ 같은 지시어로 상수의 신체를 조련할 때면 상수의 마음은 마치 팝콘이 터지듯 온갖 감정들로 터지곤 했다. 라면에만 열렬히 반응하던 여름 이전의 마음과는 달랐다. 거기에는 모멸감도 있었고 공포도 있었으며 분노와 혐오와 슬픔이 있었지만 아주 뚜렷하게는 분명 이상한 방식의 갈구”(147면)가 있었음을 깨닫는다. 상수에게 복합적 감정은 권력관계라는 회로를 통과하며 애정이라는 하나의 감정으로 수렴한다.

권력관계를 위계의 위치에너지로 환원하는 것은 일견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마음 또한 그처럼 동역학적 관계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일까. 처음에 상수는 느닷없이 솟아난 생활조교에 대한 애정에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결국에는 “이 육체의 고통을 종결할 수 있는 사람은 생활조교뿐이니까 그를 향해 분노와 원망과 울분이 달려가다가 끝내는 자기가 이 관계에서 완전히 약자가 되어 그의 선처, 용서, 동정과 연민을 바라게 된다는 걸 투항하듯 동의”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감정이 “권력의 격차 속에 환상처럼 오는 것”(148면)임을 깨닫는다. 계약기간이 끝난 뒤에 갑자기 존댓말을 하고, 따뜻한 말로 그를 격려하는 생활조교의 달라진 태도 때문이다. “시작도 진행도 종료도 모두 마음의 일이었는데 그 마음을 흐르게 한 동력은 자가발전이 아니었다는 것,”(150면) 자신의 마음에서 솟아났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실은 외부의 요인에 의해, 더 정확히는 권력관계에 의해 생성된 마음의 위치에너지의 변화인 것이다.

상수가 자기 마음에 생긴 불가해한 감정을 이해하는 태도는 나름의 방식으로 합리화하기 위한 시도이다. 어떤 대상을 역학관계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계량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또한 감정의 원인이 내부가 아닌 외력의 탓으로 손쉽게 돌릴 수 있다는 뜻에서 “상처를 덜 받을 수 있다는”(150면) 이로운 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모든 감정들에 대한 무한 회의”(150~51면)로 이어질 수 있는 맹점 또한 갖고 있다. 모든 감정들을 회의한다는 건 곧 비정한 세계의 조건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수는 자신이 속한 “세계란 터무니없이 복잡하고 감정적이고 불안정한, 측량되지 않”(350면)는 세계라는 인식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경애에게 SNS를 통해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176면)라고 조언하게 된다.

마음은 부분화될 수 없는 것이다. 막스 베버(M. Weber)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마음은 영원히 주술적이고 비계몽적 영역으로 남아 있다. 마음의 동역학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마음이라는 감정의 영토에 관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의 형태로 알려진 것이 어느 하나 없으므로, 전체와 비전체의 구도로만 간신히 그 윤곽을 그려볼 따름이다. 그렇게 재현된 세계는 타자에 대한 연민을 버려야만, 무심함을 체화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세계다. 무심함이 일상적인 마음의 온도가 되어버린 차가운 세계에서 딱히 저항하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그저 비정한 상온에 융화되는 것을, 그렇게 가까스로 살아남아 견디는 삶을 비난할 수는 없다. 소설이 이런 의문에 굳이 답할 필요도 없다. 작가는 이러한 세계에서 통제되고, 소모되고, 부서지고, 마모된 감정들의 양태를 세밀하게 바라보고 기록할 뿐이다.

이 세계에서 개인의 자아 탐색이나 총체성의 추구 같은 것은 사치이거나,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비정함을 체화함으로써 살아남은 자들만이 서술자가 될 수 있으므로 그들의 서사는 총체성을 획득하겠지만, 그렇게 재현된 세계에서 총체성은 환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소설의 소임은 그러한 재현에 철저히 실패함으로써 그 재현 불가능성을 공동의 형식으로 기록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김금희의 소설을 읽어내며 얻은 작은 확신은 다시 ‘리얼리즘’의 시대가 왔다는 것이 아니라, ‘다시’ 리얼리즘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삶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볼 수 있도록. 이제 늘 그곳에 있었지만 말해지지 않은 것들에 관해 물을 때이다.

 

 

  1. 게오르그 루카치 『루카치 소설의 이론』, 반성완 옮김, 심설당 1998, 153면 참고.
  2. 신샛별 「우리 시대의 감정생태 보고서: 김금희론」, 『문학동네』 2016년 가을호 104면.
  3. 같은 곳.
  4. 이에 대해서는 김금희·정세랑·최은영·허희 「세대·젠더·문학:30대·여성·소설(가)」(『문학 선』 2017년 봄호)와 김금희·황예인 「작가란 되어가는 존재」(『문학과사회』 2017년 겨울호) 참고.
  5. 김금희·황예인, 앞의 글 27면.
  6. 마사 누스바움 『감정의 격동: 2 연민』,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5, 587면 참고.
  7. 질 들뢰즈 『베르그송주의』, 김재인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6, 23면.
  8. 김금희·백가흠 「너무 소설의 미래, 김금희의 마음」, 『AXT』 2019년 5/6월호 63면.
  9. 김금희·정세랑·최은영·허희, 앞의 글 20면.
  10. 신샛별, 앞의 글 112면.
  11. 김금희 「창작노트: 우리가 어떻게 그럴까」, 『ASIA』 2016년 가을호 21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