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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김나영 金娜詠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통감하는 주체, 유무의 경계 너머의 말들: 최근 시의 주체에 덧붙여」 등이 있음. kfbs4@naver.com
김봉곤 金蓬坤
소설가. 소설집 『여름, 스피드』 등이 있음. writeroom@naver.com
박연준 朴蓮浚
시인.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 등이 있음. gkwlan@hanmail.net
박연준 안녕하세요. 이번호부터 김나영 평론가와 문학초점을 맡게 된 박연준입니다. 오늘 초대손님으로 김봉곤 소설가를 모시고 이 계절에 주목할 만한 소설 세권과 시집 세권을 골라 이야기를 나눠볼 텐데요. 우리 문학의 새로운 흐름을 짚어보고 그 심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되리라 기대합니다.
김나영 안녕하세요. 앞으로 두 계절 동안 박연준 시인과 함께 이 코너를 진행하게 되어 기쁩니다. 가을을 준비하는 여름의 한복판에서 여름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김봉곤 소설가와 함께하게 되었네요. 시작도 하기 전에 모든 것이 갖춰진 느낌입니다.(웃음)
김봉곤 안녕하세요. 그저 뵙기만 해도 좋을 두분과 문학초점에서 만나 더욱 기쁘고 반갑습니다.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창비)
박연준 먼저 박상영의 연작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에 대해 얘기해볼까요. 첫번째 소설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문학동네 2018)를 낸 지 일년도 안 되어 두번째 책이 나왔습니다.
김봉곤 저는 연작소설집이라는 네이밍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책이 있었나 싶어요. 네 계절에 걸쳐 발표된 네편의 중단편을 모았는데, 이야기들의 아귀가 잘 들어맞고, 그러면서도 살짝살짝 틀어지는 부분이 있어서 더 재미있게 읽었어요. 소설 자체뿐 아니라 소설 밖에서도 독서행위를 불러일으키고 또 이어지게 하는 것이 유의미한 전략이자 흥미로운 ‘빅픽처’로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김나영 들어가는 소설인 「재희」에서 던지는 “ 우리 왜 이렇게 태어났냐./ 모르지 나도”(46면) 같은 가벼운 물음과 응답은 마지막 소설 「늦은 우기의 바캉스」에서 계속 반복되는 말인 “그는 도대체 나를 왜 이곳에 부른 것일까” “나는 지금 도대체 왜 이곳에 와 있는 걸까”(300면)로 무겁게 이어져요. 이 두쌍의 질문이 거울상처럼 짝을 이뤄서 이 소설집을 감싸고 있어요. 질문과 질문 사이사이에 삽입된 아름다운 연애담은 마치 이 책의 형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연작소설이라는 형식에 맞춘 작품의 배치 순서 역시 탁월했다는 생각입니다. 질문의 의미와 그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흔한 방식이 아니라 거듭 질문하는 일이 무용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연출은 박상영 소설의 특징일 뿐만 아니라 최근 소설의 주목할 만한 한 경향 같아요.
박연준 분절된 이야기 같으면서도 장편을 읽은 듯한 기분이 들죠. 소설을 읽으면서 저는 제 이십대 초반의 ‘격정적인 찌질함’과 자기파멸적인 감정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읽는 도중에 그 시절의 저를 이해하게 됐어요. 특히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좋았는데요, 이십대는 사랑을 모르면서 ‘사랑에 대한 간절함’으로 사랑의 중심을 관통하는 시기잖아요. 박상영은 우리가 지나온 시간들이 어떤 형상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미숙하고 치기어리고 열정적이고, 무엇보다 아름다웠는지 깨닫게 해주는 것 같아요. 저는 ‘재희’라는 인물에 무척 몰입했는데, 그래서인지 영이 재희와 친하게 지내다 나중에 헤어지는 게 마음이 아팠어요.
김봉곤 오히려 연애했던 상대들이랑 헤어질 때는 괜찮았는데 재희는 인생에 다시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또다른 남자는 있겠지만 재희 같은 친구는 다시없을 것 같은. 그래서 더 슬펐어요.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이중고를 겪고 있어요. 퀴어이기 때문에 겪는 고충이 있고, 또 ‘슈퍼 을’로 살면서 사회생활을 하는 새내기의 애환이 있고요. 사랑의 초년생이자 사회의 초년생인 거예요. 소설을 한번 읽기로 마음먹으면 어떻게든 마음 붙일 곳을 찾게 되잖아요. 많은 독자들이 이 두가지 요소에 이입했을 것 같아요.
김나영 그렇게 보니까 제목이 절묘하네요. 계속해서 속하고 싶어하지만 안정된 자리를 얻지 못하고 거듭 배척당하는 공간은 ‘대도시’이기도 하고 ‘사랑’이기도 해요. 그곳에 잠시라도 소속되기 위해서 화자는 수동적인 삶의 방식을 자발적으로 취하는 아이러니를 겪기도 하지요. 여기에 ‘법’이라는 말을 붙여서 아이러니의 힘이 증폭되는 것 같아요. 법이 어떤 고정된 틀이나 약속이라면, 그 속에 밀어넣을 수 없는 게 사랑이라는 감정이기도 하잖아요. 더군다나 이 대도시가 한국이라는 지정학적 특성을 함의할 때 저 법과 퀴어의 사랑은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말들인지 우리는 최근 많이 경험해서 알고 있지요. 나를 밀어내는 곳으로 거듭 투신하려는 개인의 고투를 보편과 일반을 지시하는 ‘법’이라는 말로 감싸둔 데에서 박상영 소설 특유의 풍자를 발견하게 돼요.
김봉곤 표제작인 「대도시의 사랑법」은 정말 용감한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최근 외국의 영화와 드라마를 보면 오히려 에이즈 서사가 퇴행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80년대로 돌아가요. 그 질병에 무지하던 시기, 그 질병이 죽음을 가져오는 스펙터클이 있던 시대로 되돌아가 뻔한 신파에 그치는데, 박상영은 지금, 한국에서 이 이야기를 이토록 담백하게 써냈어요.
김나영 저도 ‘카일리’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서 이렇게 산뜻하게 에이즈 문제를 쓸 수도 있구나 싶었고, 이것이 박상영의 강점이라 생각했어요. 김건형 평론가가 박상영의 첫 책을 두고 ‘농담하는 퀴어라는 신인류의 등장’이라고 말한 것이 계속 회자되리라 생각하는데, 소설에서 일관되게 보여주는 여유며, 유머를 잃지 않는 태도 역시 작가로서의 용기와 관계가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점이 한국소설의 새로운 풍자를 주도하는 힘이 되지 않을까요.
박연준 아무리 용감한 사람이라 해도 겁을 간직한 채로 용감해지기 마련인데, 박상영의 화자들은 빈정거리거나 우스갯소리를 해서 고통을 희석하려는 태도가 엿보여요. 재희와 영이 시시덕거리는 것도 사실은 본인들 안에 약하고 상처 입은 자아가 많아서일 텐데요, 유머가 방어기제인 거죠. 저는 쌜린저(J. D. Salinger) 소설이 떠오르더라고요.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콜필드가 변주되는 느낌도 받았어요. 시니컬하지만 웃기고, 투덜대면서도 인류애가 느껴지기도 하고요.(웃음) 「우럭 한점 우주의 맛」에서 나를 미치게 하는 애인이나 운동권 출신의 새로운 꼰대상을 보여주는 방식도 신선했지만 무엇보다 어머니와 영과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정체성 문제가 중요하게 느껴졌어요. 영은 어머니에게 사과받고 싶어하지만 어머니도 영에게서 상처를 받잖아요. 이 대립구도가 팽팽하게 맞서는데, 결국엔 나의 정체성을 인정받고 싶어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랑은 결국 정체성의 문제잖아요. 알랭 바디우(A. Badiou)는 『사랑 예찬』에서 사랑을 ‘선언’하는 것이 진리를 구축하는 시작단계로 이행하는 것이어서 중요하다고 말해요. 선언을 통해 정체성을 인정받은 사랑이라야 나아갈 수 있거든요. 모든 사랑이 고비를 겪지만 동성애의 사랑은 내 안의 혼란과 상대방의 혼란, 밖에서 보는 시선과 판단 때문에 그 혼란이 가중될 텐데, 이 소설에서 그걸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김봉곤 저는 이 소설을 세번 읽었거든요. 두번째까지도 이 소설의 마지막이 위악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생각을 멈추고, 고작 지고 뜨는 태양 따위에 의미를 부여하며 미소 짓는 그녀를 그저 바라보는 일. 그녀의 죽음을 기다리는 일.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 채 죽어버리기를 바라는 일뿐이다.”(181면) 그런데 세번째 읽으니까 이 마지막 문장이 너무 슬픈 기원으로 다가오더라고요.
박연준 저는 마지막에 독자의 몫을 남겨주지 않고 왜 다 설명해줬을까 아쉬웠어요. “그를 안고 있는 동안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았는데./마치 우주를 안고 있는 것처럼”(180면) 같은 대목에서 같이 눈물 날 것 같았는데, 갑자기 정돈을 해줘서 화가 났거든요.(웃음) 세번째 읽을 땐 달랐다고요?
김봉곤 처음에는 갑자기 센 척하면서 왜 이렇게 끝나나 싶었죠. 그런데 다시 보니 표면적으로는 독한 문장이지만 그 안에 따뜻함, 순함, 진심이 엿보이는 게 과연 이런 것이 박상영적인 거구나,라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김나영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가 나를 모르는 채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것, 엄마의 사랑이 훼손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 이런 염원을 품게 된 과정을 생각하면 ‘엄마에게 이해받고 싶다’가 아니라 ‘엄마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이 훨씬 애틋하지요. 저는 박상영이 이번 소설집에서 세가지 형태의 사랑을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엄마, 애인, 그리고 재희에 대한 사랑요. 재희와의 일화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소설집 전반에 재희를 할애하고 있지만 정작 재희와의 미묘한 감정에 대해서는 그다지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헤어진 연인 규호처럼 내 세계에 있는 사람과의 감정 교류, 엄마처럼 내가 사랑하지만 싸워야만 하는 세계와의 갈등은 충분히 그려진 데 반해서요. 재희와 나를 애매모호하게 하나로 뭉뚱그리고 말았다는 점이 아쉬웠어요. 앞서 말했던,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질문, ‘우리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나는 왜 여기에 있을까’ 하는 질문과 연결시켜 둘의 관계를 조금 더 얘기해줬다면 좋았을 것 같아요.
박연준 이런 미묘한 관계가 꼭 동성애자인 남자 친구나 이성애자인 여자 친구 간의 문제는 아닐 거예요. 오래 보아온 관계가 어느 순간 애매모호하게, 형태를 알 수 없는 지점으로 향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요.
김봉곤 그건 어쩌면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작업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제 경우에 비춰봐도, 엄마나 남자에 대한 얘기는 쓸 수 있겠는데 이성에 대해 쓰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거든요. 타인이 되어보는 일보다 내가 나일 수 있는 조건을 더 많이 천착해왔으니까요. 앞으로 그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는 게 독자에게는 기대이고 작가에게는 과제가 아닐까요.
조남주 『사하맨션』(민음사)
김나영 『사하맨션』은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으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조남주의 신작 장편소설입니다. 이 작품은 ‘타운’이라는 가상공간을 소설의 배경으로 설정해요. “세계에서 가장 작고 가장 이상한 도시국가”(33면)인 타운은 일곱명의 공동총리제도로 운영이 되는데, 정체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진 총리들은 이곳에서 “최고 수준의 연봉과 종신에 가까운 고용 보장, 절대적인 권력”(28면)을 가지고 있어요. 타운에서는 주민권을 가진 L, 주민 자격이 되진 않지만 체류권을 받은 L2, 그리고 여기에 속하지 못하는 “아무것도 아닌, 마땅한 이름도 없는”(15면) ‘사하’로 사람들의 계급을 나눕니다. 사하는 일용직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배척받은 자들이에요. ‘사하맨션’은 이들이 사는 공동주택이고요. 이들은 타운에 살면서도 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존재하죠.
박연준 작가가 새로운 시공간을 창조하는 건 어려운 일이기에 이 소설의 배경 설계는 의미있는 시도로 보입니다. 작가는 도시국가를 건설하고 사하맨션의 세대들을 카메라로 하나씩 들여다보듯 그리고 있어요. 그러면서 삼십년 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사건을 전개합니다. ‘작가의 말’에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12년 3월이었다. 쓰고 고치는 7년 동안 많은 것이 달라졌다”(370면)고 했는데, 그사이 우리 사회가 겪은 수많은 사건들이 연상되면서 세월의 변화가 반영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김봉곤 신선한 설정이 돋보이는 소설이에요. 기업이 국가를 사유하면서 펼쳐지는 설정들이 정말이지 그럴 법해서 개연성 있고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런데 시작이 다소 불친절한 게 아닌가 싶었어요. 나중엔 이 소설의 첫 장면이 이해되지만, 처음 읽었을 때엔 조금 종잡을 수 없었달까요. 소설 전반에 여러 설정이 밀려들면서 갈피를 잡기가 어려운 면이 있었습니다.
박연준 작가 스스로도 사회문제나 시의성 있는 주제에 관심이 많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래서일까요? 어찌 보면 사회 현상과 메시지가 주요해서, 소설 속에서는 어느 한 인물이 제대로 도드라지지 않아요. 맨션이라는 한정된 공간 때문인지 전개방식 때문인지 인물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거나 얽혀 행동하지 않고, 한 인물이 움직이면 다른 인물들은 가만히 정지해 있는 것 같은 인상도 받았습니다.
김나영 저 역시 캐릭터의 형상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어요. 소설적 배경이나 사건은 있지만 그 속에서 움직이는 인물들이 너무 평평해 보여요. 우미라는 인물은 타운의 목적에 의해 철저히 도구화된 존재로 이른바 생체실험을 당하는데, 이 인물의 감정을 좀더 핍진하게 그렸으면 좋았겠다 싶어요. 가령 메르스사태, 세월호사건 이후 우리는 국가가 국민을 어떻게 방치하는지, 국민의 안전을 위한 장치에 국가가 얼마나 무지하고 무력한지를 확인했잖아요. 우미를 대하는 타운의 태도에서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떠올릴 수 있었는데, 문제를 암시적으로 제기할 뿐 소설적 대안을 제시해주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김봉곤 어쩌면 작가는 사하맨션의 인물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만 보여줄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러나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하나의 흐름으로 꿰면서 이야기를 전개하다보니 몇몇 인물이 아쉽게 그려진 것도 같아요. 저도 우미가 맥거핀인 듯하다 갑자기 주요 인물로 변하면서 뭔가 더 보여주길 기대했는데 인물이 더 살아나지는 못한 것 같아요. 저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직접적인 대사로 처리되는 점이 아쉬웠어요. 하지만 이렇게라도 발화하지 않으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사람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개탄스러운 현실의 반영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김나영 작가가 처음부터 인물 중심으로 소설을 전개하겠다고 마음먹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개인의 구체적인 삶을 먼저 조명하고 그 뒤에 전체를 조망하고자 했달까요. 그렇지만 인물 간의 변별력 혹은 캐릭터의 다양성에 대한 아쉬움은 내내 남았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비슷비슷하게 살 수밖에 없나’ 하고 질문하게도 돼요. 너의 삶과 나의 삶이 다를 바 없고, 어제나 오늘이나 새로울 것 없이 살게 되는 현실이 거기에 담겨 있죠. 이 동어반복의 삶을 파괴하고 돌파하는 것은 어쩌면 작가의 의무라기보다는 이 작품을 읽는 독자의 상상력에 남겨진 과제인지도 모르겠어요.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이 죽은 듯한 인물들을 되살려 각자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게 할 수 있을까?’ 묻고 대답하는 일은 독자의 몫이자 나아가 우리 사회에 주어진 중요한 숙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연준 “원래 그렇다고 알고 살았던 사람이 ‘원래’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273면)라는 문장은 의미심장해요. 당연한 것 같지만, 이런 사회에선 당연한 것의 문제점을 깨닫기도 어렵잖아요. 이런 문제들을 곱씹어보게 한다는 데에도 이 소설의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나비혁명’도 중요한 사건인데요, “애초에 L2로 태어난 아이들에게는 의문도 저항도 없었다”(245면)고 나옵니다. 계급이 세습화되면서 차별에 무뎌지거나 차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문제도 시사하는 바가 있어요.
김봉곤 저는 박상영 조남주 같은 소설가들은 스스로 독자를 개척하는 작가라고 생각해요. 박상영의 경우 소설뿐만 아니라 대외활동에서, 조남주는 다른 방식의 글쓰기를 통해서 독자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잖아요. 이번 조남주의 『사하맨션』은 어찌 보면 『82년생 김지영』과는 다른 행보인 셈인데, 저는 이런 작업이 오히려 더 과감하고 의미있어 보여 좋았습니다. 자기만의 색깔을 확실하게 지닌 작가여서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궁금해집니다.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
박연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화학을 전공한 과학도인 김초엽의 첫 소설집입니다. 제가 읽은 SF소설이라고는 카즈오 이시구로(K. Ishiguro)의 『나를 보내지 마』밖에 없어서인지, 소설집의 입구인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 머리를 들이미는 게 힘들었어요. 소설 도입부에 설명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SF의 세계에서는 설명이 필요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려움을 느끼다가 순례자의 그 순례길을 따라 걷고 나서부터는 순탄했습니다.(웃음) 읽는 내내 행복했어요. 저는 소설이 믿지 못하면 읽을 수 없는 장르라고 생각하는데, 처음에 제가 어려움을 느낀 이유가 이야기를 믿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작가의 언술에 매료되면서 이야기를 믿게 되니까 소설 안에 오래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김나영 같은 말일 수도 있겠는데, 제 경우에는 오히려 못 믿겠어서 더 믿고 싶은 세계였던 것 같아요. 지금보다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간단하고 편리한 세계에 대한 갈망이 평소에도 있었는데, 이 소설들에서 펼쳐지는 미래의 삶과 터전이 구체적이면서도 개연성 있어서 몰입할 수 있었어요. 더 흥미로운 건 막상 그곳에서도 사람들은 심리적인 면에서 똑같이 살고 있다는 점이지요. 자연과학적인 상상력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불변하는 삶의 조건에 대한 사회과학적인 질문이 이야기 배면에 무겁게 깔려 균형감을 만들어내는 것 같아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기술을 맹신하지도 않고 인간의 타고난 조건에 함몰되지도 않으면서 그 둘을 함께 다루는 솜씨에서 신인답지 않은, 오래 고민하고 쉽게 말하지 않는 자의 내공을 느꼈어요.
김봉곤 뭔가 산뜻한 공간인데 느끼는 감정은 똑같죠. 저도 SF 서사가 익숙지 않아서 가장 접근성이 좋아 보이는 「관내분실」부터 순서를 뒤죽박죽으로 읽었는데요, 어느 하나 빠지는 작품 없이 다 좋았어요. ‘올 수(秀)’를 드리고 싶습니다.(웃음) 작품에서 설명이 많은 게 거칠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말로 얘기해보고 싶어요. 보통은 작가들이 이야기의 논리를 전개할 때 사고와 행동의 동선을 촘촘히 맞아떨어지게 하는데요, SF에서는 문장이나 사고의 보폭이 다른 것 같아요. 성긴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스케일이 다르달까요. 그런데 사고의 폭이 크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느낌이었어요.
김나영 저는 반대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지금까지 읽어온 어느 소설보다 서사가 진행되는 보폭이 좁다고 느꼈어요. 별다른 사건 없이, 붙박인 듯 앉아서 광활한 우주를 바라보는 노인의 막막한 심정을 세심하게 다루고 설득력 있게 연출해내잖아요.
김봉곤 사건의 보폭이 크다기보다는 사유의 보폭이 크다는 의미였어요, 백년이라는 시간이 손쉽게 지나가잖아요. 그 중간의 내용을 과감하게 생략하면서 전개해나가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필요한 동선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갑자기 한 직원이 찾아와서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관내분실」 237면) 하고 한마디로 정리해요. 전 이런 처리가 여러 의미에서 놀라웠어요. 어쩌면 이것이 무언가를 생략하는 대신 더 놀라운 세계를 보여주는 SF서사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스토리텔링 방식 같기도 하고요. 그러면서도 이 소설에서 느껴지는 감정들은 엄청난 공포, 슬픔 같은 꽤 원초적인 것들이라 신기했어요.
박연준 미래에도 여전히 슬프겠죠.(웃음) 우주정거장에서 기다리는 노인의 마음(「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쓸쓸하게 느껴졌어요. 남편과 아들이 있는 다른 행성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거리에 있는 우주적 공간이잖아요. 지구 반대편 정도의 시공간도 아닌 거죠. 게다가 시간은 백년이 넘게 훌쩍 흘러버리고요. 그 설정에 어떤 거부감도 없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현재에서 미래로 간 게 아니라 미래가 현재에 들어와 있는 이야기 같았어요.
김나영 그런 점에서 작가가 창조해낸 세계가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충분히 현실을 뛰어넘고 있지만 그외의 부분에서는 현실에서 일상적으로 발휘하는 상상을 능가하지 못한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동시에 이것이 이 소설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분명한 건 김초엽은 자신이 소설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어떻게 임팩트를 줄 수 있는지 감각적으로 아는 작가라는 점이에요. 가령 한 문장이 한 문단으로 구성되는 형식이 자주 눈에 띄는데, 서사의 강약과 긴장을 문장 하나로도 조절하는구나 싶었어요.
김봉곤 서사를 끌어가는 방식이나 대화를 보면 직조 감각이 탁월해요. 메시지를 앞세우느라 밸런스가 무너지는 경우도 없고요. 타고난 감각과 더불어 각을 잘 잡아 쓴다는 생각이 들어요.
박연준 논리와 감성도 넘치는 법 없이 균형감 있게 전달합니다. 슬픈 내용도 적절히 절제하면서 독자에게 슬퍼할 여지를 주기도 하고요. 「감정의 물성」에서 보여주는 묘사도 좋았어요. 만질 수도 없고 규정할 수도 없는 감정을 물성으로 보여주는데, 사람들이 ‘우울체’를 사는 대목에서, 감정의 실체를 명확히 보고 싶어하는 인간 심리에 대해 생각하게 되더군요.
김나영 육아를 하고 있어서인지 가장 감정이입해서 읽은 작품이 「관내분실」이었어요. 아기를 가진 화자가 뒤늦게나마 자신의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는 단순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한 존재가 어떻게 그가 속한 곳에서 ‘분실’될 수 있는가’ 하는 중요한 질문을 남김으로써 끝내 몇마디로 요약될 수 없는 소설이 되지요. 여성의 삶을 본격적으로 다룬다는 점도 이 소설집의 중요한 특징일 텐데요, 결혼과 임신과 출산과 육아라는 과정을 겪는 여성의 삶이 어떻게 존재감을 갖거나 갖지 못하는가를 질문하는 작품들이 많아요. 가정과 사회로부터 개인성을 무시당함으로써, 다시 말해 한 개인으로서 그가 속한 집단에서 단절되고 고립됨으로써 엄마나 아내 같은 부차적 역할을 부여받고 한정적인 존재감을 갖는 여성 개인의 삶을 문제적으로 보고 있어요. 하지만 「관내분실」 이외의 작품에서 여성들은 오히려 능력을 인정받고 중책을 맡은 인물로 등장하지요.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대중 앞에 가장 크게 발휘할 순간에, 가장 크게 인정받을 기회를 앞두고 돌연 자기 자신을 위해 남은 모든 에너지를 써버려요. 이는 최근 한국소설의 주된 경향이라 할 수 있는 페미니즘소설의 계보를 잇는 동시에 자의에 의한 경력단절 여성 개인의 욕망을 그린다는 점에서 특별한 지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봉곤 SF소설에 한정된 건 아니겠지만 한 세계를 만들고 상상하는 마음과 타인을 이해하고 생각하는 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걸 김초엽 작가를 통해 새로이 느끼게 되었어요.
박연준 다 읽고 나니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가 마지막에 놓인 이유를 알겠어요. ‘여성, 동양인, 비혼모’에게서 자란 여성 화자가 등장하는데, “사이보그 그라인딩”(281면)을 통해 새로운 인간으로 재탄생하여 우주비행사가 되려는 인물이거든요. 이 시대의 약자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 태도가 빛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벌써 김초엽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져요.
김나영 ‘작가의 말’에 나오는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는 기술이라는 것이 가능할까?”(339면) “분명히 세상 어딘가 존재하지만 찾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일까”(337면) 같은 질문을 보고 이 작가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어요.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만 잃어버린 것만 같은 ‘어딘가’와 ‘누군가’에 주목하는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정말 좋은 소설을 계속 쓸 수 있지 않을까요.
최문자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민음사)
박연준 처음으로 다룰 시집은 최문자 시인의 여덟번째 시집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입니다. 슬픔, 고독감, 하지 못한 고백들, 죄책감, 그리움, 스러지는 정서가 이 시집을 이루고 있는데요, 읽는 내내 슬펐습니다. 곳곳에서 시인의 ‘사랑론’을 감지하게도 되고요. 「종소리」에서 “5분”을 믿는 게 사랑이라고 하잖아요. 사랑의 실체가 뭐지, 거짓말을 믿거나 아무것도 아닌 걸 믿는 건가 싶다가 “해바라기 베어 낸 자리에서 해바라기 없어지는 소리가 났다”는 대목에서 서늘해지기도 했습니다. 너무 당연한 건데, 당연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지점, 사랑의 종말이 이런 건가 생각해보기도 했고요.
김봉곤 시집의 주된 정조가 슬픔인 것 같아요. 전작 『파의 목소리』(문학동네 2015)에서 “사랑이 끝나자 여름이 왔다/그해 여름의 절반은 물이었다”(「그 여름」)라는 구절을 좋아하는데, 이번 시집이 그 구절의 확장판처럼 느껴졌어요. 시집의 자서에서 “슬퍼할 자신이 생겼다”고 하는데, 이 ‘자신’이 믿음〔自信〕이기도 하고 그럴 수 있는 몸〔自身〕이기도 하잖아요. 슬픈 것들은 왜 아름다울까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 다음 과거를 돌아보며 한두개의 이미지로 회한의 감정을 말하는데, 흡사 장편소설의 엔딩 장면 같았어요. 원래 장편의 마지막은 꽤 강렬하게 감정이 밀려오잖아요. 그런데 매 시마다 그런 거예요. 플래시백한 어떤 시절의 이미지를 현재 시점으로 발화하고 있어서 슬픔이 증폭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김나영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 고백이라서 더 슬퍼요. 게다가 최문자 시의 화자는 계속 뒤에서, 혹은 뒤늦게 고백해요. 고백하는 자가 처하는 공간적·시간적 위치나 발화의 방식이 슬픔을 배가하는 것 같아요. 이런 점은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적 경향과 변별되는 지점이어서 특별해 보였어요. 어떤 감정이나 사유가 오래 누적된 시간을 바탕으로 하더라도 대개는 방금 떠올랐다는 듯 즉각적으로, 혹은 거의 선언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게 요즘 시에서 자주 발견되는 발화법이었거든요.
박연준 이번 시집에 ‘고백’이라는 시어가 많이 나오죠. 시인은 고백의 자세를 말할 때 ‘개’를 오브제로 많이 가져와요. 개의 마음을 소환한다고 할까요. 저도 개의 심정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개는 고백을 하염없이 품고 있는 존재잖아요. 내가 당신(주인)을 정말 좋아한다, 이걸 고백하고 싶어 안달하는 데가 있고요. 개에게는 순정도 있지만 한편으론 수치심도 있거든요. 가령 “고백하려고/개 한 마리처럼 자꾸 손을 내밀었다”(「고백의 환(幻)」) “슬픔 곁을 개처럼 지키고 있다”(「우기」) “말들이 돌아오면/슬퍼진 부분에서 나와/꼬리를 흔들고 싶어집니다”(「핀의 도시」) 같은 시구를 보면 그런 미묘한 감정들이 슬픔과 섞여 표현됩니다. 뒤늦은 고백이지만 간절하게 털어놓고 싶어하는 마음도 보이고요. 고백을 받는 당신으로부터 수긍이든 용서든 받고 싶은데, 때를 놓쳐 못하고 지나가버렸으니 회한이 드는 거죠.
김나영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집을 다 읽어보면 최문자 시의 화자는 결국 고백하지 못하는 성격인 것 같아요. “일기 속에서도/마음을 숨기고 흙으로 덮었다”(「튜닝」)고 하는데, 아무도 안 보는 일기에서조차도 자신을 숨기거나 포장해야 할 정도로 자의식이 강하니 고백을 하려면 안간힘을 써야 하고 더 용기를 내야겠죠. 그러다보니 고백에 실패할 때가 많겠고 그 때문인지 시에서 계속 죄책감이 표출되기도 해요. 한편으로 고백은 들어줄 누군가를 전제하게 마련이지만 이 시집 속의 고백은 전할 데 없는, 수신인 없는 편지처럼 보여요. 일기나 시가 그렇듯이 하지 못한 고백에 대한 고백, 그 아이러니의 힘이 이번 시집을 관통하며 특색을 만드는 것 같아요.
김봉곤 고백의 실체가 궁금해지기도 하면서 결국 고백이 시쓰기와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화」라는 시도 시쓰기에 대한 이야기로 유비되어 읽혔고요. 고백의 불가능성이나 어려움이 시쓰기, 글쓰기의 어려움인 것처럼 느껴지는 시편들이 많아서 안타까움이 증폭되고, 그래서 좋았습니다.
박연준 시인이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이만큼 팽팽하게 시를 쓸 수 있다는 게 놀라워요. 시를 써온 시간이 긴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른 빵을 먹고 섬광이 되고 싶다/미지근함으로부터 탈구된 단 한 줄의 시라도”(「다른 빵」)라고 표현한 점도 그렇고요.
김봉곤 최문자 시인은 매 시집, 매 시에서 ‘쇄신’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미지근함과 거리가 멀어요. 「진화」에서도 “미지근한 슬픈 액체”를 품은 젖은 숯 말고 타오르는 불의 형식이고자 하잖아요. 모순처럼 보일 테지만 “죽어도 거품이 일어나지 않던 그해”(「비누들의 페이지」)라는 표현에도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던지. 시인은 물기가 가득하지만 그것이 또 에너지이기도 한데, 거품이 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슬픈 건가 싶더라고요. 최문자 시인은 때론 소설가보다 더 구체성이 있어요. 그냥 ‘구름’이 아니라 “회현역 근처 흰 구름 밑에서”(「고백의 환(幻)」)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무척 놀랐습니다.
박연준 시가 구체성을 가지면서 힘이 있을 때, 무적이 되는 것 같아요. 이런 구체성을 포착하지 못한 채 모호하게 표현하는 시들도 많잖아요. 자기가 왜 슬픈지 인식하지 못하면서 슬플 때, 혹은 사랑의 방식에 회의를 느낄 때가 있는데 그걸 「사이」에서 놀랍게 표현해요. “낱말이 홀로 내는 소리를 듣는 것/(…)/당신을 이해하는 데 꼭 띄어쓰기를 해야 할까?”
김나영 저도 이 시에 주목했어요. “신발을 신 발이라고 띄어 쓰고 싶다”는 부분을 보면서 먼저 신발의 오만가지 용도와 의미를 떠올리게 돼죠. 신발은 신고 누군가에게 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고, 어딘가로 가기 전에 신는 것이기도 해요. 또 벗어둔 신발은 사람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고요. 이 시집의 주된 사건과 감정인 죽음, 그리움, 죄책감, 슬픔 등이 이 한 문장에 다 들어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뒤늦게 자신의 말과 행동과 감정까지를 모두 교정하는 자의 슬픔이 느껴져요.
박연준 띄어쓰기는 규칙이고, 그 안에 옳고 그름이 있잖아요. 사랑하는 사이에 그런 규칙이 생기기 시작하면, 잘못은 끝도 없이 늘어나지 않나요? 띄어쓰기가 필요없는 게 사랑의 규칙임을 시인이 아는 거죠.
전동균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창비)
박연준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는 전동균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입니다. 이 시집에는 유독 화자의 정체성을 돌아보는 질문이 많아요. 왜,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하지, 여긴 어디지, 이런 질문이 곳곳에 등장합니다. “나는 사람으로 살아온 기억을 잃어버렸다가 저녁에야 간신히 되찾곤 했더랬습니다”(「보말죽」)라는 대목에서는 나에 대한 기억상실과 더불어 내가 누구인지, 뭘 하는 사람인지, 스스로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김나영 몸의 아픔이라는 것 때문에 자기 자신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인식하는 화자가 등장하면서 삶을 낯설게 보도록 만드는 게 이 시집의 특징인 것 같아요. 나, 사람, 주변, 자연에 대한 관찰과 사유가 두루 나타나는데, 그러면서 무언가를 다 깨달았다는 방식으로 시가 쓰이지 않은 점이 좋았습니다. 이런 주제의 시들이 대개 느낌표를 남발하는 데 반해 이 시집에는 물음표가 많이 나오지요.
김봉곤 전동균의 시는 그 자체로 시의 형식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인이 시, 하면 떠오르는 미니멀한 풍경을 추구하고 시인 자신도 시에 가까워지려는 이미지가 반복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가난함이나 단출함 같은 정조가 이어지는데 시 속에서 시와 삶이 순환되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얼음, 눈 같은 소재가 많이 등장해서인지 심플하면서도 때로는 힘이 있고 기개가 느껴지기도 했고요.
박연준 저는 화자가 여성적인 목소리로 언술할 때 흥미로웠습니다. 김혜순 시인이 ‘시는 언제나 여성적인 것이다’(『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문학동네 2002)라고 한 말에 동의하는데, 이런 정서가 돋보이는 대목이 있어요. “칸나꽃 피어나고/흰곰들은 부서지는 빙판을 걸어가요”(「약속이 어긋나도」) “핸드폰을 꺼도 핸드폰이 울려요/검고 긴 옷자락들이 펄럭이며 지나가고/나는 그들을 몰라요/끝까지 모르는 척할 거예요”(「밤마다 먼 곳들이」) 같은 대목에서는 단순히 어디로 가야 하지,라고 질문할 때와는 또다른 목소리의 결, 어떤 생동이 느껴지거든요.
김나영 앞서 다룬 최문자 시집과 함께 보면, 두 시집 모두 ‘기도’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화자가 등장해요. 최문자 시집이 고백의 방식으로 그것을 표현했다면 전동균 시집은 다짐의 방식으로 기도를 해요. 혼자 다짐하고 마는 게 아니라 물음표를 찍으며 자기 다짐을 질문과 같은 보편의 형식으로 바꿔놓는 데에서 한 차원 높아지는 지점이 생기는 것 같아요. 이 시집의 앞부분에 실린 시들이 아픈 몸을 한 자신을 자각하고 감각하는 데 집중했다면 뒷부분의 시들에서는 앞으로 살고 싶은 삶의 방식에 대한 기원과 기대가 주로 나타나요. 편집의 효과도 있겠지만 시집에 실린 순으로 작품을 따라 읽으면, 나아지고 있다는 전망, 혹은 회복에 대한 감각은 개별성이 보편성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김봉곤 저는 생활시에 근접한 3, 4부의 시들에 좀더 마음이 갔어요. 시쓰는 시인의 자의식을 발견할 수도 있었고요. “정면에 속지 않겠습니다/그 너머를 보겠습니다”(「당신 노래에 저희 목소리를」) 같은 구절은 어떤 시론이면서, 나는 이런 식으로 사물을 보겠다는 ‘뽈 쎄잔’적 모먼트 같았어요.(웃음) 그 아래 반 고흐의 말에서 따온 “슬픔에 가득 차서 항상 기뻐하며 살겠습니다” 같은 대목은 오늘 다룬 모든 시인들의 작품에 드러나는 주이상스(jouissance, 고통스러운 쾌락)를 또 한번 발견한 것 같아 흥미로웠고요. 그러면서도 또 아재적 모먼트가 있잖아요.(웃음) “친구 병태가” 와서 “트위스트도 한판 땡길 것이다”(「문밖에 빈 그릇을」)라고 하는데, 언어도 이미지도 극도로 정제해서 쓰던 시인이 이런 장면을 보여주니 뜨악하기도 하고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어요.
박연준 그런 시들에서는 시인이 힘을 좀 강하게 사용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1, 2부의 시가 더 좋았어요. 「한옥(韓屋)」은 아마도 임종을 앞둔 부모님 중 한분의 이야기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주어가 없어요. 주어는 없지만 인물로 가득하고, 시 한편이 꽉 차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제 어쩌면 좋으냐고/찬물로 낯을 씻고/또다시 글썽대는 별빛들”을 보면서, 찬란하게 존재한 적 있지만 스러져가는 옛것들에 대해 쓴 아름다운 시라고 생각했어요. 시에 ‘한옥’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한옥은 이제 많이 사라져버린 거잖아요. 부모님도 곧 떠나갈 존재고요. 개인적으로 전동균 시인이 글썽임이 깃든 문장을 쓸 때 좋더라고요.
김봉곤 「이번엔 뒷문으로」도 비슷한 정조인데요, 한참을 글썽이고는 말개져서 쓴 시 같달까요. 저는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병원이 아니라 무덤에 간 것으로 착각했는데, 어느 쪽으로 읽어도 다 괜찮았습니다. 또 「물속의 기차」의 “김밥 한줄에도 속이 든든해지거나 목이 메는/사람과 사람 사이/기차는 달린다” 같은 구절에는 한참 머물러서 어느 순간엔 제가 마치 그곳에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박연준 「이번엔 뒷문으로」에서 어머니에게 “세상에 제일 좋은 집이 여기예요”라고 말하는데, 시집 전체에서 자리, 위치, 장소가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시인의 말’에 천마총 발굴로 사라진 “경주 대릉원 고분동네가 가끔 생각난다”고 나오는데, 시인에게는 장소가 화두인 듯 보여요. “대구로 서울로 부산으로 떠돌”면서 정착하지 못하고, 사라진 고향을 그리며 떠돌았을 테니, 그 쓸쓸한 심정이 짐작이 돼요.
김나영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라는 제목의 역설이 무리 없이 쓰이는 것은 전동균의 시가 개인의 구체적인 경험에서 출발해 누구나 겪는 고통을 이야기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당신이 없는 곳에서”라는 개인의 처지가 “당신과 함께”(「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을 불러도」)라는 공동의 사건이 되는 과정이 시라는 것을 새삼 알게 해준 시집입니다.
박세미 『내가 나일 확률』(문학동네)
김나영 『내가 나일 확률』은 2014년에 등단한 박세미 시인의 첫 시집입니다.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도 감정을 과잉되게 표출하지 않고 이렇게 담담하게 쓸 수도 있구나 싶어 눈길이 갔어요. 자기 감정을 사물이나 구조처럼 조망하면서 내가 주체할 수 있는 것인 양 다룬다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박연준 첫 시집에서 그런 여유가 보인다는 게 놀랍죠. 수록된 시들 중에 구조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시들이 많았습니다. 시의 여러 양상을 보면, 목소리로 먼저 뛰쳐나가는 시가 있고, 감정을 겨우겨우 끊어내야 하는 시가 있고, 이렇게 침착하게 구조적으로 쌓아가는 시가 있는데요, 박세미는 어떤 현상을 가늠하면서도 배제할 건 배제하며, 침착하게 ‘시를 집도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름 없는 감정들을 핀셋으로 헤집어보고, 감각적인 언어로 옷을 재단하는 일 같달까요. 박세미의 시를 읽으면 그런 기하학적이고 독창적인 언어의 옷을 보는 기분이 들어요. 입고 싶지 않고, 계속 들여다보고 싶은 옷. 구조와 형식이 내용이고, 내용이 스타일이 되는 옷요.
김봉곤 쁘레따뽀르떼가 아니라 일상에서는 입기 힘든 오뜨꾸뛰르 같은 느낌인가요?(웃음) 박세미 시집은 정말 쾌적해요. 이 시집의 차분함이나 절제됨이 첫 시집을 내는 시인에게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장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쉬움인 것도 같아요. 어떻게 보면 너무 정교해서 시의 이데아 같은 느낌이 드는데, 첫 시집에서는 어떤 객기나 감추지 못한 끼를 더 보고 싶기도 하거든요.
김나영 요즘 작품들을 보면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작가들의 경우에는 자기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데에 주저함이 없잖아요. 굳이 정제된 언어로 표현하려고 하지도 않고요. 박세미의 시에서도 그런 태도가 보이긴 하지만 표현하는 방식이 부담 없고 담백하다는 점이 달라요. 때로는 과잉된 진술이 지닌 시적 에너지에 감탄하면서도, 그 시들이 단어들을 잘 골라 배치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창발해내는 시적 감각을 보여주지 못할 때는 아쉬움을 느끼곤 했어요. 그래서인지 박세미 시에서 절제된 묘사 가운데 신중하고도 절묘하게 선택된 듯한 말들을 발견하고 교감할 수 있어서 반가웠어요.
박연준 진지하지 않은 척 말하지만 그 안에는 깊이가 있죠. 격앙된 감정 하나 없이 판을 자주 뒤집어놓는 재능도 있고요. 표면이나 외관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이면, 보이지 않는 부분의 속살을 꿰뚫으려는 시선도 돋보입니다. 명제를 뒤집으며 특이한 논리를 증명해내거나 세상에 없는 논리를 발명하는데, 첫 시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노련해요. 한편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만 자신을 안 보여주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아요. 보여줘도 되는데 말이죠.(웃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촌스럽거나 치기어린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너무 절제하다보니 감정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김나영 저는 박세미의 ‘방’을 어떻게 이해할지가 그의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제3의 방」은 방에 대해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쓰였어요. 질문과 답이 거듭되며 방이라는 말이 반복되는데, 그 과정에서 방에 대한 인식이나 감각이 누적된다기보다는 점차 휘발되는 느낌을 줘요. 그러니까 이 방도 저 방도 아닌 방에 대한 상상을 가능한 한 분명한 말로 표현해보고자 하는 바람이 박세미 시의 원동력일 것 같아요. 상상과 바람으로 이뤄진 그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문이 닫히고 열리는 일처럼 다른 세계와 차단되고 연결되는 것을 감각하는 것이 박세미 시의 화자가 세계에 존재하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여운 나/담을 방이 없네” “빈방이 되겠습니다./아무도 읽지 못하는” 같은 구절에서는 기형도의 「빈집」을 떠올리게 돼요. 방이라는 내밀한 구역을 상상하고, 사랑이라는 원초적인 관계마저도 상실한 듯 철저히 그곳에 고립된 개인의 형상은 문학사적으로 익숙한 것이지요. 하지만 비우는 주체와 비워지는 대상을 조망하면서 제3의 ‘무의 형식’을 고민하는 태도는 흔하지 않아요. ‘지금까지 없던 방식으로 없는 나에 대한 상상’을 설명할 만한 비평적 언어를 고안해봐야겠어요.
박연준 이 시뿐 아니라 다른 시편들에서도 여러명으로 분열된 듯한 자아가 보이잖아요. 다중인격이라기보다, 인물들이 시간과 공간을 옮겨 다니면서 자아를 크고 넓게 쓰는 것 같아요. “나는 ‘나들’이 되어 있”(「떼」)다거나 “내가 나일 확률”(「몇 퍼센트입니까」)을 말하는 대목에서 완전한 나에 대한 시인의 고민이 엿보여요.
김나영 이 시집의 자기분열적인 태도는 수동성에 대한 공포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내가 어쩌지 못하는 내가 분명히 이 세계 속에 나로서 존재하고 있고, 내가 나를 주체적으로 가져가지 못하는 삶의 원리를 알아버린 거죠. 「검은콩 하나가 있다」를 보면 “유리컵에 갇혀 있”는 콩처럼 나도 방 안에 갇혀 있어요. 내 실존이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 의탁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공포스럽게 느껴지기도 해요. 그런데 그 공포가 사실은 동시대 동세대의 공통감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 시집이 대변하는 바를 알 수 있어요.
김봉곤 “내가 나일 확률”이 희미한 사람들, “당신이 당신일 확률”(「몇 퍼센트입니까」)이 희박해진 자아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것은 ‘나’의 분열처럼 보일 수도 있고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공간에 있는 메아리처럼 들릴 수도 있어요. 화자의 말이지만 때로는 공간이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거든요. 박세미의 절제된 태도나 인간적 과잉 없음이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새삼 특장으로 다가옵니다. 정직하잖아요. 과장하지도 않고 더 부풀리지도 않고 더 줄이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해요. 이것이 시인이 앞으로 보여줄 태도이자 결기처럼 전해져서 좋았습니다.
박연준 자기가 본 세계를 적확한 언어를 찾아서 정확하게 쓰고 싶어하죠. “어떤 날은 ‘돌’이라고 썼고, 어떤 날은 ‘가’라고 썼으나/그것은 모두 새였다/어제는 ‘불’이라는 글자에서 자신의 발에 입맞추는 새를 보았고/오늘은 ‘새’라는 글자에서 풍선에 매달린 새를 보았다”(「‘ ’」)라는 구절에서 생각이나 감정은 배제한 채, 관찰자로서 진실의 극단에 다가가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다소 방정식적인 언술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시인으로서는 정말 훌륭한 재능이에요. 무조건 감정이 풍부한 시가 좋은 시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여전히 박세미 시인이 좀더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김나영 저는 오히려 동세대의 시인들 중에 박세미가 가장 자유롭게 쓴다고 생각했어요. 나만의 표현을 궁리하고 그것을 마치 은어로 말하거나 별명을 붙여주듯이 자신의 감정에 가장 적합한 말을 찾아내는 시인 같아요. 돌출된 표현이나 감정의 발현 같은 건 없지만 언어를 쓰는 방식 자체에는 눈치를 보지 않는달까요. 「몇 퍼센트입니까」에 “뜀틀 하나를 넘으면 다시 뜀틀”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런 인식 자체는 동세대 시인들에게 많아요. 요즘 대부분의 시가 ‘거기’라는 한계에 대한 인식과 감정을 다양하게 표출하는 와중에 박세미가 “나는 뜀틀과 넘어진다”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대목은 놀라웠어요. 콜럼버스의 달걀처럼요. 시의 대상을 ‘넘으려’ 하지 않고 그것과 함께 ‘넘어지려’ 하는 태도의 새로움은 지금까지 서정시에 없었던 화자의 등장을 알리면서 우리 시의 어떤 도약을 기대하게도 해요.
박연준 박세미의 감정은 규격화된 것처럼 적확한 위치에 들어가 있어서 언뜻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곳곳에 숨어 있죠. 특히 “기도의 형식은/맞댄 두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꿇어앉아 하늘을 향해 포갠 발바닥에 있습니다/거기엔 빛나는 돌이 놓여 있죠//하지만/누군가 내게 와서/서로의 발바닥을 맞댐으로 사랑에 빠지자,/말한다면 나는 기꺼이//졸도할 것입니다/두 발바닥을 활짝 펴고서”(「빛나는 나의 돌」)라는 대목에서는 굉장히 놀랐어요. 시인 안에 더 큰 무언가가 응집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고, 앞으로를 더 기대하고 싶습니다.
김봉곤 저는 “껍질을 깨고 안으로 들어간다”(「알」)라는 구절이 가장 박세미다운, 그녀의 시그니처라고 생각해요. 박세미는 예기치 않은 이미지로 말을 걸어와요. 혹은 예기치 않은 이미지로 도약하고요. 그런 점에서 지금과는 또 다르게, 좀더 자유롭게 시를 쓸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들어요.
박연준 여섯권의 책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덧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무더운 날이었는데, 두분 덕에 더위를 잊고 이야기할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참석해주신 김봉곤 소설가에게 특히 감사드립니다.
김봉곤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건 어쩜 이렇게 질리지도 않고 좋을까요? 쓰는 순간 못지않게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정말이지 ‘홀리’한 것 같습니다. 행복한 시간을 선물해주셔서 감사드려요.
김나영 좌담을 하기 전에는 두분의 작품 덕분에 시와 소설을 좀더 좋아하게 되었고, 좌담을 하고 나서는 두분의 독해 덕분에 시와 소설이 또 새롭게 좋아졌어요.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9.7.23. 다이너재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