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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다산학 이후의 다산학을 위하여
김대중 金大中
서울대 국문과 교수. 저서 『풍석 서유구 산문 연구』가 있음. niemand@snu.ac.kr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췌언을 요하지 않는 조선후기 실학자이다. 그의 광범위한 학문세계를 총칭하여 ‘다산학’이라고 한다. 동시에 다산학은 다산에 대한 연구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이 두가지는 불가분의 관계지만, 본 서평은 특히 후자에 집중하기로 한다. 검토할 책은 『다산학사전』(다산학술문화재단 엮음, 사암 2019)과 『다산에게 배운다』(박석무, 창비 2019)이다.
1. 『다산학사전』
『다산학사전』은 최초의 다산학 전문 사전이다. 다산학의 태동기는 대략 1900년 전후로 잡는데(『다산학사전』 중 ‘다산학’ 항목 참조), 연구가 본격화된 것은 신조선사본(新朝鮮社本)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발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는 다산 서세(逝世) 100주년(1936)을 기념하기 위해 기획되어 1938년에 완간되었다. 그 뒤로 80여년간 축적된 다산 연구의 토대 위에 마침내 최초의 다산학 전문 사전이 나온 것이다. 이 점에서 일단 그 학술사적 의의를 인정할 수 있다. 「발간사」에 따르면 약 180명의 연구자가 작업에 참여하여 10년 정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 정도면 학계의 총체적 역량이 투입되었다고 하기에 손색이 없다.
당연히 모든 사전 편찬 사업이 만만치 않겠지만, 『다산학사전』의 편찬 과정에서는 특히 많은 난관이 있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일단 한국 학계에 참조할 만한 선례가 거의 없다. 그리고 사전의 성격이 상당히 복합적이다. 먼저 학문 영역을 보면 『다산학사전』은 문학사전, 역사사전, 철학사전 등의 면모를 두루 갖는다. 그렇지만 다산이라는 한 인물을 축으로 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백과사전과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그다음으로 항목어를 보면 『다산학사전』은 용어사전 내지 개념어사전의 성격을 갖기도 하고 인물사전의 성격을 지니기도 하며, 그밖에도 학술사전, 문학작품사전 등의 다양한 면모가 있다.
그런데 이러다보니 사전의 체재를 잡기가 오히려 더 까다로워지지 않았나 한다. 서문 격인 「다산학사전을 내며」에 따르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산학사전 분야별 항목 체계도’를 수립하여 그 토대 위에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다산학사전』은 다산학의 통일적 체계를 정립하고 그 틀 속에서 다산학의 하위항목 일체를 분류 재조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체계화 작업을 통해 다산학에 대한 총체적 인식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실제 서술은 어떨까. 아무래도 사전의 성격상 단독 저서와 같은 통일성과 정합성을 기대하기는 힘들 듯하지만, 일단 ‘다산학’에 대한 서술을 예로 들어본다. 해당 서술에 총 8면이 할애되었는데, 유학, 성리학, 실학, 서학(西學)과의 관계 속에서 다산학의 성격을 다층적으로 밝혔고, 다산학의 체계 및 정치적 실현 문제를 다루었으며, 총 4단계(1900년 전후, 1930년대, 1945년 이후, 20세기에서 21세기로의 전환기)로 구분하여 연구사를 조망하되 분단 이후의 경우에는 남한과 북한의 연구를 두루 소개했고, 국내뿐 아니라 해외의 다산학 연구까지 포괄했다. 이 정도면 통념적인 ‘사전적 기술’과는 차원을 달리하여 거대한 학술사적 조망력과 통찰력, 그리고 비평성을 지녔다고 할 만하다.
물론 『다산학사전』의 모든 서술이 단일한 성격을 띠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꼭 균질적인 수준을 유지한다고 보기 힘든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다산학 내 여러 분야의 연구 여건이 각기 다르고 연구자의 성향 또한 같지 않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산학사전』이 학계 최초의 성과임을 고려하면 부득이한 점이 있음을 이해해야 할 듯하다.
사전은 이제까지 축적된 학계의 역량을 수렴한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학문적 미래를 위한 새로운 토대가 될 수도 있다. 『다산학사전』으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 작업을 한두가지 예시해보면 이렇다. 첫번째는 백서 작업이다. 『다산학사전』의 출간과 더불어 이제 한국 학계는 실학 전문사전의 편찬 경험을 쌓게 되었다. 그 경험을 백서 같은 형태의 기록으로 남긴다면 앞으로 더 큰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미 다산학술문화재단은 『다산학사전』의 편찬에 앞서 『여유당전서』 정본화 사업을 한 뒤에 『「여유당전서」 정본사업백서』(다산학술문화재단 2014)를 낸 바 있다. 이러한 선례를 따르면 어떤가 한다. 다만 『「여유당전서」 정본사업백서』는 충실한 백서라고 하기에 미흡한 점이 적지 않다. 충실한 백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작업일지 같은 기초적 기록물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결국 사업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준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산학술문화재단은 앞으로도 다산학 관련 대규모 학술사업을 진행할 가능성이 높은 기관인 만큼, 이 문제에 대해서도 좀더 고민해주면 좋을 듯하다.
두번째는 다양한 성격의 다산학 관련 사전 편찬이다. 『다산학사전』은 다산학의 복합적인 면면을 두루 포괄한 장점이 있지만, 역으로 그렇기 때문에 세분화된 전문적 수요에는 부응하기 어려워진 면도 없지 않다. 따라서 좀더 전문화된 다산학 관련 사전이 필요해질 수 있다. 이를테면 다산 사상의 주요 개념 및 용어에 집중하여 그 의미, 용례, 출전, 출현 빈도수, 개념사적 전변 과정, 연구사적 쟁점 등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다산학 개념어사전’ 내지 ‘용어사전’ 같은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다산의 주요 저작에 대한 사전, 이를테면 ‘『목민심서』 사전’ ‘『경세유표』 사전’ ‘『흠흠신서』 사전’ 같은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렇듯 『다산학사전』은 새로운 연구를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학문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다산학사전을 내며」를 보면, 『다산학사전』 편찬은 한국연구재단의 ‘기초연구과제지원사업’으로 선정되어 2009년부터 5년 동안 총 11억여원의 지원을 받았으며, 그 뒤로 2014년부터 다시 5년 동안 다산학술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았다고 한다. 막대한 사회적 자원이 투입된 셈이다.
그런데 ‘사업’에는 양면성이 있다. 만약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아마 『다산학사전』은 빛을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단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제 한국사회에서 다산학은 대규모 지원을 받을 가치가 있는 공공재로 받아들여졌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다산학은, 그리고 좀더 넓게 보면 실학은, 대규모 사업을 수행하기에 좋은 ‘사업 아이템’이 된 면은 혹시 없는가? 『다산학사전』의 경우는 물론 해당되지 않지만, ‘다산’이니 ‘실학’이니 하는 것이 ‘사업’과 연계되면서 남용되거나 오용되는 사례가 아주 없지는 않은 듯하다. 평자로서는 이 점이 우려스럽다. 여차하다가는 다산학이나 실학이 ‘외화내빈(外華內貧)’의 상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그런 상태에 처한 것은 아닐까? 이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해서는 다산학과 실학의 사회역사적 지평에 대한 성찰이 필수불가결하다고 판단된다. 이제 이런 고민 속에서 『다산에게 배운다』를 검토하기로 한다.
2. 『다산에게 배운다』
『다산에게 배운다』의 저자 박석무 선생은 다산 연구가이다. 책에 실린 총 17편의 글 중 가장 이른 것은 1983년 작이고 가장 늦은 것은 2017년 작이니 30여년에 걸친 다산학 연구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 연구가’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다산의 글을 읽고 다산에 대한 글을 쓰고 다산에 대해 가르치는 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연구’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이는 과거와 현재가 관계 맺는 방식이 여러가지라는 말도 된다. ‘다산학’이라고 할 때 ‘다산’은 일차적으로는 연구 대상을 가리킨다. 하지만 다산학은 단지 조선후기 인물 중 어떤 한 사람을 대상으로 삼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다산학’, 더 나아가 ‘실학’은 한국학 연구자가 과거와 현재 사이에 연관성을 부여하면서 미래적 전망을 열어가려는 ‘사회역사의식의 표명’이다. 다산학은 단순히 한국학을 구성하는 여러 분야의 하나에 머물지 않고 시대정신과 공명하여 한국학 연구를 추동하는 ‘이념’의 축이 되어왔다.
요컨대 다산학은 과거에 대한 ‘골동품 학문’에 머물지 않고 현시대와의 긴장 속에서 운동성을 갖는 ‘사상운동’을 지향한다. 제목 ‘다산에게 배운다’는 다산학의 이런 사상운동적 성격을 표명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지금 이 시대는 다산의 어떤 면에 주목할 것인가.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불쌍한 일반 백성들,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치자들의 압제와 속박에서만 살아갈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자주권이 있고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인권과 자율권이 있음도 다산의 주장을 통해 밝혀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썩고 부패한 조선 후기, 새롭게 나라를 만들어 부패와 불공정에서 벗어나는 국가에 대한 다산의 그리움도 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내용이 담긴 책이 바로 『다산에게 배운다』라는 책입니다.
저자가 다산연구소 웹사이트에 게시한 「『다산에게 배운다』를 간행하고 나서」(2019.6.10)의 일부이다. 『다산에게 배운다』의 맨 앞에 실린 글은 「개혁가, 다산 정약용」이고 그 뒤를 잇는 글은 「나라를 통째로 개혁하자던 실학자 정약용」이다. 책의 첫머리서부터 다산의 개혁가적 면모를 강렬하게 부각했다.
주지하다시피 다산은 조선후기 사회의 문제점을 진단하여 구체적이고 포괄적이며 체계적인 개혁안을 내놓은 인물이다. 저자가 「개혁가, 다산 정약용」에서 소개한 대로, 다산은 『경세유표』에서 “‘오래된 나라를 통째로 개혁하자’라고 했고, ‘털끝 하나도 병들지 않은 게 없다. 지금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하고 말 것이다’라고 경고하며 철저한 개혁을 강조했다.”(『다산에게 배운다』 24면. 책에는 『경세유표』의 해당 원문이 병기되었는데 여기서는 생략한다) 지금 한국사회의 맥락에 옮겨놓아도 절실하게 와닿는 말이다. 돌이켜보면 다산의 개혁가적 면모는 국권 상실, 일제강점, 유신독재, 신군부독재, 민주화항쟁 등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국면마다 호출되어왔다. 이제 ‘적폐 청산’의 시대적 과제와 더불어 다산이 새롭게 호출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오랜 세월에 걸쳐 다산의 개혁가적 면모를 부각하다보면, 대동소이한 담론을 반복 재생산하는 느낌과 함께 ‘정신적 피로감’ 같은 것을 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시대정신과 호흡을 함께할 수 있는 다산의 핵심적인 면을 진부하지 않게, 여전히 절실하게 재인식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고민 속에서 『다산에게 배운다』를 읽어보면, 저자가 지향하는 ‘다산의 재인식’에는 양면성이 있는 것 같다.
기실 『다산에게 배운다』는 저자의 첫번째 다산 관련 저서가 아니다. 역서 및 공저는 제외하고 단독 저서만 꼽아도 『다산기행』(한길사 1988),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한길사 2003), 『풀어쓰는 다산이야기』(문학수첩 2005), 『새벽녘 초당에서 온 편지』(문학수첩 2006), 『다산 정약용 평전』(민음사 2014) 등이 있다. 그밖에 다산연구소 웹사이트에 게시한 글도 적지 않다. 이 많은 글들을 통해 저자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일관되게 ‘진보 지식인 다산’을 논한다.
일단 평자는 그런 확신과 일관성이 갖는 ‘힘’에 주목하고 싶다. 그 힘의 원천이 되는 것은 역시 저자의 삶 그 자체가 아닌가 한다. 저자는 민주화운동에 투신하여 여러차례 옥고를 치르면서도 다산 연구를 손에서 놓지 않은 분이다. 그러니 저자의 다산 연구에 실린 삶의 무게와 사회역사적 실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이만큼 다산학의 ‘실천성’과 ‘운동성’을 연구자의 삶 자체로 구현한 사례가 또 있을까. 다산 연구가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저자는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3선개헌 바로 뒤, 대학원에 적을 두면서부터 다산학에 관심을 기울인 지 어언 18년째다. (…)
쫓기면서도 다산을 생각하였고,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심지어는 지하실에서 매를 맞을 때에도 다산을 생각하였다. 의지와 뜻을 굽힐 줄 모르며 시대와 역사를 새로운 통찰력과 관찰로써 우리 시대 이전에 가장 높은 수준의 이론을 집대성한 다산 선생, 그분을 연구하면서 나의 아픔과 고독, 슬픔과 비탄의 세월을 이겨내려 노력했었다.
『다산기행』 「책머리에」의 일부이다. 한 인간의 술회로서도 충분히 감동적이지만, 학문 행위에서 학문 주체의 사회역사적 체험과 정치적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해주는 증언으로서도 주목된다. 기실 연구자가 자신의 사회역사적 체험과 정치적 기억을 뛰어넘기는 대단히 어렵다. 군사독재에 분노하고 저항한 경험, 저항 끝에 유의미한 진전을 이룬 경험, 반대로 좌절을 겪고 환멸의 늪을 건넌 경험, 그 끝에 다시 털고 일어난 경험, 이런 것들이 ‘정치적 기억’을 형성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확신에 찬 목소리와 변치 않는 일관성이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변하지 않는 것은 정체된 것, 꽉 막힌 것으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변치 말아야 할 것은 변치 말아야 한다. 그와 동시에 변해야 할 것은 변해야 한다. 이 두가지를 혼동하면 곤란하다. 실학 연구자 중에 뉴라이트가 일부 등장한 것은 변치 말아야 할 것을 지키지 않은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저자의 작업은 자신이 속한 세대 내에서도 충분히 유의미하거니와, 변치 말아야 할 것을 그대로 지켜 후속 세대에게 전수해준다는 점에서도 중요성을 갖는다. 이른바 ‘포스트모던 시대’에 대학을 다닌 평자 같은 연구자는 오히려 탈이념의 현실적 귀결이 무엇인지를 목도하면서 ‘이념 지향’ 내지 ‘거대 담론’을 고차원적으로 회복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이렇게 해서 저자 세대와 평자 세대는 새롭게 연결되는바, 『다산에게 배운다』가 그 연결고리의 하나로 받아들여진다.
같은 이유에서 평자로서는 저자가 『다산에게 배운다』에 수록된 글들과는 좀 다른 성격의 글, 회고록도 써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꼭 저자뿐 아니라 이른바 ‘이념의 시대’를 통과한 경험이 있는 선배 학자들에게도 같은 바람이 있다. 『목민심서』의 역주 작업을 예로 들어 보면 이렇다. 『역주 목민심서』 초판은 그 첫번째 권이 1978년에 간행되었고 마지막 권이 1985년에 간행되었다. 간행 시기가 유신독재기로부터 신군부독재기까지 걸쳐 있는 셈인데 역주 참여자 중 여섯분이 구금·해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컨대 『목민심서』 역주 작업은 그 당시 민주화운동과 공명한 학술운동적 성격을 갖는바, 한국 지성사의 중요한 한 장면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평자 같은 후속세대는 이런 사실을 단편적으로 알 뿐, 선배 학자들이 그 당시에 구체적으로 어떤 분위기에서 어떤 일을 겪으며 어떻게 공부해나갔는지 알지 못한다. 그 당시 다산학 연구의 풍상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유의미한 작업이 되지 않을까 한다.
이렇게 뭔가를 지키고 소중하게 간직하여 전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변치 말아야 할 것을 충실히 지킨다는 것을 전제로, 변해야 할 것은 역시 변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뭔가를 지키는 태도가 빛을 발할 수 있다. 다산의 개혁가적 면모 내지 진보 지식인으로서의 면모가 중요하다면, 그 중요성을 새로운 시대 현실에 맞게 새롭게 설명하려는 노력 또한 필요하다. 그렇다면 『다산에게 배운다』는 어떤가. 다산의 전제(田制) 개혁안에 대한 서술을 예로 들면 이렇다.
다음으로 「전론」 은 토지정책에 관한 내용이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엽의 우리나라는 경제적 파탄과 빈부의 격차로 나라 살림이나 백성의 삶이 말이 아니었다. 관리의 횡포와 착취로 백성들의 생활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곤궁한 처지였다. 굶어서 죽어가는 백성도 수없이 많았다. 이 모든 요인이 토지의 분배, 즉 생산수단의 공정치 못한 분배 때문이라고 여긴 다산은 생산수단의 공정한 분배만이 가난의 해결책이라고 주장하였다. 소수의 대토지 소유자들에게서 토지를 환수하여 마을 단위로 공정하게 재분배하고, 마을 사람들의 공동경작에 의해 얻은 소득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제도, 즉 여전제(閭田制)의 실시를 주장했다. 대단히 혁명적인 토지정책이었다.(110~11면)
여전제는 토지의 공동 소유와 공동 경작 및 노동에 따른 분배를 골자로 하는바, 다산 사상의 혁신성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일찍부터 평가받아왔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경제민주화’가 중요한 화두로 부상한 것을 감안하면, 다산의 여전제는 ‘생산수단의 민주화’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위의 서술에서는 여전(閭田)의 성격이 다소 불분명하게 처리된 감이 있다. 여전은 국가에 의해 조성되고 여장(閭長)이라는 우두머리의 관리감독을 받는 일종의 집단농장이다. 따라서 여전제는 경제적 평등주의를 실현하기에는 유효할지 몰라도, 여전제를 통해 실현되리라 기대할 수 있는 평등은 자유를 소거한 쪽에 가깝지 않은가 한다. ‘집단주의’ 내지 ‘국가주의’를 연상시키는 면도 없지 않다. 결국 다산에게는 한 개인의 개체성과 자율성에 대한 고려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편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다산이 활동한 조선후기 사회에서는 이런 담론이 갖는 혁신성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현실과 연관지어 받아들이면 그 평등주의적 지향의 장점은 장점대로 인정하더라도 그 단점은 역시 무시하기 힘들 듯하다.
요컨대 다산 사상에 대한 역사적 해석과 현재적 해석을 적절히 구분해주면서 그 현재적 의의를 좀더 다층적이면서 풍부하게 해석하려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그러려면 다산 사상의 장점은 장점대로 보되 ‘그 장점과 표리를 이루는’ 단점을 함께 시야에 넣으면서, 다산이 나아간 동시에 정지한 지점 혹은 좌초한 지점을 성찰적으로 응시해야 할 것이다. 다산이 더 나아가지 못한 지점을 통찰하는 것은 그저 다산을 흠잡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그 지점이 바로 다산의 뒤를 이은 우리가 출발해야 할 그 지점이기 때문이다. 다산이 나아간 지점까지 다산을 따라 함께 간 다음 거기서 한걸음 더 도약하는 것, 그 도약의 발판을 다산 연구에서 찾는 것, 이것이야말로 다산학의 이념을 진정으로 실현하는 길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축적된 다산학의 성과를 계승하면서도 철저한 내부 비판을 스스로 통과해야 할 것이다. ‘다산학 이후의 다산학’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새로운 과제로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