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경위
2019년 6월 14일 열린 신동엽창작기금 운영위원회에서는 김금희 심진경 한기욱 황규관을 제37회 신동엽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위촉하고, 평론 부문을 신설하기로 결정했다. 신동엽문학상은 등단 10년 이하 또는 그에 준하는 경력을 가진 이의 최근 2년간(2019년 5월 31일까지)의 한국어로 된 문학적 업적을 대상으로 하며, 시·소설·평론 각 부문에서 3인에게 수상한다(시와 소설은 단행본, 평론은 발표 원고 기준). 추천위원(창비의 시·소설 기획위와 『창작과비평』 상임위)들이 올린 후보작 가운데 아래와 같은 8편이 최종 심사대상이 되었다.
권민경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 신철규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박세미 『내가 나일 확률』(이상 시), 김세희 『가만한 나날』, 박상영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이상 소설), 신샛별 「프레카리아트 페미니스트: 조남주, 강화길 소설에 주목하여」, 양경언 「비평이 왜 중요한가: 비평이 혁명을 의미화하는 방식」, 한영인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지만: 임현론」(이상 평론).
심사위원들은 7월 25일 모임에서 장시간 토론을 펼친 끝에 수난당하는 동시대 사람들의 깊은 상처와 슬픔에 다가간 신철규 시집(문학동네 2017), 청년세대가 마주한 삶의 현장을 생생하고 정교한 서사로 포착해낸 김세희 소설집(민음사 2019), 촛불 이후 한국문학의 현장에서 비평의 역할을 뚝심있게 강조한 양경언 평론(『창작과비평』 2018년 겨울호)을 제37회 신동엽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하는 데 흔쾌히 합의했다.
심사평
김금희(金錦姬)_소설가
현재 한국문학의 지도를 들여다보는 즐겁고 의미있는 과정이었다. 특히 올해 처음으로 실시된 평론 부문 심사에서는 작품생산의 측면에서 더 나아가 그것을 수용하는 대상과 과정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수상작인 양경언의 「비평이 왜 중요한가」는 촛불혁명과 페미니즘이 당대 한국문학 비평에 습윤되는 과정을 점검하면서 『82년생 김지영』의 성공을 기반으로 논의되는 문학의 공공성과 대중적 정동에 관한 정치한 개념화에 몰두한 글이다. 문학에 대한 패턴화된 회의나, 폐쇄성에 관한 손쉬운 비판에서 벗어나 ‘논쟁의 장’으로 살아 있는 비평 현장의 의지를 담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더 깊고 세밀한 논의를 위해 오히려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고된 고민의 흔적이 남아 있는 글의 덕목을 읽고 격려할 수 있어서 기쁘다. 수상작 이외에도 작가로서 앞으로 곱씹을 만한 주제를 얻게 된 건 한영인의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지만」이었다. 윤리라는 테제를 기반으로 작업하는 한 신진작가의 작품세계를 조망하면서 그것이 지닌 미덕과 한계를 조심스럽게 짚어나가는 평론이다. 당대의 작가들이 창작과정에서 마주치는 숱한 갈등의 흔적을 복기해 보여주는 글이라 신중히 일독했다.
시 부문 수상작인 신철규의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는 논의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작품이다. 나는 이 시집이 지닌 미학적 완성도에 동의하면서도 시 전체에서 느껴지는 일종의 열패의식과 그에 비해 너무도 아름답고 정교한 시적 형상화가 혹시 상충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대상이 시적 언어로 변환되는 데는 시인 자신은 물론이고 세계의 모든 풍경과 기척들, 관계와 갈등들이 그 역할을 충분히 행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 흐름을 유려하게 담아낸 시집의 성취는 수상작으로 평가될 만하다고 생각했다.
소설 부문은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어느 작품을 수상작으로 해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가 나왔다. 한국문학의 위기에 대한 숱한 진단들이 무색할 만큼 지금 한국의 젊은 작가들은 대범하고 날카롭게, 새롭고 변화무쌍하게 소설세계를 확장하며 횡단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등단을 하고 첫 책을 내기까지, 그후에 여러번의 고비를 거쳐 꾸준히 계속 쓰기까지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 고독을 감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스스로의 내면을 단련해야 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기에 더더욱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수상작인 김세희의 『가만한 나날』은 한국의 청년세대가 마주치는 삶의 현장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단편들이다. 때로 작가는 스스로가 이야기의 주체가 되어 작품을 밀고 나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더 촘촘하고 정교한 투망을 든 채 세상의 이야기를 포집하기 위해 세공을 들이는데 김세희의 작품은 후자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김세희가 보여준 그 투망 속에 들어 있는 삶의 생생한 주체들에게 감탄하고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부터 얕은 강물이 흐르는 적막한 외지에서 스스로를 가둔 채 살아가는 노인까지 작가의 눈이 깊고 넓게 조망될 때마다 어떻게,라고 나도 모르게 경탄했다. 이 신진작가의 작품집에서 나는 오래도록 견지해나가야 할 작가의 미덕을 배울 수 있었다. 매 작품이 고른 완성도를 갖췄다는 점도 선정에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올해 신동엽문학상의 수상자가 된 세분께 축하를 보내며 앞으로의 정진에 다정한 격려가 되기를 바란다.
심진경(沈眞卿)_문학평론가
이번 신동엽문학상 심사는 총 세 부문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동안 소설과 시, 두 부문에 수여하다 올해부터는 평론 부문을 별도로 신설하게 된 결과다. 등단 10년 이하의 평론가에게 주는 문학상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변화는 큰 격려와 힘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번 평론 부문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에 유난히 관심과 신경이 쓰였던 것은 그 때문이다. 평론 부문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된 작품은 총 세편이다. 한영인의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지만」, 신샛별의 「프레카리아트 페미니스트」, 양경언의 「비평이 왜 중요하가」가 그것이다. 우선 한영인의 평론은 겉으로 ‘임현론’을 표방하지만 내게는 ‘문학의 윤리’에 관한 글로 읽혔다. 즉 초자아의 명령 앞에 선 자아의 불안과 죄의식만으로는 결코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문학의 윤리란 도덕적 불안에 사로잡힌 존재가 그에 머물지 않고 한발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신샛별의 글은 여성 내 다양한 차별을 무화시켜온 신자유주의적 페미니즘 이후의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낸시 프레이저의 논의에 기대어 젠더 문제가 어떻게 여성을 더 낮은 계층으로 내몰고 있는지를 진단한다. 양경언의 글은 촛불 이후의 한국문학 비평장에서 비평의 공공성에 대해 비평가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좋은 글은 독자에게 좋은 문젯거리를 안겨준다. 세 평론 모두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지만 양경언의 글이 좀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비평의 정신 혹은 초심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다른 심사위원들 역시 양경언의 글이 신동엽문학상의 초심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수상작 선정에 주저함이 없었다. 수상을 축하한다.
시 부문 심사에서 주로 논의된 세권의 시집은 박세미의 『내가 나일 확률』, 권민경의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 신철규의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이다. 박세미 시집은 사소해지는 ‘나’를 더 쪼개고 나누어 ‘나들’로 만드는 작업을 통해 역설적으로 사소함의 창발성과 운동성을 리드미컬하게 보여준다. 권민경의 시집은 하나의 혹이 되어버린 몸에 대한 사유를 통해 이 세계의 고통과 아프게 공명한다. 신철규의 시집은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의 시간과 애도 불가능한 슬픔의 시대에 대한 묵시록이다. 그 문제의식의 크기나 사태를 바라보는 시선의 높이와 깊이가 우리를 압도한다. 그 힘에 압도되어 수상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수상을 축하한다.
소설 부문 심사에서 논의된 소설집은 박상영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와 김세희의 『가만한 나날』이다. 두 소설집이 보여주는 재현된 세계와 인물의 심리적 동선이 확연히 달랐기 때문에 심사위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뚜렷하게 나뉘었다. 박상영의 소설집은 이전까지 한국문학에서 다루지 않았던 인물들, 예컨대 실패한 B급 예술가들 혹은 주류에 편입하지 못한 채 그 주변을 맴도는 예술계 종사자들의 일상을 생동감 넘치는 활력으로 길어 올리고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점잖게 고담준론하는 사람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발리우드댄스를 출 것 같은 이 들끓는 활기가 꽤 오랫동안 한국문학을 달아오르게 할 것 같다. 이 문학 힙스터의 등장에 박수를 보낸다. 김세희의 소설집은 언뜻 우리 시대의 왜소화된 주체에 관한 단상들처럼 보이는데, 그 때문에 고시원과 편의점으로 제한된 삶의 영역만을 차지한 채 살아가는 무기력한 청춘에 대한 익숙한 소설들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김세희 소설의 미덕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 그렇고 그런 현실을 문학적 사건으로 담아내면서도 자기만의 스타일과 감각으로 새롭게 가공한다는 것이다. 특히 시스템 바깥을 상상할 수 없는 시스템 내의 인간이면서도 단지 시스템에 납작하게 눌려지지 않으려는 안간힘을, 승리도 패배도 없는 우리의 나날들을 소소하지만 묵직한 여운이 남도록 다루는 작가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많은 논의 끝에 이 우직한 미덕에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수상을 축하한다.
한기욱(韓基煜)_문학평론가
후보작들을 읽으면서 우리 문학이 세월호에서 촛불을 거치는 동안 상당히 변모했음을 재확인하는 바이다. 이제, 분열적 자아의 내면으로 파고들던 문학의 촉수가 동시대 타자들을 향해 나아가기도 한다. 개별적 주체의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는 그것대로 진전시키되, 주체와 타자들의 만남이 이뤄지는 현실적 삶의 공간에서의 문제들 역시 직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최종심에 오른 세 시집들은 각각 타자로 나아가는 통로를 마련해놓고 있지만 권민경과 박세미 시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낡고 안정적인 자아의 해체와 그때그때 새롭게 생성되는 또다른 ‘나’이다. 권민경의 화자는 “나는 나로서/어제/어제의 사람”(「나의 형식」)이라고 천명하거니와, 박세미의 시에서는 “방문을 열고 엄마가 들어오면/나는 ‘나들’이 되어 있”(「떼」)다. 이런 과감한 실험 덕분에 시는 낡은 재현주의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으나, 다른 한편 중요한 현실의 사건들에 파편적으로밖에는 반응하지 못하는 면이 있다. 시가 난해해지는 것도 이 지점에서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신철규의 시가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재현과 탈재현의 어법을 적절하게 구사하면서 수난당하는 동시대 사람들의 깊은 상처와 슬픔에 다가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마음에 부목을 대고”(「바벨」) 있는 사람들이며 “슬픔의 과적 때문에 우리는 가라앉”(「검은 방」)아 있기도 하다. 시 형식의 혁신 자체에 몰두하기보다, 공통감각의 언어와 발상을 동원하여 동시대의 ‘우리’가 겪은 특별한 슬픔의 정동을 선연히 되살리려는 그의 분투를 높이 사고 싶다.
소설 부문의 후보작들 역시 낡고 안전한 자아의 해체와 서사형식의 혁신, 그리고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각박한 경쟁체제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박상영의 소설들이 주목을 끄는 것은 퀴어 인물들 덕분만은 아니다. 산전수전의 연마 끝에 목소리가 트인 가수처럼 그는 온갖 소설적 자원들을 동원하여 자유자재로 서사를 끌어간다. 재미있고 의미심장하게. 이에 비해 김세희는 특유의 또박또박하고 진지한 어법을 선보이는데, 얼핏 파격과 혁신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가만한 나날』에서 보여준 다채롭고 섬세한 서사들은 사실주의적 서사를 바탕으로 각각의 주제가 요구하는 만큼의 혁신적인 요소를 내장하고 있다. 사실 표제작을 포함한 여덟편의 소설에 눈에 띄는 파격은 없지만 파격적이라고 소문난 소설들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유형화된 인물, 상투적인 발상, 예상되는 전개에서 비껴나 있다. 인물과 현실에 그때그때 살아 있는 반응을 보이는 이 성실한 서사들이 가정과 직장에 스며 있는 신자유주의적 핍박기제의 작동방식을 냉철하게 직시한다는 점을 특히 평가하고 싶다.
평론 부문에서는 신샛별과 양경언의 평문이 막판까지 백중지세를 이루었다. 두 글은 각각 장단점이 있다. 신샛별의 글은 ‘프레카리아트 페미니즘’이라는 새 개념을 만들어내어 조남주와 강화길의 소설들을 분석할뿐더러 이들 작품에 쏟아진 비평적 논의들을 요령있게 분류하고 재치있게 논평한다. 가독성이 뛰어나고 유익하고 읽는 재미까지 구비해 있다. 다만 ‘프레카리아트 페미니즘’이 조남주 강화길 소설들을 이해하는 데 적실한 개념인지 의문이 드는 지점이 있고 조남주의 소설을 강하게 옹호하는 논리에는 비평적으로 무리가 따르기도 한다. 한편 양경언의 글은 ‘비평이 왜 중요한가’라는 요긴한 물음을 던지는 한편 최근 페미니즘 논쟁, 문학의 공공성 논쟁에 촘촘한 논평을 곁들이며 뚝심있게 논의를 밀어붙인다. 그런데 시종일관 밀도 높은 서술과 논평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가독성이 떨어지는 데는 한편의 평문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논제를 붙잡았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일 텐데, 쟁점 앞에서 적당히 얼버무리며 넘어가지 않는 비타협적인 태도도 한몫한 듯하다. 좋은 비평이란 무엇인가를 자문하면서, 중요한 질문을 꿋꿋하게 밀고 나가는 그의 기백을 높이 사고자 한다. 각 부문별 수상자들께 심심한 축하의 말씀 건넨다.
황규관(黃圭官)_시인
문학작품을 읽고 떨리는 가슴의 주파수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은 비교적 상식에 속한다. 이번 신동엽문학상 심사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났다.
시 부문의 수상작으로 결정된 신철규의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에 실린 시들은 현실의 어떤 상황과 사물의 상태를 꼼꼼히 기술하면서 그림(이미지)을 그려나가는 작법을 다수 드러내고 있다. 나는 그 때문에 도리어 작품에 ‘힘’이 실리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가졌다. 다른 말로 하면 신철규의 대부분 작품은 ‘포이에시스’보다 ‘테크네’에 가깝다. 다만 몇몇 포이에시스로 쓰인 작품들은 신철규의 역량을 증명하고 있었으며, 또 테크네로 쓰인 작품들에도 외부를 감각하는 긴장감이 (조금은 모호하긴 하지만) 느껴져 신동엽문학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박세미의 시집과 권민경의 시집은 신철규의 시집과는 다른 느낌들을 주었다. 『내가 나일 확률』은 예심과정에서도 나를 매혹시킨 시집이었으나 그 ‘생명력’이 왠지 오래가지 않았고,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는 앞부분에 실린 작품에서 느껴지던 ‘아픔’이 뒤로 가서는 그 몰입도가 떨어지는 경험을 했다. 아마도 그와 나의 언어 사이에 간극이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김세희 소설집 『가만한 나날』을 읽으며 주인공들의 무력감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표제작에서, 주인공이 자기 노동이 야기한 결과에 대해 보여주는 회피적인 태도에도 개인적으로는 공감하지 못했지만, 도리어 임금노동에 내몰린 현실의 세태를 드러낸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었다. 거꾸로 말해 작가의 이런 세밀한 능력에 기대를 걸기로 하고 김세희의 작품을 선택했다. 박상영의 소설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재밌게 읽혔다. 그러나 작가가 창조한 공간과 인물들에 대도시의 소비문화적인 코드와 언어들이 과하게 부여된 느낌을 주었다. 이게 현실의 어떤 측면을 표현한 결과일 수도 있겠으나 좀더 다양한 관점에서 현실에 접근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이겨내지 못했다.
평론 부문에서는, 처음에는 신샛별의 글에 주목했으나 최종적으로는 양경언의 「비평이 왜 중요한가」에 기표했다. 조남주 강화길의 소설에 비평적 무리수를 두었다는 지적들이 있었는데, 그것을 받아들인 탓이다. 평론이 그 자체로 빛날 수도 있지만 작품 분석에 기댄 경우에 그 분석 내용을 모른 체할 수는 없다고 봤다. 양경언의 평론은 읽기가 만만치 않았다. 이것이 아마 이번에 검토한 양경언 평론의 아킬레스건일 것이다. 하지만 다룬 주제의 중량감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도 있으며, 비평에 대한 능동적인 태도가 마음을 끌었다. 결론으로 도출된 ‘비평이 혁명을 의미화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뜨거운 토론이 필요할 듯 보인다.
시대와 무관하고 그 의미도 모호한 ‘최상’보다 당대에 가장 적합하고 수긍 가능한 작품을 눈여겨보는 것이 ‘신동엽문학상’에 임하는 마땅한 자세라고 나름 생각했다. 수상자들께 축하를 드린다!
수상소감
높아만 지세요
신철규 愼哲圭
1980년 경남 거창 출생.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등이 있다.
미각을 잃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한달쯤 전에 그 증상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단것을 먹어도 단맛이 안 느껴졌다. 혀끝뿐만 아니라 혀의 바깥 테두리가 전체적으로 마비된 것처럼 얼얼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약을 먹으면 회복 속도가 좀 빨라지기는 하지만 자연적으로 치유되는 것과 시간상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나을 수 있을지, 그런 날이 언제쯤 올지 아직 알 수 없다. 낫기 위해서는 아파야 한다.
전화로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뻤다. 하지만 마음이 무거운 상태였기에 미지근하게 다가왔다. 나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자신만의 시를 위해 고투하고 있는 다른 젊은 시인의 기회를 뺏은 것은 아닌지 미안했고, 나라는 인간이 시를 쓸 자격이 있는지 고민하던 터라 더 그랬다.
고정된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실을 받아들이는 동안에도 사실들의 연결고리는 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확정된 현실을 파악하기 힘들다. 또한 이처럼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현실을 포착한다 하더라도 그것과 진실 사이에는 항상 어떤 어긋남이 가로놓여 있다. 현실은 완결된 총체성을 가진 것이 아니다. 현실의 분열상을 단순히 주관적 관념에 의하여 나타난 표면구조라고 물리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언어는 미약하다. 언어는 사물의 헛다리를 짚거나 세계에 부딪혀 튕겨져 나온다. 언어는 그 불투명성과 관념성 때문에 대상을 미끄러지며 흘러간다. 그 간극을 의도적으로 봉합하는 것은 폭력이며 그것이 시를 망가뜨린다. 언어는 언제나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것이며, 언어와 대상은 완전한 일치에 도달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을 써서 그 차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시는 ‘가장 부정확한 정확함’의 상태를 지향하며, 시인은 대상 앞에서 애도(멜랑콜리)의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다. 나는 나의 문장들이 유려해지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시가 세계의 가장 어두운 곳에 머무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이 세계를 어둡게 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따뜻한 밝음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믿는다. 1961년 4월에 발표된 신동엽의 시 「힘이 있거든 그리로 가세요」라는 시를 좋아한다. 그는 좁고 잡초로 가득하고 황량한 ‘그늘밭’과 같은 현실에서 좀더 높아지라고 말한다. 높은 곳에서 보면 현재의 비극과 모순이 걷히는 시대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그는 믿었던 것이다. 그 자신마저 그 믿음을 포기하면 어둠과 절망이 영원히 계속될 거라는 책임을 스스로 느꼈던 것인지도 모른다.
힘든 결정을 내려주신 심사위원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더 좋은’ 인간이 되지는 못해도 ‘더 나쁜’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것으로 그 마음에 보답하고자 한다. 그립고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그중에는 부를 수도 없고 불러서도 안 되는 이름이 된 분들이 있다. 그분들께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수상소감
금손
김세희 金世喜 1987년 전남 목포 출생. 2015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가만한 나날』, 장편소설 『항구의 사랑』 등이 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쓴 소설을 가까운 이들이 영원히 읽지 않을 것처럼 글을 쓰고 싶어했다. 글을 쓰는 나와,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이자 친구인 나를 철저히 분리했고, 그 분리 안에서 스스로 편안하다고, 어쩌면 안전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올해 첫번째 소설집과 장편소설이 나란히 출간되면서 나의 순진한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원하는 만큼 과장해서 말하면, 낙원에서 추방된 느낌이었다. 한때는 분명 그런 장소가 존재했고 내가 그 안에 있었는데, 이제 두번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그랬고, 벌거벗은 것 같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올 것이 왔구나…… 벌거벗은 채로 살아갈 앞날을 생각하면 두렵고 막막했는데, 이상한 일이지만 그 두려움과 막막함 속에서 비로소 작가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저 읽고 쓰기를 사랑했을 뿐인데, 글쓰기가 내게 너무나 많은 것을, 때로는 내 존재와 인생 전체를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앞으로 글을 쓰면서 마주하게 될 숱한 갈등과 오해와 죄책감에 대한 예감에 두번 다시 낙원의 행복은 없겠구나, 느끼고 있을 때 수상소식을 들었고, 과분한 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더럭 겁이 났다.
수상소식을 들은 다음 날 아침, 출근준비를 하던 남편이 갑자기 내 손을 잡더니 ‘금손’이라며 손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고, 긴장이 풀리면서 그제야 기쁨이 밀려왔다. 그 여름날 아침의 장면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내가 살면서 금손이라는 말을 다 들어보다니.
내내 힘든 일만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 거야, 생각하게 되었으니 상이란 참 대단하다. 감당해야 할 일들을 감당하면서, 너무 무겁지 않게, 명랑하게 작가의 길을 걸어가보겠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수상소감
두려워하면서, 다시 쓰기
양경언 梁景彦 1985년 제주 출생. 2011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비평활동을 시작했다. 주요 평론으로 「최근 시에 나타난 젠더 ‘하기(doing)’와 ‘허물기(undoing)’에 대하여」 「비평이 왜 중요한가: 비평이 혁명을 의미화하는 방식」 등이 있다.
수상소감을 전하는 지면이 마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날 동안 많은 문장을 썼다가 지웠다. 쓰다가 다시 지우고 또 쓴다. 수상의 영광을 함께 나눌 분들을 향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단출하게나마 내가 생각하는 비평의 소임, 이 상을 통해 앞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여기는 비평의 책임을 밝히는 지면이라 생각하면 지워질 문장이 몇이나 될까 싶지만, 그게 참 쉽지가 않다. 생각한 바를 정직하게 적기 위해 문장을 벼리는 일이 점점 까다로워진다. 쓰는 일이란 다른 이들과 적나라하게 대화를 나누는 과정을 두려움 없이 계속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매번 감당하는 것이기도 하므로.
무언가를 읽고 든 생각을 사람들과 나눔으로써 세상을 현명하게 상대하는 일, 다시 지우고 또 쓰는 일, 그것은 비평가가 응당 두려움 없이 해야 할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일이 얼마나 두려울 수 있는지를 헤아리면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비평가에게 어떤 상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제대로 두려워할 줄 알면서 비평을 하라는 가르침을 받아들이란 얘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마려운 사람들’이 조용히 눈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는 때를 맞이하기 위해 순한 굵직함으로 더 이야기해야만 했던 시대를 살다 간 신동엽 시인의 뜻도 그 곁에 새길 수 있을 듯하다.
문학의 위기를 단정하는 과장과 엄살이 난무하던 시기에도 오히려 난항을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조건으로 삼고 문학의 가능성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선배 비평가들이 스스로를 ‘비평가’로 소개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다는 걸 나는 기억한다. 현장과 역사, 전망을 저버리지 않고 떳떳하게 공부에 임하는 태도를 선배들로부터 배운다. 나도 과도한 것과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가늠할 줄 아는 비평가이고 싶다.
요새는 내가 쓰는 글을 포함해 비평에서 ‘삶’이라는 말을 너무 간편하고 납작하게 언급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겨 있다. 하지만 그 말의 복잡성과 만만치 않음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일로부터 등 돌린다면 비평이 창작과 더불어 내고자 하는 목소리의 향방 역시 갈피를 못 잡을 것이다. 내 주위 훌륭한 친구들 몇몇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뭔가를 해보려다가 넘어진 시기를 최근에 살고 있다. 이들은 마음을 다쳤을지언정 삶이 끝장났다고 함부로 떠들지 않는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꾸려왔던 많은 이들이 그랬던 것 같다. 해방에 대한 설레발이 없는 이들의 근력이 시대를 다시 쓰게 한다. 그 한가운데에서 문학이 어떻게 눈을 뜨고 있는지를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