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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새로운 현실, 다른 리얼리즘

 

토니 모리슨의 현재성

 

 

김미현 金美賢

아주대 영문과 교수. 공저 『토니 모리슨』, 논문 「『서기 바틀비』: 공감의 규율성과 책임의 공포」 등이 있음. miehkim@ajou.ac.kr

 

 

1. 새로운 기억

 

미국의 작가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이 지난 8월 5일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모리슨의 별세 소식에 학계, 비평계, 출판계뿐만 아니라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언론인 오프라 윈프리 등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이 애도를 표했다. 모리슨은 1970년 『가장 푸른 눈』(The Bluest Eye, 한국어판 들녘 2003)을 발표하며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2015년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God Help the Child, 한국어판 문학동네 2018)까지 총 11권의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그의 소설은 미국 흑인의 정체성, 기억과 역사, 가족과 공동체 관계에 대한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탐구이자 인종주의에 물들지 않은 언어와 비전을 찾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1973년 『술라』(Sula, 한국어판 문학동네 2015)와 1977년 『솔로몬의 노래』(Song of Solomon, 한국어판 들녘 2004)를 발표하며 정교하고 시적인 문체, 흑인 역사와 경험에 대한 심도있는 통찰, 상상력 풍부한 스토리텔링으로 20세기 후반 미국문학의 중요한 작가로 부상했고, 그의 최고작이라 할 수 있는 『빌러비드』(Beloved, 1987, 한국어판 문학동네 2014)로 1988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993년 흑인 여성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미국 흑인작가 중에서 모리슨만큼 생전에 비평계와 학계는 물론 대중의 인정과 존경을 받은 이는 없을 것이다. 그는 소설 외에 다수의 에세이, 평론을 발표했고 희곡과 오페라 대본도 집필하여 무대에 올렸다. 아들 슬레이드 모리슨(Slade Morrison)과 함께 아동문학 작품도 출판했다. 그는 흑인 지성으로서 미국의 정치적·사회적 이슈에도 목소리를 내며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미국사회의 인종주의에 대해 날카로운 지적을 멈추지 않았다.

모리슨은 1931년 2월 18일 미국 오하이오주 로레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 워포드(George Wofford)와 어머니 라마 워포드(Ramah Wofford) 모두 남부 출신이나 어린 시절 북부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조선소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토니 모리슨의 본명은 클로이 아델리아 워포드(Chloe Ardelia Wofford)이다. 모리슨은 고향 로레인이 흑인뿐만 아니라 멕시코나 이딸리아 출신의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섞여 사는 곳이었고, 학교에서도 다양한 인종의 친구들과 같이 공부했다고 회고한다. 1 모리슨은 워싱턴에 있는 하워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1955년 코넬 대학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58년 자메이카 출신 건축가 해럴드 모리슨(Harold Morrison)과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지만 1964년 이혼했다. 그는 1965년 뉴욕주 시러큐스에 있는 랜덤하우스 계열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며 출판계에 몸담았다. 1968년부터 뉴욕시 랜덤하우스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기 시작해 1984년 뉴욕주립대 교수직을 맡기 전까지 십오년이 넘도록 흑인작가의 작품 출판에 주력했다. 그는 편집자로 일하면서 대학 강의도 했고, 첫 소설을 발표한 후에도 편집과 강의를 병행했다. 모리슨이 첫 소설을 발표한 것이 마흔 무렵이었는데, 세번째 소설 『솔로몬의 노래』를 출간한 후에야 자신이 작가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대학 시절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해 세례명 앤서니(Anthony)를 줄인 ‘토니’라는 별명을 사용했다. 2 『가장 푸른 눈』 원고를 출판사에 투고할 때 편집자가 자신을 토니 모리슨이라고 알고 있어서 그 이름을 쓰게 됐지만 3 그때 토니 모리슨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을 후회하고 자신의 이름은 클로이 앤서니 워포드라고 한다. 4 모리슨은 1989년부터 프린스턴 대학 문예창작 전공 교수로 재직하다 2006년 은퇴했다.

나는 내심 그가 백살 넘게 오래오래 살았으면 했다. 모리슨이 그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 죽지 않고 계속 살면서 과거 이야기를 해주는 여인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 한 예가 『솔로몬의 노래』에 등장하는 써시(Circe, 키르케)이다. 써시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여신으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 일행을 동물로 변하게 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마법사이기도 하다. 모리슨의 소설에서 이 인물은 산파로 등장하는데, 할아버지부터 손주에 이르기까지 마을 사람 전부를 받아냈다고 말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 여인이 백살의 나이로 이미 오래전 죽었다고 알고 있지만 실은 숲속의 큰 집에 살고 있었다. 그녀는 이십대 여자의 목소리로 아버지 고향을 찾아온 주인공 밀크맨(Milkman)에게 그의 조부모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밀크맨은 금을 찾으러 이곳에 왔는데 그의 여행은 결국 써시와 그 지역 사람들이 기억하는 조부모, 증조부모의 삶을 알아가는 여정이 된다. 또다른 예로 2003년 발표한 『러브』(Love, 한국어판 들녘 2006)의 엘(L)이 있다. 엘은 살아서는 주인공 코지(Cosey)의 호텔 요리사로 일하며 그 가족의 삶을 지켜보았고, 죽은 후 목소리로 등장해 등장인물들도 몰랐던 이 가족의 과거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해준다.

두 인물의 공통점은 과거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인데, 등장인물들이 알 수 없거나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사실, 새로운 이야기를 전해준다는 점이 특징이다. 모리슨은 이 여인들처럼 새로운 기억을 전해주는 사람이다. 모리슨의 작품세계를 간단히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인물들은 공통적으로 과거 기억과 씨름하면서 그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법을 모색한다. 모리슨의 작품은 잊힌 과거, 알려지지 않은 과거, 고통스러운 과거, 잊고 싶은 과거, 되살리고 싶은 과거에 관한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과거를 향한 감정들, 특히 회한, 두려움, 슬픔, 그리움 등을 주제로 삼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감정을 동인으로 새로운 기억이 전개된다.

첫 소설 『가장 푸른 눈』에서는 어린 시절 친구를 기억하는 화자, 클로디아(Claudia)의 안타까움과 죄의식을 느낄 수 있다. 그가 불러내는 과거는 아홉살 무렵 일년의 기간이다. 클로디아는 하굣길에 친구들과 싸우거나 가게로 사탕을 사러 가는 게 더 중요했지만 그때 피콜라(Pecola)라는 친구가 있었고 어른들이 피콜라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음을 상기한다. 그 흑인 동네 사람들이 쉬쉬하면서 주고받은 이야기는 어린 피콜라가 아버지 촐리(Cholly)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이다. 어른들은 그 사실에 대해 충격과 혐오를 드러낸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아무도 피콜라를 위하거나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 것에 의아해한다. 어린 클로디아가 또한 이해하지 못한 것은 피부색이 덜 검은 모린 필(Maureen Peal)은 누구나 예쁘다고 하고 누구에게나 존중받고, 자신과 언니에게는 다정하지는 않지만 보호해주는 부모가 있는데, 피콜라는 왜 집에서 쫓겨나고 모두가 피하고 외면하는가이다. 이 소설은 어린 클로디아의 제한된 시각이 어른 화자의 통찰과 인식으로 이어지는 형식을 취한다. 어른 클로디아는 흑인을 향한 무시와 경멸을 내면화한 ‘우리’, 즉 자신을 포함한 친구들, 이웃들, 흑인사회 모두가 그 무시와 경멸을 다시 ‘우리’ 중 가장 약한 대상인 피콜라에게 가하며 자족하고 안도했음을 깨닫는다. 그는 피콜라가 심지어 자기 부모에게도 가치 없는 존재가 되면서 그들의 절망과 분노의 희생양으로 전락했으며, 흑인사회 모두가 희생자를 만들어내서 자신들의 분노와 좌절감을 그를 통해 씻어내는 과정에 참여했다고 고백한다.

 

그 애의 추한 모습 옆에서 우리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애의 평범함 때문에 우리가 화려해졌고 그 애의 죄 때문에 우리가 성스러워졌다. 그 애의 고통 때문에 우리는 건강한 모습으로 빛났으며 그 애의 어색함 때문에 우리가 유머감각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애의 어눌함 때문에 우리는 달변이 되었다. 그 애의 가난이 우리를 넉넉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5

 

모리슨은 단순히 과거의 기억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클로디아처럼 과거를 다시 보게 한다. 클로디아는 잊어버리고 지우고 싶은 과거의 한편에서 피콜라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직면한다. 모리슨의 글쓰기는 이처럼 과거를 되살리는 작업이다. 그는 작가에게 기억이 중요하고 자신에게 기억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며 “의지가 가해진 창조”라고 말한다. 6 과거를 새롭게 되살리는 것은 현재의 인식과 감정을 동인으로 그 과거의 현재적 의미를 찾는 작업이다.

 

 

2. 기억의 고통과 윤리

 

모리슨의 소설, 글, 기억은 미국 흑인의 경험과 인종 관계에 관한 것이다. 모리슨은 훌륭한 예술, 훌륭한 사상, 훌륭한 글은 언제나 정치적이며 다른 어떤 것일 수 없다고 하고, 7 또한 자기가 흑인 여성이라는 사실과 자신의 작품이 별개가 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은 백인이나 흑인 모두 민감하게 느끼고 불편해하는 인종주의의 여러 국면을 살핀다. 특히 모리슨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인종주의로 인한 심리적 분열이다. 모리슨은 이러한 심리적 분열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의 문제이며 현대의 문제라고 본다.

 

흑인 여성들은 19세기, 그리고 그 이전부터 ‘포스트모던’의 문제와 씨름해야만 했다. 현대 세계가 경험하는 이 문제는 일종의 분열이다. 이 문제는 오래전에 흑인들에 의해 지적되어야 했다. 안정성의 상실과 안정성을 재구축해야 할 필요 때문에 한편으로 미쳐버리는 것. 소설 속 인물들이 “미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며 어느 면으로 미쳐버리듯이. 현대인은 이러한 생존전략의 산물이다. 이는 또한 서구의 침탈에 대한 반응이다. 그것을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경제체제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상은 병이다. 노예제는 세상을 반으로 갈랐고 여러 방면으로 분열시켰다. 유럽도 분열되었다. 노예제 때문에 유럽은 변해버렸다. 노예 주인이 되었고, 노예제로 그들은 미쳐버렸다. 수백년간 노예제를 유지하면서 그 댓가를 치르지 않을 수는 없다. 유럽인들은 노예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인간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이 진실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고 모든 것을 재구성해야 했다. 그 때문에 2차대전에서 일어난 일들이 가능했고 1차대전이 불가피해졌다. 이 모든 문제를 포괄하는 말이 인종주의다. 8

 

노예제, 인종주의, 식민주의에 희생된 집단은 생존을 위해 심리적 분열을 겪어야 했고 노예제를 운영하는 집단도 정신적으로 온전할 수 없다는 인식이다. 그러므로 모리슨의 과거 탐구는 흑인들의 심리적 분열과 상처를 향하는 동시에 백인을 포함한 미국인, 미국 역사의 모순과 분열을 향한다.

모리슨은 이전에 조명되지 않았던 미국 흑인의 경험과 역사를 심도있게 재현했다는 평을 받는데, 그가 미국 흑인의 경험과 내면에 대해 철저하고 날카롭게 성찰한다는 점이 먼저 지적되어야 한다. 모리슨은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를 평하며 그가 다른 백인작가들과 달리 인종주의와 그 역사의 모순을 외면하지 않고 흑인에 대한 백인들의 공포, 혐오, 심리적 왜곡을 직시했다고 지적한다. 모리슨은 포크너가 이러한 시각과 태도로 역사 기록에서는 얻어낼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이해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9 모리슨이 짚는 점은 포크너가 백인들이 지닌 인종주의의 심연을 파헤치고 자신을 포함한 남부인의 흑인을 향한 심리적 태도에 대해 철저한 자기성찰(self-reflection)을 했다는 것이다. 모리슨도 『가장 푸른 눈』부터 흑인사회 내부의 모순, 인종주의를 내면화하면서 갖게 된 자기혐오, 같은 흑인을 향한 학대와 폭력의 문제, 흑인 남성과 여성의 갈등 등을 다룬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흑인을 위한 것이기에 그들에게 의미있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고 밝힌다.

 

작품을 쓸 때 나는 흑인 말고 다른 이들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흑인들이 관심을 가질 것들에 대해 쓴다. 작품에서 나의 기준은 매우 높다. 왜냐하면 흑인들을 설득하고,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들에게 명확히 보여주고, 그들을 탐구하려 하기 때문이다. 나는 흑인들을 낮게 보며 얘기할 수 없다. 나는 실질적인 무언가를 내놓아야 한다. 10

 

모리슨은 『가장 푸른 눈』 이후 『술라』 『솔로몬의 노래』 등에서 이러한 태도를 견지했고, 『빌러비드』에서는 미국 인종주의의 핵심인 노예제를 다룬다. 이 소설은 1856년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발생한 실제 사건, 즉 남부의 농장에서 도망쳐 숨어 있던 노예 마거릿 가너(Margaret Garner)가 노예 사냥꾼에게 잡히게 되자 두살 난 자기 딸을 그 자리에서 칼로 살해한 사건에 근거하고 있다. 사건 후 가너는 남부로 끌려가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모리슨은 주인공 세서(Sethe)가 딸을 살해한 후 재판을 받고 감옥에서 나와 신시내티에서 살고 있다고 설정한다. 이 소설은 사건이 일어난 지 십팔년이 된 시점에서 기억과 대화로 세서의 과거가 조금씩 밝혀지는 서술 형식을 취하면서 세서의 내면과 그 사건 후 세서의 삶을 조명한다. 주된 사건은 십팔년 동안 이웃에게 외면당한 채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던 세서와 딸 덴버(Denver)가 사는 집에 남부 농장에서 같이 노예살이를 했던 폴 디(Paul D)가 찾아오고, 바로 며칠 뒤 정체를 알 수 없는 젊은 여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두 인물은 세서의 마음에 다른 종류의 움직임을 일으킨다. 폴 디의 등장으로 세서는 남부 농장에서의 끔찍한 과거를 다시 상기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몰랐던 농장에서의 사건과 경험도 폴 디에게서 듣게 된다. 세서는 또한 폴 디와 함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상상도 한다. 반면에 자신의 이름이 빌러비드인 것 말고는 기억도 없고 정신도 온전치 않은 젊은 여성은 세서에게 죽은 딸에 대한 이야기와 세서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계속 요구하는데 세서는 점차 빌러비드가 죽은 자신의 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모리슨이 이 작품을 “국가적 기억상실”(national amnesia)에 대한 이야기 11라고 하는 것에서 보듯이, 『빌러비드』는 백인과 흑인 모두 떠올리고 싶어하지 않는 노예제의 과거를 다시 기억하고, 다시 쓰기를 시도한 작품이다. 『가장 푸른 눈』이 어린 시절 친구 피콜라에 대한 클로디아의 애도라면 『빌러비드』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고 통계 숫자로 설명되지 못한 노예제의 희생자에 대한 애도라고 할 수 있다. 모리슨이 제시하는 노예제의 실상은 단순히 백인이나 노예 주인이 흑인 노예에게 가하는 폭력뿐만 아니라 노예 어머니가 자식을 자기 손으로 죽일 수밖에 없는 현실까지 포함한다. 기록에 따르면 가너는 칼을 든 상태에서 제압당했는데 나머지 세 자녀마저 죽이려고 가해한 상태였으며 잡힌 후에도 침착하고 단호한 태도로 자식들이 노예로 끌려가 자기처럼 살게 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고 한다. 12 『빌러비드』에서 세서도 “내가 아는 그 끔찍한 것으로부터” 13 자식을 구하기 위해 자식을 죽인다. 세서에게는 그 방법이 곧 자식을 “안전한 곳에 두는 것”(200면)이다. 세서의 결정과 행동을 특이한 개인이 저지른 일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이는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노예제 속에서 돌파구 없는 노예 어머니의 상황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노예들은 자식에 대한 권리도 없이 자식이 팔려가는 꼴을 지켜봐야 했으며 스스로 자식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세서의 이웃 엘라(Ella)처럼 “사랑을 심각한 장애”(256면)로 여기게 된 사람도 있지만 세서는 자식에 대한 강한 보호의식과 집착을 가지게 된다. 세서는 어머니가 노예선에서 낳은 아이들을 다 물에 던져버리고 자기가 원한 남자의 아이인 자신만 지켰다는 얘기를 기억하며, 자기가 선택하고 결혼한 남자 할리(Halle)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자기 힘으로 지키려 한다. 소중한 자식을 자기 손으로 죽이는 것은 본인에게는 진정한 사랑에서 나온 결단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자식에 대한 사랑과 자식의 안전 둘 다 지킬 수 없다는 절망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모리슨은 세서가 어머니 역할에 자신을 다 바쳤으며 세서에게는 그것이 노예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 상황에서 인간이 되는 방법이었다고 지적한다. 14 세서에게 자식은 자신의 “최고의 것”이자 동시에 “더럽혀지지 않은 자신의 일부”이다.(251면) 세서 본인은 어머니의 젖도 먹지 못하고 노예 주인에게 동물로 취급받고 강간당하고 아이에게 줄 젖까지 빼앗겼지만, 자신의 최고의 부분인 자식은 깨끗하고 사랑받고 노예농장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일부가 회복되는 것이다.

세서와 다른 선택을 한 어머니들도 있다. 세서의 어머니는 세서를 두고 탈출을 시도하다 잡혀 처형되었으며 시어머니 베이비 석스(Baby Suggs)는 팔려간 아이들의 모습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어머니와 자식에게 상처, 단절, 원망, 고통이 남는다. 버린 아이, 팔려간 아이, 자기 손으로 죽인 아이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노예 어머니의 정신이 온전할 수 없다. 세서는 아기의 목에 톱을 대어 생명을 빼앗은 행위가 진정한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아기의 유령을 불러서라도 설명하고자 한다. 이처럼 어떤 해결이나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노예 어머니의 상황은 노예제에 대한 역사적 이해나 사회적·도덕적 규범의 범위를 넘어서는 문제를 제기한다. 세서는 심리적으로도 온전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과거 노예농장에서 겪은 끔찍한 기억이 눈앞에 펼쳐져 시달리는 한편, 죽은 딸을 살려내고자 한다.

모리슨은 이 작품을 통해 노예제를 느끼게 하고 싶었다고 하는데, 15 노예제를 느낀다는 것은 곧 희생자들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고 그들이 경험한 돌파구 없는 상황과 선택의 문제, 그 윤리적 딜레마를 경험하는 것이다. 자기 손으로 죽인 딸에 대한 어머니의 슬픔과 애도는 끝이 없고, 어머니의 이 행동에 대한 판단을 내릴 사람은 모리슨이 말하는 것처럼 죽은 딸밖에 없다. 16 세서는 빌러비드가 죽은 딸의 환생이라 믿고 빌러비드에게 과거의 일에 용서를 구하고 보상하려 한다. 하지만 빌러비드는 세서가 용서를 구해도 이해하지 못하고 세서는 빌러비드의 어린아이 같은 요구와 끝없는 식욕에 피폐해질 뿐이다. 모리슨은 세서의 속죄, 기억, 생존의 문제에 공동체의 역할을 제시한다. 빌러비드의 존재를 알게 되자 세서의 이웃들은 각자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고 십팔년 전 세서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세서의 고통을 더이상 방관하지 않는다. 노예제의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그 상처와 슬픔에 대한 책임과 기억의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인식이다.

빌러비드는 세서의 죽은 딸이자 작품 속 인물들이 각자 마음에 담고 있는, 잃어버리고 빼앗긴 가족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모리슨은 또한 “육천만명 그리고 그 이상”(헌사)에게 이 책을 바치며 노예선에서 죽은 아프리카인들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작품 마지막에 이름도 없기 때문에 잊혔다고도 할 수 없는 존재들, 기억되지 않고 이야기도 없는 존재들을 빌러비드라고 지칭하며 노예제 속에서 사라진 존재에 대한 그리움이 아직도 그대로임을 명백히 한다. 모리슨은 이 작품을 통해 역사서술의 계시적 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했다고 하는데, 17 빌러비드, 유령을 불러낸다는 것은 모리슨이 작품 마지막에 쓰듯이 지워진 발자국을 다시 그려내는 것이고, 노예제에서 희생되고 잊히고 지워진 이들이 살아온다는 것은 과거가 현재의 안정을 위협하는 것이다. 데리다(J. Derrida)가 말했듯이 유령은 과거의 위협이고 도래할 가능성이기에 미래이다. 18 그러므로 노예제에서 희생되고 이름 없이 사라진 이들의 기억을 불러내고 그들 경험의 심연을 직시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다시 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윤리적 성찰과 고통스러운 애도의 과정에 동참한다는 의미이며 가능성인 미래를 현실로 만드는 선택과 행동을 시작하는 것임을 뜻한다.

 

 

3. 새로운 소속감

 

모리슨에게 흑인이라는 정체성은 실질적이고 중요한 것이다. 모리슨은 흑인이라는 인종적 정체성이 자신에게 소속감을 주는 중요한 근간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는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인종주의가 현대와 현대인에게, 흑인과 백인 모두에게 심리적 분열과 소외를 초래했음을 명백히 한다. 2016년 하버드 대학 강연에서 모리슨은 19세기 아프리카인들의 이동보다 크지는 않지만 현재 지구상에서 그 어느때보다 큰 규모의 이주가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가 말하는 이 움직임에는 폭력과 전쟁으로 인한 난민과 망명자들의 이동뿐만 아니라 노동자, 이주민, 자본, 물자, 정보의 이동을 아우른 세계화도 포함된다. 모리슨은 이처럼 움직임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타자, 낯선 것에 대한 공포가 증대되고 타자의 존재가 국가, 지역, 기존 영역의 경계를 약화시킨다는 두려움이 강화되는 양상을 꼬집는다. 또한 세계화에 대한 긍정적 기대와 동시에 세계화가 차이와 국가적·문화적·언어적 정체성을 무화시킨다는 우려가 커졌음을 말한다. 19 모리슨은 이러한 양가적 태도의 기저에 소속감의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인종뿐만 아니라 국가, 지역, 언어, 문화 등 우리가 소속감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범주는 정치적 권력의 문제, 투쟁의 역사와 얽혀 있다. 성, 인종, 민족, 국적, 종교 등으로 나뉜 집단 간 갈등, 지배, 폭력의 문제는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이다. 동시에 이러한 범주들은 현재 우리들의 실질적인 소속감과 정체성의 근간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범주를 부정하거나 무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리슨은 인종적 소속감이나 구체성에 충실하면서 인종적 지배와 피지배 관계, 인종주의에서 벗어나는 글쓰기를 하고자 한다. 1992년 발표한 평론집 『어둠 속에서 움직이기』(Playing in the Dark)에서 그는 “인종의 위계질서, 문화적 헤게모니, 타자화”를 불러일으키는 언어와 씨름하고 인종주의에 물든 인종적 코드를 제거하며 글을 쓰는 것이 현재 흑인작가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밝힌다. 20 그 시도가 그의 단편소설 「레시터티프」(Recitatif, 1983)다. 이야기는 간결하다. 여덟살 동갑내기 흑인 여자아이와 백인 여자아이가 고아원에서 몇달을 같이 생활한 후 어른이 되어 우연히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 짧은 만남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보일 수 없는, 엄마에게 버려졌다는 공포, 배신감, 슬픔을 나눈 기억으로 특별한 우정을 느낀다. 하지만 서로 인종이 다른 데서 오는 문화적·계층적 차이, 정치적 견해의 차이로 위화감과 적대감도 느끼게 된다. 이 이야기는 인종적 차이가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양상의 갈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그에 수반되는 질투와 공격성 등 감정의 문제도 다룬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의 기저에는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받은 경멸, 무시 그리고 외로움과 공포를 서로 의지하며 겪어냈다는 연대감과 동일시가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관계는 연대감과 적대감, 사랑과 미움이라는 양가적 모습을 보인다. 모리슨은 이 작품에서 두 주인공 중 누가 흑인이고 누가 백인인지 밝히지 않는다. 명백히 한 사람은 백인이고 한 사람은 흑인이다. 모리슨은 거주지역, 경제적 지위, 문화, 취향, 옷차림, 말투 등 흔히 미국사회에서 ‘전형적인’ 흑인 또는 백인의 특징이라고 볼 만한 근거와 요소를 제공하면서도 이 전형적 이미지가 한 인물에 국한되지 않도록 했다. 둘 중 누가 흑인인지 또는 백인인지 판단과 결정을 내린다면 그것은 독자 개인의 인종에 대한 일반화나 선입견에 근거할 뿐이다.

모리슨의 이러한 시도 혹은 실험은 독자를 향한 것이다. 독자가 작품 속 인물과 동일시하거나 인물에 대해 판단하는 과정에서 인종에 따라 일반화된 선입견이나 감정으로 빠져드는 경향이 있음을 짚은 것이다. 모리슨은 『어둠 속에서 움직이기』에서 백인작가들이 흑인을 백인 주인공의 욕망, 좌절, 공포가 투사되는 대체물이나 상징으로 사용해왔음을 지적한다. 이미 인종주의가 작가들의 상상력에 깊이 침투해 있고 그 전통이 미국과 유럽에서 수백년간 이어져왔다. 그러므로 작가와 독자 모두 이러한 버릇과 관습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모리슨은 흑인작가로서 자신의 시도는 “흑인을 인종적 객체로 형상화하는 시선을 주체로 보는 시선으로 바꾸는” 작업이라고 한다. 21 백인의 시선을 중심으로, 대다수의 입장으로 여기거나 백인의 시선을 의식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동시에 그는 인종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작업이 이론화되거나 낭만화되고 있음도 지적한다. 22 모리슨은 인종적 소속감과 정체성을 초월하는 자유를 상상하는 것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놀이동산 속의 자유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본다. 그러한 자유는 어떤 이론적·철학적·정치적 청사진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지금 흑인 여성작가라는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노력을 하고 “인종주의에 물들지 않으면서 인종에 충실한” 언어를 찾고자 한다. 23 모리슨은 또한 이러한 노력과 성찰이 현세대, 우리의 몫임을 짚는다. 그는 1993년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장님 여인과 이 여인을 시험하러 온 젊은이들의 이야기로 언어의 생명력과 자유에 대해 논한다. 그 우화에 따르면 현명하다고 소문난 장님 여인에게 젊은이들이 찾아와 그들 손에 쥐인 새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맞혀보라고 요구한다. 여인은 “그것은 너희 손에 달려 있다”라고 대답한다. 모리슨은 이 우화에서 장님 여인은 작가이고 새는 언어를 의미하며 “언어는 결과를 가져오는 행위이고 언어의 힘은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도달하려는 노력에 있다”고 피력한다. 24 모리슨은 이 우화 속 현명한 장님 여인이 되어 언어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에 도달하고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말한다.

 

 

  1. 토니 모리슨의 생애와 관련해서는 찰리 로즈(Charlie Rose)가 진행하는 동명의 토크쇼에 1993년 5월 7일 출연해 인터뷰한 내용 참조(charlierose.com/videos/18778).
  2. Colette Dowling, “Conversation with Alice Childress and Toni Morrison,” Conversations with Toni Morrison, ed. Danille Taylor-Guthrie, Jackson: UP of Mississippi 1994, 50면.
  3. Claudia Dreifus, “Chloe Wofford Talks about Toni Morrison,” Toni Morrison: Conversations, ed. Carolyn C. Denard, Jackson: UP of Mississippi 2008, 101면.
  4. Christopher Bigsby, “Jazz Queen: Toni Morrison in Conversation with Christopher Bigsby,” The Independent on Sunday, 1992.4.26, 28면.
  5. Toni Morrison, The Bluest Eye, New York: Plume 1970, 205면. 인용문의 번역은 필자 본인.
  6. Toni Morrison, “Memory, Creation, and Fiction,” The Source of Self-Regard: Selected Essays, Speeches, and Meditations, New York: Alfred A. Knopf 2019, 327면.
  7. “Conversation with Alice Childress and Toni Morrison,” 앞의 책 3면.
  8. Paul Gilroy, “Living Memory: A Meeting with Toni Morrison,” Small Acts: Thoughts on the Politics of Black Cultures, New York: Serpent’s Tail 1993, 178면.
  9. Toni Morrison, “Faulkner and Women,” Faulkner and Women, ed. D. Fowler and A. J. Abadie, Jackson: UP of Mississippi 1986, 297면.
  10. Paul Gilroy, 앞의 책 177면.
  11. Bonnie Angelo, “The Pain of Being Black: An Interview with Toni Morrison,” Conversations with Toni Morrison, 257면.
  12. Samuel J. May, The Fugitive Slave Law and Its Victims, New York: American Anti-Slavery Society 1856, 37면.
  13. Toni Morrison, Beloved, New York: Plume 1987, 165면.
  14. Marsha Darling, “In the Realm of Responsibility: A Conversation with Toni Morrison,” Conversations with Toni Morrison, 252면.
  15. Toni Morrison, “ The Art of Fiction,” The Paris Review 128, 1993, 103면.
  16. Marsha Darling, 앞의 글 248면.
  17. Toni Morrison, “Home,” The House That Race Built: Black Americans, U. S. Terrain, ed. W. Lubiano, New York: Random House 1997, 9면.
  18. Jacques Derrida, Specters of Marx: The State of the Debt, the Work of Mourning, and the New International, tr. Peggy Kamuf, New York: Routledge 1994, 48면.
  19. Toni Morrison, The Origin of the Other, Cambridge: Harvard UP 2017, 93~99면.
  20. Toni Morrison, Playing in the Dark: Whiteness and the Literary Imagination, New York: Vintage 1992, 10면.
  21. 같은 책 90면.
  22. Toni Morrison, “Home,” 3~4면.
  23. 같은 글 5면.
  24. Toni Morrison, Lecture and Speech of Acceptance upon the Award of the Nobel Prize for Literature, New York: Knopf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