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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전성태 全成太
1969년 전남 고흥 출생. 1994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매향』 『국경을 넘는 일』 『늑대』 『두번의 자화상』,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 등이 있음.
jstroot@hanmail.net
상봉
1
눈발은 더 거세졌다. 호텔 로비에 집결한 가족상봉단, 자원봉사자들, 취재진은 걱정스럽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불과 삼십분 전부터 기습적으로 내리기 시작한 눈에 앞마당에 대기한 버스들마저 자우룩하게 지워져갔다. 주차장 일대에서 눈을 치우던 인부들도 철수하고 보이지 않았다. 출발이 지연될 수 있다는 얘기는 도는데 아직 적십자사의 공식 발표는 없었다. 노란색 조끼를 입은 한적 자원봉사자들이 의자를 내와 연로한 상봉자들 앞에 놓았고, 거기에 장시곤도 앉았다.
허어, 하고 앞자리에서 누군가 장탄식을 했다. 휠체어에 앉은 노인 같기도 하고, 창가에 다녀온 작달막한 털모자 노인 같기도 했다. 장시곤에게는 사백여명이 운집한 소음 속에서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마치 자기가 뱉은 소리 같았다. 늦더라도 출발한다면 모를까 아예 무산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었다. 지난 추석 계기 상봉이 연기되었다가 설을 앞두고 가까스로 재개되어 속초까지 온 이들이 많았다. 장시곤도 그런 마음고생을 겪은 상봉자였다.
그저께 뉴스에는 두 딸을 만나기로 한 구순 할머니가 세상을 등진 사연이 보도되었다. 겨우 넉달 새라지만 세월과 싸우는 고령자들이었다. 북측도 마찬가지여서 추석 때 명단에 있던 이름이 이번에는 빠진 경우도 있다고 했다. 건강을 이유로 방북을 포기한 이산가족들도 꽤 되고, 당장 어젯밤에도 집으로 돌아간 노인이 있었다. 장시곤은 자신이 여기까지 온 것만도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어깨에 가만히 손을 놓았다. 뒤에 서 있던 딸아이였다.
“걱정 마요. 눈이 그치기만 하면 출발할 거예요. 요즘 세상에 눈 온다고 가지 못하는 길이 어딨겠어요.”
장시곤은 딸의 손을 토닥여주었다. 역시나 뒤에서 아들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다섯시간 길이야, 누나.”
“우리야 그렇다 쳐도 북측 사정은 또 다를지 몰라요.”
며느리도 거들었다.
“우리 사정이라면 벌써 설명이 있었겠죠.”
“그렇겠지? 북한 쪽 문제일 거야. 거기도 백오십명이나 금강산으로 넘어온다는데 쉬울라고. 교통 사정이야 빤할 테고, 눈이 여기보다 더 오면 오지 덜하진 않을 거고.”
며느리와 아들 내외가 말을 주고받았다.
“그래도 그쪽은 사람들 동원해서 후딱 치울걸.”
딸이 말했다. 장시곤은 딸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거슬렸다. 착하고 영특했던 애가 그렇고 그런 사위를 만나 살면서 물정 모르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눈이 그쳐야 말이죠. 근데 당신?”
며느리가 아들을 쪼듯이 불렀다. 그 소리에 장시곤도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셋이나 되는 장년의 자식들이 자신을 호위하듯 서 있었다.
“당신 자꾸 북한, 북한 한다? 어제 교육 받아놓고선.”
“내가 그랬어?”
“연습 좀 해둬. 실수하지 말고.”
그건 시아버지나 시누이도 새겨들으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자식들의 대화를 들을수록 장시곤은 절망스러웠다. 날씨를 두고 정치놀음 운운하며 누구를 탓할 수 없다. 오래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이 일은 변수가 많아 사람이 하는 일 같지 않다. 그가 상봉자 명단에 들었을 때 친구 하나가 로또에 당첨됐다고 표현했는데, 정말 복권을 손에 쥐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숨 한번 시원히 내쉬지 못하고 있었다.
로비 한쪽이 술렁거렸다. 적십자사가 설치한 안내데스크 쪽으로 사람들이 몰렸다. 거기는 어제 출경 등록을 받던 곳이었다. 장시곤 가족이 있던 자리가 갑자기 후미가 되면서 그들은 고개를 빼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장시곤도 의자에서 일어났다. 적십자사에서 나온 책임자가, 이틀을 겪으며 낯을 익힌 여자가 장내가 조용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결정났나봐.”
아들이 말하고는 성큼 나서서 사람들 틈으로 들어갔다. 옆자리 노인은 현장에서 지원하는 보청기를 귀에 꽂았다.
책임자가 목소리를 높이더니 역시나 출발 시간을 연기하겠다고 발표했다. 상황이 좋아지면 열시 반에 출발하겠다고 덧붙였다. 두시간이 떠버리는 셈이었다.
“연로하신 분들이 많으니까 가급적 객실에서 대기해주세요. 지원팀이 호별 방문을 해서 다음 일정을 안내드릴 거예요. 버스에 이미 실은 화물들은 그대로 두기로 했어요. 개인이 소지한 짐들은 여기 맡겨놓으셔도 되고요. 걱정 많으신 줄 알아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번 상봉 행사는 난관이 많았고, 그걸 다 헤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죠. 꼭 모시고 가겠습니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끝말은 현장 분위기에 휩쓸려 즉흥적으로 나온 발언이겠지만 여자가 꼭 데려다줄 것만 같아서 장시곤도 박수를 쳤다. 저까짓 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금강산 일원에도 눈이 많이 내리고 있다는데 혹시 북측도 상봉자 이송이 지연되고 있나요?”
취재진 쪽에서 질문이 나왔다. 책임자가 대답했다.
“출발 지연은 우리 쪽 사정만으로 결정된 겁니다. 여러분들이 보시고 있지만 대설주의보로 동해선 육로 사정이 여의치 않습니다. 다행히 북측 가족들은 어제 이동해서 기다리고 있다고 해요. 이제 우리만 가면 됩니다.”
브리핑이 끝났다. 상봉단이 객실로 돌아가느라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가족마다 자원봉사자가 한명씩 붙어서 북새통 속에서도 질서가 잡혔다. 휠체어를 탄 노인을 둔 가족들이 먼저 승강기 쪽으로 이동했다. 장시곤 가족을 맡은 자원봉사자 김은숙은 조장까지 맡고 있어서 로비에 내놓은 의자 정리를 통솔하고 있었다. 김은숙은 장시곤이 거동에 불편이 없고 자녀들이 알아서 잘해서 걱정을 놓는 눈치였다.
아들이 돌아와 말했다.
“우리도 방으로 올라가죠, 뭐.”
장시곤은 짐을 싸 나온 방으로 다시 드는 게 내키지 않았다. 객실에서 방북이 취소됐다는 궂은 소식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율배반적으로 그는 눈 내리는 바깥 풍경으로 자꾸 눈이 갔다. 북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면 저런 눈은 장관이었다. 설악은 부러 관광도 오는 곳 아닌가. 그러나 그는 자식들을 생각해서, 시종 저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입장이기에 순순히 호텔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2
객실에 들어서자 며느리가 외투를 받을 양으로 손을 내밀었다.
“금방 나설 텐데 성가시게 벗고 그러냐.”
장시곤은 목도리만 풀어내며 말했다.
“두시간이나 남았는걸요.”
“두시간이 뭐야. 그건 또 가봐야 알겠구만. 아부지, 기왕 이렇게 된 거 좀 쉬세요. 이제 정신없이 사흘을 보내실 텐데요.”
딸까지 거들어서 그는 별 수 없이 목걸이 명찰을 벗겨내고 외투 단추를 풀었다. 그는 며느리에게 외투와 목도리를 건네고 명찰은 다시 목에 걸었다. 조끼 차림으로 그는 소파로 물러나 앉았다.
“너희들도 쉬어라, 피곤들 할 텐데.”
인천에서 새벽길을 나섰고, 속초로 와서 등록을 하고 방북교육을 받고, 밤으로 이어진 건강검진까지, 그는 어제 하루 동안 시달린 일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새벽같이 일어나 지금 이러고 있는 것이다. 예정대로라면 오후 세시에 첫 상봉이 잡혀 있다는데 그건 물 건너갔지 싶었다.
며느리와 딸이 작은방으로 들고, 아들은 텔레비전 리모컨을 찾아 뉴스 채널을 켰다. 이산가족상봉 뉴스가 특보로 전해지고 있었다. 시동을 걸고 눈 속에 묻힌 십여대의 관광버스와 밖을 내다보는 노인들의 착잡한 얼굴이 차례로 잡히고, 출발이 지연되고 있다는 뉴스가 반복되었다. 기상캐스터도 연결되었는데 동해 일원에 내린 대설주의보가 정오를 전후로 해제될 거라고 했다.
“금강산 쪽 뉴스는 한마디도 없네.”
아들이 말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장시곤은 거실 베란다를 내다보았다. 7층에서는 뿌연 잿빛 하늘만 보였다. 뉴스 화면으로 보이는 눈발이 더 선명해서 그는 창밖이 더 비현실적으로 보였고 이내 창에서 눈을 거두었다.
화장실에서 아들이 며느리를 찾았다. 장시곤은 아범이 찾는다고, 방에 대고 전했다. 며느리가 나타나 화장실 문을 버긋이 열고 말했다.
“아침에 안 씻었어?”
“바빴잖아. 짐 내놓고 어쩌고 하느라고 머리 감을 짬이 없었어.”
“지금 어디서 샴푸를 찾으라는 거야. 그거 그냥 쓰면 안 돼?”
탈모가 심한 아들은 따로 쓰는 샴푸가 있었다. 이번 여행길에 알았다. 내일모레 환갑 맞을 사람이 머리 지키겠다고 하는 짓이 낯설었다. 며느리는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텔레비전 소리만 남고 객실이 조용해졌다. 왠지 그는 긴장에서 놓여나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여행이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자식들과 제주도로 태국으로 갔던 그런 여행하고 다를 바 없는 여행.
장시곤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는 창가로 가서 밖을 내려다보고 옷걸이로 걸어갔다. 외투를 걸치고 목도리를 둘렀다.
가족상봉단이 빠졌는데도 1층 로비는 행사 지원인력과 취재진으로 여전히 붐볐다. 이번 상봉에는 백에서 셋이 빠진 아흔일곱 가족이 방북 길에 오른다. 가족당 다섯까지 동반가족으로 방북할 수 있는데 장시곤 가족은 넷만 왔다. 미국에 사는 여동생 현숙이 끝내 합류하지 못했다. 장시곤은 조카가 섭섭했다. 제 어머니에게 영주권이 없어서 이번에 들어가면 다시 미국으로 못 나온다는데 다 늙은 사람, 한국에서 여생을 보내게 하면 좀 어떤가. 기껏 손주들 돌보는 식모 신세나 다름없이 지내고 있을 것이다. 현숙을 만나지 못한 세월도 십오년이 넘었으니 이도 이산가족이 된 셈이 아닌가 생각했다.
장시곤은 로비의 라운지까페로 갔다. 그는 아침식사 때 딸이 가져다주는 커피를 입만 대고 말았다. 자식들은 그가 커피를 즐기는 건 알지만 이른 아침은 피하고 오전 느지막이 마시는 습관을 몰랐다. 개인택시를 그만두고 나서도 십년째 그렇게 마셔왔다. 혈압 환자에게는 좋지 않다고 하나 그는 커피를 마셔야 점심에서 오후로 넘어갈 기력이 생겼다. 커피 마시기에 평소보다 시간이 일렀지만 그는 커피를 두고 눈 곁에 앉아 있고 싶었다.
매장 아가씨가 계산을 끝내고 “눈발이 약해졌어요. 곧 가시겠는걸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장시곤은 창 쪽을 바라보았고 긴가민가해서 창가로 걸어갔다. 확실히 하늘이 벗겨져 있었다. 입때껏 보이지 않던 리조트의 물놀이시설과 그 너머 산줄기가 일어나 있었다. 버스 기사들이 앞유리에서 눈을 털어내고 있었으며 제설차까지 동원되어 여기저기서 제설작업이 한창이었다. 바깥의 활기가 몸으로도 전해졌다.
그는 커피를 받으려고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그러다가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발견하고 어떤 기시감으로 다시 돌아섰다. 아주 재빠르게 사람이 지나간 듯싶었는데 등 굽은 노파 하나가 지팡이에 의지해 지칫지칫 걷고 있었다. 노인은 성장을 하고 옷가방을 들고 있었다. 장시곤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보호자와 떨어진 노인이 아닐까 직감했다. 치매의 공포에 시달리다보면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그는 호텔 문을 나서서 노인의 뒤를 쫓았다.
노인은 다른 건물동으로 이어지는 차도 위를 걷고 있었다. 그는 염화칼슘을 뿌려 질척거리는 길을 걸어 노인의 팔을 잡아 세웠다. 참으로 몸피가 작고 마른 노인이 걸음을 세우고 낯을 세워 올려다보았다. 분도 바르고 입술도 붉었는데 아흔살은 훌쩍 넘어 보였다.
“낙상이라도 하시면 어쩌려고 나오셨소?”
노인이 이내 환하게 웃었다.
“영수야!”
영수야, 하고 노인이 연거푸 그를 불렀다.
장시곤은 난감했고 별 수 없이 예, 하고 대답해놓고 보았다. 노인은 가슴에 ‘17번’ 이산가족 상봉자 명찰을 달고 있었다. 상태가 이런 노인을 어쩌자고 상봉길에 모셔왔는지 따지기 전에 당장 노인을 보호하는 사람들에게 화가 났다. 치매 노인이 순식간에 사라져 낭패를 본다는 걸 모르지 않지만 이런 날씨에 이런 곳에 노인을 방치하다니 한심했다.
“어디 가시게요?”
“영수야!”
“예, 어머니. 이제 집에 갑시다.”
장시곤은 노인의 어깨를 감싸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주차장 쪽에서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젊은 사내와 초로의 여자를 발견했다. 그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장시곤은 노인의 팔을 잡고 서서 그들을 기다렸다.
여자는 장시곤에게 묵례를 하고 노인의 등에 담요를 둘러주었다.
“그래, 엄마는 오빠를 만나셨수?”
그녀는 태연하게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이 장시곤을 바라보았다. 장시곤은 노인의 팔에서 손을 거두어들였다.
장시곤은 그 딸이라는 여자에게 한마디 해주려다가 이내 이제 됐다고, 좋은 날 궂은 말 말자고 몸을 돌렸다. 커피가 나와 있을 거였다. 동행한 젊은이가 그에게 호들갑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놀라셨죠? 할머니를 촬영하고 있었어요.”
장시곤은 그제야 젊은이가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있는 걸 보았다. 아마 무슨 방송국에서 노인을 찍고 있는데 그가 주책없이 화면으로 뛰어든 모양이었다. 그는 낭패감이 들었다. 그사이 딸이 노모를 데리고 실내로 돌아가겠다는 몸짓을 했다. 젊은이가 몸을 굽실하며 그러시라고, 추운데 어서 모시라고 해놓고 목소리를 높여 덧붙였다.
“곧 방으로 찾아뵐게요. 앨범을 다 못 찍었거든요.”
장시곤은 자신을 돌아보며 딸에게 이끌려가는 노인을 지켜보았다. 모녀가 멀어졌을 때 젊은이가 말했다.
“정신이 왔다 갔다 하셔요. 열네살 때 헤어진 아들이 일흔아홉이 되셨다네요. 박금분 할머니 같은 모자 상봉 케이스는 몇가족 안 돼요. 오늘은 아침부터 집에 가신다고 차려입고 몇번을 나서시는 걸 막을 수 없어 따라와봤어요. 할머니가 지금 혜산 가시는 길이었어요.”
젊은이가 웃었다.
“웃는가? 지금 웃음이 나와? 저런 노인네 두고 영화를 찍자고? 눈길에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원. 욕심이 과하네들.”
장시곤은 발끈 화를 냈다. 그는 눈이 침침해지며 다리가 후들거렸다. 장시곤은 젊은이의 팔을 살짝 잡았다. 젊은이가 장시곤의 팔뚝을 붙들었다.
“괜찮으세요? 많이 놀라셨으면 죄송합니다.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자녀들 입장에서는 어쨌든 정신이 돌아왔으면 싶어서 뭐든 해보자고 애를 태우고 있거든요.”
장시곤은 차차 진정이 되어 젊은이의 팔을 토닥이고 손을 거두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젊은이가 다시 사과를 했고 장시곤이 길게 숨을 내쉬고 말했다.
“노인을 보자니 속상해서 그랬네. 새삼 이게 뭔 짓인가 싶어서 말야.”
“어르신도 금강산 가세요?”
장시곤은 자기 가슴을 어루만졌고, 이내 외투 속으로 들어간 명찰을 옷 밖으로 꺼내 보여주었다.
“칠십칠번이시구나. 좋은 일 많으시겠는데요. 누굴 만나세요?”
“아우를 찾았어. 얼굴도 못 보고 헤어진 막냇동생이지.”
그러곤 장시곤은 노인이 돌아간 길로 눈길을 돌렸다. 모녀는 호텔 정문으로 들어가고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떤 사연이길래 동생분 얼굴을 못 보셨어요?”
“난 고향이 해주고, 외가가 사리원이야. 어머님이 해산하려고 외가에 가 계시다가 난리를 만난 거라. 피란을 같이 못 왔어. 어머니 찾다가 동생을 이번에 찾았지. 지금 날 찍는 건가?”
장시곤은 젊은이가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어서 멈칫했다. 젊은이가 카메라를 눈에서 거두었다.
“워낙 버릇이 돼놔서요. 그런데 행사 동안 어르신도 담고 싶은데 어떠세요? 사연 있는 분들을 찾고 있거든요. 작업해봐야 알겠지만 납북자 가족 상봉도 있고, 먼 친척들 상봉도 있으니까 케이스별로 몇분 더 섭외하려고요. 불편 드리지 않을게요. 왔다 갔다 하면서 가끔 찍을 거예요.”
“우리 애들이 어떨지 모르겠구만.”
“동반가족이 어떻게 되세요?”
“딸이랑 아들 내외가 왔지.”
“따님 내외, 아드님 내외가 함께 오셨고요.”
“사위는 못 왔고.”
“여기 카메라를 보시고, 사시는 곳 주소랑 전화번호를 또박또박 말씀해주세요.”
장시곤은 꼿꼿이 서서 처음으로 카메라를 의식하며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얘기했다. 젊은이는 사진과 이름이 인쇄된 명찰에 카메라를 밀착시켰다. 그러면서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동생분 성함이 어떻게 되죠? 만나실 분이요.”
“시춘. 장시춘.”
“동생분 만나러 가는 소감 한 말씀 해주세요. 여기를 보시고요.”
“갑자기 말을 시키니 뭔 말을 해야 할지……”
“편하게 말씀해주시면 돼요. 집 나설 때 마음 생각하시면서.”
“글쎄, 사연으로 치자면 여기 온 이산가족들이 하나같이 기구하겠지만……”
그는 노파가 사라진 호텔 쪽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저 할머니 아들이 꼭 내 나이네. 세상에 없는 줄 알았던 동생이 살아 있다는 소식 들은 것만도 꿈같은데 이제 만나러 가니 감회가 이루 말할 수 없지. 사고무친으로 고생은 얼마나 하고 살았을는지, 형편은 어떤지, 아픈 데는 없는지, 조카들도 온다는데 걔들을 어떻게 맞을지…… 아무튼 내 마음이 그렇지. 아버님 대신해서 간다, 그런 마음이지. 일단 가봐야지.”
“동생분이 태어난 줄도 모르고 월남하셨는데 알아보시겠어요?”
“……”
“대답이 곤란하시면 안 하셔도 돼요.”
“동생인데 내가 몰라볼까. 형이라는 사람이 돼가지구 동생을 못 알아볼라고. 그건 내 걱정도 안 해봤구만.”
“감사합니다.”
카메라를 거두며 젊은이는 명함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동생분과 뜻깊은 만남 가지시길 바랄게요.”
장시곤과 젊은이는 호텔 로비로 돌아왔다. 장시곤은 주문해놓은 커피도 잊은 채 승강기에 올랐다. 그는 몸을 당기는 듯한 피로감을 느꼈는데 왠지 안간힘을 쓰며 방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얼떨결에 카메라 앞에서 자식들에게도 못한 속 얘기를 털어놓고 나니 그는 지금껏 제 의지와 상관없이 실려온 듯한 기분에서 깨어나 동생을 만나러 간다는 실감이 들었다. 제 기분을 정확히 모르다가 깨달은 것 같았으며 치매 노인과 같은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 된 듯했다. 이 호텔에 투숙한 이래 일박이일 동안 이상한 흥분과 열기에서 벗어나 있다가 이제 드디어 합류한 느낌이었다. 방으로 들자 세 자식들이 다 거실에 나와 있었다.
“어디 다녀오세요?”
아들은 나가보려던 참이었는지 외투를 걸치다가 걱정스럽게 맞았다.
“바람 좀 쐬고 왔다.”
그는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안색 좀 봐. 아버님, 무슨 일 있으셨어요?”
며느리가 낯을 살피며 말했다. 딸이 허리를 굽혀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으신데.”
“아니다, 아니야. 커피 좀 하려고 내려갔다가 왔더니 몸이 처지는구나.”
그러면서 그는 까페에서 커피를 찾지 못한 걸 깨달았다.
“너무 긴장되시나보네.”
딸이 제 손가방에서 청심환을 꺼내고, 며느리가 컵을 가져다가 생수를 따라주었다. 그는 귀찮은 가운데 쓴 약을 입에 넣고 물로 넘겼다. 그는 지금껏 손에 쥐고 있던 명함이 눈에 띄어 아들에게 내밀었다.
“방송국 사람을 만났는데 우리를 촬영하겠다는구나.”
아들이 명함을 받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다큐멘터리 제작업체네요.”
아들이 며느리에게 명함을 건넸다. 며느리가 조금 놀라는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어머, 좀 귀찮게 생겼네.”
장시곤은 소파에 깊이 등을 대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여러 사람을 찍는다더라. 거 왜 텔레비전에서 이런 거 하고 나면 한번씩 내보내는 방송 있잖더냐. 우리야 얼마나 찍히겠냐. 신경 쓰지 말고 하던 대로 하자.”
3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서로 알아보실 거예요. 그렇고말고요. 형제간인데 그냥 알아보실 거예요. 저도 작은아버지를 딱 알아볼 것 같은데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잖아요. 당기는 게 있을 거예요. 할아버지 사진이랑 갖고 있는 건 다 가져왔어요. 작은아버지는 할아버지도 못 보셨잖아요. 유일한 조카인데 감격스럽죠. 아버지가 평생 가슴에 품고 산 회한을 푸시는 거니까. 자식 입장에서는 이보다 큰 선물이 없죠.
선물이요? 근데 저도 인터뷰해요? 딸 같은 며느리라고요? 우리 고모가 그렇게 말해요? 선물은 남들이 하는 만큼 준비한다고 했는데 모르겠어요. 그게 그렇더라고요. 준비하려고 하니까 이것도 해얄 것 같고 저것도 해얄 것 같고 한정이 없더라고요. 근데 가져올 수 있는 건 30킬로로 정해져 있으니까 결국 꼭 챙길 걸 따지게 되고, 그러다보니 뭐 특별한 거 없이 남들 하는 거랑 비슷해졌어요. 겨울잠바, 구두, 양복도 한벌 준비했고요. 내복에 시계, 치약, 화장품, 비타민…… 또 뭐가 있더라? 초코파이요? 그것도 당연히 넣었죠. 라면도 맛 좀 보시라고 넣고. 암튼 북측 가족들이 힘들게 사실 텐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만한 것들, 다시 만나기 쉽지 않을 것 같아서 기념될 만한 것들도 준비했어요. 초등학교 다니는 손녀가 있는데 통일가족이라고 그림도 그려서 그것도 가져왔어요. 다음에 행사장에서 그 그림 보여줄게요. 얼마나 기특한지 몰라요. 우리네 비극이랑 염원이 다 들어 있잖아요.
진호와 숙경 부부는 외금강호텔 로비에서 다큐 감독과 인터뷰했다. 짐을 찾으러 방에서 내려온 길이었다. 속초를 떠나 여섯시간 만인 오후 네시를 넘겨 금강산에 도착했다. 눈길에서 지체되었고 통관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세시로 예정된 단체상봉이 다섯시로 순연되고, 중간 휴식 없이 곧장 만찬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다큐 감독에게 붙들려 있다가 물러났을 때 적십자사의 김은숙이 두개나 되는 트렁크를 맡아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출입국관리사무소의 통관을 거치고 온 화물들이었다. 가방이 하나 보이지 않아서 숙경은 김은숙에게 물었다.
“선물 가방 있잖아요. 적십자사에서 준 가방에 담은 게 안 보여요.”
“아, 그건 내일 아침에 호텔 직원들이 방으로 배달할 거예요. 개별상봉 때 드리면 돼요.”
가방들이 비슷비슷해서 진호가 화물 태그를 다시 확인했다. 확인이 끝나자 김은숙이 말했다.
“단체상봉 행사에 맞추려면 서두르셔야겠어요. 아버님은 컨디션이 좀 어떠세요?”
“버스에서 주무시고는 한결 나아졌어요.”
“다행이에요. 동생 가족분들도 사전 통보된 대로 다 참가하신 것 같아요.”
“네분이 다 오셨어요?”
“네, 동생 내외분, 아드님, 따님 다 명단에 있어요.”
그러면서 김은숙은 북측 가족의 명단을 적은 쪽지를 진호에게 건넸다. 진호와 숙경은 쪽지를 들여다보았다.
장시춘(75세), 리호선(72세), 장양일(46세), 장양선(44세).
숙경이 물러나며 말했다.
“사촌님들이 생각보다 젊네.”
진호는 외투 주머니에 쪽지를 넣었다. 그들은 트렁크를 끌고 승강기 앞으로 갔다. 김은숙과는 승강기 앞에서 헤어졌다.
“그럼 준비해서 네시 반까지 내려오세요.”
승강기에 세 팀이 오르자 꽉 찼다. 숙경이 6층 버튼을 누르고 물러났다. 5층과 7층이 추가로 눌러져서 버튼 세개에 나란히 불이 들어왔다. 승강기가 2층을 지날 때 진호는 옆에 선 숙경이 뭔가에 흠칫 놀라는 기색을 느꼈다. 복통이라도 온 사람처럼 숙경은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진호가 왜? 하고 입모양으로 물었다. 숙경이 고개를 저었다. 승강기가 5층에 멈췄다. 5층 투숙객들이 내리고 나자 공간에 여유가 생겼고 숙경이 벽 쪽으로 바짝 당겨 섰다.
6층에서 내렸을 때 숙경은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여전히 언짢은 표정이었다.
“왜, 속이 불편해?”
숙경은 진호를 승강기에서 멀리 끌어 세웠다.
“7층 가는 부부 기억나? 특히 그 여자.”
“그 여자?”
중년 부부가 탔던 것 같은데 진호는 영문을 몰라 숙경을 빤히 쳐다보았다.
“고모부 친 김포 사람들 맞지? 왜 합의서 받으러 와서 파리바게뜨에서 울던 그 여자잖아.”
진호는 긴가민가했다. 팔년 전 이야기였다. 음주운전 차에 치여 매형이 크게 다쳤을 때 누나는 중환자실에 남편을 두고 경황이 없어 진호 부부가 가해자 쪽을 만났다. 가해자의 아내가 합의서를 들고 찾아와 병원 앞에서 만난 게 기억났다. 가해자는 고등학교 현직 교사였다. 새벽에 장례식장에 다녀오다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매형을 친 것이다.
가해자의 아내는 남편이 십년 넘게 임용에서 미끄러졌다가 가까스로 임용되어 첫 학기를 보내고 있다, 어린아이들이 있다,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매형도 무릎과 발목에 철심을 박고 장파열로 수술을 받을 정도로 부상이 컸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가해자 쪽 보험에도 이상이 없었다. 매형도 잘못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사고 때 인사불성으로 취한 상태였는데, 택시가 집에서 세 블록이나 떨어진 곳에 던져놓다시피 하는 바람에 헤매고 다니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누나와 상의해서 합의서를 써주었다. 그 뒤 가해자가 죄인 같은 얼굴을 하고 병원을 방문했다.
처음 6주 진단이 나온 매형은 입원 기간이 점점 늘어났다. 큰 통증에 가려져 있던 작은 통증들이 드러났다. 갈비뼈가 세대나 부러지고 어깨 인대에도 문제가 있었다. 병원생활이 길어져 종내에는 재활까지 일년을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보냈다. 초진병원에 대한 불신이 깊어져서 서울의 대학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았지만 오른발은 장애진단을 받았다. 보험회사에서는 나이롱환자로 의심하며 매형의 신경을 건드렸다. 결국 보상비를 두고 법원까지 가서 다투게 되었는데 초진이며 합의며 모든 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매형은 가해자가 경찰서에 손써서 구속을 피했다, 연루된 경찰을 찾아서 옷을 벗기겠다, 병원에다가도 힘을 써서 초진이 그렇게 나온 게 분명하다, 의사새끼 집어넣겠다, 변호사란 놈이 보상에 무슨 정가가 있는 것처럼 합의를 권하고 상담도 한번밖에, 그것도 십분 남짓 받아본 게 전부라고 분개했다.
무엇보다 매형이 분노한 건 가해자 때문이었다. 합의서를 써줄 때 얼굴 한번 비친 뒤로 면회 한번, 전화 한통 없었다는 것이다. 합의서 받자마자 저희들은 발 뻗고 지낸다고 억울해했다. 그래서 당시 진호가 가해자의 아내에게 전화한 일이 기억난다. 전화번호를 누나나 매형에게 건넸다가는 제정신 아닌 사람들이 무슨 일을 낼 것 같아서 자신이 직접 전화를 걸었다. 여자는 수화기 너머로 불편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내비쳤다. 뭘 어떡하라는 거냐, 다 알지 않느냐, 보험회사에서 만나지 말라고 한다, 우리는 거기서 하라는 대로 할 거다, 다시는 전화하지 마라, 계속 그러면 협박으로 신고를 할 수 있다고 겁박했다. 아마 신고 운운하는 말도 보험회사가 알려준 매뉴얼일지 몰랐다. 참으로 싸가지 없는 여자였다. 울화가 치밀어 주위에 물어봐도 교통사고는 그렇게 처리되는 게 통례라고 다친 사람만 억울한 것 몰랐느냐는 반응이었다.
진호는 누나에게 가해자 쪽이 못 배워 예의가 없더라, 거기 상종했다가는 우리만 골병든다, 매형도 그쪽한테 섭섭한 거 잊고 몸 회복하는 데 정심하라고 일러라, 맨날 자문해준다는 손해사정인도 가까이하지 말라고 권했다. 매형은 의욕상실자가 되어 지내다가 퇴원 육개월 만에 목을 맸다.
“정말 기억 안 나?”
숙경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때가 언제라고 한번 슬쩍 본 게 기억나겠어. 그리고 나는 방금 그 여자나 남자나 눈여겨보지 못한걸.”
“그 여자 맞아. 어떻게 저렇게 뻔뻔하게 이런 델 오고 그러냐.”
진호는 아내의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줄 알았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그건 숙경 자신도 잘 알고 있을 거였다. 그냥 화가 많이 나 있는 아내에게 진호는 달래듯 말했다.
“누나한테는 말하지 마.”
“미쳤어, 내가 말하게.”
“당신이 워낙 뭘 감추고는 못 사니까 그렇지.”
“난 외려 그 여자가 고모를 알아보고 사과하네, 어쩌네 하며 긁어 부스럼을 낼까 더 걱정인데.”
“그건 절대 아냐. 내가 보장해. 그럴 여자가 아냐. 우리가 들이대도 딱 잡아뗄걸.”
그는 자신이 여자와 통화하면서 들었던 얘기, 느꼈던 감정을 아내에게 다 말하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누나에게는 아내에게 설명한 것보다 더 걸러서 전했다.
“암튼 우리 어떡하냐. 불편하게 생겼어.”
숙경이 상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가 불편해? 모른 척하면 아무 문제 없어.”
“그게 말처럼 되냐고. 계속 거치적거릴 텐데.”
“당신, 바람 쐬고 올래? 금강산이잖아. 공기 좀 쐬고 와.”
“아냐, 괜찮아. 당신은 짐 못 풀어. 뭐가 어디에 들었는지도 모르잖아.”
“그래. 우리 조심하자.”
그들은 거기에서 대화를 그쳤다. 첫 상봉을 준비하자면 할 일이 많았다. 진호는 아버지와 누나가 기다리고 있을 객실 쪽으로 가방을 밀었다. 그런데 숙경이 또 걸음을 멈추었다.
“또 왜?”
“그냥 설레고 호기심도 생기고 그래서 무작정 오기는 왔는데 슬슬 걱정이 되네. 당신은 안 그래?”
진호는 아내가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잠자코 들었다.
“작은아버님 사정이 너무 딱하면 어떡하지? 아버님 성격에 모른 척하시지는 않을 테고 우리 형편에 계속 도와야 할지도 모르잖아.”
“무슨 수로 도와. 들락날락할 수 있는 데도 아니고.”
“모르는 소리 마. 요새는 중국 쪽 통해서 다 한다더라.”
“당신은 뭐가 그렇게 복잡해? 난 아버지만 생각하고 여기까지 왔다고. 그리고 도울 수 있다면 도와야지. 남도 아니고 작은집인데.”
다시 그들은 대화를 멈추었다. 누나 진숙이 객실에서 나온 것이다.
“뭐 해? 아버지 양복 입으셔야 하는데.”
4
진숙은 장시곤을 부축해 상봉장인 금강산호텔로 들어서며 위축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건 부축이라기보다 불안의 틈새를 메우며 걷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호텔 건물이 주는 인상이 거두절미하고 ‘북한’이라는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칙칙하고 묵중한 대리석 외장이며, 조명이 미처 채우지 못한 듯 어둡고 넓은 홀과 2층 대연회장으로 오르는 높은 계단이 마치 러시아 영화에 나오는 궁전을 연상케 했다. 저 계단을 다 올라야만 아버지의 형제이자 진숙의 사촌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마치 저 계단 중간에서 제지를 당해 오르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2층 천장으로부터 로비 중앙으로 내려뜨린 샹들리에 불빛을 받으며 그녀는 더 느려진 아버지를 부축해 한발 한발 계단을 디뎠다. 동근 회랑에서는 귀족들이 왈츠에 맞춰 춤을 춰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다 늙어빠진 노인들이, 이런 곳은 구경도 못해본 촌로들이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하고 도열해 인사하는 접대원들의 환대를 받으며, 노란 ‘보도’ 완장을 찬 기자들이 분주하게 터뜨리는 플래시를 받으며 그저 얼이 빠진 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진숙의 가족은 계단 끝에 올라 잠시 멈춰 섰다. 머잖아 누군가 다가와 정신없이 이끌고 가기 전에 자녀들은 장시곤의 옷매무새를 만져주고 뒤집힌 명찰을 앞으로 돌려주었다. 숙경이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한걸음 뒤로 물러났을 때 북측 남자 안내원이 다가왔다.
안내원은 명찰을 확인하고 문이 활짝 열린 대연회장 쪽으로 모시겠다는 몸짓을 했다. 그들은 안내원을 따라갔다. 그들은 금강산 벽화가 그려진 회랑을 끼고 왼쪽으로 안내되었다. 흰 테이블마다 가운데 번호표가 세워져 있었고, 북측 상봉자들이 앉아서, 혹은 서서 남측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오열하는 소리도 들리고, “저거 아입매?” 하고 손짓하는 모습도 보였다.
머잖아 진숙은 진호 부부와 함께 ‘ 77번’ 테이블을 발견했다. 사촌 장양일로 추정되는 중년의 양복쟁이가 번호표를 높이 쳐들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절모를 쓰고 뿔테안경을 쓴 노인이 일어나고, 분홍색 계열 한복을 입은 모녀도 함께 일어섰다.
진숙은 아버지의 팔을 놓았다. 장시곤과 장시춘은 멈칫 서서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두 사람은 다가섰는데 서로 껴안고 오열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두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형님, 궂은 일기에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작은아버지는 목소리가 걸걸했다. 키도 훤칠해서 아버지보다 한뼘은 더 크고 풍채도 좋았다. 아버지는 목이 메어 선뜻 말을 내놓지 못하고 엉거주춤 작은아버지의 등을 토닥거렸다.
“고생 많았네. 미안하네.”
진숙은 눈시울이 뜨거웠다. 진호도 낯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숙경은 멀찍이 떨어져서 두 형제의 상봉을 디지털카메라에 담았다.
작은아버지가 작은집 식구들을 소개했다.
“여기가 안해입니다.”
눈매가 선하게 늙은 작은어머니 리호선과 장시곤이 맞절을 했다.
“여기는 딸이고 아들입니다. 너희들 뭐 하나, 큰아버지께 인사 올리지 않고선.”
양일, 양선이 테이블 옆자리에서 큰절을 올렸다. 사촌들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는 다가가 손을 잡아주었다. 이번에는 진숙네 차례였다. 아버지는 작은아버지가 했던 대로 차례로 가족을 소개했고, 진숙과 진호 부부는 장시춘에게 큰절을 올렸다. 장시춘은 차례로 껴안고 두 손을 잡아주었다.
모두가 테이블에 앉았다. 형제가 나란히 앉고 진숙네는 왼편으로, 작은집 식구들은 오른편으로 둥글게 자리를 잡았다.
“조카님들, 고맙소. 든든한 조력자들이 아버지를 잘 모셔서 오늘 이런 경사가 있잖습니까?”
작은아버지가 덕담을 했다. 검은빛이 도는 자글자글한 얼굴에 웃음이 호탕했다. 금니가 하나 있기는 해도 이가 튼튼해 보였다. 작은아버지는 머잖아 중절모를 벗었는데 이마 너머로 머리가 벗어졌고 머리카락이 검었다. 그에 비해 아버지는 숱진 머리가 하얗게 셌다. 평소 염색을 하지 않기도 하지만 이번 방북길에 염색을 하자고 했더니 동생에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고 싶어했다. 진숙이 보기에 두 사람은 떨어져 지낸 세월이 있어서 그런지 닮은 구석이 많지는 않았지만 말할 때 팔자주름이 깊어지고 입매가 나서는 게 닮아 보였다. 곱슬머리라든가 광대가 낮은 것도 닮았다. 찾으면 찾을수록 닮은 데가 또록해졌다. 작은어머니는 시종 말없이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수수하고 정감 가는 얼굴이었다. 사촌들은 외탁을 한 느낌이었다.
옆자리 78번 테이블도 상봉이 이루어져 떠들썩했다. 남북 취재진도 붙어서 노인들의 상봉을 취재했다. 진숙네도 모두 어색한 시선을 거두어 그쪽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남측 노인이 북측 노인을 앉혀놓고 큰절을 올렸다.
“삼촌, 우리 가문을 지켜주셔가지고 정말 감사합니다.”
주변에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숙경이 테이블에 차려진 망고주스와 알로에주스를 북측 가족에게 밀어주었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기색이 역력했다. 진숙은 숙경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작은아버지 가족은 상상을 벗어나 있었다. 왠지 안도감과 함께 위화감이 들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내 사는 데 바빠서 아우님을 일찍 찾아보지 못했어. 아버지가 새장가를 들어서 북에 계신 어머니 말씀도 통 안 하셨고. 내 세살 때 어머니를 놓쳤는데 어머니 기억이 있나. 아우님은 말할 것도 없지. 이제 돌아가실 때 돼서 말씀해주시더구만. 그러고도 내 찾을 방도가 있나. 어머니 이름만 외고 지냈지.”
“아무러믄요. 남에서 형님이 어머니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이자 얼마나 놀랬는지 모릅니다. 우리야 아버지가 식솔을 거느리고 남으로 내려간 지도 모르고 전쟁 통에 돌아가셨겠구나, 그러고 살았지요. 저도 오마니 기억이 많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언제 돌아가셨나?”
“전쟁이래 끝나고 일천구백오십오년에 결핵으로 가셨지요. 외할머니가 거두어 길러주셨는데 말을 못하는 분이셨드랬습니다. 형님하고 누이가 둘 있다는 걸 가슴을 치며 알려주셔서 그건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작은아버지는 고모 소식을 궁금해하는 기색이었다. 진호가 서류가방을 주섬주섬 열어 사진들을 꺼내놓았다.
“고모님은 지금 미국에 사세요. 미국 사는 조카가 모시고 가서 거기서 사신 지 꽤 됐습니다. 여기 가족사진이 있어요.”
진호는 여러장의 사진 가운데 한장을 뽑아 테이블로 밀어놓았다. 고모까지 포함해 다섯 식구가 사진관에서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미국 사람은 없고 다 조선 사람이구만.”
작은아버지가 놀랐다는 듯 잠시 몸을 늦추며 말했다. 진호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민을 갔어요. 이번에 길이 너무 멀어서 오시지 못했지만 우리 동생 손 한번 잡아보고 싶다고 많이 우셨다고 해요. 양복 한벌 지어달라고 돈도 부쳐주시고 이 사진도 이번에 찍은 거랍니다.”
갑자기 아버지가 흐느껴 울었다. 울음은 순식간에 전염되어 작은아버지도 안경을 벗고 눈구석을 훔쳐내고 온 가족이 훌쩍였다.
울음이 그치고, 작은아버지가 말했다.
“작은누이는?”
하고 조심히 물었다.
“잘못되셨나?”
그 말에 진숙네 가족은 뜨악해졌다.
“고모는 한분이셨어요.”
진호가 대답했다. 이어서 아버지가 말했다.
“외조모께서 잘못 전해준 모양일세. 자네 누님은 하나야.”
“아, 그래요? 내 촉기가 좋아도 이자 너무 어린 나이에 말 못하는 분한테 들어놔서 오해를 하고 살았구만.”
그런 사연도 쓸쓸하여 가족들은 묵연해졌다.
다시 서로 사진을 꺼내놓고 가족들 소개를 이어갔다. 때마침 다큐 감독이 테이블로 왔다. 장시곤이 알아보고 젊은이를 소개했다.
“방송국 사람인데 우리 상봉을 담겠다는구만.”
진숙네 가족이 알은체를 하고 인사했다. 작은아버지는 일어나 악수로 맞았다. 아버지가 영정사진으로 쓰는 할아버지 사진을 작은아버지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내가 아버지를 빼다 박았어. 머리 흰 거 하며…… 보게.”
“정말 그러십니다.”
사촌 장양선이 사진을 가져다가 제 아버지에게 건넸다. 작은아버지는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작은아버지는 양복 속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작은 흑백사진 한장을 장시곤에게 내밀었다.
“이게 외갓집에 내려오는 부모님 혼례사진입니다. 형님은 처음 보지요?”
전통혼례복을 입고 찍은 사진인데 얼굴을 더 자세히 보려고 아버지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돋보기안경이 없었다. 작은아버지는 얼른 제 안경을 벗어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아버지는 안경을 돋보기처럼 들고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우리한테도 부모님 사진이 있네. 현숙이 돌 때 찍은 사진인데 거기 어디 있을 텐데……”
진숙이 테이블에 놓인 댓장의 사진을 뒤적거려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진숙은 조부모의 결혼사진을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진호를 건너다보았다.
“네 고모가 갖고 있어서 이번에 메일로 받지 않았니? 복사를 떠서 몇장 만들어 보내라고 하지 않던.”
“선물 가방에 넣은 모양이에요. 내일 개별상봉 때 드릴게요. 이제 첫 만남인데 천천히 얘기 나누세요. 두분이 너무 성급하신 것 같아요. 데면데면하실 줄 알았는데 역시 형제라 다르시네요.”
“우리 조카가 뜨직뜨직 말을 잘하네.”
진호가 작은아버지의 농을 얼른 받았다.
“저는 작은아버지를 뵙고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그는 듬성듬성해진 제 머리를 쓸어 보이며 덧붙였다.
“다 집안 내력이구나, 싶었지 뭡니까. 동생은 벌써 시작되었구만.”
진호가 양일을 건너다보며 말했다. 무슨 말인 줄 알고 가족들이 모두 웃었다.
아버지는 조부모의 결혼사진을 작은아버지에게 돌려주었다.
“이건 가져가시라요. 우리도 어머니 부탁을 한가지라도 안고 가야 하지 않갔습니까.”
이어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서로 대화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작은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 집 아들 장양일이 말했다.
“아버지는 작가십니다. 혁명열사들 전기를 많이 쓰셨어요. 전설을 모은 책도 내셨고요.”
진숙네 가족이 고개를 끄덕이며 장시춘을 바라보았다.
“다 옛날이야기입니다. 인차 아이들 뒤에 서서 살지요. 애들 뒤에 서면 이제 늙는 건 둘째고 바보가 된단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형님?”
“그렇지. 여기 오는 것도 애들 아니었으면 엄두를 냈을라구. 난 그냥 따라온 것만 같아.”
사촌 남매는 교원들이고 양선은 사리원에 살고, 양일은 원산에 산다고 했다.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를 하나씩 두고 있었다.
다큐 작가가 작은아버지에게 소감을 청했다.
“그거야 뭐 어렵겠습니까? 감개무량하지요. 자, 우리 형제 보시라요.”
장시춘은 어깨를 기울여 장시곤에게 바짝 댔다.
“모색이 비껴 있지 않습니까? 닮았지요? 형제가 이렇게 나란히 살았어야 하는데 칠십년 세월을 모르고 살았으니 사람질을 제대로 하고 살았다고 할 수 없지요. 억울하고 섧은 세월이었지요. 형님이 이렇게 건강히 살아 계시고 조카들도 훌륭해서 인차 발편잠을 자겠습니다.”
아버지가 흐뭇하게 웃는 걸 진숙은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진숙은 올케 숙경이 고개를 빼서 먼 테이블을 정신을 빼놓고 바라보는 걸 보았다.
“뭐 해? 아는 사람 있어?”
숙경이 화들짝 놀라서 돌아섰다.
“아니요. 참 별의별 사람들도 많고 눈물도 많네요, 고모.”
두시간의 가족상봉이 금방 지나고 북측에서 준비한 만찬이 이어진다는 방송이 나왔다.
5
아침 아홉시에 선물 가방이 객실로 배달되었다. 장시곤의 자녀들은 고민거리가 생긴 듯 선물 가방을 풀어놓았다.
“고모, 이건 아무래도 실례 같지요?”
“그래. 오해하실 수도 있겠어.”
장시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소파에서 건너다보았다. 초코파이와 라면, 치약 같은 게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게 왜?”
진숙이 대답했다.
“작은아버지 형편이 생각보다 좋아서 이걸 드려야 하나 걱정이에요.”
“원, 별걱정을 다 한다. 거기 손주들도 있잖더냐.”
“그냥 다시 쌀까요?”
“그럼. 그런 것 가지고 자존심 세우고 그럴 사람들 아닌 건 너희들도 어제 봐서 알겠구나.”
“아버지, 그것도 이따 드려야겠지요?”
진호가 건너다보며 물었다. 그들은 2,000달러를 선물로 준비했다. 더 넣어봐야 당자에게 가지 않는다고 1,000달러 밑으로 준비하라고 설명을 들었지만 1,000달러 봉투를 하나 더 만들어 양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운이 좋으면 오롯이 갈 거였다.
“티 안 나게 오늘 줘야겠지. 그나저나 고모가 보내줬다는 사진 뽑은 것 좀 찾아주련.”
진호가 앨범을 뒤져 거기서 어제 말한 사진을 찾아냈다. 장시곤은 돋보기안경을 찾아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현숙이 미국으로 갈 때 이건 네 거다, 하고 들려 보낸 사진이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함께 찍은 사진은 유일해서 과거 한때 닳도록 들여다보았다. 외가의 기와집 마당에서 양친이 각각 아들과 딸을 안고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은 어제 본 듯 선했다. 이게 다시 돌아와 북녘까지 올 줄 몰랐다. 장시곤은 다시 가슴이 뜨거워져서 아이들의 눈을 피해 몸을 틀고 앉았다. 그는 어제 동생에게서 받은 부모의 결혼사진을 옆에 놓고 두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는 침침한 눈을 비비며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고는 허리를 세웠다. 두 사진은 사년 혹은 오년의 시차를 두고 찍혔을 텐데 두분이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달랐다. 이건 무슨 일일까? 두분은 발까지 사진에 담겨 있는데 결혼사진은 어머니의 키가 아버지와 엇비슷했고, 돌사진은 어머니가 아버지의 어깨 아래에 서 있었다. 돌사진은 어머니의 입매가 돌출되어 있는데 결혼사진은 그렇지 않았다. 그건 속일 수 없는 특징이었다. 장시곤은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자식들이 개별상봉을 앞두고 작은집 식구들을 마중하겠다고 로비로 내려갔다. 장시곤은 협탁에 놓인 사진들을 거두어서 양복조끼 안주머니에 넣었다.
머잖아 장시춘의 가족들이 도시락이 든 비닐봉투와 선물 가방을 들고 호텔방으로 들어섰다.
“형님, 밤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장시춘이 손을 맞잡으며 인사했다.
“아우님도 잘 잤는가? 난 마음이 설레서 잠을 설쳤다네.”
장시곤은 장시춘을 식탁으로 안내했다. 어제 단체상봉과 만찬 자리도 좋았지만 두 가족은 더욱 화기애애해졌다. 식사를 펼치기 전에 그들은 선물 가방을 교환했다. 숙경이 선물 가방을 건네며 말했다.
“양복이랑 구두는 형제간이라 아버님 치수대로 어림해서 마련했는데 맞을지 모르겠어요.”
“질부, 여기서 한번 입어볼까요?”
장시춘이 흔쾌히 말했다.
숙경은 얼른 가방을 열어 양복을 꺼냈다. 짙은 회색의 양복을 양선이 받아 제 아버지 뒤에서 입혀주었다. 두 치수는 작은 듯 소매가 깡똥하고 어깨가 조였다.
“이걸 어쩌니……”
양선이 난감해했다.
“동생이 한번 입어봐.”
진숙이 양일을 가리켰다.
“그래. 네가 한번 입어보렴.”
그래서 이번에는 장양일이 걸쳐보게 되었다.
“야야, 딱 맞다야. 맞춘 듯하구나.”
장시춘이 말했다. 구두도 신어보게 되었는데 역시 장양일의 차지가 되었다.
“섭섭하다 마시라요. 저야 집에 들어앉았는데 양복이 호사지요. 한창 일하는 사람이 입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 양일이 큰아버지한테 큰절 올려야겠다야.”
북쪽 선물도 공개가 되었다. 들쭉술, 평양술, 태평곡주가 쇼핑백에 들어 있고, 술 달린 식탁보를 양선이 펼쳐 보였다. 식탁보에는 작은 꽃이 한땀 한땀 수놓아져 있었다.
“이건 우리 어머니가 직접 수놓인 거예요.”
양선의 말을 받아 장시춘이 말했다.
“우리 선물은 조촐합니다. 시침을 뚝 따고 드릴 수도 있지만 가족이 만났는데 어디 그럴 수 있습니까. 다 아시겠지만 우리 물산이 풍족치 않아 정성이 리남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남쪽 자녀들은 흡족해서 박수를 쳤다.
식사가 끝났을 때 장시춘이 장시곤에게 말렸다.
“형님, 금강산에 왔는데 바깥바람 한번 쐬시지 않겠습니까?”
장시곤이 잠시 장시춘을 바라보다가 일어섰다. 그는 주섬주섬 옷을 차려입었다. 두 아들도 옷을 입는 걸 장시춘이 말렸다.
“야야, 우리 형제간에 시간 좀 갖게 훼방 말라.”
자식들이 그러시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숙경이 얼른 커피를 타서 종이컵에다가 담아 두 형제의 손에 들려주었다.
두 사람은 호텔 마당으로 나왔다. 너른 마당가로 치워놓은 눈이 소복했고 볕이 좋았다. 그들은 호텔 직원들이 담배를 피우는 곳을 지나 운동장 멀리 걸어갔다. 흰 능선이 세겹, 원근감을 갖고 겹쳐 있었다. 앞산 검은 솔숲도 희끗하고, 그 너머 능선도 백발처럼 빛나고 있었다.
“여기가 한때 김정숙휴양소였드랬습니다. 저도 바뀌고는 처음입니다.”
그래놓고 장시춘은 몸을 돌려 장시곤을 바라보았다.
“뭐 궁금하신 거 없습니까?”
“……”
“사람이 헛꿈을 꾸고 행방이 없이 사는 게 쓸쓸하지만 죽지 않고 사는 게 용하지요.”
장시곤은 뒤늦게 장시춘에게 대답하고 싶었다.
“지금 와서 뭐가 궁금하겠나. 우린 너무 어렸잖은가.”
“그렇지요? 너무 어린 기억은 필시 우리 기억이 아닙니다.”
장시곤은 멍하니 서 있다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아버님 묘에서 얻은 흙이오. 그리고 이건 해주 살 때 주소 적은 거고.”
장시춘은 병과 쪽지를 받았다.
“네, 한번 찾아보지요.”
허어, 하고 장시춘은 먼 산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금강산입네다.”
그러면서 장시춘은 손가락을 세워 봉우리들을 가리켰다.
“저기가 대자봉이고, 저기가 수정봉이고……”
장시곤은 멀리 시선을 던져 처음으로 금강산을 둘러보았다. 대자봉과 수정봉 사이로 멀리 앉은 능선은 하늘빛과 구분이 되지 않았다.
장시춘이 말했다.
“래일도 같이 보시자요.”
장시곤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