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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성미 李成美
2001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가 있음.
beebonbon@naver.com
집의 형식
코끼리의 발이 간다. 예보를 넘어가는 폭설처럼. 전쟁의 여신처럼. 코끼리의 발은 언제나 가고 있다.
코끼리의 발이 집을 지나가며 불평한다. 더 무자비해지고 싶어. 비켜줄래?
거미의 입이 주술을 왼다. 거미는 먼저 꿈을 꾸고 입을 움직인다.
너의 집에서 살고 싶어. 너의 왕처럼. 너의 벽지처럼.
폭풍이 모래언덕을 따끈따끈하게 옮겨놓을 때, 나의 집이 나를 두고 무화과 낯선 동산으로 날아가려 할 때.
나는 모래의 집을 지킨다. 매일 거미줄을 걷어내고 코끼리가 부서뜨린 계단을 고친다. 가끔 차표를 사고 아침에 버리지만.
상냥한 노래는 부르지 않을래.
폭풍에게 정면을 내주지 않을래.
코끼리를 막을 힘이 나에겐 없지. 코끼리의 발이 코끼리의 것이 아닌 것처럼.
거미는 나를 쫓아낼 수 없지. 거미의 말을 거미가 모르는 것처럼.
거미는 줄을 치면서 거미의 얼굴을 지나간다. 나는 모래의 집을 지키면서 나의 얼굴을 지나간다.
코끼리의 발은 간다. 코끼리의 발을 막을 힘이 누구에게도 없다.
지는 사람
너의 거짓이 거짓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너는 쓴다, 읽을 수 없을 만큼 작은 글씨로.
사랑하던 단어들은 다 거짓말,
믿은 사람은 전부 엉터리였다고, 천사가 찾아와 속삭여줄 때
너는 쓴다 눈물을 닦으며
가장행렬에 가고 텅 빈 마을에서
카니발의 복장과 춤에 대해
공기가 통하지 않은 질투의 냄새
죽은 새의 발톱에 대해
자신의 거짓으로
마을의 거짓과
지는 싸움을 시작한다.
열차는 차량마다 다른 방향으로 달리려 하고
사원에서는 가장 단단한 분노가 가장 부드러운 음악으로 울린다.
변성기가 되지 않은 소년이 부르는 불협화음.
착한 지붕 장식. 착한 처녀의 부조리함 앞에서.
건축물 내부로 깊이 걸어들어가
자기 발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으면서
공기가 떠도는 공간을 종이에 평면도로 옮길 때.
그의 연약한 피부를 만지며 그것을 찢으면서.
너는 처음부터 지는 사람.
지는 싸움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