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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김나영 金娜詠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통감하는 주체, 유무의 경계 너머의 말들: 최근 시의 주체에 덧붙여」 등이 있음. kfbs4@naver.com
노태훈 盧泰勳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나’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문학사: 최근 한국 소설의 징후」 등이 있음. dacapolife@gmail.com
박연준 朴蓮浚
시인.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 등이 있음. gkwlan@hanmail.net
김나영 안녕하세요. 지난 계절에 이어 박연준 시인과 함께 문학초점을 진행하게 된 문학평론가 김나영입니다.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을 따라 읽으니 어쩐지 계절의 변화를 좀더 명확하게 감각하게 되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이번 계절에는 노태훈 문학평론가를 초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노태훈 문학초점 코너를 챙겨보던 독자인지라 초대해주신 게 기쁘면서도 조금은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렇지만 즐거운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박연준 지난 대담 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도착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벌써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부는 계절이 되었네요.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 계절도, 두분도 반갑습니다.
정소현 『품위 있는 삶』(창비)
김나영 『품위 있는 삶』 이야기를 먼저 나눠볼까요. 정소현이 7년 만에 묶은 두번째 소설집입니다. 삶과 죽음, 기억과 망각의 주제를 다루는 6편의 작품이 실렸습니다. 어떻게 읽으셨나요.
박연준 저는 이 책으로 정소현의 글을 처음 접했는데, 기대보다 훨씬 좋았어요. 첫 소설집도 찾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작가가 이야기에서 ‘진실’을 드러내는 방법이 흥미로웠어요. 진실은 켜켜이 드리운 베일처럼 알기 어려운데, 정소현은 정보들을 들추어 보여주거나 부러 가리면서 이야기의 중심으로 들어가요. 인물의 관점에 따라 행불행이 갈리기도 하고, 진실의 내용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인생에서 진실의 경계는 모호하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어제의 일들」에선 용서를 구하려는 자와 용서를 해야 하는 자 사이, 그들의 관점 차이가 흥미롭게 그려져요. “나는 인생이란 것이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쉽게 망쳐지도록 생겨먹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을 그들에게 이야기해줘봐야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 그만두었다”(84면)는 대목이 인상 깊었어요. 가해자들은 어떤 인물을 망가뜨린 후, 자기들 관점에서 그의 ‘인생을 망쳤다’고 판단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흥망을 평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편견과 무지’가 작동하기에 폭력적이지요. 누군가 용서를 구한다고 해서 용서가 쉽게 이루어지지도 않고요. 누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게 가능한지, 용서를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지 등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노태훈 수록된 대부분의 작품에 죽음이 예정되어 있거나 이미 죽은 사람이 등장한다는 것이 독특했습니다. 죽고 나서 다시 살았던 기억을 되짚어가는 방식으로 꾸려진 이야기가 많았는데, 결국 진실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는 지점으로 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서사 속에 담긴 거짓말이나 비밀이 사실 이런 것이었다고 말해주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의 기억을 따라가보니 이러한데 이게 정말 진실인지는 독자가 직접 판단해보라고 말하는 방식이어서 흥미로웠습니다.
김나영 정소현 소설의 남다른 지점은 세상을 지극히도 현실적으로 그린다는 데 있습니다. 죽은 인물을 등장시켜서 환상적으로 처리하는 부분이 압도적이긴 하지만, 그 역시 이 소설들이 만들어내는 사건이나 삶과 죽음을 형상화하는 방식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이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소문이나 거짓말의 형태로, 우리가 쉽게 주고받는 말의 방식으로 그려진다는 점이 놀라워요. 다시 말해 가장 현실적인 지점이 가장 무서운 세계의 속성을 노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이 좋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언어에 대한 작가의 불신이 커진 것 같아 오랜 독자로서 염려되기도 했습니다. 소설 속 인물들이 고통받는 이유가 소문, 거짓말, 그리고 그런 말들이 만들어낸 서로 다른 기억들 때문이에요. 결국 말이 우리 삶을 쥐락펴락하는 것이죠. 과연 말이 어떻게 진실을 전달할 수 있고 얼마나 매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작가의 의심이 더 짙어진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박연준 그럼에도 저는 이 소설들이 편안하게 읽혔는데, 아마도 문장 때문인 것 같아요. 좋은 문장은 독자를 피로하게 하지 않아요. 좋은 문장을 읽을 때면 좋은 배를 탄 듯한 기분이 드는데, 이 책은 너무 편해서 배를 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푹 빠져 읽었습니다.(웃음) 이상하고도 모호한 이야기, 환상적인 서사, 형이상학적 깊이까지 녹아 있는 건 작가의 단단한 상상력 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태훈 저는 읽으면서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질문이 떠올랐는데, 만약 삶이 지옥이라면 당신은 죽음을 선택하시겠습니까,라고 계속 묻는 것 같았어요. 특히 가장 최근에 쓰인 「품위 있는 삶, 110세 보험」이 그랬습니다. 주인공은 보험상품에 가입하면서 만약 자신이 치매에 걸려 온전치 못한 상태가 된다면 단호히 안락사로 처리해달라고 서약합니다. 여기에 할머니의 뜻을 존중해서 안락사를 시켜야 한다는 ‘민기’와, 그래도 할머니가 행복해하는 순간이 있으니 그렇게 할 수 없다는 ‘하준’의 대립을 보여줘요.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가 이 소설집을 읽는 내내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나 좀 살려줘. 이쁜 내 새끼들아”(46면)라는 마지막 문장을 읽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작가가 어떤 판단을 내리고 대답을 주는 게 아니고, 여운을 길게 남긴 채 고민하게 합니다.
김나영 삶과 죽음을 다루는 소설은 많지만 그 주제를 뻔하게 다루지 않는 것이 정소현 소설의 힘입니다. 기본적으로 삶의 편에서 죽음을 사유하는 것이 우리가 자주 봐온 방식인데, 정소현은 죽음의 관점에서 삶을 사유하는 방식으로 질문을 뒤집어놓아요. 죽은 자가 ‘죽은 채로 살아가는 일’로써 삶을 질문하고 죽음을 다시 묻는 것이 이 소설집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그후에 따라오는 기억과 망각 같은 소설의 다른 굵직한 주제들도 완전히 새로워지지요. 기억과 망각을 이분법적으로 다루는 흔한 방식이 아니라 망자 혹은 죽음의 입장에서, 삶에서만 말할 수 있는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지, 망각된 부분을 허상으로 채우고 있는 건 아닌지를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특히 연작소설로도 읽히는 「어제의 일들」과 「지옥의 형태」를 보면 삶은 기억하는 것들로만 이뤄지고, 죽음 역시 기억된 삶의 재생(再生)으로 그려지는데요, 이 소설들은 결국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가 자기 삶의 형식과 내용을 구성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요. 모든 기억은 사후(事後)의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지금과 이후를 살아가기도 하잖아요. 이 소설집을 통해서 모든 좋은 소설은 새로운 질문으로 쓰인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다만 삶과 죽음의 경계, 혹은 그 둘이 나눠지지 않는 지경을 묘사하는 일에서 자주 환상적 장면이 도입되는데, 「그 밑, 바로 옆」 같은 소설에서는 죽은 자가 말하고 산 자가 듣는 이야기의 핵심적인 기획과 구상이 너무 단순하게 묘사돼 아쉽기도 했습니다.
박연준 「엔터 샌드맨」에서 지수와 지훈이 겪는 사고의 후유증이 우리가 살면서 겪는 여러 사건사고와 다르지 않은, ‘사고의 원형’처럼 보였어요. 세월호참사,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의 붕괴, 일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대입해도 무리 없이 읽힙니다. 살아남은 자인 ‘지수’는 현실이 괴로우니까 홈페이지를 만들고 거기서 활동하잖아요. 상처를 간직한 자들이 살기 위해 찾는 방어기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실을 마주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괴로워하고, 더불어 진실도 모호해져요. “당신이 죽은 거 아니었나요? 혹은 그가 죽었어요? 아니면 나는 살아 있는 게 맞나요? 이 모든 게 꿈인가요?”(188면) 지수가 혼란스러워하는 대목이 나오기도 하죠.
김나영 무거운 주제와 현실적인 문제를 건드리면서도 유머러스한 게 정소현 소설의 또다른 강점이자 미덕이지요. 「꾸꾸루 삼촌」의 나와 삼촌처럼 가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비루한 삶을 그릴 때도 어느 틈에선가 희망을 잃지 않는, 그 때문에 일말의 여유와 농담을 간직한 인물이 등장해요. 이들을 통해 삶이든 사람이든 통째로 비관하지 않을 수 있는 태도를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작가가 이번 소설집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생각해봤는데요, ‘품위 있는 삶’이라는 제목에서 힌트를 얻자면 작가는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일까를 계속 질문했던 게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자신을 잃어가는 인물이 처한 곤경과 공포를 그린 작품이 표제작이 된 것 같고요.
노태훈 이 소설집은 2013년부터 2015년까지의 소설 다섯편과 4년 정도의 휴지기 후 올봄에 발표한 「품위 있는 삶, 110세 보험」을 함께 실었는데, 그 시차가 느껴지는 지점이 있었습니다. 오륙년 전에 쓰인 소설들에 등장하는, 뭐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인물과 사건들이 지금의 감각으로는 과잉처럼 생각되는 부분이 있었고, 최근작은 다소 단순해졌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좋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치매에 걸린 노인이 ‘신뢰할 수 없는 화자’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사실 새롭다고 보기는 어렵겠죠.
최진영 『이제야 언니에게』(창비)
김나영 최진영은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들을 집요하게 관찰하면서 그들 스스로가 말하도록 하는 작가입니다. 그래서인지 읽을 때마다 쾌적함과 정반대에 있는 정서에 사로잡히게 돼요. 슬프고 두렵고 명료하면서도 막막합니다. 그것을 단순히 불편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제야 언니에게』는 어린 시절 친척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이제야’라는 인물을 초점화자로 삼아 ‘그 이후를 살아내야 하는 어려움’을 쓰고 있어요. 이 이야기로 어떤 폭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주는 충격과 고통이 커진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요. 작가도 이 이야기를 쓰고 묶는 동안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노태훈 문학 3 웹(www.munhak3.com)에 연재할 때 따라 읽어서 대략의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다시금 힘들게 읽었습니다. 사건 자체도 그렇지만 그후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 경찰, 가해자, 지역사회의 반응 같은 것들이 지금의 제 감각으로는 견딜 수 없는 장면들이 많았어요. 여전히 이런 식의 프레임이나 시선이 일반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막상 맞닥뜨리니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다행으로 여겨진 것은 이제야가 자기 삶을 되찾고 시작하기 위해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단순히 극복하고 잊겠다는 게 아니라, 내가 겪은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작가가 주인공을 통해 꽤 유심히 들여다봤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나영 어떤 사건에 대해, 혹은 그것을 겪은 인물의 심경을 그리는 일은 어쩌면 어렵지 않을 수 있어요. 종종 자신이 겪은 일을 폭로의 방식으로나마 꺼내놓았던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런 사건이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얼마나 잔인하게 다루어 발생했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목도해왔지요. 하지만 ‘사건 이후는 어떻게 할 것인가’는 언제나 우리에게 막막한 공백으로 남아 있었기에 그 부분을 상상력으로 힘겹게 채워나갔을 이 소설이 더욱 가치있게 여겨집니다. 모르기도 하거니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지점에 대해서는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낫다고들 하지만 작가는 이제야의 목소리를 빌려 “나는 애쓰는 사람이 될 것이다”(217면)라고 말해요. 어떤 경우에나 ‘말을 시작하는 일’, 그 시도가 소중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이 소설이 값하는 바가 있습니다. 결국 제야는 “나로 살기 위해 내게 소중한 것들도 같이 내려놓기로”(227면) 하면서 부모는 물론이고 각별한 존재였던 여동생 제니와 사촌동생 승호까지 버리고 아무도 자기를 모르는, 새로운 언어가 있는 곳으로 떠나요. 물리적인 이동이라는 단순성에 누군가는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사건 자체의 심각성을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제야가 자기 삶을 이어나가려 궁리하고 실천하는 인물로 그려진 점이 좋았습니다. 그 시도를 일기와 편지를 쓰는 일뿐만 아니라 낯선 언어를 쓰는 곳으로 떠나는 것까지, 말의 형식을 모색하는 일로써 보여준다는 점이 의미있다고 생각해요.
박연준 우리가 이제야라는 인물에게 가장 고마워해야 하는 건 사건 ‘기록’을 시도한 점이라고 생각해요. 쓴다는 것은 ‘한번 다시 사는 일’인데, 피해당사자인 주인공에겐 그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일 테니까요. 소설은 이렇게 시작해요. “2008년 7월 14일 월요일//끔찍한//오늘을 찢어버리고 싶다.”(8면) 제야는 ‘끔찍한’이라는 형용사를 썼다 지워요. “‘끔찍하다’가 무슨 뜻이더라 생각”(13면)하다, 이 단어의 빈곤함에 직면하죠. 자기 마음을 표현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말의 한계, 그 무력함 때문에 줄을 그어버려요. 소설의 끝자락에는 “괴물이라고 말하기는 너무 쉽다. 너무 쉬운 그 말은 아무 의미 없다. 너무 쉬워서, 아무 힘이 없다. 그는 괴물도 짐승도 악마도 아닌 사람이어서 나를 강간했다”(217면)라고 쓰는데, 이렇게 쓰기까지 제야가 시도했던 수많은 기록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더 가치있게 느껴졌습니다. 한편 피해자인 제야가 줄기차게 떠나는 인물로 그려지는 건 안타까웠어요. 피해를 입은 직후 강릉으로 떠나고, 가족과 마을에서 멀어지고, 대학생활을 하다 벽에 부딪히니 마지막엔 국외로 떠나버리죠. 물론 이곳을 벗어나는 일이 제야에겐 분노와 항의의 표시일 수도 있고, 최선일 수도 있겠죠. 그게 현실일 수도 있고요. 그러나 정작 가해자인 당숙은 고향에서 승승장구하며 결혼도 하고 친척들과 관계도 잘 유지하는데, 제야는 자꾸 밀려나는 게 온당하지 않은 것 같아 화가 나더군요.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되더라도, 누구라도 제야의 편이 되어 이 세계를 흩뜨리거나 변화를 이끌어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들었습니다.
김나영 저는 이런 결론이 오히려 현실적이지 않나 싶어요. 이 소설을 다 읽으면 알 수 있듯이 제야는 당숙에게만 폭력을 당한 게 아니지요. 성폭력 피해자를 대하는 현실, 사회 구성원들의 모습이 핍진성 있게 그려져 있어요. 또 소설 말미에 제니에게 쓴 편지가 꽤 인상적이었어요. “성범죄를 피할 방법 따윈 없어. 조심하라는 말이 아니야. 죽일 수 있다면 죽이라는 말이야. 살아남으라는 말이야.”(229면) 이 부분이 소설의 전반적인 어조와 동떨어져 보일 정도로 특히 날카롭고 건조하게 읽히는 이유는 이것이 언니가 동생에게 전하는 강한 애정이 담긴 편지인 동시에, 그 메시지를 전달받는 모든 독자들의 구체적인 각성을 촉구하는 작가의 목소리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소설의 사회적인 기능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 지점이에요.
노태훈 폭력의 경험이 잊거나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줘서 인상 깊었습니다. 외국어의 세계를 떠돌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2017년 12월 31일 생일을 자축하며 별을 보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제야는 승호와 이모와 제니를 생각하면서 동시에 “여전히 당숙을 생각”(234면)해요. 당숙이라는 가해자가 계속 자기 안에 있는 것이죠. 이걸 어떻게 안고 삶을 지속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제야의 모습이 뭉클했습니다. ‘나는 정말로 단 한순간도 괜찮지 않다, 늘 그 기억과 같이 있다’고 인정하게 되는 순간이 제야라는 인물을 오래도록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웹 연재 때와 비교하면 제목이 ‘이제야 누나에게’에서 ‘이제야 언니에게’로 바뀌었는데, 연재 당시에는 승호에 해당하는 남성인물 ‘승’이 더 부각되는 편지 형식이었어요. 사건 이후 제야와 돈독했던 제니와 승호가 각자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가 더 많이 묘사되고요.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는 사건 이후 피해당사자인 제야의 삶에 초점을 더 맞추었어요. 작가가 ‘제야는 행복해질 수 있다, 제야가 다시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작품을 변화시킨 것 같아요.
박연준 ‘이제야 언니에게’라는 제목의 중의성은 매력적이지만, 처음엔 좀 헷갈리기도 했어요. ‘언니’라면 동생 제니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갈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거든요. 게다가 시점도 계속 바뀌죠. 같은 날짜라도 제야의 일기는 1인칭으로, 제야의 이야기는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번갈아 서술되는데, 작가가 진실을 담아내는 과정에서 ‘형식’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니 인물들의 입장을 바꿔 생각하기도 하고, 편지 형식으로 쓰기도 하고, 카메라로 비추듯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취하기도 하지요. 이런 형식은 독자가 인물에 감정 이입하기보다는 관찰자로서 고민하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 같아요.
김나영 제야는 일기를 두개 쓰잖아요. “하나는 선생님께 검사받는 일기. 다른 하나는 오직 자기만 보고 간직하는 일기.”(9면) 저는 이 소설이 구성되는 방식도 ‘두개의 일기’ 같아 보였어요. 내면에서 발화되는 당사자의 이야기와 외부에서 관찰되듯 쓰이는 피해자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방식은, 이 소설이 단순히 폭력을 당한 한 인물이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이야기에 그치는 게 아니라 성폭력의 구조적인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문법에 대해 효과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제야가 낯선 나라를 “여행하는 동안 나를 둘러싼 공기를 생각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어린 여자애여서 무시당했다가 젊은 여자여서 의심받고 늙은 여자여서 무시당하”(226면)는 우리 사회의 공기를 환기하게 되지요. 이 소설은 제야가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삶의 모습을, 그 속의 부침을 적나라하게 추적하는 듯 쓰이지만 결국 이 이야기의 수신자는 방관자들, 이 사회의 공기를 이루는 사람들이에요. 마치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같아서 소설을 읽는 일이 곧 내가 이제야(비로소) 언니에게 응답하는 일이 되지요.
노태훈 “젊은 여자 혼자 여행 다니는 거냐고” 사람들이 물을 때 “‘젊은’ ‘여자’ ‘혼자’ 중에 사람들을 가장 세게 건드리는 단어는 뭘까”(219면)를 궁금해하는 대목에서도 그렇고요. 저는 이 소설의 ‘강릉 이모’라는 인물에 대해 말해보고 싶어요. 연재 당시에는 없던 인물인데요, 작가가 최근 발간한 소설집 『겨울방학』(민음사 2019)의 표제작에 등장하는 ‘고모’와도 꽤 흡사합니다. 비혼 여성으로 소박하고 안정된 삶을 살아가면서 상처받은 조카를 보듬고 곁을 내어주는, 그러면서도 섣부른 동정 또는 과도한 간섭이나 침범은 하지 않는, 어쩌면 환상에 가까운 인물이죠. 제야를 도저히 홀로 둘 수는 없었던 작가의 마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제야가 자라서 그런 이모나 고모가 되었을 때를 상상하게 되었어요. 단단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어 제니나 승호의 조카를 마주하는 제야의 모습을요. 그렇게 제야의 미래를 생각하면 이 소설도 조금 희망적으로 읽힐 것 같습니다.
김나영 처참해 보이는 인물의 내면을 기록하는 힘으로 쓰인 이 소설에서 작은 낙관이 엿보이는 부분으로 북극성의 교체를 설명하는 장면을 꼽을 수 있어요. 지구의 자전축이 바뀌면서 “거문고자리 알파별이 북극성이 될 거라고”(156면) 알려주는 장면요. 거기에는 만이천년이라는, 우리가 체감하기 어려운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래도 달라질 게 분명한 미래에 대한 예측과 믿음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특별히 기억할 만한 장면이지요. 처음에 말했듯 최진영 소설의 특징은 이 사회의 아픈 부분과 그로 인해 상처 입은 사람들을 가감 없이 그려내며 우리 모두의 공모를 아프게 고발하지만, 동시에 이렇게 자전축이 달라지면 북극성도 달라진다고 말하기도 해요. 느리더라도 변화의 가능성을 믿는 쪽이라는 점에서 현실 비판과 부정보다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말의 긍정을 말하기 위해 쓰인 소설이겠지요.
황현진 『호재』(민음사)
노태훈 황현진은 가족사 소설을 잘 쓰는 작가여서 읽기 전에 늘 기대하게 됩니다. 이 소설도 전통적인 소설의 방식을 따르면서 주인공 ‘호재’와 고모, 고모부, 아버지 등 가족의 과거와 현재 이야기가 흥미롭게 교차되고 있죠. 강도에게 살해당한 고모부의 장례식 장면으로 시작해 장례식이 끝나고 호재의 아버지인 배두오가 집으로 찾아오기까지 소설 속의 시간은 사흘 정도입니다. 서사적으로 짧은 탓에 고모부의 살해사건이 결국 해결되지 않은 점은 조금 아쉬웠지만, 고모인 배두이라는 인물이 정말 매력적이었어요. 주인공인 호재보다도 더 강렬하게 다가왔고, 배두이를 소개할 때의 문장들도 무척 좋았고요.
김나영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아버지, 유머러스한 고모부에 대한 묘사는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달려라, 아비』, 창비 2005) 이후 달라진 가족서사의 양상을 이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또 가족서사를 중심에 놓는다는 점, 삶의 행과 불행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호재』는 현대판 「운수 좋은 날」(1924)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일생에 단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행운을 기다리던 고모부를 덮친 불운이 얼마나 완벽하게 조장되어 있었는지를 생각”(187면)한다는 대목에서는 주제의식이 지나치게 분명한 건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박연준 이 소설은 전통적인 소설의 문법을 따르는데, 우선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작가가 인물들을 생생하게 잘 그려내요. 어린 시절 호재는 이름과는 반대로 불행한 어른들에 둘러싸여 자라요. 부모의 이혼 후 고모와 고모부의 손에서 크는데, 고모는 안 좋은 기억이 많고 사는 것도 팍팍한 인물이지요. 고모부는 유머러스하고 좋은 분이지만 서민으로 힘겹게 살다 결국 강도의 칼에 찔려 죽게 돼요. 전체적으로 어두운 이야기인데, 호재가 고모네서 살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이상하게 자꾸 들여다보고 싶게 만들어요. 쓸쓸하면서도 따뜻하거든요. 나중에 실종된 줄 알았던 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나면서 호재에게 마지막 행운이 찾아든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죄를 가득 짓고 살아온 아버지가 가져온 행운이 ‘진짜 행운’일지는 확실치 않지요. “그런 행운이 아버지의 것일 리 없었다”(202면)는 의구심과 “급했던 모양인지 오타투성이”로 보낸 “바다, 바다서 가”(203면)라는 고모의 메시지에서 행운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호재의 복잡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김나영 사람들이 큰 불행에 닥치면 운명에 기대잖아요. 이건 운명이다, 어쩔 수 없다, 하는 식으로 치부해버리면 쉬우니까요. 여기서 작가는 인물들이 처한 삶의 크고 작은 어려움이 불운해서, 가족이라는 벗어날 수 없는 역사의 수레바퀴 때문에 생긴 게 아니라 각자의 선택에 의한 결과였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두이가 장례식장에서 죽은 남편에게 “거봐, 내가 그랬지. 열심히 살지 말자고”(13면)라고 중얼거리는 대목이나, “그게 뭐든 간에 대놓고 포기하는 짓을 할 때마다 번번이 뿌듯”(120면)해하는 어린 호재의 모습, “동갑내기 남자를 죽인 죄를 뒤집어쓴 게 무척 뿌듯했다”(107면)는 두오의 진술에서 삶을 만들어가는 것은 추상적이고 거대한 운명이 아니라 너무나 구체적이고 사소한 개인의 선택이라는 점이 그려져요.
박연준 두이가 그걸 깨닫는 장면이 오래 남았어요. “두오가 저지른 악행을 두오가 처한 불행으로 오인하고, 잘못을 만회하기를 바라는 대신 두오가 겪은 일련의 불운한 사건들만 기억하고, 그 기억을 근거 삼아 두오의 무고를 쉽사리 이해하고 확신했던 자신이야말로 무지하고 무심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못 울고 못 웃으며 살아 왔다고 생각했는데 틀렸다./안 울었고, 안 웃었다.”(176면) 두이는 두오의 과오뿐 아니라, 두오에 대한 자기 판단 역시 과오일 수 있고, 잘못된 선택일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독자는 두오가 또다른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 어쩌면 고모부의 살인사건에도 연루되었을지 모르겠구나 의심하게 되고요.
노태훈 이 소설에는 가족을 방치하다 가끔씩 와서 아버지 행세를 하려는 무책임한 남자들,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여러 차별과 멸시의 시선, 호재가 직장에서 겪는 상사의 갑질, 부동산 중개업을 하면서 고모부가 재개발에 거는 욕망과 절망, 호재와 조연출 사이에 보이는 타인과 관계를 맺어가는 양상 등 꽤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그런데 이 다채로운 이야기들의 도착지가 ‘호재’라는 이름에만 너무 기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호재의 가족사가 다양한 측면에서 묘사되는 반면 호재의 엄마에 대해서는 무심하다는 점이 의아하기도 했고요. 호재의 엄마는 떠나서 어떻게 살고 있고, 호재가 엄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반영된다면 호재가 좀더 풍성하게 그려졌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이 소설의 핵심축은 호재라는 인물이 되어야 하는데, 이 인물이 다소 앙상하게 읽히는 인상이거든요. 호재의 마음과 현재의 상황이 더 설명된다면 호재에게 더 이입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박연준 ‘작가의 말’이 의미심장했습니다. “알리바이라는 단어를 듣는데, 무척 거슬렸다. (…) 그때 거기 없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무죄를 입증하다니. (…) 계속 생각했다. (…) 그때 거기 없었기 때문에 남는 혐의에 대해서.”(205면) ‘알리바이’는 작가가 이 소설을 쓰는 데 중요한 단서로 작용한 키워드였던 것 같아요. 호재의 목소리로 “잘못은 내게 있지 않다, 그것은 명백한 진실이었다”(29면)라고 알리바이를 전하는데, 작가는 그 ‘알리바이’라는 단어 자체를 회의적으로 들여다본다고 고백하거든요. 호재는 어른들의 불행을 세습처럼 떠안게 된 인물인데, 작가는 그 안에 남는 ‘어떤 혐의’에 대한 찜찜함을 감지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영원히 무죄인 상태로 사는 것은 불가능에 가”(206면)깝고, 인생에서 완벽한 알리바이를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노태훈 앞선 최진영의 소설과 함께 읽어서 더 좋았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어요. 『이제야 언니에게』의 발문을 황현진이 쓰기도 했지만, 공교롭게도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제야와 호재는 각자의 생일을 맞게 됩니다. 두 인물 모두 이름 속에 여러 의미가 담겨 있고 그 이름들이 탄생했던 날에 소설이 마무리되는 것은 삶의 새로운 국면을 상상하게 해요. 호재와 제야가 모두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김나영 『호재』를 덮고 나서 ‘호재는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봤어요. 말장난 같지만 실제로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호재의 행방을 열어두는 방식으로 쓰였잖아요. 그런 점에서 개인의 희망이 무용해졌다는 인식이 팽배한 이때에 의미있는 메시지를 던지는 소설이 아닌가 싶어요. 보이지 않는 구조와 맞서려는 의지의 발현도 중요하지만 코앞에 놓인 현실에 대한 자기반성이 동원되지 않는다면 더 나은 삶에 대한 전망도 소용없다고 따갑게 말해주는 것 같아요.
성동혁 『아네모네』(봄날의책)
김나영 『아네모네』는 5년 만에 출간된 성동혁의 두번째 시집입니다. 표제시인 「아네모네」를 보고 동물의 마음으로 식물을 바라보는 일에 대해 생각했어요. 동물의 관점에서 식물은 수동적이고 약해 보이지만 성동혁은 거기서 더 들어가 식물 안에 깃든 동물성을 보는 것 같습니다. 가령 영혼이나 내생을 믿어보려는 마음이 죽은 듯 살아 있는 식물을 깊이있게 바라보는 시선을 만들어낸 것 같아요. 또 아네모네는 가장 많은 꽃말을 가진 꽃이라고 해요. 사연이 많은 꽃이 표제이기도 한, 긴 시간과 공간을 지나온 이 시집을 어떻게 읽으셨을지 궁금합니다.
박연준 알려졌듯 성동혁의 첫 시집 『6』(민음사 2014)은 다섯번의 수술 후에 새로 얻은 목숨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생사의 기로에 서서 발언하는 목소리이기에 그가 쓰는 시에는 남다른 무게와 힘이 깔려 있어요. 이번 시집을 읽으며 생과 사 사이에 걸어둔 외줄, 그 위를 자기 리듬으로 건너가는 언어의 모습이 이미지로 떠올랐습니다. 아름답지 않을 도리가 없어요. 저는 첫 시집을 읽을 때 남성도 여성도 아닌 무성의 천사가 내는 목소리를 감지했어요. ‘순수’를 지닌 자의 성스러운 독백이랄까요. 이번 시집 역시 성동혁의 색깔이랄 수 있는 ‘성스러운 격조’가 느껴지면서도 화자의 변모가 감지되었습니다. 첫 시집의 천사가 이번 시집에서는 검은 사제, 혹은 신의 영역을 봐버린 눈뜬 자, 변심한 자의 목소리로 들리기도 했습니다. 「변성기」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시에 “나무를 흔든 바람의 성대를 주워/첫 시집을 냈었다”는 고백이 나오기도 하고요. 체념과 절망으로 인해 약간의 ‘공격성’을 띠게 된 화자의 목소리랄까요? 첫 시집보다 단언하거나 선언하는 힘이 강해진 느낌입니다. “의심과 모멸감”(「작열감」)을 헤아리고, “극진한 사람은 악이 오른”(「히아신스」)다고 말하는 대목도 인상적이지요. “커다란 제사장이여/커다란 예언자여/이번 삶은 천국 가는 길 겪는 긴 멀미인가요” “나는 이리도 우연히 죄와 평행해도 되는 것입니까”(「속죄양」)라는 구절에서는 신에 대한 원망 혹은 체념이 느껴집니다.
김나영 저는 성동혁의 첫 시집을 구체적인 육체의 고통을 말로써 추상화하려는 시도, 혹은 고통을 잊으려는 안간힘으로 읽었는데요, 이번 시집에서는 고통받는 육체를 통과한 말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가늠해보려는 일종의 초연함이 느껴졌습니다. 시집은 총 네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을 나누는 면에 문장이 하나씩 쓰여 있어요. 그중 세번째 장으로 들어가는, “나는 이 문장을 쓰기 위해 모스끄바에 왔다”라는 문장을 보면서 자신의 언어를 극단으로 끌고 가는 실험을 보여주는 시집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태훈 저는 이번 시집이 언어의 측면에서 더 풍부하게 읽혔습니다. 러시아에 체류하면서 쓴 시들이 많으니 이국의 언어 속에서 한국어로 사유를 펼치는 동안 언어에 대해 섬세하고 예민한 고민이 들기도 했겠지만요. 전통적인 방식으로 얘기하자면 구체와 추상의 문제가 이 시집에서 예리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하는데요, “몬스테라도 플라타너스도 그냥 나무라고 불러야 잠을 잘 수 있는 시기가 왔다”(「변성기」), “나는 꽃 이름을 모두 알던 사람인데//이제 그것들을 꽃이라고만 부른다”(「연못」)는 대목이 상당히 심오하게 느껴졌습니다. 구체적인 이름을 부르는 것이 삶에 대한 적극적인 의욕과 동력을 주는 상태라면, 지금 시인은 구체적인 사물의 이름을 기억하고 인지하는 것을 떠나 큰 범주로 부르려고 해요. 자기가 처한 상황이나 절망적인 마음이 그런 구체를 생각하기 어려운 상태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간극이나 긴장감이 시집 전체에서 눈에 띄었습니다.
박연준 저는 이 시집이 예와 격조를 갖춘 언어로 가득 차 있어서 마치 성경처럼 성스럽게 느껴지기도 해요. 불편한 동시에 아름다운 건축물 같아요. 고통이 말할 수 없이 깊으면 모든 걸 초월하게 하고, 시적 화자는 신에 가까워지죠. 신에 가까워지는 게 죽음이잖아요. 고통이 일상인 사람은 삶이 언제나 위태롭기 때문에 그 안에 범속이 끼어들 틈이 없고, 역설적으로 아름다워집니다. 일상의 부스러기 같은 게 만져지지 않아요. 성동혁 시의 화자들은 마치 신처럼 육체 너머에서 ‘먼 목소리’로 얘기할 때가 많아요. “보호자란 말은 원죄 같아서/일렁이는 손목을 털며 가라앉는 사람들은 모두/예수 같았다 모두가 나 대신 죽으러 온 사람들 같았다”(「핑크피아노」)는 사유를 할 수 있는 지점이 그의 시를 성스럽고 특별하게 만들어요.
김나영 아픈 몸이 겪는 현실과 그렇지 않은 몸이 겪는 현실은 다르듯이 누구에게나 현실은 저마다의 현실이죠. “뛰어오는 사람이 다 신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그러고 나니 넘어지려는 사람도 모두 신처럼 보였다”(「후천」)는 대목에서 이런 인식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나 지옥에서 빌려 온 묘목 아니죠”(「아네모네」)처럼 조사를 생략하는 기법을 자주 쓰는데, 한국어 문장을 어색하게 구사해서 마치 외국어처럼 낯설게 읽히게 해요. 내가 모르는 언어 속에 놓여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절망을 경험하면서도 어떤 가망의 표현으로서 시를 쓴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성동혁의 시에서 현실이라는 것은 아픈 육체나 예민한 정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 적는 게 아니고, 그걸 받아들이는 시인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것이에요. 그런 점에서 이번 시집에서 시인의 세계가 훨씬 넓어졌다는 확신이 듭니다.
노태훈 『아네모네』는 그 자체로 완성도가 높아서 이 시집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압도당하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할렐루야 이제는 이 말에 위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시간」으로 시작해 마지막에 「천사는 지옥에 가다가/숨이 차서 돌아온/악마」에 도달할 때까지 시적으로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인이 시적 주체를 위태로운 상황까지 몰아붙이면서 쓴 시집이에요. 만약 시 한편만 읽는다면 감동이나 감각의 폭이 제한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권으로서의 의미가 큰 시집입니다.
박연준 시인이 시집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느 구절 하나 우연에 맡겨 허투루 내보낸 게 없고, 자신이 조망한 채로 배치하려면 엄청난 힘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려면 절제하고,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나누고, 말할 수 있지만 말하지 않거나 다르게 말해야 하고, 계획과 힘이 있어야 하거든요. 신처럼. 이 대목에서 ‘격조’가 생기는 것 같아요. 「아네모네」가 표제작인 이유가 있을 텐데, 이 시에서 화자는 고유명사, 혹은 구체적인 명명으로 꽃 이름을 불러요. “아네모네 아네모네”, “내 엉망인 심장”을 “붉은 제라늄”이라고 칭하고, “나의 구체적 애인이여”라고 대상을 구체적으로 호명하지요. “나는 꽃 이름을 모두 알던 사람인데//이제 그것들을 꽃이라고만” 부르겠다던 발언을 정면으로 뒤집는 시이기도 해서 어떤 감동이 느껴졌습니다.
김나영 첫 시집에서 시인이 예민하게 그려낸 구체화된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오히려 반대로 느껴졌어요. 누군가의 절절한 구체적 실감을 담은 고유명사조차 그 의미를 모르는, 그것과 관련한 역사가 없는 이에겐 한없이 추상적으로 여겨질 수 있으니까요. 두권의 시집을 지나오며 성동혁은 말할 수 있는 대상과 그것을 생생하게 살아 있도록 하는 말을 치열하게 탐구하면서 고유한 시세계를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모국어로 쓰인 시를 읽는 의미 또한 재확인하게 합니다.
노태훈 여기 쓰인 시어들, 특히나 구체적인 사물을 지시하는 명사들은 그렇게 쓸 수밖에 없어서 쓰였다는 느낌이 듭니다. 다른 걸로 대체할 수 있거나 추상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도저히 그 이름을 부르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죠. 마지막으로 그 이름들을 불러보듯 간절하게도 들리기도 하고요. 시인이 이 단어들을 상당히 숙고해서 고르고 썼을 거라고 짐작해봅니다.
박경희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창비)
김나영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은 박경희의 두번째 시집입니다. 꼭 대비해서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파토스가 주가 되는 시가 있고 에토스를 강조하는 시가 있다면, 박경희 시의 경우에는 한편에 이 둘이 함께 들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감정에만 매몰되지 않고 당대의 문제를 균형감 있게 바라보는 것이 이 시집의 미덕으로 느껴졌어요.
노태훈 근래에 발표되는 작품들을 보면 시대감수성이나 젠더의식에 맞는지 긴장하고 작품을 읽게 되는데 모처럼 편안한 기분으로 독서를 했습니다. 첫 작품부터 긴장을 풀고 따라 읽다보면 충남 보령의 어느 시골 풍경 속에 있게 됩니다. 한 시인의 공동체를 같이 경험하고 나왔다는 기분이 들어서 좋았어요. 시인의 상황을 의식하며 읽다보니 마을 풍경이나 시인이 겪은 일들이 가시화되면서 재밌게 따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시집에는 ‘호미 말고 펜을 쥔’(「경칩」) 시인 자신의 모습과 가계도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가족들, 어머니와 돌아가신 아버지의 서사가 생생하게 담겨 있어요. 다만 세월호참사, 블랙리스트 사건, 또 광주항쟁, 제주 4·3 등 역사적인 사건을 가져올 때 작가의 현실인식이 단순하게 느껴지는 지점은 아쉽기도 했습니다. 시인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감 있게 풀어내는 쪽이 훨씬 재미있었어요.
박연준 박경희의 시에는 사투리를 사용하는 인물들의 육성이 그대로 실려 있고, 농촌의 정서나 서민들의 삶의 이야기를 그대로 데려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옛날이야기를 듣는 듯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었고요. 「생강꽃처럼 화들짝」에서 윗집과 아랫집이 싸움을 한 뒤에 “눈깔사탕 한봉다리”를 문고리에 걸어놓고 화해하는 장면은 언어의 생동과 해학적 풍경이 돋보여 읽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봄날이 생강꽃빛으로 날”리듯, 평화로운 이미지도 좋았고요. 그런데 몇몇 시에선 시인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에 그치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시적 화자가 타인의 이야기를 가져오는 ‘전달자’ 역할에만 머무를 때 시적 긴장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었거든요. 시적 긴장은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좌우되고, 그 안엔 시인이 추구하는 ‘음악과 리듬’이 들어 있어야 하는데, 수록된 시들이 대부분 달변으로 쓰인 데 비해, 그 안에서 시인 고유의 개성은 쉽게 드러나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김나영 전 오히려 같은 이유로 이 시집이 좋았어요. 단일한 화자의 목소리만 내세우는 게 아니고 다른 입장과 관점을 지닌 여러 존재들의 목소리를 날것으로 받아 적으려는 시도가 엿보이는 시들이 많지요. 그런 점에서 치매 걸린 할머니가 죽은 아버지를 찾는 장면을 그린 「참말로 벨일이여」는 상징적으로 보입니다. 1연은 혼란과 착각이 빚어내는, 치매 걸린 할머니의 목소리로, 2연은 “할머니가 한번씩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어려움을 겪는 화자의 목소리로 쓰여요. 그렇게 이 시는 보편적인 삶의 형식과 내용을 수탈당한 개인의 정신을 바로 보게 하는 것이 시의 언어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개의 목소리를 병치시켜 각각 삶과 시를 주목하게 함으로써 그 무거운 사유를 가볍게 묘사해요. “참말로 벨일이여”라는 한마디에 폭넓은 시간에 관한 사유가 다 들어 있는 것 같아 흥미로웠어요. 여러 시편들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장면들을 통해 폭력에 대한 공포가 다시 폭력으로 계속해서 대물림되는 역사를 시화했다는 것도 이 시집의 중요한 미덕이라고 여겨집니다. 현재를 새롭게 하는 낡은 것이 무엇인지, 그 새로움에 대한 감각이 어떤 새로움을 낳을 수 있는지를 고민한 시집이라고 생각해요.
박연준 ‘실험’이라고 보기엔 서정주나 박용래의 계보를 잇는 서정시들이 계속 쓰여왔고, 지금도 많은 시인들이 쓰고 있다 생각해요. 전통적인 서정시를 계속 써내는 건 물론 고무적이고 가치있는 일입니다. ‘잘’ 쓰인 서정시를 볼 때의 기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으니까요. 김해자 시인이 발문에서 썼듯 “박경희는 느린 사람이지만 일견 촌스럽고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만한 시를 쓸 만큼 용기 있고 진실”한 시인, “옳은 길을 가는 사람이자 무엇보다 착한 사람”(93면)인 점은 저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전통적인 서정을 사유할 때, 형식의 익숙함과 보유한 양의 방대함 때문에 ‘더 잘’ 쓸 책임이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모든 시인이 파격이나 새로운 것을 추구할 필요는 없지만, 누구와도 ‘다르게’ 보아야 할 의무는 있다고 생각해요. 독자가 어떤 이유로든 시를 편안하게만 읽었다면, 그건 장점인 동시에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어요. 저는 이 시집을 소리 내어 읽어보았는데 입말이 살아 있는 것과는 별개로, 단어들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리듬, 즉 박경희만의 맥박 소리는 희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시인의 ‘아버지의 말’이나 ‘어머니의 말’을 전하는 시들은 활어처럼 파닥여 인상적이었어요.
김나영 이 시집이 요즘의 시들과 반대 지점에 있는 건 사실이에요. 개인사보다는 보편적인 인간사를 다루는데, 같은 공동체를 다루더라도 여기에서의 공동체와 지금의 소수집단으로 분화된 공동체는 또다른 것이지요. “짠한 사연을 넉넉한 해학으로 직조한 시들은 글자 이전에 말이, 말 이전에 마음이 있었음을 실감케 한다”(김해자 발문, 81면)는 의견에 공감해요. 확실히 요즘 시집들은 단어 하나하나의 중의적인 의미를 따져가며 긴장감 있게 읽어야 한다면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은 입말이 좀더 주도하는, 말보다는 말 이면에 있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요즘의 시집들과 극단에 놓일 수 있고 그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태훈 시적으로 새롭다는 느낌을 주지 못하는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한국시의 어떤 계보나 정서 속에 위치를 지을 수 있고, 그것이 중요한 가치를 지니기도 하지만 미학적으로 아쉬운 것은 사실이에요. 물론 현란하고 세련된, 또 정제하여 가공된 시를 쓰는 시인들과는 결이 다릅니다만 토속적인 것은 늘 이런 방식으로밖에 표현될 수 없는지 고민해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산벚나무」 「경칩」 같은 시가 더 많았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이영주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문학과지성사)
김나영 마지막으로 이야기 나눌 책은 이영주의 네번째 시집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입니다. “우리가 아름다움으로 기우는 것은/약하고 슬프기/때문일까”라는 ‘시인의 말’을 한참 바라보았어요. ‘약하고 슬프기’가 한행으로 처리되어서 그런지 그 자체로 청유형으로 읽히기도 했습니다. 이 시집을 주조하는 핵심적인 정동이 거기 집약돼 있는 것도 같고요.
노태훈 저는 ‘시인의 말’에서 “기우는 것”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직전 시집인 『차가운 사탕들』(문학과지성사 2014)이 2014년 3월에 출간되었으니 이 시집에 묶인 시들은 세월호참사 이후에 쓰였어요. 「십대」 「첫사랑」으로 시작되는 이 시집에는 유독 소년 소녀가 자주 등장하고 물의 이미지도 상당히 강조되는데, 그것이 예사롭게 읽히지 않았습니다. 3부에서 ‘광화문’과 ‘4월’에 관해 직접적으로 말하기도 하고요. 세월호참사의 충격과 사건의 이미지가 곳곳에 자리한 시들을 읽다보니 ‘기운다는 것’이 꽤 의미심장하게 읽혔습니다.
김나영 세월호참사 이후의 시들이 집중적으로 묶였지만, 동시에 그 구체적인 사건을 제외하고 읽어도 “누군가가 기록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조용한 대화”(「빈 노트」)라는 구절에 드러나듯 약하고 슬프고 허약한 존재들의 목소리를 기록하기로 작정했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목소리를 쓰겠다는 의지와 어떻게 쓸 수 있을까 하는 실험이 모두 들어 있는 시집처럼 보여요. 또 “무엇을 쓴다는 것이 고통을 줄 수도 있다면. 수많은 글자로 가득 찬 이곳에서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하는지”(「이집트 소년」) 같은 대목에서 시인이 ‘과연 지금 쓰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를 고민한 흔적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구체적인 현실의 사건들과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고통을 바라보는 시민과 시인의 시선이 뒤섞여 있겠지요.
박연준 시의 화자들은 계속해서 ‘쓰는 일’을 의식하고 있어요. “아무것도 쓰지 마. 무관한 것들을 쓰지 마. 돌아올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쓰지 마. 이제는 쓰지 마.//아름다운 것들은 기록되면 파괴되지./사라질 수가 없지//그는 연애편지를 이렇게 건네네요.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영원히 느끼고 싶다면 그저 손이라는 물질을 잡고//병의 입구를 열고”(「병 속의 편지」). 기록은 ‘사건’이 지난 후에 이뤄지는데, 기록 이전의 일들, 대개 강렬하거나 고통스러운 경험을 재인식해야 합니다. 그 때문에 ‘쓰는 자’의 ‘쓰는 행위’는 ‘시도’하고 ‘실패’하는 일이 되기 쉽지요. 「아침」이라는 시를 보면 “혼자서 죽을 쑤는 사람”은 “죽은 이후에도 속이 너무 아파서” 죽을 먹으려 하고, “자꾸만 투명해지는 손으로 무언가를 쓰고 싶은 밤이다//모두를 잊고 선박의 밑창처럼 녹이 슬고 싶은 밤이다”라는 대목에서 세월호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시는 “혼자서 죽을 쑤는” 엄마, 결국 “아무것도 쓸 수 없”다는 화자의 고백으로 이어지죠. 죽을 쑤는 것, 죽을 수 있는 것, 글을 쓰는 것, 글을 죽처럼 쑤는 것…… 비슷하게 소리 나는 일련의 언어들을 발음해보면서, 죽는 일과 사는 일과 쓰는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김나영 시인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 사유의 과정을 시쓰기로 풀어내고 있어요. 이 시집을 관통하는 시인의 태도는 ‘기록하지 말기’인 것 같아요. 세월호참사 이후에 많은 이들이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시인은 “아름다운 것들은 기록되면 파괴되”고 “사라질 수가 없”으니 기록하지 말자고 말해요. 그러나 이것은 문자 그대로 ‘적지 말자’가 아니라 ‘다른 방식의 기록’에 대한 고민을 드러낸 일종의 역설이죠. 이런 점에서 시인이 애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고 느껴져요. 안타까운 죽음들을 제대로 애도하기 위해서 시는 어떤 방식을 취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합니다. 「슬픔을 시작할 수 없다」에는 중의적인 제목에서부터 그런 고민이 담겨 있어요. 시작(始作)을 시작(詩作)이라는 시를 쓰는 행위로도 읽히게 하면서 애도를 시쓰기로 할 수 있을까, 시작되지 않는 슬픔은 어떤 것일까 등을 질문하게 합니다.
박연준 “무엇인가를 썼다고 생각했는데 다 젖어버렸다”(74면)라는 대목에서도 쓰는 일의 한계를 고민하는 시인의 태도가 보여요. 한편 「녹은 이후」에서 화자는 눈사람의 ‘녹은 이후’를 생각하는 에스키모인의 예를 들어요. “에스키모인은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막대기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선다고 한다/마음이 녹아 없어질 때까지/걷는다고 한다/마지막 부분이 사라질 때까지”. 저는 여기서 이영주의 ‘언어’를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이영주는 밖으로 표출하는 시가 아니라 안으로 수렴하는 내밀한 언어를 가졌거든요.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쓰는 에스키모인들처럼 그의 언어는 독자를 부러 외롭게 만들기도 해요. 시인이 계속 등을 보이면서, 최후의 “막대기 하나”를 들고, 안으로 침잠하는 방식으로 시를 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아요. 그 속에는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 몰랐으면 하는 마음도 있는 것 같고요. 그것을 다른 식으로 알아봐주길 기대하며 발언하기도 해요. 또 부피가 큰 단어, 관념적인 단어들을 즐겨 써요. 「잔업」이라는 시만 봐도, ‘시간 곡선 짐승 영혼 인간’ 등 구체적이기보다 큰 범주에 속하는 단어를 가져와서, 기이한 상상 속으로 도망가며 말한다는 인상을 받거든요. 이것이 이영주만의 ‘불투명한 목소리의 아름다움’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노태훈 시집 제목도 그렇지만 일종의 역설의 미학이 시집 전반에 깔려 있어요. 이것이 이 시집의 장점이자 시적 깊이를 확보하는 좋은 전략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런 식의 표현이 자주 활용된다는 생각도 들어요. 어떤 이야기를 하고 나서 그걸 다시 뒤집어 상황이나 사건을 폭넓게 조망하는 듯한 기법이나 전략이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점은 아쉽기도 했어요. 저는 4부가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어둠과 비밀의 이미지들이 좋았습니다. 『차가운 사탕들』은 절망의 끝에 서 있는 시가 대분이었는데, 여기 4부의 시들은 그 절망으로부터 한걸음 내디딘 인상이었어요. 쓸 수 없다면 쓰지 않아도 좋다고 쓰면 된다는, 또다른 쓰기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달까요. “왜 바깥에 가만히 서 있니? 친구는 뒤에서 들어오는 또 한 명의 나를 위해 문을 열어두었다”(「친구의 집」), “나는 망가진 마음들을 조립하느라 자라지 못하고 밑으로만 떨어지는 밀알. 옆에 앉아 있다. 어둠을 나누고 있다”(「연대」) 같은 대목에서 이런 기대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시집에는 2014년 4월 이후로 시인이 겪고 보고 들은 것들이 집약돼 있으면서도 거기에서 절망하고 주저앉을 게 아니라, 우리가 처한 현실의 일들을 때로는 쓰지 않으면서, 때로는 쓸 수 없지만 그래도 쓰면서 건너가보자고 말하는 듯해서 이 시집이 비관적으로 읽히지 않았습니다.
김나영 시집의 한 축에는 세월호참사 같은 현실의 구체적인 사건과 그에 대한 경험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고, 다른 축에는 시인이 계속 써온 여성서사가 있습니다. 이번 시집에서는 「무한」 「엄마의 과일청」 「여름」으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특히 눈에 띄었어요. 외할머니, 엄마, 나로 이어지는 시간을 쓰고 있습니다. “이곳의 모든 것은 아무것도 부패하지 않고 고스란히 네 입으로 흘러갈 거란다”(「엄마의 과일청」), “나는 물속에 엎드린 채 영원을 둘러싼 기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여름」) 같은 대목에서 알 수 있듯 나를 둘러싼 힘이나 기후, 쉽게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인식이 동시대 여성서사의 울타리 속에 놓여 있기도 한 것 같습니다. 앞서 얘기 나눴던 『이제야 언니에게』의 ‘공기’가 겹쳐 떠오르기도 하고요.
박연준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년과 소녀, 천사, 여성, 약자들은 시인이 특별히 애정을 갖고 들여다보는 대상인 것 같아요. 뒤표지에 실린 글을 보면, 시인은 완성된 자, 기득권을 가진 자, 고통을 주는 자에 대해서는 특별히 주목하지 않고 “독가스가 가득하고 황산비가 내리”는 아름다운 별에 사는 약자들을 보듬으며, “바로 저거야! 저걸 들여다봐야겠어!”라고 외칩니다.
김나영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네요. 좋은 이야기 많이 들려주신 두분께 감사합니다. 역시 시와 소설은 함께 읽을 때 그 의미와 재미가 더해진다는 것을 확인한 시간이었어요. 곧 다가올 새해는 2020이라는 숫자 때문인지 미래를 사는 느낌일 것 같습니다. 미래가 오기 전에 먼저 올 이번 겨울을 건강히 보내시길 바랍니다.
노태훈 이번 문학초점에 선정된 작품들이 대부분 ‘죽음’과 연관이 있어 읽을 때 마음이 무거웠는데요, 와서 이야기 나누면서 일종의 위안을 얻게 된 것 같습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연준 두 계절 동안 문학초점을 통해 다정한 분들과 책 이야기를 실컷 나눌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함께’여서 묵직한 신간들을 깊이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많이 배울 수 있는 시간, 감사했습니다. (2019.10.29.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