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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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도리스 레싱 『금색 공책』, 창비 2019

광기와 폭력에서 살아남기, 혹은 ‘무너져 내리기’

 

 

정소영 鄭素永

영문학자, 번역가 syjung0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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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당시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의 나이는 여든여덟으로, 최고령 수상자의 기록을 세웠다. 1950년 첫 소설 『풀잎은 노래한다』(The Grass Is Singing, 한국어판 민음사 2008)로 주목받은 후 2013년 아흔넷의 나이로 사망하기 몇해 전까지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지만, 만약 노벨문학상을 작품에 주는 거라면 그 수상작은 1962년에 출간된 『금색 공책』(The Golden Notebook, 권영희 옮김, 전2권)이리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 이후의 소설이 대개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많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금색 공책』이 이전의 전반적인 경험을 집대성하며 새로운 세계관을 열어 보이는 확실한 전환점을 이루기 때문이다. 전쟁과 인종차별에 반대하고 사회주의적 현실참여문학과 페미니즘에 깊이 관여하던 초기와 달리 『금색 공책』 이후로는 구체적 현실에서 멀어져 사변적이거나 공상과학적 경향이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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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색 공책』은 특히 1960년대 말 전투적 페미니즘이 등장하면서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여겨졌지만 1971년 작가가 직접 쓴 서문에 분명히 나타나듯이 레싱 자신은 이 책을 ‘양성 간의 전쟁’으로 읽는 비평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저자의 의도와 달리 이 책이 페미니즘 소설로 읽힌 데는 남녀관계가 작품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고 “공격성, 적대감, 원망과 같은 다양한 여성적 감정”(1권 15면)이 풍부히 담긴 탓이 크다. 그런데 사실 잘 들여다보면 온갖 남녀관계—많은 부분이 혼외관계이거나 단순히 섹스를 위한 관계라는 데서 60년대 말 성의 혁명을 주창한 페미니스트들이 이 책을 칭송했던 한 근거를 찾을 수도 있겠다—가 등장하지만 그중에 소위 ‘바람직한’ 관계는 거의 없고, 심지어 여성들이 남자에게 매달린다든지 정서적으로 미숙한 경우처럼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보자면 불편한 구석도 적지 않다. 「자유로운 여자들」의 몰리와 애나의 경우를 비롯하여 남녀관계가 대부분 남녀 간의 적대감이나 경쟁심에 좌우되고 여성과의 연대감도 남자에 대한 비판이나 반감에 기반하기 때문인데, 사실 생생하게 묘사된 이 모든 남녀관계가 레싱에게는 애나와 쏠의 관계를 통해 극복 혹은 해체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저자 스스로도 당혹스러울 만큼 이 작품에 대해 엇갈리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는 이유도 바로 결과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비판의 대상이 너무 충실하고도 생동감 있게 그려졌다는 데 있다.

작품은 1957년을 배경으로 한 「자유로운 여자들」이라는 소설이 네개의 공책으로 중간중간 끊어지는 방식으로 구성되고, 색깔별로 구분된 네개의 공책이 이보다 앞선 과거의 경험을 여러 방식으로 담고 있다. 애나의 소설 『전쟁의 접경지대』가 배경으로 하는 아프리카의 생활과 그 소설과 관련된 검은 공책, 공산당 및 좌파운동과 관련된 빨간 공책, 5년간 지속된 마이클과의 관계를 허구로 다시 쓰는 노란 공책, 그리고 일기처럼 사실을 그대로 적으려는 파란 공책의 경험이, 마지막 파란 공책에서 금색 공책까지 걸쳐 벌어지는 쏠과의 관계에서 모두 해체될 과거의 삶의 방식이다. 애나에 따르면 이 삶의 본질은 무엇보다 ‘순진함’이다. 19세기 사실주의적 재현과 총체성을 고수하는 문학, 가능성을 상실한 공산당에 여전히 미련을 두는 정치적 사고, 이제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진짜’ 남자와의 ‘온전한’ 관계에 대한 믿음 등이 모두 그러한 순진함의 소산이다.

젊은 열정을 바쳤던 그 모든 삶이 갑자기 버려야 할 과거의 순진함이 되어버린 이유는 세상에 만연한 폭력과 파괴와 광기 때문이다. 공책에 스크랩해놓은 신문기사나 애나가 벽에 온통 오려 붙인 신문기사에서 잘 나타나는 이러한 폭력적 상황은 인류역사 내내 존재했던 폭력과는 그 성격과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 애나/레싱의 생각이다. “수소폭탄이 터져서 인류 전체가 사멸하는 꿈에서 놀라 깨어났는데, 사람들이 석궁에 대해서도 똑같이 느꼈을 거라는 얘기”(2권 158면)는 터무니없는 것이다. 2차대전을 초래한 독일의 나치즘과 이후 소련의 스딸린 독재체제는 특히 지식인과 좌파진영에 자아분열적 혼란을 초래했고, 그렇게 도처에서 발생하는 파괴와 혼돈은 주체적 인간과 세계의 발전에 대한 예전의 믿음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애나가 성공적인 데뷔작 이후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도 한편으로 이렇게 참혹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소설 나부랭이나 쓰고 있어도 되겠는가 하는 자의식과, 다른 한편으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질서와 형식을 부여할 수 없다는 절망 때문이다.

쏠과의 짧지만 강렬한 관계, 그 속에서의 ‘무너져 내리는’ 경험은 과거의 순진함을 순진함으로 인정하고 혼돈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된다. 쏠이 처음부터 마치 다중인격자처럼 여러 자아를 가진 인물로 등장함에 따라 애나도 여러 여성의 역할을 하며 수많은 관계를 거치고, 동시에 꿈을 통해 지금까지 알아온 많은 인물을 만나거나 그 인물이 되는 경험을 겪은 후, 애나는 “내가 바로 사악한 남자이자 동시에 여자인 그 난쟁이였고, 파괴의 기쁨이라는 그 원칙”(2권 340면)이었음을 깨닫는다. 말하자면 그 누구도 시대의 파괴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 ‘순진함’은 세계의 혼돈을 회피하는 방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레싱 자신이 말하듯 이 ‘무너져 내림’이라는 주제는 “자기치유이자 내면의 자아로 하여금 잘못된 이분법과 분리를 넘어서게 만드는 일”(1권 14면)이다.

‘무너져 내림’이란, 있던 것을 허무는 일일 뿐이고 삶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 뭔가 다시 세울 필요가 있을 텐데 그렇다면 『금색 공책』이 보여주는 이후의 전망은 무엇일까? 그것은 노란 공책에서 폴이 엘라에게 썼고, 다시 애나가 쏠에게 쓰는 “바윗덩어리 밀어 올리는 사람”(1권 344면)이라는 표현에서 찾을 수 있다. 시시포스의 돌처럼 거듭 원점으로 돌아오는 일을 그래도 계속 해나가야 한다는 것인데,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경우엔 돌이 앞선 자리보다 약간 위쪽에 멈춘다는 것이다. 세상의 진보나 인간에 대한 믿음은 상실했지만, 또 나의 노력이 세계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든다는 보장도 없지만, 그래도 세상의 폭력성에 거리를 두고 꾸준히 자신의 일을 해나가야 한다는 결론은 상당히 체념적이면서 동시에 도덕적으로 들리는 면이 있다.

세계 도처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벌어지고 지구환경은 극심하게 파괴되어가는 21세기에도 레싱이 경험한 세상의 폭력과 광기는 여전할 뿐 아니라 더욱 심해지는데, 그건 어쩌면 ‘무너져 내림’ 이후에 무엇이든 다시 세울 시도를 하지 않아서는 아닐까? 당시 공산주의나 좌파이론의 문제가 “프로이트나 맑스 같은 할아버지들이 강요”(2권 411면)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이론을 ‘할아버지’의 훈계처럼 받아들였다가 이제 고리타분하다며 던져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가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들이 현실이 될 거라고 믿지 않을 때, 우리에게는 어떤 희망도 불가능”(2권 404면)하다는 쏠의 말처럼 우리의 자아가 그릇된 이분법이나 틀에 박힌 사고와 함께 무너져 내리는 중에도 완전히 쓸려가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줄 동아줄은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저자의 71년 서문으로 돌아가, 레싱은 당시 독자들에게 받은 편지 중에서 세통을 소개하는데 첫번째 독자는 이 작품을 전적으로 ‘양성 간의 전쟁’으로 보았고 오래된 공산주의자로 보이는 두번째 독자는 정치 내용에만 관심을 보였고 세번째 독자는 정신질환에만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여기서 레싱이 깨닫듯이 사실 모든 문학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각 나라와 각 시대의 독자들이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것이다. 혹은 쏠과의 관계 이전까지 당시 시대상과 남녀관계와 정신적 방황을 풍부하고 생생하게 담고 있는 작품 자체가 작가의 의도를 배신한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이 작품은 많은 독자가 나름대로 공감하며 따져볼 수 있는 종합선물세트가 아닐까 싶다.

정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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