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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양경언 梁景彦
문학평론가. 평론집 『안녕을 묻는 방식』 등이 있음. purplesea32@hanmail.net
양윤의 梁允禕
문학평론가. 평론집 『포즈와 프러포즈』 등이 있음. aleph2006@daum.net
이근화 李謹華
시인. 시집 『칸트의 동물원』 『우리들의 진화』 『차가운 잠』 『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 등이 있음. redcentre@naver.com
양윤의 안녕하세요. 이번호부터 양경언 평론가와 문학초점을 맡게 된 양윤의입니다. 오늘 초대손님으로 이근화 시인을 모셨습니다. 좋아하는 분들과 함께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설레는 마음입니다. 새해를 여는 봄호 좌담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는 생각이 드네요.
양경언 문학작품을 홀로 읽고 생각에 잠기다보면 괜한 삼천포에 빠지기도 하고 생각을 하다 말 때도 있는데요, 두분과 함께 대화를 나누다보면 작품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심도 있게 나눌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이 자리에 왔습니다. 반갑습니다.
이근화 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다룰 작품들을 꼼꼼히 읽어보았는데, 좋은 작품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다는 점에 우선 기대가 큽니다.
이주란 『한 사람을 위한 마음』(문학동네)
양윤의 먼저 『한 사람을 위한 마음』입니다. 이주란의 두번째 소설집인데요, 첫번째 소설집 『모두 다른 아버지』(민음사 2017)로 김준성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은 바 있지요. 어떻게 읽으셨나요?
양경언 최근 여러 소설에서 1인칭 화자를 내세우고,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가 싶을 만큼 에세이적인 어법도 많이 차용되고 있는데요, 『한 사람을 위한 마음』도 고유한 ‘나’의 입장에서 소설을 풀어가는 면이 돋보입니다. 1인칭 소설에 관해 이야기할 때 계속 언급될 작품집이라는 예감이 들어요.
이근화 조금 다른 방식의 위로랄까, 조심스러운 말 건네기랄까, 그런 점들이 읽는 내내 굉장히 좋게 다가왔어요. 우리는 은연중에 고통이나 불안이나 슬픔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희망과 낙관의 세계로 자신을 자꾸 이동시킬 것을 요구받는데 이주란 소설은 그러지 않아요. 「준과 나의 여름」에 화자가 지하철에서 본 여자를 떠올리는 장면이 있는데요. 옆자리의 여자가 내내 소리 죽여 우는데 “여자의 눈물 한 방울이 반바지를 입은 내 무릎에 떨어졌을 때 (…) 티내지 않으려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184면)라고 하거든요. 이 대목이 작가가 고통이나 상처를 다루는 방식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우냐고 묻지 않는 것, 울지 말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 작가가 이런 인물들을 잘 보여줘서 반갑고 고마웠어요.
양윤의 그런 ‘함께 있음’의 태도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아요. 제가 주목한 것은 이 소설집 전체에서 어떤 ‘구성’을 의도한 작품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어요. 무-구성적이라고 할까, 비-구성적이라고 할까, 소설을 하나의 ‘잘-짜여진-플롯’의 관점에서 써내려가는 전통적인 방식을 탈피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구성은 작품 바깥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작으로 읽히기도 하는 각 이야기의 배경에는 가시화할 수 없는, 그러니까 소설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그 사건’이 그림자처럼 드리워 있는데요. ‘그 사건’ 이후의 일상을 묘사하면서도 정작 그게 어떤 일인지 정확히 서술하지 않는 이주란식 서술 방식이 독특합니다. 차마 말하기도 어려운 사건을 겪은 인물이 어떻게든 일상의 표면장력을 붙들고 살아가려 애쓰는 모습을 덤덤히 보여줘요.
양경언 표제작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언니의 죽음이 주인공에게 분명히 큰 상실을 안겼지만, 말씀처럼 소설은 또다른 사건이 배후에 존재한다는 점을 짐작하게 하며 흘러가요.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끝내 드러나지 않지요. 에둘러 가듯 자기를 달랜달까요. 알 수 없는 ‘그 사건’ 이후 시간은 고요히 고여 있고, 평화로운 풍경 사이로 날카로운 햇살이 찔러 들어오듯 괴로웠던 상황이 플래시백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트라우마를 직면하는 대신에 한글자 한글자 글씨를 써내려가듯 자기 주변의 풍경들을 발견해나가는 데 집중해요.
이근화 소극적인 방식의 애도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이들은 고통을 섣부르게 위안하지도, 적극적으로 넘어서려고도 하지 않고 다만 근근이 버티는 모습이거든요. 그러면서도 줄곧 울어요. 괜찮지 않다고 말하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데 딱 거기서 멈추는 거예요. 「사라진 것들 그리고 사라질 것들」을 보면 언니 조수영이 동생 조지영의 자살 뒤 집에 찾아가 짐을 정리하려고 해요. 하지만 결국 정리를 마치지 못하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건…… 미안해서였다”(179면)라고 하지요. 우리는 미안해서, 힘들어서 자꾸 뭔가를 시도하려고 하는데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잖아요.
양윤의 인물들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곳곳에 있기는 한데, 그게 삶이 무너진다거나 절망에 사로잡힌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의미화되지는 않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저는 이런 특징을 전작과 비교해서 보고 싶습니다. 첫 소설집 『모두 다른 아버지』가 아버지라는 가부장적인 존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가족서사였다면, 이번 소설집에서는 아버지가 부재하는, 하지만 그것이 결핍이나 불행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의 가족서사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가족이라고 할까, 어머니나 자매와의 관계나 여성 연대가 주요하고요. 「한 사람을 위한 마음」에서도 어린 조카 송이의 눈에 주인공은 잘 우는 사람이고,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찾아보는 ‘자연인 이모’이고, 말하자면 성숙한 어른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언니를 잃은 주인공과 엄마를 잃은 조카가 맺는 이 관계는 어른이냐 아이이냐를 떠나 상실을 함께 겪는 자매애랄지 어떤 다정함을 보여줍니다.
이근화 가족이 그 전통적인 기능을 상실한 이후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담긴 것 같아요.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연대해야 하는지 다른 삶의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서울 중심이 아닌 주변부 지역을 배경으로 삼은 까닭도 그래서일 테고요.
양경언 저도 인물이 조카나 다른 어린이와의 관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장면이 흥미로웠습니다. 집 앞에서 노는 아이들한테 사탕을 가져다주려고 한다든지요. 아이들의 말을 허투루 흘려듣지 않고 마치 동료처럼 여기는 시선이 있는 것 같아요. 엄마나 다른 여자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때론 서로 안 맞는 구석이 있어도 삶의 동반자로서 함께해가고요. 하지만 또다른 관계들을 보자면 이들이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방어적이라는 느낌도 떨칠 수가 없는데요. 모두 ‘참는 나’의 모습이거든요. 예컨대 표제작에서 주인공이 학원 원장한테 큰 욕을 듣고도 아무 대응을 하지 않고 말없이 짐을 싸서 나오잖아요. 자기를 연민할 수 있는 상황으로 자꾸만 뒷걸음치는 건 아닐까, ‘참는 나’의 등장은 인물이 자기윤리를 실현해나가는 방식일 수도 있지만 자기연민으로 쉽게 빠질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근화 비슷한 고민을 저도 해보았는데요, 친구를 대하는 방식이나 데이트를 하는 장면에서 조금 상식적이지 않다는 느낌이 있거든요. 기호나 취향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고, 반대의견을 피력하는 데 애쓰지 않지요. 화가 나도 그런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편이고요. 확실히 주체적인 여성의 모습은 아니에요.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모든 여성이 자기 의견을 분명하게 내세울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지는 않을 거예요. 저마다 자기 나름의 성장 환경과 교육 배경, 삶의 방식이 있는데 이를 한가지 잣대로 재단하기도 어렵겠고요. 얼핏 수동적으로 보이는 여성들의 내면을 이렇게까지 끈질기게 풀어낸 것은 작가의 주된 관심을 드러낸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그 사건’은 안정되고 쾌적하게 살지 못하는 여성들을 관통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자본주의적 고통은 공평하게 오는 것이 아니니까요. 문득 진 리스(Jean Rhys)가 다락방 속에 갇힌 미친 여자 ‘버사 메이슨’(『제인 에어』)을 다시 호출하여 소설(『광막한 싸르가소해』)을 썼던 것이 생각나네요.
양윤의 여성을 동질적인 하나의 집단으로 간주하는 게 아니라, 한명 한명의 개별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작가는 ‘그 사건’을 직접 구체화해 말하지 않고 극히 제한적으로 필터링해 들려주는 서술 방식을 사용하는데, 이 부분에서 양경언 평론가 지적처럼 자기미화적인 방향이 작동할 위험이 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저한테는 이들의 눈물이 감상적으로만 다가오지는 않았어요. 이들은 대체로 알 수 없는 사건을 겪고 폭력적인 언사들을 경험한 뒤 서울에서 변두리로, 고향으로 쫓기듯 돌아온 사람들이잖아요. 아버지가 부재한 공간으로 돌아와 삶을 복원하려고 분투하는 모습인데, 위계를 거부하고 수평적 관계를 수립하려고 애쓰는 걸로 보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줄임표가 많은 소설을 무척 오랜만에 보거든요. 상당히 과감한 시도인데,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무엇인가 말할 게 있다는 것, 그것이 말줄임표라는 정념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양경언 그런 면에서 마지막에 「H에게」를 배치한 것은 적절한 것 같습니다. 화자는 “지금의 이 고통은 다 제가 자초한 일이라 누구를 탓할 수도 없”(249면)다는 말로 시작해 자신의 삶을 죽 돌아봅니다. 그리고 회고의 마무리에 이르러서는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자기와 닮은 누군가를 연기하는 배우이기 싫다고 결심하지요. 아무렇지 않은 척 삶을 연기해온 것에 대해 “진절머리가 납니다”(275면)라고 고백해요. 화자의 변화를 짐작하게 하는 마무리인데요. 소설에 배경처럼 깔린 ‘그 사건’이 무엇인지, 그동안 구체적인 진술을 피해온 트라우마와 직면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내면서 발돋움하듯 끝을 맺었다는 생각이에요.
양윤의 그렇다면 굉장히 의미있는 “진절머리”네요.(웃음)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읽는 내내 마치 저한테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만 같았습니다. 서른 중반의 여성들이라면 ‘그 사건’이 무엇인지 자기 삶에서 겪은 크고 작은 일들을 대입해가며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상상의 여백을 품은 채 공감대를 형성하는 소설이 아닐까 합니다.
정세랑 『목소리를 드릴게요』(아작)
양윤의 정세랑은 2010년 장르소설 월간지 『판타스틱』에 「드림, 드림, 드림」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2020년을 맞이해 지난 십여년간 써온 단편 SF를 엮어 출간한 것이니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이근화 이 책을 무척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굉장히 술술 읽혔는데,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비판의식이나 고민을 일상적인 소재와 자연스럽게 결부해서 정서적인 차원으로 접근해가는 방식이 유효했던 것 같아요. 인물 관계를 중심으로 서사를 이끌어가는데, 근저에 친밀함과 애정이 밑바탕되어 있어 공감하기 쉬웠고 재밌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사회의 변화, 인류의 진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인간적 가치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랑의 가치와 그에 수반되는 윤리의식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주요한 화두로 다가왔어요. 특히 여성의 입장에서요. 최근에 에코페미니즘에 관한 이러저러한 책을 읽었는데, 정세랑의 소설이 저에게는 자연과 환경, 여성에 대해 더 분명하게 미래적 비전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양경언 인물들은 망해버린 세계에서 대안을 찾아 여러 실험이나 시도를 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비장하기보다 매우 귀엽고 역동적으로 그려져요. 대상화된 수식어로써 귀엽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힘차게 발길질을 하고 그러다 마음에 안 들면 툭 반말을 해버리기도 하는 모습이 새롭고 기운차다고 할까요. 어떤 소설은 말미에 이르러서야 독자에게 ‘그래,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지만, 정세랑의 소설은 이미 인물과 내가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활달함을 줍니다.
양윤의 저도 읽는 내내 참으로 사랑스러운 소설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 정세랑식 SF의 특성이 연애와 상상을 절묘하게 잇는, 일종의 초연결망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겠지요. 저는 표제작과 더불어 「리셋」을 흥미롭게 읽었는데요, 거대 지렁이들이 출현해 지구를 덮어버린 시대를 그린 소설이에요. 레이철 카슨(Rachel Carson)의 지렁이 네트워크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이근화 시인께서 윤리의식에 주목하시기도 했는데, 우리는 흔히 윤리의식을 이성적 판단으로 여기지만, 그 의식이 몸의 감각과 한껏 결합하지 않으면 실천은 불가능하잖아요.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정세랑이 말했듯 ‘비위(脾胃)’라는 몸의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어요. 대다수 사람들이 거대한 지렁이나 지렁이떼를 떠올리면 비위가 상할 텐데, 소설 속에서는 “오리를 죽여 개에게 먹이는” 것이랄지 “인류가 다른 종들을 노예로 삼고, 학대하고, 말살”(81면)하는 것이 더 끔찍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소설을 덮고 현실로 돌아오면 지렁이가 아무리 비옥한 땅을 만들어준다 한들 여전히 비위가 상하는 게 사실이거든요. 여기서 보건대 문화적 통념이나 ‘커먼센스’가 비위를 건드리고 거부감을 일으킬 만큼의 윤리의식으로 체화되고 변화할 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리셋’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할 수 있을 것 같고, 작가가 그런 미래를 그리려 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근화 「리셋」에서 특히 기발한 대목은 거대 지렁이를 피해 숨은 인류가 더이상 섹스를 하지 않고 쾌감 패턴을 누린다는 것이었어요. 곳곳에 이런 재미있는 진술이 엿보이는데요, 예컨대 「미싱 핑거와 점핑 걸의 대모험」에서 “과거는 생각보다 재미없어. 위험하고 더러워”(10면)라는 대사랄지 「11분의 1」에서 “너 그러다 망한다? 그렇게 원칙도 윤리도 없이 막살다가 망한다?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지구가 끝난 거다?”(39면)라는 대목이 그러합니다. 읽는 이로선 너무 통쾌한 거죠. 인공 지구를 만들어낸 디자이너를 찾아가 죽이고 그런 혁명의 서사를 바탕으로 관광지로서 성공을 거두는 이야기(「모조 지구 혁명기」)도 그렇고요. 위험하고 더럽고 원칙 없는 세계에 현재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런 진술과 서사에서 얻어지는 쾌감이 있어요.
양경언 저도 그런 진술이 흥미로웠습니다만 한편으론 인물들이 어떤 연결이나 관계성이 자신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상황을 경계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언급하신, 과거가 위험하고 더럽다는 단절의 표현이나, 섹스를 다른 이와 물리적인 접촉 없이 혼자만의 감각 패턴으로 즐기는 장면 등은 지금 이 순간의 개별화된 존재를 존중하는 과정이 자칫 사회적인 감각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비롯될 수 있는 오염, 뒤섞임, 불순함을 저어하는 상황으로 연출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요. 그럴 때 인물은 자신이 문제라고 여기는 사회의 구성원이 아니라 거기서 빠져나가 사회를 대상화할 수 있는 자리에 있게 되고요.
이근화 인간중심주의가 무너지고 왜소해진 인간들이 미래 지구에서 무척 소심하게 살아간다는 전망에는 저도 수긍이 되지만 정세랑식 세계관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 지구가 그렇게 쉽게 ‘폭망’할 것 같지가 않거든요. 더 오래오래 고통받고, 훨씬 많은 사람들이 괴로움에 빠진 채 처참함을 견뎌야만 할 것 같아요. 최악으로 가기까지의 과정이 더 길고 끈질기게 이어지리라 생각합니다. 정세랑식 낙관적 시선이나 전망, 인간에 대한 기대 같은 것에 쉽사리 동의되지 않는 까닭이지요. 잘될 거라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그와 다른 국면도 좀더 그려져야 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양경언 작품이 결론을 향해 매끄럽게 안착하는 리듬을 갖추고 있어서 부러 그런 혐의를 품어보기도 하는데요. 말씀처럼 환경문제를 비롯해서 자본주의가 낳은 여러 문제는 좀처럼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반면, 소설에서 세우는 대안 내지 인물의 대처는 말끔하게 딱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요. 「11분의 1」에서 ‘남선 오빠’를 향해 “그러다 망한다?”라고 고함을 지르던 화자가 결국 우주로 날아가서는 “이제 격렬했던 흔들림은 다 끝났습니다”(39면)라고 서술하잖아요. 「목소리를 드릴게요」에서도 ‘승균’은 자신이 ‘연선’에게 중독되었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일단은 연선을 만나러 가는 ‘기회’를 얻기 위해 자신의 성대를 제거하기로 가뿐히 결정하고요. 참담하고 이상하게 돌아가는 세상일지라도 일단 내 주변부터 붙잡고, 사랑과 선을 지키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모습이에요. 엉망진창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일이란 그 엉망진창이 남기는 지저분함을 감수하며 사는 일과 다를 바 없을 텐데, 정세랑의 작품은 거기까지 깊숙이 들어가지 않는 편을 선택해요. 오히려 툭 끊어내는 것 같아요.
양윤의 그런데 정세랑식 상상력 속에서는 그런 끊어냄마저도 사랑의 표현이 아닐까요. 이를테면 거대 지렁이들로 인해 문명이 절멸하는데, 사실 지렁이의 목적은 인류를 잡아먹는 게 아니라 지구를 황폐하게 만드는 시설들을 자연으로 되돌리는 데 있었거든요. 그건 말끔하게 끊어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비위’를 되살려내는 것, 요컨대 감각과 윤리를 결합한 장소에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결국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기에 이 삶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는 계속 남는다는 것이지요. 이때의 사랑이란 꼭 로맨스만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연대를 상상하게 하는 힘이기도 하고요.
이근화 저는 좀 터무니없는 요구가 될 수도 있겠지만 아주 질 나쁜 인물이 나왔으면 싶어요. 여기 등장하는 남성들만 봐도 다 ‘식물성’이잖아요. 어떤 선한 의지 같은 게 남다른 인물들이죠. 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데, 여성이든 남성이든 한 인간의 내면에는 어쩔 수 없이 들끓는 정념과 모순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게 한 방향으로 가지런히 정리되는 문제도 아니고요. 선악의 차원은 물론이거니와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어도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벽은 견고하지요. 그런 부딪힘이 조금 적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런데 무리한 요구라고도 여겨지는 게, 아주 거칠고 폭력적인 인물이 등장한다면 아무래도 지금과 같은 정세랑 풍은 아니게 되겠지요. 생각해보니 디스토피아를 그려내는 작가들이 더 많으니까 정세랑은 우리가 사랑하는 작가로 내버려둬도 될 것 같습니다.(웃음)
양윤의 다양한 분야에서 성과를 내온 작가다보니, 이 한권만으로 정세랑의 세계를 조망했다고 보기는 어렵겠습니다. 저한테는 이 자리에서 SF를 다룰 수 있다는 것 자체로 즐거운 경험이고요. 그런 면에서 정세랑 작가의 이번 소설집이 우리에게 ‘목소리’ 하나는 충분히 내어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천희란 『자동 피아노』(창비)
양윤의 다음으로 천희란의 소설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저는 읽으면서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라는 쌔뮤얼 베케트(Samuel Beckett)의 문장이 떠오르기도 했어요. 전통적인 서사나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의 계보에 든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작가의 말’을 염두에 둔다면 현실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 있는 사실적인 소설로 볼 수도 있고 다양한 방식의 해석이 가능한 작품인 것 같습니다.
이근화 저는 이 작품이 무척이나 어려웠어요. 상황과 맥락을 소거한 채 ‘죽음’을 다루고 있어 그런 것 같습니다만 이런 저의 관점이 고루해서 섣부르게 말을 꺼내기가 좀 두렵네요. 어쩌면 제가 죽음에도 음악에도 무지해서 이 작품에 대해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보게도 되고요.
양경언 그럼 가벼운 이야기부터 시작해볼까요. 챕터마다 ‘네개의 발라드 Op.10’ 같은 음악이 적혀 있는데요. 언젠가 찾아서 들어봐야겠다 싶었는데 천희란 작가가 애플뮤직에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두었더라고요. 독자들한테 좋은 안내가 될 것 같아요.
양윤의 우선 ‘자동 피아노’라는 제목을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자동 피아노는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기록해 연주 당시와 똑같은 음을 재생하게끔 고안된 장치이지요. 말하자면 연주자 없이 자동으로 연주되는 피아노입니다. 통상적으로, 말은 의사소통의 기능을 하잖아요. 이것은 말이 사회적인 의미에 종속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자동 피아노’라는 상징은 다른 방식의 말하기를 은유하죠. 의미가 아니라 음향이나 음색, 리듬이나 선율로 존재하는 영역이 음악의 영역이고, 소설도 언어예술인 이상 음악과 공유되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에는 언제나 의미가 따라오죠. 표현이 의미의 그림자가 아니라 의미가 표현의 그림자가 될 수도 있거든요. 『자동 피아노』는 이 자리에 도달함으로써 오히려 고통의 자동성을 말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너무 고통스러운 사람은 무엇이든 말하는 법이거든요.
이근화 읽으면서 내내 글렌 굴드(Glenn Gould)가 생각났어요. 그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소음 속에서만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다고 말하며 연주회가 아니라 녹음에 몰두했지요. 연주할 때 발소리를 내거나 흥얼거리는데, 저는 그것도 연주의 일부라 느꼈어요. 이 소설에서 음악과 죽음의 글쓰기도 떼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분리 불가능성이 독서의 어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인 것 같기도 해요. 한편으로 저는 설득당할 준비가 되어 있고 설득을 기다리는데 작가가 그걸 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단단하고 유려한 문장에 비해 그것이 한 목소리로 여겨지지 않는 점이 특이하게 느껴졌습니다. 한 방향으로 정향된 목소리가 아니었어요. 기록이 고통을 음악처럼 흐르게 한다면 내용이 아니라 태도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데 그 자세를 구체화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초월적 대상을 찾아 헤매거나 구원의 가능성을 쉽게 마련하지 않는 태도에 대한 신뢰감이 생겨서 작품을 끝까지 놓지 않고 읽을 수 있었고, 그 독서가 마련해주는 믿음의 영역이 있었어요.
양경언 네, 확실히 읽기 수월한 소설은 아니지요. 소설의 화자는 고통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멈추면 바로 자신의 호흡마저 꺼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 내지는 위태로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출구 없는 고통 속에서 계속 웅얼거림으로써 길을 내려 하는 이의 몸부림처럼 보입니다. 그렇다고 출구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는 모습은 아니고요. 오직 그 안에 웅크려서 생각의 힘으로 견디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딘다. 견디고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의 의미가 혼동된다. 그에 관하여, 그의 고통에 관하여, 나는 끝내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38면) 같은 대목이 등장하게 됩니다.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이지만 계속 써나가야 한다는 자기추동의 과정이 엿보여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끊임없이 이야기해야지만 죽지 않을 수 있는, 고통의 한가운데 있는 자의 기록이라고 생각됩니다.
양윤의 그 말씀을 들으니 언어화할 수 없는 고통이 음악과 닿아 있는 지점을 짐작할 수 있겠네요. 음악이 고통 가까이에 있다고 이야기 한 끼냐르(P. Quignard)의 말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제가 앞에서 말한 언어가 한편으로는 음악과, 다른 한편으로는 고통과 연결되는 셈이죠. 음악과 감정, 둘 다 비언어의 장소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언어가 가닿을 수 없는 지점에서 비언어인 음악과 작가의 비명이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음악이 문학과 미학을 공유한다면, 고통은 문학과 감응(affection)을 공유하지요. 예를 들어서 2장(스카를라티, 소나타 라단조 Kk. 9 “전원곡”)의 항목은, 중간 중간 “단언하지 않겠다” “사랑하지 않겠다” “죽고 싶다” 이런 말들로 단락을 시작해 죽 이어가면서 의심하고 좌절하고 사랑하고 슬퍼하는 감정의 미세한 흐름을 말의 리듬으로 변용시킵니다. 이때 저 단언 혹은 선언은 실제로는 단언이나 선언이 아니라, 유려한 음악을 끌어내는 도입부이자, 그 대조된 말들을 통해서 일종의 리또르넬로(ritornello) 형식을 도입하는 ‘반복’입니다. 우리의 감정도 그렇게 일렁이는 것이지요.
이근화 ‘작가의 말’도 흥미로웠어요. ‘내가 노래를 연주할 때, 그 노래는 거기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이라는 제목 아래 이 소설을 왜, 어떻게 썼는지 경험들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작품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이 후기가 없었다면 작품이 어떻게 읽혔을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물론 이 지배력까지도 작품일 테지만, 작가의 말이 이 책의 다른 독해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어요.
양경언 독자가 소설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할지 고민을 계속 요청하는 작품이에요. 권두에 “나는 지금 증언을 하고 있는 것이지 설득하려는 게 아니다”라는 장 아메리( Jean Améry)의 문장이 인용되어 있기도 한데요. 화자는 엄청나게 큰 소리로 무어라 외치고 있는데, 그 높은 데시벨이 외려 다른 사람한테는 잘 안 들리는 목소리일 수 있거든요. 그런 차원에서 저는 작가의 말이나 해설, 나아가 표지 이미지까지도 모두 하나의 작품으로 이해됐어요. 작품에서는 이것이 허구인지 아닌지 계속 헷갈리게 혼종된 서술이 읽히는데, 작가의 말을 읽음으로써 모두 자전적인 일이라고 쉽게 해석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도 하죠. 그런데 그게 또다른 질문을 낳아요. 고통이 드러날 때 연출이나 기획 없이 가능한가, 날것의 고통은 무엇이고 언어화되는 차원은 어디까지인가 같은. 그런 효과 때문에라도 작가의 말이 의미있는 것 같습니다.
양윤의 그런데 의외로 문장은 그렇게 관념적이거나 난해하지 않아요. 단정하고 깔끔한 단문들입니다. 문장 자체가 아니라 그 문장이 결합되어서 하나의 진술로 읽힐 때 독해의 어려움이 생겨나는데요, 이것은 말의 부정 반복, 다시 말해서 앞에서 한 단언을 바로 뒤이어 부정어를 덧붙여 반복하는 방식에서 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테면 “너는 매일 죽음을 생각했다”(54면) 한장 건너서 “이제는 죽음을 생각해도 아무렇지 않았다”(55면), “멈출 수 없어서 멈춰 서고 싶었다. 하나 멈춰 서서는 안 된다”(59면)처럼요. 전달된 의미가 곧바로 부정된다는 사실 자체가 핵심이라기보다는, 그런 교차를 통해서 어떤 양가감정, 이를테면 죽음에 대한 공포와 거절, 상처에 대한 불안과 극복 같은 것이 드러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치 피아노의 검은 건반과 흰 건반이 온음과 반음들을 교직해나가듯이 검은 글자와 흰 종이 사이에서 음들이 조율되어가고 있어요. 음악과 언어, 의미와 비의미라는 문제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유비로 구성되었다는 생각이 들고, 자기의 소설론과 예술론을 끝까지 밀고 나간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양경언 문장에 있어 앞선 진술을 계속 번복하면서 자기 말에 취소선을 그으려는 시도가 독특하게 다가왔습니다. 또 흥미로웠던 것은 “사람들은 옷장에 무서운 것이 있는 것 같다면서 옷장 문을 연다. 거기에 무서운 것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45면) 같은 대목인데요, 옷장은 커밍아웃(Coming out of the closet)과 연관되어 쓰이거나 공포물에서 이질적인 세계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그려지는 등 다른 세계로 향하는 통로를 상징하곤 하잖아요. 화자는 장악하려고 해도 장악되지 않고 단선적으로 정리되지 않는 사태 속에 있지만, 이런 대목을 통해 자신이 여기에만 머물지는 않을 거라고, 그걸 자신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이근화 저는 개인적으로 작품 안에 일정한 시간과 공간이 주어지지 않으면 잘 안 읽히는 편인데요, 말씀을 듣고 보니 시간과 공간이 탈각된 점, 진술의 번복이나 내면의 웅얼거림 자체가 이 소설의 주요한 특징이 될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조금 뜬금없는 얘기지만, 이 책 번역을 해보면 어떨까 싶어요. 번역을 통과하면서 원본의 실험적인 언어들이 가지고 있는 방향성이나 아름다움이 더 부각되고 또렷해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양윤의 번역된다고 가정해보니 벌써 다른 온도가 느껴지기도 하네요. 이 소설을 내놓으며 작가가 하나의 방향으로, 한 음으로, 단일한 멜로디로 해석될까봐 얼마나 두려워했는지가 여실히 느껴졌어요. 눈물이 날 정도였는데요, 저희 대화에서도 마지막까지 단일한 해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작가한테는 오히려 힘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유림 『양방향』(민음사)
양윤의 시집 이야기도 나누어보겠습니다. 『양방향』은 김유림의 첫 시집입니다. 읽는 내내 시어를 벽돌처럼 하나하나 쌓아가는 나름의 축조술을 지녔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렇게 건축물을 세워가다가도 어느 순간 빈틈이나 균열을 내보이고 이를 통해 그동안 쌓아온 건축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전략이 이 시집의 핵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떻게 읽으셨어요?
양경언 첫번째로 실린 「죽음과 티코」부터 인상적이었습니다. “티코는 검은 초콜릿에 싸인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이다”라는 한행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인데, 언뜻 봐서는 단순한 사실 진술에 불과하잖아요. 그런데 ‘죽음과 티코’라는 제목과 연결되면서 다른 차원의 인식이 촉발됩니다. 아이스크림은 결국 녹아 없어지고 말 것이라는 연상, 나아가 티코가 아이스크림 제품명인 것을 모르면 이 시가 어떻게 읽힐까 하는 의문으로까지 이어지지요. 이를테면 자동차 ‘티코’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은 교통사고랄지 다른 죽음을 떠올릴지도 모르잖아요. 우리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하나의 방향밖에 없다고 믿는 것 속에 이미 다른 방향성과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이근화 그런 방향성과 가능성에 대한 시적 탐구 때문인지 ‘걸음’이나 ‘생각’, ‘상자’ 같은 시어들이 많이 등장하지요. 시집에 걷거나 어딘가로 들어가는 대목이 굉장히 많이 나오더라고요. ‘생각하다’라는 서술어도 그렇고요. 일상 공간인데도 생활인으로서가 아니라 여행자로서 살아가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위태로움과 불안이 많이 느껴졌고, 외부를 향한 관심보다는 마음의 관찰자로서 시가 쓰였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양윤의 여행자이자 관찰자로서의 시쓰기라는 평이 흥미롭네요. 표제시인 「양방향」에서도 외국의 거리를 산책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 시는 서울과 닮은 그 거리에선 모두 외국인이고 그들이 보기에는 나 또한 외국인이다, 하는 식으로 양의성을 띤 채 흘러가요. 그런데 마지막 대목에 이르면, 산책 중에 던진 나뭇가지가 “돌아오지 않았으며/그것은 새롭게 발견한 산책의 용도였다”라는 식의 일의성을 불쑥 드러냅니다. 양방향성이 흐트러지면서 무너지고, 이를 통해서 평온한 일상이 기우뚱해지는 거죠. 우리의 일상이 양쪽에서 팽팽히 당겨져 균형과 평형을 이루는 듯하지만 실은 동요나 균열을 내포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양경언 시집의 제목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인 듯합니다. 양쪽 방향에서 어떤 접점을 향해 들어오는, 서로 만나고 겹쳐지는 지점을 그린다기보다 계속 평행을 이루는 ‘양방향’으로 이해되거든요. 가령 「공원이 아닌 나무 세 그루」에서는 “공원은 공원이고/나무 세 그루는 세 그루로” “서로에게/서로 서로/만큼이나 멀고” 등 나무들이 겪은 개별 사태를 진술하면서 총합적인 공원의 풍경으로 묶이는 걸 거부해요. 이런 대목들에서 위태위태한 감각이 유발되는데, 화자는 이 위태로움과 난처함을 혼자 처리하고 감당해야 하는 상태에 놓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시에서는 아예 시인 자신의 이름을 등장시켜 말을 하기도 해요. “가고 싶지 않아서 멈춘 게 아니라는 김유림 씨”(「확실히 서울」)처럼요. 시인 자신을 연극무대에 올리듯 연출하는 셈인데, 시의 화자, 인물 자체를 김유림으로 봐달라는 요청이 강하게 전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화자가 다른 인물과 만나거나 대화를 하는 것보다 그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어떤 대목들은 희곡의 지시문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이근화 두분의 이야기를 들으니 시집 제목이 ‘양방향’인 까닭이나 가끔씩 출현하는 비문의 이유, 일순간 방향성을 탈각하는 문장들에 관해 의아함이 많이 해소됩니다. 확실히 연극적인 요소가 많은 시집이라는 점에도 동의하고요. 또 하나 제가 흥미로웠던 것은 시인이 현재보다는 미래에, 즉 가정의 세계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었어요. 「모래 바구니」에서는 “긁어낼 수 없는 생각의 모래알이 있”고 “이야기의 해변에서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유년의 일을 구성해 모래성을 쌓으려 한다”라고 진술하거든요. 짐작건대 김유림은 실재의 현실보다 자신의 생각이나 내면에서 미래를 구현해내는 방식에 더 관심을 품고 있는 것 같아요.
양윤의 최근 젊은 시인들이 자신의 시에서 자기 이름을 호명하는 것을 자주 발견하게 되는데, 김유림 시 속의 자기투영적 장치와 연극적 특성도 연결해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근화 시인께서는 시제와 시간성에 대해 언급하셨는데요. 「재생 주택」에서도 “2063년 5월 1일” “2002년 8월 27일” “2034년 1월 1일”과 같이 과거와 미래의 시점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모종의 긴장을 자아내지요. 마지막 행에서 “그렇게 일기 쓰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하는데요, 이 역시 건축술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서로 다른 시점들을 벽돌처럼 쌓아가는 방식이니까요.
이근화 가정형의 시제와 관련해 제가 특히 주목해 읽은 작품은 「수영해 들어간다」입니다. 이 시는 실제 확정된 사건이 아니라 가능성의 영역을 그리거든요. “사람이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다/뛰어들 수도 있고 발부터 적실 수도 있다”라고 가정하면서 막판에는 “이 바닥은 매우 쓸쓸하고 매우 차갑고 매우 단단하다”라고 하지만, 수영장에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감각으로,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진술을 해나가는 방식이 굉장히 독특하게 다가왔어요.
양경언 혹시 그런 가능성의 영역마저도 화자에게는 리얼리티가 아닐까요. 그 시의 첫행에서는 “나는 너른 풀장 한가운데로 수영해 들어간다”라고 비교적 확정적인 진술을 하는데요. 겉으로 보기에 수영장에 들어가는 것은 단순하고 확실한 행위이지만, 화자는 자신이 겪고 있는 이 현실을 신뢰하고 안착하기까지 이런저런 가능성의 영역을 아주 열심히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것 같습니다. 즉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 것이지요. 믿지 않으니까 헤엄을 치면서도 무슨 일이 벌어질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식으로 생각이 뻗어가게 되고요. 과거와 미래가 혼재되는 시간성에 비해 공간은 구체적이라는 점도 이런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마레지구나 오오사까, 앙코르와트 등 구체적 장소를 평면적으로 제시하고 있잖아요.
양윤의 전체적으로는 그런 일련의 진술들이 ‘어긋남 속의 이어짐’이라는 점에서 현실의 단속(斷續)을 보여준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삶에도 무수한 단절과 연속이 있잖아요. 그 점이 이런 방식의 부조화 혹은 불안정으로 형상화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인지의 부조화, 감정의 부조화,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다는 식의 공간감각의 부조화가 드러나는 셈이죠. 김유림의 시가 자아내는 서스펜스, 부자연스러운 느낌의 지속, 불안의 항상성 같은 것이 드러나는 방식입니다.
이근화 구체적인 장소가 제시되지만 끊임없이 현실을 의심하는 태도라면 첫 시집으로서 매력이 충분한 것 같습니다. 「사랑과 꿈과 야망」에서 아무것도 없는 흰 접시를 탐구하는 자세나 「미래의 돌」에서 검게 탄 아이가 산으로 들어간 이후의 사건을 다루는 방식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어찌 보면 자신이 밟고 있는 땅에서 5센티미터쯤 떠 있는 것 같아요. 아주 약간의 부양이 김유림의 개성이고, 앞으로의 작품활동을 기대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영재 『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창비)
양윤의 이번에도 첫 시집입니다. 젊은 시인들의 첫 시집을 함께 다루다보니 서로 연결해 읽을 만한 지점도 생길 것 같습니다.
양경언 앞서 김유림이 사실 진술에 안착하기 위해 이런저런 가능성까지도 화자 자신의 현실로 끌어들이고 있다고 평했는데, 이영재는 사실 진술에 맞서 싸우는 쪽인 것 같습니다. 제목부터 ‘되는’ 것도 ‘된’ 것도 아닌 ‘되어가는’이라고 하잖아요. 이 시인에게는 무언가를 자세히 관찰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의 에너지가 열전도처럼 움직여가는 과정 자체를 무엇이라고 부를지가 중요한 문제로 보여요. ‘되어가는’ 상태에 관심을 두는 시선이 독특하게 다가옵니다.
이근화 그런 이유로 산문적인 진술이 많이 쓰이는 것 같습니다. 「이 사과는 없다」는 총 8면에 걸쳐 있습니다. 있다 없다를 반복하는 등 부정과 번복과 재진술의 방식으로 쓰인 시들이라서 편편이 말놀이랄까, 언어 게임을 하는 것 같아요. 비탈에 비스듬히 서 있는 사람을 보다가 “나는 모카빵을 씹는 비스듬이다 그런데 저 비탈의 비스듬이, 저 사람의 비스듬이어도 좋은 걸까”로 이어지는 「모카와 모카빵」 같은 시가 그렇습니다. 시를 읽으면서 굉장히 흥미로운 게임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양윤의 「슬럼」에서도 그런 언어유희가 돋보이는데요. ‘슬럼, 어슬렁거리다, 슬럼프’ 같은 말에서 시작해서 ‘슬럼프에 빠지다 → 통조림을 파먹다 → 구덩이를 파다’로 이어지는 기표들의 사슬을 거쳐 “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로 이어지는 연상의 흐름이 상당히 재미있어요. 「새의 간격을 보며」도 마찬가지고요. 새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 새를 바라보고 있는 나와 옆 사람, 즉 우리의 이야기예요. “벤치의 우연한 개괄”이 두 사람의 어색한 관계를 설명해주지요. 언어를 세련되게 사용할 뿐 아니라 상황구사력이 뛰어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양경언 저도 「새의 간격을 보며」를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리듬감을 상당히 고려하고 있어요. “포옹과 포옹과 포옹과/포옹과 포옹과 과정과 인력과 마찰과” 하는 식으로 계속 시어의 속도나 에너지를 올려가지요. 그러다가 후반부에는 “우리는 사실이 되고 싶어/사실이 되고/있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사실이 “되고/있”는 것이지 그 자체로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키려는 것 같아요. 되어가는 상태에 있는 자기를 연기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정의 내리지 않고 단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시어를 구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계속해나가는 것 같습니다.
이근화 시적 발견이 자기를 투영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이나 특정한 상황을 진술하는 움직임 속에서 이루어진다면, 젊은 시인들은 끊임없이 그 발견을 유예하면서 자기연출의 과정 자체를 보여주고 어떤 태도를 구축하는 데 관심이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실험의 자세가 발견의 시선보다 항상 급진적인 것은 아닙니다만 이 시집은 확실히 실험성이 부각되어 보입니다.
양윤의 저는 이 시인이 오규원과 이수명의 계보를 잇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깨지기 직전의 유리컵」이라는 시 한편만 보아도 바로 연상되거든요. 이 시는 거의 오규원의 「안락의자와 시」(『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문학과지성사 1995)의 오마주입니다. 여기에 “개미들이 평소를 이쪽에서/저쪽으로 옮겨두었다”(「흰검정」)처럼 관념어를 사물로 다루는 이수명식 표현법도 자주 눈에 띄고요.
양경언 그 점이 용감하게 보여요.(웃음) 대개 첫 시집에서는 자신의 개성적인 목소리로 존재감을 알리고자 하잖아요. 자신에게 어떤 시인이나 작품이 영향을 끼쳤는지를 일찍이 드러내는 순간, 거기에 붙잡혀 있기 십상이니까요. 하지만 이영재는 앞선 시인들의 방식을 체화하면서 동시에 자기만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일에 많은 힘을 들여요. 끝까지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는 절망을 거론하면서 ‘반성’을 중시하는 시인으로 김수영을 떠올릴 수 있다면, 이영재는 「잔여」에서 “잔여를 남겨둔다. 의미는 아니다. 이건 반성에 관한 것일까. 아니어도, 뭐”라거나, “중간에서, 중간을 탓하며, 완벽한 우리가 힘을 완화하고 있다 완화의 뒤엔 인위적으로 교육받은 반성이 반성을, ……, ……, ……, 반성을 위태하고”, “반성으로 이루어진 인간을 본 적 없다”라고 하면서 문학사에 기입되어 있는 ‘반성’을 다시 보게 만들어요.
이근화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작품으로서 「그릇되는 동안」 「환하고 더딘 방」 「흰 벽」 「마당을 쓴다」 「깨지기 직전의 유리컵」 등의 작품이 특히 좋았어요. 그런데 저는 이 시집을 죽 읽으면서 마치 미로에 빠진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산문적이고 게임 같다는 게 좋은 의미에서만은 아니고 좀 잡다하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맥락을 못 잡고 헤매게 된달까요. 독법을 마련하여 추동력을 얻게 되기까지 진입장벽이 좀 높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건 스타일과 코드의 문제일까요. 어쩌면 그것 자체가 시인의 의도였겠구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는데요. 미로라는 게 그 안에 있을 때에는 혼란스러운데, 멀리서 전체를 조감하면 완성도나 미적 감각을 느낄 수 있지요. 시인이 자신의 시를 한편 한편 읽기보다 한권을 통으로 읽게끔 독법을 유인해낸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양윤의 시집 전체에서 방법론이 일관된다는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초반부터 흥미로웠는데요, 예를 들어서 두번째로 배치된 「내가 알던 A의 기쁨」에서 캔 속에 든 콜라와 콜라 속에 있는 탄산, A와 a, 그리고 a 속의 감정에 유비되는 건 신선하게 읽혔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일상적인 언어 용법에서의 일탈을 시적 효과로만 삼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들었어요.
양경언 이 시집을 미로로 본다면, 시인의 행위를 중심이나 목적지, 출구인 곳에 가닿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런 반복이 중첩되는 것일 테고요. 미로에서 헤매는 것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헤매는 과정 중에 있을 때에만 자기가 존재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탈출을 지연시키려는 움직임을 드러내는 것 같아요. 「이 사과는 없다」를 보면 화자가 스크럼을 보고, “스크럼 너머에서 구워지는 고기”를 봐요. 얼핏 소소한 풍경이나 단상을 묘사하는 것 같지만 시가 굉장히 길게 이어지는 와중에 “동창이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죄책감이 들었다거나, “폭죽이 터”졌지 “폭탄이 아니”라거나, “미워하고 싶지 않”고 “모두의 오해여서 다행”이라는 둥 아주 복잡한 이야기가 펼쳐지거든요. 화자는 이러한 상황을 정확히 어떻게 명명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있기로 한 것 같아요. 단지 자신이 그곳의 일부일 뿐임을 인정하는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양윤의 저는 말들을 장난감처럼 다루는 방식에서 천진한 유머랄까, 엉뚱한 반문이랄까를 느꼈어요. 「조화」는 긴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요, 염소와 닭과 나의 삼각관계를 재미있게 풀어가고 있거든요. 염소는 뿔이 났으니까 화를 내고, 닭은 벼슬이 있으니까 위신을 세우고요. 염소와 닭, 이 둘은 손이 없으니까, 이건 손〔手〕이자 손님〔客〕이 없다는 뜻인데 그래서 한가하고, 이런 식으로 유머가 계속되죠.
이근화 글쎄요, 저는 이 시집에서 유머가 발견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뭐」 같은 시를 보면 그냥 편하게 쓴 시 같거든요. “여름이니까/뭐, 꽃도 피고/사람도 죽”는다거나, “기다리는 척”을 할 뿐이라는 식의 진술이 가볍게 읽힙니다. 다른 시와는 확연하게 다른 간소한 진술이라 굉장히 튀더라고요. 자신을 긴장 없이 드러내는 이 시에서 특이한 파토스가 느껴졌어요. 이 시인에게 유머는 특정 작품이나 구절에서가 아니라 자기 몰두의 자세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양경언 그렇지만 「정물 b1의 당위」에서 마지막에 “아, 토마토” 하고 끝을 맺을 때에는 확실히 웃음이 나던걸요. 한껏 자세를 잡고 진지하게 오규원 시인을 떠올리게 하는 진술을 펼치다가 마지막에 탄식하듯 내뱉는 거예요. 더 중요한 것을 깜빡했다는 듯 “아, 토마토”라고요.
이근화 사실 첫 시집을 낼 때까지도 시인은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상태가 아닐까요. 저는 뭘 쓰고 어떻게 쓰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뚜렷한 앎이 없는 채로 첫 시집을 냈거든요. 이영재는 그보다는 좀더 아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비교적 잘 개관하고 있고, 기술이나 형식에 관해서도 고민이 넓고 깊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그만큼 열도(熱度)가 있다는 뜻일 텐데, 그 열도가 부럽기도 하고요.
신해욱 『무족영원』(문학과지성사)
양윤의 마지막으로 다룰 시집은 신해욱의 『무족영원』입니다. 시의 여백까지도 가져다 쓴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팽팽한 감정과 파토스를 만들어낸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시인의 네번째 시집인데 그야말로 어떤 경지에 이르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양경언 저도 이 시집이 독자에게 미치는 감정의 자장이 어마어마하다고 느꼈어요. 무엇보다도 시인이 어떤 언어를 쓰든지 간에 두려움이 전혀 없다고 느꼈고요. 사유의 방식에 있어서도 머리를 쓰는 게 아니라 마치 물질을 그대로 통과하는 것만 같은 남다른 방식을 활용하는구나 싶었어요. 그래서인지 감각적인 면이 함께 승하는 언어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시집의 제목인 ‘무족영원’은 땅속에 사는 양서류의 한 목(目)이라고 해요. 지렁이와 닮은 이 발 없는 생물들은 깜깜한 지하에서 땅과의 접면에 어떻게든 자기 감각을 비비대며 살아갈 텐데, 시인도 언어를 그처럼 감각적으로 활용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빛이 없는 곳에서 세계를 어떻게 볼 수 있을지 하는 의문에서 출발해 직접 부딪치고 겪어가며 몸으로 쓴 시라고 해야 할까요.
이근화 굉장히 급진적이고 과격하다 할 수 있는데요, 미학적 아방가르드를 보여주는 매력적인 시집이었어요. 주변적인 것들, 경계에 서 있는 것들을 천착하면서도 관념과 의미를 배제하고 그것을 감각적으로 다루는 데 공들인 것 같아요. 상투성을 격파하고 아름다운 무질서를 세우는 언어의 운용이라 해야 할까요. 단춧구멍이나 가방 속의 구슬 같은 아주 사소한 물건들을 대담하게 다루면서 의미와 공감대를 만들어내고, 아케이드, 햄릿상자, 마술피리, 키르케, 클론, 옥텟 같은 것들을 들여와서도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감각을 분명하게 거느리고 있어요. 결국 무엇을 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인데, 묘한 불균형과 부조화를 자신의 개성으로 삼는 탁월함이 있지요. 생물학사와 생물철학에서 사용되는 은유를 연구한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작업이 생각났어요. 개체와 집합, 여성과 남성, 인간과 동물, 생물과 기계 등의 이분법을 깨고 혼종적 존재들에 관심을 갖고서 다른 삶을 구상하는 전투적인 여성입니다.
양윤의 표제시 「무족영원」에 “음을 영원히 놓친/가수의 표정”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제목의 중의성과 맞물려 우리가 영원(永遠)을 얼마나 운명처럼 안고 살아야 하나 생각하게 해요. 나의 노래가 음을 잃어버린 채 영원히 주변을 떠돈다는 것, 내가 부르고 싶었던 노래는 이제 복사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시인의 시론일 수도 있겠고요. 그래서인지 언어 사용의 방식도 굉장히 독특한데요. 「파훼」를 보면 “흙이. 숲이. 습함이. 병듦이.” “병듦이. 붉음이. 시듦이. 슬픔이.” “보잘것없는 상념이. 건조불멸의 시름이. 어지러운 빈혈의 마음이.” 하는 식으로 시구가 이어지는데, 이 정도면 거의 엑스터시 상태에서 흘러나오는 방언이 아닌가 싶었어요.(웃음) 음절이 조금씩 늘어나며 생기는 리듬감, 음운이 가진 각각의 어감이 살려내는 의미는 정말 말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솜씨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양경언 신해욱은 언어의 밭에서 한국어의 가능성을 경작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이죠. 「천변에서」를 보면 천변에 주저앉은 사람의 시선이 자꾸 “동그랗고/작고” “차갑고/말랑말랑하고/당돌한 것들”에게로 가닿아요. 주저앉은 것을 회생 불가능한 무너짐이나 낙담의 포즈로 설명하지 않고 기다리는 자세로 표현하고요. 그러면서 이 생각의 경단을 나누어 먹자고 하는 것을 보면 수직적인 힘이 수평적 힘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산발인 머리를 하고 있더라도 냉소하지 않고, 나눠 먹을 경단에 머리카락이 섞일지 모르니 우선 머리부터 땋아주자고 말하는 에너지 같은 게 느껴집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부싯돌이 확 불을 일으키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제의적인 진술처럼도 여겨져요.
이근화 어려움을 뚫고 나가는 에너지나 제의적 차원을 저는 엉뚱함으로 보았어요. 능청을 떨 수 없는 상황에서도 천연덕스럽게 굴고, 끝까지 생각의 끈을 놓지 않거든요. 도저한 허무와 고통에 한 발을 담그고서 다른 발로는 개구지게 구니까 좀 슬프기도 했어요. 그런데 시인이 독특하고 유머러스한 한국어의 활용에만 안주하는 것은 아니고, 동시대의 사회와 문화에 주석을 붙이는 일에도 큰 관심이 있어 보입니다. ‘나는 이렇게 존재한다’의 측면도 개성적으로 발견되지만, 좀더 내밀한 의도는 ‘우리는 이렇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같아요. 소수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이상하고 비틀린 대화인 것 같아도 결국엔 어떤 보편성을 겨누고 있어요. 개인의 내밀함 속으로 빠지지 않고 소통과 연대의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양윤의 그런 차원에서 「조그만 이모들이 우글거리는 나라」가 좋더라고요. ‘이모’라는 존재는 나보다 조금 앞서서 무언가를 겪어낸 사람이라 할 수 있는데요. 이주란의 소설에서 여성들의 연결 가능성을 보았듯 요즘 사랑스럽고 선한 이모들이 한국소설에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도 이모들과 함께 놀고 먹으면서 “우리는 자라서/무엇이 될까”라고 묻는 지점이 한국어의 어감을 독특하게 살려내는 동시에 동시대적인 공감을 자아낸다는 생각이 듭니다.
양경언 동시대성을 말하자면 「악천후」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자기성찰, 책임감의 문제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이 시에서는 나라는 존재가 우리와 대별되고 동떨어지지 않는다는 것, 나는 우리를 구성하는 한 차원이라는 인식을 보여줘요. 그러니까 악천후라는 좋지 않은 날씨를 시대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불가능한 바람”을 품고 무언가를 시도하려는 모습이지요.
이근화 그런데 제가 좀 당황스러웠던 것은 요정이 나오는 대목들이었어요. 「난생설화」 「수안보」 「영구 인플레이션에서의 부드러운 탈출」 등에서 요정이 자꾸 목격됩니다. 상식이란 게 없는 세상에서 머리를 긁적이며 만나게 되고(「홀로 독」), 걸레를 들고 우두커니 서 있는 자세로 대면하기도 합니다(「걸레를 들고 우두커니」). “상한 달걀의” “퇴폐적인 냄새”를 풍기기도 하지요(「드링크」). 이런 시를 읽으면서는 양식을 규정할 수 없는 이상한 건축물들이 떠올랐어요. 저는 모텔이나 까페에 이상한 이름이 붙어 있는 걸 보거나 놀이동산의 환상적인 퍼레이드를 볼 때 묘하게 불편한 기분이 들거든요. 멀리 동떨어진 것을 불현듯 접붙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뒤틀림과 불편함마저도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인가, 그래서 요정의 존재가 필요했나, 궁금증이 생겼어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난데없이 출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고, 그런 삶의 비루함을 드러내는 방식이 필요했던 걸까요?
양경언 몇년 전에 수안보에 가본 적이 있는데요, 자본과 인파가 빠져나간 뒤의 폐허감이랄지 씁쓸함이 느껴져서 쉽게 잊히지 않는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때 누렸던 영광을 되찾기 어려워 보이는 공간이었거든요. 하지만 그곳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어요. 몇 안 되는 손님을 붙잡으면서요. 그런 키치적인 잔여의 풍경이 어떤 지역에서는 제 몫의 역할을 하고 있는 거잖아요. 「수안보」에 “요정은 잘못 든 밤의/잘못 든 숙소를 지키는 것 같았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짠하면서도 희미한 웃음을 남기는 구절로 읽혔어요.
양윤의 노동의 현장을 동화적인 어법으로 묘사한다고 할까요. 전자는 고단하고 희미한데, 후자는 아름답고 환상적이죠. 저는 이런 중층적인 묘사가 이 시집의 동시대성을 역설적으로 부각시킨다고 생각합니다. 동시대성은 서로 다른 시간의 어긋난 결합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이죠. 그 동시대성이 저한테는 이 시집을 읽는 재미였고 이 시집이 제게 건네는 위안이었습니다. 어느덧 마무리할 시간이네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말고 좀더 멋진 왕관(corona)이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근화 재밌고 좋은 작품들을 선사해주신 작가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성장과 변화란 결국 다른 목소리를 참조점으로 삼을 수 있는 개방성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분 덕분에 다시 생각해볼 부분들을 많이 챙겨가는 자리였어요.
양경언 풍성한 얘기를 나눠주신 덕분에 문학작품을 읽는 기쁨을 누리면서 2020년의 문을 연 것 같습니다. 올해의 시작에 자리한 작품들이 가진 알찬 매력 덕분이기도 합니다. 시간 관계상 더 나누지 못한 생각거리들은 이후의 공부로 남겨둬야겠어요. 함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2020.1.28.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