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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어둠의 정원과 밤의 문장들
신용목과 김중일의 시세계
이철주 李哲周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그림자 필경사: 김소연의 시세계」 등이 있음.
vertigo8558@gmail.com
1.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파울 첼란(Paul Celan)의 한 시구를 제목으로 인용한 책1에서, 일본의 사상가이자 작가인 사사끼 아따루(佐々木中)는 작품을 정보로 환원해 읽는 것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정보란 곧 명령이다. 놓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그저 열심히 따르기만 하면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제공하는 정보는 본질적으로 명령과 다르지 않다. 그는 이러한 강박관념에 눈이 멀어 닥치는 대로 정보를 모으는 두 전형으로 비평가와 전문가를 꼽는데,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비평가나, ‘한가지’에 대해서만큼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망상에 빠진 전문가나, 필터를 끼워 정보로 환원된 무해하고 안전한 명령들만을 다룬다는 점에서 공히 비판의 대상이 된다. 물론 비평이라는 행위 일체와 전문가들의 학술적 논의 전체를 싸잡아 부정하려는 의도는 아닐 것이다. 그가 정보화시대에 굳이 힘주어 문학에서의 ‘정보화’를 비판하는 것은 읽는 행위 자체에 깃들어 있는 본질적 ‘위험함’ 내지는 읽은 대로 살지 않을 수 없는 문학의 불가역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지 비평과 연구의 무용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명령들에 기도를 바치는 두 손을 자르고, 책 자체의 혁명적 에너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할 것을 촉구한다.
물론 비평은 “단지 스스로를 폐기처분하는 것에 불과한 자기투영적 형식, 다시 말해 텍스트의 생명에 겸허한 자세로 순응하는 것”2이 아니며, “텍스트의 실존적 사실에 대한 자연발생적인 즉각적인 응답”3도 아니다. 비평은 시대에 따른 문학의 지형도를 그리고 문학에 던져지는 사회적 요청들에 응답하며 문학이라는 담론의 구성적 외부로 기능한다. 작품들을 선별하고 카테고리화하며 아직은 읽을 수 없는 형상들을 소통 가능한 언어로 번역해낸다. 작품들에 내재된 미지의 가능성을 담론의 층위로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작품의 정보화 역시 발생하기도 하는데, 다만 조심할 점은 이렇게 얻어낸 정보란 오직 비평 속에서만 작동하는, 비평이 붙인 네이밍이라는 사실이다. 작품과 정보의 경계를 주의 깊게 바라보는 일을 멈출 때 작품이 지닌 섬세한 호흡과 에너지는 작품의 주된 특징만을 명명하는 비평의 담론들에 휘발되어 자체의 위험함을 잃고 유순하게 길들여진 정보가 되고 만다.
물론 텍스트 자체가 비평의 담론과 코드에 기대어 생산됨으로써 작품을 정보화하여 바라보는 일에 힘을 실어주는 현상 역시 간과할 수 없다. 혁신적인 실험으로 이야기되지만 미학 담론 내부에서는 이미 익숙히 봐온 빈번한 각주나 서브컬처의 항목들을 비롯해 파편화된 문장이나 문화 담론에서 주로 거론되어온 저항전략들이 시집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해서, 비평이 평가하고 해석하기에 용이한 단서들을 작품이 직접 내세우고 있다고 해서 특권적 환대를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최근 시의 경향을 진단하고 문제적 지점들을 논의하는 문예지 지면에서 이같은 ‘특징’을 공유하는 작품들이 좀더 면밀한 읽기에 근거하지 않고 평가되는 것이 아쉽게만 느껴지는 건 이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맥락에 따라 신용목과 김중일의 시를 꼼꼼히 읽어내고자 한다. 하필 이 두 시인을 고른 까닭은 20년 가까운 기간4 동안 이들의 시가 보여준 단단하고도 깊이있는 시세계에 대한 신뢰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등단 초부터 이들이 획득한 분명하고도 개성적인 스타일로 인해 오히려 작품이 충분히 입체적으로 조명받지 못했다는 판단에서다. 2000년대 초 데뷔 무렵에는 두 시인이 미학적 대척점에 서 있다고 평가받았지만, 2010년대를 통과한 지금 이들의 시 풍경은 그렇게 대립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서정적 성찰과 응시를 미학적 관념성과 뒤섞고(신용목), 미학적 모험을 애도와 성찰의 시간 속으로 구부러뜨리며(김중일) 시세계를 단단하고도 풍성하게 다듬었다. 이는 이들의 시를 두고 흔히 언급되는 용산참사와 세월호라는 외부 현실의 문제로 간단하게 치환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시적 변화가 분명한 외적 계기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잠재되어 있던 한 경향의 결과라고 보고 그 내적 동력을 추적해보고자 한다.
2. 서정시인의 ‘관념성’과 미래파 시인의 ‘설화성’
신용목은 등단 초기부터 “군더더기 없이 절제된 이미지와 언어의 조탁에 바탕한 정제된 형식미, 그리고 현실 인식과 상상력의 팽팽한 긴장”5을 갖춤으로써 “서정시의 근본적 세계관과 본질적 조건에 충실”6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200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소위 미래파 시인들과는 선명한 대척점에 설 수밖에 없었는데, 그럼에도 일부 논자들은 신용목의 시가 서정시의 일반적 경향으로부터 어긋나 있는 지점들에 대해서도 빠뜨리지 않고 언급해왔다. “2000년대 다른 젊은 시인들의 시에 비하자면 상대적으로 현실의 실감이 상당히 남아 있기는 하지만 같은 서정시끼리 대별하여 보자면 이상할 정도로 관념적인 어떤 세계”라는 박상수의 지적7이나, “우리가 발 디디고 선 ‘지금 여기’의 삶에서 발원하는 서정이라기보다는, 시인이 만들어낸 ‘관념’ 덩어리를 미학적 구조물로 형상화했다는 인상을 풍”긴다는 고인환의 지적8은 주목할 만한데, 다만 이 ‘관념성’에 대한 해석을 더 밀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신용목의 시세계에서 이 불균질한 관념성을 “단숨에 읽히지 않는” “혼돈된 것의 이미지”들로 보고 그 출현을 『아무 날의 도시』(문학과지성사 2012) 이후로 보는 의견도 주목할 만하지만9 선뜻 이해되지 않는 관념적 세계는 그의 초기 시에서도 종종 살펴볼 수 있다. 신용목 시의 미학적 관념성은 초기 시세계를 벗어나며 더 선명해진 측면이 분명히 있지만, 본질적인 변화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반면 김중일은 “세계를 알레고리화하여 이해하며, 활유법이나 직유법 등 수사적 장치에 의해 이미지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매우 개성적인 시작을 추구하고 있다”10거나 “당도할 삶, 열릴 삶의 조건과 형식을 고안하는 언어의 모험”11을 보여주고 있다며 미래파 시인들에게 주어졌던 예의 익숙한 수사 속에서 평가되어왔다. 다만 김중일이 이른바 ‘미래파 담론’이 유행할 무렵에는 주목받지 못했으며 이것이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미래파’로 불리는 일군의 시인들보다도 더 낯선 세계를 구축했다는 데 대한 반증이 아”니겠느냐는 장이지의 지적12은 매우 흥미로운데, 이는 김중일의 시 안에 ‘미래파’의 언어실험으로 쉽게 환원되지 않는 이질적 지점들이 존재했음을 암시한다. 같은 글에서 그는 김중일 시의 이야기로 구축된 알레고리들이 교훈을 줄 목적으로 동원된 것이 아니며 “세계가 ‘이야기’로 되어 있”고, “세계의 주민인 우리들은 이 ‘이야기’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동원된 것처럼 보인다”고 언급하는데,13 이는 미래파 시인들의 낯선 감각과 그 정치성을 논하기 위해 사용해온 일반적인 논법들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러한 논의들은 신용목과 김중일의 시에 이들을 설명해온 익숙한 코드들로 환원되지 않는 지점이 있음을 보여주지만, 이를 부차적 특성으로만 간주하고 있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신용목과 김중일 시의 고유성은 서정시인의 ‘관념성’과 미래파 시인의 ‘설화성’14이라는, 전형성에서 어긋난 특이성들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이질적 성향들이 어떻게 이들의 시세계를 조금씩 변화시키며 독특한 균형점을 만들어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용목의 시는 세계의 근원을 어둠이라는 견고한 물성으로 파악하고, 어둠의 연대기를 따라 걸으며 어둠에 봉인된 마음의 상흔들을, 온 힘을 다해 버텨온 시간의 인각들을 문장의 정원에 이장하고 봉헌한다. 어둠의 물성에 도달하려는 시인에게 삶과 세계에 대한 서정적 성찰과, 물성 자체가 품고 있는 ‘관념’에 머무르려는 충동은 그리 다른 게 아닐 것이다. 반면 세계의 근원을 ‘이야기’로 보는 김중일의 시는 존재의 심연에서 소용돌이치는 어둠을 ‘이야기’로 구축된 인간의 말과 접붙임으로써 끓어오르는 밤의 열기로 피워낸 다채로운 감각들을 초대한다. 김중일의 시가 낯선 미래의 감각에서 시작해 무슨 수를 써도 온전히 응답하는 것이 불가능한 애도의 감각으로 변주되며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견고한 존재의 경계를 무한히 지우고 뒤흔드는 이야기의 운동성이 그의 문장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의 시는 어둠의 견고한 물성과 이야기가 품은 열기로 부풀어 오르는 검은 정원이 되어 낮이 쏟아내는 무심한 흥분과 망각의 관성으로부터 어둠의 온기를 보호하고 생의 구석진 자리에서 웅크린 채 마모돼가는 존재의 마른 얼굴들을 끌어안는다. 어둠이 품은 울음들로 일렁이는 검은 숲이 된다.
3. 어둠의 물성과 울음으로의 유폐: 신용목
신용목의 시는 생에 가득 도사리고 있는 어둠의 흔적으로부터 생의 원형적 불구성과 울음의 깊이를 발굴하고 이를 말에 돌려줌으로써 어둠의 물성을 언어 속에 인장한다. 신용목 시의 풍경은 마음을 다해 생을 견뎌낸 존재의 울음들로, 뼈에 각인된 상처의 문양들로 축조되는데 이는 “아버지의 뼈 속”에서 울리는 “바람”(「갈대등본」,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문학과지성사 2004)으로부터 물집이라는 “몸에 가둔 시간”(「산수유꽃」, 같은 책)과 “사라진 근원에 갇혀 돌고 있는/피의 우물”(「포로들의 도시」, 『아무 날의 도시』)을 이해해가는 생의 단계들 속에서 깊이를 더해간다. 신용목의 시는 세계와 존재의 근원을 향해 삶의 감각들을 한단계 더 밀고 들어감으로써 명징하게 해소되지 않는 관념의 자리를 확보하는데, 이는 경험을 추상화한 인식의 산물이 아니라 실감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전제조건이자, 섬세한 빛의 질감을 구분하고 구조화하는 감각의 토대로서 작동한다. 신용목의 시가 관념성을 품고 있음에도 서정시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경험적 실감의 차원을 정확하게 찌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신용목의 시는 “어둠이 깨진 자리에 정확한 크기로 박히는, 슬픔의 오래된 습관”(「공터에서 먼 창」,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창비 2017)들처럼 쏟아지는 어둠을 품에 안은 채 묵묵히 견디려 할 뿐 안전한 문장의 온기로 어둠을 가두고 길들이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가령 아래 인용하는 시에서 어둠의 발견과 응시는 생의 의미를 포착하고 향유하려는 ‘눈’의 권능을 무너뜨리기 위한 사건적 계기로 존재하는데, 신용목의 문장은 상처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존재들의 항구적 운명성 앞에서 캄캄히 멈춰 설 뿐 마주한 어둠을 섣불리 이해하거나 끌어안으려 하지 않는다.
숲속에 집을 짓던 때도 있었나 집 속에 숲을 만든 공원에서 어둠 속에 불을 켜던 때도 있었나 불빛 속에 어둠을 모신 화단 앞의 기다림 먼 가등이 제 발을 뻗어 그 끝 연자귀 붉은 꽃잎 위에 간신히 흔들릴 때 꽃잎의 붉은 볼을 순하게만 더듬는 내 눈을 희번덕, 발광하는 눈동자가 깨물었다 연한 살 꽃잎도 상처를 품고 피나 불 없이도 빛을 내는 눈동자처럼 상처 겉에 살을 입혀 세운 몸 등진 자리마다 뭉텅이씩 어둠은 또 어둠끼리 한몸으로 사나 캄캄한 짐승은 내 안의 어둠까지 불러내며 눈과 눈 사이 간격을 좁히는데 먼 빛을 가리고 선 나도 연자귀도 어둠의 가죽, 한몸의 짐승으로 사는 눈동자는 또 얼마나 많나 어둠 속의 당신과 나처럼 어둠의 깃털을 달고 어둠 밖을 바라보는 캄캄한 맹수들
—「어둠에 들키다」 전문(『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창비 2007)
어둠과 상처를 씻어내고 매끄럽게 봉합된 표피의 감각들로 위로를 얻으려던 눈이 “희번덕, 발광하는 눈동자”인 어둠에 깨물린다. “불빛 속에 어둠을 모신 화단 앞”에서 불빛은 어둠을 거두어내는 낮의 대리인이 아니라 오히려 어둠의 섬세한 결들을 보호하고 봉헌하는 어둠의 배경이 된다. 어둠을 비추어야만 비로소 조금씩 풀려 나오는 굳은 표정 뒤의 상처들. 빛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어둠이 역류하며 뒤엉키는 밤의 웅성거림 속에서 화자는 ‘나’와 ‘당신’ 안의 “어둠 밖을 바라보는 캄캄한 맹수들”과 눈이 마주친다. 서로의 단단한 윤곽선을 미처 확인할 틈도 없이 좁혀 들어오는 어둠의 압도적인 체적 앞에서 화자는 어둠 속으로 도망치지도, 어둠이 품은 위태로운 열을 누그러뜨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먼 빛을 가리고 선 나”의 나약함을, 빛에 의존하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의 불가피함을 부정하지 않은 채 평생을 달라붙어 공기처럼 숨 쉬며 살아야 할 태연한 불안의 한순간을 적확하게 그려놓을 뿐이다. 선명하지만 어떤 의미나 의도로 규정되거나 환원되지 않는 신용목의 시는 온전히 분해되지 않는 어둠의 ‘관념성’에 힘입어 해명될 수 없는 존재의 본질 앞에 우리를 오래도록 머무르게 만든다.
신용목 시의 관념성은 타자의 고통을 응시하고 애도하는 시들에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데, 그 울림과 파괴력은 애도라는 행위 자체에서 온다기보다는 그의 애도가 풀어놓는, 강제하는, 살아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호흡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침묵의 완고함에 근거한다. “바다라고 불리는 익사자들의 거대한 무덤”(「얼음은 깨지면서 녹는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으로부터 슬픔은 자꾸만 밀려오는데, “불빛의 내벽에서 분비되는 어둠의 위액들 그 속에 웅크리고 앉아”(「아무 날의 도시」, 『아무 날의 도시』) “두 손 속으로 사라지는 얼굴로 비가 오고 물이 붇”(「아주 먼 곳」, 『나의 끝 거창』, 현대문학 2019)는 이 절대적 슬픔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신용목의 화자들은 이러한 자신의 무능을 결코 용서받으려 하지 않는다. 어둠으로부터 홀로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을 고백하되, 그로써 암묵적으로 용서와 사면을 구하는 고백의 이기적인 문법으로부터 철저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시들에서 신용목의 문장은 타자의 슬픔 앞에 선 존재의 무능을, 가슴과 목구멍을 꽉 막고 밀려들어 오는 묵직한 어둠의 중력을, 그 침묵의 심연을 구축하는 데 공을 들인다. 고통과 슬픔을 정확한 실감의 문법에 따라 그리려 하기보다는, 실감의 세계 앞에 온전히 선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육중한 침묵의 공기를 그려낸다.
비 오는 밤 외진 골목처럼 형광등 뜬 미역국에 얼굴을 비쳐봤을 뿐인데
미안하다, 마음이 돌아오지 않아 나갈 수가 없다
그냥 밥을 먹으며
나는 입을 가졌고 목은 부드러우며 배는 따뜻하다
이렇게 생각한다
일생을 두고 가장 힘든 일을 떠올리듯이
일곱시가 되기를 기다려, 차단막 너머 삼색 리본의 긴 휘날림 속으로 빨려들듯이
그리고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지나가는 기차를 바로 앞에서 바라볼 때처럼
칸칸이 환한 창의 얼굴들을 모두 놓치고
경종 소리를 내며
아이들의 거리에서 일곱시가 사라지고,
빨강 노랑 파랑
괜히 세가지 색깔을 대보듯
나의 입과 나의 목과 나의 배에 대해
나의 입과 나의 목과 나의 배……라고 중얼거리며 미안하다, 나는 밥을 먹는다
—「그리고 날들」 부분(『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이 슬픔은 어디선가 누군가의 마음을 피할 도리도 없이 집어삼킬 것이고, 누군가의 눈동자는 이 출구 없는 어둠을 헤매다 늘 그렇듯 새카맣게 타들어갈 것이다. 신용목의 문장은 미래가 예정된 이 오래된 실패 앞에서 한참을 숨죽인 채 머무른다. “나는 입을 가졌고 목은 부드러우며 배는 따뜻하다”라는 진술은, 슬픔에 대해 어떤 것도 하지 못한 존재의 무능을 뼛속 깊이 각인시킨다. 해갈될 수 없는 슬픔을 목구멍에 떠 넣은 밥의 온기로 해감하며 비정한 날들을 견딘다. 울음 속에 유폐된 이 어둠은 신용목의 문장이 강제하는 침묵의 시간들이다. 때로, 아니 자주 그의 “호흡이 자연스러운 것만은 아니”15게 되는 것은, 이 익숙한 현실의 호흡을 멈추고 다시 호흡하게 만들기 위한 침묵을 문장의 심부 하나하나에 날카롭게 심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침묵의 호흡, 관념성의 뿌리에 걸려 넘어져야만, 신용목의 문장은 진가를 발휘한다. 신용목 시의 관념성은 둔탁해진 살갗을 가르고 혈관을 거슬러 타고 오르는 칼날 같은 침묵이다.
4. 이야기로 피워낸 밤의 열기와 상호투신의 윤리: 김중일
김중일의 시는 자아 내부로부터 끓어오르는 끝끝내 지워낼 수 없는 ‘자기 안의 바깥들’을 어둠의 폐허로부터 끌어올려 현실의 중력과 매혹적으로 뒤섞는 ‘혼숙’의 순간들을 창조해낸다. 이를테면 “아침에 발설하면 불길하고 어지러운 꿈자리 같은 (…) 국경꽃집”(「나는 국경꽃집이 되었다」, 『국경꽃집』, 창비 2007)이 되어 음습한 몽상과 육중한 현실의 무게가 뒤엉키는 치명적인 경계를 만들어내고 “내가 낳은 아이가 자라” “촛불처럼 켜진 혀보다 밝은 입김으로 키스를 하며 내 아버지가”(「내 시집 속의 키스」, 『내가 살아갈 사람』, 창비 2015) 되는, 안과 바깥이 끊임없이 순환하며 서로의 몸을 뒤바꾸는 “영구 항진”(「영구 항진」, 같은 책)의 운동성을 꿈꾼다.
이러한 낯선 감각의 경계에 주목하는 김중일의 시는 감각이 촉발되는 사유의 기저에 ‘설화’라고나 할 법한 존재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깔아놓음으로써, 어째서 황막한 밤의 거리를 배회하며 버려지고 잊힌 존재의 얼굴로 스스로의 얼굴을 대신할 수밖에 없는지, 자기라는 천형 같은 굴레를 깨뜨리기 위해 알아듣지 못하는 낯선 감각들이 피워내는 어둠의 혼돈 속으로 스스로를 몰아댈 수밖에 없는지, 그 치유될 수 없는 허기의 내력을 발굴하고 설명한다. “부유하는 새의 그림자를 심장으로 갖고 살아야 하는 보잘것없는 부족의 일원”(「아스트롤라베」, 『아무튼 씨 미안해요』, 창비 2012)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선언하며 존재를 무감각한 일상의 시간 바깥으로 밀어붙인다. 가령 생은 이 무수한 이야기들의 선언으로 비로소 시작된다고 믿는 김중일에게 밤의 권능은 모든 존재를 슬픔으로 묶는 “매듭”의 단위로 찾아오는데, 인용하는 아래의 시에서 ‘그’가 저지른 장난에 “바람의 체중”을 잃고 “매듭”을 갖게 된 ‘나’는, 인과와 필연의 법칙에 묶여 온 생을 떨어야 하는 운명을 부여받는다.
장난스러운 방랑자가 모닥불을 훔쳐 쬐며 잠든 나의 끝단을 그저 한번 묶었다 풀었다. 하릴없이 매듭을 지었다 풀었다. 미처 다 풀리지 않은 매듭의 모습으로 나는 처음 밤을 맞았다. 나는 지상과 공중 사이를 묶은 매듭이었다. 나는 내 바람의 체중을 잃어버렸다. (…) 다음 날 그가 묶은 매듭은 발목이 되었다. 한순간 나는 우주의 외진 기슭에 불시착했다. 나는 지구라는 거대한 쇠구슬을 발목에 매단 죄수처럼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매듭이 조금씩 늘어갔다. 나는 빗속의 개가 되었다가 새가 되었다가 결국에 사람이 되었다. 이미 피곤해서 죽을 지경인 내가 기어이 어느날 섧게 우는 갓 난 매듭덩어리로 땅 위에 내던져졌다. 인생은 얽힌 매듭을 푸는 시간이었다. 지나치게 명민했던 친구는 단 이십년 만에 제 몸의 매듭을 모두 풀고 바람의 태생으로 돌아갔다. 친구의 친구는 회사 난간에서 투신하여, 지구라는 거대한 망치로 자신을 내려쳐 호두처럼 단단한 매듭을 단번에 으스러뜨리기도 했다. 부러진 절기와 절기, 하루와 하루라는 관절 사이에 밤이 검고 차가운 쇠심처럼 박혀 있다. 하루는 수만개로 조각난 관절을 가진 짐승이다. 매일 순식간에 날개를 펴고 바람처럼 어제로 날아가버린다. 늘 시큰거리는 무릎은 나를 이루는 가장 굵은 매듭. 바람이 누운, 세상에서 가장 작은 무덤.
그는 천진한 학살자, 날 이곳에 묶어둔 방랑자, 불면의 작가.
나는 그가 나를 혁명적으로 다시 써주기를 희망한다.
—「관절이라는 매듭」 부분(『내가 살아갈 사람』)
‘관절’이라는 매듭의 기원에 대한 설화적인 이 시 속에서, “하루와 하루라는 관절 사이에 밤이 검고 차가운 쇠심처럼 박혀” 들어오는 ‘나’에게 삶은 “시큰거리는 무릎”을 품에 안은 채 있는 힘껏 견뎌야 하는 불모의 시간들이다. 하지만 김중일의 시는 이러한 ‘죽은 바람’의 연대기로, 인간의 비극성을 강조하는 익숙한 수사의 연장으로 스스로를 한정짓지 않는데, “부러진 절기와 절기”, “으스러뜨”려진 매듭들을 잇고 견디는 밤이야말로 “천진한 학살자”이자 “날 이곳에 묶어둔” “불면의 작가”가 마주하고 있는 “혁명”의 시간들이기 때문이다. 김중일의 시에 있어 밤은 바람의 무덤인 관절들, 무수한 삶의 매듭들을 온 힘을 다해 접붙이는 수분(受粉)의 시간으로, “자정에 발바닥을 맞대고 있으면/다음 생은 서로 바뀌어 태어”(「당신의 온몸을 떠내려온 발 이야기」, 『내가 살아갈 사람』)나는 환생과 변신의 가능태이자, “갈기갈기 갈라진 내 목소리 사이사이에 일곱가지 소리의 검은 무지개가 연주”(「환절기에 찾아온 변성기」, 『아무튼 씨 미안해요』)되는 어둠의 비등점에서 끓어오르는 ‘변성’의 순간들이다. 김중일의 시는 밤이 품은 피 냄새를, 어둠의 내장을 흐르는 차가운 허기를 문장의 심연에 털어 넣은 채 “그가 나를 혁명적으로 다시 써”줄 변신의 시간을 꿈꾸며 광막한 밤의 무게를 견딘다.
이러한 김중일 시의 설화성은 차분하고 절제된 서정의 문법을 따름으로써 외견상 이전의 시세계와 상이한 풍경을 보여주는 듯한 세월호 이후의 시편들에서도 그대로 유지되는데, 타자의 고통 속으로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울음의 절대성을 인간과 세계의 기원에 위치시켜놓음으로써 슬픔의 항구성과 그 역능을 입증해 보인다. 우주만큼이나 오래된 슬픔의 기원을 ‘이야기’화함으로써 폐기될 수도 망각될 수도 없는 ‘불변’의 ‘필연’을 만들어낸다. 그의 문장에 따르면 “세상은 매일 매 순간 무너지려” 하는데 “세상 모든 새들”이 “잿빛 댐처럼 우주를 가둔 하늘을 틀어막고”(「매일 무너지려는 세상」, 『가슴에서 사슴까지』, 창비 2018) “베테랑 잠수부처럼/첨벙첨벙 하늘로 뛰어”(「흐르는 빈자리」, 같은 책)들 수밖에 없는 까닭은 새들이 “밤이라는 거대한 운석이” “산산조각” 난 “별의 부스러기”(「밤과 하늘」, 『내가 살아갈 사람』)이기 때문이다. 별이 떨어져 새가 되었다는 이 기원 속에서 모든 슬픔은 서로를 향해 투신하지 않을 수 없는 서로의 그림자가 된다. 맹약으로 묶인 가슴이 되어 서로의 심장 속으로 뛰어들어 오는 울음이 된다.
나는 다시 너에 대한 기억을 앞질러 가려, 밤낮을 식음 전폐하고 쫓았다.
절벽처럼 우두커니 멈춰 선 네 어깨까지 다다랐다.
나는 네 어깨 너머,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 순간 끝 모를 바닥이 내게로 뛰어내렸다.
—「나는 네가 뛰어내린 절벽」 부분(『가슴에서 사슴까지』)
이 절대적 상호헌신의 율법은 애도에 대한 낭만적 수사가 아니다. 애도는 ‘나’의 바닥에 타인의 슬픔을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속에 ‘나’의 바닥을 투신하는 일이고,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향해 뛰어내린다는 건 목숨을 거는 일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삶과 기억과 세계가, 앞으로 겪게 될 삶의 모든 가능성들이 정체불명의 심연 속에 집어삼켜지는 일이고 여기에는 어떤 약속도 보상도 존재할 수 없다. 이 불가해한 행위가 하나의 필연처럼 가능해지는 건, ‘나는 네가 뛰어내린 절벽’이라는 이 시의 불가역적 선언 때문이다. 너라는 심연을 향해 뛰어내리는 순간 “끝 모를 바닥”도 “내게로 뛰어내”리는 이 철저한 ‘상호투신’의 세계는, 작용·반작용의 물리법칙처럼 견고한 필연성으로 구축된 신념의 세계이며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에 대한 가장 실천적이고도 뜨거운 신화적 해석이다.
애도 이후가 아닌, 애도라는 행위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상호투신의 불가항력에 주목하는 김중일의 화자들은 존재하기 위해 뛰어들고, 뛰어드는 타자를, 슬픔을, 울음을 견디기 위해 존재한다. 김중일의 절대적 투신의 문장은 이 예고된 실패와 붕괴의 중심에 서 있다. 밤은 오고 이미 무너진 가슴으로 사슴들은 찾아와 잠시 또 허기를 데우다 가겠지만(“이 계절에 일어난 참혹한 사건으로 사슴은 태어났다. 누군가는 죽고, 사슴은 태어났다. 나는 죽은 이의 가슴을 사슴이라고 부른다.”, 「가슴에서 사슴까지」, 같은 책)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의 맹목 속에서 김중일의 문장은 부서지고 무너져 내리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스스로가 선언한 삶과 세계의 기원들 속에서 김중일의 시는 몇번이고 울음들 속으로 뛰어들어 기꺼이 산산조각 남으로써 깨어질 수 없는 맹약 그 자체가 된다. 지워낼 수 없는 얼룩이, 울음이 된다.
5. 밤의 혈관 속으로
두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나는 한 시인을 이해하기 위해 이름 붙인 기표들로 인하여 작품 자체를 ‘읽지’ 못하고 ‘정보’로 환원시켜버리곤 했던 비평의 오래된 실수에 대해서였고 그래서 제대로 읽어주지 못해온 두 시인의 작품을 애정을 담아 읽어보고 싶었다. 다른 하나는 신용목과 김중일의 시에서 부차적으로 논의되었던 ‘관념성’과 ‘설화성’이야말로 어쩌면 두 시인의 시세계를 이끌어가는 핵심 동력일 수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두 시인이 서정과 미학적 관념성 사이에서, 또는 첨단의 낯선 감각과 공감의 울림 사이에서 독특한 균형을 획득하며 시세계를 발전시켜왔으리라는 얘기였다. 한편으론 아쉬움도 많이 남는 글이지만 빼어나고 매력적인 시세계를 갖추고 있어도 비평이 선택한 담론의 체계에 온전히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충분히 더 깊이 논의되지 못했던 두 시인의 시들을 재조명할 기회를 얻은 것에 만족하려 한다.
이들의 시는 전략과 기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해당 시가 품은 잠재적 에너지와 생명력에 더 오래 깊이 머무르게 만들고,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16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문장의 보법으로 삶의 근원에 자리한 어둠의 무게를 증언하고 응시한다. 삶의 바깥으로 밀려난 어둠들을 하나둘 불러 모아 마음의 바닥에 파종하고, 어둠의 심연이 건네는 말들을 정성스레 받아 인간의 말과 피 흘리며 수분시킨다. 울음의 절벽으로 존재를 밀어붙이며 응답해주지 못한 어둠의 한가운데에 스스로를 유폐시키고, 서로의 슬픔 속으로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울음의 절대성을 삶과 세계의 중심에 새겨 넣는다.
신용목과 김중일의 시는 상처 난 세계와 삶과 언어들로 가꾸어진 어둠의 정원이다. 밤의 혈관으로 퍼져 들어가는 이 불가능한 애도의 정점에서 부러진 생을 견디느라 마디가 다 닳아버린 울음들이 밤의 혈관을 따라 아득히 수혈된다. 신용목과 김중일이 일구어낸 문장의 정원 속에서 길을 잃는다. 웅성대는 어둠들로 직조된 견고한 밤의 문장들 사이에서 마음을 빼앗기고 스스로 감금된다. 해명되어선 안 될 수억의 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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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송태욱 옮김, 자음과모음 2012. ↩
- 테리 이글턴 『비평과 이데올로기』, 윤희기 옮김, 인간사랑 2012, 34면. ↩
- 같은 책 43~44면. ↩
- 신용목은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김중일은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
- 고인환 「일상과 관념 사이: 신용목의 작품세계」, 『공감과 곤혹 사이』, 실천문학사 2007, 291면. ↩
- 하상일 「서정시와 시간의식: 문태준, 신용목, 이재무, 김석환, 강희안」, 『전망과 성찰』, 작가마을 2005, 297면. ↩
- 박상수 「서정시의 혁신: 신용목의 『아무 날의 도시』」, 『너의 수만 가지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줄게』, 문학동네 2018, 440면. ↩
- 고인환, 같은 곳. ↩
- 신형철, 『아무 날의 도시』 해설. ↩
- 장이지 「영원회귀의 에티카, 혹은 아무튼 씨의 탈주선: 김중일론」, 『환대의 공간』, 현실문화 2013, 47면. ↩
- 조재룡 「정치시의 미래를 견인하는 꿈의 전사(戰士)」, 『시는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14, 417면. ↩
- 장이지, 같은 곳. ↩
- 장이지, 앞의 글 51면. ↩
- 강계숙은 재래의 설화성과 김중일 시의 설화성을 구분하며 김중일의 ‘설화’가 매개하는 시간이란 미래이며, 그래서 ‘새로움’과 ‘낯섦’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하지만, 그럼에도 ‘설화성’ 자체가 언어적 실험의 첨단을 보여주려 했던 동시대 다른 시인들과 김중일을 구분지었던 조금은 전통적인 특징임도 부정하지 않는다. 강계숙 「두 겹의 저녁 시간: 김중일의 시」, 『미언』, 문학과지성사 2009. ↩
- 이동재 「바람의 노래: 신용목의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침묵의 시와 소설의 수다』, 월인 2006, 127면. ↩
- 사사키 아타루, 앞의 책 36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