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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 『여성-되기』, 에디투스 2019

‘되기’의 페미니즘적 쓸모

 

 

고윤경 高崙景

서울대 여성학협동과정 석사과정 dasim901@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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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중반 대학가에서 한창 들뢰즈(G. Deleuze)의 책이 읽히고, ‘노마드’ ‘리좀’ 같은 들뢰즈식 용어가 유행을 이루던 시기가 있었다. 십여년이 흐른 지금, 들뢰즈의 개념으로 엮여 나온 한권의 책이 혹자에게는 다소 뒤늦거나 엉뚱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비평의 영역에서 자주 사용되면서도 좀처럼 철학적 개념으로 소개되지 않아온 ‘되기’를 본격적으로 천착하는 학술서라는 점에서 반갑고도 의미가 깊다. 더욱이 페미니스트 철학자로서 들뢰즈의 아이디어와 페미니즘을 최대한 교차시켜보는 저자의 사유실험은 ‘되기’의 실천적 의미와 페미니즘의 급진성 모두를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어 흥미롭다.

사실 들뢰즈의 철학과 페미니즘은 그리 화해롭게 만나왔다고 하기 어렵다. 『여성-되기: 들뢰즈의 행동학과 페미니즘』에서 다루는 ‘되기’ 역시 페미니스트들에게 적잖은 의혹과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개념이다. 되기는 말 그대로 무언가 다른 것으로 되어가는 것을 말한다. 기존의 서구 철학이 존재의 불변하는 본질을 규명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아왔다면 들뢰즈는 오히려 주어진 정체성이나 규범화된 상태로부터 이탈하려는 흐름, 서로 다른 것이 관계하면서 새로운 상태로 조성되어가는 존재들의 역동적 과정에 초점을 맞추려 했다. ‘되기론’을 전개하면서 들뢰즈는 되기의 열쇠이자 모든 되기가 경유하는 출발점으로 ‘여성-되기’를 제시한 바 있다. 이는 성차를 최종적으로 남성/인간의 기준으로 재현되고 환원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이라고 규정되어온 존재양식과 삶의 방식을 균열시키면서 일신할 수 있도록 하는 잠재력을 지닌 생산적·긍정적인 차이로서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과연 들뢰즈의 여성-되기가 페미니즘의 기획과 함께 갈 수 있는 아이디어인지 의문했다. 철학과 담론의 급진화라는 명목하에 “남성들에 의해 여성이 또 한 번 전유되는 것은 아닐까”(122면) 하는 의구심을 낳은 것이다. 실제 들뢰즈는 성차를 포함한 차이들을 긍정하자고 말하면서, 동시에 끝없는 분열과 해체를 통해 또다른 차이로 바수어져 결국 ‘보이지 않게-되기’로 이행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이것을 과연 차이에 대한, 그리고 그러한 차이를 체현하는 타자들에 대한 진지한 태도로 볼 수 있는가. 분열하는 존재들의 상태를 낭만화·이상화하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비판은 충분히, 특히 역사적으로 타자화를 강제당해온 주체들에게서 더욱 강하게 제기될 만하다.

저자는 들뢰즈의 되기 논의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이같은 의혹과 불안에 대해 짚되, 역으로 페미니즘이 되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정치적 이점이 있다고 보고 이를 밝히는 데 주력한다. 저자가 주목하는 되기의 쓸모는 ‘차이의 문제’에 직면한 페미니즘이 그를 돌파하면서 차이와 함께 기꺼이 작업(working through)하도록 돕는 사유의 방식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들뢰즈가 차이를 ‘강도(強度)적인 것’으로 사유하면서 서구 철학의 전통에서 비껴나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들뢰즈는 차이를 동일성으로 수렴될 수 없는 복수적인 것 그 자체, 질적으로 언제나 변화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으로 사유하자고 제안한다. 차이를 단지 동일성의 반대항으로서 부정이자 결핍으로 정의하는 기존의 이원론은 비단 어느 한쪽에 우열성을 부여해서만이 아니라, 차이들을 통해 가능해지는 새로운 존재 방식의 창출과 변화의 가능성에 보수적·소극적이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억압적이다. 들뢰즈에게 차이는 새로운 존재 방식을 모색하고 창조하는 운동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변혁적이고 긍정적인 역량으로 재정의된다.

따라서 차이를 인정하고 옹호하는 것은 들뢰즈에게 있어 더이상 당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역량이라는 관점에서 지지된다. 들뢰즈의 주된 관심은 얼마나 우리가 달라질 수 있는가이고, 계속적으로 (다르게-)되기를 어떻게 고무하고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인가로 옮아간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사유의 전환을 통해 체현성이 전면화할 여지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미리 설정된 환상이나 꿈을 실현하는 것이 아닌, 오직 계속해서 달라지는 그 자체만을 계속해서 발생시키는”(91면) 것이 ‘되기’라면, 이 운동에서 실질적 주인공으로 부상하는 것은 결국 탈중심화된 채 차이를 체현하며 새롭게 생성되어가는 신체들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유동하고 끝없이 조성되어가는 과정 속의 신체들에 긍정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되기는 생물학이나 통제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이기를 거부하고 이를 넘어서려 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그 일을 끈질기게 지속하고 밀고 나가도록 하는 비전과 용기를 줄 수 있다. 이는 현실 속 다양한 여성 체현들을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에 계속해서 열려 있는 약동하는 장으로 인식하게 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저자는 이러한 생산적 장으로서의 신체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되기를 시행하면서 하나의 중심으로 수렴되지 않고 변이하는 유목적 주체”(215면)로 여성 주체를 새롭게 정의하는 브라이도띠(R. Braidotti)의 논의를 경유하며 ‘여성-되기’의 페미니즘을 제안한다. 여성-되기의 페미니즘은 일원화된 공통성과 보편성이라는 논리에 기대지 않으면서도 복수적이고 이질적인 여성 체현들이 생산되는 과정 자체로 운동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한다. 또 무엇보다 여성들 자신에게서 발명될 저항과 변화의 가능성을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지지하고 고무한다.

몇해 전만 해도 한국에서 여성 범주나 여성 간 차이의 문제는 ‘이론적’ 문제로 여겨지곤 했다. 현재 이것은 직접적으로 운동의 문제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누가 여성/주체가 될 수 있는가를 두고 치열한 설전이 벌어지고, ‘여성의 신체’는 담론의 격전지가 되었다. 최근 한 트랜스 여성의 여대 합격을 둘러싼 공방과 결국 입학이 좌절되기까지의 과정은 지금의 지형을 고통스럽게 보여준다.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한쪽에서는 트랜스 여성을 여성에 대한 위협이라고 표현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함께하고 연대해야 할 동료라고 주장했다. 이 두 반응은 공통적으로 하나의 진실을 가리키는데, 트랜스 여성의 신체가 여성 경계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이다. 트랜스 여성이 진정 심각하게 ‘침범하고 교란하는’ 여성 신체의 경계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여성의 몸에 대한 자유와 결정의 범위를 실험하고 새롭게 생산해내는 하나의 ‘되기’이며, 이 위반을 통해서 그녀는 여성의 스펙트럼상에 위치하고 다른 여성들과 연속된다. 유동하는 신체들에 대한 ‘되기’의 조증적 사유는 사실은 변화를 열망하면서 그 변화의 여파를 함께 감당할 것을 결의해야 하는 여성들, 두려움이나 비관주의에 압도당하기 쉬운 여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우리 사이의 차이를 고려하고 옹호하는 것이 당파성을 띠는 운동과 함께 갈 수 있으며, 그것이 운동을 강화하고 지속시키는 방법임을 ‘되기’에 대한 검토를 통해 이론적으로 논증한다. 책의 말미에서 도달하는 페미니즘의 운동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 여성-되기로서의 페미니즘은 여성들에게 여성 내부/사이의 차이들을 운동의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볼 것을 권유한다. 이 철학적 제안은 분열이나 와해에 대한 두려움을 돌파하도록 돕는 것은 물론 자칫 상대주의나 형식적 논의로 빠지기 쉬운 다양성의 함정 역시 넘어서서 실제적 차이들에 접근하고 다룰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실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