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특집 | 우리 문학은 지금 무엇과 싸우는가

 

혁명의 재배치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민족문학의 ‘정전 형성’과 3·1운동: 미당 퍼즐」 「우리들의 일그러진 ‘리버럴’: 비평이 하는 일에 관한 메모」 등이 있음.

netka@hanmail.net

 

 

1. 반복되며 새로워지는 ‘오늘’

 

황정은의 중편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디디의 우산』, 창비 2019, 이하 「아무것도」, 면수만 표기)는 화자인 ‘나’ 김소영과 연인 서수경이 함께 사는 집에 김소영의 동생 김소리와 김소리의 어린 아들 정진원이 함께 있는 오후 장면으로 시작한다.

 

정오가 지났다. 모두 잠들었다. 지난밤 잠을 설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신비한 오후다. 이런 시각에 이 집에 모여 자고 있다. 모두 모여 있는데 이 정도로 조용하다. 이런 일이 다시 있을까.(150면)

 

‘나’는 소설을 쓰기 위해 식탁 겸 책상으로 쓰는 테이블 앞에 앉아 있고 다른 이들은 모두 잠들어 있다. 그런데 이 장면이 “신비한 오후”로 선언되어야 할 이유를 독자들로서는 당장 알 길이 없다. 이는 사실 풍경 자체가 그러하다기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 어떤 변화가 찾아왔다는 의미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정말로 “신비한” 무엇처럼 풍경이 갱신되는 듯한 느낌도 일정하게 받게 된다. 마지막에 가서야 명확해지지만 화자가 “오늘은 어떻게 기억될까”를 반복해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던 ‘오늘’은 2017년 3월 10일, “제18대 대통령 박근혜”가 “헌법재판소 재판관 전원의 찬성으로 대통령직에서 파면”(313면)된 날이다.

우선 작품의 독특한 형식에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같은 날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단순히 회상을 경유한 순환구조라 하기에는 어딘지 설명이 부족해 보이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그것은 하나의 겹침점 같은 것이다. 겹침점이되 마주 보며 서로를 지양하는 중인 두개의 ‘오늘’이라고 한다면 적절할까? 「아무것도」는 화자의 개인사적 회고와 타인의 전언, 역사적 사건—가령 홀로코스트, 6월항쟁, 한총련사태, 2008년 촛불시위, 세월호참사 등—의 기록과 논평, 젠더 불평등 문제를 비롯한 사회비평, 독서수상(隨想) 따위로 채워져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오늘’로 수렴되는 동시에 ‘오늘’로부터 새롭게 생성 중인 것이어서 뚜렷한 방향으로 서사가 진행된다는 느낌을 거의 주지 않는다. 12개의 장은 화자가 떠올린 화제나 대상의 범주에 따라 구분될 뿐 시간 순서의 선형적 지배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끝까지 읽고 나면 처음과 달리 읽는 ‘나’가 다른 차원으로 한걸음 이동해 있다는 강한 실감에 휩싸이게 된다. 조금 길지만 좀처럼 생략을 허락지 않는 작품 막바지의 한 대목을 옮겨본다.

 

혁명이 도래했다는 오늘을 나는 이렇게 기록한다.

 

우리가 여기 모였다고.

간밤에 잠을 설친 사람들이 세수만 하고 이 자리에 모여 늦은 아침을 만들어 먹었다고. 김소리가 정진원에게 줄 간식으로 하룻밤 달걀물에 담근 식빵을 가져왔고 양이 넉넉해서 우리가 거기에 버터를 더해 토스트를 해 먹었다고. 오렌지도 잘라 먹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깔깔 웃으며 서둘러 식사를 준비하고 다 같이 먹고 올리브잎 차도 한잔씩 마셨다고. 남자는 울지 않는 법이라며 구석에 숨어서 우는 아이를 말하고 그 아이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며 살아야 하는지를 걱정하기도 하면서. 쌤 스미스의 커밍아웃을 말하다가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해 회원들과 작은 언쟁을 벌이고 만 일을 말하기도 하면서. 헌법재판소로 들어가는 재판관의 머리칼에 핑크색 헤어롤 두개가 말려 있는 것을 우리가 보았으나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아서 그것에 관해 별말을 하지 않았다고.(317~18면)

 

첫 장면의 반복과 부연에 불과한 이 대목이 어떤 새로운 조명 가운데 놓여 있다는 느낌은 착각이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함께 토스트와 오렌지를 먹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흔한 일과가 모종의 유토피아적 광채를 발하는 동시에 상실의 예감이나 노스탤지어에 휩싸이는 듯한 이유는 그것이 “혁명이 도래했다는 오늘” “우리가 여기 모였다”는 예외적 계기에 의해 고양되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일과들이 전에 없던 생동감을 띠는 것은 물론 헌법재판소 재판관 같은 일견 특별해 보일 수도 있는 존재가 “핑크색 헤어롤 두개”의 자리, 그러니까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아서”의 장소로 내려온다. 평범함이든 특별함이든 혹은 그것이 무엇이었든 이 자리에 오면 우리가 알고 있던 상투적인 그 무엇과는 분명 다른 것—단순한 위계 전도가 아니라—이 되고 만다. “혁명이 도래했다는 오늘”의 뉘앙스에 배어 있는 ‘혁명’에 대한 회의적 거리감은 일각에서 혁명이라고 일컬어지는 그것, 가령 탄핵심판의 인용결정 따위가 혁명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는 부주의하고도 납작한 인식에 대한 거리감이다. 사람들이 함께 모여 토스트와 오렌지를 먹고 차를 마시며 “남자는 울지 않는 법이라며 구석에 숨어서 우는 아이”에 관해, “쌤 스미스의 커밍아웃을 말하다가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해 회원들과 작은 언쟁을 벌이고 만 일”에 대해 견해를 주고받는 행위들 없이는 그나마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고, 상투성을 벗어나는 일상의 바로 그러한 순간들로부터 ‘갈리아(Gallia)의 수탉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기 시작한다고 「아무것도」는 말하는 듯하다. 요컨대 종래의 혁명이라는 관념을 지양하고 갱신하는 혁명(가령 ‘혁명의 혁명’), 그래서 읽는 이들을 언제나 새로운 출발점과 열린 가능성—고양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선사하는—에 놓아두는 혁명, 적어도 이 작품이 말하는 촛불혁명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2. 진리공정으로서 ‘열세번째 소설’

 

따라서 “퀴어 되기(「아무것도」 또한 이를 수행하고 있으므로—인용자)가 자신의 신체와 욕망을 응시하고 훈련하여 주변의 물질적 조건 및 인간관계와 자신을 조율해가는 순환적 과정에 가깝다면, ‘퀴어-쓰기’의 서사적 특성은 고정된 범주로의 안착이 아니라 그 ‘되기’를 재구성하는 갱신 과정으로 독해될 때 나타”1난다는 주목할 만한 원칙의 제시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를 “여성이자, 레즈비언 커플이자, 양육자의 입장에서 동시대의 기점인 촛불 혁명이 누락한 광장의 역사를 되짚는” 작품으로 파악하는 김건형의 독해는 취지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더라도 무언가 덜 말해진 것이라고는 해야 할 듯하다. 이는 「아무것도」가 말하는 혁명이 ‘혁명의 혁명’을 포함하는 개념임을 간과한 결과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고작해야 남성 지배집단이 통치 순서를 교대하는 것이 혁명이라면 그것은 무슨 소용인가”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2 그런데 만약 앞선 해명과 무관하게 「아무것도」가 말하고자 한 혁명마저 “탄핵이 이루어진다면 혁명이 완성되는 것”(313면)이라는 “사람들의 말”(314면)을 준용한 데 불과한 것이라면, 그래서 “촛불혁명이 누락한” “여성이자, 레즈비언 커플이자, 양육자의 입장”이 있는 그대로 촛불혁명의 결여나 공백 또는 구성적 외부(constitutive outside)에 불과한 것이라면 이 작품은 사실상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지금 이대로’의 온존을 수행적으로 강화하거나 기정사실화하면서 그러한 현실을 폭로하고 고발—여기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하는 작품에 머물고 만다.3

이러한 읽기는 「아무것도」의 연재(『문학3』 웹 2017.10~12) 직후 일찌감치 발표된 강지희의 글4에서 이미 자리 잡은 것이었지만 정작 강지희 자신은 단행본 『디디의 우산』의 해설(「세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우산을」)에서 미묘한 선회의 흔적을 남긴다. “광장에서 누락된 목소리의 복원”이라는 명쾌한 단정을 유보하면서 그가 예민하게 포착한 것은 세월호참사 추모집회 장면에 끼어든 한 문장 “더 가볼까?”(290면)이다. 경찰 차벽에 가로막힌 대열 가운데서 ‘나’는 문득 “더 가볼까?”라고 읊조린다. 강지희는 「d」에서는 “이제 어떻게 할까”라는 말이 체념적인 중얼거림이었지만, 「아무것도」에서는 이 말 다음에 “더 가볼까?”라는 말이 이어지며 “적극적인 질문과 대답을 구성한다”라고 분석한 뒤 “이 놀라운 차이는 작가가 어떤 가능성을 보고 있음을 말하는 것일까”(328면)라고 묻는다. “그 혁명이 야기한 도약의 흔적을 읽어내고자”(327면) 분투한 덕분에 다음과 같은 그의 결론은 전에 비해 한층 새로운 힘을 받게 되는 것이다. “혁명이 이루어진 날은 오늘이 아닐 것이다. 일상 속에서 사소하게 치부되어온 문제들과 지워져온 존재들을 위해 무한히 많은 혁명들이 계속되어야 하고, 정말 혁명이 도래하는 그날에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316면)는 대신에 모두가 말하게 될 것이다.”(342면)

전기화가 날카롭게 간파했듯 “테이블은 언제나 이미 광장이다.” 그것이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언제나 이미 침입하고 있는 광장의 영향에 관한 문제의식”에 힘입은 것임은 물론이다.5 이렇듯 「아무것도」의 해석과 평가에 있어 촛불혁명을 어떻게 보느냐는 관건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혁명이란 결코 탄핵이나 정권교체 같은 현실정치적 변화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작품의 “오늘”이 고양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발산하는 데서 보듯 여전히 진행 중인, 그래서 아직은 그 한계가 지어지지 않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촛불의 현장이란 거대한 스펙터클로 우리 앞에 놓인 ‘객관적 상관물’이 아니라, 의식적인 차원의 성상을 깨뜨리면서 각자가 지금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이야기와 이미지를 구축하는 자리, 그리고 그것이 서로 마주하고 갈등하고 경합하면서 새로운 사회가 수행적으로 만들어지는 자리”6인 것이다.

열두개 장으로 배열된 「아무것도」의 구성적 외관 또한 그러한 혁명관을 일정하게 지지하는 요소다. 도입부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화자의 고백은 무심코 지나치기 어렵다. “내게는 단편이 되다 만 열한개의 원고와 장편이 되다 만 한개의 원고가 있다. (…) 열두개의 원고. 모두 미완이므로 종합 열두번의 시도, 그 흔적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151면) 작가 황정은의 「아무것도」가 거느린 열두개의 장과 작중 화자가 수행한 “열두번의 시도”는 묘한 유비를 이루며 상호연상을 자극한다. “그 흔적들”의 대리보충(supplement)으로서 열두개의 장이 각기 제시된 것이라면 거기에 어떤 질서를 부여해 이들을 배열하고 총체화한 이야기, 즉 ‘열세번째 소설’이 「아무것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는 그 자체로 수행성의 아날로지인 셈이다. “역사에서 새로운 질서의 수립은 급격한 정치적 변동과 함께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공적 선언(주체화)과 사건적 충실성에 의해 지탱되는 진리공정을 통해서 실현”되지만 “사건-이후의 과정은 선형적 발전이 아니며 중단이나 심각한 퇴보도 겪곤 한다.”7 「아무것도」가 “혁명이 도래했다는 오늘” 새롭게 시작하려는 이야기도 바로 그런 사건적 충실성에 의해 지탱되는 진리공정의 일환이며 그것은 그 “중단이나 심각한 퇴보”와의 싸움 그리고 낡은 정상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포함한다. 작가가 촛불혁명의 자리에서 6월항쟁, 한총련사태, 광우병촛불시위, 세월호참사 등을 소환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아무것도」는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방식을 결정하도록 강요하는” 사건8으로서 촛불혁명에 즉해 “여성이자, 레즈비언 커플이자, 양육자의 입장”이라는 문학적 사유와 실천의 새 플랫폼을 수행적으로 고안해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3. 고발의 자리, 도약의 순간

 

별로 주목되지 않은 사실이지만 「아무것도」의 화자인 ‘나’의 이름은 단 한번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회사동료인 K가 월차를 내고 쉬려는 ‘나’를 악의적으로 모멸하려는 장면에서다. (‘나’는 얼마 전 K의 구애를 거절한 적이 있다.) “K는 어제 내게 서류를 건네며 비웃는 듯한 표정을 하고 김소영 주임, 내일 쉰다고요? 굳이 왜요? 뭐 보러 가요? 그래서 뭘 하려고요 어쩌려고?라고 비아냥거렸다. (…) 그는 그걸 말하고 싶은 것 같다. 네가 얼마나 하찮고 무력하고 같잖은 존재인지를 알라.”(197면) 이 장면이 일상화된 여성혐오와 젠더 불평등의 현실을 겨냥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거니와 여기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의 이름이 호명되는 것은 예의 혐오와 차별이 ‘나’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이름에 이미 새겨져 있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을 이끌고 있는 직전의 두 문장에도 그 못지않은 주목이 필요하다. “오늘은 어떻게 기억될까. 나는 오늘을 기억해두려고 월차를 사용했고 내일은 오늘을 기억으로 간직한 채 내 책상 앞으로 출근할 것이다.”(196면) ‘오늘의 기억’이라는 다른 지평의 조명을 받게 되었을 때에야 일상적 폭력의 반복조차도 한층 여실히 드러난다는 사실이 여기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에서 미뤄둔 ‘폭로와 고발’에 대해 좀더 들여다볼 차례이지만 그전에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문제를 잠시 거쳐가기로 한다.

이 말은 대개 불의한 현실의 직접적인 폭로와 고발이 문학 또는 예술의 영역에서 일으킬 수 있는 또는 일으킨다고 간주되는 역기능을 비판하기 위해 동원되는 편이어서 문맥상 ‘정치적 정답주의’에 가까운 뜻으로 쓰이곤 한다. 그런데 “‘정치적 올바름’ 프레임 내에서는, ‘쓰는 이’가 무엇을 위해 쓰는지, 또한 ‘읽는 이’는 왜 읽는지 등의 문제가 ‘미학을 위한 미학’의 문제 속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정확히 말해, ‘기존의 언어로 포착되지 않아 온 미학 현상을 가늠하고 고민할 계기’를 놓쳐 버린다. 그리하여 이후 논의는 다시 ‘우리끼리의’ 미학 vs. 정치, 자율성 vs. 사회 식으로 축소되고 공회전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9 바꿔 말하면 ‘정치적 올바름’은 거의 언제나 덜 말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 프레임의 미학적 불모성을 이와 같이 지적하며 김미정은 최근 논란이 되어온 『82년생 김지영』(조남주, 민음사 2016)을 적극 옹호한다. “이 소설의 독자들은 이제껏 대변되지 못해 온 자기를 읽고 싶은 것이다.”10 독자의 변화에 착목한 그가 이 글에서 강조하고자 한 것은 점증하는 정치적/문학적 대의(代議) 불가능성이다. 그는 representation의 사전적 중의성에 기초해 정치적 대의와 문학적 재현을 과감히 겹쳐 쓴다. 대의정치 제도와 직접민주주의적 요구들 간의 길항을 근거로 문학적 재현의 위상을 심문하는 일이 이론적 비약은 아닌지, 독자들이 “이제껏 대변되지 못해 온 자기를” 『82년생 김지영』에서 읽은 것이라면 이 작품이야말로 전형적인 대의/재현 장치가 아닌지11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여기서 말하는 “기존의 언어로 포착되지 않아 온”이나 “우리끼리” 같은 범주가 그가 전제하는 것만큼 자명하지 않을 수 있다는 신중함이 이 글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반론들이 종종 정곡을 잃고 미끄러지는 듯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그가 ‘누구도 나를 대변할 수 없다’는 집합적 각성으로서, ‘페미니즘 리부트’를 비롯한 “발밑의 동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우리가 겪어 본 적 없는 변동의 시작”12을 예고하고 그 가운데 스스로를 기투(企投)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는 “발밑의 동요”가 “비가역적 사실”임을 단호히 선포한다. “비가역적 사실들 앞에서 선택지는 무엇이 있을까. 아예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으로 여기며 주저하기에는 이미 놓친 시간이 짧지 않다.”13 따라서 그 “발밑의 동요”는 어떤 차원이동을 필연적으로 강제하는 면이 있다. 질러 말하면 사회적·문화적 자원과 권력의 혁명적 재분배 필요성 또는 그 임박한 필연성을—특히 젠더 불평등을 중심으로—강조하고 있는 이 글에서 무엇을 말하느냐에 못지않게 중요한 쟁점은 어디에 서 있느냐,이며 대부분의 문맥에서 후자는 전자에 선행한다.

이러한 차원이동에 동참하기로 한다면 최근 문학에 나타난 폭로와 고발의 직접성에 대해서도 ‘정치적 올바름’으로 미처 회수되지 않는 다른 토론의 가능성이 열린다. 대화 자체의 화용론적 조건과 상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아무것도」에서 울라브 하우게(Olav Hauge)의 시 「새 식탁보」 또는 생떽쥐뻬리(A. Saint-Exupéry)가 “별 아래 펼쳐놓은 보자기”에 비유했다는 “편평한 고원”(205면)으로 암시하고자 한, 일종의 ‘리셋’을 통한 인식과 실천의 지평 전환은 예의 폭로와 고발에 새로운 조명을 요청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발화자가 서 있는 사회적 위치에 주목한 윤이형의 단편 「작은마음동호회」(『작은마음동호회』, 문학동네 2019, 이하 면수만 표기)는 좋은 예다.

이 작품은 ‘작은마음 vol.1’이라는 책을 만들기 위해 모인 사람들, 책 읽고 글 쓰는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이 왜 책을 만드는가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다. “우리의 첫번째 구체적 목표는 아이를 맡기고 나가고 싶은 정치적 집회에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각자의 입장과 생각을 써서 모은 책이 필요했다. 그것을 우리의 집회 참여를 막는 사람들에게 주고 읽게 하자. 설득하자. 그들을, 그리고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꼭 거기 나가야만 하나’라고 자꾸 중얼거리려 하는 우리 자신을.”(12면) 작품 도입부에서 “각자의 입장과 생각”을 대변하는 ‘나’ 김경희의 내적 독백은 이 단편을 힘차게 이끄는 백미의 하나다. 여성현실의 질곡을 고발하는 목소리는 직접적이고도 선동적이며 반론의 여지 없는 신념으로 충전되어 있다. 선동성과 신념이 곧바로 반(反)미학에 부쳐지는 것은 아니거니와 이 작품이 바로 그러한 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좌고우면하지 않는 문체 안으로 현실이 쇄도한다.

 

우리는 바이링궐이다. 우리의 말들은 반쯤은 자신의 것이지만 반쯤은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우리는 종종 싸우려다 싸울 대상을 변호하며 주저앉는다. 그러고 나서는 성나고 괴로운 마음이 되어, 자신을 때려 기어이 피를 내곤 한다. 아무리 싫어도 우리 입에선 자꾸만 ‘아줌마’라는 말이 흘러나온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하하는 그 말이.

그런 게 싫었다. 그래서 목표를 정했다. 이제 더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말자.(12면)

 

‘작은마음동호회’라는 이름, 책 또는 깃발은 광장의 어딘가 다른 곳에 ‘큰마음’으로 만들어진 본진이 따로 있으리라는 막연한 가정과 결별한 이들의 양식이자 결코 누락될 수 없는 자신의 위치 확인일 것이다. 그러나 ‘발밑의 동요’에 자신을 내맡긴 그들의 위치 확인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말한다. “글로 써놓고 나니까 좀 이상해요. 내가 정말 이런 사람인가? (…) 내 언어로 정확히 ‘나’를 표현할 수가 없어요.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뭔가 좀 어색해요.”(17면) 이 대목은 화자인 ‘나’가 옛 친구 강서빈과 결별하게 된 내력이 제시된 직후에 등장한다. 결혼해서 아이를 가지며 소설가의 꿈을 포기한 ‘나’는 일러스트레이터로서 막 명성을 얻어가는 중이었던 비혼여성 강서빈에게 초상화를 선물받는다. 그런데 보답을 하려는 ‘나’에게 서빈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써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나’로 하여금 자신의 열악한 사회적 존재조건을 강렬하고도 아프게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을 테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결별이 ‘나’의 열등감 때문만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친구가 자신의 꿈을 되찾길 바란 강서빈의 선의는 사실상 자신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실제의 ‘나’에게 강요하고 명령하는 행위처럼 작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결별은 그들 각자의 삶이 지닌 경험적 차이를 구조적으로 위계화하는 사회문화적 역학과 그러한 역학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데올로기적으로 무의식화해버린 강서빈의 ‘선의’가 만나 이루어진 합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강서빈 또한 ‘정상가족’을 추구하는 기혼여성들 사이에서 “나는 사실 늘 들러리에 불과했다는”(18면) 소외감에 고통받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를 비난할 수도 없는 심리적 이중구속 상태에 속박되어버린다. “날카롭고 차가운 칼이 마음을 베고 지나가면, 따뜻한 스팀 타월이 거기서 흘러나오는 피를 계속 닦아주는 것 같았다”(19면)라는 문장 이상으로 그러한 이중구속 상태를 강렬하게 환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연하게도 강서빈이 ‘작은마음동호회’의 책 작업에 참여하게 되고 그의 결혼과 임신 소식을 듣게 된 ‘나’는 완성된 책과 함께 태어날 아이를 위한 선물을 건네지만 거기서 돌아오는 길 내내 여전히 이중구속에 시달린다. “서빈을 다시 봐서 정말 좋았고, 서빈이 정말 미웠다.”(21면) 그런데 여기에 균열을 일으키는 계기는 어딘지 석연치 않은 면도 있다. 동료의 전언을 통해 강서빈의 계류유산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설정이 왜 필요했을까? ‘나’는 “걸어가는 자리마다 핏자국이 남는 여자”(21면) 이야기를 소설로 완성해 마침내 서빈의 오래전 요청을 성취하지만 결혼 이후 ‘나’의 전철을 밟게 된 서빈은 결국 출산에 실패함으로써 이들 사이의 위상차는 지워지거나 전도된다. 어떻게 보면 이는 예의 사회체제의 아직 변경되지 않은 역학 내에서 작품의 무의식이 행하는 상징적 처벌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제 둘 사이는 어느정도 공평해진 걸까? 그러나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른 방향의 해석을 열어준다. 마지막의 집회 장면에서 둘은 결국 해후한다. 역시 화자의 목소리다.

 

세번째로 깃발을 발견하고 다가갔을 때, 거기 그 사람이 있었다. 칼바람에 붉어진 볼을 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

서빈이 웃으며 핫팩을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두 손으로 감쌌다. 내가 추웠다는 걸, 많이 추웠다는 걸, 그제야 알 수 있었다.(23면)

 

작품은 마치 그런 상처를 겪지 않았다면 서빈이 ‘나’에게 진정으로 공감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혹은 반대로 ‘나’가 서빈을 받아들이긴 어려웠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듯하다. 서빈에게 부여된 치유자로서의 자격은 다른 것과 비교하거나 교환될 수 없는 고유한 상처를 소유함으로써 주어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서빈과 ‘나’는 사회적 위치의 차이를 지움으로써 ‘공평’해졌다기보다 종래의 간격을 유지하고 보전하되 전혀 다른 원리의 개입을 통해 그렇게 되어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작품의 이러한 마지막 장면이 ‘정상가족’의 돌봄노동 가운데 자기실현의 기회를 박탈당한 기혼여성 ‘나’와 사회적 성취를 이룬 비/혼여성 서빈 사이를 가르는 위계 이데올로기를 치유받는 자와 치유자 사이의 상호인정과 신뢰의 네트워크로 교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은 겉보기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듯 보이지만 실은 근본적으로 달라져버린 각자의 위치와 관계를 말 없는 행동으로 드러내거니와 촛불혁명의 현장을 배경으로 ‘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도약의 순간을 작품은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하게 보여준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저쪽으로 갑시다! 사람들이 뛰기 시작했다. 질서정연했지만, 빨랐다. 내게는 너무 빨랐다.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도 뛰었다. 이런 것이었나. 이런 것이었구나. 사실은 별것도 아니었는데, 그래서 별거였구나. 왠지 자꾸만 웃음이 났고 눈물도 나려 했다. 처음에는 이런 것이 이렇듯 낯설어질 때까지 방치해둔 나 자신에게 미안했는데, 구호를 함께 외치는 동안 점점 내가 정말로 대통령을 퇴진시키러 이 자리에 나온 것일까 궁금해졌다. 이것이 나의 한계일까. 허들일까.(22면)

 

「아무것도」의 “더 가볼까?”와 만나는 이러한 도약의 계기 앞에서 작품은 비로소 자신의 위치를 재구성하며 “사실은 별것도 아니었는데, 그래서 별거”였던 눈앞의 “허들” 하나를 넘어간다.

 

 

4. 긍지와 수치 그리고 다음

 

“존재를 결정짓는 어떤 연속적인 패턴은 이를테면 존재의 짜임새로서의 체질이라 하겠는데, 이때의 체질은 타고난 게 아니라 사회에서 습득한 것이다. 역으로 생각하면 개개인의 그런 체질이 사회의 체질—영어로 ‘체질’(constitution)에 ‘헌법’이라는 뜻도 있듯이—을 구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맞물려 있는 체질을 바꾸는 것이 곧 혁명이 된다.”14 이렇게 간단하고도 의미심장한 혁명의 정의를 마주하고 있자면 “사실은 별것도 아니었는데, 그래서 별거”였다는 표현의 함의가 해당 작품의 맥락 이상으로 풍부하게 다가오며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변화들을 새삼 주목하게 된다. 물론 거꾸로 “변화가 시작될 때 ‘지금 이대로’가 어떤 것인지 한층 분명해진다”15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때에 그 ‘맞물려 있는 체질’ 또는 ‘지금 이대로’의 실상과 내력을 추적해보려는 문학적 시도들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럽고 그 또한 촛불혁명이 만들어낸 진리공정의 일환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작업들의 시공간적 하한선이 대개 87년 민주화 무렵에 그어진다는 점 또한 납득할 만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촛불혁명의 특별한 의미는 과거의 민중항쟁·시민항쟁과는 달리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정착되었다는 인식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다시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을 소환하는 대규모 시민항쟁”16으로 진행되었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정착되었다는 인식이 지배적인 상황”이 아니었다면 아예 제기되지 않았거나 제기되더라도 이만큼 강렬하게 제기되지는 않았을 의제들이 거꾸로 87년 민주화 이전 시기를 ‘역사’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촛불혁명이 87년 헌정체제가 만들어놓은 테두리 안에서의 합헌혁명이었다는 사실도 이와 무관치 않음은 물론이다.

황정은의 「아무것도」 역시 최초의 정치적 목격담으로 “그해 6월의 며칠”(215면)을 생생하게 전한다. “눈이며 뺨이며 너무 문질러 빨개진 채로 부은 그들의 얼굴을 보고 김소리와 나는 엄마와 아빠가 어디서 몹쓸 일을 겪어 많이 울었나보다고 겁을 먹었지만 정작 두 사람은 즐거워 보였다. 그들은 걔네들, 걔네들이라고 말하며 배를 붙들고 웃었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당혹스러워하는 우리 자매를 보면서도 웃고 얼굴이 따갑다고 웃고 너무 세게 달려 종아리가 아프다고 웃었다.”(216면) 작가는 이렇게 “그해 6월의 며칠”을 넘실대는 기쁨과 긍지의 날들로 그린다. 그러나 그밖의 어떤 장면에서도 그런 기분, 감정은 재연되지 않는다. ‘나’의 정치적 원체험이라 할 만한 사건은 1996년 연세대 한총련사건이었고 그것은 기쁨과 긍지는커녕 수치와 모멸의 트라우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고립에서 풀려나온 ‘나’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니들이 데모할 일이 뭐가 있느냐고 그는 괴로워하며 말했다. 지금은 독재가 아니다. 전두환도 감옥에 가는 시대다. 명분이 없다. 깃발 들지 마라. 데모 따라다니지 마라. 북한 간다고 나서는 거 봐라. 빨갱이 짓이다.”(217~18면) 긍지와 수치의 뚜렷한 대조 가운데 당시의 사회정세를 날카로운 음화(陰畫)로 드러내는 이 장면은 촛불혁명 이전까지 우리 사회에 존재했던 혁명적 상상력이 대체로 6월항쟁을 계기로 형성되어 90년대 중후반 ‘업그레이드’ 또는 ‘다운그레이드’를 마친 버전이었다는 암시를 주기에 충분하다. 당시의 한총련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던 전민(全民)항쟁 노선, 그러니까 학생운동이 전위에 서면 노동자, 농민이 연대하고 드디어 양심적 시민층이 후방 결합함으로써 혁명/투쟁을 완수하리라는 노선은 오히려 학생운동 조직의 내부 이완과 사회적 고립을 자초했다. 연세대에서 일어난 한총련사건은 이러한 약한 고리를 파고든 공안정권의 고의적 과잉봉쇄에 의해 수치와 외상의 기억으로 전락했거니와 이는 1998년 현대차노조의 정리해고 반대투쟁과 함께 ‘긍지의 시대’를 황혼으로 물들인 상징적 계기가 되었다.

김성중의 최근 단편 「정상인」(『창작과비평』 2019년 여름호, 이하 면수만 표기)은 “한총련 끝물 세대”인 주인공을 내세워 90년대 후반과 현재를 마주 보게 하고 그 안쪽을 이상주의자였던 어느 선배에 대한 회고로 채워간다. 후일담계의 흔한 구성을 반복하는 듯하지만 단순한 복고적 향유는 아니다. 사회문화적 감수성의 아슬아슬한 분기를 예리하게 포착한 다음 장면은 흥미롭다.

 

한총련 끝물 세대인 주영은 강력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선배들의 무협지 같은 시절이 막을 내렸고 이 판을 기웃거려봐야 ‘오늘부로 깃발 내린다’ 같은 소리밖에 들을 수 없음을. 마음속에 환멸인지 실망인지 모를 안개가 피어났는데, 주영은 그게 또 싫지 않았다. 그 와중에 캠퍼스를 ‘캠’이라고 줄여 부르는 선배의 말을 새겨들었는데 캠퍼스는 캠, 공산당선언은 공선언, 마르크스는 당연히 맑스. 이렇게 줄임말을 사용하면 뭐랄까, 그 세계를 친근하면서도 전문적으로 대하는 느낌이 든다. 캠퍼스를 캠으로 부르니까 평범한 대학가가 하나의 진지처럼 동그랗게 뭉쳐지는 것 같았다.(114면)

 

혁명적 이상주의의 잔여물이 오히려 소속감의 획득을 통한 자기계발 심리에 동기를 부여하는 이러한 어정쩡함 가운데 작품이 핵심적으로 탐구하고 있는 주제 역시 시대착오가 야기하는 ‘수치’이다. 사회과학 동아리에 참여한 주인공이 토론시간에 라디오를 켜놓는 관행에 의문을 표하자 도청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백화점에 틀어놓는 국민체조 음악만큼이나 부조리극 같다구요. 맑스 운운하면서 김건모나 녹색지대 노래를 듣는 게 얼마나 웃기는데요. 부자연스러운 건 말이죠, 수치스러운 거예요……”(123면) 아마도 그 수치에 관한 것일 선배의 원고 뭉치를 받아들고 주인공은 “또다시 바통을 물려받은 기분이” 되어 밖에서 들려오는 시위대의 함성 소리를 듣는다. “생각의 수초가 흔들리면서 주영은 저 함성 속에 들어 있는 다른 시위대의 모습을, 각자의 은하로 떠나는 시위대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주영은 가장 먼 미래로 날아가 그들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가, 아무도 도청할 리 없는 이 마음을 누군가에게 들킬 것만 같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133면) 작품은 90년대 이후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수치와 무력의 체질이 지금 이곳에서 어떻게 갱신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보다 그 모호한 계기들을—바깥의 시위대는 누구인가—낭만화하는 데서 멈춘다. 그것은 작품의 한계일 수도 있고 독자들 앞에 놓인 허들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것은 그 수치가 우리에게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다음은 무엇인지를 다시 물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다음을 묻는다는 것. 언제나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1. 김건형 「지금, 교차하는 퀴어 서사들이 여는 시간」, 『문학동네』 2019년 겨울호 110면. 이 글은 최근 한국문학에서 퀴어-페미니즘의 교차성에 관련된 주요 쟁점들을 명료하고도 폭넓게 부각하고 있어 좋은 참고가 된다.
  2. 같은 글 124면.
  3. 김요섭 또한 “‘우리’라는 하나로 묶여 있던 경험을 더는 믿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각자의 ‘나’로 돌아간다”라고 말함으로써 촛불혁명에서 ‘배제’된 존재들을 강조한다. 「이후의 사람들: 한정현·황정은 소설과 다원화된 세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9년 가을호 149면. 촛불혁명을 어떻게 해석하든 ‘우리/나’ ‘공동체/개인’ 같은 익숙한 도식을 반복하는 것은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4. 「광장에서 폭발하는 지성과 명랑」, 『현대문학』 2018년 4월호. 이 글은 연재본 「아무것도」를 “승리한 광장이 누락해버린 목소리들을 끌어올리며, 형식적인 전환점을 보여주는 소설”(339면)로 독해한다.
  5. 전기화 「황정은 다시」, 『창작과비평』 2018년 가을호 342면 및 각주 8 참조.
  6. 양경언 「싸움과 희망」, 『안녕을 묻는 방식』, 창비 2019, 165면.
  7. 이남주 「3·1운동, 촛불혁명 그리고 ‘진리사건’」, 『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 64면.
  8. 알랭 바디우 『윤리학』, 이종영 옮김, 동문선 2001, 앞의 글 64면 재인용.
  9. 김미정 「흔들리는 재현·대의의 시간」, 소영현 외 『문학은 위험하다』, 민음사 2019, 238~39면.
  10. 같은 글 248면.
  11. 이러한 의문은 결국 무엇이 더 나은, 재현다운 재현인지에 관한 물음을 필연적으로 소환한다.
  12. 같은 글 258면.
  13. 같은 글 259면.
  14. 한기욱 「주체의 변화와 촛불혁명」, 『창작과비평』 2018년 겨울호 24면.
  15. 황정아 「세상의 기준은 이미 변했다」, 『창작과비평』 2018년 봄호 2면.
  16. 이남주, 앞의 글 65면.

강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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