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조명
열권의 시집, 열개의 고원
황규관 黃圭官
시인. 시집 『패배는 나의 힘』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정오가 온다』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산문집 『강을 버린 세계에서 살아가기』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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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라는 우물
어떤 시집은 ‘시인의 말’이 더 궁금할 때가 있다. 백무산 시인도 그런 경우인데 아마 그의 시에서 언제나 ‘뼈’를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뼈가 없이는 근육도 있을 수 없는데, 내가 보기에 근육이 없는 시집이 허다한 것은 일차적으로 이 뼈가 없기 때문이다. 뼈가 있는 시인의 경우는 대체로 ‘시인의 말’도 귀 기울이게 한다. ‘시인의 말’을 읽고 백무산 시인의 이번 시집이 열번째 시집이라는 것을 알았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지금껏 낸 시집이 마치 시간의 부표 같기도 해서 그에 대한 소회가 혹 있을까 물었다.
저는 시간이 그냥 뭉텅 잘려나간 느낌이 들 뿐입니다. 살아온 시간의 간격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줄곧 한곳에서만 살았고, 특히 내 주변의 문학적 환경이 전혀 바뀌지 않아서 그런지 굴곡을 별로 느끼지 못했죠. 또 지난 시집들을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살았어요. 그동안의 과정을 되돌아보고 정리한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해서 더욱 그렇습니다. 이렇게 앉아서 시 이야기를 하는 기회도 그동안 몇번 되지 않아요. 열번째 시집까지도 단숨에 온 것 같습니다. 저는 시집을 묶고 나면 펼쳐보는 것이 아주 고통스러워요. 예전에 쓴 시 중에서 선별을 부탁받으면 아주 괴롭죠.(웃음) 과거를 되새겨보지 않아서 그런지 열권의 시집을 내온 여정이 짧은 것 같은 느낌입니다.
오래전 일이지만 그는 “아직은 회향이 아니다”(「회향」, 『길 밖의 길』, 갈무리 2004)라고 말한 시인이며 지금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에서 과거를 돌아보며 회한에 젖거나 과거를 이상화하는 사례는 단연코 없다. 하지만 과거의 사건을 현재로 길어올리는 일은 자주 만나는 현상이다. 나는 그것을 ‘과거라는 우물에서 찰랑거리는 두레박 물을 길어올린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 우물을 현재라는 시간에 들이붓는다. 왜? 그에게 현재는 무언가 끓으면서 생성하는 시간이며, 각박한 현실과는 ‘다른’ 시간이라 해도 그 시작은 어쩔 수 없이 현재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은 시간이 물리적인 운동이 아니고 관념이라는 겁니다. 동일한 노동과 동일한 패턴을 반복하면 한달을 살아도 그건 하루의 시간을 산 거라는 생각이죠. 그렇게 보면 물리적 시간과 달리 노동자의 인생은 굉장히 짧고 무의미하게 탕진되는 거라는 생각입니다. 노동 시간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동일한 시간이고 시간을 팔아 밥을 먹는다는 말은 정확한 말입니다. 시간이 곧 인생인데 우리가 죽은 시간을 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다른 시간에 대한 생각이 절실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시간이 과연 제대로 된 삶의 시간인가 의문이 들 때 과거로 향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현실의 각박함 때문에 제게 숨통 역할을 해주는 시간이 과거인데, 그것이 향수 같은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현재와는 다른 시간에 대한 경험 또는 다른 감각을 얻는 과정이었죠.
계량화되고 분절된 근대의 시간에 대한 비판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를 과거로 향하게 만들었단 뜻일까.
그렇죠. 근대의 시간은 시계의 시간, 발명된 시간이죠. 인간이 자신의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시계의 시간에 적응하며 사는 게 노동 시간입니다. 겨울밤 한시간과 여름낮 한시간이 왜 동일할까요? 계절도 다르고, 전혀 다른 운동과 전혀 다른 생체활동이 벌어지는데 우리는 그것을 동일한 ‘한시간’이라고 부릅니다. 아마 제가 예전에 「한시간?」이라는 시로 표현한 것 같은데, 그것은 겨울밤 한시간과 여름낮 한시간이 상품 생산량 기준으로 같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혁명은 새로운 시간을 발명하는 것
「한시간?」은 2012년에 출간된 『그 모든 가장자리』(창비)에 실린 작품인데 1, 2연은 다음과 같다.
여름낮 한시간 동안 나무는 얼마나 많은 일을 할까
겨울밤 한시간 동안 나무는 얼마나 깊어질까
그걸 왜 한시간이라고 하지?
햇살 가득한 봄날 한시간 동안 새들은 가슴이 얼마나 두근거릴까
산들 가만히 눈을 감는 가을 저녁 한시간 동안 새들은
얼마나 쓰린 허공을 날아야 할까
그걸 왜 한시간이라고 하지?
백무산 시인에게 시간이란 과거, 현재, 미래가 나뉜 시간이 아니다. 백무산 시인의 시간은, 비유컨대 자신을 옭아매는 경첩을 풀고 나와 들판으로 내달려 물이 “타는 목을 적실 때 물의 생명이 비로소 시작”(「완전연소의 꿈」, 『폐허를 인양하다』, 창비 2015)되듯이 꿈틀댄다.
제가 경험한 일들 또는 인생의 시간들을 떠올려보면 시제는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직선으로 된 게 아닌 거죠. 시제로서 ‘과거’도 의미없고, ‘현재’도 의미없고, ‘미래’도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사실 ‘도 튼 사람’들은 전부 다 ‘현재’만 살라고 하잖아요? 바로 이 순간만이 진실이고 나머지는 다 허구라고 하는데 제 생각은 반대입니다. 우리는 과거나 미래를 살지 현재를 사는 게 아닙니다. 현재라는 시간은 지금 우리가 움직이고 있지만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무언가 발생되는 거품 같은 시간이 현재입니다. 기억과 희망이 현재라는 순간순간을 호흡하면서 몸에 실리는 거죠. 몸 안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적일 수 있습니다.
시간 이야기가 관념적으로 들리시겠지만, 그걸 그냥 인생이라고 바꿔 불러도 상관이 없습니다. 현대 노동이 인생의 나날과 삶의 시간을 너무 무의미한 것과 교환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볼 때 노동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근본적 해방의지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혁명은 사실 새로운 시간을 발명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자본이 강제한 노동 시간을 살고 있죠. 그건 노동자만이 아니라 세계의 시간이 노동 시간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관념적이라기보다 그대로 인생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시간에 대한 성찰은 삶에 대한 성찰, 생명에 대한 성찰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축의 시간」에는 다음과 같은 인상 깊은 구절이 나온다. “시작과 끝이 맞물린 알/시제가 없는 알”. 백무산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역시 새로운 ‘시간의 축’을 향한 고투를 보여주는데,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시제가 없는 알”을 품는 일일 것이다.
알은 해석으로 풀려나올 수 없다
어떤 문법으로도 풀려나올 수 없다
어떤 언어로도 깨어나게 할 수 없다
품을 수밖에 없다
—「축의 시간」 부분
나는 이 품는 행위가 시인이 발명한 또다른 사랑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리고 이는 자신의 지난 사랑이 다 실패한 사랑이라는 인식의 ‘뒷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에게 보이지 않는 ‘뒷면’은 앞면을 있게 하는 힘이잖은가. 「사랑 혹은 불가능」이라는 작품에서 시인 자신의 개인적인 아픔이나 회한 같은 것이 어른거리는 것 같아서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인 것이 ‘조금’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들어가 있죠.(웃음) 저는 진짜로 모든 사랑에 실패했습니다. 사랑은 성공하는 게 아니겠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아픔으로 간직한 것은 많은데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은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잖아도 얼마 전에 돌아가신 고(故) 황현산 선생을 처음 봤을 때 연애시는 없어요? 하고 물으셔서, 연애시도 있습니다, 답한 적이 있습니다.(웃음) 그런데 연애라는 감정이 우리들에게 현실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짓눌려져 있는 상황에서 연애도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것 때문에라도 개인사를 드러내는 것에 부담이 있었던 거죠. 아주 각박한 상태에서는 개인의 감정도 많이 왜곡된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느끼고 사고하는 것도 왜곡되기 일쑤인데, 스스로 통제를 하지 못하게 되죠. 그런 것들이 자기혐오를 불러오곤 하죠. 나는 자기혐오의 감정이 강한 편입니다. 스스로 내 감정을 믿지 못해서 자기혐오에 빠지고 개인사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죠.
백무산 시의 특징 중 중요한 것을 또 꼽으라면, 근대문명 비판에 기반한 급진적인 정치시가 있지만 사실 이런 작품들도 시간에 대한 사유가 언제나 지렛대로 작용한다는 점일 것이다. 나는 이것을 디오니소스적 긍정과 아폴론적 부정 정신이 한몸을 이룬 것으로 읽었다. 그 때문에 역설이 넘쳐흐른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위치가 바뀌거나 선형적 시간이 깨지고 사건의 인과 관계가 뒤집힌다.
「카운트다운」은 시간이 진행되는 듯하지만 진행되지 않는 시간, 가상의 시간을 좀 의미있게 다뤄보려 했는데 그런 문제의식이 좋게 마무리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웃음) 시를 쓰다보면 의도와는 다른 경로로 접어드는 경우도 있지만 「카운트다운」은 일관된 문제의식으로 썼습니다. 기계의 시간이냐 인간 심리의 시간이냐가 아니라 현재 작동 중인 시간을 분명히 느끼고 있는데 말로 하기는 어려운 듯합니다. 그 이야기를 「카운트다운」에서 하자고 했는데, 마무리를 못 지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자기긍정”은 자폐적 시간인데 “밖이 없는 시간”이며 “오직 안에서만” 무한 “복제되는” 시간입니다. 저는 이 시간이 현재 작동 중인 문명의 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 진보의 시간이 반대로 퇴행의 시간이기도 한 것인데, 시인의 답변은 그렇지 않았다.
「사람의 말」은 그냥 소품입니다. 특별히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요. 그리고 문명의 시간이 오히려 퇴행적이라고 말한 작품도 아닙니다. 서로 다른 시대를 대비시켜서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경험과 세계의식
최고의 작품은 아니지만 거기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소품들을 계열화시켜보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의 외곽이 더 잘 드러나기도 하는 법이다. 그 외곽이 또 시인의 내면을 독자에게 훨씬 잘 전달하기도 하고. 「사람의 말」이 시인에게는 소품일지 몰라도 독자에게는 시인의 영혼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역시 시는 시인의 의식적인 경로 설정과는 다른 결과를 드러내는 것 같다. 어쩌면 시란 몸의 기억으로 쓰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해서 그 얘기를 내처 듣고 싶었다. 그러면서 내가 느끼고 있던 최근의 시적 경향에 대한 의견을 함께 물었다. 즉 최근 우리의 시 경향에서 시인 자신의 경험은 너무 가볍게 취급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리얼리즘 경향의 시들은 ‘날것’으로서의 경험이나 일차적인 심리상태를 드러내는 경향이 있고 (연령을 기준으로 해서) 젊은 시들은, 물론 그 나름의 현실 조건이 있겠지만, 경험을 은폐하거나 동일한 경험을 반복적으로 표현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시인에게 경험은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를.
그렇습니다. 시에서는 의도대로 쓰기가 힘들기도 하죠. 생각이 정리된 작품들은 닫혀버릴 수도 있어요. 근육을 뺀 작품들이 오히려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미처 다 말하지 못한 소품들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기도 하고 시인의 마음을 잘 더듬어도 볼 수 있죠. 닫히지 않고 끓고 있는 상태를 드러내기 때문이겠죠. 시인이 아니라도 경험이 곧 자기 자신이죠. 시는 경험으로 쓸 뿐이죠. 경험은 자신의 현재 상태, 삶의 상태, 존재에 대한 세계의 이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통해서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문학이고 시 아닐까요. 세계를 통해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문학이 아니라 다른 것이겠죠. 그러려면 세계가 나에게 들어와야 하는데, 그게 경험이라는 고삐가 있어야 하죠. 경험이 부실하면 나를 통과하는 세계를 부실하게 만들 수밖에 없죠. 과거에 참여시나 노동시는 엄혹한 독재 시절에 격문 같은 것을 막 토해냈던 적도 있죠. 그것은 경험적이기보다 앎에 의한 분노의 표현이 적지 않았지만 역사적 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려는 개인의 의지는 순수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순수가 아니면 뭐가 순수겠습니까? 다만 그러한 문제들을 지금 다시 가져오는 것도 곤란하죠. 경험의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당대의 경험을 통과하지 못한 세계의식이 그대로 시가 될 수도 없습니다. 반대로 자기 경험이 그대로 시가 되는 것도 아니죠. 중요한 것은 세계의식과 경험이 만나야 하는데…… 그런데 요즘 이런 문제가 중요한가요?
“그런데 요즘 이런 문제가 중요한가요?”라는 반문에서 시인이 갖고 있는 어떤 답답함을 느꼈는데, 지금 우리는 중요한 것을 폐기하고 살아감으로써 우리 스스로 하찮아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다음 질문을 잇따르게 했다. 하지만 이 질문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때가 좋았지」의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 살아온 날들 그래도 꽤 괜찮았어/맞아 그땐 분명히 그랬어/그땐 이처럼 버려지진 않았으니까/그땐 이처럼 쓰레기는 아니었으니까”. 이는 자족이나 자기위로가 아니라 지금 우리는 “쓰레기”가 되었다는 뼈아픈 비판이다.
백무산 시인을 처음 안 것은 당연히(?) 『만국의 노동자여』(청사 1988, 개정판 실천문학사 2014)를 통해서였다. 스무살 무렵, 나는 남해안의 어느 제철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누군가의 추천으로 손에 쥔 이 시집의 표지에는 노란 바탕에 징을 치는 사람이 그려진 판화가 박혀 있었다. 나는 그때 그냥 얼굴 하얀 문학청년이면서 어김없는 노동자였고, 그 원인도 잘 모르겠다는 듯한 우울한 표정 일색이었다. 시집을 읽으면서 받은 충격은 지금 생각해도 큰 것이었다. 내 우울의 정체를 그 시집을 통해서 알았던 듯도 하다. 병역특례를 자진해서 포기하고 들어간 전방 지역의 부대로 그 시집도 어떻게 된 일인지 따라오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틈만 생기면 『만국의 노동자여』를 탐독하곤 했다. 백무산 시인의 시는 근본적으로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 인식 위에서 펼쳐지지만 『만국의 노동자여』 이후로도 내게는 그가 ‘여전히’ 노동시인이었다. 일반화된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 구도를 넘어섰기 때문에 세간의 괜한 오해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됐죠. 여전히…… 예전에 어느 행사에 갔는데, 행사 성격이 꼭 그런 것도 아닌데, 펼침막에 제가 ‘영원한’ 노동시인으로 소개되어 있었습니다.(웃음) 그런데 사실 노동계급을 역사적 보편 계급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까? 지금에 와서 그것이 유효하든 않든 노동문학에서 인간의 모든 문제가 다 주제가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데, 현실정치적 문제 때문에 잘못 이해되는 부분이 있는 거죠.
『길은 광야의 것이다』(창비 1999)나 『그 모든 가장자리』에서 나타나는 대지의 중력은 삶을 춤추지 못하게 작용했다. 이 대지는 근대 노동 시간을 함축하기도 했는데, ‘영원한’ 노동시인이 노동자들이 살아가는 노동 시간 자체를 문제 삼는 건 자칫하면 노동자의 (투쟁을 비롯한) 현재 상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비춰질 수도 있다. 실제로 이 ‘낡은 시간’을 “우리의 노동이 자주 그렇게 만들었다”(「치욕」, 『거대한 일상』 창비 2008)라고 말한 적도 있다. 물론 백무산의 ‘대지’는 해방의 상징으로도 등장한다. 그러한 대지가 이번 시집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인 의상을 입는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상징이 된다. 「몸의 명상」에서는, 우리의 본능인 식욕이 땅으로 귀가를 종용하고 “땅이 만들어낸 피와 살로 버무리”게 한다. 다시 말해 몸을 옭아매고 있는 일상과 본능들이 대지와 만나 긍정의 대상이 되는 것 같았다.
긍정하는 게 아니라 전도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만, 반대로 또다른 사람들은 해방감을 느끼고 축적의 기회로 삼고 있죠. 과거에 존재했던 질서, 규범, 제도, 관습, 규제, 윤리 등을 많이 쓸어내기도 했습니다. 강제적이고 억압적인 장치를 많이 걷어낸 것도 사실입니다. 알고 보면 이게 신자유주의의 효과이기도 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세력들의 기득권을 문제 삼고 있지만, 그 내용을 보면 그들은 사실 신자유주의체제의 수혜자들입니다. 그들은 신자유주의체제의 지배계급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확장된 공간을 신자유주의가 선점한 거죠.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도 낡고 억압적인 권력을 제거하는 운동이 필요한데, 민주화운동은 신자유주의의 문을 열어젖히면서 더 많은 자유와 자율권을 확대해간 거죠. 그리고 더 많은 자율을 통해 자기 능력을 극대화하고 창의적인 활동과 예술노동을 만들어내어 자본의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거죠. 과거의 억압적 상황이 ‘중력’과 비교될 수 있다면 지금은 그 중력을 극복한 힘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중력처럼 짓누르던 것이 이제는 우리를 대지로부터 분리시킵니다. 그러나 인간은 허공이 아니라 대지 가까이에서 자유를 느끼는 존재입니다.
흐르는 자아와 공통 주체
사실 이번 시집에서 내게 예민하게 다가온 점은, 시의 화자가 자기의 자아를 어디인가로 내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징후는 지난 시집 『폐허를 인양하다』에서도 어느정도 감지되기는 했다. 예를 들어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가듯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마지막에 “그대와 나 사이에 푸른 염소 한마리 있어야 합니다”처럼 이미지화된 측면도 있지만, 자아를 밖으로, 그러니까 “그대와 나 사이”로 내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번 시집에서는 그 느낌을 더 강하게 받았는데, 자아를 내보내면서 화자의 자아가 점점 ‘적어지게’ 하려는 것만 같았다. 기존의 자아가 적어지면서 대신 신체 혹은 영혼이 확장되는 사태는 「나에게 이르는 길」에서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는 “바람”과 “길”과 “말”을 아예 자아 앞에 세우기도 한다. 또 본능과 야생을 잃어버린 개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알레고리로 자주 나오지만, 그 예외인 「그들 등쌀에」에서는 인상적인 구절, “인간을 한움큼 덜어내었다”가 등장한다. 이 ‘인간성’에 대해서는 「인간 형성」이라는 작품도 간과할 수 없다. 「그들 등쌀에」 다음 페이지에 수록된 「모과」에서도 향기가 떠난 상황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아예 “모든 향기에는 죽음의 냄새가 묻어 있어 그렇지 않다면 그 어떤 향기가 우리를 매혹시킬까”라고 묻는다. 덜어내고자 하는 자아가 한편으로는 ‘현대적인 인간성’인 듯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죽음’도 동시에 불러들이는 것 같아 약간 슬프기도 했다.
주체가 액체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전면적인 해체는 오히려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만듭니다. 언어로 서로 공감하고 무언가를 공유하는 데에는 제한이 있어요. 말은 수단일 뿐 소통은 침묵 가운데서 일어난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매개를 가지고 있어야 서로 공감을 넓힐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여러 관계망을 통해서 연결돼 있으니까요. 한 공간에 모여 있을 때 서로 가까이 있다고 느끼기보다 오히려 큰 거리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한 공간에서 부대끼다보면 서로 긴밀해질 것 같지만 오히려 싸울 일밖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든 인간과 자연 사이든 매개가 있어야 연결된다는 생각입니다. 공통성은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또는 같은 자연적 존재이기 때문에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공통의 자아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은 우리들 바깥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는 계속 가시가 발생합니다. 매개를 많이 가질수록 많은 뿌리를 가지게 되고 하나의 뿌리가 다친다고 해서 바로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거든요. 모든 관계는 단순 접속이 아니라 생태적 연결인데, 이런 무의식적 연결은 우리가 동시에 담기는 공통 자아 같은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대와 나 사이에 눈길이건 꽃이건 다른 매개를 두고 그 매개에 자아를 계속 흘려보내면 그 매개가 ‘공통 주체’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인가?
나의 주체가 내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죠. 내 안에는 아주 조금만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그마저도 고정된 것이 아니고요. 어떤 매개물에 나라는 주체를 넘겨주면 그 매개가 공통 주체 혹은 공통 자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그 공통 주체인 대지를 잃어버렸어요. 대지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의 공통성을 말하는 것이지 단순히 땅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번 시집에서는 좀 어중간하지만 「풀의 바다」에서도 그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풀은 기초가 되는 삶의 뿌리입니다. 그것을 상실할 때 종교는 유일신을, 권력은 국가라는 신앙을 만들어내죠. 그러한 공통성은 오히려 폭력입니다. 지금은 모든 공통성이 해체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분리된 상태를 자유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언어에 전적으로 의존하죠. 하지만 우리에게 매개가 없이는 언어도 자기 목적을 실현할 수 없고 기능을 다하지도 못합니다. 그 매개들은 우리들의 확장된 주체입니다.
발밑에서 내 머리까지
나에게서 너에게까지
풀이 있었던 때와 그렇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내가 풀을 숨 쉬면
풀이 나를 숨 쉬었다
네가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내가 풀 속에 담겨 있어야 했다
너의 눈과 나의 눈 사이에
너의 말과 나의 말 사이에
풀이 있었던 때와 없었던 때가 있었다
—「풀의 바다」 부분
사실 개 이야기는 인간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해요. 「사람의 말」에서도 그랬듯이, 현대 문명적 시각에서 보면 우리 할머니와 저는 종이 다를 수도 있죠. 인간성이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고 봐요. 종의 차이도 별것이 아닌 거고요. 개의 생태를 살펴보면 또 하나의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개도 매우 도시적이더라고요. 야생의 개가 인간의 마을로 내려온 것은 먹이 때문이 아니라, 개의 복잡한 감성 때문에 인간의 마을에 적응하기가 더 쉬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감정도 그리 단순하지 않아요. 우리가 자연 속에서 안락하고 편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자연에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연에 포함된 존재이고 자연을 통해 공통성을 찾아가는 일은 언제까지고 계속되어야 할 거라고 봅니다. 그것은 자연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보죠. 소로(H. D. Thoreau)의 책들은 자연에 대해 많은 영감을 줍니다. 그런데 에릭 호퍼(Eric Hoffer)라는 사람은 그런 소로를 비웃기도 하죠. 인간성은 자연이 아니라 도시에서 만들어졌다고 호퍼는 말합니다. 자연의 혹독함은 오히려 인간성을 각박하게 만든다는 거죠. 호퍼는 평생을 떠돌이 노동자로 살면서 자연을 몸으로 겪었어요. 그러면서 소로가 도시를 떠나 자연으로 갔다고 했는데 바로 그곳 매사추세츠는 이미 인간의 손에 의해 잘 다듬어진 곳이라고 비판합니다. 인간이 자연 그 자체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며 쓴 ‘개 시’가 「그들 등쌀에」입니다.
눈 덮인 마을에서 시작되는 시
대화 도중 나는 「소를 끌고」에 대한 이야기를 내내 참았다. 「소를 끌고」는 개인적으로 예전 시집 『초심』(실천문학사 2003)에 실렸던 「세한도」를 먼저 떠오르게 했다가 다시 ‘심우도(尋牛圖)’로 나를 이끌었다. 백무산 시인이 드디어(?) 기우귀가(騎牛歸家), 즉 소를 타고 돌아가는 중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가 꼭 정신적인 구도의 여정만 상징하는 게 아니라고 보지만, 아무튼 이 작품에서 이제는 소를 끌고 가보자는 화두를 다시 던진 듯했다. 「겨울비」에서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저기 젖은 겨울나무와 함께 가야 할 곳이 있다”라는 방백은 그것과 연결되는 것도 같았다. 전작 「세한도」가 아직 끓고 있는 자아에 대한 작품이라면, 「소를 끌고」는 자아를 밖으로 내보내 자아가 적어진 탓인지 자아 바깥을 그리고 있다. 또 비교해보고 싶은 것은, 「세한도」의 “집”은 그려진 집이지만 「소를 끌고」의 집은 주위의 존재들로 인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차이에 대해서 말하려면 또다른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아무튼 「소를 끌고」는 생동감 있는 이미지와 정신적 깊이가 맞물려 있다. 나는 감히 「소를 끌고」가 이번 시집의 심층을 이루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시집을 내면서 가능하면 어떤 결정적인 의도를 시에 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좀 했습니다. 시에 너무 많은 걸 요구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죠. 물론 의도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스무살 무렵 친구들은 공장에서 돈 벌어 집에 소 한마리 사드리고 싶어했어요. 이 시는 그런 마음으로 쓰고 싶었어요. 심우와 관련된 시는 예전 시집에 실은 「미황사 동백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에서 소와 「소를 끌고」에서의 소는 다르면서 같은 점이 없지 않은데요, 「소를 끌고」의 시는 보다 평상심의 소라고 할 수 있겠네요. 「미황사 동백꽃」의 소는 사나운 소입니다. 그 소를 길들여 집으로 가는 기우귀가는 마침표이자 회향입니다. 그러나 「소를 끌고」는 어떤 경지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정서로 그리움을 표현한 것입니다. 흔히 시(詩)와 선(禪)은 하나라고 하지만, 시로서 출발하되 시를 버리고 초월해버리는 것이 선의 세계입니다. 깨달음 역시 본향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새로운 세계를 그리워하고 어떤 강렬한 것을 원할 때조차도 언제나 낮은 집과 눈 덮인 마을이 떠오르는 것은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어릴 때 눈을 하도 좋아하니까 어른들이 늘, 너는 전생에 북만주에서 살았던갑다,라고 했어요. 어딘가에 뭔가를 두고 온 사람 같다는 말을 자주 듣기도 하죠.
먼지 일으키며 풀 한포기 없는 몽매한 길
끌고 얼마나 멀리 헤매어왔던가
소는 자하루 돌계단에서 풀썩 쓰러지네
동백꽃은 필 듯 아니 피고
세상길 버리고 동백숲에 숨어든 새들
비린 울음 삼키고 이 밤 어디서 젖몸살을 앓고 있는지
지나는 구름 밤새 오락가락 요사 창에 흩뿌려대던 것이
눈송인가 했더니 새벽 뜰 가득 별빛 쌓여 있네
별빛 공양 이고 새벽 법당 차가운 문고리를 당기니
길을 묻지 마라
여기 와서 길을 묻지 마라
소의 행방을 묻지 마라 하네
—「미황사 동백꽃」 부분(『그 모든 가장자리』)
백무산 시인의 시세계에서 ‘눈’은 빼놓을 수 없는 원천 경험인 것 같다. 「소를 끌고」도 “눈 덮인 낮은 집이 저 너머에 있다”로 시작한다.
아직도 눈 오는 풍경을 보면 자지러지게 좋아요,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봐요. 그래서 요즘은 그런 말은 하지 않습니다. 추위를 잘 견디는 체질이 아닌데도 겨울이면 활기가 생기는데 어릴 적부터 그랬어요.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 안의 어떤 결핍과 관련이 있을 겁니다. 뭔가 소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기다릴 것이 없을 때도 습관적으로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내 마음은 자주 그 막막한 풍경에 붙들려 있습니다.
내 물음을 일단락지어야 할 시간이 다 되었다. 어쭙잖은 질문을 내려놓고 금강석 같은 마지막 말을 나는 기다렸다.
우리 시대는 예전에 비해 많은 것이 풍요로워졌지만 의식은 더 단순해지면서 작은 차이를 지나치게 분리해놓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공통성을 빠르게 잃어가고 있죠. 차이는 적은데도 공통성을 잃어가는 것은 우선 노동 공동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더이상 땅이라는 공동의 터전과 집단적 협업노동이 중심이 되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므로 회귀적 공동체는 더이상 실현이 어렵다고 봅니다. 공통 영역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이전과는 다르죠. 그러나 계속 분화만 되는 것은 우리 삶의 근본을 분열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의미에 대해서 내가 뭘 알겠습니까만, 개인의 자유 확대와 함께 어떤 긴밀한 공통성을 찾아나가지 않으면 ‘의미’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공통성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멈춤’을 자주 떠올리게 되는데, ‘멈춤’은 단순한 정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현재 시간대의 밀도에 지나치게 압도당하는 시간을 살고 있어요. 한 세대 이전만 하더라도 할아버지의 시간과 손자의 시간과 그 이상의 시간을 함께 살았어요. 저는 불과 십년도 안 되는 두께의 ‘현재’라는 시간대에 갑갑함을 느낍니다. ‘멈춤’은 회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어느 순간에도 제로-베이스를 딛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시는 기성관념을 파괴하고 나오는 거잖아요. 시가 나오는 곳이 바로 제로-베이스라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 제로-베이스는 몸에서 출발하죠. 몸에 대해서 말할 때면 흔히 ‘사회적 신체’를 떠올리는데 그보다 더 근본적인 공통성 문제와 연결해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인류학자의 말처럼 ‘멀고 먼 시선’을 가질 필요가 있는 거죠. 『폐허를 인양하다』에 있는 「철물점에 가서」라는 시는 시선을 멀리 둘 필요가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문명을 부정하지 않아요. 어느 시대는 인간적이었고 어느 시대는 야만적이었다는 식으로 평가하고 싶지 않아요. 다만 목전의 과열된 시간만을 살고 있는 ‘현실’을 문제 삼고 싶은 겁니다. 어느 시에선가 나는 ‘십만년을 살아야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류가 탄생하던 시간부터 현재까지 전 시간대를 살 수 있다는 생각에서죠. 현대 도시인들은 ‘현재’의 시간대에 펼쳐지는 것만을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현재’라는 시간대는 휴대폰의 새로운 모델이 출시되는 시간만큼 짧아요. 그러한 ‘현대’의 시간에 인간의 전부를 할애해버려도 괜찮을까요?
다시 시로 돌아와서 마지막 말을 보태자면, 오직 시만이 할 수 있고 시 아니면 어떤 것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할 뿐입니다.
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이런 자리는 내게 매우 드문 일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써놓고도 내가 설명을 할 수가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말한 대로 믿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