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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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기석 咸基錫

1966년 청주 출생.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오렌지 기하학』 『뽈랑 공원』 『착란의 돌』 『국어선생은 달팽이』, 동시집 『숫자벌레』 등이 있음. remma@hanmail.net

 

 

 

이타사(利他寺) 입구

 

 

낮에 도축장에서 죽은 돼지를 안았던 팔뚝과 가슴으로

그는 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간다

왠지 미안하다 몸 구석구석 배어 있을 돼지피와 주검의 냄새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의 목을 간질이며 까르르 웃고

유치원 옆 대숲에 눈발이 흩날린다

 

선 채로 온몸이 뼈가 되어가는 대나무들

죽은 자들이 숲의 공중에서 검은 바구니를 들고 지상으로

흰 꽃눈을 계속 흩뿌리고 있다

그때마다 어미 찾는 들짐승처럼 바람은 목을 세워 울고

사람의 묘지 쪽으로 몸을 휘는 나무들

 

저 뼈 속에 고인 순백의 어둠을 지나 먼 우주로 내리는

아내의 눈망울 닮은 눈송이 하나

아내를 묻었던 거친 손으로 이제는 아이를 안고

똑똑히 맞서야 할 백색 눈보라의 날들

사무치던 아픔과 시간들은 칸칸의 뼈마디가 되어 말이 없고

 

눈 덮인 길이 장엄한 백지다

죽은 아내가 꾸는 흰 꿈결에 찍히는 슬픈 산새 발자국

그는 가만히 눈을 감고 귓바퀴에 내리는 차갑고 아픈 시를 듣는다

대지가 제 맨살을 영하의 대기에 드러내놓은 채 언 가슴으로

눈의 울음을 차곡차곡 받고 있다

 

아이가 오들오들 떨며 비린 품속을 파고든다

그는 낡은 잠바 깃을 올려세우고 힘껏 아이를 끌어안는다

이타사(利他寺) 입구에 고단한 하루를 내려놓고 걸음을 재촉한다

마을 어귀, 밤이 까만 어미개처럼

다섯마리 새끼를 낳아 눈과 젖은 발을 핥아주고 있다

 

 

 

작전명, 하늘을 나는 돼지

제2차 세계대전 오가사와라(小笠原) 학살사건

 

 

콧구멍이 긴 일요일의 전장

태평양을 건너온 분홍 돼지들이 치찌시마(父島) 해안을 날고 있었다

벚꽃축제처럼 하늘에서 하늘하늘 폭탄 꽃비가 내렸다

격납고에서 천황이 키운 하이에나들이 튀어나왔다

타조는 모래더미에 머리를 박고 숨었다

 

타조의 꼬리깃털을 뽑으며 조선인 소년병이 말했다

바보 겁쟁이, 하이에나도 모두 폭격기야

아이들은 야자나무 꼭대기로 올라가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피멍 든 머나먼 고향땅, 죽창에 피살된 엄마와 아빠

사라진 이름들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빙빙 공중을 돌던 돼지들이 분홍 똥 폭탄을 누었다

파편이 터지고 소년은 진흙 구덩이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타조가 진흙탕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집과 놀이터를 잃은 타조가 소년과 싸우기 시작했다

소년은 뚜껑이 날아갔고 타조는 밑창이 떨어졌다

소년은 두번째 서랍이 빠졌고 타조는 세번째 다리가 부러졌다

 

지느러미 빨간 달이 태평양 해구로 침몰할 때

들꽃 흐드러진 언덕마다 어린 병사들의 사체가 쌓여갔다

백주의 하늘에서 하이에나와 돼지들이 연기를 뿜으며 전쟁놀이를 했다

태양은 눈이 뻘게지도록 모르핀에 취해 있었고

광대뼈가 깨진 구름의 엉덩이에서 검은 피가 흐르는 동안

 

난쟁이 게이형제 다찌바나, 마또바, 모리, 요시이는

유골 항아리 같은 지하벙커에 숨어 사체 육포를 뜯었다

지구 모양 케이크에 칼과 국화를 꽂고 포로들의 인육을 뜯었다

콧구멍이 검게 탄 일요일의 전장이었다

포로들의 눈알이 윙윙, 치찌시마 해안을 골프공처럼 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