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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볼턴의 강대국 정치와 남북관계의 이행기 자율성

 

 

이정철 李貞澈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공저 『현대 북한학 강의』 『북미 대립』 등이 있음.

rheeplan@ssu.ac.kr

 

 

하노이회담 이틀째인 2019년 2월 28일 오전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던 시점, 존 볼턴(John Bolton)은 실내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고 있던 자신들과 달리 김여정 부부장은 열대의 습도와 더위를 견디며 꿋꿋이(stoically) 야외에 서 있었다고 자신의 회고록에 쓰고 있다. 판이 깨질지도 모르는 불길한 상황에서 김부부장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하에서는 볼턴 회고록(The Room Where It Happened, 2020)에 깨알같이 숨어 있는, 그래서 언론이 주목하지 못한 감춰진 진실들을 중심으로 2018년 이후 남북관계와 북미협상의 숨은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굳이 볼턴의 김여정 부부장에 대한 평가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현 상황 해석을 7·10 김여정 담화로 마무리하기 위한 설정 정도로 이해하기 바란다.

 

 

1. 볼턴의 강대국 정치와 알려지지 않은 깨알 진실

 

트럼프 행정부 ‘어공’(어쩌다 공무원) 4수생1 볼턴이 북한에 대해 갖고 있는 적개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2002년 북미회담 당시 미 국부무의 대담한 접근법(bold approach)을 파탄 내고 북핵문제를 플루토늄 문제로부터 고농축우라늄(HEU) 문제로 전환시킨 장본인이다. “8월의 어느 날, 국무부 군축 담당 차관이었던 볼턴이 서울에 들어옵니다 (…) 그는 이태식 외교부 차관보를 만나 모종의 ‘정보’를 전합니다. 한국 정부 내 안보 진용이 바짝 긴장합니다. ‘북한 고농축 우라늄 계획의 심각성’이 담긴 정보를 전했기 때문입니다.”2 그 때문에 2002년 켈리(J. Kelly) 국무부 차관보의 평양 방문은 북한의 핵 시인 논의로 한바탕 소동을 벌이는 2차 북핵위기로 이어진다.

북한에 대한 그의 악연은 2006년에 재연된다. 북한의 1차 핵실험에 대해 2006년 10월 14일 유엔제재 결의안 ‘1718호’가 채택되자 북한 박길연 유엔 주재 대사는 ‘갱단 같은 행위’라며 제재 거부를 밝히고 퇴장해버린다. 당시 유엔 주재 미국대사로 있던 볼턴은 이에 발끈, 유엔은 북한을 축출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곧 이어진 미국 중간선거에서 대승해서 상원을 차지한 민주당에 의해 볼턴은 12월에 유엔 대사직을 떠나게 되었다. 북한의 저주라고 할까, 볼턴이 북한과의 숙적의식(rivalry)에 빠지게 된 결정적 순간이라고나 할까?

 

종전선언이 실패한 까닭과 ‘six p.m. text ’

그로부터 12년을 떠돈 볼턴이 2018년 4월 9일 백악관으로 되돌아왔을 때 누구보다도 긴장한 건 북한이었을 것이다. 볼턴 보좌관은 이미 진행 중인 북미정상회담 논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주지하다시피 그의 개입으로 시작된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 논란은 예정된 6월 북미회담을 파탄 직전까지 내몰았다. 이때 5월 26일 원포인트 남북정상회담과 이어진 한국정부의 극적인 중재로 북미정상회담의 모멘텀은 되살아났다. 이후 김영철 특사의 방미와 친서로 불씨를 되살린 북한은 드디어 6월 12일 싱가포르정상회담을 갖게 되었다.

당시 김영철 특사의 방미 소식에 당황한 볼턴은 김영철이 백악관에 입성하는 것 자체를 막기 위해 분주히 노력했다. 뉴욕회담만 허용하자는 1차 저지선이 실패하고 백악관회담이 확정되자, 오벌 오피스(oval office) 회담을 반대하는 것을 2차 저지선으로 삼았다. 결단의 책상(resolute desk)이 있는 오벌 오피스에서 김영철 특사가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는 것 자체를 북한 권력에 대한 정당화로 생각한 볼턴의 반대는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 앞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심지어 1시 15분부터 2시 45분까지 한시간 반이나 이어진 특사 면담에 볼턴과 펜스(M. Pence) 부통령은 배석조차 허락되지 못해, 둘 다 충격을 받았다고 자조하는 장면은 이후 이어질 북한과의 새로운 숙적 관계를 보여주는 전초전이었다.

이렇게 되살아난 세기의 싱가포르회담에서 미국은 장문의 공동선언안과 단문의 형식적 공동선언안(short statement)이라는 두개의 시나리오를 들고 갔다. 북미 실무진이 사실상 합의에 도달한 초안(six p. m. text)을 들고 오자 볼턴은 추가 요구사안을 관철하기 전엔 대통령이 서명해서는 안 된다며 폼페이오(M. Pompeo) 국무장관을 강력하게 압박했다. 추가 요구사안이란 하나는 유엔제재 결의안 1718호를 합의안에 명기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일본인 피랍자 문제 해결을 다루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자는 자신이 유엔 주재 미국 대사였던 2006년 10월 채택한 것으로 CVID라는 문구를 처음으로 포함한 그 유엔 결의안이었다. 싱가포르회담 직전인 2018년 5월 CVID라는 표현 때문에 회담 결렬의 위기까지 갔던 북한이 받을 수 없는 구절을 볼턴이 또다시 강요한 것이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일본인 피랍자 문제를 북미공동선언에서 다루라는 볼턴의 생떼 같은 요구였다. 북일회담도 아니고 북미회담에 일본인 문제를 집어넣는다는 발상은 미국의 안보보좌관이 얼마나 일본에 경도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미국 실무팀이 북한에 창피를 당했다는 세간의 평가가 틀린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밤샘 협상에서 미국의 수정 요구 때문에 양국은 이미 합의된 초안을 폐기하고 짧은 합의문을 채택하게 되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우리가 아는 싱가포르공동선언이고, 공동선언 논의의 핵심이었던 종전선언문안은 영문화까지 근접했지만 결국 최종 합의안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곧이어 7월 7일 폼페이오 장관이 평양을 방문해 후속조치를 논의했지만, 김정은 위원장을 면담하지 못한 채 귀국했고 북미는 추가합의에 실패하게 된다.

 

백악관 정상회담 무산과 볼턴의 활약

이후 8월 백악관의 결단으로 한미군사연습 연기가 결정되자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낸다. 이른바 ‘러브레터’로 알려진 유명한 편지다. 이 편지를 받은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을 미국으로 초청해 백악관에서 2차 정상회담을 갖자는 논의를 시작한다. 이에 놀란 볼턴은 백악관회담 불가론을 내걸고 9월 뉴욕회담론을 권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엔총회 시기 북미정상회담이 가능하지 않다는 입장을 내걸며 논란을 벌인다. 8월 말 폼페이오 장관의 실무 방북이 결렬되고 이 논의가 공전하지만, 김정은 위원장의 9월 10일 친서는 또 한번 백악관 내부 논쟁을 촉발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9월 10일 친서를 받아 재차 북미정상회담 개최론을 펼치자, 볼턴은 ‘선 실무회담, 후 정상회담’론을 들고나와 사력을 다해 정상회담을 막는다. 이번엔 아예 노골적으로 정상회담을 막기 위한 시간 끌기용으로 선 실무회담론을 주장했다. 참모들의 반대에 밀린 트럼프 대통령은 11월 중간선거가 끝난 바로 다음 주에 회담을 준비하라고 물러선다. 예정대로라면 11월 6일 중간선거가 끝난 그 무렵에 북미정상회담이 개최되도록 준비가 시작됐어야 하지만, 볼턴은 그 장면을 이렇게 쓰고 있다. “5주간의 시간을 벌었다. 5주는 트럼프 시대(trumpworld)라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으니 더욱 분발할 때다.”3

2018년 10월 7일 폼페이오 장관이 평양을 재방문하는데, 그 직전인 10월 2일 북한은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공식적으로 종전선언을 접고 제재 해제 논의에 들어갈 것을 제안한다.4 이에 따라 2018년 11월 8일 김영철 특사의 방미 일정이 합의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김영철의 방미는 우여곡절 끝에 취소된다. “다행히도 김정은이 특사 파견을 취소했고, 4차 남북정상회담(김정은 답방—인용자)은 표류했고 빨라야 2019년에나 가능한 상황이 되었다.”5 북미회담이 11월 김정은 위원장 답방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 시기를 반추해보면 2018년 하반기 2차 북미정상회담을 위해 북한이 내세운 세가지 전략을 읽을 수 있다.

첫째, 북한은 미국이 주장하는 선 실무회담을 시간 끌기로 판단했다는 점이다. 이미 싱가포르 실무회담 과정에 볼턴이 관철시킬 것을 명령한 두가지 이슈(CVID와 일본인 피랍자 문제 포함)는 합의의 의지보다는 회담 결렬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는 판단이다. 뒤이어 폼페이오 장관의 7월 7일 방북이나 10월 7일 방북에서도 북한은 실무회담에서 큰 실익을 보지 못할 거라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북한의 태도는 지금까지도 분명하게 이어지고 있다. 최선희, 권정근 등 외무성 관리들이 미국과의 대화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최근 성명의 의미를 잘 해석해야 하는 이유다.

둘째, 2018년 9월 북한은 남·북·미 3자 정상회담 혹은 북미회담과 남북회담을 동시 혹은 교차로 진행하는 복(複) 2자형식의 삼각회담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9월 10일 대미 친서를 통해 북한은 이미 예정된 9월 19일 남북정상회담과 비슷한 시기에 북미정상회담을 가질 것을 제안한 것이다. 싱가포르회담 당시 북한이 남·북·미 정상회담을 한사코 반대한 것과 비교해보면 한국정부의 역할에 신뢰를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반전이었다.

셋째, 북한은 9월 10일 친서를 보낼 당시 이미 영변 핵시설 해체를 협상 수단으로 던지기로 상정해놓았음이 분명하다. 북한은 영변 해체안을 들고 미국과의 비핵화협상을 본격화하고자 했고, 실제 9월 19일 남북정상회담에서 영변 해체안을 공식화한 이상 이제 북한의 요구는 종전선언보다 한걸음 나아간 다음 단계인 영변 해체(비핵화)의 가격을 청구하는 것이었다. 제재 해제론과 종전선언 무용론은 이렇게 나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폼페이오 장관의 10월 7일 방북을 앞둔 시점에 북한은 느닷없이 “종전은 결코 누가 누구에게 주는 선사품이 아니며 우리의 비핵화조치와 바꾸어 먹을 수 있는 흥정물은 더더욱 아니다 (…) 미국이 종전을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도 구태여 이에 연연하지 않을 것”6이라는 논평을 낸다. 영변 해체의 가격은 종전선언이 아니며 종전선언은 그 전제 혹은 전 단계의 문제라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볼턴에 따르면 김정은 위원장은 싱가포르에서 “종전선언의 다음 단계는 제재 해제냐”라고 질문함으로써 이미 그 순서를 밝힌 바 있다. 북한에 있어 영변은 “우리 핵계획의 심장부와도 같은 핵심시설”이므로, 이같이 중차대한 시설의 해체를 “반세기 전에 해결되었어야 할 (…) 선차적인 공정”일 따름인 종전선언과 맞바꾸겠다는 것은 ‘강도 논법’이나 다름없다는 비판에 나선 것이다.7

북한은 이로써 2차 북미정상회담의 의제를 ‘비핵화 대 제재 해제’로 설정하고, 2018년 8월 군사연습이 중단됨에 따라 종전선언과 적대시 정책 철회 문제는 전 단계, 즉 낮은 단계의 문제로 간주하기 시작한다. 이제 북한이 원하는 협상의 성격은 분명해졌고 하노이를 향한 다음 걸음이 시작된 것이다.

 

하노이회담과 ‘영변 플러스 알파’의 실체

그러나 북한의 성급한 판단은 하노이에서 좌절을 겪어야 했다. 볼턴은 하노이회담을 준비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치밀한 작업에 나섰다. 회담의 실패를 향한 볼턴의 집념은 대단했다. 2월 12일 45분짜리 백악관 준비회담에서 볼턴은 대통령이 ‘영변 플러스 알파’에 합의하는 빅딜과 ‘영변 해체’만 합의하는 스몰딜 사이의 양자택일 상황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걸어 나오기’(walking away, 협상 결렬)라는 제 3의 대안이 있음을 설득하는 데 집중했다. 짧은 회의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영상을 제작하는 등 그의 집요한 노력은 통념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도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의문을 갖게 할 정도의 이 치밀한 준비는 트럼프 대통령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카터 이래 모든 미국 대통령이 북한과의 회담을 자랑하는 장면과 북한의 도발에 따른 회담 실패 장면을 엮어낸 그는 마지막에 레이건-고르바초프의 레이캬비크회담을 보여주는 것으로 영상을 마무리했다. 레이캬비크회담에서 레이건 대통령이 걸어 나오기를 통해 어떻게 다음 회담의 승기를 잡았는가를 알려줌으로써 트럼프 대통령에게 양자택일이 아닌 제3의 대안이 있음을 각인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뒤이어 볼턴은 비건(S. Biegun)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하노이협상 초안을 집중 공격한다. “북한 측이 쓴 초안 같다”는 비난이 보여주듯 그는 비건 대표나 국무부 외교관의 비밀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놓는다. 그는 펜스 부통령, 멀베이니(J. Mulvaney) 비서실장 등에게 전화를 걸어 트럼프 대통령이 비건 대표의 초안에 현혹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점을 재삼 강조한다. 결국 하노이회담은 볼턴의 의도대로 걸어 나오기로 귀결되고 합의는 결렬된다.

한편 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빅딜안으로 던진 플러스 알파의 내용이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폐기였다고 밝힌 대목은 매우 흥미롭다. 볼턴은 트럼프 대통령이 ICBM을 얘기하자 자신이 나서 이에 더해 핵탄두, 생화학무기, 중장거리미사일 모두의 폐기를 주장했다고 자랑하는데, 이는 회담 종결자로서의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준다.

 

6·30 판문점회담과 한국정부 역할론

하노이회담에서 드러난 이상의 쟁점에 근거해 문재인 대통령은 북미정상회담을 또다시 중재하고 나섰다. 김정은 위원장은 2019년 4월 12일 시정연설을 통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제가 할 소리는 당당히 하면서 민족의 리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여야 합니다”라고 비판했지만, 이를 등 뒤로 하고 한국정부는 북미회담을 재차 중재하는 길에 나선다. 볼턴에 따르면 4월 11일 한미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에 차기 북미회담과 관련해 세가지 사항을 제안했다. ① 시기: 6월 12일에서 7월 27일 사이 트럼프 대통령 방한 및 북미정상회담 개최 ② 장소: 판문점 혹은 미 해군 함선 ③ 방식: 실무회담 없는 3자 정상회담이 그 내용이었다.

볼턴의 회고가 사실이면 문대통령은 6·30 3자 정상회담 실현을 위해 구체적인 전략을 갖고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5월 7일 트럼프 대통령과의 통화를 통해 그의 방한을 다시 한번 설득한 장면은 6·30회담 성사의 매우 중요한 밑거름이었지만, 이런 대통령의 의지와 구상을 이해하지 못한 외교관과 일부 정치인은 당시 통화를 ‘방한을 구걸한 굴욕’이라고 비난했다. 그 통화야말로 6·30회담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 계기였음을 생각하면 ‘굴욕외교’ 운운이 얼마나 단견이었는지 알 수 있다. 국내의 이같은 해프닝에 아랑곳없이 일주일 뒤인 5월 16일,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6월 방한 계획을 공표하자 남·북·미 정상회담 카드를 둘러싼 움직임은 급박하게 진척되기 시작했다.

이후 문대통령은 6월 정국이 다가오자 북한과 미국 각각을 향해 메시지를 발신했다. 2019년 6월 14일의 스톡홀름연설이 북한에 대화와 신뢰 구축 방법론을 제안한 것이라면, 6월 26일의 세계 6대 뉴스 통신사 합동 서면인터뷰는 미국을 향해 던진 제언이었다. 이 인터뷰에서 문대통령이 영변 해체의 중요성을 특별히 추가 강조하고 나선 것은 하노이합의가 불발로 끝난 이유가 영변의 중요성을 간과한 데 있음을 미국에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다가온 북미회담이 북한에도 충분히 의미있는 회담이 될 수 있게끔 한국정부가 돕겠다는 대북 메시지이기도 했다.

6·30회담은 물론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와 이에 대한 북한의 즉답으로 마련된 세기적 이벤트였다. 그러나 하노이 이후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이라는 무대를 만든 것은 전적으로 한국정부의 노력이었고 그것은 남·북·미 회동을 만들기 위한 전략적 행보의 결과였다. 남북관계에 대한 북한의 불만은 여전하지만, 그 이면에 깔린 한국정부의 노력이 평화적 추동력으로 기능하고 있었음은 평가해줘야 한다. 6·30회담은 중재자냐 촉진자냐 당사자냐를 둘러싼 논란에서가 아니라, 연출자가 어떤 행보를 통해야만 실질적 협상을 진전시킬 수 있는가를 실증해준 극적 장면이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8

 

 

 

2. 2020년 북한의 6월 공세와 자주의 역설

 

볼턴의 기록은 2019년 9월까지다. 그의 마지막 활약은 2019년 8월 워게임(war game)에 집중된다.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연합연습을 워게임이라 부르며 그것을 중단하라고 지시한다. 7월 16일 폼페이오 장관과의 회의에서 볼턴은 자신이 한국과 일본을 방문한 이후 이 문제를 판단하자고 역제안해 합의에 성공한다.

2019년 7월 25일, 방위비 협상차 방한한 그는 해리스(H. Harris) 대사와 에이브럼스(R. Abrams) 한미연합사령관과의 조찬회동을 갖는다. 이 자리에서 두 군인은 한미연합연습 중단은 양국의 ‘전투태세’(Fight Tonight!)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며 대통령의 그런 결정에 경악했다고 볼턴은 회고록에 적었다. 그는 미국에 돌아가 워게임을 지속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렸고, 트럼프 대통령이 “그렇다면 방위비를 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이를 수용했다고 쓰고 있다. 이에 반발한 북한은 2019년 8월 계속된 로켓 발사에 나선다. 북한식 이스칸데르, 초대형 방사포 등의 이름이 대중화된 시기가 바로 이때다. 이처럼 북한이 로켓을 발사하며 강력히 반발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8월 14일 백악관회의에서 군사연습을 강행한 결정을 후회한다며, 20일로 예정된 훈련 종료일에 맞춰 단 하루도 연장하지 말고 군사연습을 끝내라고 지시한 것으로 그려진다.

실제 김정은 위원장은 6·30 판문점회동 당시 트럼프 대통령에게 8월 군사연습의 중단을 조건으로 북미실무회담을 진행하겠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 당국이 군사연습을 강행함에 따라 북한의 불만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 것으로 보인다. 2018년에 중단된 한미군사연습이 2019년 3월에 이어 8월에까지 강행된 것을 북한은 사실상 적대시 정책의 부활과 북미회담의 결렬 선언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문대통령은 임기 내 전작권 반환이라는 공약 실행을 위해서는 8월 군사연습의 실행이 불가피하다는 군부의 논리를 수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IOC(Initial Operational Capability, 기본운용능력), FOC(Full Operational Capability, 완전운용능력) 그리고 FMC(Full Mission Capability, 완전임무수행능력)를 점검해 합격점을 받는 것을 조건으로 전작권을 넘겨준다는 한미합의를 지켜야 한다는 규범 논리를 대통령이 거부하기 어렵다는 현실론이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같은 우리 측 사정을 북한이 수용할 여유가 있는가 하는 데 있었다. 전작권 전환의 긍부정 판단 여부와 무관하게 북한은 한국정부에 적대시 정책의 공동책임론을 묻기 시작했다. 혹시나 볼턴의 보고서에 한국정부가 전작권 전환을 위해 8월 워게임을 적극적으로 원했다고 쓰여 있었다면, 그것은 사실의 왜곡이었을까? 그리고 그 책임은 볼턴에게만 있었을까? 소위 ‘자주의 역설’9이 남북 간에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한 장면이라 하겠다.

이런 상황의 한 가운데에 8·15가 있었다. 전통적으로 광복절연설은 남북관계에 대한 중요한 계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8·15연설에 대한 기대는 매우 높았다. 직간접적으로 하노이회담과 판문점회담이라는 판을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한국정부가 이어진 8·15연설에서 무엇을 제안하는가,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에 기대를 가질 만했기 때문이다.

실제 북한은 2019년 1월 신년사에서 금강산, 개성 협력을 제안했고 그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대해 남북 간 합의가 있었다는 주장에 따르면 북한은 적어도 담당부서인 통일전선부 차원에서는 8·15연설을 통해 그 합의가 실행되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연설에서 대통령은 남북관계에 대한 포괄적 선언 외에 어떤 구체적 제안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연설은 아베 총리의 느닷없는 도발에 대응한 ‘한일대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연설의 상당 부분을 지소미아(GSOMIA)의 조건부 종료에 집중했고, 예상되었던 8·15 남북관계 드라이브는 오히려 후퇴시키는 인상이었다. 한일대전을 앞두고 북한문제로 한미갈등을 초래할 수 없다는 사정 변경론이 작동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에 대한 북한의 실망은, 특히 책임 부처의 당혹감은 예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이를 집약하여 표현한 것이 8월 16일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성명이었다. 성명에서 통일전선부는 “태산명동 서일필”(태산이 떠나갈 듯 요동쳤으나 나온 것은 쥐 한마리뿐이다)이라며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 운운하며 울분을 폭발했다. 이전까지 대남 비방이 중재자론에 대한 비판과 당사자론 권고에 초점이 있었다면 이후로는 한국 책임론 그 자체로 치달았다. 우리 입장으로서는 한일대전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강변할 수 있겠지만 갈 길 바쁜 북한이 이를 이해할 리 만무했다.

요컨대 지난해 전작권 반환을 위한 한미연합연습 실행과 한일대전을 둘러싼 대미 구애전이라는 두가지 상황 변경은 한국정부에 대한 북한의 배신감을 자극하는 계기가 된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 더해 2020년 탈북자들이 날려 보낸 전단들은 도를 넘는 수준의 것들이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잠잠한 2~3월을 보낸 북한이 6월 공세, 즉 대남 비방전과 연락사무소 폭파라는 강수를 둔 것은 이같은 맥락에서 해석 가능할 것이다.

 

 

 

3. 협상 ‘재개’ 단계의 의미와 7·10 김여정 담화

 

따지고 보면 남북관계 긴장의 원인도 북미대립에 있다. 이런 근본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이번 7·10 김여정 담화는 북미관계의 돌파구를 예측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나는 《비핵화조치 대 제재해제》 라는 지난 기간 조미협상의 기본주제가 이제는 《적대시철회 대 조미협상재개》 의 틀로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여정의 주장은 ‘협상 재개’ 단계라는 매우 특수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비핵화 대 제재 해제’라는 프레임은 2018년 9·19 남북정상회담에서 북한이 영변 해체안을 제시한 후, 종전선언 논의를 뛰어넘어 바로 제재 해제 논의 단계로 전환하자고 주장한 데서 시작된 논점이었다. 영변이라는 중추적 시설의 해체를 종전선언 정도로 ‘바꾸어 먹으려는’ 미국의 주장을 ‘강도 논법’으로 비판한 북한이 ‘영변 해체’와 ‘제재 해제’ 간의 교환표를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비핵화 대 제재 해제’라는 하노이회담의 주제는 평행선으로 이어졌고, 영변 이상을 내놓을 수 없는 북한과 영변만 합의할 수는 없는 미국의 무한 대결은 끝을 볼 수 없었다. 즉 북한은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빅딜안(ICBM 폐기)을 수용할 수 없고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원하는 스몰딜안(영변만 폐기)을 수용할 수 없다는 양국 국내 정치의 한계를 상호 확인하는 데 만족할 따름이었다.

2020년 김여정 부부장의 7·10담화는 이같은 교착상태를 인정하고 협상 프레임을 하노이회담 이전, 즉 싱가포르회담의 논점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적대시 정책 철회 대 조미협상 재개’라는 프레임은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종전선언이 논의되던 상황으로 돌아가 신뢰를 구축함으로써, 후속 회담 재개의 모멘텀을 만들자는 제안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논자들은 김여정 담화가 명시하는 적대시 정책 철회가 주한미군 철수를 의미하는 등, 협상의 문턱을 높이는 전형적 회담 지연책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북한 외무성의 ‘군축 및 평화연구소’가 2020년 6월 25일 발표한 「미국의 대조선적대시정책철회는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선결조건」이라는 보고는 주한미군 철수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북미 간 교전관계, 교전 당사자 관계를 강조하며 군사연습의 위협성을 부각하는 데 방점을 두고 있다. 이 보고에 따르면 북한이 원하는 적대시 정책 철회란 2018년 8월 당시처럼 한미가 연합군사연습을 중단하자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 점에서 동 보고는 협상의 문턱을 낮춘 것이라는 반론이 가능하다.10

김여정 담화는 “미국은 대선전야에 아직 받지 못한 크리스마스선물을 받게 될까봐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 우리는 미국에 위협을 가할 생각이 전혀 없으며 이에 대해서는 위원장동지도 트럼프대통령에게 분명한 립장을 밝히신 적이 있다. 그저 우리를 다치지만 말고 건드리지 않으면 모든 것이 편하게 흘러갈 것이다”라고 하여 대미 도발이 없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조건부이긴 하지만 대미 도발을 삼가겠다는 김여정 담화의 전체 맥락은 트럼프 대통령에겐 나쁘지 않은 메시지로 보인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7·10 김여정 담화가 나오던 시점인 7월 9일(미국 시각) 회견에서 “우리는 정상회담의 바로 아래 수준(the levels beneath the summit)에서든, 시니어 리더들이 다시 모이는 정상회담에서든”이라고 하여 바로 정상회담을 갖기 어려우면 준정상회담 수준의 회담을 고려하고 있다는 생각을 내비쳤다. 이에 화답하듯이 같은 날 김여정 담화는 “가능하다면 앞으로 독립절 기념행사를 수록한 DVD를 개인적으로 꼭 얻으려 한다는 데 대하여 위원장동지로부터 허락을 받았다”라고 하여 김여정 부부장 자신이 직접 나설 수 있다는 의향을 드러냈다. 그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사업에서 반드시 좋은 성과가 있기를 기원한다는” 김정은 위원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의 선거를 돕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쯤 되면 김여정 담화의 아리송한 마지막 구절은 2000년 클린턴 대통령의 오벌 오피스를 방문한 조명록 차수의 방미를 연상시키는 것 아닐까? 실제 하노이회담 당시 스몰딜에 머무르면 재선이 불리해진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말을 듣던 김정은 위원장이 그러면 자신도 더이상 스몰딜을 고집하지 않겠다며 물러섰다는 일화는, 트럼프-김정은 신뢰관계 구축이라는 양측 주장하에 미국 대선을 염두에 둔 이벤트가 이어질 수 있다는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요컨대 하반기 정국의 반전은 김여정 부부장이 준정상회담 즉 ‘정상회담의 바로 아래 수준의 회담’에 직접 나설 수 있는 명분과 환경이 조성되는가에 달려 있다고 보인다. 김여정 담화는 대선을 앞두고 미국이 스몰딜, 즉 영변만 해체하는 비핵화안 수용이 불가능한 조건에서 무리하게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보다는 그 이전 단계로 자신이 나서는 선거용 이벤트를 통해 신뢰 구축이 가능하다는 점을 내비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협상 ‘재개’ 단계라는 특수 용어가 의미하는 속내를 이렇게 해석한다면 그 이벤트의 성사 여부는 적대시 정책 철회라는 조건을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에 달리게 된다.

아마도 그 첫 단추는 교전관계의 상징인 8월 군사연습의 중단 여부일 것이다. 2018년 한미군사연습 중단 선언 직후에 김정은 위원장이 8월초 트럼프 대통령에게 ‘러브레터’와 9월 10일 친서를 보내 정상회담을 제안했던 사실을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반면 2019년 6·30 판문점 북미회담의 모멘텀을 살리지 못한 지난해 워게임 강행의 오류를 올해도 반복한다면, 김여정 부부장 담화는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경우 한반도 정세는 또다시 격랑에 놓일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2020년 8월 한미군사연습을 축소·진행하는 한미 군사 당국의 태도는 매우 애매한 수준의 것으로 북한 지도부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할 가능성이 높다. 훗날 모처럼 나온 북한의 유화적 성명을 낚아채 기회로 만들지 못했다는 꼬리표를 달게 될 경우 무책임한 정책에 주어질 후과는 상상 이상의 것일 게다.

 

 

4. 결

 

트럼프 현상이 촉발시키긴 했지만, 기존의 강대국 질서나 미국 주도의 ‘바퀴축과 바큇살’(hub and spoke) 동맹이라는 국제 레짐은 이미 디커플링(decoupling) 과정의 한가운데로 진입해 있다. 거의 모든 구질서가 디커플링 과정을 거치며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싸움의 승패를 예단하고 일방에 ‘다 걸기’하는 방식의 냉전형 생존 모델로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단일 패권의 완전한 승리나 완벽히 단절된 양극적 사회가 공존하지 않는 한, 중약국들에 이행기적 자율성은 필연적이다.

물론 이행기의 결과에 따라 자율성 행사의 후과는 있겠지만 결과론과 사후정당화로 자율적, 즉 전략적 결단의 의의를 폄훼할 이유는 없다. 시행착오를 거친 자율적 판단이 만들어낼 공공재 생산능력에 비추어보면, 결과론은 우연에 기대어 능력 부재의 무한 순환 고리만 맴도는 자기합리화일 뿐이다. 주권국가의 자율성은 처참한 실패로 귀결될 수 있다는 공포 마케팅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무모해 보이는 자율성이 ‘실패의 성공’이라는 역설을 만든다는 점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자율성을 이행기 디폴트값으로 삼는 데 거침이 없어야 하는 이유이다.

글로벌 이행기 그리고 모든 기존 질서가 디커플링을 겪고 있는 현실에 직면해, 남북관계가 강대국 정치의 소용돌이로부터 이행기적 자율성을 추구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지난 2년 한국의 통일외교안보 정책을 판단하는 기준점이다. 볼턴 회고록에 드러난 수많은 순간 중 우리가 만든 것을 지킨 장면과 잃어버린 장면을 돌아보면, 강대국 정치의 소용돌이에서 어떻게 남북관계의 자율성을 지킬 것인가에 대한 방법적 고민은 깊어간다. 우리가 만든 성과마저 우리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강대국 정치의 현실에 눌려 애써 만든 탑을 스스로 부숴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되겠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가를 결정하는 마지막 한뜸을 선택하는 순간에 이행기적 자율성, 즉 미래를 향한 초심이 중요한 이유다.

 

 

  1. 볼턴은 트럼프 행정부 들어 국무장관직 두번, 국가안보보좌관직 두번의 면접을 거쳤으나 모두 떨어졌고 2018년 4월 9일 마침내 맥매스터의 후임으로 공직에 임명된다.
  2. 이우탁 「2002년 여름, 볼턴은 왜 서울에 왔을까」, 연합뉴스 2020.7.2.
  3. John Bolton, The Room Where It Happend, Simon and Schuster 2020, 111면.
  4. 이는 7·10 김여정 담화에 나온 이른바 ‘비핵화 대 제재 해제’ 단계의 시작을 의미한다.
  5. John Bolton, 앞의 책 285면.
  6. 조선중앙통신 2018.10.2.
  7. 같은 논평.
  8. 이 부분은 다음 책에 실린 필자의 글을 보완·작성했다. 이정철 외 『세계 정치·경제 변화와 한반도 평화 및 통일 전망』, 통일교육원 2020.9.1(근간).
  9. 한국정부의 국방 자주화는 군비증강 등으로 이어져 북한의 위협 인식을 자극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남북 사이에 상호 불신이 강화된다. 남북 간 안보 딜레마는 양측의 군비증강으로 이어지고 한국정부는 더욱 한미동맹에 의존하게 된다. 결국 자주화 노력이 동맹 종속을 강화시키는 역설적 상황을 초래하는데, 이러한 딜레마를 ‘자주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10. ‘군축 및 평화 연구소’ 발표는 6월 23일 김정은 위원장이 중앙군사위원회 예비회의를 통해 대남 작전을 ‘보류’한 직후에 나온 보고로 대미 및 대남 메시지의 성격이 강하다. 실제 이 연구소는 2018년 9월 4일 김용국 소장 명의로 “조선반도에서의 평화체제구축은 시대의 절박한 요구”라는 담화로 당시 현안이던 종전선언 채택에 대한 북한의 공식 입장을 정리·제시한 바 있다. 이 점에서 북한이 요구하는 적대시 정책 철회 제안에 종전선언이 들어 있다는 해석도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