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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사이 金思伊
1971년 전남 해남 출생. 2002년 『시평』으로 등단. 시집으로 『반성하다 그만둔 날』이 있음. haebang2004@naver.com
나를 사주실래요?
거인처럼 커다란 야자나무 꼭대기에서 원숭이들이 동그란 열매를 딴다 이 가지 저 가지 옮겨다니며 툭툭 떨어뜨린다 열매를 줍는 인간들이 웅성웅성 시끄럽다 원숭이들에게 언제 먹을 것을 주나요? 주인이 정해놓은 일당을 채워야 내려올 수 있어요 원숭이의 주인은 인간인가요? 노는 게 아니라 노동을 하고 있다니 인간만이 인간의 노동에 족쇄를 채운 건 아니네 몰랐어요? 놀라는 척 말아요 눈을 감고 귀를 닫는다 그런들 원숭이들은 종일 열매를 따고 먼 나라 아이들은 돌을 깨고 쓰레기를 주울 테지 죽을 때까지 죽어서도 대물림되어야지 그래야 살지
바람
간드러지게 노래를 잘하던 외숙모 눈웃음이 예뻤던 외숙모 고만고만한 새끼들 다섯을 놓고 동네 사내랑 눈 맞아 도망간, 도망을 가도 하필이면 옆 동네라니 바람처럼 멀리멀리 날아가든가 바람 잘 날 없는 집에 시집와 바람으로 맞선 외숙모는 바람처럼 사내와 도망을 친다 뿌리를 흔드는 태풍은 못 되면서 소문만 무성하게 흩뿌려놓은 채 잡혀오기 일쑤였다
세들어 사는 동생네에 갓난이까지 줄줄이 맡겨놓고 미친 듯이 찾아 헤매는 외삼촌, 소주 됫병 나발 불고 동네방네 휩쓸고 다니다 마지막 길엔 어머니를 찾아와 깽판을 부리고 꼬꾸라지던, 마흔 즈음 먼저 바람이 되어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외숙모의 바람은 멈추었으나 큰아들이 바람을 잡아탄다 큰아들의 바람을 잠재운 두 딸들 그제야 바람도 같이 늙는다
도망간 남편을 기다린 여자에겐 바람의 욕망이 없었을까 그 여자의 남자에게 첫 순정을 내주었던 어머니는 바람의 욕망이었을까 한창 꽃 같은 시간들이 바람 따라 흩어져버렸다 아픈 시간들이었다 아팠기 때문에 견뎠을 바람 같은 삶 아프기 때문에 바람을 좇아 떠돌았던 아버지 내 핏속에도 스며 있을 바람의 씨앗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마흔을 넘어서니 독기가 옅어진다 발갛게 열이 오른다 내 자궁 속 바람의 씨앗이 꿈틀거리는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