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평론
생명의 관측소와 새로운 노동시
김영희 金怜熙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불온한 미(美)와 다른 현실: 정한아 김성규 서대경의 시」 「페미니즘으로 김수영의 시를 읽을 때: 여성주의 언어와 감성적 혁명의 모색」 등이 있음.
yhorizon@naver.com
1. 재난 자본주의와 다른 현실
재난 상황에서 사회의 불평등과 착취의 구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재난 자본주의’의 작동은 누가 우리 사회의 취약계층인지를 보여주었다. 방역 시스템을 가동하며 우리 모두는 같은 배를 타고 있다고 강조하지만, 정작 배 안의 공간이 차별과 배제의 구조로 구획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예컨대 콜센터 노동자, 택배 노동자를 포함하여 상대적으로 높은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여전히 일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존재는 바이러스 방역과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 간의 사회적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준다.1
노동과 위험의 조건이 비단 재난 상황에서만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다. 고용노동부 공식 집계에 의하면 2019년에는 2,020명이, 2018년에는 2,142명이 산업재해로 생을 마감했다.2 산업화 이후 수십년째 지속되고 있는 이 죽음들은 한 작가가 쓴 것처럼 “한 개별적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나락으로 밀려 넣어지는 익명의 흐름처럼 보”인다. 그러니 “제도화된 약육강식이 아니라면, 이처럼 단순하고 원시적이며 동일한 유형의 사고에 의한 떼죽음이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고 방치되고 외면될 수는 없다”3라는 문장에는 어떠한 과장도 없다. 현대의 노동자는 고전적인 의미의 소외가 아니라, 바이러스 감염과 산업재해를 포함하여, 건강과 안전 혹은 깨끗한 공기와 수도의 공급과 같은 ‘삶의 물질적 조건들’에서 소외되고 있다. 맑스주의적 의미의 생산관계가 아니라 “삶의 물질적 조건들과 맺는 관계의 측면에서 착취당”하는 것이다.4
차별과 야만성의 시대일수록 다른 삶의 기획과 새로운 사회의 고안을 역설하는 목소리는 넘친다. 하지만 상품과 마케팅 사회에서 개인의 삶의 모습과 욕망은 점점 비슷해질 수밖에 없다. 시장에서 교환될 때의 능력과 값어치가 개인의 고유한 경험과 개별적인 시간이 지닌 가치를 대신한다. “이 풍요가 너절한 세상에/각자 다르게 사는 것이 패션인 시절에/어쩌면 생각이 이처럼 같은지”(백무산 「교환가치」,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창비 2020)5, 사람들은 대체로 유사한 성공 모델을 지닌 채, 다만 평균적인 삶에 안착하기 위해 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창조성이 중요한 가치로 추구되기는 하지만 정작 드러나는 것은 “새로운 창조성”이 아니라 “새로운 상투성”이다.6
이를테면 “죄 없는 자들일수록 더 많이 참회하고/적게 먹는 자들이 더 많이 감사하고/(…)/적게 살생한 자들이 더 많이 속죄한다는” 히말라야에서의 깨달음은 사람들을 숙연하게 하고, 경쟁과 중독의 도시에서 감사와 참회의 문화는 세련된 교양이자 종교가 된다. 동시에 “많이 먹고 많이 가질수록 죄가 줄어든다는,”(「히말라야에서」) 혁명할 것이 없어진 시대의 진리는 은폐되고, 히말라야의 깨달음은 여행 상품으로 전환된다. “거액의 자산가가 방송에 나와 무소유의 자유로움에 대해/진지한 표정으로 말”하고, ‘좀 살 만한 작가’가 “무소유의 청빈함을 제대로 글로” 썼을 때, 욕망과 물화의 도시에서 무소유와 가난의 가치는 현대의 도덕이자 양심이 된다. 이때에 “무소유는 가진 뒤의 자유”이고 “없을수록 집착할 수밖에”(「무무소유」) 없다는 진짜 현실의 얼굴은 공포스럽게 다가올 것이며, 한편에선 무소유가 마케팅 전략에 활용될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이미 낡은 문화이며 새로움을 가장한 상투성이다.
켄 로치(Ken Loach)의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에는 “무엇에 저항하는지 아는 건 쉽지만,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건 어렵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백무산은 한 인터뷰에서 이 대사를 인용한 적이 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억압과 폭력에 대하여, 즉 ‘어떤 현실에 저항해야 하는지’는 알지만, 현재의 착취 구조와 자본의 시간 이후에, ‘어떤 현실을 만들어야 하는지’는 고민하지 못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노동시에는 ‘부정해야 할 현실’이 담겨 있지만, ‘이것이어야 하는 현실’이 적극적으로 모색되지는 않았다는7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현실에 대한 이같은 사유는, 불평등 재현이 갖는 문제적 지점들을 짚으며, 현실이라는 개념 자체를 ‘있는 현실’로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을 배태하고 있는 현실’(백낙청)로 다시 생각하자는 황정아의 논의와 연결시켜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눈앞의 “불평등이 유일한 현실이라는” 관념에 맞서서 공동영역의 존재를 모색하는 작업의 요청으로 이어지는데,8 백무산이 문학의 고유한 기능을 “공동체의 이상과 공통성”을 유지하고 확장하는 데에서 찾고 있는 것9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시간』(창작과비평사 1996) 이후 백무산의 시를 인간주의, 생태주의로의 전환으로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백무산 시의 시간과 육체는 자본의 시간 ‘바깥’의 인간과 생명에 대해서, 부재하는 현실, 곧 새로운 현실에 대해서 끊임없이 ‘제로베이스’에서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백무산의 시를 통해, ‘자본의 시간에 포획된’ 현실의 구체적인 모습과 ‘자본의 시간 이후의’ 현실을 발견하고 감각하는 시의 모험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저항의 시와 저항 이후의 시, 새로운 노동시의 가능성을 최근에 발표된 신인들의 시를 통해서 타진해보고자 한다.
2. 죽음의 무의미와 생명의 감수성
백무산은 시란 “나 자신을 통해서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자신이란 시인이 겪어낸 “당대의 경험”과 그 경험을 통과한 시인의 “세계의식”으로 구성될 것이다.10 시인은 당대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의식을 통해 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시의 언어로 씌어지기 이전에 시인의 몸이 이미 감각하고 있는 경험과 (무)의식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시인은 신체의 언어를 시의 언어로 옮겨 적는다. 그러므로 전지구적 생태위기 혹은 재난 자본주의의 증상 앞에서 시인의 몸이 무엇을 감지하고 어떻게 저항하는지를 살피는 일은 중요하다.11
천마리 악어를 사육하는 우리에
제 발로 걸어들어간 여인이 있다는 것이다
먼 나라에서의 그 일은 끔찍하지만
이 지구 위에서 가난한 자들의 삶에 대한
그저 평범한 비유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불구덩이 세상을 피해 악어의 아가리로 피신한 것인지
고깃덩어리밖에 안 될 무의미를
악의 없는 저들에게 그저 던져준 것인지
나의 상상도 역시 평범한 비유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
이 나라에서만 매일
마흔명이나 걸어들어가는 그곳에 대한
—「평범한 일상」 부분
사람들은 “천마리 악어를 사육하는 우리에/제 발로 걸어들어간 여인”의 이야기를 끔찍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나라에서만 매일/마흔명이나 걸어들어가” 불구가 되고, 목숨을 잃는 노동자의 이야기는 그저 ‘평범한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악어의 “우리”에도, 재해의 “그곳”에도 그들은 “제 발로 걸어들어”갔다. 코로나바이러스 시대에 감염 위험과 생계 노동 사이에서 이른 업무 복귀를 선택했고, 어제 동료가 죽은 자리로 오늘은 내가 일하러 간다. “악어의 아가리”든 “불구덩이 세상”이든 그들의 육체는 “무의미한 고깃덩어리”로 그곳에 던져진다. 휠체어에 앉은 노동자가 “그땐 이처럼 버려지진 않았으니까/그땐 이처럼 쓰레기는 아니었으니까”라고 말할 때, 시장에서의 교환가치를 상실한 병든 육체는 “버려”진 “쓰레기”에 비유된다 (「그때가 좋았지」).
이것이 2020년에 씌어진 현실이라면, “죽음과 피와 불구는 늘 곁에 있었다/비용과 실적을 위해 사람목숨도 소모자재에 불과해서/기름때와 쇳가루 먼지가 더께 깔린 트럭 짐칸에/핏덩이가 거적에 덮여 하루가 멀다 하고 실려갔지만,”(「치욕」, 『거대한 일상』, 창비 2008) 그 죽음이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것은 2000년대에 씌어진 현실이고, “부속병원 정원에 갈꽃이 지고/떨어져 죽은 인부들의 빛바랜 초상화가 빗속에 흐느꼈다/간밤에 나와 함께 짜장면을 나눠먹었는데/짜장면처럼 까맣게 타서 거적에 쌓여 가는 친구의 얼굴이/어두운 날들, 질척이는 바닥에 핏물 되어 흘렀”(「지옥선 5: 조선소」, 『만국의 노동자여』, 청사 1988)던 날은 1980년대에 씌어진 현실이다. 저 문장들 속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시대는 가파르게 변하였으나 “피를 뒤집어쓰는 노동”(「평범한 일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노동자의 육체가 “고깃덩어리밖에 안 될 무의미”로 비유될 때, 무의미의 진짜 의미는 바로 ‘죽음의 무의미’일 것이다. 노동자의 반복되는 죽음과 죽음의 숫자는 의미를 얻지 못한다. 악어를 사육하는 우리에 걸어들어간 여인과 동료가 죽은 작업장에 일하러 가는 노동자가 써내려간 평범한 서사와 “사소한 비유”(같은 시)는 피와 죽음의 진혼곡을 이룬다. 그뿐 아니라 가죽을 얻기 위해 인간은 악어를 도살하고 악어는 자신의 아가리로 피신한 인간을 삼킨다. 상품과 화폐의 흐름에 따라서 대규모의 사육과 수많은 생명의 도살이 이루어진다. 이같은 착취와 죽음의 순환 구조는, 단위 작업장이나 개별 국가에서의 노동과 자본의 대립을 넘어, 전지구적 차원에서 자본이 생명을 포식하는 잔혹한 생태계를 그저 평범한 일상으로 만들고 있다.
살 속에 말이 있다
살은 스스로 말을 한다
어설픈 이성은 그 말을 막는다
노동의 근육 속에는 말이 있다
그것은 살과 살의 대화다
뼈와 살의 대화다
남의 살과 나의 살의 대화다
—「노동의 근육」 부분(『만국의 노동자여』)12
백무산의 시에서 몸의 의미는 주체의 언어라는 측면에서도 의미를 지닌다. “노동의 근육 속에는 말이 있다”. 노동자의 몸은 곧 노동자의 말이다. 노동하고 창조하는 몸, 병든 몸과 죽음의 몸은 생산과 저항의 기호가 되어, 인간과 생명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상품화하는 세계에 메시지를 송신한다. 그 말은 고립된 독백이 아니라 타자와의 대화이다. “억눌린 살의 말”은 “피흘림으로 대답한다”. “어설픈 이성”은 그 말을 막으려 하고 “지배하려” 한다(같은 시). 여기서 이성이란 아마도 계산과 효율성의 언어를 장전하여 몸이 세계를 비타협적으로 감각하고, “노동의 근육”이 세계를 기록하는 것을 가로막는 권력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백무산은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시인의 말’에서 “나 자신이 하나의 관측소인 셈”이라고 말했다. 자신을 구성하는 경험과 세계의식은 시인의 ‘몸을 통과하여’ 시 안에 존재할 것이므로 시인의 몸은 세계의 관측소라고 표현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그 관측소가 “거의 모든 것의 변방”에 있으니, 시인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몸으로, 늘 억압된 현실을 마주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관측소의 몸은 “귀를 파먹으며 울던 새”의 “울음소리”를 따라 현실의 험하고 “가파른 곳”으로 간다. “허기”에 시달리며 “피투성이 되기도” 하지만 끝내 “그 소리에 귀를 막”지는 못한다(「새의 운명」).
그 관측소는 “회색의 밀림” 같은 대도시의 지상에서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이들의 존재를 감지하고 “초막 같은 지하 단칸방에서 밤이면 문밖에 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 들어야 했을까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했을까”(「누구였을까」)라고, 천만의 도시에서 배제된 자들의 존엄과 고독을 질문한다. “약자의 울분을 모방한 자들”은 광장의 언어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광장의 지분을 주장하였으나(「광장이 사라졌다」), 약자의 울분과 광장의 언어를 몸으로 관측한 이들은 그 소리를 따라 나섰다. 여기에서 몸이 타자와 대화하고 타자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장소임은 자명하다.
내가 풀을 숨 쉬면
풀이 나를 숨 쉬었다
네가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내가 풀 속에 담겨 있어야 했다
—「풀의 바다」 부분
고라니나 다람쥐쯤 되는 지능으로
노랑에 물들어 쉽게 노랑이 되어버렸던 것은
산에서 내려와 풀을 뜯던 고라니가
집으로 돌아가다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던
그 뛰는 가슴 같았을 것
—「감각의 기억」 부분
백무산의 시에서 광장과 몸의 의미는 조금 특별하게 다가오는데, 특히 광장에 ‘눕는 몸’의 형상이 그러하다. 광장의 “바리케이드가 원하는 것은” 폭압으로 상징되는 수직의 질서인 “세워진 길을 눕히는 것이”다(「세워진 길」). 광장에서 노동자가 눕는 이미지13는 대지에서 풀이 눕는 형상과 유사하다. 이는 차별과 폭력의 세계에 저항하는 힘이자 새로운 광장을 일으키는 힘으로서의 운동성을 지닌다. 이처럼 저항과 생성의 힘인 풀은 「풀의 바다」에서 “너”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너와 나의 상호 발견과 소통을 위해서 우리는 공통의 감각으로 풀을 호흡해야 하는 것이다. “너의 눈과 나의 눈 사이에” “풀이 있었던 때와 없었던 때가 있었다”는 것은 우리 안에 함께-느낌의 감각이 미만했을 때가 있었고, 이를 상실했을 때가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감각의 기억」은 시인의 “첫 기억”이자 “풍경을 풍경으로 이해했던” 순간의 감각에 대해 말하는 시이다. “풀을 뜯던 고라니가” 산 녘에서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는 풍경을 떠올려보자. 그때 고라니의 눈에 담긴 풍경, 고라니의 “뛰는 가슴” 같은 것을 백무산의 시는 고요하게 담고 있다. 백무산의 노동시는 계급과 불평등을 말하더라도, 이와 같은 생명의 감각을 내장하여 말할 것이다. 더불어 자연에 대한 착취에 대항하여 ‘모든 생명’의 평등을 노래할 것이다. 백무산 시에서 풀의 상상력과 생명의 감수성은 ‘시장에 대항하고 시장을 넘어설 힘’14으로서의 자연(성)인 것이다. 백무산의 시에서 함께-느낌의 감각은 이같은 자연성을 토대로 한다고 할 수 있다.
3. 자본의 시간에 맞서서
이미 지나간 과거의 트라우마에 얽매이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에 포획되지 않은 채, ‘현재에 충실하라’는 말은 현대인의 행복론의 기본처럼 얘기되곤 한다. “현자들은” 하나같이 “현재만을 살라고 충고”(「밥이 끓는 동안」)한다. 하지만 이러한 충고는 어딘가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경제학에서 시간은 항상 현재로 소환된다. 이를테면 “지금부터 생겨날 비용과 편익만을 고려해야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비용에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체계적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거기에 맞춰 현재의 행동을 바꾸도록 끊임없이 요구받는다.”15
모든 건 완성된 것에서 시작된다
모든 발단은 절정이다
모든 결론도 절정이다 탄핵이 진행되듯이
카운트다운될 뿐이다
(…)
시간이 증발한 곳
불안은 허공처럼 출처가 막연하다
시작도 끝도 시간이 아니라 카운트다운이다
죽음도 완성된 죽음을 치른다
아무것도 밀려오지 않는 카운트다운
아무것도 폭발하지 않는 카운트다운
어느새 폐기돼 있을 뿐이다
어느 순간 검은 아가리를 벌릴 뿐이다
파국도 종말도 재생도 약속하지 않는 카운트다운
—「카운트다운」 부분
어떻게 ‘자본의 시간’을 전복하여 혹은 되돌려서 ‘삶의 시간’을 발명할 것인가. 삶의 시간이란 인간의 시간이고, 좀더 근원적으로는 생명의 시간이며, 시인에게는 무엇보다 시적인 시간일 것이다. 「카운트다운」은 자본의 시간을 시적으로 정의한다. 시작과 끝, 발단에서 결론까지의 시간, 즉 과정은 사라지고 경험도 무의미하다. “모든 건 완성된 것에서 시작”되어 “복제품”으로 보충되다가 어느새 “폐기”된다. 완성되는 순간에 이미 “내던져질 시간”이 예비된다. 점점 빨라지는 회전주기나 완성, 복제, 폐기의 운명은 상품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이 시에 묘사된 시간의 속성은 이미 상품의 일생에 대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삶의 시간은 점점 상품화된다. 예를 들어 여러 유형의 돌봄노동은 비시장적 관계에서 벗어나 상품의 영역으로 흡수된다. 자본의 시간이 삶의 시간을 잠식해간다.16 시인이 말하는 “시간이 증발한 곳”의 의미가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본의 시간과 삶의 시간을 대립항으로 설정하여 백무산 시의 시간론을 정리해볼 수도 있겠다. 삶의 시간이 순환하는 시간이라면, 자본의 시간은 “가기만 하는 시간”, 즉 “순환의 절반을 버림으로써 얻은” “질주와 쾌락”의 시간이다(「시계」). 삶의 시간이 개인의 고유한 시간 감각과 경험에 따라 다르게 흘러가면서 어떤 생성의 순간을 만들어낸다면, 자본의 시간은 기계적이고 동질적으로 인지되는 시간이며 규칙적으로 반복되고 카운트다운된다. 「지구평면설」에서 묘사했던 “굴곡 없는 고른 땅” 또한 시간에 대한 사유와 연결시켜볼 수 있을 텐데, 삶의 시간이 예측할 수 없는 틈과 굴곡을 만들면서 일상의 ‘바깥’을 경험하게 한다면, 자본의 시간은 굴곡 없이 평평하고 직선적인 시간이며 ‘바깥’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다. 현대 자본주의의 시간은 무엇보다 시간을 분절하고 카운트다운함으로써 매순간 시간을 관리하게 하고 ‘불안’을 삶의 근본적인 정서로 만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본의 관점에서 시간을 사유하게 하고 자신의 삶을 해석하게 한다.
현자들은 현재만을 살라고 충고하지만
현재를 살아볼 도리가 없다
지금은 끓고 있을 뿐이다
—「밥이 끓는 동안」 부분
시간을 고요에 헹구지 않으면 오늘을 반복할 뿐
내일의 다른 시간이 뜨지 않기에
—「고요에 헹구지 않으면」 부분(『거대한 일상』)
나는 숲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시계가 되기 전에는
—「나도 그들처럼」 부분(『거대한 일상』)
자본이 지배하는 시간은 끊임없이 현재에 충실할 것을 강요하지만, 그 현재라는 시간은 사실 가늠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매우 모호하고 비현실적인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만 노동시간과 상품 생산주기 등을 통해 현재를 눈앞의 매우 짧은 시간대로 인식하며 산다.17 자본의 시간에 저항하여 다른 시간을, 시적으로 탐문하는 작업은 특히 『거대한 일상』에서 두드러지는데, 이는 “내가 시계가 되”었다거나 “시간을 고요에 헹구”어야 한다는 인식 등에서 잘 드러난다. “시계”가 된다는 것은 기계적으로 분절되고 동질적으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현재의 시간을 관리하고 ‘계산하며’ 산다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나’라는 존재는 계산되고 측량되고 해석되어, 자연이라는 소용돌이 혹은 자연 속의 고요를 잊게 되는 것이다. 그 시간을 고요라는 자연의 흐름에 헹구어 다른 시간을 개시하는 것, 그리하여 현재라는 시간을 목전의 시각으로만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먼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까지로 확장하여 감각하는 것이다. 이는 현실을 움직일 수 없는 고정된 실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간과 다른 현실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과도 맞닿아 있다.
4. 불온하지만 살아 있는 형태로
2020년에 첫 시집을 낸 신인들의 시에서 자본의 시간에 맞서 다른 현실을 암중모색하는 현장을 확인하게 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앞에서 코로나 시대의 재난 자본주의에 대해서 말하기도 했거니와 이들의 시를 읽으며 자본주의 자체가 재난의 속성을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으며 일상 자체가 재난 상태임을 실감하게 되기도 한다.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가난의 형상들, 지난한 투쟁의 현장과 무력한 일상이 그곳에 있었다. 거기 멈추지 않고 고단한 노동을 가로지르는 오래된 미래의 상상력을 갖는 일, 현실주의자가 되기 위해 역설적으로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을 멈추지 않는 일, 자신의 가난한 생활을 꾸준하게 응시하고 미학적으로 기록하는 작업 등은, 자본에 포획된 세계에 맞서 자신의 삶과 시를 밀고 나가는 불온하고도 의미있는 전진을 보여준다.18
오금행 열차 안이다
한 여자가 잘린 손가락 마디로 연주를 한다
프레스에 절단됐다는,
글귀 적힌 악보가 사람들 눈으로 전조되고
마디 없는 손이 음표를 단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놀라운 노래가 아니다
사방이 놀라운 일투성이라
슬픔을 환승역으로 둔 이들은
노래를 돌려 부르지 않는다
종점은 가까워 오는데
그녀의 선율을 오선지에 옮겨줄 손은
어느 칸에 있을까
몸의 온 마디를 잘라내도 죽순처럼 돋아나고
한 계절을 차지할 슬픔의 길이
—박은영 「어메이징 그레이스」 부분
박은영은 단정한 서정시의 언어로 가난의 목록들을 적어 내려간다. 수도세 독촉장, 기름에 찌든 끼니, 마이너스 통장, 구로공단, 폐기물 집하장, 가리봉 오거리, 재개발 철거반, 신림동 옥탑방…… 시집 어느 곳을 펼쳐도 목록은 끝없이 이어진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 여성과 가난을 매개로 한 ‘슬픔의 연대’를 보여준다. 뉴기니섬 다니족 여인과 열차 안에서 잘린 손가락으로 연주를 하는 여자와 시의 화자가 그들이다. 다니족 여자들은 친족이 죽으면 손가락 마디를 잘라서 슬픔에 동참한다. 열차에서 연주하는 여자의 삶은 프레스에 손가락이 절단되었다는 글귀 속에 요약되고 사람들은 사연을 “눈으로 전조”(轉照)한다. 화자의 내력은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으나 “오금 저리는 밤”의 고단한 노동과 슬픔의 정서가 시의 곳곳에 배어 있다. 예컨대 「모자이크」의 “모자 가정이 되었”고 “정권이 바뀌고 수급비가 끊”겼고 “24시간 행복포차식당에서” 일을 하는, “식탐이 많”은 아이를 키우는 ‘나’를, 이 시의 화자로 생각하고 읽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잘린 손가락”의 “선율을 오선지에 옮겨줄 손”은 슬픔에 동참하는 몸의 존재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시인의 손은 그녀의 선율을 이렇게 종이에 옮겨 적는다. 잘린 손가락에서 시를 쓰는 손가락까지, 다니족 여인에서 「모자이크」의 ‘나’에 이르기까지, 아픈 손들의 연결이 슬픔의 연대를 이룬다.
주름보다 먼저 두통이 왔고 구두 굽보다 먼저 발꿈치가 닳았으며 나보다 먼저 입사 동기가 승진을 했다 지하철에 빈자리가 생기면 보상을 받는 듯도 했다 그 작은 의미를 던져주며 누군가 나를 조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밤은 짧고 낮은 길다는 것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부품 하나가 없어도 움직이는 기계처럼,
세상은 돌아갔다
저녁 없이도 돌아가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박은영 「저녁 없는 삶」 부분
노동자에게 “밤은 짧고 낮은 길다”. 낮이 노동시간이라면 밤은 노동력 재생산 시간이다. 저녁 없이 짧은 밤과 긴 낮으로 이루어진 구성은 인간의 삶이 전적으로 노동시간을 중심으로 운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저녁이 없다는 것은 여가, 취향, 타인과의 관계 등을 포함하여 삶을 재생산하는 데에는 중요하지만 돈이 되지는 않는 시간이 삭제되었음을 의미한다. 시인은 “누군가 나를 조종하고 있는 것 같았다”라고 고백한다. 이를 ‘시간주권’의 상실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여기서 시간주권이란 “내 삶의 시간을 어떻게 설계하고 사용할지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가리킨다.19 누군가 나를 조종하는 느낌은 무엇보다 ‘시간의 사용 권한’을 자신이 가지고 있지 못한 현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부품 하나가 없어도 움직이는 기계처럼” 저녁 없이, 세상은 돌아가고 노동자는 살아간다. 「저녁 없는 삶」은 노동자의 평범하고 구체적인 일상을 통해 시간주권을 빼앗긴 삶 혹은 시간주권을 회복해야 할 현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삼백만 킬로미터를 지나 휴게소에서 잠드네
능소화 덤불 아래 앨버트로스보다 넓은 날개를 펴고
아틀라스산맥과 지브롤터해협과 우랄산맥을 넘네
꿈에서도
평균연비와 평균속도와 짐의 톤수를 노트에 적네
짐칸에 채웠던 것들을 줄자처럼 늘여
하늘 높이 길을 닦네
삼년쯤 달리면 달에 도착해
다시 삼년이면 지구로 돌아올까, 더 멀리
소혹성 지대에도 국밥집이 있을까
—이정훈 「일죽휴게소」 부분
이정훈은 화물 트레일러 운전기사다. 이십년 넘는 시간 동안 “삼백만 킬로미터를” 운전했다. 운전시간과 거리를 생각하면 시인의 일생 또한 노동시간으로 채워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생산수단이자 노동의 장소인 트레일러 운전석에서 시인은 우주적인 스케일의 상상력을 키웠다. 휴게소에서 잠을 자고, 꿈에서도 “평균연비와 평균속도와 짐의 톤수를” 기록하지만, 자신의 트레일러를 운전해 “앨버트로스보다 넓은 날개를 펴고” 유럽과 아시아의 산맥을 넘고 지중해와 대서양을 잇는 해협을 넘는다. “이십년 넘게” 삼백만 킬로미터를 달렸으니, “삼년쯤 달리면 달에 도착해/다시 삼년이면 지구로 돌아올까”와 같이 언뜻 환상적으로 보이는 비유도, 실은 가감 없이 사실적인 수치가 된다.20 현재 시인의 시간은 트레일러의 “바퀴에 능소화 꽃이파리 물드는 여름”이다. “2015년 여름,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 최정명, 한규협이 국가인권위원회 빌딩 광고탑 위에 올라가 농성을” 할 때, 시인은 “돌계단에 앉아 피오르해안에 산다는 솜털오리를 생각”한다(「아이슬란드」 부기). 노동시 특유의 분노와 비참보다는, 모종의 패배감을 매설하였으나 끝내 활달한 상상력과 기원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서정적인 활력과 자신의 노동현장에 발 딛고 선 목소리가 ‘이정훈의 노동시’를 만들어낸다.
이 악랄한 계산법은
죽는 일보다 사는 일이 더 지독하다는 이론에서 시작되었다
이목구비를 제대로 갖춘 바닥은 없고 운명을 긍정하는 바닥도 본 적 없다
이 바닥은 다국적으로 평수가 넓어서 난민이 몰려든다
더럽고 누추한 것들이 아무렇게나 모여서 아름다운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어느 날 이런 장면을 보면서 침을 질질 흘리며 울었다
먹다 만 밥그릇이 식어 있었다
—김대호 「만원 때문에 옆눈을 가지는」 부분
인간 생태계의 바닥에는 자본의 경제학으로는 셈해지지 않는 ‘바닥의 계산법’이 있다. 죽음보다 삶이 더 지독하다는 경험에서 체득하게 된 이 계산법으로는 “더하면 마이너스 통장이 나오고/빼면 절벽이 나”온다. 바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매주 로또를 사는 일용직”(같은 시) 노동자와 다국적 난민들이 이곳의 계급을 이룬다. 하지만 바닥은 가난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곳이다. “더럽고 누추한 것들이 아무렇게나 모여서 아름다운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곳이 바닥이다. 그리고 시인은 자신의 삶에서 이 바닥을 잃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는(“나는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가”) 자이며21, 바닥을 향해 개방된 몸으로 이 세계의 난민들과 울고 있는(“침을 질질 흘리며 울었다”) 존재이다.
해고 노동자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
통계로 계량된 기쁨
확률로 계산한 미래
그 빗금에 있는 미세한 의심들
건전한 의심이란 불안보다 넓은 평수의 고백을 경작한다
불온하지만 살아 있는 형태로
—김대호 「의심 한 뚝배기 하실라예」 부분
현존 경제 시스템에서 해고는 “항상 등 뒤에서” “대기 중”이라 하더라도, 해고의 순간은 순식간에 한 존재의 삶을 흔적도 없이 “베고 지나간”다(같은 시). 시 속에서 해고 노동자는 “살아 있는 형태로 죽은 생물”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빗금에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분명히 통계와 확률로 계산되어 누군가의 인생의 생사가 결정되었을 것이다. 개인도 사회도 온통 측량되고 계산된다. 시인은 그렇게 도출된 기쁨과 미래가 과연 온당한 것인지를 의심하는 자이다.
올해 첫 시집을 낸 신인들의 시를 통해, 재난의 현실을 실증하는 장소로서의 노동자의 육체, 세계에 대한 부정성에 매몰되지 않는 노동자의 자기의식, 생활의 구체성과 형이상학적 사유의 이분법을 돌파하는 힘 등을 살펴보았다. “불온하지만 살아 있는” 인간의 형식으로 이 세계를 향해 질문하는 노동시의 가능성을 이들을 통해 탐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5. 생명의 관측소
2020년.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가상현실, 빅데이터의 시대에 떨어짐, 끼임, 깔림·뒤집힘, 부딪힘, 물체에 맞음22 같은 원시적인 형태의 사고로 노동자가 사망한다. 2020년에 발행된 4권의 시집을 읽었다. 지금 여기에 있는 현실을 지독하게 천착하여, 지금 여기에 없는 현실을 발견하는 시적인 작업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현실 탐구이고 현실 발명이었다. 핍진한 현실의 구체적인 자리는 이미 지나간 현실과 아직 오지 않은 현실 속에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백무산은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의 ‘시인의 말’에서 “여전히 나는 첫 시집을 내던 그곳과 다름없는 공간에 머물러 있다”라고 썼다. 백무산의 첫 시집과 최근 시집 또한 변해야 하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서로 연결되고 있었다. 백무산의 시적 작업은 자본의 바깥에서 자본의 시간에 저항하는 ‘자본’과 ‘생명’의 싸움의 행로를 보여준다. “아버지가 꿈꾼 세상은 모두에게 할 일을 주고, 일한 대가로 먹고 입고, 누구나 다 자식을 공부시키며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였다. (…) 지나친 부의 축적을 사랑의 상실로 공인하고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네 집에 내리는 햇빛을 가려버리고, 바람도 막아버리고, 전깃줄도 잘라버리고, 수도선도 끊어버린다. 그런 집 뜰에서는 꽃나무가 자라지 못한다. 날아 들어갈 벌도 없다.”23 이 문장 속에서 자본과 생명의 싸움을 발견할 수 있다면, 사랑의 상실은 바로 우리 시대의 생명에 대한 감수성과 타자에 대한 공감각의 상실일 것이다. 시인의 몸이 ‘생명의 관측소’라는 것을 증언하는 백무산과 2020년에 첫 시집을 낸 신인들의 시는, 무엇보다 우리 시대에 새로운 노동시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
- 강우성, 슬라보예 지젝 『팬데믹 패닉』 옮긴이 해설, 북하우스 2020, 191면. ↩
- 이주연·이지혜·이정환 「하루에 5.5명 ‘이것’으로 죽었다, 100명 중 1명도 감옥에 안 갔다」, 오마이뉴스 2020.7.27. ↩
- 김훈 「죽음의 자리로 또 밥벌이 간다」, 경향신문 2019.11.25. ↩
- 슬라보예 지젝 「바이러스 세상에서 맞는 노동절」, 앞의 책 184~85면. 이어서 그는 “잉여가치surplus-value의 착취를 잉여존재surplus-existence의 착취로 바꾸자고 제안하는” 니콜라이 슐츠의 논의를 인용한다. 여기에서 존재는 “삶의 물질적 조건들”을 의미한다. ↩
- 앞으로 이 시집에서 인용하는 경우 제목만 밝히고, 다른 시집에서 인용하는 경우 시집명을 함께 밝힌다. ↩
- 김인환 「스투디움과 풍크툼」, 『의미의 위기』, 문학동네 2007, 81면. ↩
- 이설야·박성란 「백무산 시인과의 대화」, 『작가들』 2016년 가을호 233면. ↩
- 황정아 「불평등의 재현과 ‘리얼리즘’」, 『창작과비평』 2019년 가을호 33~34면. ↩
- 이설야·박성란, 앞의 글 247면. ↩
- 황규관 「열권의 시집, 열개의 고원」, 『창작과비평』 2020년 여름호 449면. ↩
- 나희덕 「‘자본세’에 시인들의 몸은 어떻게 저항하는가」, 『창작과비평』 2020년 봄호. 나희덕은 백무산의 시세계에서 노동에 대한 성찰이 “계급적 당파성을 넘어 생태적 사유를 통해 한결 풍부해졌음을” 언급하면서, 노동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몸에 대한 발견과 각성”으로 연결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몸은 노동을 위해 바쳐진 제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감각과 행위의 터전”이며 다른 생명체와 소통하는 매체가 된다. 자본과 문명이 점령해버린 시공간에 대항하여 자연과 교감하고 “야생의 시공간”을 그리워하는 감각 또한 몸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노동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생태적 사유와 몸에 대한 발견이 강조되면서, 백무산 시에서 몸의 의미가 이전의 시세계와 얼마간 단절적으로 혹은 축소되어 이해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본 글에서는 “몸에 대한 발견과 각성”의 의미를 생태적 감수성과 함께 노동에 대한 감각과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각이라는 측면을 더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
- 이 시와 유사한 맥락에서 같은 시집의 “몸이 곧 말씀이 되길 원했다/믿음이 아니라, 결단이 아니라/찢긴 우리들 몸뚱아리가 곧 말씀이 되길 원했다”(「저녁 기도—종이에게」)라는 노동자의 기도 또한 참고. ↩
- 예를 들어 겨울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 “얼음처럼 찬 빗물 바닥”에 누운 노동자와 이들을 밟고 지나가는 관리자의 충돌은 파업현장의 비인간적인 장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노동자여 인간이여」,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노동문학사 1990) ↩
- 조정환 「백무산 시의 여정과 위대한 리얼리즘의 문제」, 『실천문학』 2009년 겨울호 277~78면. ↩
- 류동민 『시간은 어떻게 돈이 되었는가』, 휴머니스트 2018, 88면. ↩
- 같은 책 104면. ↩
-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황현산 「과거도 착취당한다」, 『밤이 선생이다』, 난다 2013, 12면. ↩
- 이하에서 다루는 시집은 다음과 같다. 박은영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실천문학 2020); 이정훈 『쏘가리, 호랑이』(창비 2020); 김대호 『우리에겐 아직 설명이 필요하지』(걷는사람 2020). ↩
- 류동민, 앞의 책 134면. ↩
- 황규관은 이정훈 시의 특정 진술에 대해 “시적 비유라고 받아들여도 좋고 사실로 읽어도 좋은데,” 이는 그의 시에서 “비유와 사실은 언제나 함께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쏘가리, 호랑이』 해설, 109~10면. ↩
- 오연경, 『우리에겐 아직 설명이 필요하지』 해설, 145면. ↩
- 황경상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 경향신문 2019.11.21. ↩
- 조세희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문학과지성사 1978, 185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