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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나희덕 羅喜德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가 있음. rhd66@hanmail.net
그러나 밤이 오고 있다
질주하는 차들은 그녀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도로변에 누워 있는 것은
식당의 환풍구에서 나오는 더운 바람 때문이다
그 식당은 가장 늦게 문을 닫는 편이다
음식 냄새가 시장기를 자극하지만
무디어져가는 감각과 의지를
그렇게라도 일깨울 필요가 있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냄새에 따라 접시 위의 음식을 상상해보면
식탁을 가졌던 시절이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한다
필요 없는 것들로 불룩한 아이의 주머니처럼
상상의 식탁은 음식으로 가득 찬다
음식에서는 이내 죽음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하나밖에 없는 담요는 개를 감싸주고
담요에 싸인 개가 살아 있는 담요가 되어주는 저녁,
온기와 냄새를 좀더 비축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오늘은 운이 좋은 편이다
따뜻한 커피를 건네준 사람이 있었으니까
커피가 식기 전까지 세상은 마실 만했다
그러나 밤이 오고 있다
여우의 눈동자를 지닌 밤이 오고 있다
물론 그녀는 밤에 움직이는 것들을 잘 알고 있다
길 잃은 개들과 고양이들, 또는
쓰레기통을 뒤지다 달아나는 여우들,
술 취한 남자들이 갈기고 간 오줌 냄새와
변태성욕자들, 또다른 노숙의 달인들에 관해
동물적인 감각으로 익혀온 바가 있다
그러니 어젯밤이 지나갔듯이 오늘밤도 지나갈 것이다
갈라진 시멘트의 혈관에서 냉기가 흘러나온다
그녀는 자벌레처럼 몸을 굽혔다 뻗는다
벌거벗은 한뼘의 땅 위에
약간의 빛과
굴광성의 영혼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려는 듯
환풍구를 향해 길게 숨을 들이쉰다
잠든 개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이 온기가 남아 있는 동안은 견딜 만하다고 중얼거리면서
아홉번째 파도
오늘 또 한 사람의 죽음이 여기에 닿았다
바다 저편에서 밀려온 유리병 편지
2012년 12월 31일
유리병 편지는 계속되는 波高를 이렇게 전한다
42피트 ………… 쌍용자동차
75피트 ………… 현대자동차
462피트 ………… 영남대의료원
593피트 ………… 유성
1545피트 ………… YTN
1837피트 ………… 재능교육
2161피트 ………… 콜트-콜텍
2870피트 ………… 코오롱유화
부서진 돛대 끝에 매달려 보낸
수많은 낮과 밤, 그리고 계절들에 대하여
망루에서, 광장에서, 천막에서, 송전탑에서 나부끼는 손에 대하여
떠난 자는 다시 공장으로, 공장으로,
남은 자는 다시 광장으로, 광장으로, 떠밀려가는 등에 대하여
밀려나고 밀려나 더 물러설 곳이 없는 발에 대하여
15만 4000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電線 또는 戰線에 대하여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불빛에 대하여
사나운 짐승의 아가리처럼
끝없이 다른 파도를 물고 오는 파도에 대하여
결국 산 자와 죽은 자로 두동강 내는
아홉번째 파도에 대하여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 남겨진
젖은 종이, 부서진 문장들,
그들의 표류 앞에 나의 유랑은 덧없고
그들의 환멸 앞에 나의 환영은 부끄럽기만 한 것
더이상 번개를 통과시킬 수 없는
낡은 피뢰침 하나가 해변에 우두커니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