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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시, 새로운 공동체를 향하여
우리, 살아 있는 언니들의 시
양경언 梁景彦
문학평론가. 평론집 『안녕을 묻는 방식』 등이 있음.
purplesea32@hanmail.net
1. ‘우리’를 다시 쓰는 언니들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이봄 2020)는 이른바 ‘n번방 사건’으로 알려진 텔레그램 성착취 문제를 최초로 신고하고 해당 사건을 뉴스통신진흥회의 ‘탐사 심층 르뽀 취재물 공모’를 통해 보도한 ‘추적단 불꽃’의 르뽀 에세이이다. 대학생 ‘불’과 ‘단’으로 이루어진 추적단이 불법촬영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텔레그램 방에 잠입해 진행한 취재뿐 아니라 경찰과 협력해 문제 해결에 힘쓴 과정이 생생히 기록된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상황이 절박하게 다가오지만, 특히 주목하고 싶은 장면이 있다. 취재를 시작하면서부터 연령대가 낮은 이들이 입는 피해상황의 끔찍함을 눈으로 확인하고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25면)어서 “뭐라도 해야”(34면) 한다는 심정으로 움직였던 추적단이 한국성폭력상담소의 활동가를 만났던 경험을 언급한 내용이다. 제일 먼저 ‘괜찮냐’고 물어온 선배 활동가와의 만남을 추적단은 든든함과 따뜻함이 함께했던 순간으로 회상한다. 선배 활동가의 그러한 물음에는 좀처럼 침착함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싸움의 과정을 이미 알고 있는 이의 염려와 자칫 홀로 싸우고 있다고 느낄 수 있을 ‘불’과 ‘단’에게 동료로서 갖는 신뢰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언니의 심정으로 혹은 가까운 동료의 심정으로 시작한 추적단의 활동은 자신들과 비슷한 마음으로 사건에 관심을 두었던 기자와 경찰, 또다른 활동가와의 만남을 통해 활로를 마련한다. ‘우리’라는 말의 배타적인 속성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뜻을 모은 숱한 관계가 교차하는 과정에서 열린 속성으로 전환되어 새로운 ‘우리’를 만들고, 이러한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개개인의 ‘살아 있고자 하는’ 힘을 북돋는다.
구조적인 불평등으로 가려졌던 개개인을 중시하는 페미니즘운동이 강조해왔던 ‘개인’의 의미는 자율성을 갖춘 관념적인 단위로 수렴되지 않는다.1 추적단 불꽃의 르뽀 에세이에서도 확인될 뿐 아니라, 팬데믹을 겪는 중에 감염의 공포 속에서도 이어지는 돌봄노동, 필수노동의 최전선에 있는 여성들을 떠올릴 때,2 ‘언니’의 심정으로 새로운 ‘우리’를 형성하는 관계에서 발견되는 ‘살아 있는 이’들의 연결은 “성장과 이윤을 지상목표로 삼는 체제”와 갈라서서 “서로 의존하는 존재”들로 이루어진 “돌봄 중심 사회로의 전환” 3이 요청되는 지금 시기에 필요한 실천의 한가지일 것이다. 어쩌면 이같은 연결의 방식은 미국의 시인이자 비평가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가 거론한 ‘레즈비언 연속체’적인 움직임으로도 이해해볼 수 있다.4 이때 ‘레즈비언 연속체’는 “단지 한 여성이 다른 여성과 성적인 관계를 맺었거나 의식적으로 욕망했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고,5 폭력이 만들어지는 구조를 폭로하고 연대하는 정치적인 합창을 설명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을 각자의 자리에서 다시 짜기 시작한 사람들, ‘언니’의 심정으로 움직인 여성들은 그러므로 폭력과 차별을 양산하는 구조에 질문을 던지면서 권력의 작동 방식을 건드리는 정치적 주체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언니들의 살아 있는 움직임으로 진행되는 변화는 2016년부터 최근까지 다양한 차원의 페미니즘 이슈와 만나고 있는 한국문학 현장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현재 한국문학 현장에서 페미니즘은 그동안 사회가 경시해온 구성원이 누구였는지를 드러내기 위해 인물들을 ‘엄마’ ‘딸’ ‘유리천장과 싸우는 여성’ 같은 사회적 관계가 부여하는 역할과 분리하여 개별적인 이름으로 호명하고, 개인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포착되곤 한다. 당장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을 하나의 사례로 떠올려봄직한데 이는 꼭 소설 작품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특정 고유명사를 여러 시편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시키는 기획하에 구성된 시집도 부쩍 늘었다.6 하지만 이러한 호명이 관념적인 단위로서의 ‘개인’을 극복하고 쉽게 정의내릴 수 없는 삶을 그리는 데에 역할을 하는지, 아니면 기계적인 평등의 구축에 급급해 사회적 역할의 윤곽을 가시화하는 기능만을 하는지에 관해서는 작품마다 좀더 따져 읽을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주체화의 계기로 작동하는 것은 맞지만 이것이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누설하는 데에만 머문다면, 그 호명의 의의 또한 개별적인 권리의 언어로 협소하게 이어지는 ‘정체성 정치’로 인식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고유한 개별성은 “공공적인 장과 다양한 관계 속에” 있으면서 “자신을 새롭게 규정하고 비약시키는 존재의 고투”7를 수행할 때 드러난다. 이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 글은 ‘우리’를 다시 쓰는 실천 속에서 다른 무엇과도 교체될 수 없는 그 고유한 목소리가 제대로 들릴 수 있음을 전하기 위해 ‘언니’들과의 연결을 표현한 최근의 시를 읽는다. 이들 시에서 ‘언니’는 경험을 공유하고 관계의 재조정을 촉발하면서 ‘나’의 목소리가 들리도록 이끄는 역할을 한다.
‘언니’는 한국문학 작품에서 “구세대적인 가족 질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역으로 해당 질서에 구속되어 있음을 암시했던 “청년 주체”로서의 ‘오빠’나, 희생의 대상으로 재현될 위험성을 안고 등장하던 ‘누이’와는 다른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8 특히 최근의 시에서 ‘언니’는 사전적 의미의 성별 구분, 생물학적 위계를 떠나 먼저 경험을 한 자로서 뒤따르는 이가 편하게 지혜를 구할 수 있으면서도, 서로의 성장을 도모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이는 영화 「벌새」(김보라 연출, 2019)에서 십대 소녀인 ‘은희’가 자신의 얘기에 진지하게 응답하는 한문학원 선생님 ‘영지’를 통해 살아갈 힘을 얻는 모습이나, 사진가 황예지가 「절기」(그리고갤러리 2017)에서 보여준, 집 나간 엄마 대신에 ‘복잡한’ 역할을 떠맡으며 관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신의 역사를 잇게 해준 언니의 모습 등 동시대 문화 콘텐츠에서 구현되는 ‘언니’들의 역할과 연결해서 읽을 때 그 의미가 더 뚜렷이 다가온다. 서로의 “처지를 철저히 해부”함으로써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미처 탐색하지 못한 여성들의 자원과 변혁적인 힘을 서로에게 기꺼이 내놓”음으로써9 정서적 협동 및 유대를 형성하며 어떤 지향점을 선취하는 관계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민주주의적인 가치의 실현이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의 구축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재)구성을 향한 협동적 창조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우애”를 수행하면서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10 기존 체계에서의 이러한 ‘언니’와 같은 역할을 환기함으로써 공동체의 성격을 전환해나가는 시에 주목하여 ‘우리’가 ‘어떻게’ 구축되는지를 살피는 작업은 중요할 것이다.11 이런 시들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포함의 운동으로 공동체를 재구성하는 것이 적절한 방향이며 여기에는 다시 포함의 성격을 재규정하는 작업이 필수적”12임을 새삼 일깨운다.
2. 나란한 연결: 정다연, 주민현의 시
정다연의 『내가 내 심장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니까』(현대문학 2019)에 수록된 몇몇 작품에선 여성들의 시위를 연상케 하는 이미지가 제시되며, 그 무리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을 재조정하는 ‘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는 불특정다수의 군중이라는 추상적인 차원으로 그려질 수 있을 집단을 자신과 분리하거나 대상화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영향관계를 주고받을 수 있는 위치에 두어 자신뿐 아니라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공동체로서의 무리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만드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한낮의 웃음, 한낮의 데이트, 한낮의 바리케이드, 바리케이드 안의 검고 검은 여자들
이상했지 앞에 서 있는 처음 본 여잔 그침이 없다 아직 아무것도 외치지 않았는데 얼굴을 반쯤 가린 검은 마스크는 외침보다 먼저 젖는다 눈이 가장 먼저 젖고, 눈가를 닦는 손과 소매가 젖고, 닦지 못한 것이 흘러 마스크를 적신다 투명을 먹고 더 검게
눈이 마침내 적셔지기 위해, 그 이전에 눈이 견딘 것을 생각한다
베고 찌르는, 밝은 스침 밝은 위협 밝은 도시의 죽음 너무나도 깊어서 아득한 검고 차가운 마지막 숨 녹을 줄 모르는 검은 선글라스 뒤의 눈동자, 빛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는 외침 속에서 나는 인간의 피부가 방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한낮의 바리케이드, 한낮의 구경꾼, 한낮의 칼 넌 저기 못생긴 검은 여자 따윈 되지 마 검고 검은 저런 미친 불 같은 건 허락해줄 수 없으니까 아니야 난, 저것 좀 봐, 이상해 이상해 밝은 흩날림 형형색색의 얼굴빛 환하고
나는 더 이상 내 눈에 비친 빛의 눈을 세지 않는다
검은 어깨를 감싸는 검은 외투 외투 속에 검은 티셔츠 검은 양말 검은 신발 검은 머리칼을 단단히 쥔 검은 머리끈 검은 마스크 안에 가려지지 않는 거대한 싱크홀 우주가 지구를 향해 쾅쾅, 미친 듯이 주먹을 내리찍는 크레이터
오늘은 최대한으로 검정을 껴입을 것 검정을 자랑하고 뽐낼 것
—「검은 거리의 어깨들」 부분
이 시에서 ‘나’는 20세기 초 여러 문화영역에서 근대성의 특질을 알리듯 등장했던 군중 속 고독한 산책자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무리와 섞인다. ‘나’는 모여 있는 “검고 검은 여자들”의 앞으로 가서 나란히 선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그녀들의 세부적인 표정을 꼼꼼하게 살피다가 “여자들”을 통해 감화된다. 광장에 모여 있는 특정한 무리는 화자에게 “정말로 나와 관계가 있는 역사”,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 내고자 하는 이가 “의존”하고 “기초로 삼을 수 있는 역사”13를 말할 수 있게 하는 언니들로 다가오는 것이다.
시의 전반부에서 “한낮의 데이트”라는 표현 때문에 화자가 “넌 저기 못생긴 검은 여자 따윈 되지 마” “저런 미친 불 같은 건 허락해줄 수 없으니까”라고 말하는 이와 같이 있고 이들은 지금 거리에 놀러 나왔다가 시위대를 구경하는 중이라고 읽을 수도 있겠지만, 화자의 시야는 오직 “바리케이드 안의 검고 검은 여자들”로 가득 차 있다. 그녀들과 병렬적인 위치에 있으려는 마음이 화자에게 스밀 때 이 시가 시작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렇게 본다면 화자가 그녀들에게로 점점 다가가는 중임을 알리는 표현으로 1연이 채워져 있다고 볼 수 있다. 화자를 그녀들과 분리시키려는 목소리는 화자의 옆에서 직접적으로 말을 거는 사람의 목소리일 수도 있지만, 화자를 포함한 “검은 여자들”을 향해 축적되어온 사회의 시선, 그녀들이 무엇을 위해 모였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은 채 그녀들의 행동을 저지하고자 하는 이들의 오만한 시선에 더 가까운 것이겠다. 그 모든 방해의 소음에 맞서서 그녀들은 있다.
인용한 시를 읽고 여성혐오 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이를 애도하기 위하여 거리에 나타난 시위대의 모습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으리라 짐작된다. 여자들은 눈이며 눈가를 닦았던 손과 소매, 마스크를 눈물로 ‘적시면서’ 슬픔을 제어하거나 막아설 수 없는 몸으로 ‘거리’에 있다. 이 “검은 여자들”은, 어떤 삶은 철저히 보호하면서 어떤 삶은 애도조차 허용하지 않는 지금 사회의 구획에 의해 ‘내쳐진’ 죽음에 자연스럽게 반응하면서, 혹은 그들 자신의 ‘취약성(이라고 여겨져왔던 다른 이와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성향)’을 받아들이고 드러내면서 슬퍼하는 일 자체를 정치적 자원으로 만든다.14 사회가 의미화하지 않은 죽음은 그녀들의 눈물로 이어진 “어깨”들 속에서 비로소 제대로 존중받을 수 있는 여지를 얻는다.
정다연의 시에서 ‘어깨’는 ‘머리’와 대별되게 움직이는 신체기관이다. 시인의 또다른 시에서 “머리통”은 “모르는 척” 돌릴 수 있고 “아무것도 아닌 척 인파에 떠밀려” 갈 수도 있는, 사회가 요청한 가면을 비겁하게 지지하는 “안전하고 착한” 것으로 등장한다(「머리의 습관」). 반면 「검은 거리의 어깨들」에서 어깨는 사회가 구획한 제한으로서의 “바리케이드”를 넘어서서 머리통으로부터 “형형색색의 얼굴빛”을 내게끔 만든다. 이러한 어깨‘들’이 끌어온 “검은”색을 두고 아스팔트 위에 선 여자들의 색, 또는 시위대가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경찰의 채증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성들의 시위는 특히 이를 촬영한 편집영상이나 이미지가 온라인사이트에 떠다니면서 성추행에 노출되는 일이 잦다—쓴 선글라스의 물결을 이르는 색이라고만 한다면 이는 검은색을 겉으로 드러난 시위대의 색채로만 보는 것이다. 화자는 “검은 어깨”들 사이에 있으므로, “검정”은 곧 그녀들이 보는 세상을 이루는 색이 된다. “밝은 도시”가 가린 “죽음”과 연결될 수 있는 “검은”색의 입장에서 “밝은”색은 오히려 ‘나’의 시야를 “베고 찌르”면서 “위협”하는 “빛”의 성질을 띠므로, ‘나’는 이제 “빛”에 속지 않는 사람이고자 한다. 씰비아 플래스(Sylvia Plath) 시의 폭발적인 힘과 교차하면서 시신을 찾아 어둠을 향해 돌진해감으로써 “부족해, 턱없이 부족해”라고 외치는 「어느 진흙 속의 대화」나, “빛나는 것들이 전부 수상해서” 동굴과 같은 어둠 속에서 빛을 “추방”하고 “굶주린 새에게 나의 살점을 떼어” 줌으로써 겨울을 나는 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겨울철」 같은 시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둠’은 ‘빛’의 방해에 맞서 ‘내’가 붙잡고자 하는 존재들과 적극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부추기는 색채이다. “검은 어깨”들이 형성하는 횡적인 위치에서의 연결을 통해 화자인 ‘나’는 자신을 혐오하거나 가학적으로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확장하는 방법과 만난다. 정다연의 시에서 이제 더이상 연기하고 싶지 않은 ‘나’는(「그림 없는 그림」) “편리한 호명과 위계”로 이루어진 형식적인 평등의 질서에 강박적으로 매달리지 않고서도(「리액션」) ‘나’와 나란한 자리에 있는 다른 여성들, 즉 언니들과의 연결을 통해 스스로 이름을 지을 수 있는 자리에 이르는 것이다.
페미니즘이 한국사회에서 대중적인 폭발력을 보이면서 자주 인용되곤 하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1960년대 서구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구호는, 이러한 시를 경유한 우리에겐 ‘우리’의 구성원으로 치부되지 않았던 존재의 개인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우리’를 다시 쓰기 위한 행동의 필요성을 촉구하는 ‘나’의 전환에 대한 내용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 전환이 당연히 손쉽게 이루어질 수 없음을 현실에서 처절히 겪어나가면서도, 그같은 세상을 상대하느라 빚어질 수 있는 자기경멸과 다투기보다는 자신이 접하고자 하는 관계를 찾아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이의 모습은 주민현 시집 『킬트, 그리고 퀼트』(문학동네 2020)에서 만날 수 있다.
주민현 시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하는 곳은 대체로 평화와 폭력이 공존하는 자리로서의 현실이다. 시인이 현실을 이루는 구조적 양식을 역설 그 자체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다. 하지만 주민현 시의 화자들은 우리가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안과 밖」) 뫼비우스의 띠 같은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 할지라도, 그 세계에서 안전을 찾아 도망가는 대신에 이중적인 시선을 가동시켜 자신이 극복해야 할 문제는 무엇이고 연결되어야 할 상황은 무엇인지 판단할 줄 안다. 다시 말해, ‘나’를 휘발시키려는 세상에 맞서 지상에 스스로를 비끄러매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이는 「빵과 장미 1」에서는 “한 손에 빵을, 다른 한 손에 장미를 쥐고 걸어”가는 ‘내’가 “서류가방을 들고” 가면서 동시에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는 누군가에게 시선을 두는 장면으로, 「이미 시작된 영화」에서는 “뒤로 감을 수 없는” 인생에서 “앞도 뒤도 없”는 돌림의 규칙을 받아들이는 상황으로 나타난다. 특히 히잡을 두른 “이란인 친구”와 나란히 앉아 “할랄푸드”를 먹으면서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노래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한 친구 나라의 규칙을 어기고 그의 웃음과 노랫소리를 근사하게 포착한 「철새와 엽총」에서, 시인은 모든 대립되는 이미지들을 “나란히 앉”혀 놓는 세상이 곧 지금 현실의 풍경일 수밖에 없음을 일러주는 동시에 이 모든 걸 구분하는 선들을 가로지르는 상황을 구현한다. 요컨대 주민현의 나란한 상호의존성은 현실을 가로질러 가는 전략으로 작동한다.
생각은 뻗어나가고 어디로나
연결된다는 건 골목의 좋은 점
편의점에서 우체국으로
카페에서 게이 바로
드나드는 우리에게
셔츠와 바람은 몹시 헐렁하지
모자와 함께 생각이 날아갈 것 같아
그렇지만 나는 생각을 정돈하지 않으려고 해
당신의 바람 속에서 나는
좋은 여자, 좋은 아내를 연기하겠지만
생각에는 언제나 허점이 있고
칼은 누운 물고기의 숨을 노리지
이 골목은 옛날엔 궁터였고
앞으론 넓어져 광장이 될 거래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좋은 것이 좋다고 말하기 위해 싸우지
좋은 게 좋은 거야, 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침묵을 선물하기 위해
광장 바깥으로 독재자를 위한 피켓을 든
동성애 반대, 낙태 금지, 십자가를 든
사람들이 지나가고
우리는 잠깐 수많은 인파 속에서
윙크하며 지나가는 신을 본 것 같아,
하늘은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그 신이 인간에게 중얼거리는 입모양을 보았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각자 상상하지
집에 돌아와 물을 튼 뒤에
김이 서리기 시작한다면
발끝부터 조금씩 외로워지겠지만
우리는 언제라도 거울 속에서
자신을 꼭 닮은 신을 하나씩 만들 수 있다
—「광장과 생각」 전문
화자에게 광장은 골목이 교차하면서 탄생하는 장소이다. 즉 명명백백 열린 장소로 알려진 광장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이유는 “편의점” “우체국” “카페” “게이 바”를 드나들 수 있는 “골목”이 “어디로나”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란 뜻이다. 광장의 활성화는 여러 색깔의 “골목”과의 연결에서 “우리”가 살아내고 싶은 삶을 수행하는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
이를 두고 “좋은 것이 좋다고 말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과 “좋은 게 좋은 거야, 라고 말하”면서 그 싸움을 저지하려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의견 표명의 자유가 허락되어야만 평등이 획득된 광장이라고 오해해선 안 된다. 대립되는 입장이 쏟아져 나오는 장소에서 “좋은 것”을 좇는 과정은 “더이상 개인의 올바른 삶이라는 관점에서만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사유 15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광장과 분리되어 있을 방(“집”)으로 돌아가 “언제라도 거울 속에서/자신을 꼭 닮은 신을 하나씩 만들 수 있”는 존재로 스스로를 가꾸는 일이 진행될 때, 그러니까 자신을 계속 보살피고 살펴나갈 때 광장의 움직임도 이어질 수 있다고 전하는 시의 마지막 구절을 다시 보자. 이를 통해 말하자면 정리되지 않은 혼돈으로 가득 찬 광장에서 필요한 일이란, 원하지 않는 연기를 요구하는 사회적 질서를 피하지 않은 채 그 긴장 속에서 무엇이 좋은 것인지를 계속해서 “생각”하는 과정에 있다. 화자는 혼돈 속에서 “잠깐” “윙크하며 지나가는 신을 본 것”만 같은 구체적인 마주침의 순간을 생생하게 받아들임으로써 멈추지 않고 뻗어나가는 “생각”에 몸을 싣는다.
주민현의 ‘우리’는 “밝은 대저택과 침침한 교회 앞에서/하인처럼 조아리는 두 개의 음악”이 어울릴 수 없는 상태로 나란히 울려퍼질 때(「네가 신이라면」), “어떤 것이 옳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떤 것이 좋다는 느낌은 어떻게 올”지를(「가장 완벽한 핑크색을 찾아서」) 헤아리는 과정을 피하지 않는 이들의 연결로 형성된다.
3. 끝나지 않는 연결: 김복희, 김현의 시
김복희와 김현의 시에서는 종적인 연결을 통해 시의 목소리가 처음 출발한 곳을 되짚음으로써 역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바람을 그릴 때 기댈 수 있는 언니들의 형상이 나타난다. 이들의 시는 기존의 친족관계를 기계적으로 되풀이할 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진중하게 고심하는 가운데 새로운 집단의 출현이 예고될 수 있다고 말한다.
김복희의 『희망은 사랑을 한다』(문학동네 2020)에 수록된 여러 시편에는 마치 제의(祭儀)를 지내는 이들의 보이지 않는 존재를 향한 정중한 섬김의 태도처럼 귀신과 같은 존재를 기민하게 감지하는 이의 이야기가 암약하고 있다. 김복희 시에서 이 귀신과 같은 존재는 삶 바깥에 머무는 타자로 있기보다는 삶의 한가운데서 적극적으로 섞이는 존재로 다가옴으로써 겹눈을 가지고 그 존재를 느끼는 이에게 잃어버린 역사를 상기시키며 더불어 소망과 현실에 대한 요구를 떠올리게 한다. 이를테면 「신의 술」은 “면포에 단정히 싸인 도시락을 꺼”내든 이의 평범한 상황이 그려지는데도, 화자는 묵직한 도시락을 들고서는 “묵직했는데 조금 울리는 느낌”이 든다면서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자다가 문득 바닥이 꺼지는 느낌”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범상치 않은 기운을 전한다. 이윽고 도시락 뚜껑을 열어 “누군가 나눠달라고 말할 때까지” 조금씩 마시는 화자의 모습은, 시의 제목으로 보건대 평범한 일상을 한순간에 성스러운 상황으로 들어 올리는 힘에 집중할 필요성과 이를 통해 나와 전혀 다르다고 느껴지는 존재를 접할 가능성을 전해주는 것처럼 읽힌다. 시인은 이를 ‘시적인 순간’의 다른 이름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저건 더러운 음식이야, 더러운 거야, 라고 생각하고 나서도 먹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먹지 않으면, 먹지 않는 일 말고는 다른 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릇 긁히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사람들이 숨어 지내는 지하보다 더 깊은 지하도를 파야 했다
어느 사이엔가 나는 또
어린 동생도
어린 동생을 낳은 어머니도 잃어버리고
벽에 귀를 대고 발소리, 말소리를 들으면서 계속 가야 했다
옛 주인에게 종모법이란 게 있다고 들었다
누가 내게 주어
고맙다 인사도 없이 받아먹은 음식의 기억 같다
먹고 보니
모르는 친척이 어디엔가 살고 있다는 기억이 난다
내 기억에
어머니의 어머니가 등을 돌리고 주무신다
동물은 절대로 깊이 잠들지 않는다
사람만이 무섭도록 잠에 취한다
게걸스럽다
—「종모법」 전문
이 시의 화자는 지금 조상을 기리는 제사 자리에 있는 듯 보인다. 그곳의 음식을 “더러운 음식”으로 여기는 걸로 보아 아무래도 그 자리에 있기가 영 편치 않은 것 같지만 ‘나’는 그 음식을 먹는다. “먹지 않는 일 말고는 다른 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므로. 그런데 정말 그런가?
화자는 먹고 싶지 않은 것을 먹고 삼키는 행위를 곧 원치 않는 대상과 억지로 동화하는 과정으로 여기지 않는다. 가부장제의 습속에 대한 즉각적인 거부 표시를 하지 않는 이러한 행위를 화자는 오히려 자신이 적극적으로 이입하여 연속성을 찾고자 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누구와 연결되고 싶은지를 구체적으로 탐문해갈 입구로 삼는 것이다. 제목인 ‘종모법’은 신분제 사회에서 ‘양인’인 아버지와 ‘천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자식이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던 법을 일컫는 말인데, 과거든 현재든 아버지의 질서만을 강요하고 따르는 자리라면 어머니의 경험은 억압해야만 하는 ‘천한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화자는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스스로 등을 돌리거나 경험을 회피하는 대신 오히려 억압을 체험하는 과정에 몸을 실어 해당 질서에서 억압의 하중을 견뎌왔던 이들과 교통하고자 한다.
그러나 기층 여성을 재현하는 일에 따르는 왜곡 역시도 피할 수 없으므로, 화자에게 이 상황은 “벽에 귀를 대고 발소리, 말소리를 들으면서 계속 가야” 하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어린 동생도/어린 동생을 낳은 어머니도” 모두 “잃어버”린 것만 같은 고립된 자리에 화자는 놓인 것 같다. 이 시가 전하는 놀라움은 바로 여기, 억압의 하중을 견뎌왔던 이들을 설명할 별다른 언어를 갖지 못하고 있던 화자의 한계가 드러나는 3연에서 발견된다. 화자의 일부로 자리하고 있었으나 화자 자신도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인사도 없이 받아먹은 음식의 기억”이랄지 “모르는 친척이 어디엔가 살고 있다는” 연결의 기억이 해당 지점에서 살아나는 것이다. 이처럼 시는 화자가 겪는 만큼의 세계를 제시하기보다는 화자가 세계를 겪는 가운데 일깨워진 화자의 일부를 제시하는 데 할애된다.
“그릇 긁히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해야 하는 자리에서 원치 않는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었던 일이 있었음을 투명하게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경험과 역사를 다시 구성하는 것, “변절자의 명성을 배”우는 방식으로 역사를 잇는 과정에서 “신”을 “아는 것이 없”는 존재로 여기고 따라서 “영원”히 고정된 질서란 없음을 넌지시 이르는 것(「사랑하는 신」), “할머니”는 “따뜻한 자장가”를 부르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망가진 현관 센서등과 꽃과 나무 사이로 사라”지고 “묻힌” 것들을 알아보는 존재임을 이야기하는 것(「꽃과 나무, 할머니의 노래」). 이러한 행위는, 우리의 과거를 이루는 존재들이 설사 ‘페미니즘적으로’ 각성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삶을 감당하는 가운데 현실의 문제를 감각적으로 감지하였으며 나름의 힘으로 그것과 씨름해왔음을 깨달은 이의 것이다. 김복희 시의 ‘나’는 자신의 현재 처지에 열심히 적응함으로써 (지금의) 삶 바깥으로 구획된 영역/존재와 접속하여 “어머니 세대의 여성들이 자신의 운명에 가해지는 사회로부터의 강제를 구조적으로 분석하지 못하더라도” “고유한 삶의 방식과 양식 및 저항방식을 구축한다는 사실”16을 느낀다.
시인이 겹눈을 통해 살핀 과거의 존재들, 혹은 지금 바깥의 존재들은 패배와 수동성의 운명을 체현하지 않는다. 그들과 연결되는 순간 ‘현재’ ‘나’의 고유성이 살아나고 ‘우리’ 역사의 재구성이 부추겨지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저마다의 삶의 방식이 가진 특유의 힘을 당당하게 드러낼 줄 안다. 이처럼 김복희 시의 화자들은 현실의 고통 한가운데에 있다고 해서 불행과만 교통하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김복희의 시가 과거의 관계들과 경험을 공유하면서 신비를 발휘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김현의 시집 『호시절』(창비 2020)에 수록된 시편들은 살아 있는 여러 세대의 경험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로부터 질적으로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욕구를 표출한다. 이는 기존의 친족관계를 드러내는 속에서 그 관계가 자연스러움을 획득하게끔 만든 ‘허용된 정상성’이 무엇인지를 물음으로써 저항성과 변혁성을 갖추는 과정이다.
김현의 시는 ‘함께 살아 있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인지를 예리하게 파고든다. 가령 「겨울은 따뜻한 과일이다」에는 집에 과일을 가져가는 일을 “아빠”의 몫이라 여기는 “그녀”가 얼마든지 ‘아빠가 될 수 있는 삶’을 꾸려가고자 과일을 사 들고 귀가한 후, “아내”와 함께 “부모”를 떠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들의 삶은 부모와 같이 “고향에서 소젖을 짜”고 “선산으로 가는 아름다운 길을” 걷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 “따뜻한 과일”로 겨울을 기억하는 법을 부모로부터 배운 이들이 그러지 못할 이유는 또 뭔가. 그녀들이 떠올리는 어린 시절과 부모의 모습은, 부모의 생활과 유사하게 살아가는 그녀들의 삶을 문제로 여기는 이들에 대한 항변으로 자리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입을 맞춘 “아내”의 배가 “무덤 같”다는 표현에서 전해지는 섬뜩함이란 아직 태어나기 전인 그녀들의 아이가 어떤 내일을 맞이할 것인지에 대한 부정적인 암시라기보다는, 아이의 내일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피하지 말고 생각해보라는 일종의 경고 메시지가 일깨우는 감정에 더 가깝겠다.
김현의 여러 시에 등장하는 부모를 떠올리는 장면은 부모세대로부터 물려받은 바를 바탕 삼아 살아가야 할 자식들의 자연스러운 생활 표현이자, 물려받고 싶지 않은 것들 또한 바탕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이들이 자신의 삶을 견주어보는 일이기도 한 셈이다. 이토록 비슷하고, 이토록 다른 이들이 연년세세 이어지는 역사가 곧 여기의 삶으로 더불어 살아 있다. 또한 이토록 어긋나고, 이토록 정합적으로 마련된 리듬으로 ‘우리’는 미래를 마련한다.
저는 여성이자 성소수자인데
제 인권을 반으로 가를 수 있습니까?
반으로 갈라진 것을 보면
소금을 뿌렸다
상하지 말고 살아
언니가 말했다
언니에게는 파란 접시가 있고
나에게는 씨앗이 있어서
우리는 그걸 합쳐두길 좋아했다
왜냐면 신비
하나가 되지 않고 둘로
존재하는 곳에서
나무가 자라고 숲이 되고
열매가 달리고
하얀 털북숭이 짐승처럼 평화로워서
구름은 바다로 흘러가고
깊고 깊은 산골짜기에서
모닥불 피우고
고깃덩어리와 양배추가 끓는 고요한 양철통
언니와 나는 석양을 보았다
아무 말 없이 보았다
두마리 목양견이 양의 무리 속에
말들이 히응히응 소리 내어 꼬리 흔들고
언니와 나는 담배를 씹었다
산 너머 아파트와 공장과 판잣집을 보면서
살고자 했다
해는 붉고
밤이 오면 흰 천을 뒤집어쓴 자들이 나타나니
총을 멀리 두지 않았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
나중은 없다
지금 당장
—「생선과 살구」 부분
이 시는 “하나가 되지 않고 둘로”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곳에서 출발한다. 이는 이미 “반으로 가를 수” 없는 “인권”의 속성과 같이, 또는 “씨앗”을 담은 “파란 접시”의 풍경과 같이 하나로 완전히 합쳐질 순 없지만 포개진 모양새로 ‘함께’ 내내 있을 수 있는 “언니와 나”, 둘로 존재하는 “우리”가 과거이자 미래인 상황에서 시가 쓰였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렇게 출발한 시는 ‘언니’와 ‘나’의 ‘살고자 하는’ 행위를 그리면서 진행된다. 가령 ‘언니’는 ‘나’에게 “상하지 말고 살”자면서 “반으로 갈라진 것”의 생은 “소금을 뿌”리며 연장하고, “아파트와 공장과 판잣집”의 풍경에서 짐작할 수 있는 세상의 불평등을 살피는 일을 멈추지 않으며, 지상과 분리된 영역의 존재를 향해 진심을 다하는 방법 역시 알려준다. 그렇게 이들은 서로의 생활이 상하지 않고 이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나중의 인권과 지금의 인권을 따로 분리할 수 없듯, 혹은 “여성”인 ‘나’와 “성소수자”인 ‘나’를 따로 분리할 수 없듯 ‘내’가 꾸리는 생활과 ‘언니’의 생활은 강한 연결을 통해 새로운 삶을 이룬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이룩하고 싶은 미래의 형태를 통해, 지금 품고 있는 좋은 삶에 대한 바람을 통해 ‘우리’의 ‘현재’가 계속된다고.
4. 어떻게 살아 있을까
‘우리’를 다시 쓰기 위한 실천의 일환으로 ‘언니’들과의 연결을 보여준 시들이 있다고 전하는 이 글을 준비하는 동안 씁쓸하고 안타까운 소식을 자주 접했다. 남성의 돌봄 부담률은 코로나 확산 전후 변화가 거의 없는 데 반해 여성의 돌봄 부담률은 크게 상승했다는 소식이나17 젊은 여성의 고용 위기가 심각해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십대 여성들이 유례없이 늘고 있다는 소식18 등이 그것이다. 모두가 살 만한 삶을 꾸려갈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만들어갈 사회상은 지금과는 달라야 한다고 숱하게 선언되는 바에 비해, 정작 ‘우리’를 어떻게 바꿔나갈지에 대한 이야기는 제대로 공유되지 않는 것 같아 조바심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정말 다른 ‘우리’가 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살펴본 활로를 만드는 연결에 대해 거듭 생각한다. 유연하게 관계를 맺을 줄 아는 ‘언니’들과의 연결은 그것을 열패감 없이도, 혹은 자신에 대한 혐오감 없이도 스스로 확장할 수 있도록 이끌고 끝내 ‘우리’를 다시 쓰는 상황을 형성한다. 이 연결은 기쁨과 슬픔의 공감만으로 계속되는 게 아니다. 연결을 통해 서로가 보람을 창안할 수 있을 때 계속되는 것이다. 네명의 시에서 우리는 그런 연결을 본다. 그리고 그런 연결은 지금 이 자리로부터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시작될 수 있다.
‘언니’의 심정으로 다른 이와 연결되는 일은 그 단어가 주는 친근함에 비해 만만하지 않다. 이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어떤 삶을 만들어갈지 자신의 책임과 몫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가운데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목에서 ‘살아남은’이 아니라 ‘살아 있는’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 살아 있는 이들을 ‘살아남은’ ‘생존자’라고만 명명하는 순간, 계속해서 붙잡고 있어야 할 ‘어떻게 살아 있을까’라는 질문은 희미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죽지 않고 어떻게 살아 있을까. 이 질문은 시의 손이 나란히 닿아 있는 곳에서, 혹은 계속해서 닿아 있는 곳에서 일으켜진 유대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살아 있는 언니들의 시는 어떻게 살아 있을지를 고민하는 우리의 목소리로 울려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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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계적 자아의 역할을 조명함으로써 개인의 구체적인 삶을 드러내는 페미니즘의 입장은 D. H. 로런스가 민주주의에 대해 논의할 때 강조한 내용을 분석한 백낙청의 글과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 백낙청은 근대 민주주의의 문제가 ‘평균적인 것’의 확립을 천착하는 평등주의에 있다고 한 로런스의 말에 주목하면서, ‘진정한 민주주의’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관계뿐 아니라 ‘살아 있는 우주와의 생생한 관계맺음’을 요하는 자아”, 즉 “새로운 집단성에 대한 욕구를 내재하고 있는” “‘살아 있는 개인’ 내지 개별체”라는 단위가 존중되어야 한다고 전한다. 백낙청 「로런스의 민주주의론: 에쎄이 「민주주의」와 그후」,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 창비 2020, 471면. ↩
- 팬데믹의 위험과 맞서 사회의 안전과 일상생활을 지속하는 데 역할하는 의료인, 돌봄노동자, 교사, 조리사와 서빙 노동자, 콜센터 노동자 등 여성 노동자들을 주목하면서 한국사회에서 여성 노동자를 더이상 주변적인 존재로 대우해선 안 된다고 역설한 글로는 신경아 「재난 앞에 선 여성 노동자: 팬데믹 시대의 최전선에서 분투하는 이들을 위하여」, 김은실 엮음 『코로나 시대의 페미니즘』, 휴머니스트 2020 참조. 코로나로 인한 봉쇄 상황에서도 멈출 수 없는 필수노동이 젠더화되어 있다는 점만을 언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가 “사회와 생명의 재생산을 위한 필수적인 노동에 그에 걸맞은 인정과 보수를 책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탈성장과 돌봄사회로의 전환을 촉구한 글로는 백영경 「필수노동, 제대로 하면 급진적인 개념」, 창비주간논평 2020.10.28 참조. ↩
- 백영경 「탈성장 전환의 요구와 돌봄이라는 화두」, 『창작과비평』 2020년 가을호 40면. ↩
- 리치의 ‘레즈비언 연속체’ 개념은 이성애를 ‘정상’으로 강제하면서 이어져온 가부장제가 재단한 침묵을 깨뜨리면서 “남성 독재에 대항하는 유대나, 실천적이고 정치적인 지지를 주고받는 등 여성들 사이에 맺는 다양한 형태의 일차적이고 강렬한 관계까지 포괄”한다. 에이드리언 리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이주혜 옮김, 바다출판사 2020, 262면. 디지털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한 연결 사례 등 최근의 흐름에서 살필 수 있는 적극적인 대항의 의미 또한 전통적인 ‘자매애’를 넘어 ‘레즈비언 연속체’적인 움직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 같은 면. ↩
- 이소호 『캣콜링』(민음사 2018)에 등장하는 ‘경진’, 김유림 『양방향』(민음사 2019), 『세 개 이상의 모형』(문학과지성사 2020)에 등장하는 ‘김유림’, 오은경 『한 사람의 불확실』(민음사 2020)에 등장하는 ‘유미’ ‘수지’ 등을 그 예로 떠올릴 수 있겠다. ↩
- 백지연 「한국문학과 민주주의, 평등의 의미를 돌아보다」, 『사소한 이야기의 자유』 창비 2018, 69면. ↩
- 한국 시에 등장한 ‘오빠’와 ‘누이’의 형상을 일별한 글로는 이기성 「국가와 청춘: 모윤숙 시에 나타난 내셔널리즘과 사랑」, 『현대문학의 연구』 38권, 2009 참조. ↩
- 에이드리언 리치, 앞의 책, 224 및 233면. ↩
- 팬데믹 시대가 국가를 비롯한 공동체를 다시 사유하고 협동적 창조, 곧 정치적 우애를 통해 집단 주체성을 적극적으로 재구성할 것을 민주주의의 과제로 요청하고 있음을 지적한 글로는 황정아 「팬데믹 시대의 민주주의와 ‘한국모델’」, 『창작과비평』 2020년 가을호 참조. 인용은 31면. ↩
- 최근 시에서 나타나는 ‘우리’를 “그간 쌓여온 한국문학의 토대를 재점유”하는 시도 속에서 이전 질서와 단절한 결과로 생성되는 ‘새로운’ 집단으로 읽는 입장(임지훈 「우리는 이쁘고 강합니다. 우리는 춤을 춥니다」, 『문학동네』 2020년 가을호), 또는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대의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면서 스스로를 “대표-재현”하려는 “여성 청년들”의 등장이야말로 지금 시대의 중요한 ‘우리’라고 읽는 입장(김보경 「‘하는’ 여성들」, 같은 책)은 모두 지금 시에서 주목해야 하는 ‘우리’라는 집단을 기존 ‘정치’ 영역 ‘외부’에 존재해왔던 “탈정치화된 존재 형태”들로 환원함으로써 오히려 “정치적인 것의 한계를 확고히 하는 지배적 방식들이 옳다고 인정하는”(주디스 버틀러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김응산・양효실 옮김, 창비 2020, 116~17면) 구도를 만든다. ↩
- 황정아, 앞의 글 30면. ↩
- 에이드리언 리치, 앞의 책, 343면. ↩
- 사회적 규범이 누가 애도할 만한 ‘인간’인지를 결정함으로써 성원권을 분별하고, 차별화된 애도의 할당으로 폭력이 양산되는 현재의 상황을 진단한 글로는 주디스 버틀러 『불확실한 삶』, 양효실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2008 참조. ↩
- 주디스 버틀러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301면. ↩
- 김미덕 『페미니즘의 검은 오해들』, 현실문화 2016, 167면. ↩
- 「‘돌봄 책임 있는 노동자’가 표준인 사회를 만들자: 코로나 시대 돌봄노동 가중된 여성들의 노동위기」, 일다 2020.11.5. ↩
- 「‘조용한 학살’, 20대 여성들은 왜 점점 더 많이 목숨을 끊나」, 한겨레 2020.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