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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경희 朴卿喜
1974년 충남 보령 출생. 2001년 『시안』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벚꽃 문신』 등이 있음. rud4151@naver.com
청명(淸明)
옻 잘 타던 아부지 산 넘어가신 지 8년인데, 옻 안 타는 엄니가 걸리는 것 없다고, 냅다 옻 든 염색약을 머리에 바르고, 하얀 머리 흙 묻은 파뿌리로 흔들며 방바닥을 돌아다녔다 가볍게 새소리도 치면서, 흘러가는 구름을 가릉가릉 목소리로 가르마를 타면서, 콧노래가 밭머리에 쌓아둔 돼지 똥거름에 부딪히는데, 방구들 귀신이라고 안중에도 없는 나는 뒤쫓아다니며 걸레질이 바쁘고, 날도 잘 넘어간다고 까만 머리카락 꼬불거리며 한달은 바람을 잘 스치겠다고 거울을 빤히 들여다보는데, 하필 오밤중에 내 온몸에 옻꽃이 피어 환장하는 밤을 보내는데, 뭐가 그리 즐거우신지 웃으면서 잠꼬대하는 엄니, 참말로 소리라도 질러서 깨우고 싶은, 아주 진저리나게 온몸을 긁고 싶은, 구름 한점 약이라면 좋을 것을, 그 한점마저 떠먹을 수 없는 맑은 밤이다
산벚나무
주지 스님이 법당 언저리 잎 진 산벚나무로 서 있는 내게 삭발하자, 말씀하시고는 길 따라 내려가신 지 여러달 캄캄이다 달도 차서 참나무숲으로 기운 게 여러번 눈길 밟아 마음도 득달같이 속세로 달아나버렸다가 미끄러져 돌아오는 날이 돌마당 갈잎으로 뒹굴었다 긴 머리 질끈 묶고 모과나무 그늘에 서서 시린 산 아래 읍내 그림자만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놓고 온 것들에 대한 서글픔이 눈앞을 가리는데 어질어질 산벚꽃 핀 자리로 돌아온 스님 내 눈을 깊이, 깊이 들여다보고는 오늘은 안 되겠다, 하시며 바랑에 내 설움까지 넣고 또 휘청휘청 고갯길 넘어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