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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최은미 崔銀美
1978년 강원 인제 출생. 200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너무 아름다운 꿈』, 『목련정전(目連正傳)』, 장편소설 『아홉번째 파도』, 중편소설 『어제는 봄』 등이 있음.
alfmrlal@naver.com
장편연재 1
마주
나는 다른 사람의 신발에 발을 넣어본 적이 있다.
그때 난 겨울이 2월의 마지막 날에 끝난다고 믿었다.
2월 28일. 가끔은 2월 29일.
아무리 춥거나 눈이 와도 2월이 지나면 그건 겨울이 아니지.
겨울이 아닌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얼음 위를 걸어본 적이 있다.
오직 겨울에만 볼 수 있다고 니가 말했다.
헤엄을 치거나 배를 타고서는 갈 수 없는 어떤 바위 아래를, 물이 얼면 갈 수 있다고 했다. 얼음 위를 걸어서.
나는 너의 신발에 발을 넣어본 것을 숨긴 채, 너를 따라 언 강 위로 올라갔다.
나는 김이 서린 욕실 거울 위에 글자를 써본 적이 있다.
나는 아주 오래 샤워했다.
해변에서 놀다 들어오거나 언 강 위를 걷고 온 날,
샤워기의 뜨거운 물을 맞고 서서 오줌을 쌌다.
김이 사라지면 내 글자도 숨고, 다시 김이 서리면 내 글자도 살아난다.
나는 니가 봤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쓴 것을.
아주 오래전에,
나는 272년의 형량을 받은 적이 있다.
그게 언제쯤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서 나는 내 형기가 끝난 건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여름마다 선풍기 창살을 세어보긴 한다.
백 하고도 스물한개.
나는 한번도 잘못 센 적이 없다.
닭 튀기는 소리를 빗소리로 착각한 적은 있다.
‘절대 뒤집지 마시오’라고 쓰인 택배를 뒤집은 적이 있고,
닥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한줄로 서서 흔들리는 다리를 건넜다.
다리 아래로는 호수가 있었고, 다리를 다 건넌 곳에는 사과주를 만드는 농장이 있었다.
우리는 먹고 마셨다.
니가 옆에 와 앉았을 때 나는 혀가 풀렸다.
반은 어둡고 반은 밝은 달이 남쪽 하늘에 뜰 때,
긴 바늘이 6에 갈 때,
나는 답장을 써본 적이 있다.
보내본 적도 있다.
기다린 적은 없다.
*
지금부터 내가 하는 모든 말은 나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
나는 포토라인 앞에 선 적이 있다.
평일이고 대낮이었다. 눈앞에서 플래시가 터지고 마이크를 든 사람들이 나를 에워쌌다. 나는 말린 장미색 원피스를 입었다(상견례 때 샀던 옷이다). 머리카락은 목 뒤에서 하나로 묶었고 아이라인은 그리지 않았다. 마스크는 에티본 스탠다드핏 중형 블랙.
나는 커다란 건물의 회전문을 막 밀고 나온 참이다.
마치 좀 전까지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듯, 누군가 마이크를 내밀며 묻는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또다른 사람도 묻는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죠?”
나는 눈을 내리뜨고 잠시 생각을 해본다. 얘기를 이어가야 하는 건가? 어떤 얘기인 거지? 그래서 어떻게 된 걸까? 대답을 않는 사이 누군가 외치듯 묻는다.
“당신은 피를 뽑지 않았습니까?”
피. 물론 나는 피를 뽑았다. 내가 회전문을 밀고 나온 저 커다란 건물은 병원이다. 들어가는 길이 아니라 나오는 길이라는 게 중요하다. 나는 성실히 임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건물 안으로 사라질 수 없다. 카메라를 헤치고 걸어 나가 차를 타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만 해주시죠.”
마이크들이 서로 어깨를 밀치며 다가온다. 나는 정말로 한마디만 던져주고 저 마이크 원을 뚫기로 한다. 그래서 고개를 들고 솔직하게 말했다.
“피 검사 결과 제게는,”
“……”
“잠복결핵균이 있었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키보드 소리가 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야외 포토라인인데도 이상하게 그 소리가 들렸다. 수십대의 노트북이 잠복결핵균을 받아 치는 소리가. 곧바로 질문이 쏟아졌다.
“어떻게 잠복결핵균이 있을 수가 있죠?”
“지금까지 숨기고 살았나요?”
“하시는 일이 뭐죠?”
“혹시 헬리코박터균도 있는 거 아닙니까?”
나는 억울한 얼굴로 질문자를 본다.
“헬리코박터균은 없거든요?”
“그건 왜 없죠?”
“칠일 동안이나 약을 먹고 다 죽여버렸는걸요?”
“그럼 또 뭐가 있나요?”
또 뭐가 있을까.
“치질?”
“치질이 있습니까? 어디까지 진행됐죠? 3기? 4기?”
나는 이번에도 억울한 얼굴로 말한다.
“전 2기예요.”
치질 2기를 받아 치는 소리.
“딱 하나만 더 말씀해주시죠. 최근에 또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나요? 불면이나 불안, 중독 증세는 없습니까?”
나는 조금 자포자기한 심정이 된 채로 그들에게 말해준다. 내 증세를. 솔직하게.
“전 사실 스마트폰 중독이에요.”
몇몇이 격앙된 목소리로 외친다.
“어떻게 스마트폰 중독일 수가 있죠?”
“부끄럽지 않습니까?”
“하시는 일이 뭐죠?”
병원 앞 포토라인을 회상하다보면 이 모든 게 다 잠복결핵균에서 시작된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날 나는 내 묵비권을 걷어차고 내 변호사를 실망시켰다. 어쩌면 말린 장미색 원피스 때문일 수도 있다. 그 포토라인에서 내가 입었던 옷은 거의 전생과도 같은 시절, 이십대의 어느 불편한 날에 입었던 옷인 것이다.
“치료를 받기로 결정했나요?”
누군가 물었다.
“스마트폰 중독 말인가요?”
“잠복결핵 말입니다.”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조언을 듣고 싶은 표정이 되어 질문자들을 바라봤다.
“당연히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누군가 말했다.
“반년 동안 약만 먹으면 되는 걸로 아는데요?”
다른 누군가도 말했다.
“지금이야 균이 잠복 상태지만 활동성으로 바뀌면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의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나는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골똘한 표정으로 말했다.
“의사야 아무래도 약을 권하죠. 하지만 사정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왜죠?”
“사실 저 어렸을 때요,”
나는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동네에 어떤 아주머니가 계셨어요. 엄마랑 친한 분이었죠.”
“엄마요?”
“아, 제 친정엄마요.”
“친정엄마라니, 결혼을 하신 겁니까?”
“설마 아이도 있나요?”
“일단 얘기부터 좀 들어봅시다.”
누군가 가지를 쳐냈다.
“계속하시죠.”
나는 계속했다.
“동네에 어떤 아주머니가 계셨는데요, 우리 할머니보다는 젊고 우리 엄마보다는 나이가 든 분이었죠. 저는 그분을 만조 아줌마라고 불렀어요. 그 아주머니가 꽤 건강한 분이었는데요, 어느 날 결핵약을 먹고부터 눈앞이 잘 안 보이기 시작한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죠?”
“결핵약 부작용으로 시력 손상이 왔단 말인가요?”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나는 침을 한번 삼켰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면요, 그 아주머니께서, 전 사실 그 아주머니를 좋아했거든요. 근데 그분이 눈이 잘 안 보이니까 어느 날 닭간을 드시는 거예요.”
“닭의 간 말인가요?”
“맞아요. 그 아주머니가 닭의 간을 드셨어요.”
“현장을 직접 봤나요?”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나는 그다음이 기억나지 않았다.
“엄마한테 물어보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만조 아줌마에 대해 까맣게 잊고 살아왔다는 것을 나는 그때 병원 회전문 앞에서 깨달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어렸을 때 이사를 나온 뒤로 예전 동네 사람들을 거의 못 보긴 했지만 그렇다고 만조 아줌마를 아예 못 만난 건 아니었다. 성인이 된 뒤에 딱 한번, 나는 만조 아줌마를 만난 적이 있다. 내 결혼식 바로 전날 밤이었다.
당시 나는 남자친구와 결혼 전 마지막 데이트를 하고 느지막이 귀가한 참이었다. 현관문을 여는데 안에서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오래전에 내가 잘 알고 있었던 것만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어?”
아침에 헤어졌다 만난 것처럼 인사하면서 누군가 내 엄마와 함께 거실에 앉아 있었다. 초등학생 때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나는 그녀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만조 아줌마?”
시간이 더 오래 흐른 뒤 언젠가 엄마는 이런 말을 했다. 그이가 그렇게 온 게, 그게 보통 성의가 아닌 거야. 만조 아줌마는 내 결혼식을 보기 위해 당일 새벽도 아닌 그 전날에, 한복과 칫솔을 짊어지고 고속버스와 택시를 번갈아 타면서 먼 길을 온 참이었다.
“다 컸네.”
내일모레 서른인 나를 보고는 만조 아줌마가 말했다.
“어려서는 겨드랑이를 펄럭대면서 뛰어다니더니.”
겨드랑이를 펄럭댔다는 말에 나는 누가 간지럽히기라도 한 것처럼 흐흐흑, 하고 웃었을 것이다. 어려서도 그랬다. 만조 아줌마는 늘 마주치는 동네 어른이었지만 옆에 있으면 뭐랄까, 재미가 있었다. 입담이 좋다거나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만조 아줌마가 하는 말을 듣다가 혼자 웃을 때가 많았고 웃고 나선 이렇게 생각했다. 만조 아줌마는 말하는 게 재미있어.
‘똥’과 ‘간’ 얘기가 들어가는 속담도 나는 만조 아줌마한테서 처음 들었다(아끼다 똥 된다, 간에 기별도 안 간다). 어느 날은 만조 아줌마네 부부가 우리 집에 와서 둘러앉아 있다가 무슨 말 끝엔가, 아줌마가 자기 남편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니지. 아니야. 그건 당신이 날 잡아먹고 싼 똥인 거고.”
지나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또 흐흐흑, 하고 웃었는데 만조 아줌마도 그런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리 너는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웃었어. 웃긴 말이 아닌데도 웃었다니까.”
마치 그 이유 때문에 내 결혼식을 보러 왔다는 듯이 말했지만 사실 만조 아줌마는 내 손님이라기보다는 엄마 손님이었다. 엄마는 가까운 사람도 먼 사람도 모두 ‘그이’라고 칭하길 좋아했는데, 내 결혼식에 왔던 엄마의 그이들은 예성에서 이사를 나온 뒤인 ‘대전 시절의 그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장 먼저 온 하객인 만조 아줌마만이 말하자면 ‘예성 시절의 그이’였다. 대전의 그이들이 대개 엄마 또래인 것에 비해 나이가 좀 있는 그이.
그날 밤 만조 아줌마는 우리 집에서 잤다. 그날 밤이라고 말하고 보니 새삼스러운 기분이 든다. 결혼식 전날 밤. 내 전생의 마지막 날이자 현생이 시작되기 직전의 밤. 나는 남자친구와(그는 내 마지막 남친이자 현 남편이다)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은 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신부 메이크업이 이른 아침으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 일찍 잠드는 게 좋았지만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거실에서는 만조 아줌마와 내 엄마가 이불을 펴고 앉아서 티브이를 보다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간간이 웃기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씩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처럼도 보였는데 화장실에 다녀오다 옆에 가보면 만조 아줌마와 엄마는 역대 인현왕후 중 누가 제일이었냐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한명은 이혜숙이 인현왕후였을 때가 최고였다고 했고(이때 장희빈은 이미숙, 숙종은 유인촌이었다), 한명은 박순애만 한 인현왕후가 없었다고 했다(장희빈-전인화, 숙종-강석우). 내가 기억하는 인현왕후는 김원희 때부터였다(장희빈-정선경, 숙종-임호). 박하선이 연기했던 인현왕후도 기억이 나는데 이때는 내가 이미 현생으로 넘어온 후였기 때문에 결혼식 전날 밤과는 시간차가 좀 있다.
닭간에 대해 물어보려고 전화를 했다가 나는 엄마한테 그 얘기부터 묻게 됐다.
“만조 아줌마가 얘기한 게 이혜숙 인현왕후였나? 박순애 인현왕후였나?”
엄마의 기억은 달랐다. 엄마와 만조 아줌마는 그날 밤 사극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내가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합류할 때 둘은 한창 티브이를 보고 있었고, 그날 밤 티브이에선 이혜숙도 박순애도 아닌, 박순천 배우가 누군가의 엄마로 나오는 특집극이 재방송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박순천 배우라니. 박순천 배우가 엄마로 나오는 특집극이라니. 그렇다면 극 중에서 그녀는 분명 울고 있었을 게 아닌가.
“그럼 나도 울었겠네?”
“울었지.”
드라마에서 박순천 배우가 울기 시작하면 나는 가슴이 미어져서 같이 울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늘 그랬다.
“그럼 만조 아줌마도 울었어?”
“그이도 울었지.”
엄마는 그날 밤을, 만조 아줌마와 엄마와 내가 거실 이불 위에 나란히 앉아 함께 눈물을 흘렸던 밤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음 날은 어땠나.
결혼식 당일의 만조 아줌마 모습은 이상하리만치 희미하다. 내가 기억하는 만조 아줌마의 마지막 모습은 식 당일 오전, 엄마가 혼주 메이크업을 받는 동안 광택이 반지르르한 양단 한복을 입고 그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모습이었다. 하객들이 오기 시작하면서 엄마는 곧 중일회의 그이들에게 둘러싸였고(중일회는 내가 중학교 1학년일 때 결성된 학부모 모임이다), 나는 폐백 시간이 길어지는데다 신혼여행 캐리어에 들어 있는 비치 원피스에 마음이 설레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만조 아줌마가 뷔페는 드시고 갔는지, 한복은 갈아입고 버스를 탔는지 하나도 알지 못했다.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날로부터 십여년이 지나도록 한번도 엄마한테 만조 아줌마 소식을 먼저 물은 적이 없었다. 예성에 안 갔던 것도 아닌데, 신기할 정도로 잊고 지냈던 것이다.
만조 아줌마에 대한 기억이 줄줄이 올라온 것도, 만조 아줌마에 대해 먼저 묻게 된 것도 모두, 그해 여름 병원 회전문을 밀고 나온 뒤부터였다.
*
닭의 간은 철분 함유량이 많고 단백질과 각종 비타민, 무기질이 풍부하다. 특히 비타민A의 함유량은 거의 독보적인데 당근의 여덟배이며 소의 간보다도 높다. 예부터 간 기능이 안 좋거나 시력에 이상이 있는 사람들한테 명약 대우를 받았다. 닭의 간은 기름에 튀겨 먹기도 하고 물에 삶아 먹기도 하며 야채와 함께 볶아 먹기도 한다. 갈아서도 먹고 사시미로도 먹는다. 얼마나 고소한지 한번 맛보면 소나 돼지의 간은 쳐다보기도 싫어진다. 닭의 간은 간 중의 간이다.
이것이 내가 병원에서 돌아와 닭간을 검색하고 추린 내용이다. 호흡기내과 의사는 내게 질병관리청의 ‘결핵 바로알기’라는 사이트에 들어가보라고 일러주었지만 나는 미룰 수 있을 때까지 숙제를 미루려는 아이처럼 오직 닭간만을 검색했다.
내 결혼식을 보러 왔을 때 만조 아줌마가 특별히 눈을 불편해한 기억이 없는 걸 보면 만조 아줌마는 아마도 오래전 닭간의 효능을 봤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만조 아줌마라면 시력을 회복한 뒤에도 닭간을 계속 먹었을 가능성이 있다. 며칠 동안 레시피를 검색하고 내가 내린 결론은 닭간은 어떻게 봐도 술안주라는 것이었다.
학교에 들어가고 한두 학년이 지난 뒤였으니 아홉살에서 열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내가 방학을 하면 엄마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나를 만조 아줌마한테 맡겼다. 나는 만조 아줌마가 딱히 편하지도, 그렇다고 불편하지도 않았지만 그날 하루의 내 안위가 만조 아줌마한테 달려 있다는 건 알았기 때문에 아줌마가 가는 곳을 군말 없이 잘 따라다녔다. 만조 아줌마의 동선은 단순했다. 아줌마네 집과 동네의 과수원, 버스를 타고 좀더 이동하는 날은 예성시장, 그리고 시장에서 멀지 않은 호수였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나오지 않을 만큼 넓어서 어렸을 땐 바다가 아닐까 생각했던 그 호수.
지금은 호수를 따라 둘레길이 조성돼 있지만 그땐 낚시하는 사람들만 군데군데 보이는 외진 흙길이었다. 만조 아줌마와 둘이 호수에 갈 땐 여름이거나 겨울이었으므로 늘 덥거나 추웠다. 호수 위로 가지를 드러낸 수몰 나무에 잎이 무성하면 여름이었고 수면에 잔무늬를 그리면서 살얼음이 끼면 겨울이었다. 만조 아줌마는 산책을 하는 것 같지도, 특별히 볼일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 걸음으로 호수 주위를 하릴없이 걷다가는, 내가 지쳐 할 즈음이 되면 상을 주겠다는 표정을 짓고는 시장으로 넘어갔다. 시장에 가면 만조 아줌마는 제일 먼저 파래향이 나는 센베이 과자와 검은깨가 박혀 있는 생강과자 봉지를 내 양손에 쥐여줬다. 그곳에는 커다란 파라솔들을 이고 있는 꽃 좌판이 있었고 빨간 고무대야에 담긴 갯가재가 있었다. 만조 아줌마가 자주 들르는 국숫집 앞 공터에는 갓 뽑아낸 국수 가닥들이 흰 빨래처럼 널려 있었다.
“얘가 그 비탈 과수원집 딸?”
만조 아줌마가 고개를 끄덕이면 시장 아줌마들은 내 얼굴을 쓱 훑고는 말했다.
“참하게도 생겼네.”
만조 아줌마 뒤에 서서 오도독오도독 과자를 씹어 먹고 있으면 이렇게 덧붙였다.
“천상 여자네, 천상 여자야.”
만조 아줌마는 과연 그러냐고 묻는 듯이 나를 물끄러미 돌아봤고, 그러면 나는 센베이 과자에 대한 보답이라도 하듯 활짝 웃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렸을 때 나는 웃으면 눈꼬리가 처지는 반달눈에 흔히들 ‘강아지상’이라고 하는 얼굴이었다. 마음먹고 웃으면 거의 예외 없이 호감을 샀다. 안 웃으면 참해 보이고, 웃으면 참한데다 귀엽기까지 한 얼굴이 되는 것이다. 내 외모에 대한 그런 반응들은 성인이 된 뒤에도 놀랍도록 일관되게 이어졌다. 나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여자답다는 말을 들었고 아무리 귀엽게 보이고 싶지 않아도 이미 생긴 게 귀여워서 어쩔 수 없이 귀여워지곤 했다. 그 때문에 겪은 오해와 억측에 대해서라면 몇시간이고 얘기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사는 게 더 불편했냐 하면 꼭 그렇진 않았다. ‘여자여자’하면서도 ‘애기애기’하다는 건 많은 경우 프리패스권처럼 통했다. 내가 강아지처럼 웃고 나면 공기의 흐름은 부드럽게 바뀌었고 사람들은 적어도 부뚜막에 냉큼 올라가진 않겠구나 하는 얼굴로 나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만조 아줌마를 따라 간 시장에서도 나는 어렵지 않게 프리패스권을 얻었고 그것은 내게 시장 풍경과 만조 아줌마를 즐길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모종 좌판이 나와 있으면 만조 아줌마는 꼭 당초고추 모종을 샀다. 사과밭에 나갈 때 쓰기 좋은 알록달록한 그늘막 모자도 신경 써서 골랐다. 시장 사람들은 그 자리에 없는 제3자의 근황을 종종 만조 아줌마한테 물었다. 그 양반은 잘 있나? 요새 뭘 하나? 그러면 만조 아줌마는 말했다.
“뭘 하긴 뭘 하겠어. 소금 먹었으니 물 먹겠지.”
그 말이 이상하게 웃겨서 나도 모르게 흐흐흑, 웃고 나면 만조 아줌마는 내가 강아지처럼 웃을 때와는 또다른 표정으로 쳐다보고는 다음 좌판으로 걸어갔다. 시장에서 갓난아기들을 보게 되면 만조 아줌마는 항상 춥겠다는 말을 했다. 얼마나 추울까. 오늘도 춥겠네. 추운데 왜 반팔을 입혔어.
나는 이해가 안 가서 만조 아줌마한테 말했다.
“날씨가 이렇게 푹푹 찌는데 쟤들이 왜 춥겠어요.”
그러면 만조 아줌마는 말했다.
“원래 자기가 태어난 해에는 솔개미 그늘 아래서도 춥다고 했어.”
나는 아마도 물었을 것이다.
“그럼 죽는 해에도 추워요?”
땀이 조금씩 식고 있었으므로 이제 시장에서의 마지막 코스가 남아 있었다.
“눈물은 나겠지.”
만조 아줌마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사람이 딱 죽을 것 같을 땐 다른 건 다 모르겠고 그냥 눈물이 난다.”
삼십여년 후의 어느 여름에 그 말을 실감하게 될 거라는 걸 알지 못한 채로 나는 그곳, 예성시장 한복판에 서 있다. 한 가게에 오래 머물지도 않고 특별히 긴 말을 하지도 않으면서 시장 구석구석을 살피는 만조 아줌마와 함께. 그렇게 돌아다니다 시장을 나오기 직전에 들르는 곳이 바로 닭집이었다.
*
만조 아줌마가 닭집 주인한테 닭간을 받는 걸 직접 본 기억은 없다. 하지만 만조 아줌마와 내가 저만치에서 보이기 시작하면 닭집 주인은 묻지도 않고 생닭을 손질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만조 아줌마가 어딘가에서 닭간을 꾸준히 공수해다 먹었다면 바로 그곳이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닭집의 상징이자 중심인 통나무 도마 앞에 서면 나는 그때부터 얼어붙은 듯한 집중력이 생겼기 때문에 만조 아줌마도 누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숨도 안 쉬고 서서 투박한 칼이 생닭을 토막 내는 것을, 튀김솥에서 기름이 끓는 것을, 튀김옷을 입은 닭이 솥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면 나는 내 눈앞에서 갓 튀겨낸, 염지 안 한 생닭의 그 생생한 풍미를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에, 내가 플라스틱 테이블에 앉아 닭을 먹는 틈을 타 만조 아줌마는 생간을 건네받아 품에 넣는 것이다. 자신의 진짜 만찬은 집에서야 가능하다는 듯이, 만조 아줌마는 나와 함께 앉아 닭을 먹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나올 때보다 조금 빨랐다. 버스에서 내려 전봇대와 비닐하우스를 따라 걷다보면 저쪽 비탈 위에서 사과밭이 시작됐고 밭을 따라 걷다보면 우리 집 조금 못 미쳐서 아줌마네 집이 먼저 나왔다.
만조 아줌마네 집.
호수에서 시작해 푸릇푸릇한 모종 좌판과 닭집을 경유하는 그 외출의 기억은 마치 한곳에 이르기 위한 여정이었다는 듯 만조 아줌마네 집으로 이어진다. 이상한 것은 시장에서의 기억은 여름인 데 반해 만조 아줌마네 집에서의 기억은 주로 겨울이라는 것이다. 집을 나설 때는 분명 한여름이었는데 점심 지나 오후 늦게 돌아와보니 눈 쌓인 겨울이 되어 있는 것처럼. 시장 앞에서 버스에 오를 때까지도 반팔에 닭기름이 밴 손으로 센베이 과자 봉지를 들고 있던 나는 버스에서 내린 뒤엔 털목도리를 둘둘 말고 한겨울 사과밭을 걷고 있다. 겨울 전지 작업을 끝낸 나무 아래엔 아직 다 수거하지 않은 잔가지들이 흩어져 있어서 걸을 때마다 따닥따닥 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겨울 사과밭은 쨍하고, 차갑고, 나를 늘 어리둥절하게 했다. 맨 가지 그대로 하얗게 줄지어 서 있는 사과나무를 보고 있으면 불과 두세달 전만 해도 저곳에 붉게 익은 사과가 매달려 있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그 많던 사과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그게 다 만조 아줌마네 집으로 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무렵 만조 아줌마 아들은 군대에 가 있었고 만조 아줌마 남편은 거의 호수 낚시터에 나가 있었다. 엄마는 저녁식사 시간이 되기 전엔 나를 데려갔기 때문에 시장에서 돌아오면 만조 아줌마네 집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한시간 남짓이었다.
만조 아줌마네 집 안쪽에 있던 그 방이 떠오른다. 보온재로 문틈을 빈틈없이 막아놓아도 어쩔 수 없이 냄새가 새어나오던 방. 그것은 달콤하고도 달콤한 것이 손 쓸 수도 없이 상해가는 것 같은 냄새였다. 복숭아나 배에서는 나지 않는, 오직 사과가 썩어갈 때만 날 것 같은 냄새. 사과가 내뿜는 향이 분명한데도 과수원을 오가며 자라온 나조차 그 냄새는 낯설었다.
만조 아줌마는 시장에서 돌아오면 아이를 재워놓고 나갔다 온 사람처럼 그 방문부터 열었다. 다른 방보다 유독 따끈했던 그 방에는 우리 집 된장 항아리와 똑같이 생긴 항아리들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건 된장도 간장도 아니었다. 항아리 안에서 기포를 만들며 보글보글 삭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사과였다. 만조 아줌마가 항아리 뚜껑을 열고 면포를 걷어내면 코를 톡 쏘는 고릿고릿한 냄새가 순식간에 방을 장악했다.
나는 일부러 “윽” 소리를 내면서 코를 싸쥐고 숨을 참았지만 그렇다고 방을 나가진 않았다. 그것은 코를 막고 도망치고 싶은 냄새였지만 동시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고 싶은 냄새이기도 했던 것이다.
“취할라 나리야. 이건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거야.”
만조 아줌마는 기다란 주걱으로 항아리 벽을 훔치면서 내게 손을 휘휘 내젓곤 했다.
처음에 나는 생각했다. 그해 가을에 수확한 온 동네 사과들이 겨우내 만조 아줌마의 항아리 방에서 끓고 있는 거라고. 하지만 그 방에 몇번 더 들어가본 뒤에는 각각의 항아리들에 다 다른 시기의 사과가 담겨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엄마가 나를 서너 계절만 더 만조 아줌마한테 맡겼어도 나는 만조 아줌마가 항아리마다 해놓은 표지를 읽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내가 다섯살만 더 많았어도 냄새만으로 숙성 정도를 가늠해 항아리 간의 시간 배치를 해석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낮이 두시간만 더 길었어도, 나는 이 모든 걸 좀더 빨리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엄마도 알고 있었어?”
그날 이후로 나는 하루에 두번씩도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그러니까 잠복결핵 판정을 받은 날 이후로 말이다.
“뭘.”
“만조 아줌마가 사과 발효시키고 있었던 거.”
“사과?”
엄마는 잠깐 뜸을 들였다.
“발효라, 그럴 수도 있었겠지.”
딸려 오는 기억들 때문에 며칠째 잔잔한 흥분에 감겨 있는 나와 달리 엄마는 심드렁한 목소리를 냈다.
“그이야 일당을 사과로 받아 갈 때도 많았으니까.”
적과 철이나 수확 철이 되면 동네 과수원들이 서로 대기를 걸어놓으려고 할 만큼 만조 아줌마는 손이 빨랐다. 과실에 봉지를 씌우는 초여름이 되면 만조 아줌마는 팀을 짜서 움직였는데 그맘때에 사과밭에 잘못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힘들었다. 사다리를 딛고 올라서서 사과나무의 빽빽한 이파리에 상체를 묻은 아줌마들이 여기저기서 나를 불렀던 것이다. 나리야, 사다리 좀 잡아라, 사다리! 나리야, 봉지 좀 올려라, 나한테 와서! 나리야, 목 탄다, 물 좀 던져 올려라!
비탈 과수원으로 통할 만큼 우리 집 사과밭은 반 이상이 산비탈에 걸쳐 있었다. 경사진 땅에 사다리를 놓고 몇단씩 올라가 봉지 작업을 하는 아줌마들을 보면 매번 조마조마할 수밖에 없었다. 만조 아줌마 팀이 아니면 일손 구하기도 힘들어서 비탈은 아빠의 근심거리이기도 했다. 더 늦기 전에 평탄화 작업을 해야 하나 철마다 고민을 비치면 만조 아줌마는 고개를 저었다.
“이만한 데 없어. 나무들 서 있는 키가 다르니 햇빛 골고루 들지, 경사가 져서 물도 잘 빠지지, 산비탈 아래라 밤만 되면 기온이 뚝 떨어지지. 씹었을 때 아삭한 소리가 제대로 나는 건 이 동네에서 나리네 비탈 사과뿐이야.”
그 말은 몇년 후 우리 가족(특히 아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이 되었지만 당시에 내 부모는 그 말에 의지해 한해 농사일을 넘겼을 것이다. 만조 아줌마는 봄과 초여름과 가을에 과수원을 돌며 바짝 일하고 한여름과 한겨울엔 밭일을 하지 않았다. 방학 때 마주치는 만조 아줌마는 봄가을 밭일에 기를 다 내준 것처럼 한겹은 더 늙어 보였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 나무 우듬지 위로 그늘막 모자를 불쑥 내밀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럼 엄마는 몰랐단 말이야?”
“그러니까 뭐, 그이 술항아리?”
나는 엄마가 대놓고 술항아리라고 해서 조금 놀라고 말았다. 내가 초등학생이던 그때는 자가 양조가 허용되기 전이었다. 매실이나 돌배에 술을 부어 담금주로 만들어 먹는 집은 있어도 알코올 첨가 없이 과일 자체를 발효시켜 술을 만들어내는 집은 거의 없었다. 아마도 만조 아줌마만 빼고.
“그이는 상처 난 사과는 가져가지도 않았어. 새벽부터 온 동네 밭을 돌면서 그 고생을 하고는 품삯 반을 최상품 사과로 받아갔는데, 그럼 뭐 그걸로 사과청을 만들었겠니?”
“그럼 엄마는 알고 있었단 말이야?”
“니가 힌트 줘서 안 거잖아. 좀 전에.”
나는 엄마가 뭔가를 튕겨낸다고 느꼈다. 엄마와 나는 예성 얘기도 사과 얘기도 만조 아줌마 얘기도 나눌 수 있었지만 그 셋이 결합된 얘기는 좀처럼 하지 않은 채로 지내왔다.
엄마는 아직인 걸까, 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만조 아줌마가 내 결혼식에도 왔었는데.
*
엄마와 통화를 하고 난 날 밤, 결혼식 날에 대한 기억 하나가 더 떠올랐다.
결혼 당일 새벽녘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방에 들어가서 자는지 보이지 않았고 만조 아줌마 혼자 깨서 어둑한 거실에 앉아 있었다. 내가 욕실에 들어가 씻고 나왔을 때도 만조 아줌마는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우리 집 거실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집에서 우리 가족이 겪은 시간을 짐작해보고 싶다는 듯이.
대전 그 집은 우리가 비탈 과수원을 팔고 예성을 떠나온 뒤 내내 살아온 집이었다. 내 부모의 불화와 무언가를 삼키듯 보낸 내 십대가, 아빠의 투병과 엄마의 회한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분투가 고여 있었다. 만조 아줌마는 몇시간 뒤 결혼을 하는 나에게 잘 살라거나 행복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욕실에서 나오는 나를 올려다보면서 딱 한마디를 했다.
“니 신랑은 이름이 뭐니?”
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만조 아줌마를 봤다.
“종수예요, 아줌마. 오종수.”
*
병원 다음 예약일이 다가오자 오종수는 내가 약을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꼭 먹어야 한다고. 결핵약을. 내가 닭간과 발효 항아리 생각에 빠져 숙제를 미루는 동안 오종수는 이미 결핵 바로알기에 들어가본 것 같았다.
“언제든 발병할 수 있대, 자기야.”
내 남편 오종수. 그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언제든은 아닐 거야, 자기야.”
오종수가 휴대폰 화면을 내밀었다.
“여기 봐. 결핵은 면역기능과 깊은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고 적혀 있잖아. 마지막 이 문장 이거 딱 자기 얘기야. 정신적 스트레스와 과로, 영양 불균형, 습관적 음주. 자기는 면역력이 언제든 떨어질 수 있는 최적의 상황 속에 있잖아.”
“자기는 정말, 나를 잘 알고 있네.”
그렇게 말하고 나는 설거지를 시작했다. 오종수가 소리 없이 옆에 와 섰다.
“자기가 아프면 은채랑 나도 아파.”
“알아.”
“내가 만약에 잠복결핵이라면 말이야, 난 당신이랑 은채를 위해서 바로 약을 먹을 거야.”
내가 별다른 말이 없자 오종수가 직장 동료의 처형 얘기를 했다.
“걔네 처형이 원래는 잔병도 없는 체질이었대. 근데 마흔 넘고 나서부터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기 시작했다는 거야. 종합병원의 온갖 과들을 전전해도 이유도 안 나오고.”
“병원도 모르는 이유가 있겠지.”
“아니야. 아무도 이유를 못 찾았대. 그러다 혹시나 해서, 정말 혹시나 해서 결핵 검사를 했는데 몸속에 비활동성 결핵균이 있다고 나온 거야. 자기처럼.”
“그래?”
“걔네 처형이 정말 맨날 피곤하고, 맨날 기력 없고, 맨날 골골댔는데, 그게 다 결핵균 때문이었던 거지. 결핵균이 걔네 처형을 갉아먹고 있었던 거야.”
“슬픈 얘기다, 자기야.”
내가 설거지를 마치자 오종수도 휴대폰을 닫았다. 뒤로 와서 내 어깨를 주물주물하더니 오종수가 진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자기는 누구한테서 옮은 거야?”
*
그건 내가 호흡기내과 의사한테 묻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폐 씨티 판독 결과를 들려주면서 의사가 내게 말했다.
“어렸을 때 결핵을 앓은 적이 있나요? 이건 오래전에 결핵이 한번 지나간 폐 모양이에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전 결핵을 앓은 적이 없어요.”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어요. 자기도 모르게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의사는 잠시 말이 없는 채로 내 폐 사진만을 바라봤다. 모니터 아래쪽 상자에 천식 흡입기가 몇개 담겨 있었다. 그 옆의 손소독제, 탁상달력, 텀블러, 뒤쪽의 오렌지색 클리어파일을 돌아 시선이 다시 모니터 앞으로 왔을 때 나는 의사가 나와 같은 에티본 마스크를 쓰고 있는 걸 알아보았다.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 진료실 의자에 앉기까지 뚫어야 했던 수많은 관문이 떠올랐던 것이다. 호흡기 감염병 대유행 시기에 호흡기 증상으로 진료를 받는다는 건 반복되는 심문과 검사, 거부와 대기의 긴 벽을 지나야 하는 일이었다.
“피 검사는 결핵 항체 보는 검사였어요. 환자분한텐 항체가 있고, 그건 얘네들이 환자분 안에 이미 있다는 뜻이에요. 환자분 면역력 덕분에 얘네가 억제되고 있는 거고요.”
특별히 어딘가를 가리키지 않은 채로 의사가 ‘얘네’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움찔하고 놀랐다. 문맥상 ‘얘네’는 아마도 결핵균이겠지만 왠지 ‘라바’처럼 생긴 어떤 걸 떠올려야 할 것만 같았다.
“저는 지금까지 별 증상이 없었어요, 선생님. 폐활량이 안 좋긴 했지만 그건 운동부족 때문이었고요, 감기만 걸리면 기침을 했지만 그건 다들 그러잖아요? 건강검진에서도 추가 검사를 권고받은 적이 없어요.”
말 그대로였다. 2020년 초여름, 기정병원 호흡기내과의 송미림 의사한테 진료를 받기 전까지 나는 내가 결핵 보균자일 거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흉부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송미림 의사가 폐 씨티를 찍자고 했을 때 내가 걱정했던 건 암이었다. 그래, 암이 걸릴 때도 됐지. 아직도 안 걸린 게 더 이상한 거야.
증상이 나타난 건 자가격리가 끝나고 얼마 뒤였다. 2주가 지났을 뿐인데 격리를 끝내고 집 밖으로 나오니 계절이 바뀌어 있었다. 같은 날 자가격리에 들어갔던 취미반 클래스 수강생 중에 추가 확진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아마 그들도 그즈음 집 밖으로 나왔을 것이다.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고 다른 지역으로 이송된 수미만이 아직 병상에 있었다.
상가로 걸어가는데 땀이 배어났다. 길가마다 장미가 선명했다. 사람들은 모두 반팔 반바지를 입고 있었고 과일가게 앞을 지날 때는 벌써 진한 참외 냄새가 났다. 새경프라자 304호 나리공방, 오직 그곳에만 지난봄이 고여 있었다.
환기부터 해야 했지만 왜 그런지 창문을 열 수가 없었다. 미처 마무리를 못한 지난봄의 수업 흔적들을 탁자에 그대로 둔 채 나는 어딘가를 붙잡고 앉았다. 숨을 들이쉬는데 가슴 안쪽에서 낯선 통증이 느껴졌다. 천천히 내뱉은 뒤 다시 들이쉬어보았다. 들숨이 3분의 2 지점에서 멈추는 느낌이 들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뛰었을 때처럼 숨이 밭은 느낌. 호흡을 마저 하기 위해 숨을 한껏 더 들이쉬자 흉곽 전체에 통증이 느껴졌다. 분명하고도 생생한 감각이었다. 숨 쉬는 게 불편해지자 나는 내 호흡을 초마다 의식할 수밖에 없었고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결핵이 지나갔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폐가 정상인보단 안 좋을 수밖에 없어요.”
송미림 의사가 말했다.
“하지만요, 선생님.”
모두가 신종 호흡기 바이러스로 정신이 없는 때에 생각지도 못한 결핵 얘기를 듣고 있자니 그 익숙한 병명이 오히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제 주위엔 결핵에 걸린 사람이 없었어요. 가족들 중에도 없었고 학교 친구들이나 선생님 중에도 없었어요. 동네 사람들 중에도 없었고요. 정말 아무도 없었어요. 만조 아줌마만 빼고요.”
의사의 눈에 장난기 어린 웃음이 서렸다 사라졌다.
“결핵 바로알기엔 들어가보셨죠?”
누군가를 특정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고, 의사는 그 말을 하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결핵 바로알기에 따르면 결핵은 공기와 비말을 통해 전파되는 대표적인 호흡기 감염병이었다. 내가 숨을 쉬고, 머물고, 먹고, 얘기를 나눈 어느 곳에서도 나는 감염될 수가 있었다. 2020년을 지나면서는 더욱이 그걸 모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만조 아줌마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결핵 치료는 정말,”
의사가 말했다.
“너무너무 힘들어요. 약 먹는 게 정말이지 쉽지 않아요.”
한 호흡을 쉬고 의사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얘네가 진짜, 너무 독해요.”
이번 ‘얘네’는 결핵약인 걸까, 결핵균인 걸까.
만조 아줌마의 결핵약 얘기는 다행히 내 기억 속에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엄마도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심했지.”
전화기 너머에서 엄마가 말했다.
“그이가 과수원 일을 못한 게 결핵약 먹을 때뿐이었어. 눈이 얼마나 안 보였는지 한 걸음을 디디면 눈앞에 검은 벽이 탁 막아서고, 또 한 걸음을 디디면 저쪽으로 검은 천이 차르륵 쏟아지고, 부엌 끝에 있는 냉장고가 안 보인다고 했으니까.”
나는 그게 곧 내게 닥칠 미래이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전화를 끊었었다.
“선생님, 전 이제 어떻게 하면 좋죠?”
나는 처분을 내려주길 바라는 심정으로 의사를 봤다. 병원 앞 포토라인에선 내 다음 얘기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집에선 오종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만조 아줌마가 내 인생에 다시 등장하고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의사를 바라봤다.
그때였다. 모니터를 보고 있던 송미림 의사가 내 쪽으로 의자를 확 돌리더니 물었다.
“무슨 일 하세요?”
기습이라도 당한 것처럼 나는 그 질문에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당황한 나 자신에게 다시 당황을 했고, 대답을 못한 채로 우물쭈물 몇초가 지나자 스스로에게 모욕을 당한 기분이 들었다.
“아, 집단시설 종사자인지를 여쭤본 거예요. 어린이집이나 학교, 요양원 등이요.”
그제야 나는 몇주 전 코로나19 진단검사 때도 그 질문을 거쳤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때 내가 어떤 대답을 했었는지도.
“집단시설 종사자는 아니지만, 불특정 다수를 상대하긴 해요.”
의사는 모니터를 조금 더 바라봤고, 매듭을 짓자는 듯 말했다.
“객담 검사를 진행해보기로 하죠. 그 결과까지 보고 얘기하는 게 좋겠어요. 나가셔서 안내에 따라 가래 뱉고 가세요.”
진료실 의자에서 일어서며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 가래가 없어요, 선생님.”
송미림 의사가 나를 봤다.
“최대한 끌어올려보세요. 최대한.”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