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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희업 金熙業
1961년 서울 출생.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칼 회고전』이 있음. hanakim3@hanmail.net
통증의 형식
생각하지 않으면 아프지 않을 수도 있다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세상에 존재하듯
아프고 안 아프고의 차이는 아픈 차이
통증은 쪼그리고 앉아 오래오래 버티다가도 정들 만하면, 어느새 날아가는 바람둥이 새
순간을 제치고 몸속 한획을 긋는, 통증
먼 길 돌고 돌아 까마득한 새벽 어디서 왔을까
종종 통성명 없이 불쑥 나타나
평소에 없던 수많은 감정을 들춰내 죽이고 살리길 거듭
이대로라면 자멸에 평안히 도달할 것인가
내가 아니었으면, 해서 몸을 떠나고 싶은 떳떳한 출가
어떤 통증은 병명 없이 발견되기도 했다는데,
높은 가지의 이파리 하나가 공중의 하루를 잠깐 날다 떨어졌다
그 위로
무지개를 새긴 문신의 통증에 대해, 고통의 화려함에 대해 하늘이 속삭이듯 고백한다
어둠을 몰아낸 형광등 빛, 바라본 동공엔 눈부신 통증이 깜박거렸다
오늘도 추운 곳에서 빙하가 녹는다 진리처럼 모순처럼
따뜻한 통증을 동반한 채
그러니 멀리 근처에도 통증은 있어
언젠가 상쾌할 거라는 가설은 미완성으로 남겨놓는다
새를 오래 품은 병색 짙던 아이는 더 버티지 못하고, 새보다 먼저 하늘로 날아갔다
변명
나무의 무릎이 말뚝 박듯 잠기기 시작했다
그때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나흘 내내 내리는 눈이 세상의 발목을 잡는 것을
밤이 서둘러 도착한 산간마을은 정적이라는 맹수로 들끓었다
이곳은 피안이 될 충분한 조건이라
굳이, 멀리 밖을 나서지 않아도 되었다
키만 한 든직한 눈이 떳떳하게 머물 수 있게 해주었다
문밖으로 나와보라며, 창문을 두드리는 눈발을 애써 외면했다
들리지 않는 소리는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아
차곡차곡 눈과 귀를 닫아버렸다
영영 침묵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는 무덤처럼,
숨소리는 결국 몸 밖을 나오지 못했다
눈이 내려 지구의 체중이 조금 늘었을 뿐
필연적인 관계마저 두절된 채 울타리가 쳐지고
어떤 가능성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러나 살아 있는 것은 움직이지 않고도 살아 있었다
그저 마음속 발목이 빠지는 바람에 나서지 못한 것도,
머물러 있도록 마음이 조정한 것도 아니다
호명하지 않았는데, 무작정 눈이 다가와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