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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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박상영 朴相映

1988년 대구 출생. 2016년 문학동네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연작소설 『대도시의 사랑법』 등이 있음.

 

 

 

요즘 애들

 

 

카메라가 꺼졌다.

황은채가 큐 사인을 보내기 무섭게 남선배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청바지가 아니라 그럴듯한 정장을 입은 선배의 모습이 오랜만이라 낯설었다. 선배가 내 시선을 눈치채고는 웃으며 말했다.

“야, 넌 어째 유튜브랑 더 잘 맞는 것 같다? 대본 없으니까 더 잘하네.”

그럼 대본이 있는 프로그램에서는 어떻다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나는 신입사원 특유의 작위적인 미소를 지으며, 선배랑 함께 유튜브 프로그램 하나 맡아야 할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황은채가 웃으며 대답했다.

“김기자님, 실없는 소리 하는 버릇은 여전하네요.”

눈치 빠른 선배가 은근히 하대를 하며 물었다.

“황피디랑 김기자랑 어떻게 아는 사이라고 했지?”

황은채가 어물쩍대는 사이 내가 잽싸게 답했다.

“언론사 시험 칠 때 같은 스터디 그룹이었어요.”

“그렇구나, 소중한 인연이네. 대단히 잘됐네. 둘 다 잘돼서 만났으니 정말 잘됐네.”

선배 특유의, 같은 어미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리액션이었다. 나로서는 단순히 어휘력이 모자란 사람처럼만 느껴지는데 방송에서는 저런 화법이 꽤 잘 먹혔다. 오디오가 비지 않아서 그런가.

비지 않는 오디오.

그것은 첫 출근날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했던 남선배가 신입사원 열명에게 가장 먼저 일러두었던 덕목이기도 했다. “3초 이상 오디오가 비잖아? 그건 방송사고야.” 그의 말을 대단한 격언이라도 되는 것처럼 받아 적던 때도 있었다. 그게 마치 지난 생의 일처럼 까마득해서 괜히 웃음이 나왔다.

“저는 화장실이 급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대표님께 안부 전해주고요.”

하지 않아도 될 핑계까지 덧붙이고는 황은채에게 90도로 고개를 숙여 깍듯이 인사를 하는 남선배. 은근슬쩍 말을 놓을 때는 언제고 저러는 걸 보면 확실히 사회생활 15년 짬밥을 거저먹은 건 아니었다. 남선배는 스스로를 유능한 사회인이라고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었고 실제로 그 판단은 상당 부분 옳았다. 내가 기억하기로 선배는 신입 때부터 지금까지 쭉 회사의 간판이었으며, 심지어는 지난 몇년간 지리멸렬하게 이어졌던 언론파업 때조차도 노조의 대표 얼굴이었다. 어느 집단에 속해 있든 항상 무리의 중심에 있는 사람. 집단의 이익과 스스로의 정체성을 일치시킬 줄 아는 사람. 그런 종류의 인간들을 항상 동경하는 동시에 의아하게 생각해왔다.

황은채는 문밖까지 선배를 마중한 뒤, 다시 회의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웃으며 내게 말했다.

“스터디에서 만났다고? 언제 그렇게 순발력이 늘었대?”

“말도 마. 눈칫밥 3년에 거짓말만 청산유수다. 기자 똥은 개도 안 먹는다더니 그동안 는 건 맘고생이랑 구라밖에 없어.”

“하긴 솔직하게 다 말하기도 좀 그렇긴 해. 구질구질하기도 하고.”

그제야 나는 우리의 과거가 솔직하게 말하기 조금 그렇고 구질구질해져버린 종류의 무언가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때는 우리가 함께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공간이 우리의 자랑이었던 적도 있는데, 이제는 더이상 그렇지 않다는 게 못내 어색하게 느껴졌다. 황은채가 내게 말했다.

“시간 되면 우리 오랜만에 커피나 한잔할래?”

“좋지.”

황은채가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검은 백팩을 둘러맸다. 목선이 고스란히 드러날 만큼 짧게 잘린 그녀의 머리카락이 좌우로 흔들렸다. 통이 넓은 청바지와 오버사이즈 항공 점퍼가 썩 잘 어울렸다. 5년 전에는 단정하고 불편해 보이는 투피스 계열의 옷들을 고수했던 그녀였다. 내가 알던 이십대의 황은채와는 여러모로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고백하자면 연락을 받기 전까지 나는 황은채에 대해 단 한번도 떠올리지 않았다.

며칠 전 유튜브 섭외 요청,이라는 제목을 단 메일을 보았을 때 한숨부터 나왔다. 최근 원치 않게 여론의 집중을 받게 된 이후로 부쩍 수상한 섭외가 늘었기 때문이었다. 경영진 교체 후 화려하게 현업으로 복귀한 남선배와 파업 기간 동안 임시로 채용된 비정규직 사원들 중 유일하게 정규직으로 전환된 내가 얼마 전 한 시사 프로그램의 메인 MC로 기용되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애초에 신입 기자가 레귤러 프로그램의 고정 출연진으로 선발되는 경우도 잘 없거니와, 남선배와 함께한다는 사실이 불필요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여느 때처럼 영양가 없는 채널에서 간 보기 식으로 돌린 연락이겠거니 하고 무심히 넘기려 했는데 메일을 보낸 사람의 이름이 뭔가 낯익었다. 자세히 보니 내 첫번째 직장의 유일한 입사 동기였던 황은채였다. 그녀가 꼬박 5년 만에 내게 연락한 것이었다.

황은채는 내가 다니는 방송국이 포함된 미디어그룹의 협력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주로 유튜브나 팟캐스트 등의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뉴미디어 계열의 신생 프로덕션이었는데, 파업 때 해고당한 전 교양국 본부장이 차린 사업체라 우리 회사와 관련된 콘텐츠를 자주 제작했다.

메일의 내용은 여느 프로그램들의 섭외 요청과 다르지 않았다. 신입 공채 시즌을 맞아 신입과 부장급 사원이 출연해 자소서를 쓰는 방법과 미디어 기업에 입사하는 꿀팁을 공개하는 기획이었다. 관심도가 높은 취업 관련 이슈에 최근에 인기몰이를 하는 신구 간의 세대차를 예능적으로 녹이는 기획은 새로울 건 없었으나 적어도 큰 문제를 일으킬 것 같지는 않았다.

섭외 메일을 받은 지 십분이 채 지나지도 않아 남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언제나처럼 질문의 외피를 입고 있으나 명령에 가까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이 기획 괜찮은데? 과도하게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도 없고. 김기자는 어떻게 생각해?”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없다니, 설마요. 유튜브 콘텐츠에 우리 둘의 얼굴이 함께 잡히는 것만으로도 몹시 정치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걸 선배도 나도 모르지 않았다. 탐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섭외에 응하게 된 것은, 단지 황은채가 보고 싶어서였다.

 

황은채가 데리고 온 앳된 VJ 한명이 박스에 마이크 송신기와 조명, 트라이포드를 담아 들었다. 그리고 누가 봐도 채근하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선배님, 저 회사로 복귀할까요?” 황은채는 VJ에게 곧장 집으로 가되 내일 일찍 출근해 사무실에 장비를 들여다 놓으라고 답했다. VJ는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의실 밖으로 나섰다.

“저분 되게 개성이 강하신 것 같다?”

“말도 마. 요즘 애들 아주 칼 같지?”

정작 입 밖으로 그 단어를 꺼낸 황은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그러더니 이내 내 팔을 때리면서 웃기 시작했다. 황은채의 입에서 요즘 애들,이라는 단어가 나오다니. 그것은 그 옛날 우리가 함께 공유했던 멸칭이었다. 나는 웃을 때 옆 사람을 때리는 습관이며 매운 손맛은 여전하다고 생각하며 과장되게 팔을 문질렀다. 그리고 황은채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네가 선배라니. 너무 어색하다.”

“선배인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 우리 회사에서는 위에서 몇번째다? 벌써 이런 나이가 됐다.”

“무슨 소리야, 난 아직도 신입인데.”

황은채는 대단한 실례를 저지른 것처럼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그 표정은 지난 몇달간 사람들이 나에게 가장 많이 지어 보였던 표정이기도 했다. 나는 별일 아니라는 의미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황은채와 함께 회의실 밖으로 나섰다.

 

*

 

나에게 『매거진C』가 영세한 문화 잡지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내 인생 첫번째 직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잡지사에 들어가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대학 마지막 학기, 수업 몇개를 함께 들어 꽤 친분이 있었던 선배에게서 갑작스레 연락이 왔다. 선배는 (기자들 특유의 별로 급하지도 않은데 항상 다급한 목소리 톤으로) 선배의 신문사와 같은 계열의 잡지사에 에디터 자리가 났다고 했다. 잡지의 이름은 『매거진C』. 규모는 크지 않지만 인터뷰 지면이 충실해 잡지업계나 문화계에서 꽤 단단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 갑작스러운 제의에 당황한 내게 선배가 마침표를 찍듯 말했다.

“내가 왜 너한테 전화했겠냐. 너 잘하잖아.”

예나 지금이나 칭찬을 들으면 일단 그 이상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나는 나도 모르는 새 그간 썼던 기사며 산문을 추려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크리스마스이브, 나는 눈이 펑펑 내리던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눈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밀치고 가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매거진C』의 건물을 찾았다. 안면 윤곽 전문 성형외과와 보톡스 전문 피부과 사이에 함정처럼 위치해 있는, 도무지 강남 한복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낡은 4층짜리 건물이었다. 1층 상가에는 쇼윈도에 먼지가 잔뜩 낀 천냥 백화점이 있었고, 그 옆으로 돌아가니 온갖 박스가 쌓여 있는 시멘트 계단이 나왔다. 나는 박스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2층 『매거진C』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면접장이랍시고 마련된 곳도 뭐 그럴듯한 공간이 아니라, 덩치가 큰 책장 뒤에 놓인 십인용 테이블이 전부였다. 책장에는 『매거진C』의 과월호들이 차곡차곡 꽂혀 있었다. 나를 제외하고 다섯명 정도 되는 면접 대기자들이 더 있었는데 다들 왠지 힙하고, 세련되고, 그러니까 잡지사를 위해 완벽히 준비된 인재들인 것만 같았다.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이 들어 오히려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면접은 평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직원들은 거의 다 여성이었는데 편집장만 중년 남자였다. 포트폴리오 중 몇몇 글의 디테일에 관해 물었고, 『매거진C』에서 인상 깊게 본 기사가 무엇이냐, 대학 졸업 여부나 언제부터 출근이 가능한가,와 같은 질문들이 이어졌다. 면접 내내 말이 없던 편집장이 면접 말미에 궁금한 것이 없냐고 했다. 나는 수습 기간이 얼마나 되냐고 했고, 그는 약간은 불편한 듯한 표정으로 “3개월 정도”라고 짧게 답했다. 사무실이 너무 추워 면접을 보는 내내 무릎을 쓰다듬었던 기억이 있다. 막상 이틀 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다음 날부터 출근하라는 연락을 곧바로 받았을 때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을 느끼기는 했다. 그때 내 감을 믿었어야 했다.

 

12월 26일, 출근하자마자 나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동기인 황은채였다. 그녀는 서울 소재 한 여대의 국문과를 졸업한 후 인터넷 신문사에서 일년 동안 일했으며, 그 경력을 바탕으로 피처 에디터로 들어오게 됐다고 했다. 우리는 동갑이라는 이유로 순식간에 말을 놓았으며 어색함을 덜기 위해 서로 공통분모를 찾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때 키가 크고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를 가진 여자가 우리 앞에 섰다. 마치 사극에 나올 것처럼 반듯하게 정중앙 가르마를 탄 그녀는 날카로운 눈매에 창백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으나 목소리만큼은 아기처럼 앳된 비음이었다. 그럼에도 말투에 안정성이랄까, 사회생활 9단 특유의 냉정한 어조가 깃들어 있어 나이나 연차를 짐작게 했다. 그녀가 피처팀의 선임 기자이며 우리를 가르칠 배서정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배서정은 우리를 이틀 전 면접장으로 사용되었던 책장 너머의 테이블로 데려갔다. 테이블 옆에는 박스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배서정은 나와 황은채에게 첫번째 업무를 배당해주었다. 정기구독건 잡지와 까페에 무료로 배치하기 위한 잡지를 발송하는 작업이 그것이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매거진C』의 규격봉투에 잡지를 넣고 라벨지에 인쇄된 주소를 붙여서 박스에 집어넣으면 되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까페며 대학 등지에 무료로 배포되는 분량이 많았다. 대외적으로는 매달 3만부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매거진C』였으나, 실상 판매는 그만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루한 단순 작업을 하며 황은채와 나는 서로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경상도 출신인 그녀는 다소 새침해 보이는 첫인상과는 달리 사투리가 묻어나는 시원시원한 말투를 구사했고, 화끈한 성격인 것 같았다. 나와 음악이며 영화 취향도 비슷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우리는 조용히 수다를 떨며 당시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해 큰 인기를 끌고 있던 가수의 얼굴을 오백개쯤 봉투에 집어넣었다. 아차 하는 사이 내가 손가락을 베어버렸다. 황은채는 호들갑스럽게 괜찮냐고 물었고, 배서정이 덜그럭거리는 슬리퍼 소리를 내며 책장 너머로 다가왔다.

“너네 뭐가 그렇게도 즐겁니.”

그녀는 특유의 딱딱한 말투로 우리에게 말한 뒤 내가 손가락을 벤 것을 뻔히 보고서도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나는 피가 나는 손가락을 입에 문 채, 가뜩이나 반듯한 가르마에 머리를 너무 과도하게 올려 묶어 성격이 더 사나워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피 맛은 비렸다.

 

황은채와 나에게 다음으로 배당된 업무는 커피가 떨어지지 않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드립커피를 내리는 것과, 편집부에 놓인 커다란 고무나무에 물을 주는 것이었다. 아침에는 회사에서 집이 가까운 황은채가 커피를 내리고, 점심에는 밥을 빨리 먹는 내가 커피를 내리는 것으로 어렵지 않게 합의가 도출되었다. 고무나무의 경우엔 비교적 자리가 가까운 내가 수시로 물을 주기로 했다.

처음 며칠 동안 우리는 커다란 책장에 백권도 넘게 꽂힌 『매거진C』의 과월호를 보며 잡지의 구성이나 정체성에 대해서 스터디했다. 흥미로운 인터뷰가 많았고, 순수예술부터 대중문화까지 문화계 전반을 골고루 다루고 있다는 점이 꼭 마음에 들었다. 잡지를 보면 볼수록 나는 꽤 부푼 꿈에 사로잡혀갔다. 언젠가, 그러니까 3개월의 수습 기간이 끝나고 머지않은 시간 후에 이런 사람들을 만나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설렘이 차올랐다.

 

*

 

며칠 뒤 첫번째 기획회의가 열렸다. 기획회의라고 해봤자 세 팀의 선임 기자 세명과 편집장, 수습 에디터인 황은채와 내가 모여 앉아 각자의 기획안을 발표하고, 일방적으로 평가를 받고 혼나는 자리였다. 그룹 차원에서 한차례 커다란 구조조정이 들어간 뒤 편집부의 인원이 반토막 났다고 했다.

첫번째 기획회의가 끝난 후 황은채와 나는 각자 몫의 고민을 안게 되었는데 일단 우리 둘이 제시했던 모든 기획안이 단 하나도 통과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선배들이 알짜배기 기사만 쏙쏙 가져가버린 통에 우리에게 배당된 지면이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광고주들이 배포한 보도자료를 앵무새처럼 받아 적는 홍보용 기사나, 마감에 늦기로 유명한 심리상담가가 필자로 있는 코너의 원고 수발 및 교정, 거리를 쏘다니며 앙케트를 포함한 미니 인터뷰를 하는 것 정도였다. 게다가 원래 막내들의 주 업무라며 『매거진C』의 공식 사이트와 SNS 계정을 담당하는 중대한 역할까지 부여받았다. 황은채가 공식 사이트의 독자 게시판, 이벤트 페이지 등을 총괄하게 되었으며, 내 경우는 『매거진C』의 이름으로 개설된 트위터 계정을 관리하며 매일 오후 두시에 기사를 업로드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나, 황은채와 나는 사회 초년생 특유의 과열된 열정으로 모든 일에 힘을 잔뜩 준 채 최선을 다했다. 황은채는 독자 게시판에 올라온 흔하디흔한 이야기들을 마르고 닳도록 읽으며 최적의 사연을 고르기 위해 고심했으며, 나는 사진기자를 대동한 채 압구정동과 신사동 일대를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누비며 인터뷰감이 될 만한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사무실 안은 히터를 틀어도 언제나 입김이 나올 만큼 추워서 나는 인터넷으로 만원짜리 중국산 난로를 주문해 발아래 틀어놓았다. 난로는 오래 켜놓으면 너무 뜨겁고 또 끄면 금방 발이 시려 수시로 켜고 끄기를 반복해야만 했다. 우리의 사수였던 배서정은 긴 머리칼을 집게핀으로 올려 묶고, 약지로 안경을 추켜올리며 특유의 날카로운 눈매로 우리를 관망할 따름이었다.

 

어느 날은 화장실의 수도관이 완전히 동파되어버렸다. 편집장은 나에게 변기를 뚫으라고 명했고, 나는 언 손을 비비며 한나절 동안 계속해서 변기를 뚫고 뚫었지만 얼어버린 배관 때문에 물이 나오지 않았다. 빨갛게 언 코를 한 채로 총무팀의 대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출장 수리기사를 부르면 30만원이 넘는 돈이 든다고 했다. 편집장은 이 사실을 전해 듣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잡지팀에 배정된 예산이 여의치 않다며 내게 ‘사용금지’라는 안내문을 인쇄해 화장실 앞에 붙이라고 했다. 그럼 도대체 사무실 사람들이 어떻게 용변을 해결하라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시키는 대로 화장실 앞에 안내문을 붙였다. 자리에 돌아오자 배서정이 자신의 모니터를 바라본 채로 내게 말했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 말해봐.”

순식간에 머리가 하얘졌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배서정이 평온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지금 몇시지?”

“네시입니다.”

“두시간 전의 네가 뭘 했어야 하지?”

그제야 내 업무였던 트위터 업로드가 퍼뜩 떠올랐고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말했다. 여섯시간이 넘도록 언 수도관을 뚫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 모습을 뻔히 다 보고서도 다짜고짜 책망부터 하다니. 차갑게 언 손으로 트위터 업로드를 하며, 괜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얼른 그 생각을 지웠다. 대신 알람 앱을 열어 매일 두시에 알람이 오게 설정해놓았다.

 

한파가 끝날 때까지 약 보름 동안 잡지팀의 사람들은 옆 건물 성형외과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해야만 했다. 혼자 낯선 병원의 화장실에 갈 만큼 낯짝이 두껍지는 않았던지라, 황은채와 나는 언제나 시간을 맞춰 함께 성형외과로 향했다. 우리는 마치 그곳이 내 집 앞마당이라도 되는 것처럼 뭔가를 조잘대며 붕대를 감고 있는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볼일을 봤다. 그렇게 쫓기듯 화장실에 갔다 돌아올 때면 쉴 새 없이 웃었지만 그 웃음 뒤에 알 수 없이 허탈한 기분에 사로잡히고는 했다.

 

*

 

첫번째 잡지가 나온 후, 우리가 쓴 기사에 대한 크리틱이 시작됐다. 황은채와 나는 약간은 긴장된 자세로 회의 테이블에 앉았다. 편집장과 선임들은 저마다 우리 기사에 대해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국문과 문학회 출신의 황은채는 문장력과 글쓰기의 기본기가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다. 황은채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아니면 정말 단순히 추웠던 건지 볼이 빨개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배서정은 내 인터뷰 기사를 보고는 과월호를 던져주며 어떤 방식으로 인터뷰이에게서 질문을 뽑아낼 수 있는지 분석해 보라고 말했다. 훑어보니 오늘 뭐 먹었어요, 인도 카레 좋아해요,와 같은 하나 마나 한 질문만 가득했고 그마저도 너무 재미가 없어 달리 뭘 보고 배워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최종교에서 편집장이 내가 인터뷰에 써놓은 “~했고요”라는 구절을 싹 다 “~했구요”로 바꿔놓았다. 나는 회의가 끝날 무렵 조심스럽게 사수 배서정에게 물었다.

“선배님, 그런데 왜 했고요,를 했구요,라고 쓰나요?”

그 말을 들은 편집장이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다. 너희들 입장에서는 헷갈릴 수 있겠네.”

그리고 덧붙이기를 우리 잡지는 대중 친화적이고 편안한 언어를 구사하기 때문에 어색한 문법은 바꿔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했다. 때문에 ‘바람’을 ‘바램’이라고, ‘금세’를 ‘금새’로, ‘했고요’를 ‘했구요’라고 표기한다고 했다. 나는 어법을 지키지 않는 것과 대중 친화적인 것이 무슨 상관인지 잠시 고민하다 말았다.

편집장은 내 전공을 듣더니, 자신도 영문학과를 나왔다며 갑자기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자신의 대학 시절 일화들을 털어놓았다. 그후에는 갑자기 ‘고전 읽기에 소홀한 요즘 아이들’을 주제로 훈화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 신입들이 기초 소양을 쌓고 비판하는 지성을 길러야 한다며, 자신의 책상 책꽂이에 꽂혀 있던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를 꺼내 건네주었다. 번역이 엉망인 것으로 유명한 D 출판사의 전집이었다. 황은채와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든 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

 

인턴 신분의 황은채와 나는 백만원의 월급을 받으며 매일 아홉시 반부터 이르면 저녁 여덟시, 늦으면 열한시 정도까지 일했다. 한달에 한두번씩은 무조건 밤을 새워 마감을 했다. 점심과 저녁 식대가 따로 나오지 않아 식비나 출퇴근 교통비를 제외하면 남는 돈이 없었지만, 괜찮았다. 이 시기를 버티고 나면 더 나은 삶이 펼쳐지게 될 거라는 모종의 희망이 있었으니까.

황은채와 나는 매일 다른 사유로 다채롭게도 혼났다. 일단 우리 둘 다 나름대로 꽤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지라 시키는 일을 아예 수행하지 못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아무리 최선을 다해 일을 해 가도 꼭 지적을 받고는 했다. 사수의 디렉션은 일관성이 없었다. 어떤 날은 인터넷 게시판에나 적합할 만큼 신조어를 많이 쓰는 발랄한 무드를 요구하는가 하면, 가벼운 톤으로 기사를 써 가면 문장에 중량감이 떨어지고 수식이 지나치게 많다고 평했다(그렇게 말하는 배서정이야말로 딱딱한 번역투에 지나친 화려체를 구사하곤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김없이 『매거진C』의 성격과 잘 맞지 않는다며 다시 써 오라고 지시했다. 아무리 과월호를 뒤져봐도, 선배들이 쓴 기사를 마르고 닳도록 읽어봐도 『매거진C』다운 게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수정해야 하는지 질문했지만 명확한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황은채와 내가 무슨 질문을 하든 “내가 니들 질문 받아주는 사람이니? 기사 똑바로 분석 안 했지?”라고 쏘아댈 따름이었다. 그러다 함께 점심을 먹을 때면 선임 기자들끼리 요즘 애들은 아무것도 알고 싶어하지도 질문하지도 않는다며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학원을 다니며 수동적으로 공부를 해 그런 것 같다고, 별로 논리적이지도 참신하지도 않은 세대 분석을 했다. 그 말을 한 배서정과 우리가 고작 네살 차이라는 것이 떠올랐고, ‘요즘 애들’이라는 말을 쓰기에 네살 터울은 조금 애매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은채가 기사 내용 자체에 지적받는 경우가 많았다면 내 경우는 트위터 멘션이나 DM에 즉각 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성실성에 문제가 있다는 평가를 듣곤 했다. 선배들의 눈에는 내가 인터뷰이를 섭외하느라 수십통도 넘게 전화를 걸고, 규모가 작고 정체성이 모호한 잡지라 섭외 요청을 거절한다는 사람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설득하며, 선배들이 떨궈준 보도자료를 열번도 넘게 고쳐 쓰고, 고무나무에 물을 주고 다 내린 커피 필터까지 가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첫 개인전을 여는 신진 아티스트의 전시를 스케치하기 위해 삼청동의 한 갤러리로 향한 적이 있었다. 사진을 포함해 두 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기사였으나 내 이름을 달고 나오는 기사였으므로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다. 뉴욕에서 막 귀국해 주로 회화 작업을 하는 작가의 배경을 조사했고, 영문 사이트를 뒤지며 짧은 인터뷰들을 인쇄해 갈무리해놨다. 전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장식적이지만 깊이가 부족해 보였고,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좋은 아기자기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기사의 내실을 다지기 위해 전시장에 상주해 있는 작가와 미니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과묵한 힙스터처럼 보이는 외견과는 달리 정오의 라디오를 틀어놓은 것처럼 말이 많은 남자였다. 유학 기간 동안의 고충이며 자신의 작품에 담긴 심오한 의미며 삶의 궤적, 하다못해 기르는 반려견의 품종까지도 읊어대는 통에 도대체 말을 끊을 수가 없었다. 예상했던 시간을 훌쩍 넘긴 나는 인터뷰를 하다 잠시 쉬기로 한 후, 배서정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선배님. 인터뷰가 길어져 아무래도 퇴근 시간까지는 사무실에 못 들어갈 것 같습니다.

알겠어. 끝나고 바로 퇴근해. 내일 출근 때까지 녹취 풀어놓고.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너, 프사랑 대화명이 그게 뭐니?

네?

내 프로필 사진은 당시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해 한창 유명세를 끌고 있는 아이돌이었고, 대화명은 ‘꿀꿀이’였다. 실제로 회사를 다니면서부터 갑자기 살이 찌기 시작해서 별생각 없이 달아놓은 대화명이었다.

생각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애도 아니고 꿀꿀이가 뭐니? 인터뷰이가 보면 무슨 생각 할 것 같아? 넌 밖에 나가면 우리 매체를 대표하는 사람이야. 당장 대화명이랑 프로필 사진 바꿔.

배서정의 프로필을 클릭해보니 프로필 사진은 『매거진C』의 이번 호 표지였고, 대화명은 ‘매거진C 배서정 에디터’라고 되어 있었다. 나는 프로답지 못한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얼른 대화명을 바꾸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인터뷰이가 자기 자랑을 하는 걸 듣다가 녹초가 된 나는 집에 가는 길에 황은채에게 오늘 인터뷰이의 수다스러움을 흉봤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배서정이 한 말을 전했다. 그러자 갑자기 황은채가 엄청나게 격렬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야, 너도 당했어?

어? 무슨 소리야.

배서정 진짜 이상해. 내가 카톡에 남친이랑 찍은 사진 올려놨더니 점심 먹다 말고는 세상천지에 남자친구는 너만 있느냐고, 당장 바꾸라고 난리 치는 거 있지.

헐. 뭐야. 그렇게까지 할 일이야?

그니까. 게다가 너랑 나 둘 다 왜 공식 계정 팔로우 안 하느냐면서, 페북 친추도 먼저 하는 게 기본 아니냐고, 너네는 다들 기본이 안 됐다고 게거품 물더라니까.

우리가 개인 계정으로 뭘 하든 말든. 야 이거 다 사생활 침해 아냐?

내 말이. 근데 너 배서정 와세다대 나온 거 알아?

말도 안 돼.

진짜야. 내가 선배들 얘기하는 거 들었어.

헐 진짜? 하긴 말투나 목소리 좀 특이하긴 하잖아. 교포래?

중학교 때 일본 가서 대학까지 쭉 거기서 나왔대. 하루키 후배래!

갑작 하루키ㅋㅋ 아니 근데 일본 사람들은 원래 남 사생활 터치 안 하는 거 아냐?

몰라. 일본 생활 하다 너무 숨 막혀서 그렇게 됐나?

후배들 잡도리하고 남 일에 참견하는 것만 한국패치 적용됐나봐.

그후로도 우리는 집단주의 문화에 젖어 있는 한국사회에 대한 개탄과 개인의 가치를 완벽히 잃어버린 채 집단과 동화되어버린 배서정을 주제로 약 40분간 폭풍 카톡을 했다.

 

*

 

사수 배서정이 우리를 사수로서 엄하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싫어하는 게 분명하다는 확신을 하게 된 날이 있었다.

우리가 만든 두번째 잡지가 출간됐을 무렵, 출판 디자인 페어에 『매거진C』의 단독 부스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국의 잡지들과 독립 출판물 등이 모이는 꽤 커다란 자리였다. 회사 측에서도 일년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행사라 했고, 때문에 이것저것 챙길 게 많았다. 전날부터 부산하게 사무실에서 짐을 싼 우리는 당연히 당일에 가장 먼저 행사장에 도착했다. 운송업체가 아무렇게나 부려놓고 간 박스를 본 황은채와 나는 망연해졌다. 다른 잡지나 출판사의 관계자들은 모두 삼삼오오 모여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다. 선배들에게 전화를 해봤는데, 다들 취재가 있다며 우리끼리 행사 준비를 하라고 했다. 회의 시간에 말했던 대로 부스 외벽에 포스터를 붙이고 과월호를 진열해놓으라고 덧붙였다. 고작 두명이서 이 많은 것들을 다 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일단 황은채와 나는 미리 마련해둔 천을 테이블에 깔고, 유달리 판매고가 좋지 않았던 과월호들을 그 위에 펼쳐놓았으며, 페어 측에서 제공한 플라스틱 테이블의 다리 쪽에 포스터들을 이어 붙였다. 미리 준비해 온 광고물이며 굿즈들을 부려놓고 나니 페어가 시작하는 열시 무렵이 되었다. 그제야 홍보팀 선배들이 하나둘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개장하자마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도대체 어디서 이 많은 사람들이 나타난 거지?) 황은채와 나는 정신없이 유인물과 굿즈를 나눠주며, 또 팔리지도 않는 과월호를 홍보하며 다른 선배들을 기다렸다.

배서정은 정오가 다 되어 부스에 도착했다. 그녀는 오자마자 가방을 턱 내려놓으며 우리에게 소리를 질렀다.

“너네 지금 이걸 포스터라고 붙여놓은 거야?”

쉴 새 없이 사람들이 밀려들고 있었지만 배서정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지, 테이블 앞쪽에 주저앉아 우리가 붙여놓은 포스터를 북북 소리가 나게 떼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옆에 어정쩡하게 서서 같이 포스터를 떼야 하나, 죄송하다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야 하나 고민에 휩싸였다. 황은채는 부스에 몰린 사람들의 질문에 웃으며 대답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배서정이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황은채, 지금 웃음이 나와? 사람들이 너한테 웃어주니까 좋니? 너 지금 내가 뭐 하는지 안 보여? 안 보이냐고.”

당황한 황은채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고 부스를 구경하던 사람들도 놀란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다. 홍보팀의 사원들은 우리를 본체만체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다 결국 배서정이 떼다 남은 포스터를 모두 떼어냈다. 배서정은 다시 한숨을 쉬더니 우리에게 새 포스터를 가져오라고 했다. 배서정은 그걸 이리저리 대보더니 가장 이상적인 각을 찾으려 노력했다(배서정은 항상 오와 열, 각에 집착했다). 그러더니 마침내 가장 적합한 구도를 찾았다는 듯 다시 정성껏 포스터를 붙였다. 우리가 붙인 것과 정확히 같은 형태로…… 한참 동안 낑낑대며 포스터를 붙인 우리. 배서정은 포스터를 다 붙이기 무섭게 이마의 땀을 닦으며 나에게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 말해봐.”

“네?”

“지금 몇시야?”

“두시 십분요.”

“매일 두시에 네가 할 일이 뭐지?”

맞다, 트위터.

이 난장판에도 트위터를 올리라는 말인가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어쨌든 내 롤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했으므로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죄송합니다, 정신이 없었습니다, 대답을 했다. 배서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요즘 애들은 정말,이라고 중얼거렸다.

다시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몰려들었고 우리는 점심조차 거른 채 미리 준비한 앙케트며, 과월호 판매를 이어나갔다. 오후가 되자 편집장과 다른 팀 직원들이 도착했고, 마치 사찰단과 같은 태도로 여기저기를 배회하며 우리 부스를 이리저리 품평했다. 배서정은 우리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싹싹한 태도로 그들을 맞이했다. 황은채는 이전에 비해 확실히 풀 죽은 모습이었다. 애써 웃고 있기는 했지만 눈꼬리가 처진 것이 누가 봐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하긴 그런 말을 듣고도 괜찮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오후 여덟시, 행사가 끝난 후 우리는 모두 녹초가 된 채로 부스를 정리했다. 편집장은 책 몇권을 대충 박스에 넣는 시늉만 하더니, 얼른 마무리하고 회식을 하러 가자고 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스 밖으로 걸어갔다. 나와 황은채는 눈빛 교환을 하며 무언의 욕을 주고받았다. 손바닥에 땀이 나도록 짐을 싸자, 곧 운송업체에서 우리의 짐을 실어 갔다.

황은채와 내가 컨벤션센터 인근의 중국집에 갔을 때 우리를 제외한 모든 직원들이 자리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편집장은 여느 때처럼 ‘우리 식구들’의 근황을 묻는 말로 식사를 시작했다. 나와 황은채는 테이블 중간에 놓인 젓가락과 간장 종지를 묵묵히 배분했다. 음식보다 맥주가 먼저 나오자 편집장이 건배를 제안했고 모두가 잔을 들었을 때, 편집장은 뜬금없이 배서정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배기자가 오늘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 데리고 혼자 일하느라 수고 많았다,라고 말했다. 나는 어이없는 기분이 들었지만 티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한 음식이 나와 나는 코로 마시듯 자장면을 먹었고, 황은채는 짬뽕을 깨작댔으며 볶음밥을 먹던 편집장이 뜬금없이 말했다.

“그런데 서정아, 너 남자친구는 아직이니?”

도대체 저런 사적인 얘기를 왜 묻는 걸까 생각하고 있는데, 배서정이 웃는지 찡그리는지 모를 표정(배서정의 미소는 언제나 그랬다)을 지으며 “네, 그렇죠 뭐”라고 말했고 사람들이 와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황은채와 나는 언제나처럼 서로 눈을 마주치며 이게 웃을 일인지 뭔지 고민했고 그런 우리를 보며 편집장은 “얘 얼마 전에 남자친구랑 헤어졌잖아”라고 말했다. 아무리 가족 같은 회사를 지향해도 이런 얘기까지 나누는 건 정말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맞은편의 황은채 역시 나처럼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후로 대화의 주제는 배서정의 연애 얘기로 완벽히 넘어가버렸다. 편집장은 우리 서정이가 대학 졸업하자마자 회사 들어와 일만 하고 사느라 번번이 차이기만 하고 제대로 연애도 못한다며, 어디 소개해줄 좋은 남자 없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누가 봐도 작위적인 미소를 지으며 적당히 대답을 회피했다. 배서정은 표정 없는 얼굴로 자기 몫의 단무지를 씹었다. 배서정의 연애에 대한 토론이 끝난 후, 편집장은 나에게도 여자친구가 있냐는 질문을 했다. 나는 입에 음식이 가득한 채 고개를 완강히 저었다. 그리고 입안에 있는 음식물이 보이지 않게 노력하며 사력을 다해 미소를 지었다. 배서정은 때를 놓치지 않고 내게 톡 쏘아붙였다.

“예전부터 말하려고 했는데 너 옷 입는 것 좀 신경 쓰고 다녀. 밖에 나가면 네가 우리 매거진을 대표하는 사람인데 명색이 에디터가 꼴이 그게 뭐니.”

나는 갑작스러운 지적에 당황해 나도 모르게 또 허허허 소리를 내며 웃어버렸다. 기분이 나쁘거나 궁지의 상황에서 웃음이 터져버리는 것은 나의 고질병이었다.

“왜 웃니? 재밌어?”

“아니요, 그게 아니라……”

“넌 왜 그렇게 맨날 조증 걸린 사람처럼 웃니?”

그럼 울까? 하다 하다 이젠 웃는 것 갖고도 난리였다. 그러는 배서정 본인도 매일 보풀이 일어난 파란 스웨터만 입고 다니는 주제에(그녀의 말에 따르면 다이칸야마의 빈티지 숍에서 산 물건이라고 했다). 나는 도통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빈 접시만 쳐다봤다. 방금 전까지 일었던 연민의 감정이 무색할 정도로 불쾌한 감정이 들끓었다. 그때 편집장이 검지로 자신의 잔을 툭툭 쳤다. 나는 그의 잔이 빈 것을 뒤늦게 깨닫고 부랴부랴 맥주를 따랐다. 편집장은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김기자는 형제관계가 어떻게 돼?”

“아, 저는…… 혼자입니다.”

“역시. 그렇구나. 나랑 친한 밴드 S 알지? 거기 베이시스트도 외동인데 김기자랑 비슷해.”

“어떠신데요?”

“자기세계가 강하고, 독고다이고 그런 사람? 혼자 작업해야 하는 아티스트지.”

그러니까, 외동인 내가 조직생활에 맞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술 한잔 제대로 안 따라줬다고 이러는 걸까 설마. 내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자 편집장은 황은채에게도 가족관계를 물었다. 언니 한명이 있다고 하자, 역시 막내라 그런지 응석이 심한 편인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 황은채의 얼굴이 설핏 굳어지는 게 보였다. 편집장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황은채에게 남자친구가 있냐고 다시 물었다. 배서정이 냉큼 말을 받아쳤다. “얘 장난 아니에요. 카톡 프로필이 거의 러브장이잖아요”라고 말하며 예의 얼굴이 구겨지는 미소를 지었다. “근데 너 그렇게 다른 남자들한테 막 웃어주고 긴 머리 휘날리고 다니면 남자친구가 싫어하지 않니?” 배서정의 날 선 질문에 황은채는 애매하게 웃으며 젓가락으로 다 먹은 짬뽕 국물을 휘휘 저을 따름이었다.

그날 황은채와 나는 끈끈한 것을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

 

다음 날 우리 사무실에는 소소한 파란이 일었다. 일단 황은채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웨이브 진 긴 머리칼이 어깨 위로 짧게 잘려 있었다. 덕분에 내가 처음으로 재킷을 입고 출근한 게 완벽히 묻혀버렸다. 회사 사람들이 황은채에게 한마디씩 건넸다. 머리가 긴 게 낫다느니 짧은 게 더 예쁘다느니, 남자친구랑 헤어졌냐는 둥 대답할 가치도 없는 얘기들이었다. 나는 황급히 자리에 앉아 메신저를 켜고, 황은채와의 대화창을 열었다.

너 머리 뭐야. 진짜 헤어진 건 아니지?

아냐. 그냥 기분 더러워서 잘랐어. 근데 나 어제 미용실 갔다 죽을 뻔했다.

왜?

머리 자르다가 갑자기 숨도 안 쉬어지고, 답답하다 싶었는데 쓰러졌잖아. 구급차 오고 응급실에 실려 가고 난리 났어.

야 너 괜찮아? 지금 출근해도 되는 거야?

응. 링거 맞고 약 먹고 지금은 멀쩡해.

의사가 뭐래? 큰 병은 아니지?

공황장애래.

미친, 그거 연예인들이나 걸리는 병 아냐? 원인이 뭐래?

스트레스. 약 먹고 상담치료 받으래. 이따 점심에 회사 옆 병원에 가보려고.

이거 완전 산재 아니냐? 노동청에 신고해버려.

 

이후로 황은채는 일주일에 한번씩, 점심시간마다 사무실 옆 정신과에 치료를 받으러 다니게 되었다. 회사에는 단순히 지병이라고만 알렸다. 황은채가 없는 점심때마다 누군가가 황은채의 행방을 물었고, 내가 병원에 갔다고 말해주면 선배들은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냈다. 진짜 아파서 병원에 간 게 맞는지, 요 근처 병원이면 단순히 미용시술을 받으러 다니는 거 아닌지, 남자친구랑 밥 먹으러 가놓고 아프다고 둘러대는 건 아닌지와 같은 말들. 물론 그 비판의 선봉에는 언제나 배서정이 있었다.

“요즘 애들은 그렇다? 실력은 없는데, 자기가 뭐나 되는 줄 알고. 이름이나 알리려고 하고. 도무지 동료의식 같은 건 없고. 사실 이렇게 함께 밥 먹고 얘기 나누는 것도 다 회사생활 일부인 건데. 그런 걸 잘 모르더라고. 너희들이 그렇다는 건 아니고. 요즘 그런 애들이 많다고. 친구들끼리 만나면 그 얘기만 하잖아. 88년도에 호돌이가 방사능을 뿌려놓고 간 거 같다고.”

뒤이어 식당이 떠나가라 웃는 사람들. 분명히 황은채만을 지칭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나는 불편한 속내를 내비치는 대신 누구보다도 큰 소리로 웃은 뒤, 고개를 숙여 묵묵히 볶음밥을 먹었다.

 

그후로 나의 삶은 요즘 애들답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점철되었다. 뭔가를 먹을 때면 누구보다도 빨리 컵에 물을 따라 놓았으며, 인원수대로 수저를 깔았다. 사무실에 사람 그림자라도 보이면 고개 숙여 인사했고, 누군가 싫은 소리를 하면 주워 삼켰다. 그렇게 가족과도 같은 회사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기획회의에 들어갈 때도, 기사를 쓸 때도, 남이 쓴 기사를 필사하다시피 하거나 내 기사가 틀린 맞춤법으로 고쳐질 때에도 나는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황은채 역시 나와 마찬가지인 듯했고, 이런 우리의 변화가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이라 믿었다. 그렇게 나다운 것들을 깨끗이 표백하고 나면 비로소 『매거진C』의 색깔이 입혀져 그토록 염원하던 정식 사원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

 

그후로도 배서정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두시간 분량의 긴 인터뷰를 하고 기진맥진해져 돌아온 나에게 ‘성의 없이 핸드폰으로 녹음을 해 왔다’고 혼을 냈다. 그녀의 논지에 따르면 핸드폰 하나 딸랑 들고 가서 녹음하고 얘기 듣는 것만큼 성의 없어 보이는 건 없다고 했다. 일단 반사적으로 죄송합니다, 대답을 했지만 자리에 앉는 순간 아이폰으로 녹음하는 게 뭐가 어때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매체에서는 어떻게 인터뷰를 하는지 검색해보았는데 『뉴욕타임즈』 기자가 대통령을 인터뷰할 때 아이폰으로 녹취를 하는 사진이 떴다. 하물며 백악관의 출입기자도 아이폰을 쓰는데,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건데. 나는 분노를 누르며 아이폰으로 녹음하는 기자들의 샘플을 집착적으로 찾아냈다. 그런데 역시나 1절만 하고 끝낼 선배는 아니었다.

“너는 그게 문제라고, 기자가 발로 뛰고 손으로 쓸 생각은 안하고, 핸드폰 하나 딸랑 들고 가면 끝이니? 그리고 너 회사 올 때는 왜 가방도 안 들고 오는데? 성의 없어 보이게……”

나는 그 성의,라는 게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져버렸고, 배서정의 번들거리는 이마에 대고 묻고 싶어졌다. 그럼 인터뷰이가 말하고 있는데 선배처럼 다 해진 모닝글로리 수첩에 다시 읽지도 않을 낙서 같은 걸 끄적여야 한다는 건가요? 그럴 거면 녹음기는 왜 켜놔요? 그럴 시간에 질문 하나라도 더 하고 인터뷰이랑 눈을 마주치는 게 낫지 않나요? 가방을 왜 안 들고 오겠어요. 하루에 사무실에 있는 시간만 열세시간이 넘는데요. 집에서는 잠만 자는데, 칫솔도 치약도 수건도 슬리퍼도 펜도 노트북도 프린터도 빌어먹을 핸드폰 충전기도 다 회사에 있는데 가방을 왜 갖고 다녀요. 누구보다도 또박또박하고 명료한 목소리로 따지고 싶었지만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그리고 싸해진 사무실 분위기를 달래기 위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오늘 취재 분위기가 어땠다 저땠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얘기를 재잘재잘 늘어놓았다. 셰프 D씨가 요즘 매출 문제 때문에 많이 힘드신 것 같더라, 인터뷰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으며, 우리 잡지를 눈여겨보고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내 말을 도중에 끊고 배서정이 쏘아붙였다.

“너 왜 웃어? 웃겨? 내가 방금 뭐라고 했는데 기분도 안 나쁘니? 조증 걸린 애처럼 왜 맨날 웃어?”

그러게, 나 왜 웃지.

이렇게까지 화가 나고 모욕적인 상황 앞에서도 나는 정말 왜 웃지.

 

*

 

면접 때 약속한 3개월의 수습 기간이 지났지만, 우리는 정직원이 되지 못했다. 아무도 그에 대한 언급조차 하지 않아 황은채와 나는 편집장에게 언제쯤 정식으로 채용될 수 있는지 묻기로 했다. 둘 중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아 가장 민주적인 해결절차인 가위바위보로 대표를 정했고, 결국 황은채가 걸렸다.

점심을 먹은 뒤, 우리는 나란히 편집장 앞에 섰다. 편집장은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무슨 일이냐고 말했다. 황은채가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저희 3개월 수습 기간이 끝난 것 같은데요……” 말했다. 편집장은 누구보다도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원래 수습이 끝나는 시점은 업무 수행도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했다. 편집장은 아직 우리가 정식 기자가 되기에는 역량이 부족하다며 턱짓으로 배서정을 가리키며 말했다.

“은채야, 너네가 지금 쓰는 글이 서정이 쓰는 기사랑 퀄리티가 같다고 생각하니?”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잘 아네. 그런데 어떻게 너희랑 서정이랑 똑같은 기자가 될 수 있겠냐. 그건 요행이고 놀부심보 아닐까?”

우리는 순식간에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며 고약한 심보를 가진 대역죄인이 됐다. 편집장은 뒤이어 스물세살에 처음으로 이곳에 입사한 배서정의 경우 18개월의 수습 생활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정식 기자로 채용되었다고 했다.

한참 동안의 일장연설을 마친 편집장이 칫솔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18개월의 시간 동안 배서정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 또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잠시 상상해보았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배서정은 여전히 모니터를 바라본 채로 편집장님이 하신 말씀에 너무 상처받을 것 없다며, 너희가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하고 잘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우리를 위로했다. 선배에게 인간적인 말을 듣는 건 거의 처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찰나 배서정이 덧붙였다.

“나는 일년 넘도록 버스비도 못 받고 다녔어. 너희는 일도 배우고 돈도 받잖니. 긍정적으로 생각하렴.”

황은채와 나는 우리가 너무 어리석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매거진C』에서는 그 어떤 질문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무슨 질문을 하든 원하는 답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또 한번 깨닫게 되었다. 적막하고 건조한 사무실에 앉아 있노라니 어이없고 화나고 억울한 마음이 한꺼번에 몰아쳐 왔으나 생각을 멈추기로 마음먹었다. 그저 매일 아침마다 고무나무에 물을 주며 이토록 춥고 건조한 사무실에서 열대 지방의 나무가 이렇게 징그럽게 자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찌꺼기를 남기지 않고 커피 필터를 가는 일이나, 집에 가서 야식으로 무엇을 시켜 먹을지와 같은 것들을 고심하며 그 시절을 버티기로 마음먹었다.

 

*

 

어김없이 다음 호 기획회의가 돌아왔다. 나는 요즘 가장 핫한 극단이 새로 올린다는 공연을 취재하고 싶다는 기획안을 냈다. 배서정은 내 기획안을 보자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 한쪽을 올리며 말했다.

“그 극단, 러시아 희곡은 엉망이야.”

“아……”

“가만 보면 네 기획안은 항상 어디서 대충 긁어 온 거 같더라? 뭘 제대로 조사하고 쓰는 거 맞니? 아니면 그냥 당대 유행하는 걸 그냥 다 때려 박는 거니.”

당대 유행하는 것을 모아놓는 매체가 잡지 아닌가요,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았고 앞으로 더 성실히 조사해보겠습니다, 대답하고 말았다. 어차피 내가 무슨 의견을 내든 수렴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뭘 묻고 따지고 배우고 하는 게 쓸모없이 느껴졌다. 편집장이 우리가 낸 기획안들을 하나씩 훑어갔다. 국제영화제 행사를 위해 방한하는 일본의 유명 영화감독의 인터뷰는 역시나 배서정에게 돌아갔다. 황은채와 내게 행사 스케치와 홍보용 기사가 공평하게 분배되는 가운데 갑자기 편집장이 물었다.

“소설가 K? 언제적 K야. 이 양반 완전 은퇴한 거 아니었나? 이거 누가 기획안 냈어?”

별생각 없이 회의록을 받아 적다가 화들짝 놀란 내가 대답했다.

“저요. 다음 달에 십년 만에 신작이 나온대요. 이천매짜리 장편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 좋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처음으로 내게 정식 기사가 배정된 것이다. 심지어 40매 분량의 긴 인터뷰 기사가. 편집장은 회사로서는 너 같은 새파란 수습한테 이렇게 큰 꼭지를 맡기는 것은 모험이나 다름없다며 고마운 줄 알라고 했다. 물론 하나도 고맙지 않았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일을 처음으로 맡았다는 사실이 기뻐 감사하다고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인터뷰 섭외는 만만치 않았다. 소설가 K의 은둔하는 성격 탓에 연락부터가 만만치 않았다. 오직 출판사를 통해서만 소통이 가능했다. 거의 상소문에 가까울 만큼 절절한 인터뷰 섭외 요청을 출판사에 전달하자 작가의 개인 메일 주소로 답장이 왔다. 언젠가 우리 잡지를 본 적이 있다고 했고, 어릴 적부터 당신의 전작을 따라 읽었다는 나의 메일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 대면 인터뷰가 부담스럽다며 섭외를 고사했다. 나는 이것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오래전 나의 독서 노트를 꺼내, 그의 소설 문장 중 감명 깊었던 것들을 모조리 적고, 그 문장들이 나를 지금 기자의 길로 이끌게 되었음을 강하게 어필했다. 한시간이 지나지 않아 나의 제안을 승낙한다는 답신이 왔다. 나는 전율했다.

 

인터뷰 날, 배서정은 갑자기 나에게 인터뷰 시트를 들고 오라고 명했다. 내가 쭈뼛대며 그녀에게 질문지를 뽑아가자, 근황을 묻는 것부터 시작하는 내 질문들이 너무 진부하며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고, 도저히 인터뷰이에게 좋은 내용을 뽑아낼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갑자기 빨간 펜을 들더니 질문의 순서를 마구 바꿔놓은 뒤, 급하니까 자기가 제대로 정리를 해준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가 고쳐놓은 질문지는 얼핏 훑어봐도 흐름이 어색했다. 나는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그녀가 준 빨간 줄이 가득한 인터뷰 시트를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수정 전의 것을 한부 더 인쇄해서 인터뷰 장소인 서울 근교의 작가 레지던시로 향했다.

소설가와의 인터뷰는 즐거웠다.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좋아하며 싫어하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나는 그게 부러웠는데, 그때의 내게 결핍된 것이 그런 판단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관한 것들. 내가 내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된 게 언제부터였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가 했던 말들을 되새기며 사무실로 돌아갔다.

 

자리에 돌아와 모니터를 켜자 사내 메신저로 메시지가 하나 와 있는 게 보였다. 배서정이었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 말해봐.

나는 몸을 살짝 일으켜 맞은편에 앉은 배서정에게 물었다.

“선배님, 무슨 일이세요?”

배서정은 자신의 핸드폰을 톡톡 치며 지금이 몇시인지 보라고 했다. 시간은 일곱시.

“너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니? 매일 빼먹는 그거.”

내가 일부러 빼먹은 것도 아니고. 그럼 인터뷰하는 도중에 핸드폰을 켜고 트위터를 하라는 말이야?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메신저 대화창을 열고 배서정에게 말했다.

선배님, 인터뷰가 길어져서, 인터뷰하는 도중에 폰을 만지는 건 실례인 거 같아서 업로드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너 오늘따라 말이 길다? 내가 오늘 일만 갖고 그러겠니? 넌 언제나 이런 식이잖아. 하는 일이 뭐 얼마나 된다고, 그거 하나 똑바로 못하니. 내가 팔만대장경을 필사하라고 했니? 아니면 하루에 열번씩 기사를 올리라고 했니? 트위터 관리 똑바로 하라는 게 그렇게 어렵니? 기사 하나 맡으니까 이제 니가 아주 대단한 기자라도 된 것 같니? 그래서 트위터는 하찮게 느껴지니? 분위기 파악 못하고 조증 걸린 애처럼 시끄럽게 웃을 줄이나 알지. 똑바로 하는 일이 있긴 하니?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키보드로 한참 동안 뭔가를 치다가 다 지웠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배서정에게 말했다.

“선배님, 사무실 밖으로 좀 나와보시겠어요?”

배서정은 기가 찬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이며, 그래, 못 나갈 건 또 뭐니, 하며 나를 따라왔다. 내 입술이 사정없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이제 정말 끝을 낼 때가 온 것 같았다. 복도에 나서자마자 배서정이 나에게 소리쳤다.

“내 기자 인생 팔년 만에 선배를 복도로 불러내는 애는 네가 처음이다. 너 지금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인지 알긴 아니?”

나도 지지 않고 복도가 떠나가게 소리를 질렀다.

“내 인생 이십육년 동안 당신 같은 사람도 처음인데요? 그 잘난 기자 인생 팔년 동안 인간 되는 방법은 못 배우셨나봐요……”

그것은 내가 『매거진C』에 와서 처음으로 웃지 않는 표정으로 한 말이었다.

 

*

 

마지막 출근 날, 편집장은 나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배서정이 편집장에게 보고했던, 내 평가서를 읽어주었다. “트렌드를 읽는 감각과 문장의 기본기가 있음. 기복이 심한 성격만 잘 눌러주면 좋은 인력이 될 자질이 있음.” 편집장은 지금까지 너를 정규직으로 채용할 생각이었으나 그날의 소동을 바탕으로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우리 회사는 가족 같은 분위기가 전부인데, 그런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이 들어오면 되겠냐.” 역시나 외동이라 그런지 조직생활에 도통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고 나의 사회성에 대한 평가를 마쳤다. “모두가 조직에 적합한 건 아니잖아? 아예 감이 없는 애는 아니니까 칼럼 같은 것도 쓰고 블로그 같은 것도 하고 그래봐.”

나는 빙긋 웃으며 그동안 감사했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 돌아와 빈 박스에 짐을 싸기 시작했다. 배서정은 그런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마디 했다.

“너 그동안 내가 아무 칭찬도 하지 않아서 화가 났던 거니?”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이번 인터뷰 기사 잘 썼더라. 소설가 K.”

나는 무슨 대답을 할까 고민하다 결국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자파를 잡아먹는다는 선인장을 박스에 집어넣었다. 배서정은 나에게 만약에 ‘섭섭한’ 일이 있었다면 잊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면 좋겠다고 이런 일을 백번쯤은 겪어본 사람처럼 차분하게 말했다. 처음 들어온 날부터 조증 걸린 애처럼 너무 방방 떠 있길래 그것을 눌러주기 위해, 너를 위해 일부러 칭찬을 하지 않았다고 내게 말했다.

선배 있잖아요. 저는 칭찬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냥, 인간 취급을 받고 싶었어요. 실력도 없는 주제에 이름이나 알리고 싶어하는 요즘 애들이 아니라, 호돌이가 방사능을 뿌리고 간 해에 태어난 애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삶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한명의 인간으로요.

뭐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다만 여느 때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세상 가장 밝은 얼굴로, 선배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꾸벅 인사를 했을 따름이었다. 앞으로 무엇을 할 거냐고 형식적으로 묻는 선배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저, 선배님 말씀대로 제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일을 하려고요.”

“무슨 일?”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일요. 사회생활 못하는 사람도 할 수 있는 그런 일.”

입사 때에 비해 머리숱이 많이 줄어버린 황은채는 짐 박스를 안아 든 나를 몹시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묵직한 박스를 든 채 그 풍경으로부터 멀어져왔다. 안간힘을 다해 앞만 보고 걸었다.

 

*

 

『매거진C』를 떠난 뒤 내 인생은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내 인생 두번째 회사는 꽤나 평범한 곳이었는데 첫번째 회사, 즉 『매거진C』에 비해서는 돈도 훨씬 많이 주고 출퇴근 시간도 일정하고 후배 사원이라고 함부로 말을 놓지 않으며, 그러니까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는 곳이었다. 호봉제가 적용되었고, 연차만 채우면 바로 승진이 가능했다. 선배들도 다들 지루하지만 안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한번도 크게 웃거나 뭔가 튀는 행동을 한 적은 없고, 시키는 일을 오직 할당된 분량만큼 하는 정물 같은 인간이 되었다. 무료함이 느껴질 때면 연애를 했고, 취미를 만들었다. 그러다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면 자소서를 썼다. 『매거진C』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깨우친 바가 없었던 건지, 아니면 너무나 편한 직장에 다니는 통에 배가 불렀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언론계에 대한 미련을 차마 버리지 못했다. 때문에 언론고시 까페에 올라오는 기자 모집 공고에 일일이 지원했다. 대부분은 서류 단계에서 탈락했지만 몇번은 최종 면접까지 간 적도 있었다. 연차를 써서 면접을 보고 오면 어김없이 불합격 통보를 받았지만 괜찮았다. 그런 도전의 궤적이 적어도 나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들어준다고 믿었다.

지금 다니는 방송사의 채용 공고가 떴을 때도 기계적으로 지원했고, 기적적으로 합격했다. 막상 붙고 나니 정규직 채용을 전제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2년 동안 계약직으로 근무해야 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사측이 편의에 따라 얼마든지 말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지난 경험을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기껏 잘 다니고 있는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불안정의 세계로 뛰어드는 게 불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을 박차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2년이라는 정해진 기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약이 없는 기다림보다는 끝이 정해진 실패가 편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지난 2년의 계약 기간 동안 내가 예상치 못한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파업을 위해 자리를 비운 선배들을 대신해 나는 빠르게 현업에 투입되었다. 입을 닫고 귀를 닫은 채 그저 최선을 다해 일했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곁을 주었고 또 공평하게 선했다. 그런 종류의 기계적 공평함이 오롯이 나를 위한 방어기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의 신념과 나의 마음과 나의 본심을 잊은 채 내가 어떻게 보일지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1년 11개월의 치열했던 계약직 생활이 끝나고 정규직 전환 심사를 볼 때는 고작 23개월의 시간이 흘렀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게 다 변해버린 상태였다. 사장이 바뀌었고, 부당 전보를 받았던 선배들이 현업에 다시 돌아와 빈자리를 채웠다. 정규직 전환 심사 최종 면접을 볼 때, 면접관이었던 신임 사장이 내게 마지막으로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김기자는 요즘 애들 같지 않네. 잘 웃고 밝고 사회생활도 능통한 듯하고.”

면접장의 문을 닫고 나오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요즘 애들답지 않은 건, 또 뭘까. 함께 들어온 열명의 계약직 사원 중 정규직 전환이 된 사람은 나뿐이었다. 선배들은 그런 나를 두고 두명의 사장 모두에게 인정받은 것은 너뿐이라고, 이념과 체제를 초월한 인사라고 농담을 건넸다. 그만큼 실력이 있기 때문에 뽑힐 수 있었으며 적법한 절차에 따라 채용된 것이니 주눅 들지 말라는 말도 고명처럼 얹어져 있었으나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더욱 내가 이질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체감할 따름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나와 함께 웃고 떠들고 같은 사무실에 앉아 있던 동기들은 이제는 모두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대신 나는 새로운 신입사원들과 함께 두번째 신입 연수를 받게 되었다. 나에게도 기수라는 게 생겼다. 31기. 그것은 내 앞으로 30년간 축적되어온 수많은 선배들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정규직이 된 이후에도 나는 계약직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일들을 했다. 비슷한 방식으로 취재를 했고 기사를 썼으며, 비슷한 프로그램을 맡았고, 비슷한 삶을 살았다. 다만 회사에서 날 알아보는 사람들이 부쩍 늘기는 했다. 프로그램을 잘 보고 있다고 말하는 그들의 얼굴에 묘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나만 느낄 수 있는 찰나의 쉼표, 지난 몇년간 나를 항상 둘러싸고 있는 일종의 배타감이자 위화감. 어쩌면 이제는 아예 공기가 되어버린 감정의 흐름이기도 했다.

 

*

 

황은채와 나는 사옥 15층에 있는 직원용 까페로 향했다. 내가 회사 근처의 그럴듯한 까페에 가자고 했으나, 은채는 굳이 멀리 갈 필요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한창 업무 시간이라 그런지 까페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우리는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통창 앞 명당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황은채는 밝은 얼굴로 “이제 너 성공했으니 비싼 거 얻어먹어도 되지?”라고 말하며 자몽에이드를 시켰다. 그 시절 나를 버티게 해준 황은채의 너스레가 반가웠다. 내 앞자리에 앉은 황은채의 표정은 적어도 그 시절보다는 훨씬 밝아 보였다.

“너 나가고 나서 나도 결국 한달 만에 거기 때려치웠잖아.”

“역시 그랬구나. 하긴 거기서 누가 버티겠냐.”

황은채는 경력을 살려 한 홍보회사의 미디어 담당으로 이직한 뒤, 지금의 회사로 스카우트됐다고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까 『매거진C』, 업계에서 유명했더라고. 헐값에 어린 애들 뽑아먹고 갈아치우는 걸로.”

“우리만 당한 일이 아니었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나저나 너 몸은 좀 괜찮아?”

황은채는 『매거진C』를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황장애가 나아졌으며 지금은 약도 끊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은채는 아직도 가끔 『매거진C』 시절이 꿈에 나온다고 했다.

“나 그후로 단 한번도 사회생활 못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

“그래, 은채 너 잘하잖아. 보도자료도 잘 쓰고, 성격 좋고, 커피 필터도 잘 갈고.”

“말도 마. 거기 다니면서 우리 둘 다 드립커피 장인 됐잖아.”

“난 지금도 절대 드립커피 안 마시잖아. 그때 다 질려버려서.”

우리 둘 다 웃음이 터져 눈물까지 글썽이며 웃었다. 한참을 웃던 황은채가 갑자기 표정을 바꿔 내게 물었다.

“그런데 있잖아 너는, 괜찮아?”

“뭐가?”

“나는 아직도 그때 생각하면 너무 화가 나고 어이가 없고, 괜히 따지고 싶거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우리한테 꼭 그랬어야 했냐고……”

“나도 비슷하지 뭐. 그치만 어쩌겠냐. 우리가 운이 없었던 거지 뭐.”

“거기 그만두고 난 뒤로도 이상하게 난 네가 엄청 생각나더라? 이런 말을 하고 싶은데 할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고. 근데 연락할 방법이 있어야지. 퇴사하자마자 전화번호도 바꾸고 SNS에도 흔적조차 없고. 근데 모르는 새 이렇게 유명인사가 됐을 줄이야.”

“유명인사는 무슨. 너도 알잖아. 그냥 죽지 못해 산다.”

“엄살도 여전하고 말이야.”

“사람이 어디 바뀌겠냐.”

“너 배서정 선배 소식 들은 거 있어? 소문에는 E 사로 옮겼다고 하던데.”

“신기하네. 죽을 때까지 『매거진C』의 벽돌로 남을 것만 같았는데.”

“거기 완전 망했잖아. 잡지 사업부 자체를 없앴대. 너 몰랐어?”

황은채의 말을 듣고 『매거진C』를 검색해보았다. 포털사이트에 공식 홈페이지 링크가 남아 있긴 했지만 들어가보니 빈 페이지였다. 포털에서 내 이름과 잡지의 이름을 함께 검색해보니 기사 제목 몇개가 떴다. 중년 배우 K의 인터뷰, 청담동에서 막 새 레스토랑을 연 스타 셰프 D, 토요타에서 나온 새 자동차의 시승기, 홍대 섹스토이 숍 구매 후기, 10년 만에 신작으로 돌아온 소설가 K의 인터뷰…… 그중 어떤 것도 살아 있는 링크는 없었다.

“진짜네. 아예 없어졌네.”

“응, 없어. 이제 다 사라졌어.”

“당연히 망해야 하는 곳이었어.”

“그럼. 잘 없어졌지.”

황은채는 다 마신 자몽에이드를 빨대로 휘휘 젓더니 갑자기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내게 건넸다.

“아까 촬영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다.”

명함에는 유튜브팀 팀장 황은채,라고 되어 있었다. 그 직책이 못내 어색하고 심지어는 조금 감동적이기까지 해 나는 몇번이고 반복해 같은 문구를 읽었다. 황은채는 내게도 명함을 달라고 했다. 나는 명함지갑을 꺼내 새 명함 한장을 주었다. 황은채는 명함을 주머니에 넣더니 차가 밀리기 전에 얼른 가봐야 할 것 같다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나는 그녀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했다가 다시 까페로 돌아왔다.

황은채가 떠난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광장이 내려다보였다. 광장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이곳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공정 채용이나 일자리 미끼 규탄, 고용 정상화와 같은 단어들이 쓰여 있을 터였다. 그들은 작년 이맘때까지 나와 같은 사무실에 정장을 입고 앉아 있던 동료들이었다.

까페의 카운터 앞에 남선배가 나타났다. 선배는 심각한 어조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큰 목소리가 아니었음에도 워낙에 또렷한 음성이라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마도 선배가 최근에 분양받았다는 회사 근처 아파트의 잔금 처리 문제인 것 같았다. 선배는 커피가 나오고 나서도 한참 동안 카운터 앞에서 전화통을 붙들고 있었다. 전화를 끊은 선배가 나를 발견하고는 곧장 내 앞에 와 앉았다.

“사무실 안 들어가고, 여기서 혼자 뭐 하냐?”

“방금 전까지 황은채 피디랑 같이 있었어요.”

“아까 그 유튜브 피디? 둘이 엄청 친해 보이더라.”

“네.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할 말이 많더라고요.”

선배는 핸드폰으로 부산하게 뭔가를 보내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너 그거 아냐? 인생은 부동산이다. 이제 서울 시내에 아파트 사려면 신혼 특공 말고는 답이 없어. 덮어놓고 일단 결혼부터 해라.”

뭘 안다고 다짜고짜 결혼을 해라 마라야, 괜히 사나운 마음이 들었지만 당연히 티를 내지는 않았다. 다만 “어디 결혼하기가 쉽나요”라고 웃으며 대답했을 뿐이었다. 남선배는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고, 심지어는 롤모델로 삼아도 좋을 만큼 꽤 좋은 선배였다. 가끔씩 회식을 하자 조르기는 했지만 귀여운 강요 수준이었다. 그는 술을 마실 때마다 꼭 파업 때 얘기를 하며 울었다. 선배의 눈물을 볼 때마다 측은한 마음보다는 그의 인생에 그만큼 큰 고비가 없었던 것 같다는 주제넘은 생각이 들고는 했다. 나로서는 타인에게 쉽게 공감받을 수 없는 주관적인 고통 같은 건 전시하고 싶지 않은데, 누구나 예상 가능한 통증을 딱 그만큼만 전시하는 것이 이곳에서는 유효한 듯했다. 모두가 선배와 함께 눈물을 흘려주고는 했으니까. 나는 내 눈물의 방향을 정할 수 없어 가끔은 화가 났고 대개는 고독했다.

남선배가 자꾸만 비껴가는 내 시선을 눈치채고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시위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쟤들이 무슨 죄가 있겠냐. 윗사람들이 나쁜 놈들이지. 너무 마음 쓰지 마라 너도.”

“네, 선배님. 감사합니다.”

“그래도 참 다행이지 않냐?”

“뭐가요?”

“네가 여기에서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여기와 저기, 또 우리와 우리가 아닌 것들을 가르는 선이 무엇인지에 대해.

남선배는 나와 자신의 빈 커피잔을 들더니 먼저 일어나겠다고 했다. 내가 대답할 새도 없이 입구 쪽으로 걸어간 선배는 플라스틱과 종이컵을 분리해 버리고는 특유의 힘찬 걸음걸이로 빠르게 사라져갔다. 언제나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선한, 그야말로 남선배다운 행동이었다.

 

보도국의 사무실로 돌아와 나의 자리에 앉았다. 파티션에 붙어 있는 내 명패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새로 만들어져 아직 반질반질한 내 이름 세 글자를.

저녁 무렵의 사무실은 한산했고, 나는 문득 황은채와의 대화가 떠올라 핸드폰으로 배서정을 검색했다. 인스타그램에서 어렵지 않게 그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배서정의 프로필명은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E, 배서정 에디터’였다. 아래의 정보란에는 『マガジンE 』 ベ·ソジョン(裵書正) エディタ라고 적혀 있었고, 나는 뭔가 질린 기분이 들었다. 올라온 사진을 훑어보니 매달 자신이 쓴 기사를 포트폴리오처럼 올려놓은 것이며, 이따금 등장하는 셀카 속 반듯한 가르마까지 예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포스트 가장 아래쪽까지 내려보니 『매거진C』 시절의 사진이 나왔다. 출판 디자인 페어에 참가했던 날, 나와 배서정, 황은채가 나란히 부스 앞에 서 있는 사진도 있었다. 여느 때처럼 뚱한 표정의 배서정과는 달리 나와 황은채는 세상 해맑게 웃는 얼굴이었다. 그 웃음이 아득하게 느껴져 화면을 꺼버렸다.

검은 화면에 내 얼굴이 비쳤다. 미간이 잔뜩 구겨지고 신경질적인 표정이었다. 그 옛날 배서정이 자주 지었던 표정과 닮아 있는 얼굴. 나는 화들짝 놀라 버릇처럼 얼른 손가락으로 주름을 꾹꾹 눌러 폈다. 그럴 때면 나는 내가 아직도 배서정과 『매거진C』의 영향권 안에 있음을 깨닫고는 한다.

『매거진C』를 떠나고 딱 한번, 배서정을 닮은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폭설이 내리던 날, 강남역의 회사에서 버스를 타고 집에 가던 길이었다. 눈 때문에 완전히 멈춰버린 버스 속에서 나는 창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사위가 완전히 어두워져버렸고, 버스는 신사역 정류장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차창 너머로 정류장에 앉아 있는 긴 머리의 여자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뭔가를 보고 있었다. 파란 스웨터와 커다란 코트를 입고 있는 그녀의 무릎에는 커다란 잡지책이 펼쳐져 있었다. 무엇이 쓰여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것이 『매거진C』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멈췄던 눈이 다시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정수리에 뽀얗게 눈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어쩌면 버스가 오는 것을 아예 포기해버린 채로 잡지만 뚫어져라 봤다. 마치 종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버릴 것처럼, 잔뜩 허리를 구부린 채. 그렇게.

고백하자면 꽤 오랫동안 나는 배서정과 『매거진C』의 사람들을 원망했었다. 몇번이고 그때 내게 왜 그랬냐고 묻고 따지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덧 나는 그때의 배서정과 비슷한 나이가 돼버렸고, 딱 그만큼 나이 든 모습이다. 서른한살, 벌써 네번째 신입사원이 된 나는 스물세살에 잡지사에 들어와 내 나이에 이미 8년차 직장인이 되어버린 배서정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나도 모르는 새 내 삶에 옮겨붙은 어떤 안간힘의 궤적을 말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조금 알 것 같다. 내가 『매거진C』와 배서정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던 만큼 배서정 역시 자신의 방식으로 나와 황은채를, 요즘 애들이라고 이름 붙여진 불가역의 영역을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종류의 이해는 실패하고 나서야 비로소, 삶의 자세로 남기도 한다. 내게는 그 시절이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