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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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이현 鄭梨賢

1972년 서울 출생.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상냥한 폭력의 시대』, 장편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 『사랑의 기초: 연인들』 『안녕, 내 모든 것』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 등이 있음.

deepoem@hanmail.net

 

 

 

선의 감정

 

 

1

 

재작년 가을, 재단 이사장이 바뀌었다. 노익장을 과시하며 자전거로 출퇴근하던 전임 이사장은 비 오는 도로에서 트럭에 치여 즉사했다. 새 이사장은 전임 이사장의 둘째 사위였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전문 컨설팅 업체에 재단 산하 전국 다섯개 병원의 경영진단평가를 의뢰했다. 교수진의 급여 체계부터 손볼 거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와 관련하여 조찬 설명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부디 참석해달라는 내용의 메일이 나에게도 왔다. 병원 사무처 경영지원팀에서 발송한 것이었다. 왜 ‘꼭’이 아니라 ‘부디’라고 했을까, 나는 잠시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설명회에는 가지 못했다. 아이 학교의 녹색학부모회 봉사가 같은 시간에 있었다. 남편은 다른 지역의 학회에 참석 중이었고, 하교 후에 아이를 맡아주는 친정엄마에게 그것까지 부탁하기는 어려웠다. 내 출근 시간을 조정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 평소보다 좀 늦게 출근해 회진을 돌고 나니 설명회 후기들이 들려왔다. 병원은 어떤 종류의 소문이든 신속하게 유통되고 재생산되는 곳이다.

“진검 과장님 엄청나게 화나셨다는데요. 수술도 없고 외래도 없는 과는 그냥 바닥 깔아주라는 거냐고.”

펠로우 하나가 진단검사의학과나 마취과 등은 당장 집단행동에 돌입할 태세라는 말을 다소 과장되게 전했다. 공개된 개편안의 핵심은 급여 인센티브제의 전격적 도입이었다. 교수 개개인별로 월 매출액과 수익액을 산출하여 전체 순위를 매기고, 그에 따라 인센티브 액수를 차등지급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그러니까 지난달 병원에 얼마를 벌어줬느냐에 따라 다음달 월급이 결정되는 건가보다고 나는 이해했다. 결론적으로 급여가 늘어난다는 건지 줄어든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돈과 관련된 이슈에 민감하고 재빠르게 반응하는 것은 경박한 일이라고 교육받아왔다.

그날 밤 잠들기 전, 학회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그 얘기를 했다.

“의사들은 정말 세상물정을 몰라.”

개업의인 그는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도 그 정도의 자기인식력은 가지고 있다. 남편과 나는 도시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공부 잘하는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유무형의 수혜 속에 자라 의대에 입학했다. 남편은 의료계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는 진즉부터 인센티브제가 보편화되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병원과 일반 기업은 다르잖아.”

나는 항변해보았다.

“다를 게 뭐야.”

“병원이 수익 생각만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남편이 풋, 소리를 내며 돌아누웠다.

“과잉진료니 뭐니 뒷말도 나올 거야. 조직문화에도 안 좋고.”

논쟁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닌데 음성이 높아졌다. 남편은 대답 대신 물어왔다.

“근데,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되는 거야, 당신 월급은?”

인센티브제는 그로부터 몇개월 후에 시행되었다. 뚜껑을 열고 보니, 전체 교수들을 1등부터 꼴등까지 줄 세우는 방식은 아니었다. 등급제였다. 지난달 수익에 의해 교수들은 1등급부터 7등급까지로 나뉘었다. 최상위와 최하위 그룹의 숫자가 적고 가운데가 불룩한 다이아몬드형 구조였다. 수술과 외래가 없는 과에는 그들만의 리그가 적용되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내용은 나도 알지 못했다. 진단검사의학과나 마취과 스태프들이 단체행동에 돌입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으니 어떻게든 해결되었나보다고 짐작했을 뿐이다.

첫 달, 나는 3등급을 받았다. 3등급은 중간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었다. 실제 급여통장에 입금된 액수는 인센티브제가 도입되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번째 달에는 4등급이었다. 중간의 약간 아랫부분에 해당했다. 수익액을 보면 지난달과 거의 같은데도 등급이 하락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다른 교수들의 수익이 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외래가 있던 날 연차를 썼던 것이 떠올랐다. 응급시술 콜을 두번, 펠로우에게 돌린 적도 있었다. 그만큼이 그의 수익으로 카운트되었을 것이다. 급여통장에는 전달보다 10퍼센트 정도 적은 액수가 입금되었다. 반사적으로 다음달의 수익을 가늠해보게 되었다.

없던 습관이 새로 생겼다. 매달 내과 전체 교수들의 실적 그래프를 훑어보는 것. 예년에 비해 어쩐지 다른 교수들의 입원환자 숫자가 늘어나고 내시경 시술 횟수가 증가한 것도 같았다. 모두 내 기분 탓인지도 몰랐다. 병원 로비나 식당에서 다른 과의 친분 있는 교수들과 마주칠 때면 저 사람은 몇 등급일까 궁금해졌다. 그리고 내가 몇 등급인지 그들이 알고 있을까봐 두려웠다. 최소한 3등급 밑으로 떨어지고 싶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월급이 줄어들어서만은 아니었다. 절반 이하의 의사라는 자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였다.

새 이사장과 원장단은 이 제도의 목적은 개인을 서열화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며, 경영 효율성 제고를 위한 합리적 방안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심사평가원의 진료비 삭감률, 입원병상의 회전율과 가동률 등을 각 진료과 평가의 주요 지표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라는 우려가 들었지만, 나는 그 생각을 깊이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2

 

그날은 아침부터 유독 정신없던 날로 기억된다. 아침 여덟시가 지나도록 엄마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집 전화도, 휴대전화도 연결되지 않았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출근을 해야 했다. 자고 있는 아이를 두고 현관을 나서는데 등 뒤에서 남편의 안절부절못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쩔 거야? 어떻게 해?”

내가 허공에 대고 외치고 싶은 말이었다. 코로나19로 아이는 몇달째 등교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방학 때처럼 엄마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에 맞춰 친정 옆 단지로 이사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엄마는 아침 일찍 건너와 아이를 챙겼다. 아이의 일과는 팬데믹 이전의 방학과 비슷한 듯 달랐다. 그때는 혼자 셔틀버스를 타고 영어학원도 수영장도 다닐 수 있었다. 엄마는 그 시간을 쪼개 여러 용도로 사용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이제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시절이 되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엄마의 불안은 유별난 데가 있었다. 아이를 집 앞 놀이터에도 내보내지 않았고, 시간제 가사도우미를 부르자는 나의 제안도 완강히 거부했다. 있던 사람도 내보낼 판에 겁도 없다고 했다.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이니?”

질문 형식의 문장이라고 해서 진짜 질문은 아니었다. 엄마의 질문은 어릴 때부터 늘 내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서우 아빠랑 나는 매일 병원에서 별별 사람들 다 만나고 오는데.”

나는 겨우 대답했다.

“그거랑 같니?”

엄마는 일갈했다. 엄마는 눈에 띄게 점점 우울해지고 말수도 줄어갔다. 전날 밤에도 그랬다. 내가 퇴근해 신발을 벗기도 전에 겉옷을 걸쳐 입고서 집에 갈 채비를 했다. 시술이 밀리는 바람에 예정보다 늦었다고 나는 공연히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넌 왜 그러고 사니?”

엄마의 음성은 나직하고 냉랭했다. 나는 이럴 때 엄마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대답을 알고 있었다. 더 낮고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거였다.

“그러니까. 나 진짜 다 그만둘까?”

사실 이것이 나의 진심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이마가 일그러졌다. 엄마는 한숨을 깊게 한번 뱉고서 집으로 돌아갔다. 불과 열두시간 전의 일이었다.

출근하는 동안 남편이 오분 단위로 전화를 걸어 왔다.

“어떡할 거야? 나 아무리 늦어도 여덟시 반엔 나가야 되는 거 몰라?”

“서우를 깨워서……”

나는 횡단보도에 자동차 앞바퀴를 어중간하게 걸친 채 말했다.

“엄마 집에 데리고 가봐.”

“아이 씨.”

블루투스 스피커를 통해 남편이 내뱉는 소리가 그대로 전해졌다.

지하주차장에서 병원 구내로 연결되는 통로에, 전에 없이 출근자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한명씩 수기로 건강 상태 자가진단표를 쓰느라 일어난 일이었다. 어제까지는 없던 절차였다.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타원 환자의 전원을 받지 않고, 보호자 1인 외의 출입을 금지하는 등 여러 제한조처가 있었다. 그럼에도 병원 시스템은 멈추지 않고 돌아갔다. 인플루엔자 같은 계절성 질병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나 코로나19 외의 모든 병이 지구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여러 종류의 암에 걸렸고, 교통사고를 당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제초제를 마셨고, 위출혈을 일으킨 채로 응급실에 실려 왔다. 나는 연구실이 있는 3층까지 비상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팬데믹 이후 가능하면 붐비는 시간에는 병원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게 내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주의였다. 지하1층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층계참에서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3층에 다다랐을 때 답이 왔다.

—오셨어.

—무슨 일이래?

—늦잠이신 듯 ㅋ

주어와 서술어가 없는 미완성형의 짧은 문장, 그뒤에 붙은 단 하나의 ㅋ. 그런 것들이 내 신경을 긁었다. 아침 회진을 준비하다가, 행정실 직원의 애인이 어젯밤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까 출근길의 소동은 그 여파인 모양이었다. 행정실 직원은 어제까지 정상근무를 하고 퇴근했는데 밤사이 밀접접촉자로 분류되었다고 했다.

“어제 출근했으면 병원 안 여기저기 다 다녔을 텐데.”

“그러게요. 8층만 닫아도 될까요? 오늘 정상진료하면 안 되지 않아요?”

전공의들의 대화가 불길하게 귓가를 울렸다. 정오쯤 나온다는 진단검사결과에 따라 아주 큰일이 될 수도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여기는 지역의 거점병원이었다. 800개 병상에, 하루 내원객은 수천명에 달했다. 차트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어제를 포함한 요 며칠간, 원내에서의 내 동선을 빠르게 복기해보았다. 직원식당, 편의점, 베이커리 까페…… 내가 들렀던 곳은 이 병원에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가는 곳이었다. 불안이 몰려왔다. 그럼에도 오늘은, 오늘 몫의 일을 해야만 했다. 나는 회진을 돌기 위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회진해야 할 환자는 열명이었다. 병동 분위기는 예상보다 더 어수선했다. 첫번째 환자는 55세 남성으로, 췌장암을 진단받고 입원한 지 하루째였다. 남자는 누워 있었고, 어정쩡히 침대에 걸터앉았던 부인이 회진 일행을 보고는 벌떡 일어섰다. 부인이 고개를 지나치게 깊이 숙여 인사했다. 나도 비슷한 각도로 인사했다.

“어떻게 좀 잘 주무셨어요?”

부인이 환자 대신 대답했다.

“아 이 사람이 코를 골아가지고요.”

아직 자신들에게 닥친 일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몇가지 사항을 체크하고 돌아 나가려고 하는데, 마스크 쓴 얼굴에 눈만 껌뻑이던 환자가 나를 불러 세웠다.

“교수님, 저, 괜찮을까요?”

괜찮지 않을 것이다. 4기에 발견되었고, 췌장암은 예후가 좋지 않다. 나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우선은, 모르던 병을 알게 된 거니까요. 현재 알려진 가장 좋은 방법으로 치료를 시작해보죠.”

유난히 짙은 환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거기 담긴 것은 끝 모를 두려움일 것이다. 나는 그 얼굴을 바로 쳐다보지 않은 채 살짝 묵례를 하고 자리를 떴다. 어떤 경우에도 나는 환자에게 괜찮을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괜찮지 않을 거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괜찮음과 괜찮지 않음 사이에서 적절하게 밸런스를 조정하는 것이 이 직업에 가장 필요한 덕목일지도 몰랐다. 회진 시간이 더디게 지났다. 환자들은 원내에서 코로나19 관련자가 발생했다는 소문을 대부분 들어 알고 있었다. 행정실 직원이 밀접접촉자가 아니라 아예 확진자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다수였다. 병원 안에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퍼지면 어떻게 되냐고 묻는 보호자도 있었다. 당황스러웠지만,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지요,라고 답했다.

75세, 여성, 안복희 환자는 일곱번째 순서였다.

안복희 환자는 일주일 전, 한밤중에 극심한 복통을 호소하며 응급실을 통해 내원했다. 다음 날 급성담낭염 진단을 받았고 내 이름 밑으로 입원 중이었다. 다행스럽게 예후가 상당히 좋았다. 항생제도 잘 들었고 염증 수치도 이미 정상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예정대로라면 오늘 오후에 퇴원할 수 있을 터였다. 안복희 환자의 병상은 6인용 병실의 중간 자리였다. 환자는 체구가 작고 몹시 마른 사람이었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얼굴빛이 거무죽죽했다. 피부색이 검게 보이는 것은 담낭염의 한 증상일 수 있었다. 오늘은 보호자 없이 혼자였다. 일주일의 입원 기간 동안 두어번 정도 그녀의 딸을 본 적이 있었다. 딸은 어머니와는 달리 피부색이 창백할 정도로 희고 체구도 컸다. 무엇보다 독특한 헤어스타일 때문에 멀리서도 눈에 띄는 여자였다. 목덜미와 이마가 훤히 드러나고 양쪽 귀가 보이는 쇼트커트였는데, 머리칼이 아주 밝고 선명한 노란색이었다.

나는 새삼 안복희 환자의 차트를 들여다보았다. 이름 옆에 누군가 작은 별모양을 표시해놓았다. 전공의들과 병동 간호사들은 환자 이름 옆에 그런 표시를 해놓고 정보를 공유하곤 했다. 일종의 블랙리스트였다. 본인도 모르게 별을 단 환자들은 의료진에게 폭력적으로 굴거나, 치료에 비협조적이고 불만사항과 요구사항이 지나치게 많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안복희 환자는 두가지 모두 해당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한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상습 입원. 그녀는 이 병원의 유명한 상습 입원자였다.

안복희 환자가 응급실에서 코로나 검사를 마치고 병실로 올라온 지 이틀째 되던 날, 연구동 앞에서 정형외과 교수와 마주쳤다. 필요 이상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 할머니 이번엔 거기로 갔다면서요?”

이름을 대지 않아도 누구를 가리키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고생하시겠네. 지난번엔 저였잖아요. 한여름 지내고 푹 쉬다 갔어요.”

당시 안복희 환자의 입원 사유는 발가락 미세골절이었다고 한다.

“발가락 부러진 걸로 그렇게 오래 입원이 돼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되죠. 그런데 안 돼도 되게 하는 게 그분 특기거든요. 금방 아시게 될 거예요.”

어쩐지 그는 더이상 자기 몫이 아니게 된 이 상황을 즐기는 듯 보이기도 했다.

“의료보호환자는 본인부담금이 거의 없잖아요. 한달을 있어도 나갈 때 얼마 안 낼걸요. 그런 환자들한테는 병원이 천국 아니겠어요. 냉난방 해결되지, 하루 세끼 잘 먹여주지. 그냥 엿가락처럼 최대한 오래 병원에 붙어 있는 게 이득이에요.”

“그래도 아프니까 그러겠죠.”

“원래 그 나이 되면 여기저기 다 아파요. 늙어봐요.”

그는 마스크를 콧등 위로 끌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발가락을 방문에 찧었다는데 뭐 그것도 확인한 사람은 없으니까요.”

환자가 입원하기 위해 자해라도 했다는 건가. 내가 보기에 그것은 과도하고 부적절한 상상이었다. 나는 불쾌감을 느꼈다. 우리 과에도 안복희 환자를 가까이서 겪어보았다는 사람들이 꽤 되었다. 3년차 전공의인 도진은 거의 도리질을 쳤다.

“응급실 인턴 돌 때 봤어요. 할머니도 할머닌데, 와, 그 보호자가요. 진짜 이건 그냥……”

전기장판에서 자다가 화상을 입어서 왔는데, 등이 좀 벌게진 정도였다고 했다.

“간단히 바르는 약 처방해주고, 다음주에 외래로 오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할머니가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더니 땅을 막 치는 거예요.”

바로 그때,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딸이 나타났다고 했다. 왜 자기 어머니를 무시하느냐면서 당장 입원시키라고 난동을 부렸다는 것이다.

“링거 폴대를 이렇게 확 뒤집어가지고요, 막 허공에다 휘두르더라고요. 보안요원한테 끌려 나가면서도, 사람 차별하지 말라고 고함을 치는 거예요. 나중에 들으니 완전 알코올홀릭이라고.”

나는 환자에 관한 이야기를 그런 방식으로 하는 건 옳지 않다고 도진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래도 어쨌든 다들 신경 써서 살피자고 당부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번 입원 기간 동안은 안복희 환자와 그 보호자가 유별난 존재감을 과시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안복희 님.”

나는 그녀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렀다.

“잘 주무셨어요? 밤에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으셨지요?”

안복희 환자가 눈을 치켜떴다.

“왜 없었겠어요?”

높고 카랑카랑한 음성이었다.

“여기가 불편해서, 계속 호출을 했는데 그냥 왔다 가기만 하고. 아무도 내 말을 제대로 안 들어줬어요.”

그녀는 환자복 상의 위로 자신의 복부를 문질렀다.

“정확히 어느 부분이 불편하신 거예요?”

“다 아파요. 다 아프다는데 왜 사람을 못 믿어요?”

공격적이기도 방어적이기도 한 태도였다. 나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응대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아프신 데가 있을 거잖아요. 한번 가리켜보세요.”

환자는 오른손을 주춤주춤 움직여 배꼽 아래쪽 4~5센티미터 지점에 가져다 댔다. 나는 손바닥을 펼쳐 그곳을 지그시 눌렀다.

“아아.”

날카롭다고 할 수는 없는 비명이었다.

“입원하셨을 때는 우측 상복부가 아프셨는데 통증 위치가 바뀌었네요. 어제 대변은 보셨어요?”

“아니. 봤나? 안 본 거 같은데. 그것 때문 아니에요. 원래 나는 매일 변을 안 보는데 뭘.”

환자가 말끝을 흐렸다.

“이따 퇴원하실 때 대장 운동 도와주는 약도 같이 처방해드릴게요. 꾸준히 드시면 좀 편안해지실 거예요.”

“여봐요, 교수님.”

그녀가 급히 말꼬리를 잡아챘다.

“어제부터 계속 얘기했는데 내가 아직 몸이 안 좋다니까. 왜 이 병원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람 말을 제대로 듣지를 않아요?”

뒤에 서 있던 도진이 머뭇거리면서 대답했다.

“소화가 안 되시고 열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차트에는 정상 체온만 기재되어 있을 뿐, 그런 사항들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여러번 체크했는데 이상 없으셨습니다.”

전공의들에게 다시 한번 차팅 교육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트를 작성할 때는 환자의 육성을 그대로 적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환자의 반복되는 요구나 기억할 만한 행동은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두어야 했다. 의학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추후 혹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하기 위해서도 그랬다. 간호사가 다시 열을 쟀다. 37.2도. 애매한 수치였다.

“아무튼 나는 오늘 못 가요.”

안복희 환자는 단호했다.

“환자분. 다 나으셨고, 이제 병원에 더 계실 필요가 없어요.”

그러나 그녀의 귀에는 타인의 어떤 말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아휴 정말, 교수님.”

그녀가 갑자기 간절한 목소리를 냈다.

“교수님 내가 진짜 오늘은 못 가겠어서 그래요. 소화도 안 되고 배도 아프고 가슴도 아프고 일어날 기운이 하나도 없는데 집에를 어떻게 가요? 내 몸은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아요. 아주 오래는 안 있을게요. 주말 지난 다음에 딱 며칠만 더 쉬고 바로 갈 거예요. 집보다 여기가 편해서 그래요.”

입원실의 다른 환자들이 이쪽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아직 세명의 회진이 더 남아 있었다. 참으로 피곤한 아침이었다.

“환자분.”

나는 낼 수 있는 가장 엄격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런 순간이면 내가 더 강하고 나이 들어 보이는 인상이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나으셨어요. 그렇지만 아프다고 하시니까 기본검사 몇가지만 하고, 이상 없으면 오늘 퇴원하시죠.”

안복희 환자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순간, 안광이 번쩍 빛난 것도 같았다.

“집에 가서도 많이 움직이셔야 합니다.”

그렇게 당부하고 나는 뒤돌아섰다. 병실을 나가려다가 고개를 돌리고 덧붙였다.

“열흘 뒤에 외래로 오시고요. 그때까지 계속 불편하시면 봐서 다시 입원시켜드릴게요.”

진료부원장이 틈만 나면 떠드는 입원병상 회전율이라는 복잡한 용어가 왜 그 순간 기억났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남은 회진을 돌고, 오전 외래를 위해 진료실로 내려갔다. 컴퓨터의 부팅을 기다리는 동안 서랍에서 KF94 마스크를 하나 더 꺼냈다. 두겹의 마스크가 두배로 안전하지는 않아도, 바이러스의 침투를 막는 데에 미미하게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외래진료가 끝난 뒤 전화기를 확인하니 병원 당국에서 보내온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확진자의 밀접접촉자로 분류되었던 본원 임직원의 코로나19 검사 결과 음성이라는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저희 병원은 환자와 임직원의 안전을 위해 방역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그제야 위쪽 마스크를 벗었다. 점심을 먹으러 가려다가 어쩐지 찜찜해서 가지 않기로 했다. 연구실에서 에너지바를 하나 먹었다. 1시부터는 담석 초음파 시술이었다.

며칠 후, 전체 교수회의가 온라인으로 열렸다. 원장은 모두발언에서, 엄중한 팬데믹 시기에 병원 내부적으로 코로나19 감염 환자가 발생하지 않고 있는 것은 원장단이 목숨을 걸고 방역에 힘쓴 덕분이라면서 자화자찬을 늘어놓았다. 부원장은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이번 분기 전체 매출이 전년 대비 30퍼센트 이상 감소했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직원들이 고통 분담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지 지혜를 모으고 있다는 애매모호한 소리도 곁들였다. 직원 급여 일부를 반납하는 방안을 연구 중이라는 말 같았다. 그는 이어서 전년도 전국 상급 병원의 입원병상 회전율 순위를 언급하며 각 과마다 그 부분에 특별히 신경을 쓰라고 또다시 주문했다. 안복희 환자의 이름이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사라졌다.

 

 

3

 

일주일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사이 조직검사를 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라는 문장을 스무번쯤 말했고, 검사 결과 악성입니다,라는 문장을 열번쯤 말했다. 누군가의 눈빛이 왈칵 흐려지는 것을 그 이상 보았다는 뜻이다. 엄마는 살림을 도와주는 가사도우미 대신 아이를 위한 대학생 학습 시터를 구하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대학생 시터와 학부모를 연결해주는 플랫폼 몇군데에 구인 신청을 했다. 엄마가 내건 이해하기 힘든 조건은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의 밝고 성실한 여학생일 것, 단 현재는 휴학 중일 것이었다. 학생들의 프로필이 메일함에 연달아 도착해 쌓였다. 누구를 골라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퇴근길이었다. 응급실 앞을 지나는데 얼핏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단무지처럼 샛노란 색의 짧은 머리칼, 그 여자였다. 안복희 환자의 딸.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몰라. 몰라. 나도 몰라.”

동물의 흐느낌에 가까운 소리였다. 예감이 안 좋았다. 나는 응급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면이 있는 스테이션의 간호사에게 혹시 안복희 환자가 왔느냐고 물었다.

“안 그래도 지금 교수님 호출 드리려고 했어요. 교수님 환자였다고 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에요?”

“흉통으로 왔는데 지금 어레스트 나서 씨피알 중이에요.”

가방을 스테이션에 던지고 처치실로 뛰어 들어갔다. 여러명의 의료진이 베드를 둘러싼 채 심폐소생술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틈으로 환자의 얼굴이 보였다. 안복희 환자가 맞았다. 막 기도삽관을 하려는 중이었다. 나도 모르게 정신없이 다가가 기도삽관을 도왔다. 누군가 소리쳤다.

“교수님! 방호복 입으셔야죠!”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를 제외한 모든 의료진이 방호복을 입고 있었다. 나는 내 옷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앞자락에 환자의 몸에서 튀어나온, 비말인지 혈액인지 알 수 없는 액체가 점점이 묻어 있었다. 나는 양손을 위로 들어 올리면서 한발 뒤로 물러났다. 뒤편에서 내게 소리 친 응급실 간호사도 방호복 차림이었다. 나는 물었다.

“코로나예요?”

“모르겠어요. 아직 결과가 안 나와서.”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그러면, 그때까지 저도 일단 격리되어야겠네요.”

감염관리실에 문의해야겠지만 아마도 그래야 할 것 같다고 간호사가 대답했다. 나는 나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처치에 끼어들지도 못한 채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저 눈만 부릅뜨고 있었다. 심폐소생술에도 안복희 환자의 몸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심장은 멈추었다. 응급의학과 교수가 나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그는 손에 쥔 심전도 결과지를 흔들었다.

“누가 봐도 심근경색이네요.”

나는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렸다. 환자의 딸을 본 순간부터 납덩이같은 불안에 짓눌려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래, 아무래도 담낭의 문제일 리는 없었다. 퇴원할 때 환자의 담낭 상태는 정상이었다. 그건 전문의로서 내가 보장할 수 있었다. 일주일 만에 이렇게 악화되어 죽음에 이를 만큼의 상태는 절대로 아니었다.

“원래 심장 문제가 있었나봐요.”

“모르겠어요. 보호자 말로는 며칠 전부터 가슴이 뻐근하다고 했다는데. 그렇게 자주 오던 분이 심장 진료는 한번도 안 봤더라고요.”

응급실을 나오면서 다시 환자의 딸을 보았다. 방금 어머니를 잃은 그 여자는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고 있었다. 허공이 아니었다. 단단한 콘크리트였다. 콘크리트 벽을 맨주먹으로 쾅쾅 때리면서 그 여자는 울고 있었다. 울면서 포효하고 있었다. 눈에 띌세라 나는 마스크를 최대한 올려 쓰고 빠르게 걸었다. 그녀가 나를 알아봐서는 안 될 이유 같은 것은 물론 없었다. 내가 그 어머니의 마지막 담당의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 둘 사이의 인과관계를 꼼꼼히 따지기엔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지금은 그 여자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연구실에 들어와 먼저 마스크를 벗어 던졌다. 체액이 튄 옷을 처치복으로 갈아입었다. 컴퓨터를 켜고 안복희 환자의 차트를 보았다. 응급실에 실려 오자마자 실시했던 피검사 결과가 그새 올라와 있었다. 황달과 염증 수치는 정상범위였다. 담낭에 문제가 없다는 의미였다. 이 갑작스러운 죽음이 내 오진 탓이 아님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이기도 했다. 다시 한번 나는 안도했다. 환자가 퇴원 후에도 약을 꼼꼼하게 복용해왔음을 알 수 있었다. 외래에서 봤다면 칭찬해드렸을 텐데. 괜스레 연민의 감정이 들었다.

아까 응급의학과 교수가 흔들어댔던 심전도 검사 결과를 확인해보았다. 누가 봐도 자명한, 전형적 심근경색이었다. 사람의 일이란 한치 앞도 모른다는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학은 운명을 잠시 지연시키는 데에만 유효할 뿐이다. 안복희 환자의 경우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하필 퇴근 시간대였다. 구급차가 서둘렀대도 도로에서 시간이 꽤 지체되었을 것이다. 또 아무리 초응급 환자라도 코로나19 탓에 응급실 의료진이 방호복을 입고 처치에 돌입할 때까지 삼사분 이상 지연되었을 것이다. 아니 차라리 급성 심근경색이 조금 빨리, 그녀가 입원 중이었을 때 닥쳤더라면 즉시 처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 부질없는 가정이었다.

2주 전 안복희 환자가 입원했던 날의 심전도 검사지를 열어보았다. 그때 그녀의 심장은 멀쩡했다. 완전히 정상이었다. 불과 보름여 사이에 한 인간의 심장 상태가 이렇게 극적으로 바뀌기도 하는구나. 나는 인체의 비밀을 처음 알아낸 사람처럼 한동안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우스를 다시 움직인 건 딱히 할 일이 없어서였다. 안복희 환자의 퇴원 검사지도 살펴보았다. 일주일 전 그녀가 퇴원하던 오후가 떠올랐다. 담석 제거 시술에 들어가기 직전에 도진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오늘 퇴원하는 환자들에게 시행한 검사 결과가 나왔다는 보고였다.

“응, 별건 없지?”

도진은, 자기가 보기에는 괜찮은 것 같다고 대꾸했다. 그러면 네가 알아서 퇴원시키라고 나는 말했다. 어떤 교수든 연차 높은 레지던트에게 그 정도의 자율권은 허용할 것이다. 불과 일주일 전 일인데 아득하기만 했다. 병원 안에서만 생활하다보면 마치 진공 상태에 놓인 것처럼 시간의 흐름이 몽롱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곤 했다. 퇴원 전 검사에서도 안복희 환자의 복부 엑스레이와 염증 수치는 정상이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화면을 넘겼다. 퇴원 전 심전도 검사 결과가 있었다. 도진이 습관적으로 오더를 냈던 모양이다. 불현듯, 이때는 심장이 괜찮았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검사지를 모니터에 띄웠다.

언뜻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눈으로 가만히 심전도 그래프의 선을 따라가보았다.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안복희 환자가 입원했던 날의 심전도를 다시 열었다. 불과 일주일 차이로 찍은 두개의 심전도.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니 미묘한 차이가 보였다. 둘은 달랐다. 낭패감이 밀려왔다. 분명 입원 기간 일주일 동안, 그녀의 심장 상태는 나빠지고 있었다. 놓쳤다. 내가, 발견하지 못했다.

퇴원 전에 알았다면 당연히 집에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심장내과에 컨설트를 내고 전과시켰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지금, 적어도 죽은 사람은 아닐 것이다. 사방이 끔찍하도록 고요했다.

전화기에서 카톡 알림음이 울렸다.

—안 와?

남편이었다. 나는 오늘 밤 병원에 머물러야 하는 상황을 간단히 알렸다. 그러고서 모니터에 떠 있는 두장의 심전도 그래프 사진을 찍어 그에게 전송했다.

—이게 뭐야?

—차이가 있어 보여?

몇분 후에 답장이 왔다.

—차이는 있네. 왜?

나는 손바닥을 펼쳐 두 눈가를 천천히 문질렀다. 창 너머 어둠이 질식할 듯 빽빽했다. 이상했는지 남편이 전화를 걸어 왔다.

“당신 환자야?”

“응.”

일주일 전에 퇴원한 환자인데 조금 아까 응급실에서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말하는데 식도에서 신물이 울컥 치밀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내가 잘못한 것 같아. 심전도 변화를 체크 못했어.”

남편이 어이없어했다.

“당신은 심장내과가 아니잖아. 무슨 상관이야?”

“그래도 내가 마지막에 한번만 확인했더라면.”

더 말을 잇기 힘들었다.

“아니 그걸 누가 일일이 봐. 환자가 한둘도 아닌데.”

우리 사이를 침묵이 휘감았다. 잠시 후 남편이 약간 부드러워진 어조로 말했다.

“심전도 지금 다시 봤거든. 괜찮아. 두개가 차이가 없진 않지만, 있다고 볼 정도도 아니네. 당신도 알 거 아냐?”

“나한테는 있어 보여, 차이가.”

“누가 없대? 유의미하지 않다는 거지. 이 정도 변화로 어떻게 심근경색 올 걸 의심해? 의사가 신이냐.”

나도 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서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도 이쯤은 괜찮다고 단언하고 싶었다. 나의 무결을 나에게 밝히고 싶었다.

“심전도 변화가 2밀리미터 이상 있었다면 또 모를까, 지금 이걸로는 아무도 시비 못 걸어. 불안해하지 말고 쉬어.”

남편은 마치 내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이 굴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보호자가 알아?”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나는 중얼거렸다. 전화를 끊고 나서 한번 더 속엣말을 했다. 그게 중요해?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답을 물을 수도 없었다. 나는 모니터 앞에 더 가까이 다가앉았다. 안복희 환자의 심전도 그래프 두장을 거듭 살펴보았다. 첫번째 심전도와 두번째 심전도 사이에 존재하는, 1밀리미터가 넘고 2밀리미터가 안 되는 차이. 그것은 유의미한가 아니면 유의미하지 않은가. 그것은 나의 책임인가 아니면 나의 책임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위험한가 아니면 위험하지 않은가. 진실을 판독해줄 유일한 근거는 오직 심전도 그래프 속 얄따란 선뿐이라는 듯이 나는 정신없이 몰두했다.

두번째 심전도 그래프 화면의 상단에서 ‘NONSPECIFIC CHANGE’라는 문구를 발견한 것은 늦은 밤이 다 되어서였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박혀 있었던 글자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심전도 기기에서 자동 판독되어 나온 결과였다. ‘비특이성 변화’ ‘예전에 찍은 것과 비교해 이 사람의 심장에 특별한 변화 없음’을 뜻했다. 내 입술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환자가 퇴원일 아침 회진 때 배가 아프다고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러고 나서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했던 것도 같았다. 나는 안복희 환자의 차트 기록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 말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흉통이라는 단어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내 기억의 오류인지, 전공의가 환자의 말을 받아 적지 않은 것인지 분명치 않았다. 이제는 조금쯤 마음을 놓아도 되지 않을까 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생각했다. 잠을 잘 수 없는 밤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안복희 환자의 코로나19 검사 결과가 나왔다. 음성이었다. 나의 격리도 곧바로 해제되었다. 처치복 위에 그대로 가운을 걸치고 평소보다 조금 늦게 회진을 돌았다. 언제쯤 퇴원할 수 있느냐고 묻는 환자들이 몇 있었지만, 병원에 남겠다고 우기는 환자는 한명도 없었다. 오전에는 외래진료를 보았고 오후에는 담도 내시경 검사와 시술을 반복했다. 저녁 일곱시 넘어서야 퇴근할 수 있었다. 병원 밖의 땅을 밟은 건 거의 서른여섯시간 만이었다. 마스크 때문에 공기의 냄새는 맡지 못했다. 멀리서 그 여자를 또 보았다. 안복희 환자의 딸. 그녀가 병원 옥외 주차장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보안요원 서너명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서서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샛노란 머리칼에 상복 차림이었다. 상중이겠구나, 나는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깨달았다.

 

 

4

 

안복희 환자의 딸은 거의 매일 병원 앞에 출몰했다. 병원 로비에는 들어오지 못했다. 코로나19 이후, 예약환자나 보호자 1인이 아니면 병원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는 조치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병원 측으로서는 그녀의 출입을 막을 유용한 구실을 가진 셈이었다. 대신 그녀가 자리를 잡은 곳은 주차장 한편의 코로나 선별진료소 앞이었다.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이 흰색 음압텐트를 바탕으로 서 있으니 대조가 뚜렷했다. 행인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는 거기서 전단지를 뿌리지도 않고 피켓을 들지도 않고 현수막을 걸지도 않았다. 그리고 어떤 민원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냥 번번이 술에 취해 나타나 울면서 난동을 부렸다. 우리 엄마 살려내라고 고함을 치기도 했고, 살아서 들어간 사람을 죽여서 내보낸 살인마 병원은 반성하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나는 가능하면 그쪽 길로 다니지 않았다. 안복희 환자를 치료한 적 있는 의료진들이라면 누구나 비슷하지 않을까 짐작했다. 한번은 1년차 전공의가 출근길에 보안요원들과 싸우는 그 여자의 모습을 봤다고 전했다. 왜 못하게 하느냐고, 사람이 길에서 우는 게 법에 걸리는 거냐고 소리 지르며 바닥을 구르고 있더라고 했다. 미친 사람의 종류도 참 다양하다고 의국원들이 하는 소리를 나는 못 들은 척했다.

병원 측에서는 소문을 염려했다. 지역 맘카페에도 선별진료소 앞에서 난동 부리는 여자가 누구냐는 글이 올라왔다. 온라인 커뮤니티나 유튜브 등에서 알려지면 더 복잡해진다는 병원의 우려에도 일리는 있어 보였다. 의료서비스를 포함한 어떤 서비스 업종도 한번 여론의 낙인이 찍히면 평판을 돌이킬 수 없다고들 했다. 병원은 선제적 방법을 택했다. 안복희 환자의 의무기록을 변호사에게 검토시킬 예정이니 마지막 담당의였던 나에게도 서면 경위서를 제출하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차트 기록에 남겨진 말들을 그대로 옮겼다. 없는 말을 만들어 적을 수는 없었다. 황달과 염증 수치를 비롯해 담낭염에 관련된 검사 기록지들과 함께 세장의 심전도 결과지도 첨부했다. 두번째 심전도의 ‘NONSPECIFIC CHANGE’라는 문구에 형광펜 표시를 했다.

 

어느 날 오후, 외래진료를 보고 있는데 대기실이 시끄러웠다. 다음 환자 대신 간호사가 급히 방에 들어왔다.

“교수님, 큰일 났어요. 그 사람이 왔어요.”

간호사가 다 말하기 전에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눈치챘다. 내가 이 장면을 계속 상상해왔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섬뜩하지는 않았다. 그저 멍했다. 나는 잠시만 기다리시라고 말했다.

“만나시게요?”

간호사가 깜짝 놀라며 만류했다.

“유명한 사람이잖아요. 보안요원 불렀으니까 올 때까지 밖에서 저희가 시간 끌어볼게요.”

내 차례인데 왜 못 들어가게 하는 거냐고, 나도 엄연히 예약하고 왔으니 사람 차별하지 말라고, 이 병원 사람들은 왜 항상 이러는 거냐고, 닫힌 문틈을 뚫고 그녀의 목소리가 쩡쩡 울려 퍼졌다. 나는 예약환자 목록에서 다음 순서의 이름을 찾아보았다. 김현숙, 42세, 여, 초진.

“환자로 오셨나봐요. 진료는 봐야죠.”

나는 말했다. 그녀가 내게 한바탕 퍼부을 것은 각오하고 있었다. 그녀는 뭐라고 할까? 다 내 탓이라고 할까? 내가 퇴원만 안 시켰어도 어머니가 죽지 않았을 거라고 할까? 두장의 심전도 기록지를 바닥에 던지면서 이때부터 심장이 이상했는데 무슨 의사가 그것도 몰랐느냐고 할까? 그러면 나는 전부 다 오해라고,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 상대는 당연히 모든 대화를 녹음하고 있을 테니, 미안하다는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내 상상은 늘 거기서 끊겼다. 보안요원들이 너무 늦게 도착하지는 않을 것이다.

노크 소리도 없이 문이 확 열렸다. 안복희 환자의 딸이었다. 김현숙 님, 그녀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검은색 반팔 티셔츠와 검은 바지에 흰색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마스크에 가려서 표정은 볼 수 없었다.

“교수님, 나 누군지 알죠?”

알고 있다고 나는 대답했다.

“우리 엄마도 알죠? 우리 엄마 기억하죠?”

기억한다고 말했다. 정적이 흘렀다. 여자의 머리는 그사이 많이 자라 덥수룩했고, 샛노랗던 색깔도 정수리 부분부터 거무스름하게 변해 지저분해 보였다. 술 냄새는 나지 않았다. 마스크 덕분인지도 몰랐다. 마스크는 많은 것들을 가려주었다. 그녀가 갑자기 불룩한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진료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캔커피 두개였다. 그중 하나를 내 쪽으로 밀었다.

“고맙다고 인사하러 왔어요.”

그녀가 말했다.

“엄마가 그때 퇴원하고서 계속 얘기했어요. 이 병원을 그렇게 오래 다녔는데 다음에 오면 또 입원시켜준다고 말한 의사는 교수님이 처음이라고.”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교수님만 자기를 믿어줬대요. 교수님이 준 약 먹었더니 화장실도 잘 간다고, 멋있다고 했어요.”

그녀가 제 앞의 캔커피를 땄다.

“그냥 내가 오늘은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교수님이랑 이거 같이 마시면서 엄마 생각하고 싶어서. 그래서 사 왔어요. 이거 드세요. 나쁜 거 아니에요. 편의점에서 제일 비싼 거예요.”

나는 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차가웠다. 마시려면 마스크를 벗어야 했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마스크를 벗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제대로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평범하고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도 캔을 땄다. 마스크를 살짝 내려 턱에 걸쳤다. 그녀도 내 얼굴을 보는 것이 처음일 것이다. 우리는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밖에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요, 교수님.”

그녀가 불쑥 나를 불렀다.

“내가요, 옛날에 술을 좀 많이 먹었었거든요. 그래서 간이 안 좋은데, 이제부터 교수님한테 진료 다니려고요.”

“아, 네.”

나는 무력하게 대답했다. 잠깐 미소 지은 것은 당혹스러운 감정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서였다. 남은 커피를 목구멍으로 흘려 넣었다. 이윽고 다시 마스크 속에서 나는 김현숙 환자에게 간의 이상 증상에 관한 첫번째 질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