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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아베로부터 스가로
일본 정권 이행 과정과 한일관계
아오야기 준이찌 青柳純一
김기림기념회 공동대표, 번역가.
bunkokorea31@yahoo.co.jp
1. 시작하며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일관계는 미중 양 대국의 대립과 공존 사이에서 이해와 내부갈등을 공유한다. 한편 많은 일본인들은 인정하려 들지 않지만, 일본사회는 미일관계와 한일관계의 미묘한 균형 위에 성립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의 의미를 보다 깊이 생각해보면, 미일관계와 중일관계를 통해서 규정되는 일본을 전제로 해서 한일관계에 주목할 때 오히려 그 동향이 더 잘 보이는 면이 있다. 돌이켜보면 한국전쟁 후 70년간 미일관계의 틀은 크게 변하지 않은 한편, 일본사회는 한국사회의 동향에 영향을 받아 변화한 측면이 있으며, 앞으로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작용과 반작용의 측면이 있으며, 당연히 일본사회의 동향이 한국사회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트럼프 신드롬이라고도 할 수 있는 4년이 끝난 지금,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한국 촛불혁명의 영향을 일본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이거나 혹은 무시했는지, 아베(安倍晋三) 정권으로부터 스가(菅義偉) 정권으로의 이행 과정을 되돌아보면서 검토해보려고 한다.
이는 동시에, 4년 전의 촛불혁명과 트럼프 정권의 시작으로부터, 그다음 단계인 촛불혁명의 본격화와 트럼프 정권의 종식(바이든 정권의 성립)이라는 흐름에 대한 대응이 요구되고 있는 일본사회의 변화를, 한일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서 고찰한다는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의 한일관계는 장기적으로 보면 미소 냉전체제 붕괴 후의 그것이자 중기적으로는 촛불혁명 후의 한일관계를 가리키는데, 본고에서는 아베정권에 의한 ‘반도체 3품목 수출규제’ 이후로 한정시켜서 살피고자 한다.1
2. 코로나 사태 이전의 아베 정권
우선 2019년 7월부터 약 5개월간 계속된 일본사회의 ‘반(反)문재인’ 분위기를 돌아보자. 그 발단은 2018년 10월의 대법원 판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베 정권은 2015년 말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합의’를 무효로 만든 촛불혁명과 문재인정권을 적대시해왔다. 그 단적인 예가 오오사까에서 열린 G20정상회의에 참석한 트럼프 대통령이 판문점을 방문하여 문재인 대통령, 김정은 위원장과 삼자회담을 가진 직후, 그리고 일본 참의원 선거 공시일 직전에 ‘반도체 3품목에 대한 수출규제’를 발표한 것이다. 이를 통해 선거의 쟁점을 돌리는 데 성공해서 선거에서 승리하자, 8월에는 ‘수출심사 우대국(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고 ‘한일경제전쟁’에 돌입했다. 이 두 조치는 ‘대한(對韓) 경제제재 조치를 위한 비장의 카드’로 오래전부터 준비되어온 것인데, 이를 계기로 한국에서는 단순한 ‘반일’보다 ‘NO 아베’의 움직임이 명확해졌고, 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과 일본 여행을 자제하는 등의 항의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즉 아베 총리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들이 계속되는 한 당연히 한일 양국의 정부 차원에서 ‘오랜 기간에 걸친 평온’은 없다. 어느 쪽이건 정책을 바꿀 때까지 양국 정부 간의 갈등은 계속되어서 지구전이 되는 한편 일시적인 타협과 대립이 반복될 것이다. 폐기가 ‘일시 정지’된 GSOMIA(군사정보보호협정)도 언젠가 다시금 불씨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2019년 가을의 한일관계를 돌아보면, TV나 신문 등의 반한 보도는 상식의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예를 들어 자국 법무상의 해임에 대해서는 단신으로 다루면서, 한국의 법무부장관에 대해 연일 광적으로 보도하는 등 어이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무언가 특별한 사정 없이는 그런 정도의 ‘반문재인’ 분위기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실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당시 총리관저 내에서 시작된 균열이다. 이는 해가 바뀌고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내부 투쟁으로 발전했고 여름이 끝날 무렵 정권 이행으로 귀결되었다. 물론 한일관계나 ‘반문재인’이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아니지만, 이를 축으로 해서 내부 투쟁의 전개 과정을 좇아가보면 여러 국면에서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아베 정권은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하지만 헌법 개정의 국회 발의에 필요한 ‘총 정수의 3분의 2’를 획득하는 데는 실패해서 9월의 개각과 당 간부 인사에서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참의원 선거 승리 후 논공행상의 의미를 가지는 이 두 인사의 배경에는 ‘아베 총리-아소(麻生太郞) 부총리’와 ‘스가 관방장관-니까이(二階俊博) 간사장’ 사이의 갈등이 있었다. 저명한 전직 총리들의 손자인 전자 두명은, 그 자신들 또한 총리 경험자로서 자민당 내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비해 지방의원으로 시작해서 올라온 후자의 두명은, 정무·당무를 통해 다양한 인맥을 형성하고 정책에 정통했다. 아베 정권은 후자가 전자를 보좌함으로써 비로소 톱니가 맞물려서 정권이 장기 유지되었는데, 포스트 아베를 둘러싸고 입장의 차이가 드러나게 되었다.
특히 총리관저 내의 균열이 심각해졌다. 새로운 내각이 발족한 직후인 10월, 관방장관계의 각료 두명이 불상사로 인해 차례로 사임하면서 주도권은 아베 총리 측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 직후인 11월, 2013~19년의 ‘벚꽃모임’ 참가자 다수를 총리의 지역구 후원회를 중심으로 모집한 것이 발각되면서 공사 구별의 문제와 더불어 정치자금규정법 위반의 혐의가 짙어졌다. 총리는 종래와 마찬가지로 단호한 답변을 반복하면서 정면돌파를 시도했다(작년 말, “결과적으로 거짓말이었다”라고 국회에서 해명했다). 이 당시 총리와 거리를 두는 듯한 스가 관방장관의 대응이 인상적이었는데, 이전 다른 스캔들의 국면에서 총리를 전면적으로 옹호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즈음 양자는 정책 면에서 이견이 표면화된다. 스가가 힘을 쏟던 외국인 관광객 유치는 아베의 ‘혐한외교’에 따른 한국인 관광객 급감으로 좌초되고 만다. 또 태풍으로 인한 대규모 정전사태에 대해서도 아베는 극히 냉담한 태도를 보이며 대책본부조차 설치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스가는 연휴를 반납하고 관계부처 담당자들을 불러들여 개별적으로 지시를 내리는 등 활발하게 움직였다. 이런 상황에 더해서 아베와 스가의 측근들 사이에서의 대립도 격화되어서, 이미 2019년 말의 시점에 내부에서는 ‘관저 내 별거’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3. 아베 정권의 코로나 대책과 갈등의 격화
이러한 갈등을 표면화한 것이 2020년 초부터 시작된 코로나 사태이다. 1월 15일 일본 국내 첫 감염이 확인되고 나서 외국인 관광객과 귀국자들을 통한 감염이 확산되고 2월에는 대형 크루즈에서 다수의 감염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시중에 감염이 확산되기 시작한 2월 말, 아베 총리는 전국 초·중학교에 대해 3월 초부터의 ‘일제 휴교’를 발표했다. 이러한 일방적인 조치는 사전준비 없이 공표되어, 코로나의 공포에 떠는 국민들은 불안과 분노를 안은 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4월에는 ‘아베 마스크’라고 야유를 받은 천 마스크 두장씩이 전국의 모든 가구에 배포되고, 외출을 자제하고 집에 머물기를 호소하는 일환으로 ‘우아하게 휴일을 보내는 아베 총리’가 SNS에 공개되었다. ‘전국 일제 휴교, 아베 마스크, SNS 동영상’은 모두 총리 측근의 기획하에 실행된 것으로, 관방장관이나 담당대신도 직전까지 몰랐다고 한다. 이렇게 ‘관저 내 별거’의 실태가 폭로되어갔다.
같은 시기에 아베 총리와 관계가 깊은 쿠로까와(黒川弘務) 토오꾜오고등검찰청 검사장이 차기 검찰총장으로 지목되었고, 그의 정년 연장을 목적으로 하는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곧이어 그러한 경위가 신문을 통해 폭로되자 인터넷상에서는 가수, 배우 등의 유명인들이 포함된 법안 반대 서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총리에 대한 비판이 극에 달했다. 그 와중에 쿠로까와 검사장이 5월 연휴의 외출금지 기간에 친한 신문기자와 내기 마작을 한 것이 발각되어 사임하게 되었다. 이 일련의 사태에 스가 장관은 일관되게 침묵을 지켜, ‘정보 누설’ 의심을 받을 정도로 양자의 관계는 권력투쟁의 색채가 짙어졌다.
이러한 양자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서로 일치한 것은, 드라이브 스루 방식의 PCR검사 등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갖기 시작한 한국의 코로나 대책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정책이었다. 4월의 한국 총선에서 집권여당이 압승한 주된 요인이 코로나 대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매스컴에서는 그러한 언급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그 전해에 법무부장관이 사임했을 때의 ‘반문재인’ 분위기는 사라져서, 대만, 뉴질랜드와 더불어 한국의 방역대책을 평가하면서 PCR검사의 확충을 요구하는 발언들도 눈에 띄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정기국회는 유효하고 적절한 코로나 대책을 검토도 하지 않은 채 연간 국가예산의 반이 넘는 60억엔에 달하는 추가경정예산의 집행 권한을 정부에 일임하고 예정대로 6월 하순에 폐회했다. 그로부터 1개월간 지병이 악화되었다고 전해지는 아베 총리는 회견조차 열지 않는 활동정지 상태가 계속되었다. 한편 스가 장관은 의욕적으로 활동을 펼치며 8월부터 예정했던 ‘Go To 트래블’ 캠페인을 7월 중으로 앞당겨서 개시한다고 발표하는 등 ‘경제활동 재개’로 방향을 틀었다.
이렇게 맞이한 8월 하순, 아베 총리가 통원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공표되자 총리관저 주변의 움직임이 갑자기 활발해지고 총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주목받게 되었다. 그리고 아베의 친족이기도 한 사또오(佐藤榮作) 총리가 가지고 있었던 최장 정권기록(1964년 11월~72년 7월, 2798일)을 갱신한 직후인 28일, 아베 총리는 지병 악화를 이유로 사임을 표명했다. 그날 밤, 총리관저 내의 정보에 정통했던 스가 장관은 니까이 간사장과 긴급하게 회담을 하고, 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를 결의, 당내 주류파의 뜻을 집결시키는 방향으로 일거에 주도권을 쥐었다. 9월 16일 세명의 후보가 나선 총재 선거 결과 스가는 총 투표수의 3분의 2 가까이 득표하며 압승하고, 그 직후의 여론조사에서도 70퍼센트 전후에 달하는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아베 총리 사임을 전후로 한 이러한 정권 지지율 상승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다 상세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지만, 코로나가 심각해지는 가운데 정권의 안정을 바라는 심리가 작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이렇게 아베 정권으로부터 스가 정권으로의 이행이 완료된다. 표면적으로 그 과정은, 아베 총리가 ‘지병이 재발해 정권 운영이 곤란하다’고 느낀 시점에 퇴진을 결의하고, 그 복심이었던 스가 장관에게 순조롭게 정권을 이양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본질은, 앞에서 언급한 ‘아베-아소’ 대 ‘스가-니까이’의 정권 내부 권력투쟁이고, 후자가 전자에게 승리한 결과인 것이다.
4. ‘스가-니까이’ 정권의 성립과 한일관계
이런 경위를 거쳐 스가 정권이 탄생한 지 4개월이 지난 지금, 앞으로의 동향을 보는 데 있어서 주목하고 싶은 점이 세가지 있다. 첫째, 아베와의 관계이다. 정권 출범 직후에 표면화된 학술회의 회원 6명에 대한 ‘임명 거부’ 문제는, 말하자면 아베의 ‘악의적인 선물’로, 스가 정권에 생채기를 내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2 또 아베는 총리 퇴임 직후의 인터뷰나 선거구인 야마구찌(山口)로의 ‘귀향’ 기사를 읽어보면, ‘지병으로 퇴진’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활기가 있고, 올해 9월의 자민당 총재 선거에 재출마하려는 의욕마저 엿보였다. 그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패배한 것도 뼈아프지만, 12월에 ‘벚꽃모임’ 전야제와 관련해 제1비서가 검찰에 소환되고 그 스스로 국회에서 해명해야 하는 상황에 몰린 것은 큰 타격이었다. 결국 비서는 약식기소가 되어서 정식 재판을 피할 수 있게 되고 아베 자신도 불기소처분을 받았지만, 그러한 경위를 총리관저에서 묵인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앞으로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양자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11월 10일에 한국의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스가 총리를 예방하고 취임에 대한 축하의 뜻을 전달하면서, 올림픽을 앞둔 시점에 ‘한일정상회담’을 조기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이때 강조된 것이 1998년 오부찌(小渕恵三) 총리와 김대중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발표된, 박지원 자신도 당사자로서 관여했던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다. 이 선언에서 오부찌 총리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의한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입힌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과”를 표명했다. 즉 이 선언은 종래 일본정부의 입장에 비해서 획기적인 것으로, 아베 정권은 이것을 일관되게 무시해왔다고 할 수 있다. 올해 여름 올림픽 전까지 스가 총리의 대응이 주목된다.
셋째, 스가정권에 있어서 81세의 니까이 간사장의 존재이다. 니까이 간사장은 스가 정권을 탄생시킨 실력자로 나이가 나이인 만큼 그 경력과 넓은 인맥이 아베 정권하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는 ‘친중파’로 지목되는데, 원래 자민당 타나까(田中角榮)파에서 오자와 이찌로오(小沢一郎)의 측근으로 함께 탈당했다가 2000년에 오자와와 결별하고 자민당에 복귀하는 등 아베 정권 간부로서는 매우 이색적인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타나까 정권의 산물이기도 한 중국과의 친밀한 관계도 중시하지만 한국의 정치가, 특히 박지원 특사와는 ‘형제의 서약’을 맺었다고 한다.3
그의 칼럼에 따르면, “박지원 씨와의 첫 만남은 1999년 10월로, 제주도에서 열린 한일 정기각료회의에서”였다. 당시 “나의 직접 교섭 상대”로 “첫 만남부터 의기투합”했고, 그가 “김대중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서” 열심히 주장을 펼친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그리고 “2003년 6월, 북한으로의 송금 건으로 갑자기 수감되는 사태” 후에 “병으로 인한 집행정지 중의 박지원 씨를 만나서 옛정을 나누고 동시에 격려”한 니까이는 귀국하고 나서 “한일 양국의 다리가 되는 중요한 역할을 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편지를 썼다고 한다. 앞으로 그런 시기가 올 것인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5. 결론을 대신해서: 2021년의 남북 코리아와 일본
2021년 초의 열흘 정도 시간 동안 앞으로의 한일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4개의 사건이 일어났다. 첫째, 트럼프 대통령이 선동했다고도 할 수 있는 미국 의회 난입 사건, 둘째, 일본의 급격한 코로나 확산, 셋째,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나온 ‘위안부’ 피해자들의 일본정부에 대한 승리 판결, 넷째, 북한 노동당대회 개최이다. 심각한 사회적 분단 상황에 빠진 미국 바이든 정권의 초기 외교정책이 확실하지 않은 가운데, 스가 정권은 코로나 감염 상황을 ‘극복’하고 올림픽을 개최하는 것에 그 명운을 걸고 있다.4 여기서 셋째와 넷째 사건과 관련해 심각한 딜레마가 존재한다.
앞으로 김정은 위원장이 올림픽 참가를 표명할 경우, 북한과 국교가 없는 상태에서 필요한 준비에 대해 JOC(일본올림픽위원회)는 어디까지 상정하고 있을 것인가. ‘반북한 및 북한 혐오’ 감정이 심각한 정도로 존재하는 일본에서 ‘국교가 없는 유일한 나라’가 참가하는 의미를 어느 정도로 인식하고, 어떤 경비태세를 갖출 것인가. 1964년 토오꾜오올림픽 당시 일본은 한국, 북한 어느 쪽과도 국교가 없었는데, 한국만 올림픽에 참가하고 이듬해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진 반면 북한과는 지금도 국교를 맺지 않고 있다. 결국 2002년의 ‘북일공동선언’을 토대로 한 협의를 시급히 개시해서 북한 정부요인이 방일할 가능성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문재인 대통령도 올림픽 참가를 표명할 경우 실무적인 단계에서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토대로 한 ‘한일공동선언’의 제안이 다시 이루어질 것이다. 이미 작년 11월 박지원 특사로부터의 제안에 더해서, 그 직후 한일의원연맹(일본측 간사장은 니까이파의 카와무라 타께오(河村健夫))에서의 발언을 보더라도 한국 측의 교섭 기조는 당연히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다. 만약 올림픽의 취지에 부합하는 공동선언의 의의를 강조할 경우, ‘올림픽 개최’를 지상과제로 여기는 일본정부, 스가 정권이 이를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1년 후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개최될 때에는 평창올림픽 당시 남북관계 이상의 관계 개선이 예상된다. 향후 1년 안에, 즉 올해 안에 자민당 총재 선거와 중의원 선거가 예정되어 있으므로 스가 정권은 아베 정권과는 달리 ‘근린외교’를 전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연상되는 것이,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국내외의 민주화 요구’에 굴복한 전두환정권이다. 형태도, 시대도 다르지만 ‘국제적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문대통령보다는 스가 총리다.
2021년을 앞두고 발표한 ‘신년칼럼’에서 백낙청은 “세상의 민낯을 본 뒤에 무엇을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촛불혁명을 화두로 삼아 한층 더 연마해서, “촛불을 표준 삼은 냉정한 형세판단과 착실한 제도개혁으로 대응할 필요가 절실하다”5라고 논했다. 이 글의 일본어 번역을 담당한 나는, 재작년 가을에 『반일종족주의』가 간행되었을 때의 일본 측 협력·연계를 떠올리며, 한일 양국의 시민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코로나 사태와 트럼프 신드롬에 휘둘리고 난 지금에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분단시대가 낳은 인물’ 5명으로 키시 노부스께(岸信介), 박정희, 전두환, 박근혜, 그리고 아베 신조를 꼽을 수 있다. 그들이 만들어온 ‘분단시대의 한일관계’는 1957년 전범인 키시 정권의 탄생으로 시작되어 2020년 아베 정권의 붕괴로 종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촛불혁명이 중요한 고비를 맞은 지금이야말로 이들 5명이 군림했던 시대와 사회, 그리고 한일 양국의 현대사를 각각의 입장에서 직시하고, 한일 양국 시민들의 활발한 논의가 필요한 때다.
또 지난 30년간 미일관계에는 기본적으로 변화가 없었던 데 비해 한일관계는 상호 정권의 성격에 따라 매우 큰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 점을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면, 지금이야말로 식민지 지배의 종식으로부터 70여년이 지나서 드디어 도래한 ‘적폐청산’을 본격화할 호기이다. 그리고 다가올 2020년대를 생각하면 약 백년 전의 3·1운동이 제기한 ‘동아시아의 평화 만들기’에 비추어서 일본사회의 모습과 자세를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을 자각하는 일본시민의 한사람으로서 살아가겠노라 생각한다. (2021년 1월 12일 작성)
* 본고 작성이 끝난 후에, 한국정부가 『2020 국방백서』(2021)에서 일본을 ‘동반자‘가 아닌 ‘이웃 국가’로 격하시켜서 표기했다는 소식이 일본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이는 수출규제를 유지하고 있는 일본에 대한 당연한 ‘현황인식’이다. 그리고 수출규제의 철회가 ‘파트너(동반자)’ 관계의 전제조건이라고 요구한 점은 중요하며, 본고의 취지와도 합치한다.
번역: 김형수(金亨洙) / 녹색평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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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 내용 중 ‘관저 내의 내부 갈등’에 대해서는 『週刊文春』 『週刊金曜日』 등의 주간지에서도 여러차례 다루어졌고, 특히 월간지 『選択』는 2019년 10월호 이후 거의 매달 아베 총리와 스가 관방장관의 갈등을 다루었다.↩
- 「‘学者6人排除’の真犯人 ‘陰の総理’杉田官房副長官の思惑」, 『日刊ゲンダイDIGITAL』, 2020.10.14 참조. 실은 한국인에게 있어서 이러한 일본 정치 시스템을 이해하고 현황을 분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わかやま新報』에 실린 니까이 토시히로오의 칼럼, 2008.4.22.↩
-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도 일본정부와 IOC·JOC는 무관중 개최 또는 소수 일본인 관중만으로의 ‘올림픽 개최 강행’에 일치된 의견을 보이고 있으며, 이하 그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개최 강행’을 전제로 서술했다.↩
- 백낙청 「세상의 민낯을 본 뒤에 무엇을 할까」, 창비주간논평 2020.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