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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한 장군의 생애와 한국 정치사의 어떤 단면
민기식 전 육군참모총장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
남재희 南載熙
전 국회의원, 노동부 장관. 저서 『진보 열전』 『남재희가 만난 통 큰 사람들』 『양파와 연꽃』 『일하는 사람들과 정책』 등이 있음.
이 글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민기식(閔耭植, 1921~98) 장군의 회고록 『격동의 역사와 나의 시련』(제일문화사 1996)을 주요 참고로 한 것이다. 민장군은 이 책이 많은 논란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명예훼손 소송도 여러건 제기될 것 같아 발행을 취소했다. 그러나 가까운 몇몇 사람들에게는 그 책이 흘러나왔다. 또 나는 그의 중학교 10년 후배로 그가 군에서 퇴역한 후에 자주 그와 술자리를 하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오능균이라는 후배는 나보다도 더 자주 만나고 흉허물 없는 이야기를 들은 듯하다. 이러한 세가지 출처를 종합하여 이 글을 엮었다. (회고록의 발간을 중지한 지 25년쯤이 지났으니 이제 그 내용을 인용해도 무방할 것으로 생각한다.)
만주건국대학을 다녀
민기식은 일본 괴뢰정권 만주국의 최고 명문 국립대학인 ‘건국대학’을 다녔다. 국무총리가 되는 강영훈도 같은 대학 동기생이었다. 건국대학은 6년제로 등록금이 전혀 없고, 학생들은 졸업 후에 고등문관(사무관)으로 채용되었다. 우리의 3·1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육당 최남선은 당시 그 대학의 교수였다. 일제는 조선의 지식인 가운데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을 친일화하는 데 노력을 집중하여 마침내는 그 목표를 달성한 듯했다. 민기식의 기록에 의하면 최남선은 민기식을 사적으로 만났을 때 아주 은밀히 우리 민족정신을 고취했었다 한다.
2차대전 후반에 민기식은 학병으로 징집되어 일본에서 장교로서의 훈련을 받다가 전쟁이 끝나자 귀국했다.
“할 일 없어 군에 입대했다”
민기식은 장군 시절 육군사관학교 측으로부터 ‘장군과의 시간’에 참석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사관생들에게 강연을 하고, 이어 그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는 대화에 참여하여 ‘어떻게 하여 군인이 되었습니까’ 하는 질문에 다음과 같은 요지로 답변했다. “우리 집안은 생활이 넉넉하여 나는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만주에서 제일 좋은 건국대학에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가 일제 말에 학병으로 끌려가 일본에서 장교훈련을 받다가 해방이 되어 귀국했다. 귀국하여 보니 뚜렷하게 무언가 택할 직업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놀고 있던 때에 마침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어 거기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런 식으로 연설을 하고 있자 단하에 있던 육사의 간부가 종이쪽을 올려 보냈다. 펴보니 ‘사관생도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합니까’라는 내용이었다. 이 쪽지를 받아본 민기식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연설을 계속했다. “나는 그렇다 치고 여러분 사관생도들은 국가에서 모든 것을 부담하여 먹여주고 입혀주고 가르쳐주지 않느냐. 여러분은 국가와 국민에게 엄청난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사를 버리고 충성을 다하여 봉사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사형수 서민호 의원 구명
6·25전쟁 중 피난수도 부산에서 당시 국회가 야당의 우세인 탓에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하는 헌법으로는 이승만의 재임이 어렵다고 본 지지정파가 국민직선제로 개헌하려고 하여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났을 때다. 서민호 국회의원이 공무로 전남 순천에 가서 한 식당에 들렀을 때 일행 중 한명이 거기에 있던 군의관 서 모 대위와 시비가 벌어져 서대위가 권총을 한발 발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서의원은 자기의 권총을 뽑아 그에게 일격을 가한 것인데 서대위는 즉사하고 말았다. 그때는 전시여서 국회의원에게도 권총 휴대가 허용됐었다.
서의원은 군법회의 1심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2심 재판장으로는 민기식 장군이 임명되었다. 당시는 대통령 국민직선제를 주장하는 여당파와 그에 반대하는 야당파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였으며, 서의원은 야당 측의 투사였다. 따라서 서의원을 1심대로 사형에 처하라는 압력이 각계로부터 민기식에게 가해졌다. 특히 계엄당국의 압력은 거세었다. 민기식은 양심상 도저히 사형을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고심 끝에 2심 언도 뒤 지리산 속으로 도망쳐 있으려고 식량과 기름을 잔뜩 실은 지프차를 대기시켜놓았다. 그리고 용감하게 서의원에게 8년형을 언도했다. 언도 전에는 압력이 거셌으나 언도 후에는 누그러졌다.
8년형을 산 서민호 의원은 4·19혁명 후 국회의원에 다시 선출되고 부의장이 되었다. 그리고 민기식 장군이 자기 생명의 은인이라고 계속 칭송했다.
곽영주 경무관이 살려줘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가 있을 때 민기식은 부산에 있는 제2관구 사령관이었는데, 선거 부정을 요구하는 자유당 측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자유당의 경남도당은 그를 해임하라고 중앙당에 압력을 넣었고, 마침내는 그의 해임상신서가 경무대로 올라가고 있다는 정보가 육군본부에 있는 심복으로부터 전해졌다(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후 경무대는 청와대로 이름이 바뀌었다). 당황한 민기식은 무작정 서울로 지프차를 몰며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생각했다. 도달한 결론은 조선일보 방일영 사장에게 부탁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조선일보 사장실을 찾았다.
방사장은 관계, 정계, 사업계 등 여러 방면의 거물급들과 사통팔달의 교제 범위를 갖고 있었다. 그는 우선 자기 돈으로 그들에게 무조건 요정에서 융숭한 대접을 하는 것으로 친분을 쌓는다. 그래서 나중에는 ‘밤의 대통령’으로 불리기도 했었다.
민기식의 구명요청을 받은 방사장은 곧 경무대의 곽영주 경무관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 약속을 잡았다. 당시 경무대에는 경무대경찰서가 따로 있고 경찰서장이 있었다. 그러나 경호의 총책임자는 곽영주 경무관이었다. 민기식이 방사장과 함께 곽경무관이 지정한 낙원동에 있는 요정 ‘오진암’으로 가니 거기에는 곽경무관과 함께 연예계 조직을 총책임지며 자유당 정권의 산하조직처럼 만든 임화수도 있었다. 그들은 그날 밤 신나게 즐겼고 그 돈은 민기식이 부담했다.
육군본부에서 올라온 민기식 해임상신서를 곽영주가 자기 서랍 속에 넣어 보류시켰다는 설이 있는데 여하간 곧이어 4·19혁명이 나는 바람에 민기식은 해임을 모면하게 되었다.
민기식의 회고록에는 “자유당 말기 이기붕 씨만 죽이면 이승만 대통령은 산다는 논법”을 언급하며 “그렇다면 이씨 일가족도 자결한 것이 아니라 이대통령의 측근에 있던 곽영주, 임화수 등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라고 말하는 대목도 나온다.
군단장으로 5·16 지지
1961년 박정희 장군에 의해 일어난 쿠데타와 이에 대한 민기식의 대응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쿠데타가 있기 며칠 전 이한림 제1군 사령관은 1군 산하부대 간의 축구시합을 개최했다. 그러나 부정선수가 섞였다는 이의가 제기되어 그 시합은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시빗거리만 남긴 채 끝나고 말았다. 제1군 산하의 제2군단장이던 민기식은 애초부터 이한림과 그리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 육군사관학교가 설립된 다음에는 기수별로 서열이 분명하지만, 창군 당시의 군인들은 만주군 출신, 일본군 출신, 광복군 출신, 기타 신규 입대자 등 복잡한 계파로 이루어져 위계질서가 잡힐 수 없었다. 그래서 계급의 질서가 확립되지 못한 채 얼마간의 혼란이 있었던 것이다.
민기식은 본래 이한림과 서먹한 사이였던데다가 축구시합도 부정선수 시비로 감정 대립이 생긴 터라 기분이 나쁜 상태에서 군단 본부로 복귀했다. 그런데 하룬가 이틀 후에 부관이 ‘서울에서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보고한다. 민기식의 첫 질문은 쿠데타에 대한 이한림의 태도가 어떠냐는 것이었다. 부관이 “사령관께서는 쿠데타에 반대이십니다”라고 말하자 민기식은 “그러면 나는 찬성이지”라고 말했다는 것이 거의 정설처럼 되어 있다. 그 당시 군 장성들 사이에서 장면 민주당 정권의 통치가 그래서 되겠느냐는 불신과 불만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배경도 있다. 박정희 소장으로서는 제1군 사령관이 반대한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그 산하의 민기식 군단장이 즉각 지지를 표명한 것이 큰 뒷받침이 되었다. 그후로 박정희 소장과 민기식 중장의 유대는 굳건해지고 민기식은 육군참모총장으로 승진하는 길이 열리게 된다. 그것도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 강력한 육군참모총장으로서이다.
국방장관과의 알력
민기식이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될 때의 이야기다. 육군본부에 있는 심복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상신서에 참모총장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은 있으나 육군 중장에서 대장으로 승진한다는 내용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같은 신당동에 살고 있던 김성은 국방부장관 집을 새벽에 방문하여 그 사실에 대해 항의했다. 그 결과 대장 진급도 함께 이루어졌다. 김장관은 해병대 출신이다. 해병대의 병력 규모는 육군에 비해 아주 적어, 육군에서는 해병대 출신을 경시하기도 했다. 여하튼 그런 사정도 있고 하여 민기식 육군참모총장은 당시 장관실에 들어갈 때 절대로 손을 쓰지 않고 발로만 문을 여닫았다고 한다.
장군들의 부인에게 욕설
조선일보의 방일영 사장이 각계 거물들을 요정에서 대접한 것은 돈 낭비나 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필요할 때 무언가 부탁하기 위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교제로 덕을 보았다는 평이다.
민기식이 참모총장이 되었을 때 사장에서 회장이 된 방일영이 민 장군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 말했더니 아침 식사나 같이하자고 해서 그 집으로 갔다. 식사 중에 민기식의 부인이 ‘장군 부인들이 와 있으니 나와서 아는 체나 하고 가라’라고 말한다. 민기식이 불응하자 부인은 장군 부인들을 식사하는 방 문 앞에 서 있게 할 터이니 아는 체나 하라고 말한다. 조금 있다 아침 식사하는 방 앞에 장군 부인들이 오고 문이 열리자 민기식은 그 부인들을 향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상스러운 말을 퍼붓는다. 방회장은 그후에도 그때의 이야기를 전할 때는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나중에 내가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공군 장군 출신인 유정회(유신정우회) 국회의원과 잡담하던 중 그때의 이야기를 했더니 그 의원은 나보고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했다. 그의 설명은 진급 운동을 하는 장성의 부인들이 돈을 갖고 상납하러 온 것인데 마침 신문사 회장에게 그 광경을 목격당하자 상스러운 욕을 해댐으로써 신문사 사주에게는 욕한 기억만 남고 뇌물을 바치는 일에 대해서는 깜박 잊게 하려는 술책이 아니었겠는가 하고 해석한다.
『삼국지』 같은 난세가 되다
이 절은 회고록의 원문 그대로를 옮긴다.
“박정희 의장의 2·27 선언 후 이틀쯤 뒤에 박병권 국방부장관은 “박 의장은 정치에서 손을 뗐다. 그가 이끈 혁명은 잘못이다. 군은 절대 정치에 개입하면 안 된다. 국민은 눈을 똑바로 뜨고 군을 보고 있다”라고 기자들에게 발표했다. 후에 들려오는 말에는 박 장관은 이범석 장군을, 김종오 총장은 김도연 씨를 밀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몇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다. 건국 초기 이범석 장군을 가장 존경하는 면면은 박병권, 강영훈, 김응수, 최영희, 유해준, 김익열 등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박 장관이 이범석 장군을 추대하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로 생각한다. 또한 앞당겨 얘기하게 되나 6·3 사태 때 김종오 총장이 박 의장에게 ‘김종필 사살’을 건의하게 된 연유도 이때부터 그를 제거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막강한 계엄사령관
1963년 한일협정이 타결되었으나 그 협정이 굴욕적이라고 학생사회에서나 야당 일각에서 강력한 반대운동이 일어나 정권 입장에서는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고는 사태를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 계엄사령관은 물론 당연직으로 민기식 육군참모총장이었다. 데모 사태가 어지간히 진정된 때에 계엄사령관은 대통령을 방문하여 계엄령 해제 시기를 상의했다. 박대통령은 이제 바로 계엄령을 해제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민기식은 얼마간 계엄령을 더 유지하자는 의견을 말했다 한다. 그 이야기를 할 때가 매우 긴장된 순간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부정선거에 별 하나 더
이 절은 회고록의 원문 그대로를 옮긴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 후보가 당선되기를 기대하며 내 나름으로 최선을 다했다. 즉 군인의 신분으로 박 후보 당선을 위해 앞장섰던 것이다. 나는 여러번 일과 후 육군본부 강당에 전 장병을 집합시켜놓고 “윤 후보가 당선되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니 박 후보를 찍어야 한다”라고 소신을 갖고 역설했다. 육본에 근무하는 병사들은 비교적 학력이 높았기 때문에 부작용이 나타날 것으로 짐작했으나 그들은 세태를 읽고 있어 투표 결과는 좋았다.
그러면서도 예하 제1 및 제2군은 각 사령관의 영역을 침범할 우려에서 개입하지 않았으나 김상복 제2훈련소장에게는 “중장으로 승진시킬 테니 박 후보를 찍도록 교육하라”라고 지시했다. 당시 대통령선거에서 군인의 신분으로 선거운동을 한 자는 나밖에 없었던 것으로 안다.
개표하는 다음 날 새벽 3시, 나는 책상정리를 마치고 형무소에 들어가 입을 옷을 준비시켰다. 나는 박 후보가 쉽게 이길 줄 알았는데 예상을 뒤엎고 서울, 경기, 강원, 충남북에서 참패했을 뿐만 아니라 군에서마저 패했던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나로서는 불과 2년 전에 피 흘려 마감한 3·15 부정선거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경남북 및 전남북에서 이기고 있었다. 특히 전남의 바닷가에서 많은 표가 나와 박 후보 당선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여담이나 그후 박 대통령은 전남 출신 장성들에 대하여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군에서도 육군본부와 논산 제2훈련소에서 5천표, 5만표의 몰표가 나왔다. 군에서는 내가 나서 선거운동을 한 부대를 제외하곤 모든 부대가 소신껏 투표했던 것이다.
선거결과는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보다 15만표를 더 얻어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선거 후에 이런 일도 있었다. 선거가 끝난 어느 날 김상복 훈련소장이 아예 중장 계급을 달고 나의 사무실에 나타났기에 “어찌된 일이냐. 그 계급장은” 했더니 그는 “총장께서 중장 승진을 약속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대들듯이 말해 난처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을 찾아가 “실은 제가 약속했었습니다”라고 상황을 설명했더니 “그런 일도 있었습니까”라고 하여 그대로 진급되었다.”
국방부장관이 못 되다
육군참모총장을 마친 민기식은 국방부장관이 되지 못했다. 나는 그 이유로 그가 말은 올바르게 하나 그 표현방식에 있어 얼마간 세련된 구석이 없었다는 데 원인이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국방부장관은 군 전체를 상대로 말하여야 함은 물론 국민 전체에 대해서도 설득력 있는 발언을 해야 하며 야당 의원이 있는 국회에서도 아주 정확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민기식의 말은 내용은 올바른 것이나 그 표현방법이 세련되지 않아 특히 국회에서는 흠 잡힐 우려가 많았다. 그래서 육군참모총장에서 퇴임한 후 그의 거취가 충주비료 사장 임명으로 낙착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후 그는 고향인 충북 청원군에서 공화당 공천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공격조원을 만진 이유
박정희정권 시절 어느 국회의원들의 회식자리에서 최영희 의원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6·25전쟁이 휴전협정으로 끝나고 얼마 후의 일이다. 그때만 해도 북한군이 몇십명씩 남으로 침투하여 우리 군인들을 살상하고 다시 북으로 도망칠 때다. 우리 군은 그 침범행위를 정전위원회에 제소하여 해결하는 것을 귀찮게 여겨 똑같은 방법으로 북한군을 응징하는 방법을 택했었다. 최영희 사단의 바로 옆에 있던 민기식 사단에 북한군의 침범이 있자 그 사단에서도 보복조를 결성했다. 출발에 앞서 사단장의 격려 순서가 있었다. 격려차 나온 민기식 사단장은 보복조 10여명에게 모두 허리띠를 풀고 바지를 내리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직접 한 사람 한 사람씩의 사타구니를 만지고 다녔다. 모두 마치고 난 다음에는 “됐어. 가서 잘 싸우고 와” 했다. 모두 밑부분의 것이 축 늘어져 있어 그는 겁먹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안심했다는 이야기이다.
최영희, 민기식 두 전 참모총장 사이에 얽힌 일화도 있다. 공화당의 사무총장이 국회 국방위원장에 최영희 의원이 내정됐다고 출입기자들에게 귀띔한 것을 당시 신문사에 있던 내가 듣고 저녁나절 민의원에게 전해주었다. 그러자 그는 “그렇게는 안 될걸” 하더니 청와대를 방문하여 국방위원장은 지역구 출신인 자기가 맡아야지 어떻게 비례대표 출신인 최의원에게 맡기느냐고 이의를 제기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다음 날 국회 국방위원장에 민기식이 발표되었다. 얼마 후 최영희는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었으니 재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장준하와의 인연
민기식이 국회 국방위원장으로 있을 때 장준하도 같은 위원회 의원이어서 둘은 아주 절친하게 되었다. 둘이 너무나도 친하게 지내니까 장준하 부인이 둘이 의형제를 맺으라고 했을 정도란다.
둘은 모두 일제 말 학병 출신이다. 민기식은 학병으로 끌려가 일본에서 장교훈련을 받다가 해방이 되었다. 장준하는 학병으로 중국 대륙에 끌려갔다가 탈출, 우리 임시정부 쪽으로 가서 광복군이 되었다가 해방 후 귀국했다. 그리고 『사상계』라는 월간지를 발행하면서 반 이승만,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 섰던 사람이다.
그 장준하가 휴일에 등산을 갔다가 산에서 추락사했다. 일부에서는 권력 측에서 그를 떠밀어 추락사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하고 여러가지 유언비어가 나돌았었다. 그러나 민기식은 장준하가 책만 읽고 글만 쓰는 문약한 체질로 보았다. 운동신경이 전혀 발달하지 않은 둔한 인물로 본 것이다. 그의 이런 판단은 자연추락사설에 가깝다 하겠다.
민기식과 하우스만 대위
민기식은 술을 좋아했다. 애주가이지 알코올중독은 아니었다. 주로 자기 집에서 마셨는데 나도 스무번 넘게 초대를 받은 것 같다.
물론 밖에서도 마셨다. 지난날 그의 부하였던 보안부대장과 식사하는 자리에 나도 불러 합석한 적이 있으며, 한국 육군 창설의 산파역을 맡았었다는 하우스만(J. H. Hausman) 대위가 은퇴 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를 호텔에 초청하여 환대하는 자리에 나를 동석시켜주기도 했다. 하우스만 대위는 중령까지 진급하고 퇴역한 것으로 아는데 한국에서는 그를 모두 하우스만 대위로 기억한다.
민기식은 회고록에서 스티븐 브래드너(Stephen Bradner)도 언급하며 그의 역할이 하우스만과 비슷한 것으로 썼는데 그것은 착각인 것 같다. 브래드너는 민간인으로, 미8군사령관에게 한국 정세에 대해 조언하는 정보 고문이었다. 그는 박신자 선수와 결혼하여 유명해지기도 했다. 브래드너는 아주 오랫동안 근무했기에 민간인으로서 미 육군 장성급으로 승진하기도 했으며 용산미군기지 안에 있는 그의 관사에서 축하연을 베풀기도 했다.
브래드너는 합동통신 문화부장 박석기와 절친이었는데 나는 박석기의 소개로 그를 알게 되어 함께 여러번 대폿집을 돌아다녔었다.
군에 있을 때 민기식이 미 고문관을 골탕 먹인 이야기가 재미있다. 그는 고문관의 여러가지 건의들이 귀찮았다. 그래서 한번은 안동소주 비슷하게 독한 소주를 준비하고 마늘, 풋고추, 파, 고추장으로 안주를 마련하여 그에게 술대접을 했다. 예의상 술을 약간은 안 마실 수 없고 마시자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그후로는 고문관의 충고나 건의가 확 줄어들었다는 이야기이다.
박정희 평생 집권은 안 돼
민기식 의원이 국방위원회에서 경제과학위원회로 옮기고 난 후의 일이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큰 파티를 열고 일본 언론의 특파원도 몇몇 초청했다. 신문사에 있던 나도 초청을 받아 갔더니 경제계 고위관료들과 국회의원 다수가 참석하고 있었다. 일본 특파원을 초청한 것은 일본 『토오꾜오신문』의 주필이 만주 건국대의 동문이었기 때문이다. 『토오꾜오신문』은 비교적 작은 신문이어서 몇몇 작은 신문들이 연합하여 서울에 한 사람의 특파원을 파견하고 있었다.
민기식의 집은 단층집이지만 지하실을 넓은 연회장으로 꾸며놓아 30여명의 손님들을 맞이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양동이에 진토닉을 가득 만들어놓고 국자로 잔에 퍼주는 식이었다.
파티가 끝나고 1층 응접실에서 일본 특파원들과 담소를 하고 있을 때다. 그때 민기식이 돌출발언을 하여 나를 놀라게 하고 걱정하게 만들었다. “박정희 대통령, 왜 혼자 평생 대통령을 하려고 해. 안 될 일이지. 야당의 김영삼이 말하는 것처럼 개헌을 해야지.” 나도 놀랐지만 일본 특파원들도 돌연한 그런 발언에 놀랐을 것이다. 나는 민기식에게 자세히 묻기 전에 우선 일을 진화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본 특파원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들, 민의원은 타누끼 가운데서도 늙은 타누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반응을 보려고 짐짓 그런 엉뚱한 발언을 해본 것입니다. 그것을 진짜 발언으로 생각하면 착각하는 것입니다.” ‘타누끼’는 너구리를 뜻하는 일본말인데 일본에서는 이 타누끼를 아주 꾀가 많고 교활한 동물로 취급하고 있으며 늙은 타누끼라고 하면 최고로 교활한 사람을 지칭하기도 하는 것이다. 여하간 민기식의 그러한 발언은 일본 언론에 보도되지 않고 끝났다.
그런데 그의 그러한 발언은 되풀이되었다. 서영희라는 유정회 국회의원이 같은 유정회 국회의원과 결혼하여 자주 그들의 집에 의원들이나 다른 고위인사들을 초청하여 파티를 열었는데, 거기에 참석한 민기식이 전번과 같은 개헌 발언을 다시 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군인 출신의 다른 의원이 중앙정보부에 밀고를 한 듯하다.
민기식은 골프를 치다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다. 그런데 그를 연행하고 아주 당혹스럽게 된 것은 오히려 중앙정보부 쪽이었다. 전직 육군참모총장이며 현역 국회의원인 그를 어떻게 처리할까가 문제였다. 잘못 다루었다가는 국제적으로도 큰 뉴스가 되고 오히려 정권의 입장이 곤혹스럽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기식에게 “그때 술에 만취하여 무슨 말을 한지 모르지요?” 하고 몰아붙였다. 그러나 민기식은 “나 그때 술 얼마 안 마셨어” 하는 대답. 중앙정보부 측에서 계속 과음한 상태에서의 발언으로 몰고 가자 그들의 속셈을 뒤늦게 눈치챈 민기식은 과음했음을 인정하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박대통령에게 사과문을 썼다. “소생 기식은 술에 만취하여 각하에게 불손한 말을 한 것 같습니다.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예 술을 끊겠습니다. 소생 기식 올림.” 대충 이런 내용의 편지였다. 그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박대통령의 지방 순시가 시작되고 충청북도 도정보고회 날짜가 정해졌다. 그 보고회에는 충북 출신 국회의원들이 모두 참석하게 되어 있어 민기식도 참석했다. 도정보고가 끝난 후 박대통령은 국회의원 전원을 속리산에 있는 관광호텔로 불러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가 끝난 후 박대통령과 민기식은 단둘이 술자리를 가졌다. 일제 때 청년기를 지낸 둘은 모두 일본식 주법에 익숙했다. 일본인들은 이른바 ‘하시고 노미’를 한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사다리 음주’가 되겠는데 그것은 저녁에 술을 마시게 되면 적어도 서너 집쯤 옮겨가며 술을 마시는 습관을 말한다. 그런데 속리산 관광호텔에서는 옮겨 다닐 술집이 없으니까 방을 옮겨 다니며 ‘하시고 노미’를 했다는 것이다. 그때 방마다 술상을 다시 차리고.
“카터, 선 오브 어 비치”
미국에서 카터 대통령이 당선되고 그가 주한미군의 대폭 감축을 발표했을 때다. 한국에서는 미군 감축 반대론이 들끓었으며 주한미군 장성들 사이에서도 감축 반대론이 나왔었다. 특히 미8군의 씽글러브(J. K. Singlaub) 참모장은 공개적으로 카터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었다. 민기식은 주한미군 장성들과도 자기 집에서 자주 술자리를 가졌었다. 씽글러브와도 술친구였을 것이다. 한번은 내가 민기식의 초청을 받고 그의 집에 가니 미군 장성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도 참석하라고 해서 같이 마셨는데 미군 장성의 술 마시는 태도에 위압을 느꼈었다.
정동에 있는 미대사관저에서 아마 미군에 관한 어떤 축하파티가 있었던 모양이다. 민기식도 참석했는데, 주한미군 철수 찬반으로 화제가 되자 그는 “카터, Son of a bitch”라고 하여 주변을 놀라게 했다. 그 심한 발언은 국내 신문 일부에도 보도되었다. 나는 민기식의 욕설이 돌출발언이 아니라 여러가지 계산 끝에 나온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정보장교는 문제가 있어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암살되고 얼마 후 신군부에 의한 쿠데타로 보안사 출신의 군인들이 집권세력으로 등장했을 때다. 민기식은 마침 국회의원이었던 나를 불러 “정보계통 출신의 군인들은 일반병과 출신의 군인들과 달라 문제가 좀 있어. 그들과 어울려 정치를 함께하지 말기를 바라네” 하고 충고를 해주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기간이 지나고 다시 만나니 “다시 생각해보니 그들 말고는 달리 정권을 맡을 사람이 없는 것 같아” 하고 태도를 바꾸었다. 그동안에 신군부 측에서 민기식을 회유했다는 소문이 들려왔었다.
6·29 선언 후 김영삼 지지
민기식은 노태우 대통령이 이른바 6·29선언으로 민주화를 하고 전날처럼 대통령선거도 완전 자유경선으로 치른다고 하자 처음에는 김영삼 후보 지지파에 속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정치활동을 포기하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장군과 의원, 누가 높은가
12대 국회 때 이른바 국방위 회식사건이라는 일이 벌어졌다. 육군 안에서 어떤 잘못된 사건이 있었던 모양이다. 육군은 곧 열릴 국방위에서 문제가 될 것을 무마하기 위해 국방위원 전원을 한 요정으로 초청했다. 육군참모총장 이하 모든 참모가 나왔는데 대부분 하나회 소속이었다. 제시간에 참석한 야당 원내총무는 여당의 원내총무와 권익현 의원 등이 불참한 것을 보고 “똥별들만 잔뜩 나오고 여당의 실세들은 나오지 않았다”라고 폭언을 했다. 그래서 야당 총무는 군 측의 집중적인 술공세를 받았고, 얼마 안 있어 만취하여 방 안에 있는 소파에 가서 드러눕고 말았다.
여당의 이세기 원내총무가 아주 뒤늦게 도착하여 미안했던지 바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려 했다. 그러자 참모차장이 마이크를 쥔 그의 목을 잡고 “이 새끼, 이리 와” 하고 야당 총무가 누워 있는 쪽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멱살을 잡힌 이총무는 “아야, 이거 놓아” 하고 말하고, 그 말은 그가 마이크를 잡았기에 크게 울렸다. 이세기라는 이름과 ‘이 새끼’라는 욕설의 발음이 비슷한 것도 문제였다.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국방위원장은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그가 공군 장성 출신이어서 육군 장성들의 위세에 눌린 것 같았다. 나는 10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을 때 육군공수특전여단이 선거구인 강서구 주변에 있어서 당시 사령관이던 박희도 준장과 안면이 있는 사이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있던 그에게 분위기를 잡아달라고 부탁을 했으나 그는 무반응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앞에 있는 유리잔을 들어 앞의 벽면을 향해 던지며 항의했다. 그러자 내 건너편에 앉아 있던 인사참모부장 이대희 소장이 일어나 나에게 발길질을 하여 내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앞에 있던 물수건을 입에 대니 피가 벌겋게 묻어난다. 나는 그 피 묻은 물수건을 갖고 “이렇게 국회의원을 때려도 좋다고 청와대 측에서 말했느냐, 지금 청와대에 가서 따져보자” 하며 곧 밖으로 나가 차를 탈 기세였다.
그러자 군 측이 태도를 돌변하여 나에게 사과를 하고 옆방에 술상을 다시 차려 사과술을 내며 거듭 사과를 했다. 그래서 나도 돌출행동을 용서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사건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지고 여러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참모차장을 즉각 해임, 예편시키고 이대희 소장은 그때 있던 동해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좌천시켰다. 이것이 국방위회식사건의 개요인데 나도 그 사후처리에 불만은 없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얼마 후 육군은 전직 참모총장들을 대접하기 위해 우선 일선 시찰을 시켰다. 민기식이 전방에 갔을 때 이대희로 추측되는 소장이 그에게 뜬금없이 “각하, 육군 소장하고 국회의원하고 누가 더 높습니까?” 하고 묻더란다. 그러자 민기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봐, 그것은 사과하고 배 중에 어느 것이 격이 높으냐고 묻는 것과 같아. 사과는 사과의 맛이 있고 배는 배의 맛이 있어 각각의 격이 있는 게 아니냐. 육군 소장은 육군 소장의 격이 있고 국회의원은 국회의원의 격이 있는데 무슨 그런 질문을 하느냐.” 헌법상, 법률상의 문제를 떠나 그 답변은 즉각적인 응답으로서는 그럴듯한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런 말을 즉석에서 한 것을 보면 민기식은 재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김응수 장군과 강영훈 장군
5·16 쿠데타에 반대하여 미국으로 망명하여 살던 김응수 장군이 일시 귀국했을 때 민기식은 아침 식사를 하자며 그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까닭은 잘 모르겠으나 관계가 전혀 없는 나도 불러 조찬에 동석시켰다. 김응수의 오누이 중 한 사람이 강영훈 장군과 결혼했기에 그들은 처남남매간인데 둘 다 5·16 쿠데타에 반대하고 미국으로 가서 오랫동안 산 셈이다. 김응수의 친동생인 김항수가 나와 서울법대 엇비슷한 기수의 학생이었는데 그는 법대의 영어회화 공부모임에 참석하였을 때 ‘자기 집안은 군인 가족’이라고 몇번인가 얘기했었다. 김항수는 졸업 후 주한 미대사관에 취직하여 거기서 정년까지 근무했다.
삼성가와의 혼사
오랜 후에 민기식 장군 딸의 혼사가 있다고 하여 예식장에 갔더니 신랑은 삼성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의 아들이었다.
미국에서는 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 military-industrial complex)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특히 군인 출신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퇴임 연설에서 군산복합체의 영향력 증대를 경고하면서 그 문제가 더욱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했다. 나는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민기식 가문과 우리나라 일급 재벌인 삼성 가문의 혼사를 군산복합체의 일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 급진적인 이론가들은 그 혼사를 군산복합체의 일단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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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여러번 민기식의 집에서 진토닉 대접을 받았다. 한번은 그가 “우리 집에서 여러번 술을 마셨으니 이번에는 자네 집에 가서 술을 마시세” 하고 내 차에 먼저 올라탄다. 선거구에 있는 우리 집까지는 한시간이 넘는 거리다. 그래서 가까이에 있는 살롱으로 가서 카운터에서 칵테일을 몇잔 대접했다. 그의 대단한 애주와 소탈함은 그가 권력의 자리에 있었을 때도 계속되었다.
그가 중학의 동창회장에 추대되었을 때의 취임연설이 기억할 만했다. “내가 일본과 만주 등을 돌아다녀보았는데 한국은 아주 작은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에서 동창회끼리 서로 뭉치면 이 나라는 잘못되어갑니다. 동창회란, 명단이나 만들어 동창들이 어디 있겠거니 하고 알게 할 정도면 되는 것입니다.” 나는 TK니 PK니 하고 지역별로 뭉치기 시작하던 시대에 매우 뛰어난 명연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신문의 칼럼에 그 연설을 소개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