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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백영서 『중국현대사를 만든 세가지 사건』, 창비 2021

20세기 중국에서 또다른 민주주의를 상상하다

 

 

강진아 姜抮亞

한양대 사학과 교수 canton@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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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대표하는 중국사 연구자인 백영서 교수가 퇴임 후 출간한 첫 저서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현대사의 세가지 사건을 매개로 중국이 어떤 국가를 만들려고 고민했는지, 그 노력은 오늘날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또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를 점친다. 이때의 세가지 사건은 1919년 5·4운동,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건이다. 세 사건은 모두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일어났다. 5·4운동 때에는 베이징의 학생들이 광장을 메웠고, 1949년에는 5·4세대 출신의 공산당 지도부가 그곳에서 건국을 선언했다. 1989년에는 5·4운동 70주년에 5·4정신을 살리겠다며 정부 비판에 나선 학생들이 광장에서 단식을 시작했다. 따라서 비록 첫 문장에서 ‘중국’이라는 주어를 썼지만, 20세기 내내 역사 속 문명제국의 영광과 근대국가 경쟁에 뒤처진 열패감 사이에서 고민했던 지식인, 청년들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저자는 원래 2019년 출간을 겨냥하여 딱 5·4운동 100주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70주년, 톈안먼 사건 30주년으로 징검다리 건너듯 지난 중국의 100년을 회고할 예정이었다고 한다(‘책을 펴내며’). 하지만 독자를 위해 미리 이야기하면, 이 책은 중국현대사 개설서가 아니라, 정말 이 세가지 사건이 어떻게 중국의 100년을 만들었는가를 정치사·지성사의 입장에서 서술한 저서다. 그것도 저자의 중국관과 역사관이 꽉 차게 100년을 해석한, ‘설계된’ 서술이다. 총 3부는 각 사건에 한부씩을 할당하고 간단한 사건 경과를 먼저 개괄한 뒤에는, 고도의 밀도 있는 학술적 분석이 주를 이룬다. 마무리는 각 사건이 한국, 일본, 타이완 등 해외에 어떤 반향을 일으켰는지를 짚어보았다.

저자의 설계에 따르면, 지난 중국의 100년은 ‘민(民)의 결집과 자치의 경험’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의 지난 100년을 혹자는 혁명이 싹트고 성공하는 과정으로 혹자는 근대화를 실현하는 과정으로 보지만, 저자는 이 둘을 대립적으로 보지 않고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론으로 설명하겠다고 선언한다. 두 측면을 한쪽 면만 있는 게 아니라는 식으로 애매하게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중국 100년을 보면 근대화 과정 속에 혁명의 계기가 있고, 혁명의 진행 속에 근대화가 모색되었음을 강조한다. 즉 양자가 상호 융합·모순·충돌하면서 서로를 규정해간 과정이 중국의 지난 100년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읽혔다. 또한 저자는 역사가이지만 한국의 지식인으로서 이러한 ‘이중과제’는 한국사회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묻는 데 필요한 방법론이기도 하다고 본다. 역사가와 운동가의 정체성을 둘 다 추구하는 저자에게 중국 청년들의 운동사와 그 100년은 절호의 소재이지 않았나 싶다.

‘이중과제’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는 것이 ‘어떤 국가를 만들지’ 고민해나간 지식인들, 청년들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5·4운동 당시 서양식 대의주의와 자유주의를 받아들여 서양화해야 한다는 주장과, 앞으로 중국의 전통사상이 전쟁과 파괴를 낳는 서양 근대의 대안 문명이 될 것이라는 지식인들의 논쟁이 있었다. 그런 논쟁을 자양분으로 사상을 배우며 학교제도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던 젊은이들이 5·4운동을 겪으면서 ‘운동’을 알았다. 평민을 발견했다. 그리고 일부는 ‘직업혁명가’로 새로운 직업과 정체성을 찾는다. 이 젊은이들은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이라는 두 당의 새로운 인재풀이 되는데, 특히 중국공산당은 5·4세대의 경험으로 혁명화·정치화된 청년들의 당이었다. 30년도 못 되어 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여 자신들이 꿈꾸는 국가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국가는 공산화가 아닌 ‘신민주주의’라는, 정치적으로는 여러 정당이 연합하는 형태이며 경제적으로는 사유제를 용인하는 혼합경제의 국가였다. ‘인민’의 대표는 ‘각계’라고 지칭하는 사회 각 계층과 직업군을 기준으로 뽑아 새로운 국가 행정체제의 말단에서부터 아래로부터 의견을 수렴하는 정치체제를 지향했다. 저자는 신민주주의의 건국 구상이 비록 3년 만에 단명하지만 ‘신민주주의’라는 중국 나름의 민주주의가 5·4운동 때부터의 국가 및 사회 구상을 잇고 있으며, 50년대 이후에도 복류했다가, 1989년 톈안먼 사건에서 ‘인민대표대회’의 권위를 재소환했다고 본다. 저자는 그러므로 오늘날 중국에서도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이뤄줄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 대안적 국가 형태에 대한 모색이 계속되기를 희망한다. 다만 국가가 씌운 프레임 아래에서가 아닌 진정한 자율적 논의의 결과로 말이다.

이렇게 정리는 했으나 평자로서 저자의 핵심 논의를 1할도 소개하지 못했다. 책 곳곳에서 저자는 국내외 연구자들의 다양한 주장을 디딤돌로 창의적 논의를 펼치는데, 일일이 소개할 여유가 없어 아쉽다. 저자가 사용한 여러 개념어 또한 마찬가지다. 따라서 ‘담론’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꼭 사서 직접 줄을 그으면서 읽어야 할 책이다. 국내외 학계의 사상적 지형도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이 책에서 다룬 중국의 ‘이중과제’로서 근대의 적응과 극복이 어느 정도 평가할 만한지는 논자마다 다를 것이다. 적어도 오늘날 중국은 사회주의 도덕론이 유교의 도덕론 자리를, 고소득의 도시 중산층과 교육받은 지식인 계층이 과거를 준비하는 문인 신사층을 대체한 것에 더 가깝지 않나 싶다. 이데올로기와 엘리트의 체제내화로 초안정적 지배를 달성한 중화제국의 지배 방식과 많이 닮았다. 가끔 자본가, 관료, 지식인 등 엘리트에 대한 솎아내기로 일반 대중들에게는 기득권이 아닌 ‘지고지상(至高至上)’의 도덕적 체현자로, 엘리트층에게는 그들의 권력이 누가 준 것인지 상기시키며 길들이는 퍼포먼스는 더욱 닮았다. 전통사회에서는 도덕론에 의한 단죄가 정통과 이단을 비타협적으로 나눔으로써 힘을 얻었다. 오늘날 중국에서도 ‘인민의 이익’에 부합하는지에 대한 최종 판단은 공산당 정권에 의해서만 결정되며 ‘인민의 적’에 대한 단죄는 초법적이며 위협적이다. 자본주의적 근대극복에 점점 유교사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비단 중국뿐이 아니다. 중국이나 한국이나 부국강병 기준에서 근대적응에 꽤 성공한 오늘날, ‘신도덕론’과 ‘정통-이단’적 구분법이 사상계와 사회를 횡행하는 것은 비슷하다. 평자는 오히려 그 이유가 더욱 궁금하다.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을 둘 다 과제로 생각했던 것은 세계 여느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근대를 수입하고 후발주자의 입장에 놓인 비서구 지역에서는 ‘근대극복’이 국가적 자존심과 정체성을 챙겨줄 수 있었다는 면에서 민족주의적 정서와 맞닿아 있다. 서양의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다른 면이다. 중국이나 한국이나 어느 정도 경제적 근대화에서 따라잡기형 발전이 성공한 후 ‘근대극복’의 목소리가 커진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왜 ‘근대극복’이 전통의 소환으로 동아시아에 나타나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때이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이 책은 역사서라기보다는 사상서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이 책의 핵심적 가치 역시 이 점에 있기 때문이다. 군벌 시대와 국공 경쟁, 중화인민공화국 시기를 관통했던 것은 냉혹한 군사·정치 논리였다. 그러나 책 곳곳에는 피비린내와 포연, 파편 속에서 국민성을 개조해서든 뭐든 대안의 길을 모색하려 애썼던 지식인들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넘친다. 그들의 모색은 건국 초기 신민주주의의 불안한 틀 안에서도 뭔가 실질적인 제3의 민주주의를 발굴하려는 저자의 모색과도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