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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세인 李洗認
동국대 국어국문문예창작과 4학년. 1997년생.
nieceofearl@gmail.com
귀로
나는 걔를 그렇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목소리 큰 여자애,로 기억하게 된다 이 동네에서 아주 흔한 뿔테 안경을 쓰고 꽃무늬 머리띠의 색상을 자주 바꾸는 그애는 수업 때마다 나와 같은 타이밍에 웃는다 석회색 창밖으로 잉글랜드의 비가 내릴 때 내 귀에 들리는 소리가 그애의 웃음소리인지 이 계절이 쏟아지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가끔은 그애의 얼굴보다 예이츠나 엘리엇 같은 사람을 발음할 때의 둥근 손짓이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3개월을 보았고 세미나에서 교수님이 교수가 선생이, 아니 매튜가 그애를 부르는데 나는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지나가버렸으므로 들은 적이 없다 그애가 특별히 반짝이는 것이 아니라 도서관에서 집으로 가는 이층버스에서 내 앞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잊지 못하게 되었다 Sorry, 말하고 좌석에서 일어나는 나를 쳐다보던 옆자리 할머니의 파란 눈동자를 보면서 나는 그애에 대해서 지금 당장 써야겠다고 다짐했는데 그애의 눈동자가 밝은 갈색인지 어두운 갈색인지 갈색마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내가 가장 다양하게 말할 줄 아는 영어 문장은 ‘모르겠다’이고 그럴수록 차츰 그림자와 닮아가는데 내가 정말 그것들을…… 모르는 건가? 나는 가끔 영어보다 새들의 말을 더 잘 알아듣는다 구름이 재빠르게 지나가는 창가 밑에 누워 있으면 내게 친절하던 사람들의 얼굴이 이따금씩 떠오르는데 그애의 무심한 얼굴이 더 보고 싶은 건 왜일까 캠퍼스 언덕의 축축한 풀냄새 때문일까 나는 질문이 늘어가고 아무도 답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아이디어를 공유할 뿐이고 나는 또 모르겠다고 한다 나 네가 되고 싶어, 생각했다가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 모르겠다는 말을 다시 곱씹는다
사이버펑크
쓰레기 만든다 해가 뜰 때 블루베리를 믹서에 가는 소리가 돌아갈 때 못 일어나서 커피 마신다 종이컵 장미에 얼룩지고 플라스틱에는 얼룩 안 진다 플라스틱 씻어서 볼펜꽂이로 쓴다 내 볼펜은 검정뿐이다 책 읽는다 울면서 읽는다 사실 울지 않았다 표정이 없다는 말 진짜일까 주둥이에 눈알에 힘 안 주면 표정 없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없는 인간
쓰레기장은 밤이든 낮이든 입을 벌리고 있다 시트가 터진 부엌 의자가 창밖으로 버려질 때 나는 누구 관절 삐걱대는 소리 BGM으로 깔아놓고 로션 바른다 파우더로 뺨 때린다 제발 정신 차려 이년아 이년아 이번 년에는 나 말고 아무도 나를 이년이라고 부르지 마 그러다가 시인 되면 어떡해
반복되는 구간에서 나는 자주 흩어진다 오사카 니혼바시역 네스트호텔 뒷골목에서 오른다리로는 파워에이드 페트병을 잡고 왼다리로 뚜껑을 돌리는 푸른 까마귀를 본 적이 있다 콸콸 새파란 구름들이 전신주 위로 흘러내리고 화장실 가고 싶지 않아도 오줌 누는 꿈을 꾸겠지 새벽이 되도록 빨갛게 소리 지르는 신호등과 하늘에서 쏟아지는 껍데기 부서진 호두들 시부야에서 쓰타야에서 내가 없는 거리에서
혀 위로 아이스커피를 모아 굴린다 액체도 모양은 있겠지 키라임파이 맛 사랑처럼 나도 모양 있겠지 본 적 없으니까 모른다고 말하는 거다 이 우스운 엘리베이터에서 나는 외국인이 된다 도아가시마리마스 내일 저녁에 산문집 읽었고 베껴 쓰고 싶다 “나는 늦게 일어났다” 지금 나는 표절했다 영화관에서 훔쳐 온 3D 안경 콧잔등에 써본다 세상 좀 납작해지라고
대충 던져 넣은 흰색 물감이 도쿄에 살고 있다 8층에서 공룡이 발을 구르고 컨시어지가 당신에게 미지근한 물수건을 건넨다
인셉션
클루지나포카에서 우리는 타인들에게 각인된다 번데기 같은 버스를 기다리면서 왜 아라비아 숫자는 전세계 공통이어야만 하는지 생각한다 정류장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루마니아어를 스페인어로 착각하고 세비야에서 먹었던 가장 맛있는 음식을 상상한다 녹안과 벽안이 나를 유심히 쳐다보고 나는 이곳에서 가장 전능해진다 나는 저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만 저들은 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초콜릿이 쌓인 거리에서 버스에 올라타자 나는 퍼레이드 마지막 줄 무용수의 치맛단에서 막 떨어져 나온 깃털이 된다 저들이 너를 보고 눈이 빨개질 때까지 웃는다 우리는 저녁 식탁에서 그들이 양배추로 감싼 고기에 포크를 찔러 넣으며 우리의 이야기를 할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어떤 이들에게 평생 기억될 것이다 경험으로 혹은 적대로, 거죽으로, 고문서로, 빨간색으로, 서커스로, 대륙으로,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고 더이상 타인의 눈을 마주치고 미소짓지 않는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드라큘라의 성에서 쏟아져 나온 까마귀떼 얼어서 세 갈래로 쪼개진 햇빛 가로등마다 매달려서 해방을 기다리는 국기와 죽은 개처럼 누워 있는 나무들 터키시딜라이트로 속을 가득 채운 빵을 씹으면서 폐공장의 깨진 유리창에 눈을 감고 손을 넣어본다
축축하고 따뜻하다 누군가의 심장 같다
자화상
자화상은 어떤 방식으로 무너지는가 어린 시절 함부로 연필을 들고 밑그림을 그렸던 전적이 있다 이제 너는 자유의 몸이야 처음 가위에 눌린 날 모르는 남자가 귓가에 속삭였고 이 세상에서 가장 재능 뛰어났던 모범수, 굵어진 손가락으로 첨예한 스케치를 할 수 있는가 컴퓨터용 사인펜을 쥐고 덧그리기 시작한 그림은 온통 검정이고 고딕 양식이다 너를 훔쳐보기 위해 지은 첨탑을 애정으로 명명하자 자화상이 구겨지기 시작한다 셋 둘 하나
나침반은 자기장을 무시한다 핀란드의 흑야 속에서 나는 혼자 무엇을 그리는가 밤은 보라색으로 취해가고 아침은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온통 얼어붙은 나뭇잎 압생트가 질러버린 화염 누구도 없는 거리에서 나는 너의 뒷모습을 닮은 나무 그림자를 손에 쥐고 걷겠지 가끔 그루터기를 기어오르는 불개미가 너 같아서 손등에 울긋불긋한 알레르기가 돋아나도 뜨거운 물로 씻었다 어머니가 기다리는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민트향 껌을 오래 씹는 사람, 그건 내가 되고 싶었던 어른은 아니지만
내가 다 자라고 나서도 나를 나이 먹게 한 것은 너다
핀란드 건축의 역사는 돌로 쓰였으며 나무로 지은 집들은 북유럽의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모두 늙어버렸다 조적식으로 쌓은 아치, 그것을 사랑의 문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자화상은 다시 그려지고 주변에는 너를 사랑하는 친구 너를 시기하는 친구 너를 좋아하는 행인123이 흑연 자국으로 존재한다 왼발을 컴퍼스 삼아 찌그러진 원을 그리면 모두의 얼굴이 낯설어진다 나는 상상한다 전부 엎어져 증발해버린 향수와 만나본 적도 없는 너의 집 고양이와 콧잔등의 솜털과 분홍색 비니를 이 모든 것을 직사각형 케이지 없이도 데리고 갈 수 있는 세계여행을, 손은 있되 돈은 없는 초상화가 혹은 그런 도둑을 꿈꾸는 습작생의 마음으로
양재꽃시장
선글라스 안 끼고 아침 꽃시장에 갔다 지하철 두번 갈아타는 동안 초록과 빨강이 오래된 필름처럼 지나가고 엄마 손을 세번 정도 놓쳤다가 잡았을 때 너무 뜨거워서 팔짱 꼈다 시장 몇바퀴 돌고 잎사귀 속에서 다육생물 구경하고 뭘 사려면 인간이랑 대화해야 하니까 엄마가 대화하고 나는 엄마랑 대화하고
다육이는 물 주면 안 돼요 안 예뻐져요
안 죽어요 그럼?
지금 살아 있잖아요
살아 있는 거예요 지금?
그럼 죽어 있나요
외계인 같은데
장미를 사려고 온 건 아니에요
꽃도 피워요 장미를 닮았죠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이게 꽃 핀 거예요
꽃 핀 거예요 이게?
꽃이 밑으로 자라요
꽃이 밑으로 자라요 왜?
햇빛을 별로 안 좋아해요
이상하네 식물인데도
외계인 닮았다면서요
이상하네 정말 꼭 이거 사야 돼 엄마?
다육이의 세계를 몰라서 그래 네가
엄마는 알아?
가져가실 거면 봉지에 담아드리고요
봉지요? 집이 먼데요
댁이 어디신데요
서울이요
강원도에서 오신 분들도 봉지로 들고 가세요
그 사람들이 꽃을 사러 오나요 서울로?
이런 외계인도 팔리러 오는데 서울로 엄마
외계인 아니라니까
도대체 생명체라고 볼 수 없어
데려가서 키워보면 알아요
예쁜 거 골라봐 뭐 사 갈까 세인아
오백개가 있는데 다 똑같이 생겼어
똑같이 생겼네요 얘랑 얘는
다 다른 종이에요
들었어? 다 다른 종이래 엄마
이런 애들도 물을 싫어한다고요 물 주지 마세요
뭐 줘요 그럼?
아무것도 주지 마세요
선인장이에요?
선인장 아니에요
외계인이에요?
외계인 아니에요
여긴 없네 점핑 돌고래 다육이 같은 건
범고래는 무서워서 싫어 정말 무섭더라 육지에 산다는 거에 감사해야지
바다에 사는 사람도 있던데
그건 죽은 거고
다육이는요 죽은 거 아니에요?
싱싱하게 살아 있어요
사장님이 좀 골라주세요 예쁜 애들 잘 크는 애들
집에 다육이 여덟명을 데려와서 물 안 주고 베란다에 뒀더니 애들이 하얗게 늙어버렸다 3일 참다가 물뿌리개 꺼내버리자 5월 베란다 바닥 흠뻑 적시고 흙 섞인 물웅덩이가
찌그러진 유라시아 지도를 다 그려냈을 때쯤 다육이들이 파랗게 통통해졌다 집에 어린애들이 아홉이나 있어서 좋다고 엄마가 말했고 다육이 물 주러 밤중에 베란다 문 열 때마다 내가 싱싱하게 죽었다 희끄무레한 창밖으로 돌고래들이 헤엄쳐 지나가고 깜빡, 깜빡, 깜빡 보안등 불빛이 살았다가 내 눈 속에서 시든다
심사평
이번 공모 시 부문에는 총 383명이 응모했다. 작품으로 셈하면 1915편으로 예년보다 그 수가 조금 늘었다. 작품을 읽는 동안 심사자들은 자주 놀라곤 했다. 전반적으로 작품의 수준이 높을 뿐 아니라 더러는 개개의 작품에 깃든 열기로 인해 ‘아, 시에 자신의 미래를 걸고 있구나’ 하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심사자들에겐 이를 넘어선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생각, 새로운 화법, 새로운 발성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그런데 그런 작품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대체로는 익숙한 세계에 머물며 익숙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듯 보였다. 어떤 경향을 의식한 듯 특정 시인들의 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나 주제, 전개 방식을 차용한 시들이 다수였는데, 선명한 기시감이 되풀이될수록 아쉬움이 쌓여갔다. 아울러 극적인 상황을 가공하여 자신의 무기력과 지루함을 발산하거나(시는 으레 그런 것이라고 오해하는 것은 아닐까?) 죽음과 같은 무거운 소재를 비극적 자기인식의 매체로 가져와 지극히 표피적 차원에서 소모해버리거나 말과 말, 상상과 상상을 이어가는 ‘놀이’를 거듭하며 결과적으로 단순 나열에 그치고 마는 등의 특징을 계속 확인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시적 기량에 걸맞은 개성과 참신성을 갖춘 작품을 찾는 일은 극히 어려운 것이었다. 대체 왜일까. 잘 쓴 시는 많은데, 좋은 시를 찾기란 왜 이다지도 힘든 것일까. ‘잘 쓴 시’와 ‘좋은 시’의 극명한 차이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되었다. 화려한 외관에 이끌려 그 속을 들여다보면 특별한 무언가를 발견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시를 읽을수록 허탈한 감정이 커졌다. 어쩌면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 없이 (그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은 채로)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서만 무작정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기도 했다.
세명의 심사자들이 전체 투고작을 살피는 데에는 11월 한달여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12월 중순 14명의 작품을 선별, 본심에서 토론했다. 응모작의 수준이 고른지 등을 살펴 최종으로 5명의 작품을 추렸고, 재차 정독과 논의의 과정을 거쳤다. 당연히 심사 과정에서 그 원고들은 모두 무기명이었다. 최종 대상이 된 작품은 「타히티」 외 4편, 「예약석」 외 4편, 「여름나기」 외 4편, 「새가 머리를 조아리는 저녁」 외 4편, 「귀로」 외 4편이다.
먼저 「타히티」 외 4편은 말을 다루는 솜씨로 심사자들을 압도했다. 다만 말을 능숙하게 이어내며 자신의 세계를 거칠 것 없이 펼쳐 보이지만 그 세계의 면면을 자세히 살폈을 때는 특별한 사유의 깊이와 폭을 지닌다고 확신하기 어려웠다. 「예약석」 외 4편은 이미지를 포착하는 독특한 시선과 섬세한 문장으로 눈길을 끌었다. 그럼에도 시편들을 관통하는 쓸쓸함이 결과적으로 시종 무력하게 부유할 뿐이라는 것이 취약점으로 지적되었다. 「여름나기」 외 4편은 일상의 아이러니를 다루는 방식이 탄탄하고 유연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새롭지는 않았다. 본연의 것이라기보다 기성 시들을 학습한 결과라는 생각이 심사자들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산문적 문장을 습관적으로 구사한다는 점도 걸리는 대목이었다. 「새가 머리를 조아리는 저녁」 외 4편은 날카롭고 또렷한 주제의식이 믿음직스러웠다. 「환상통」 「쿠마펜 펠렛」 등에 담긴 일상의 공포가 생생한 울림을, 때로는 섬뜩한 기분을 자아냈다. 그러나 이들 시편 또한 기시감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주제의 심도에 비해 직조된 내용이 다소 단조롭다는 인상도 있었다.
마지막까지 심사자들의 손에 남은 것은 「귀로」 외 4편이다. 이 시편들이 첫눈에 심사자들을 사로잡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반복해서 읽을수록 그가 일군 세계와 발성을 신뢰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는 오롯한 자신의 것이 아닌가! 기성의 것을 기웃거리지 않고, “도둑을 꿈꾸는 습작생” 혹은 “없는 인간”으로서의 자신 안으로 깊숙이 침잠해가고자 하는 화자(들)의 태도에서 그런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화자는 수시로 타지를 떠돌며 외부 세계의 풍경과 현상을 포착하는데, 그 안에서 자신에 대한 탐색이 거듭된다는 점이 좋았다. 이를테면 심사자들이 주목한 「귀로」는 먼 이국에 자신을 위치시킨 뒤 이방인으로서의 고독을 과장 없이 그려낸다. “영어보다 새들의 말을 더 잘 알아듣는다”라는 고백과 함께 “네가 되고 싶어, 생각했다가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 모르겠다는 말을 다시 곱씹는다”라는 이야기가 자연스러운 여운을 주었다. 익숙한 것에 기대는 대신 더욱 확장된 시공간으로 독자를 불러들이려는, 외적 요인을 자유롭게 충돌시키려는 시도 자체에 대한 지지도 있었다. 당선자에게 아낌없는 축하와 격려를 보내며, 그가 앞으로 써낼 미래의 시를 얼른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 또한 밝힌다. 부디 더 넓고 깊은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주기를.
본심에 올랐으나 아쉽게 당선하지 못한 이들은 물론 대산대학문학상을 믿고 자신의 소중한 작품을 보내준 응모자 모두에게 감사와 응원을 전하고 싶다. 시를 쓰는 순간순간 여러 실패와 좌절을 겪게 되겠지만, 실은 그것이 실패와 좌절이라기보다 훗날 웃으며 고백할 귀한 추억임을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지금의 간절함을 잃지 않고 쉼 없이 자신을 단련해가야 할 것이다.
박소란 이병률 임승유
당선소감
나는 언젠가부터 시를 찾지 않기로 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너무 많았으므로.
내가 도대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는데. 이대로 껍데기만 핥다가 죽는 것은 아닐까.
세상을 안다고 착각한 흔적만 남고, 나는 없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에 대해서는 누가 연구해줄 것인가?
누가 기꺼이 나의 세계로 뛰어들 것인가?
나는 나를 먼저 찾기로 했다.
그러자 세계가 밝아졌다. 내게 필요했던 것은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어떻게 쓰고 고치는지가 아니라 새로운 나 자체를 찾아나가자. 아니, 굳이 새로울 것도 없다. 나는 항상 내가 낯서니까. 내가 할 일은 나를 발견하는 것. 발견한다면 들여다보는 것. 들여다본다면 표현하는 것. 나라는 인간의 수만 갈래 중 열 갈래라도 잠시나마 붙잡아 그려볼 수 있게 되는 것.
그 찰나를 포착했던 순간에 느꼈던 희열.
그래서 나의 글과 현실 사이에 있어주었던 모든 존재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영국 대학 종강일에 아주 우연히, 버스 앞자리에 앉아 있었던 그애가 고맙다. 내 이름을 똑바로 발음하려고 했던 매튜가, 나를 쳐다본 할머니가 고맙다. 기숙사 방 창가에 찾아와주었던 이름 모를 새가 고맙다.
오사카를 함께 여행했던 친구들이 고맙다. 따뜻한 식탁을 내어주었던, 비스트리차의 단란한 가족이 고맙다. 도쿄에서, 양재꽃시장에서, 그리고 지금도 나와 함께 있는 엄마가 고맙다. 나는 네가 고맙다.
수많은 나와 수많은 네가 모여서 내가 되었다.
더 먼 곳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준 심사위원분들에게. 언젠가 내게 멋진 말을 해주었던 사람들에게. 한번쯤은 나와 마주쳤던 모든 세계에게 감사를.
나는 계속해서 나를 찾아나갈 것이다. 세상을 만날 것이다. 하고 싶은 짓을 실컷 하고 하기 싫은 짓도 잔뜩 해서 이 끝 모를 여정 속에서 내가 사랑할 새로운 존재들을 찾아내겠다.
세상이 우리를 부른다. 시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무엇을 맞닥뜨려도 좋으니 우리는 달려나가자.
이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