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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재난과 고립을 넘어, 전환의 상상으로
팬데믹 시대의 목소리를 함께 듣는 일
김태선 金兌宣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불가능과 공동체」 「밀레니얼 세대 작가의 삶」 등이 있음.
kimloup@naver.com
1. 코로나19 속에서 ‘우리’를 다시 쓰기
코로나19 확산 초기 한국에서 성공적인 방역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데에는 “민주적 시민성이 높은 사람들, 수평적 개인주의자들”1로 불린 시민들의 참여가 큰 역할을 했다. 정부의 방역지침을 공동의 일로 여기며 자율적으로 이행하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황정아는 촛불혁명에서 이어지는 시민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며, 이를 ‘우애’의 실현으로 이해한다. 나아가 코로나19라는 “비상한 상황에서 해결을 곧 대안으로 만드는 협동적 창조가 무엇보다 절실하다”2고 주장한다. 이는 백영경이 담론적 실천으로 제시한 ‘커먼즈’(commons), 즉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정치적 주체로 자각하는 가운데 공적 공간을 변화시키려는 노력3이 팬데믹이라는 ‘비상한 상황’에서 절실한 요구로 다가오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송종원 역시 촛불혁명과 코로나19에서 시민의 대응을 “우리에게 생존은 물론이거니와 존엄과도 직결된 시민적 주체성에 새롭게 눈뜨게 만든 사건”이라 규정하며 시인과 시민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살핀다. 둘의 만남을 매개하는 것으로 송종원이 제안하는 개념은 백낙청의 「시민문학론」(1969)에서 제시된 ‘사랑’으로, 이는 “시인과 시민 사이의 상호주체적 관계”이자 “현실의 관계들을 재조정하고 변화시키려는 열정과 비판 속에서 획득할 수 있는 무엇”이다. 시인과 시민이 ‘사랑’을 통해 만나는 일은 “타자의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책임감”과 함께 “자신의 삶의 조건에 구속되지 않고 그 너머의 삶을 꿈꾸는 주체의 형상”을 제시하는 연대와 협력을 수행하는 일이며, 이를 “공동의 언어 속에 안착시키는 협동 과정”이다. 송종원은 팬데믹 상황이 “‘사랑’을 다시, 지속적으로, 발명할 것을 요구”한다고 전한다.4
하지만 신형철은 「시민문학론」에서 시민의식의 동의어로 제시된 ‘사랑’의 자리에 “지금 우리가 ‘우리’로서 그 자리에 다른 단어를 써넣어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일 수 있을까”5라며, 오늘날 시와 시민을 함께 사유하는 일에 있어 ‘사랑’과는 다른 말이 필요하다는 물음을 던진다. 이 물음의 배경에는 오늘날 ‘우리’라는 이름을 가르는 균열에 대한 문제의식이 자리해 있다. 신형철은 촛불혁명 전후로 일어났던 강남역 살인사건과 ‘미투’ 운동 등의 과정을 겪으며 ‘우리’라는 이름에 균열이 드러났다는 데에 초점을 두며 오늘날 “문학의 주어는 다시 ‘나’로 되돌아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때의 ‘나’는 “‘시민’이라는 이름의 ‘우리’에 대한, 이탈할 수도 충성할 수도 없는 그 집단에 대한 항의로서의 목소리”6라는 점에서, 송종원이 2000년대 시와 정치에 관한 논의 가운데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 했던 “어떤 결속도 거부하는 심미적 개인주의”7로서의 ‘나’와는 다르다는 점을 새겨야 한다.
신형철이 전하는 ‘우리(시민)’의 균열은 소수적 삶의 목소리를 다수적인 것이 봉쇄하는 데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하며, ‘우리’가 현재 놓여 있는 조건과 상황을 살핌과 더불어 다시 쓰일 것을 요청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를 다시 쓰는 일8은, ‘우리’를 찢는 것들을 고려하는 일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우리는 자유로운 개인들이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을 보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표출되는 확진자를 향한 혐오정서를, 그리고 누군가의 비대면 일상을 지원하기 위해 필수노동자들이 처하게 되는 불평등한 상황 등을 함께 보았다. 코로나19 극복이라는 미명 아래 희생당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한 시인은 “이렇게 밝은 빛 아래서도 누가 버려지나”라고 묻는다.
손을 구석구석 씻는다
손가락 날을 샅샅이 느낀다
손가락이 찢어지고 있다 물이 손을 찢으려고 한다
한 마을을 희생하기
한 사람을 희생하기
한 걸음을 희생하기
한 절벽을 한 능선을 희생하기
한,
한 가지라고 믿어 버리기
여기까지 오려고 손을 씻은 건가
물에 얹힌 빛의 무게와 빛의 질감에 기대
입을 연다
바닥으로 물방울이 떨어진다
빛이 나를 사랑하려나
드디어 오늘이려나
이렇게 밝은 빛 아래서도 누가 버려지나
—김복희 「희생」 전문(『문학들』 2020년 겨울호)
「희생」에서 손을 씻는 일은 코로나19 방역 과정과 그에 잇따른 일련의 상황들을 연상케 하는 알레고리로 쓰이고 있다. 누군가에게 방역 과정에서 일어난 일은 단순히 손을 씻는 일 정도의 감각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그러나 “손가락이 찢어지고 있다 물이 손을 찢으려고 한다”라는 말처럼 누군가는 손을 씻는 일로 비유된 일련의 움직임에서 살이 찢어지는 고통과 공포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전염병은 인종과 계층을 가리지 않고 전파된다고 하지만, 그것과 함께하는 재난의 아픔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찾아오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선 다수의 안전과 일상을 위해 “한 마을”과 “한 사람”, 그리고 “한 걸음”이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희생하기”의 대상으로 표현된 것들 중 ‘절벽’과 ‘능선’은 어떤 끝의 지점과 그 사이를 잇는 윤곽을 이르는 것들로, 이는 삶 자체와 그 이야기를 가리키는 기호들일 터이다. 희생으로 내몰린 것들은 계산 가능한 숫자들이 아니라 이렇게 한 사람의, 한 마을의, 그리고 한 걸음이라는 구체적인 움직임의 삶과 서사들이다. 그러나 “한 가지라고 믿어 버리기”라는 말처럼 다수의 안전과 경제 회복이라는 미명 아래 이들의 목소리는 침묵된다. “빛이 나를 사랑하려나”라는 물음에서 볼 수 있듯 이러한 과정에서 희생당하는 것은 비단 “한 가지”로 추상된 타자의 삶만이 아니라 그에 의존하며 안전과 일상을 영위해야 하는 ‘나’와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우리’를 가르는 균열은 또한 ‘나’에게 가로놓여 있는 것이기도 하다.
김복희의 시는 이렇게 우리의 안전을 위해 희생되는 삶과 그 삶의 이야기가 봉쇄되는 움직임을 전한다. 시인은 “물에 얹힌 빛의 무게와 빛의 질감”이라는 구체적인 감각, 실감에 기대어 희생의 영역으로 버려진 이들의 서사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연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밝은 빛 아래서도 누가 버려지나”라고 물으며, 말하기를 박탈당한, ‘우리’로부터 방기된 이들의 삶에 목소리를 돌려주고자 한다. 이렇게 「희생」에서 화자인 ‘나’는 “여기까지 오려고 손을 씻은 건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고통을 외면한 채 안전한 곳에 머무르려는 ‘우리’라는 이름에 항의의 목소리를 전한다. 이는 ‘우리’를 거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다시 쓰기’ 위한 ‘나’의 투쟁이다. 비록 주어진 상황에 맞서는 움직임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타자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느끼는 가운데 우리에게 가로놓인 균열을 넘어서려 한다는 점에서, 김복희의 시는 ‘나’에 고립되는 심미적 개인주의와는 다른 움직임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2. 노동의 현장과 ‘우리’를 가르는 책임의 문제
팬데믹 시대에 ‘우리’를 가르는 ‘균열의 선’ 중 하나는 코로나19 확산 초기 방역을 성공적으로 이끈 주역으로 평가되며 ‘수평적 개인주의자들’이라 명명된 우리의 시민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수평적 개인주의자들’의 시민성 이면에는 ‘민폐’에 대한 개인주의적 민감성 또한 함께하고 있었다. 서보경에 따르면 “감염병 대유행 상황에서 ‘적어도 남에게 민폐는 끼치지 말아야지’라는 말은 타인에 대한 배려를 나의 편의보다 우선시하겠다는 윤리적 태도를 뜻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폐를 끼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앙갚음의 정서를 내포하고 있다.”9 이는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에토스의 연장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저 팬데믹 상황에 국한되는 독특한 현상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삶의 미시적인 영역까지 침투한 신자유주의는 세계의 모든 영역을 시장처럼 조직될 필요가 있는 경쟁 공간으로 구성한다. 또한 시민들에게 자립성과 경쟁력을 갖춘 기업가적 주체가 될 것을 요구하며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강조한다.10 문제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주장처럼 “독립적 개인이 되기 위한 ‘책임’의 요구에 따르면 따를수록, 더욱더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더 큰 불안정함을 느끼게 된다”11는 점이다.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문화는 자율성을 보장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인으로 하여금 무한한 경쟁의식을 내면화하도록 하여 상호의존성의 토대를 망각하게 한다. 팬데믹 상황이 대면케 한 진실 중 하나는 우리의 일상이 그동안 ‘비대면’해왔던 여러 돌봄노동과 필수노동에 의존해왔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의 희생에 기대어 우리의 안전과 일상이 유지되는 구조가 지금까지 이어져온 까닭은, 그러한 노동을 수행하는 이들에게 차별적으로 할당된 조건들을 개인의 책임 문제로 여기게끔 시민들의 품행에 각인되어 있는 신자유주의 문화와 합리성에 기인한다.
신자유주의 합리성에 대항하는 가치로서 ‘목소리’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닉 콜드리(Nick Couldry)에 따르면, 자기 자신의 삶을 목소리로 내는 일은 개인적인 말하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의존하는 다양한 관계와 함께 스스로의 경험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이야기로 표현하는 서사 과정이다. 이 과정은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데에 있어 목소리의 발화가 근본적이고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태도와 행동을 포함한다. 그러나 문제는 신자유주의 문화가 만드는 “목소리를 체계적으로 부인하는 삶 형태”이다. 목소리를 부인하는 삶 형태가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곳은 오늘날 계약직, 임시직, 일용직과 같은 불안정노동의 현장일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시장 기능 외에는 유효한 인간조직의 원칙은 없으며, “노동을 자본 최적화의 개인적 과정으로 재해석”하는 동시에 개별 노동자를 “잠재적 보상(임금)을 위해 자신의 자본(노동기술)을 최적화하는 자”로 규정하며 상품과 같은 존재로 만든다.12
(…) 주임은 속도 모르고 느려 터져 속 터진다 고래고래 지른다 땀에 쩔어 윗도리 벗어재낀 장정들 입 모아 목 타들어간다 말해도 상자는 이리저리 옮겨지겠지 이국 청년들 안취엔, 안취엔 읊으면 그래, 그래 취하려면 멀었다 누워버리면 갈 곳도 없다
소매 접어 올리고 바짓단 추켜잡고 접고 무릎까지 접는다 형씨, 그거 알아? 테트리스, 뭐 하다 이곳까지 오셨어? 저거 봐라 무너지겠네, 형씨, 오락실도 안 가보셨어?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물어본들 아나 물 한 모금 마시고 오라 해라 넘어가겠다
머리 돌아간 선풍기 날개 달고 돌고 수레 끄는 사람들 돌아버리기 전에 먼지바람 일고 무너지고 그는 화물 꾸러미에 깔려 일어날 수 없다 화물차는 달리고 싣고 나른다 컨베이어 벨트는 쓰러진 그를 흘려보낸다 분류되면 옮겨지고 수레에 싣고 실리고 그를 짐짝 사이에 잠시 낑가 놓는다 벨트 가동되면 벨 소리 징하게 울린다 미친 듯이 밀려온다 달려들고 돌고 돌고 분류하고 분류되고 쌓여 있는 상자들 육면체 모서리 구겨지고 짜부라지고 주소지 불명이라 한켠으로 내동댕이쳤다 (…)
—이용훈 「신수동 수화물 터미널」 부분(『문장웹진』 2020년 2월호)
이용훈의 「신수동 수화물 터미널」은 컨베이어벨트의 속도에 맞춰 쉴 틈 없이 자신의 노동력을 투여해야 하는 불안정노동자들의 모습을 전한다. “뭐 하다 이곳까지 오셨어?”라며 삶의 이력을 묻는 목소리도 있지만, 일분일초가 자본으로 환산되는 현장에선 그 이야기를 말하거나 들을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건 “형씨, 그거 알아? 테트리스,”라는 비유로 전하는 효율성의 강조이다. 노동자는 효율적이고 최적화된 자본으로 취급되며 과중한 노동을 요구받는다. 이곳에서 사람은 쓰러져도 상자가 무너져서는 안 된다. 결국 “먼지바람 일고 무너지고 그는 화물 꾸러미에 깔려 일어날 수 없다”. 산업재해가 발생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쓰러져도 “화물차는 달리고 싣고 나른다”. 현장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 컨베이어벨트는 계속 돌아가고 화물은 “미친 듯이 밀려온다”. 쓰러진 ‘그’는 컨베이어벨트에 의해 흘려보내지는 “짐짝”으로 취급된다. ‘그’가 ‘이국의 노동자’라면 “주소지 불명”의 상자처럼 “한켠으로 내동댕이”쳐질 뿐이다. 여기서 노동자는 이름도 호명되지 못하고 삶의 서사도 차단당한 채 컨베이어벨트의 속도에 맞춰 자신의 노동력을 투여해야 하는 자로 존재할 것을 요구받으며 언제든 다른 이로 대체될 불안정한 삶에 놓여 있다.
이용훈 시의 화자는 냉소적인 관찰자에 머물러 있지만, 그만큼 현장의 다양한 목소리들을 담아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불안정노동자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묘사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경제적 합리성에 의해 목소리가 가로막힌 이들의 삶을 듣고 말하며, 이들에게 목소리를 돌려주는 일을 수행한다. “이국 청년들 안취엔, 안취엔 읊으면 그래, 그래 취하려면 멀었다 누워버리면 갈 곳도 없다”라는 대목에서 이용훈의 시는 ‘안전’이라는 말을 둘러싼 ‘불화’13의 지점을 포착해낸다. 이주노동자들의 ‘안취엔’이라는 목소리가 ‘안전’을 말한다는 사실을 알아들으면서도, 이를 ‘술에 취하는 일’로 잘못 들은 척 외면하는 장면은 안전을 개인의 책임 문제로 축소하는 경제적 합리성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시적인 차원에서 은밀히 작동하는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혐오, 그리고 배제를 문제적인 것으로 드러내며 쟁점화한다. 이렇게 이주노동자들의 ‘안취엔’은, 그 말을 알아들으면서도 목소리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보고자 하지 않았던 우리로 하여금 보도록 하는 동시에 그 목소리에 응답하도록 촉구하는 호명의 기능을 수행한다.
김경인의 「올해의 슬픔」은 “지하철의 스크린도어와/쉴 새 없이 죽음을 돌리는 컨베이어벨트”와 같은 슬픔들이 “요즘은 다 표준화되었으니까”라는 말처럼 단일한 척도로 계산되며 조장되는 모습을 노래한 시다. 표준화라는 단일한 척도는 삶의 다양한 목소리를 가로막으며 “피와 분노와 고통의 농도가 제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계산 가능한 이해관계로 추상화한다. 「올해의 슬픔」 가운데 택배 배송기사가 처한 장면을 살펴보자.
어제 보낸 슬픔이
오늘 도착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더군
배송하던 사람이 갑자기 과로사한다 해도
고객님, 오늘은 제가 장례 중이어서
유령이 대신 배송 완료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김경인 「올해의 슬픔」 부분(『문장웹진』 2021년 1월호)
“배송하던 사람이 갑자기 과로사한다 해도” “배송 완료”는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효율성만을 중시하는 사회 시스템은, 배송기사를 회사에 고용된 노동자가 아닌 개인사업자로 규정하며, 개인에게 무한한 경쟁과 책임을 요구한다. 그 결과는 시에서 죽음과 슬픔의 양산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올해의 슬픔」에서 이 문제는 회사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만 있지 않다. 시에서 “양해 부탁드립니다.”라는 목소리가 향하는 곳은 택배를 이용하는 소비자인 우리 자신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표면적으로는 ‘개인의 책임’을 이행하지 못한 데에 따른 사과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자신과 같은 불안정노동 계층이 겪는 재해와 열악한 노동조건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이면에 포함하는 목소리이다. 노동자를 사회라는 거대 기계의 부속으로 여기며 어떤 상황에서도 “정확하게” 작동할 것을 요구하는 우리에게도 ‘올해의 슬픔’과 무관하지 않은 책임이 있다는 걸 이른다. 이렇게 김경인의 시에서 “양해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은 우리를 부르는 호명의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 목소리를 듣도록 하며 공동의 문제에 관한 사유와 응답을 추동하게끔 한다. 이 지점에서 “그러니 나는 이제 나 없는 슬픔에도/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는군”이라는 시의 마지막 언술은 희생의 구조에 연루된 ‘나’의 무력함을 드러내지만, 또한 ‘나’로 안주하며 고립되는 일에서 벗어나 슬픔에 동참하고 연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3. 공동의 움직임으로서 듣기
“듣는다는 것은 귓속의 미로에서 소리가 사방으로 돌아다니게 허락하는 것이며,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거꾸로 그 길을 되돌아서 그 소리를 만나는 것이다.”14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의 말처럼, 듣기는 단순한 수동성에 머무르지 않고 능동적으로 타자의 서사를 ‘나’의 내면으로 받아들이며 참여하는 일, 그리고 타인의 삶 안으로 들어가 함께 여행하는 일이다. 문제는 목소리를 전하려는 이들에게 그 소리가 가닿도록 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안희연의 「나의 투쟁」에서 ‘나’는 고통의 목소리가 외면당하는 현실을 넘어서는 방법을 고민한다. “이곳으로 저곳을 옮겨 오는” 일, 바로 이것이 시의 투쟁이다. 여기서 안희연의 시는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15을 실천하는 단계에 이르고자 한다.
엔젤농장의 주인인 그는
이곳으로 저곳을 옮겨 오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온도라고 설명한다
반으로 갈린 핑거라임의 속살이 붉다
나는 생각에 잠긴다
기를 수 없는 것을 기르려면
물속에 잠긴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려오려면
(…)
안전한 곳에 있으면 안전한 사람이 되겠지
이불 속 악몽을 악몽의 전부라 여기며 살겠지
하지만 기를 수 없는 것을 기르려면
(…)
겨울에서 겨울로
더 가파른 겨울로
양을 몰고 가는 상상을 한다
늑대의 목에 달린 방울을
미래라 부르는 사람이 되려고
주저앉은 뜀틀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그래도 나는 사랑한다
—안희연 「나의 투쟁」 부분(『릿터』 2020년 6/7월호)
“이곳으로 저곳을 옮겨 오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온도”라는 말처럼, “기를 수 없는 것을 기르려면/물속에 잠긴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려오려면” 차가운 이 세계에 “핑거라임”의 붉은 “속살”이 연상케 하는 따뜻하고 살아 있는 온도가 필요할 것이다. 문제는 “뜀틀을 뛰어넘는 법은 단순한데/왜 번번이 뜀틀에 주저앉고 마는 걸까”라는 말처럼 그 일을 수행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차가운 곳에서 “보일러를 틀고 물을 끓”이듯 편안하고 안전한 방법으로 ‘이곳’에 안주하려는 일에서 비롯한다. “안전한 곳에 있으면 안전한 사람이 되겠지/이불 속 악몽을 악몽의 전부라 여기며 살겠지”라며 누군가의 고통을 “티브이” 너머의 일로만 간주하는 일은 일상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할 테지만, 상호의존성16을 망각한 채 ‘나’의 작은 세계에만 갇힌 채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한다. 고립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불 밖으로, ‘나’의 바깥으로 나아가는 일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기를 수 없는 것을 기르려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것으로 바꾸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시인은 “겨울에서 겨울로/더 가파른 겨울로/양을 몰고 가는 상상을 한다”. 따뜻하고 안전한 곳에서 안주하는 이들과 함께 냉혹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추운 곳에 자리한 이들에게 다가가는 움직임을 모색하는 것이다. 앞서 ‘이곳’으로 옮겨 오고자 하는 ‘저곳’으로 제시된 “물속에 잠긴 사람들”은 세월호참사의 희생자와 그 유가족들을 연상케 하지만 또한 그 아픔을 외면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킨 이들을 이르기도 한다. 고통의 목소리를 듣는 일, 그리고 듣도록 하는 일은 ‘나’의 안온함을 뒤흔들기에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신자유주의 문화는 고통조차도 그 개인의 책임으로 삼으며 ‘우리’를 개별화된 주체로 만들기도 하였기에, ‘이불’ 밖으로 나오게 하는 일은 불가능한 임무처럼 보인다. 따라서 ‘나의 투쟁’은 “번번이 뜀틀에 주저앉고 마는” 것과 같은 수많은 실패를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시인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험난한 길에서 보는 풍경을, 시인은 “그래도 나는 사랑한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안희연의 시는 우리 사이에 놓인 균열을 넘어서는 일을 모색하며 공동의 장을 구축하고자 투쟁한다.
안경에 입김이 서린 채 흘러내리는 마스크를 붙잡고 아이들은 아픈 이야기를 듣는다.
요즘 귀가 아파요. 숨도 차요. 벗으면 안 돼요?
저는 마스크를 끼고 수업을 한 건 처음이에요.
온통 처음인 친구들을 앞에 두고
훗날 너희도 말할 수 있겠지.
아주 나이가 들어서
나 때는 마스크를 끼고 수업을 했는데 말이야.
그러면 딱 너희만큼의 애들이 그럴거야.
거짓말하지 마세요.
어떻게 마스크를 끼고 수업을 해요.
이러고 아이들은 방독면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단다.
그때 우리는 다 같이 웃었다.
—김소형 「나 옛날 사람인가봐」 부분(『현대문학』 2020년 3월호)
코로나19 확산 초기 한 교실, 아이들은 “요즘 귀가 아파요. 숨도 차요. 벗으면 안 돼요?”라며 마스크 쓰는 일의 어려움에 관해 이야기한다. 아이들의 목소리는 선생님을 향한 것이지만, “흘러내리는 마스크를 붙잡고 아이들은 아픈 이야기를 듣는다.”라며 듣는 이의 자리에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사실을 전한다. 아이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는 가운데 또한 다른 아이의 이야기를 함께 듣는다. “내가 듣는 타자의 목소리들은 나로 하여금, 내가 말하기 안에 들어간 채로 ‘듣는다’는 점에서, 이미 나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자리한 존재를 관통하는 언어에 몰입케 한다. 타자와 나 자신은 소리로 된 말의 현전 안에서 함께 얽힌다.”17 돈 아이디(Don Idhe)에 따르면 이렇게 타자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나’의 모든 경험에 침투하며, 이러한 경험은 항상 ‘상호주관적’이다. 이 점에서 이미 모든 말하기는, 그에 앞서 타자의 목소리를 듣는 다성성(polyphony)의 경험에서 비롯되며, ‘나’의 존재가 이미 타자에게 연결되어 있고 항상 서로의 존재를 나누는 공동의 참여 가운데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하지만 “온통 처음인 친구들을 앞에 두고/훗날 너희도 말할 수 있겠지.”라며 시에서 전하는 미래는 밝지 않은 것 같다. “어떻게 마스크를 끼고 수업을 해요.//이러고 아이들은 방독면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단다.”라는 말로 묘사된 미래는 오늘의 재난이 앞으로 더 큰 재난으로 반복될 수 있다는 두려운 전망을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어두운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도 “그때 우리는 다 같이 웃었다.”라고 하는 반어적 상황이 이어진다. 어쩌면 “방독면을 쓰고 있을” 모습이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여겨져서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웃을 수 있는 까닭은 무엇보다 “아픈 이야기를” 나누는 공동의 경험에서 그 아픔을 넘어서는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픔과 같은 슬픔이라는 수동의 정서는 역량의 감소를 일컫는다. 그러나 아픔을 표현하는 일은 자신의 삶과 존재를 드러내는 능동적 행위이다. 그 아픔을 듣는다는 건, 고통에 처한 이의 목소리가 발화될 수 있도록 긍정하는 일이다. 듣기라는, 서로의 삶과 존재를 나누는 과정은 고립에서 벗어나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도록 하는 가운데 개인과 공동체의 역량을 증대하는 능동적 변용을 이끌어내어 기쁨을 산출한다.18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일은 또한 서로에 대한 책임감의 토대가 되며, 이는 문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 해결을 개인의 몫으로 미루지 않고 함께 길을 모색할 수 있게 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첫 시집 『ㅅㅜㅍ』(문학과지성사 2015)에서 김소형 시의 ‘나’는 전망이 부재하는 세계의 고립감을 노래했으나, 최근 발표작들에서의 ‘나’는 고립된 심급으로 머무르지 않고,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연대의 움직임을 모색하고 있다.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죽어가는 사람들」(『문학3』 2021년 1호)에서도 “나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죽어가는 사람을 떠올렸다”라며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움직임으로 ‘듣기’를 제시한다. 시인에게 듣기란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태어난 누군가의 이야기”를 ‘나’의 안에 새기며 “우리는 홀로 있어서는 안 된다/죽는 순간에도/곁에 있어줘야 한다”는 책임을 이행하는 일이다.
이렇게 팬데믹 상황에서 시인들이 내보이는 ‘책임’은 신자유주의 문화에서 개인에게 부과된, 자기 자신을 향한 ‘책임’과는 방향성을 달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타자의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책임은 타자를 향한 ‘나’의 윤리로 전환되며, 고립된 것으로 여겨졌던 개인들로 하여금 서로가 연결되었다는 감정을 갖게 한다. 이처럼 듣기는 고통의 목소리에 담긴 부름에 응답하는 일이며, 말하는 이에게 ‘나’의 신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이다.
4. 끝없는 대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
“가까운 미래,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다양한 신종 감염병이 중복 유행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감염병 인류』의 저자들은 감염병 유행과 같은 재난의 상황이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고 경고하며 “공동체의 붕괴를 막고 더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과 광범위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주문한다.19 이를 위해선 앞서 살핀 불안정노동의 삶 외에도 돌봄, 사회적 차별을 받는 정체성과 취약계층, 전지구적 자본화 과정이 만들어낸 기후위기 등 ‘우리’가 온실에 머무르기 위해 비대면해왔던 목소리들을 듣는 일이 중요하다. 그 어느 때보다 “진실과 오랫동안 비대면해온”20 우리를 반성하고 사회가 배제해왔던 목소리들을 듣는 일로 ‘우리’라는 공동의 자리를 다시 구축해나가는 일이 요구되는 지금이다.
우리 사회와 개인들의 내면에 공고하게 자리 잡은 “삶을 능력에 따라 줄 세우는 구조”21는 재난에 대한 취약성과 고통을 개인의 책임으로 한정하며 우리로 하여금 ‘나와는 무관한’ 문제로 여기게끔 한다. 이러한 구조는 오늘날 고통의 목소리를 가로막는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두기로 돌봄노동이 잠시 멈추게 되었을 때 우리가 깨닫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우리 모두가 돌봄과 무관하지 않은 상호의존적 존재라는 점이다. “돌봄과 무관한 인간은 없다. 무관한 척 살도록 허용하는 부정의한 구조가 있을 뿐이다.”22 부정의한 구조에 틈을 내기 위해선 그 구조에 희생당하는 이들이 내는 고통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이야기가 ‘나’의 삶과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에게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배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팬데믹 상황을 인식하는 가운데 시를 쓰는 일은 ‘우리’에게 가로놓인 ‘균열의 선’을 살피는 가운데 그에 대응하는 방법의 모색과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나’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라는 이름에 던져진 항의는 ‘우리’를 부정하거나 거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수가 획일적인 목소리로 소수의 목소리를 봉쇄하는 일에 맞서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에서 배제된 목소리를 듣는 가운데 이를 공동의 장에 다시 들리게 함으로써 ‘우리를 다시 쓰는 실천’을 수행하며, 촛불에서 이어지는 시민성을 갱신하는 가운데 이행하고자 하는 충실성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렇게 배제된 목소리와 함께하려는 노력은 ‘선택하지 않은 공거’와 ‘상호의존성’의 인식 및 그 긍정에서 비롯한다.
이 글에서 살핀 시편들에서 듣기의 과정과 함께 공통적으로 엿볼 수 있었던 ‘책임’의 이행은 윤리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며 목소리를 봉쇄하는 신자유주의 문화에 맞서는 대항품행으로서, 시장의 질서와는 다른 공동의 움직임을 구성하고자 하는 정치적 이행이기도 하다. “윤리적 책임감은 윤리적 반응성을 전제로”23 한다는 점에서, 책임의 이행을 정초하는 ‘듣기’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움직임에 있어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타자의 목소리, 특히 고통을 듣는 일은 타자의 삶에 참여하며 ‘나’를 개방하는 가운데 서로가 의존하는 ‘연결된 존재’라는 걸 느끼고 배우는 과정이다. “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만 하고, 그다음에 상상해야만 한다.”24 공감에 머무르지 않고 그다음으로 나아가는 일을 상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와 ‘우리’에게 가로놓인 균열을 소통 가능한 것으로 전환할 수 있으며,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처로 만드는 게 아니라 재난을 극복하는 힘이 되게끔 한다. 이를 위해 오늘날 일상의 회복이라는 미명 아래 울려 퍼지는 방역과 경제 회복의 구호에 봉쇄된 목소리들을 듣는 일이 중요하다. “숫자로만 집계되는 피해에서 얼굴을 읽어내고 목소리를 들어야 할 때다.”25 그 목소리를 통해서 우리는 그동안 비대면해왔던 진실과, 그리고 팬데믹 이후를 긍정할 수 있는 길과 만날 수 있다.
‘우리’의 바깥으로 배제된 고통의 목소리를 공동의 장에 기입하는 일은 그 아픔을 도구적으로 전시하는 일이 아니라, 목소리가 전하는 삶의 고유함과 대체 불가능함을 들으며 다양성과 차이를 긍정하는 가운데 ‘나’의 삶과 관계 맺도록 하는 노력과 함께해야 한다. 스스로를 공적 공간에 변화를 가져오는 정치적 주체로 자각하며 타자와 함께 연대하는 일 역시 ‘듣기’라는 상호인정과 우애의 움직임에 의해 이루어진다.26 공동체는 동일한 정체성으로 유지되는 집단이 아니라 타자의 목소리, 특히 다수성에 의해 억압받는 고통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에 응답하는 끊임없는 과정, 서로에게 감응하며 ‘우리’를 끊임없이 다시 써가는 과정의 이름이다. 이렇게 아픔을 듣는 일과 함께하는 말하기로서 시의 목소리는, 독자에게도 타자를 향해 ‘나’를 열어 서로의 삶과 존재를 나누는 과정에 참여케 하며, 함께 공동의 장을 만들어가는 이행을 도모한다. 타자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함께 다시 말하는 일, 즉 끝없는 대화로 이루어지는 공동의 과정은 재난의 시간을 넘어 삶을 긍정하는 방법들을 모색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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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관율 「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인의 세계’: 모두를 위한 자유 편」, 『시사IN』 666호, 2020.6.23.; 황정아 「팬데믹 시대의 민주주의와 ‘한국모델’」, 황정아 외 『코로나 팬데믹과 한국의 길』, 창비 2021, 31면에서 재인용.↩
- 황정아, 같은 글 42면.↩
- 백영경 「복지와 커먼즈: 돌봄의 위기와 공공성의 재구성」, 『창작과비평』 2017년 가을호 28면 참조.↩
- 송종원 「시인과 시민, 어떻게 만날 것인가」, 『창작과비평』 2020년 겨울호 19~24면 및 33면 참조.↩
- 신형철 「시적 시민성의 범주론: 감정, 의문, 행위」, 『창작과비평』 2021년 봄호 365면.↩
- 신형철, 같은 글 343면.↩
- 송종원, 앞의 글 21면.↩
- 양경언의 “‘우리’를 다시 쓰는 실천”이라 표현한 대목에서 가져왔다. 양경언 「우리, 살아 있는 언니들의 시」, 『창작과비평』 2020년 겨울호 37면 참조.↩
- 서보경 「감염과 오명, 보복하지 않는 정의에 대하여」, 미류 외 『마스크가 답하지 못한 질문들』, 창비 2021, 42~43면.↩
- 미셸 푸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오트르망 옮김, 난장 2012, 224~26면 참조.↩
- 주디스 버틀러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김응산·양효실 옮김, 창비 2020, 25면.↩
- 닉 콜드리 『왜 목소리가 중요한가』, 이정엽 옮김, 글항아리 2015, 1장 및 63면 참조.↩
- 랑시에르(J. Rancière)의 개념인 ‘불화’(不和, mésentente)는 서로가 같은 이름으로 이르는 걸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 사이의 갈등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A가 말하는 것을 B가 “명료하게 알아들으면서도” A가 B에게 말하는 “대상을 보지 못하”는 상황으로, A와 B 사이의 “공통적 대상의 현존이나 부재에 관계한다”(강조는 저자). 자크 랑시에르 『불화』, 진태원 옮김, 길 2015, 17~19면 참조.↩
-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김현우 옮김, 반비 2016, 284면.↩
- 안희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창비 2020.↩
- 주디스 버틀러는 ‘상호의존성’이라는 용어를 두고 “어떤 아름다운 공존의 상태”나 “사회적 조화”와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어떤 차원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전한다. 이는 ‘나’의 존재가 타자의 삶에 연루되어 있으며 서로에게 의존한 가운데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삶의 조건이며,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던 이들의 생명을 보존해야 할” ‘공거의 윤리’이기도 하다. 주디스 버틀러, 앞의 책 175~77면 및 218~19면 참조.↩
- Don Idhe, Listening and Voice: Phenomenologies of Sound (2nd Ed.),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007, 118면.↩
- ‘능동’과 ‘수동’, ‘정서’와 ‘역량’ 등 스피노자의 개념에 관해선 스티븐 내들러 『에티카를 읽는다』, 이혁주 옮김, 그린비 2013, 333~52면 참조.↩
- 박한선·구형찬, 『감염병 인류』, 창비 2021, 315~21면 참조.↩
- 송경동 「비대면의 세계」, 『창작과비평』 2021년 봄호.↩
- 미류 「우리는 서로 책임질 수 있을까」, 미류 외 『마스크가 답하지 못한 질문들』 27면.↩
- 전희경 「감염병과 약한 자들의 페미니즘: 불안을 마주하는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하기」, 김은실 엮음 『코로나 시대의 페미니즘』, 휴머니스트 2020, 96면.↩
- 주디스 버틀러, 앞의 책 162면.↩
- 리베카 솔닛, 앞의 책 157면.↩
- 미류, 앞의 글 25면.↩
- 백영경, 앞의 글 같은 곳 및 닉 콜드리, 앞의 책 197~98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