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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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검붉은 기억의 대지에서

제주4·3의 현재적 의미

 

 

허영선 許榮善

시인, 제주4·3연구소 소장.

저서로 『제주4·3을 묻는 너에게』, 시집 『뿌리의 노래』 『해녀들』 등이 있음.

ysun6418@hanmail.net

 

 

4·3, 일흔세해 너머의 기억

제주도는 73년의 기억 너머에 있다. 단 한발의 총에 맞아 죽는 사람들은 차라리 행복했다고 기억되는 사람들의 땅. 이유도 모르고 죽어가야 했던 사람들의 땅. 검붉은 기억의 섬이다. 해방공간 분단을 원치 않았던 죄로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 사람 3만여명이 희생되었다. 4·3으로 잃어버린 제주의 마을 130곳. 4·3의 가장 가혹한 시간이었던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까지 중산간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키보다 높은 눈더미를 짐승처럼 넘어야 했다. 한라산 곳곳엔 이름도 지어주지 못한 채 떠나보낸 아이들과 굶주려 죽거나, 행방불명되거나, 함께 죽어간 혈육들의 비애가 떠다닌다.

섬은 까맣게 타버렸다. 화산재의 황량한 섬은 폐허의 전장처럼 검은 핏자국이 스며든 얼음땅이 되었다. 기억도 재가 되면 사라져야 마땅한 줄 알았다. 사람씨, 풀씨마저 절멸한 대지 위로 다시는 꼼지락거리는 것들이 없을 줄 알았다. 허나 직접 4·3의 불바다를 건넌 제주 사람들에게 4·3의 기억은 끝내 타지 않았다. 차마 인간의 눈으로 보아선 안 될 것들을 봐버린 사람들과 살아남은 자들은 그날들을 어떻게 견디고 살아냈는지 몸소 보여준다. 이 처연과 황홀의 모순된 땅, 제주도는 그런 섬이다.

그럼에도 어느 귀퉁이에선 여전히 인간의 흔적을 품은 대숲이 쉬이익 소리를 낸다. 박쥐가 서식하는 한라산 기슭 피난지의 크고 작은 동굴에도 그 생존의 옹기 파편들이 아직도 남은 온기로 웅크리고 있다.

1948년 11월, 그날 이미 인간들이 낸 화염에 죽은 줄 알았던 선흘마을 후박나무에도 연두가 펄럭이고 있었다. 더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저 불에 타다 만 나무는 몸에 동굴을 파놓은 채 성성했다. 바닥까지 기생하는 생명들이 긁히고 옹이진 몸을 위로하는가. 248명의 무덤이 된 서귀포 정방폭포는 비통의 당사자임에도 오늘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얀 포말을 긁고 있다. 2021년 제주도는 그런 섬이다.

 

행불인 묘역에서 ‘무죄’를 고하다

“살은 녹고 뼈는 삭아버린 세월입니다. 이제나 올 건가 저제나 올 건가. 올레 어귀 바람소리에도 문 열고 바라보던 칭원한 세월이었습니다. ‘웃샤쓰(윗셔츠) 두벌만 보내줍서. 얼마어성 나가짐직 허우다(얼마 안 있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형무소 우편엽서가 마지막으로 영영 이별이 될 줄 누가 알았습니까. 그보다 더 억울한 것은 영령님들에게 덧씌워진 범죄자 낙인이었고, 저희들 유족 역시 연좌제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얼마나 발버둥을 쳐야 했겠습니까. 이제 4·3특별법 개정이란 단비가 내리고 ‘수형인 무죄’라는 판결을 이뤄냈습니다.”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묘역의 4월, 굵고 떨리는 목소리의 문장이 묘역 사이를 지나 푸른 하늘을 향하고 있다. 호남지역 여러 형무소에서 국가폭력의 희생양이 되었던 망자들을 향해 유족들이 고유제를 올리고 있다. 하늘에서라도 자유로운 영혼이길 바라는 산 자들의 마음이 그곳에 닿았을까. 얼굴조차 아득하다는 혈육들이 울먹였다.

여기선 ‘강군옥의 자(子)1’ ‘이(李)명미상’ 등으로 새겨진, 태어나던 순간 모든 것을 잃고 사라진 존재들도 만난다. 어디서 죽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는 사람들. 어느 날, 어느 곳이 마지막이었는지 돌아올 수 없던 그날을 모르기에 여기선 대부분 생일이 제삿날이다. 아버지 나이의 갑절을 넘긴 혈육들이, 평생 트라우마에 젖은 눈동자들이 여기로 온다. 스물에 떠난 당신을 기다린다는 아흔셋 백발 아내도 만난다. 잿빛 표석 위로 붉음이 터진다. 가녘으로 피어난 붉은 동백이 노란 목젖을 드러내며 묻는다. 무엇으로 진실을 정의할 것인가, 어디에서 당신들의 행방을 찾을 것인가.

어느 표석에 엎드린 일흔세살의 아들은 말을 삼킨다. 젖은 눈이다. 농사만 짓던 아버지가 무슨 죄명이 있었겠냐며 4·3특별법 개정안으로 수월해진 재심을 청구하지 않겠다고 했다. 너무나 사무치는 이름 아버지, 평생 눈 닫고 귀로만 들어온 아버지, 아들의 출생을 알 리 없는 아버지라 했다. 사진 한장 남겨놓지 못하고 형무소로 떠났던 아버지의 얼굴을 보려면 네 얼굴을 들여다보라고 했던 이웃 삼촌들의 말씀을 어려서부터 달고 살았다. 그에게 아버지는 환상 속의 이름일 뿐이다.

 

73년 만의 재심 판결, “피고인 무죄”

4·3 73주년인 2021년은 제주 사람들에게 역사적인 해다. 희생자 배·보상과 특별재심, 추가 진상조사 등을 담은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4·3특별법) 개정안이 2월 26일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했다. 이어서 3월 16일 제주지방법원은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다. 이날 하루 종일 판사는 불법 군사재판으로 육지 형무소로 끌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수형 행불인1 등 335명에 대한 무죄판결을 내렸다. “피고인 각 무죄!” 빨간색을 없애는 데 73년의 시간이 걸렸다.

“기막히죠?” 법정의 판사가 말했다. 피고인은 이미 하늘에 있고, 지상의 법정에는 피고인들을 대리한 혈육들이 나와 앉았다. 법정엔 사상도 없었다. 오로지 어떻게 그 야만의 시대가 있었는가를 말하고 있을 뿐. 판사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 얼마나 추웠을까요?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이제는 조금 편안하셨으면 좋겠어요.” 장찬수 부장판사의 따뜻한 위로가 더 서러웠다. 그 한마디에 끝내 여든여섯살 딸의 비애가 터졌다. 법정은 그야말로 산 자와 죽은 자의 장이었다. 백발의 혈육들은 이미 그 광기의 시대, 어린 눈으로 목격했던 그날을, 평생 떠나지 않는 잔혹했던 그날들을 증언하였다.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만나러 죽을 때까지 바다로 갔다던 해녀 어머니는 정말 거기서 아들을 만났던 걸까.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깊은 말들은 뒤엉키고, 꺾어지고, 넘어가지 못하여 속으로만 흐르는 파도처럼 법정을 흔들었다. 그 말들은 어떤 상상도 뛰어넘는 현실이었다. 4·3은 일생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치명적인 부호다.

한 여인의 말이 꽂힌다. “글쎄, 무죄라 하면 막 기쁠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네. 명예회복만 되면 좋을 줄 알았는데 왜 이리 가슴이 아리는지……” 기분은 풀렸으나 뭐라 할 수 없이 헛헛한 가슴, 그것이 4·3의 현재다.

 

그날 이후, 산 자의 조각들

처참한 죽음들을 직면했던 그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진다. 살다보니 이런 날이 오긴 왔다고 감격해하는 일흔아홉살의 딸, 그가 법정에서 한 말이다. “생후 8개월 된 남동생을 업고 토벌대를 피해 달아나던 어머니가 총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남동생이 죽은 엄마의 젖을 빨았습니다. 저는 4·3이 끝나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언니들을 따라다니면서 김매러 다녔습니다.”

밥 한 숟가락만 먹고 죽었으면 좋겠다던 다섯살 여동생이 끝내 밥 한 숟갈 못 떠먹고 죽었다는 늙은 언니는 지금도 밥숟가락만 보면 그 기억이 떠나지 않는다. 시커먼 비누가 감자떡으로 보여 입에 넣을 뻔했다는 여인, 아버지의 ‘빨간색’을 없애려고 여군으로 자원입대해 숱한 매를 맞았다는 여인, 죄 없이 옥살이하다 풀려났지만 빨갱이 소리 듣는 것이 죽기보다 싫어서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는 아흔둘의 여인. 산 자들의 이러한 한없는 말들은 기록으로 살아나야 한다.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가 ‘폭도’가 되었고, 태어나면서 ‘폭도’가 되어버린 아이도 생겼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임산부가 발가벗겨진 채 학살당한 장면은 잔혹함의 극치였다. 젖이 퉁퉁 불은 수용소의 젊은 엄마는 “빨갱이 새끼에겐 젖도 주지 말라”는 말에 떨어야 했다.

열살 소녀의 기억은 아직도 현재다. “우리 이모 딸이야. 열아홉살. 군인들이 신랑 어디 갔냐 할까봐 머리를 올렸다가 풀었어. 근데 배가 나와 있으니까 임신했다고 무릎 위에 나무를 걸쳐놓고 양쪽에서 발로 밟았어. 남(나무) 끊어지는 소리가 나더라고. 나중엔 쏘았어. 마을 사람들 다 있는 앞에서. 눈은 막 왔어.”

토벌대의 명령에 따라 해변마을로 소개(疏開)했을지라도 남자가 없으면 여성들은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희생을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은 감시, 도피, 구금, 고문, 학살 등 폭력을 겪거나 목격해야 했고, 4·3 이후 가장이 되었고, 생활고와 연좌제, 이산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한 팔순의 아들은 어머니가 죽고 젖 굶어 죽은 동생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아직도 시달린다 했다.

 

총 맞아 죽는 것이 행복하겠다던 아이들

“아직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있다면/견디어 낸 시대보다도/더욱 참혹한, 부서진 기억./그것을 돌이켜 보는 눈동자인지도 모른다.”(김시종 「아직도 있다면」 부분, 『광주 시편』, 푸른역사 2014)

모든 것을 쏘아도 기억은 쏘지 못했다. 질긴 그 기억은 죽어야 끝날 터. 이렇게 산 자들의 기억투쟁은 제주4·3의 현재진행형이다. 특히 어린아이들의 기억 속에 그것은 강력한 접착제처럼 붙어 떨어질 줄 모른다.

아흔살 할머니가 된 박기하의 기억은 눈만 감으면 그날이다. “총소리가 팡팡 나가니까 위로(산으로)만 다 도망쳤지. 민오름 앞으로. 사람이 다 위로만 달리니깐 우린 소나무밭에 들어갔어. ‘어머니 엎드려요 엎드려요’ 했어. 탁 엎드리는 순간 어머니 등으로 총알이 날아오고, 그 총알이 가슴으로 나오면서 피가 콸콸이야. ‘어머니, 어머니’ 해도 조용. 벌써 죽었어. 그냥 그 소나무밭에 묻고 울면서 집에 왔어. 우리 할머니가 그래. ‘울지 마라. 우리 다 그렇게 죽을 거 아니냐’ 했어.” 그에게 “하루짱아, 우리 어떻게 총 맞아서 죽을까. 총 맞으면 편할 텐데……” 하던 열아홉살 친구는 끝내 산에서 총을 맞고 죽었다. 살아남은 박기하는 눈만 감으면 꿈속에서 도망치고 있는 자신을 본다.

“학교 가는 길에 따발총이 바바바바 했던 밭이 있어. 자기가 총 맞는 거 모르잖아. 아구, 저렇게 총 맞는 사람은 행복하겠다고 생각했어.” 1942년생 조은숙. 그는 지금도 짓누르는, 이 기억과 산다.

 

여전히 배제된 자들, 기억투쟁과 현재성

공식적인 4·3 추념식이 끝나고서야 조용히 위패봉안실에서 홀로 절 올리는 여든의 딸이 있다. 아무도 없는 시간, 아버지 위패가 빠진, 다른 가족들 위패 앞에 그가 한잔의 술을 올리며 기도를 한다.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오빠, 우리 다음 세상에 만나면 재미나게 살아요. 이승에서 더 해드릴 게 없어 미안합니다.” 남편이 말했다. “밤마다 저 사람이 돌아누워 우는데 못 보겠어요.” 산에서 잠시 내려왔던 젊은 아버지는 자식이 보고 싶어 보리밭에 들었다가 이웃의 밀고로 붙잡혔고, 가족들도 학살당했다.

“아버지가 무슨 빨갱이라고, 희생자로도 올리지 못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말이 없습니다. 그것이 젤 억울해요. ‘한라산에서 추워서 어찌 살았을까’ 그 생각에 평생 가슴 아파 못 살아요. 아침밥 준비하던 할머니를 향해 토벌대가 들이닥쳤어요. 난 살고 싶은 마음으로 맨발에 눈 위로 도망쳐 살았어요.”

마지막으로 목격한 할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총 맞고 이 밭과 저 밭을 넘어가며 손톱이 없어졌던 마지막 할머니 모습이 밤마다 악몽으로 덮친다. 혈압약, 수면제, 안정제는 밤마다 눈물이 고여 잠들 수 없으니까, 뜬눈을 막아야 하는 것이어서 먹는 것이다. 평생 기억과 싸우는 이 노부부에게 4·3은 현재형이다.

이 오래된 울음은 이들뿐인가. 4·3 뉴스만 나오면 아예 채널을 돌리고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는다는 배제된 희생자의 아들. 당시 세살이었던 아들은 아버지가 농사짓고 마을 궂은일은 다 해결해주던 훌륭한 분이었다고만 들었다.

이들에게 4·3은 아직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밝은 곳을 바라보는 눈초리, 평생 4·3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의 피멍 들고 부서진 가슴과 함께하지 않는 한 4·3은 어떻게 어둠에서 나왔다 할 것인가. 4·3이 떠오를수록 기대와 절망은 모순되게 커진다. 4·3의 이쪽은 아직도 눈 속 겨울인 것이다.

 

목숨 걸었던 사람들의 한라산

청춘을 걸고 올랐던 한라산의 사람들은 그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던 섬, 한라산은 산사람들의 근거지였고, 무차별 학살을 피해 집을 떠난 수많은 사람들의 피난처였다. 산은 모든 것을 보고 들었으나 감당하고 침묵해야 했다.

1987년 스물일곱살의 시인 이산하는 4·3서사시 「한라산」을 쓴 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갔다. 통곡하듯 쓴 그날 이후에 한라산은 그에게 평생의 무게가 되었으리. 한라산은 “일자무식한 사람들도/하나 둘씩 식량보따리를 싸들고/산으로/산으로” 들어갔던 산이었다. 한라산에 올라 30여년 만에 하산한 듯한 그의 시가 올해 제주 4·3 평화공원 문주 시화전에 걸렸다. 거기 시인은 여전히 새로운 유배지 앞에 서 있었다.

 

“4·3을 기억하는 일이 금기였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온시되었던 시절

4·3의 고통을 작품에 새겨넣어

망각에서 우리를 일깨워준 분과 작품도 있었습니다.

이산하 시인의 장편서사시 「한라산」……”

 

TV의 ‘제주4·3’ 70주년 추념식을 무심히 보는데

가수 이효리가 내 시를 낭송하는가 싶더니

추념사를 하는 문재인 대통령 입에서 내 이름까지 나왔다.

아득히 환청처럼 들리면서 현기증이 일어났다.

몸은 감옥 밖으로 나왔지만 ‘이산하 시인’이라는 이름은

극좌의 상징으로 30년 동안이나 세상에서 유배된 상태였다.

4·3의 진실을 폭로하다 외면당한 금기의 이름이었다.

‘아— 이제야 유배에서 풀려났구나……’

혼자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새로운 유배지가 어른거렸다.

—이산하 「새로운 유배지」 전문(『악의 평범성』, 창비 2021)

 

4·3, 그럼에도 더 발굴해야 할 진실들

그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한 국가폭력이었다. 4·3은 소박했던 섬의 공동체를, 가족사를, 한 인간의 생을 기를 쓰고 뒤틀어놓았다. 이후로도 반백년,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제주 안의 ‘왁왁한’ 역사였다. 4·3으로 부모를 잃고 이름을 잃고, 호적에 등재 못한 이들도 많았으나 아무 말 못하던 사람들의 역사였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다보면 살 수 있다’는 주문을 외며 거친 파고를 넘었다. 절실하면 응답하는 법. 결국 동굴 속의 4·3은 여기까지 왔다. 다른 여러 과거사들이 그 해법의 실마리를 여기서 찾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더 발굴해야 할 진실들은 여전히 남는다. 4·3특별법 개정안은 4·3 완전해결의 지주가 될 것이다. 추가 진상조사를 통해 아직 발굴 중인 행방불명인의 마지막 흔적을 찾고, 아직도 묻혀 있는 더 많은 진실들, 당시 가해자의 지휘체계를 통해 가려진 역사를 규명해야 한다. 무엇보다 냉전체제하에서 이 사건과 연루되어 있었던 미국에 명확한 근거를 통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4·3 희생자임에도 공적인 애도의 공간을 누리지 못했던 배제된 활동가들이 우리 앞에 있다. 4·3은 평화와 인간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을 향하고 있다. 늦었으나 그 이름들에 대한 공적 진혼이 이뤄지고 그들이 원했던 세상을 밝혀야 한다.

우리에게 4·3은 무엇인가. 강우일 주교는 “4·3은 인간의 기본적 존엄을 억압하는 사회악과 불의에 대한 저항, 인간해방, 인권회복, 참된 민주주의 세상의 동력 표출이었다”라고 했다.(제주4·3 70주년 학술 심포지엄 2018.2.22) 역사가 이만열은 “4·3은 5·10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반대, 외세저항 자주통일운동이다. 동학, 4·19, 광주민주화운동, 6월 민주화운동, 촛불혁명과 궤를 같이하는 한국 근현대사의 위대한 운동선상에 있다”라고 했다.(제주포럼 기조강연 2018.6.28.)

4·3은 묻는다. 대체 국가는 그때 어디에 있었는가. 하나 된 조국을 원했던 것도 죄였는가. 떠올려보라. 국가의 이름 앞에서 발발 떨며 산과 계곡으로 숨으러 다니던 제주 사람들의 눈빛을, 동백꽃 목숨들을. 짙푸른 바다 저 멀리 쪽배에 실려 가던 그들을. 가면서 뒤돌아보던 그 두려움에 찬 마지막 눈동자들을.

 

법 앞에서

법 아닌 법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갔다. 법 아닌 법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땅에 진정 꽃은 피려 할까. 4·3특별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나는 이 시를 썼다.

 

법 아닌 법인 줄 몰랐습니다/죄라면/좋은 세상 꿈꾸며 속솜하지 않던 죄, 맞습니다/죄명도 기록도 모른 사람들,/풀잎처럼 이 산천 저 산천 이송되었습니다/법 아닌 법 앞에서//당신은 귀환하지 못했습니다/한 방에 사라졌습니다/법 아닌 법 앞에서//(…)

대체 아름다운 것은 어디 있습니까/그러니까/이 섬이 하는 말/일생 기분이 안 났습니다//누구나 당연한 건 당연하다지만 당연하지 않았습니다/홀로 핀 동백이 홀로 질 때까지/꽃봄은 영영 타버린 줄 알았습니다//누구나 그러할 때 그러면 안 되는,/안 되는 게 법인 줄 알았습니다/(…)

터질 땐 터져야 하는 법/기쁠 땐 기쁨하라 흔들리며 소송합니다//아침에 본 사람 저녁에 안 보이던,/사람씨 풀씨마저 안보이던 시절/죄 없이 죄가 된, 법 아닌 법 앞의 사람들/모욕도 수치도 속수무책 법 아닌 법 앞에서/눈도 입도 다물던 사람들, 이제 한번/묻습니다 법 앞에서//거기 꽃 피었습니까//여기 꽃 피젠 헴수다(꽃 필락 합니다)

—허영선 「법 앞에서」 부분(한겨레 20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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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주4·3 당시 군사재판은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두차례 열렸다. 각각 내란죄와 국방경비법 위반죄를 적용한 것이었다. 물론 당사자들은 무슨 죄인지 모르고 끌려갔다. 수형인 2530명의 형량과 인적사항 등이 기록된 ’수형인명부’(국가기록원)가 1999년 발굴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 가운데 280여명은 사형이 집행되었다. 산 자들은 1년~무기징역형을 받고 수형생활을 하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상당수 행방불명되었다.

허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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