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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단 하나의 미얀마는 가능한가
군부 쿠데타 이후 현재와 미래
장준영 張准榮
한국외대 미네르바교양대학 객원교수. 저서 『미얀마 외교정책의 변화와 주요국과의 관계』 『미얀마의 정치경제와 개혁개방: 성과와 과제』 『하프와 공작새: 미얀마 현대정치 70년사』 등이 있음.
koyeyint@hotmail.com
쿠데타의 동기와 배경
2021년 2월 1일, 미얀마 군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작년 11월 총선 결과에 만족하지 못한 군부는 몇차례에 걸쳐 정부와 여당 관계자를 만났고, 1월 28일에 있은 최종 회동에서 합의점을 찾는 데 실패했다. 국민 여론을 의식해서였는지 군부는 1월 30일 국민통합을 위해 정치적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성명을 발표했으나 국회 개원일 새벽에 쿠데타를 자행함으로써 이틀 전 약속을 스스로 깨트렸다.
군부는 연방선거위원회 위원을 모두 교체했고, 신임 위원들은 선거인 명부를 다시 조사하여 국영 신문에 발표했다. 그러나 최근 기표소 총책임자라는 인물1이 군부의 주장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문서를 발표했다.2 명부의 부정확성을 인정하면서도 군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광범위한 선거부정에 대한 근거는 없다고 반박한다. 일례로 이번 총선에서 합당한 증거로 선거부정을 신고한 건수는 287건(유권자 94건, 출마자 193건)에 불과했다. 또한 그는 전자정부(e-government) 체계가 구축되지 않은 미얀마의 행정환경에서 향후 어떤 선거에서도 선거인 명부는 시빗거리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군사정부의 연방선거위원회 위원장도 선거인 명부의 정확도는 30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쿠데타는 왜 발생한 것인가? 두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군부의 누적된 불만과 기득권 축소에 대한 두려움이다. 2015년 총선에서 승리한 뒤 아웅산수찌(Aung San Suu Kyi) 당시 국민민주주의연합(NLD) 당 대표는 대통령, 군사령관과 회동한 뒤 안정적인 정권 이양에 합의했다. 그러나 아웅산수찌와 군부의 협력은 거기까지였다. 2016년 정부 출범 이후 아웅산수찌 국가고문은 군부를 국정 운영의 동반자로 인정하지 않는 듯했다.
결정적으로 NLD는 정치권에서 군부를 배제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가동했으니 그 첫번째 시도는 개헌이었다. 2020년 3월, NLD는 상·하원 의석 25퍼센트에 할당된 군부 의석수를 향후 15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줄이는 개헌안을 발의했다. 헌법 436조에 따르면, 개헌을 위해서는 상·하원 정족수의 75퍼센트가 동의해야 하므로 사실상 개헌은 불가능하고, 실제로 개헌안 투표에서도 찬성표(404표)보다 반대표(633표)가 더 많았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군부에 압박을 주는 동시에 국민에게는 군부의 정치참여가 명분이 없음을 확인시키는 것이었다. 향후 정부에서의 지속적인 개헌 시도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작년 총선에서 NLD의 승리는 기정사실화되었으나 2017년과 2018년 보궐선거에서 NLD가 연거푸 패배했고, 특히 소수종족 지역에서 NLD에 대한 민심은 이반했다. 하지만 선거 일주일 전 군부가 선거 결과를 인정할 수 없을 것이라는 엄포를 놓자 위기감을 느낀 국민은 NLD를 선택했고, 이에 따라 NLD는 2015년 총선보다 더 많은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3 이로써 NLD는 차기 정부(2021~25년)에서 군부를 더욱 압박할 동력을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았다. NLD의 지난 5년이 시행착오의 시기였다면, 향후 5년은 군부와의 불안한 동거를 청산할 절호의 기회인 셈이었다.
그러나 아웅산수찌와 NLD는 군부가 사활적 이익집단이라는 사실을 순간 망각한 듯하다. 선거부정이라는 군부의 주장은 허울에 불과할 뿐 정작 군부는 그들의 불만을 정부에 토로하면서 정부가 자신들을 예우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쿠데타 이전 군부와의 회담 중 타협이나 포섭의 미학을 끌어내지 못한 아웅산수찌의 정치적 기술이 아쉽다. 아웅산수찌의 참모와 측근은 군부가 언제든지 정치에 개입할 수 있으며, 퇴로를 열어놓지 않고 이들을 압박만 하면 역효과가 발생할 것을 진즉 우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성역(聖域)에 있는 성인(聖人)인 아웅산수찌에게 직언을 할 참모는 없었다. 아웅산수찌는 자신을 지지한 국민에게 군부가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다고 호소함으로써 국민의 일상을 잃어버리게 한 쿠데타만큼은 막았어야 했다. 이번 선거에서도 드러났듯이 국민의 80퍼센트 이상이 NLD를 지지하기 때문에 군부의 행동 이전에 이들을 제어할 방법은 있었을 것이다.
둘째, 이번 쿠데타는 미얀마 군부, 즉 땃마도(Tatmadaw)의 집단행동이 아니라 민아웅흘라잉(Min Aung Hlaing) 군사령관의 개인적 야욕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다.4 민아웅흘라잉을 만난 몇몇 외교관에 따르면, 그는 아웅산수찌를 신뢰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으며, 민간정부와의 조화에 관심이 없는 인물이다.5 이런 이유로 이미 그는 두차례에 걸쳐 군부의 정치개입, 즉 쿠데타를 언급한 적이 있다. 먼저 2016년 11월, 그는 국방대학(NDC) 연설에서 정부가 법치를 존중하지 않고 무장단체를 제어하지 않는다며 국가비상사태를 언급했다.6 2017년 8월에는 로힝자족(Rohingya) 문제 해결을 위한 국가진상조사위원회에 외국인 참여를 반대하며 다시 쿠데타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는 분명히 권력욕이 있는 것 같다. 작년 6월 러시아 방문 당시 러시아 국영방송에서 헌법에 따라 지금보다 더 높은 직위(authorities)에 오를 수 있다는 인터뷰 진행자의 언급에 “항상 그러한 야망이 있다”고 화답했다.7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작년 총선에서 NLD가 전체 의석의 50퍼센트를 확보하지 못하고, 군부 자동할당 의석을 포함하여 군부 후원 정당인 연방단결발전당(USDP)-소수종족 정당 간 연합을 통해 반NLD 전선을 구축한다. 이 전선은 군부 몫으로 할당된 대통령 후보로서 자천(自薦)한 민아웅흘라잉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킨다.8 작년 의회 내 개헌 투표 표결 수, NLD에 대한 국민적 인기 저하, 소수종족 지도자에 대한 민아웅흘라잉의 포섭 등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NLD의 예상 밖 승리로 인해 그의 시나리오는 휴지 조각이 되었다.
한편, 복무규정에 예외를 두어 임기(5년)를 연장한 그는 오는 7월 퇴역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루지 못한 권력욕만큼이나 그에게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가족의 막대한 부 축적뿐 아니라 신변을 지켜야 한다.9 군부 수장으로 자리매김해온 지난 10년 동안 그를 제어할 인물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선배들의 말로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의 전임인 딴쉐(Than Shwe) 장군은 자신을 성장시켜준 네윈(Ne Win)과 그의 족벌을 무참히 다뤘다. 현재 딴쉐의 족벌은 안전해 보이지만 그 미래는 알 수 없고, 그가 후원한 기업들은 더는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 권력은 영원할 수 없어 보인다. 민아웅흘라잉의 후임으로 거론되는 쏘윈(Soe Win) 부사령관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군부는 스스로의 계보를 아버지와 자식 관계라고 떠들어왔는데, 그것은 주종관계가 확고할 때나 적용 가능한 것이다. 손에 쥔 권력을 어떠한 보상도 없이 내려놓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탱천(撐天)한 노욕(老慾)과 안전한 노후를 보장받을 출구전략은 서로 갈등한다.
미얀마 군부는 어떤 집단인가?
일반적으로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는 경제개발을 통해 장기집권의 토대를 마련한다. 국민에게 물질적 부와 복지를 배분함으로써 정권에 대한 지지를 유도함과 동시에 국민을 탈정치화하는 부수효과도 누릴 수 있다. 그럼에도 경험적으로 군부정권의 생명력은 길지 않았다. 정권 차원에서는 지속적인 경제발전이 좌절될 때 집권에 부담감이 가중되고, 경제발전을 통한 사회적 근대화는 신흥계층의 등장을 견인하여 정권을 압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얀마 군부는 ‘실적에 의한 정당성’(performance legitimacy)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도 다른 나라의 군부처럼 민간정부의 위기를 정면 돌파하여 국가를 수호하겠다는 의지에서 정권을 장악했으나, 이후 행보는 전혀 달랐다. 1988년 민주화운동이 발생하기 전까지 군부는 연방의 유지와 아웅산(Aung San) 장군이 못다 이룬 사회주의를 추구한다는 일념으로 집권의 명분을 마련했다.
그런데 이들은 사회주의라는 이름만 제외하면 아웅산의 철학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네윈이 주창한 버마식 사회주의(Burmese Way to Socialism)는 아웅산이 주창한 정교분리의 원칙을 깨고 불교의 세계관을 빌린 난해한 이념이 되었고, 식민경험이라는 외상을 치유한다며 쇄국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했다. 군인이 관료사회를 대체했고, 사회 곳곳에는 군사문화가 침투했다. 군부가 사유재산의 국유화를 발판으로 부를 증식함으로써 당시 버마는 전형적인 약탈국가로 나아갔다. 정부는 국민의 경제활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국가 전역은 거대한 암시장(흐마웅코제, hmaungkoze)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군부는 부의 독점을 통해 무기를 사들이고, 군인 가족에 대한 복지를 늘려 내부 결속을 강화하여 ‘국가 안의 국가’가 되었다. 국민의 생활수준은 끝없이 추락했다. 1987년 12월, 유엔총회에서 ‘최빈국’(Least Developed Country) 명단에 미얀마가 이름을 올렸을 때, 더는 정부를 지지하는 국민은 없었다.
근대화론의 수혜를 입지 못한 상황에서 1988년 민주화운동은 실패할 운명이었다. 학생들은 사회주의나 극단적 형태의 공산주의를 추종했고, 권좌에서 밀려난 군 장성은 반군부 연대를 결성했으나 더 나아가지 못했다. 민주주의를 추구하지만 정작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모순적 상황이 연출되었다. 국민의 분열을 틈타 재집권한 군부는 이번에도 그들의 집권 명분을 연방의 분열과 사회 혼란에서 찾았다. 1989년 군부는 ‘공산당과 연합한 국내 폭도들이 외세와 결탁하여 연방을 공중분해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며 1년 전 민주화운동을 평가절하했다. 아웅산수찌도 그 세력에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군부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의 실패를 인정하고, 외자 도입을 통한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이제 군부가 부를 축적하는 방법은 더욱 다양해졌다. 이름을 바꾼 군 기업이나 국영기업이 명의 또는 토지를 제공하고 외국기업의 자본과 기술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고위 군부와 결탁한 정실 기업가도 등장했다. 이들은 군부의 자금을 세탁해줄 은행을 설립했고, 군부를 대행하여 인프라 사업에도 참여했으며 그 댓가로 천연 및 지하자원 개발권을 독점했다. 정실 기업은 민간경제 생태계를 독식했고, 2011년 다시 시장이 개방되자 경쟁을 회피할 목적으로 외국기업의 현지 진출을 가로막기도 했다.
1993년부터 미국이 경제제재를 시작하자 다수의 외투기업이 떠났고, 10년도 채 되지 않아 중국 자본이 미얀마를 메웠다. 아웅산수찌는 경제제재만이 군부의 자금줄을 말릴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 NLD도 미얀마는 전형적인 농업국가이고, 외국기업은 주로 2차 산업에 투자하므로 경제제재로 인한 미얀마 국민의 피해는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제재가 지속하는 동안 제재 회의론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국민의 삶은 더욱 궁핍해져갔다. 동아시아연구원(EAI)의 조사에 따르면, 전형적인 농촌 지역인 만달레주(Mandalay Region)와 꺼친주(Kachin State) 주민은 외국인직접투자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했다.10 NLD의 현실 인식에는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2011년 미얀마가 서방과 관계를 정상화하기 전까지 군부가 부를 축적한 것을 제외하고 국민의 삶을 개선하는 경제성장은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2011년 떼인쎄인(Thein Sein) 정부가 출범한 뒤 미얀마는 연 6~8퍼센트 대의 전례 없는 성장을 기록했다. 쉐보르스키(A. Przeworski)는 1인당 국민소득이 약 6천 달러를 돌파할 때 어느 나라도 독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입증했다. 미얀마는 이 기준에 한참 부족하지만, 경제성장과 함께 현지에 거주하는 외국인과의 접촉은 미얀마인의 세계관을 다양화했다. 스마트폰의 대중화와 SNS의 일상화는 미얀마가 더는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지 않았다는 훌륭한 증거이다. 분명 지난 10년간 미얀마 국민의 의식은 성장했다. 국민의 손으로 뽑은 지도자를 감시하고 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촉구하는 동안 국민의 안중에 군부는 없었다.
국민은 발전했으나 군부는 그대로였다. 군부는 다시 다양한 소수종족을 아우르는 연방을 수호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임을 자처하며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고, 2007년 사프론 혁명 때처럼 단기간에 상황을 정리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찼던 것 같다. 무고한 시민이 희생당하는 순간에도 군부는 주변국 군 인사를 초청하여 연회를 개최하고, 띤장(Thingyan)에는 새해맞이 물축제를 열기도 했다. 국민을 존중하지 않는 군부의 태도는 여전하고, 상황 인식조차도 과거에 머물러 있다. 미얀마의 미래가 걱정된다는 군부의 주장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한편, 지난 10년간 전임 두 정부는 전국의 18개 무장단체와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화해와 완전한 국민통합을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군부는 절대적인 걸림돌이었다. 특히 아웅산수찌 정부는 자치에 기반한 연방제(federalism)를 추진했으나, 군부는 연방의 분열이 우려된다며 현행 중앙집권적 연방(union)을 고수해왔다.
정말 군부는 연방의 통합에 관심이 있을까? 군부와 무장단체 간 갈등이 일상적이어야 군부가 정치권에 남아 있을 명분이 생기며, 반대로 평화협정이 완성되면 군부의 역할은 끝난다. 이런 배경에서 아웅산수찌 정부가 평화협정을 진행하는 동안에도 군부와 무장단체 간 교전은 끊임이 없었다. 정부에 군부를 제어할 여력이 없으니 군부는 정부와 무장단체 간 이간질도 서슴지 않았다. 즉 군부는 국민통합에 관심을 두기보다 중앙과 지방 간 갈등을 조장함으로써 정치권에 남아 있으려고 한다. ‘연방의 결속과 수호’가 지난 70년간 군부의 정치개입 동기로 변함이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민주주의를 향한 처절한 몸부림
시민의 저항은 즉각 표출되었다. 의료진에서 촉발한 시민불복종운동(CDM)은 교육계, 금융계, 산업계 일반으로 확산했다. 일반 시민은 그들에게 ‘악귀’인 군부를 쫓아내기 위해 미신에 의지하여 가재도구를 시끄럽게 두드리기도 했다. 4월 말 현재 사망자 수는 800여명에 이르나 이 수치도 추정치에 불과하다. 수천명이 구금되었고, 군부는 고문 흔적이 역력한 체포된 청년들의 사진을 공개하며 공포심을 유발하고 있다. 양곤은 거의 진압된 양상이지만 전국적으로 게릴라 형태로 이어지는 다양한 시위는 지속할 것이다.
시민의 저항은 과거와 다르다. 1988년과 2007년 당시 시위대는 아웅산 장군의 사진을 들고 행진했고, 주요 무대는 불탑(불교사원)이었다. 식민시기 반영(反英)운동에서도 불탑은 미얀마 민족주의의 상징이었다. 이번 시위대의 다수는 아웅산수찌와 윈민(Win Myint) 대통령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지만, 오롯이 두 인물에 집중한 투쟁은 아니다. 국민의 의지가 반영된 민주주의의 회복, 군부가 통치하는 국가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지 않으려는 시대정신이 저항의 핵심이다.
2012년 보궐선거로 NLD가 45석 가운데 43석을 차지하며 제도권에 입성했을 때 국민은 아웅산수찌가 국가의 지도자가 되면 민주주의는 꽃을 피울 것이고, 경제는 발전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국민에게 아웅산수찌는 훼손해서는 안 되는 절대 가치이다. 군부만 없으면 민주화가 된다는 흑백논리와 다당제 총선이 곧 민주주의라는 왜곡된 시각도 팽배하다. 아웅산수찌 정부에 실망한 국민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NLD를 대체할 뚜렷할 정치세력도 없다는 것이 미얀마의 현실이다.
거리의 시민과 괴리감을 보이는 일부 세대의 공백도 아쉽다. 소위 MZ세대는 군부가 얼마나 잔인한지 모르지만, 이미 장기간의 군부 독재와 1988년과 2007년을 겪은 기성세대는 감히 거리로 나서지 못한다. 군부에 대한 그들의 트라우마는 예상보다 심각한 수준이다. 기성세대 중 일부는 군부에 포섭되어 덜랑(dalang), 즉 밀고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더욱이 1988년 이후 해외에서 민주화운동을 한 기성세대 중 다수는 본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들이 다시 고국의 민주화를 입에 올리는 것은 순수해 보이지 않는다. 시위를 이끌 사오십대 지도자의 공백이 아쉽다.
한편, 쿠데타 당일 체포를 피한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17명으로 구성된 연방의회대표자위원회(CRPH)가 출범했다. CRPH는 군부에 대적하는 임시정부의 역할을 자처하며 시민들의 지지를 얻었고, 지난 4월 16일 국민통합정부(NUG)의 수립을 선포했다. NUG는 모든 국민을 통합하고, 국제사회에서 유일한 합법정부의 지위를 획득함으로써 연방제에 기초한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를 위해 군부와 맞설 각 소수종족 무장단체를 포괄하는 연방군(federal army) 창설을 선언했다.
NUG의 활동을 더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군부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한 실천적 대안을 마련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먼저 연방군 창설이 성공하더라도 단기에 군부와의 무장 대결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작다. 경찰을 포함하여 정규군은 약 50만명인 반면, 연방군에 편입을 희망하는 모든 무장단체의 병력을 합쳐도 3~4만명 수준에 불과하다. 그간 무장단체는 밀림에서 게릴라 방식으로 생존했으므로 공격보다 수비에 익숙하다. 또한 지금까지 무장단체는 연방 내에서 배타적인 영토, 군사, 경제적 이권을 보장받기 위해 정부(군부)와 투쟁해왔는데, 민주주의만을 위해 연방군에 가담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민주주의가 회복된 뒤 각 무장단체가 이권을 두고 이전투구를 한다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지금까지 각 무장단체가 영토와 자원을 독점하기 위해 경쟁해왔다는 사실도 단일대오를 형성해야 하는 연방군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 된다. 지난 3월 CRPH 지도부는 연방군 창설 협상이 80퍼센트 이상 진전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처럼 복잡한 내막을 해결할 방안이 있는지, 아니면 연방군 창설 자체에 단순하게 접근하고 있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군부와 연방군 간 무장충돌은 사태의 장기화로 이어져 내전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난민이 발생할 수 있고 주변국의 개입이 본격화될 수 있다. 대량 사상자가 발생하면 군부와 함께 NUG도 책임 소지를 비껴갈 수 없을 것이다.
CRPH는 해체하기 전까지 70여건의 문건을 생산했지만, 사망하거나 피해를 본 국민에 대한 그 어떤 애도와 위로의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NUG는 4월 24일 아세안(ASEAN) 정상회담에 민아웅흘라잉 군사령관이 참석한 것을 맹비난하며 자신들을 초청하라고 요구했다. 자칫 NUG는 국민의 희생을 외면한 채 국제사회에서 정통성만을 획득하는 데 집중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NLD도 국제사회에서 합법적 미얀마 정부라는 지위를 보장받는 데에만 천착하는 동안 국민을 내팽개쳤다. 국제사회는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냉정하게 움직이므로 NLD와 마찬가지로 NUG를 향한 측은지심이나 도덕적 당위성은 통용될 수 없어 보인다.
다시 강조하면 미얀마 국민은 아웅산수찌나 NUG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회복을 바란다. 이제 NUG는 피할 수 없는 길인 민주주의의 회복을 향한 국민과의 연대를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데 인색했던 아웅산수찌에 대한 비판은 나중에 해도 충분하다. 군부에도 그들이 정치의 주역이 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 된다는 진리를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일깨워주어야 할 것이다. 지금 미얀마에 필요한 것은 칠흑 같은 어둠을 깨울 단 하나의 미얀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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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얀마의 투표소 관리 및 참관은 현역 교사가 담당한다. 이들과 함께 각 정당원도 참관인으로 참가할 수 있다.↩
- Lin Htet·Poll Station Teachers, 2020 General Elections: Reflections and Remarks from Poll Stations, n.a., 2021.↩
- 2020년 총선 결과는 다음을 참조하라. 장준영 「2020년 미얀마 총선 분석과 정치지형의 변화: 여당의 승리와 군부의 견제」, 『동남아시아연구』 31권 1호, 2021.↩
- International Crisis Group, “Responding to the Myanmar Coup,” ICG Asia Briefing, No.166, Yangon, Bangkok and Brussels: ICG 2021.2.16, 15~16면.↩
- Shibani Mahtani and Timothy McLaughlin, “ In Myanmar coup, grievance and ambition drove military chief ’s power grab,” The Washington Post 2021.2.10.↩
- Maung Aung Myoe, “Partnership in Politics: The Tatmadaw and the NLD in Myanmar since 2016,” Justine Chambers eds., Myanmar Transformed?: People, Places and Politics, Singapore: ISEAS 2018, 206면.↩
- Shibani Mahtani and Timothy McLaughin, 앞의 글.↩
- 미얀마의 대통령은 의회 내 간접선거로 선출된다. 후보자는 상원과 하원에서 각 1명, 군부 할당 몫으로 1명 등 총 3명이 출마하고, 상하원 의원이 선출한다. 다수 득표자가 대통령, 2위 및 3위 득표자는 자동으로 1부통령과 2부통령이 된다. 따라서 군부 출신 인사는 최소 한자리의 부통령을 확보한다.↩
- 민아웅흘라잉 가족의 경제활동, 그리고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정실기업가들은 다음의 사이트를 참조하라. https://www.justiceformyanmar.org/stories/who-profits-from-a-coup-the-power-and-greed-of-senior-general-min-aung-hlaing.↩
- 동아시아연구원 ‘쿠데타 이후, 미얀마 민주주의의 미래’ 학술대회 토론 자료(2021.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