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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불쌈꾼 백기완의 한살매

 

 

임진택 林賑澤

문화운동가. 마당극 연출가, 판소리 명창. 저서 『민중연희의 창조』 『애국가 논쟁의 기록과 진실』 『이야기와 소리로 만나는 전태일』(공저) 등이 있으며,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 「다산 정약용」 「오월광주 윤상원가」 등의 사설을 쓰고 작창·공연함.

directlim@hanmail.net

 

 

2021년 2월, 백기완(白基琓, 1933~2021) 선생이 세상을 떠나셨다. 백기완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선생에 대한 추모의 발길과 더불어 선생의 일생을 함축한 수식어들이 거론되었는데, 대체로 ‘우리 시대의 어른’ ‘거리의 투사’ ‘백발의 투사’ ‘민중의 벗’ ‘조선의 3대 이야기꾼’ ‘장산곶매’ 등이었다. 그와는 달리 ‘불쌈꾼’이라는 수식어가 특히 눈길을 끈바, 그것은 혁명아(革命兒)·혁명가(革命家)를 일컫는 순우리말이다. 돌아보니 백기완 선생의 삶은 과연 ‘불쌈꾼’으로서의 한살매(일생)였다. 이 글은 선생이 떠난 자리에서 뒤늦게 ‘불쌈꾼’의 한살매를 되돌아보는 새김글이다.

 

부심이

‘부심이’는 백기완 선생의 어릴 적 덧이름(별명)이다. 선생은 ‘노나메기’라는 출판사를 만들어 같은 이름으로 계절마다 작은 책을 내던 중, 2005년 『부심이의 엄마생각』이라는 책을 따로 써냈다. 이 책에 담긴 글에 의하면, ‘부심이’는 선생의 어릴 적 덧이름으로 옷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했다. 무슨 옷인가 하면, “파아란 풀빛 바지에 빠알간 대님, 빠알간 저고리에 풀빛 고름의 옷”인데, “그것을 떡하니 입고 눈보라 치는 허연 뜰에 나설 것이면 마치 꽁꽁 얼붙은 겨울을 한사위로 갈라치는 새싹 봄빛같이” 드러난다고 한다. 선생의 설명을 나름대로 해석하자면, ‘부심이’는 ‘눈이 부신 옷’이면서 ‘눈이 부신 옷을 입은 아이’, 다시 말해 ‘새싹 봄빛같이 눈이 부신 아이’를 일컫는 이름이었다고 생각된다.

선생의 어머니는 늘 어린 아들이 스스로 생각을 더듬을 수 있게 말뜸(화두)을 던져주시곤 했다. 선생이 어렸을 적 어머니로부터 듣고 머릿속에,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말뜸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아무리 단 엿이래도 땅에 떨어진 건 주워 먹는 게 아니다.”

“사내 녀석이 돌을 던져야지 소쿠리나 집어던지는 게 아니야.”

“제 배지만 부르고 제 등만 따스고자 하면 키가 안 커.”

“굶주린 남의 배를 채워주려면 제 배는 좀 주려야 하는 게야.”

“살 맞은 짐승은 산으로 가고, 칼 맞은 사람은 사람한테 온다.”

꽁꽁 얼붙은 겨울을 한사위로 갈라치는 새싹 봄빛같이 살라고 어머님이 덧붙여주신 이름 ‘부심이’! 기완은 이 덧이름을 새김말(좌우명)로 삼아 평생을 살았다.

 

마당굿

내가 백기완 선생을 처음 뵌 것이 1973년이던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서 ‘졸업미필자’로 남아 연극 활동을 하고 있던 내가 그때 막 출범한 대학가 탈춤운동과의 결합을 모색하고자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 사무실을 찾아가서였다. 심우성 선생의 한국민속극연구소는 당시 명동 어느 건물 3층에 있었는데, 내가 친구 김민기(「아침이슬」의 작사·작곡자)와 함께 그곳을 찾아갔을 때 마침 심선생은 출타 중이었고 전혀 예기치 않은 딴 선생을 만났으니 그분이 바로 백기완 선생이다. 두분 선생이 한 사무실에서 나란히 책상을 놓고 활동하고 계신 것을 우리는 모르고 간 것이었다.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본 나는 거기 앉아 있는 어떤 사내를 보자마자 첫눈에 압도되고 말았다. 그에게서 백두산 범의 기상을 느꼈기 때문이다. 백두산을 가본 적이 없고 범을 직접 본 적이 없는 내가 왜 그런 느낌을 받았을까? ‘백범사상연구소’라는 명칭으로 인해 어떤 착각이 있었을까? 김구 선생의 호 백범(白凡)은 ‘백정처럼 천한 평범한 백성’이란 뜻이었음에도, 나는 백기완 선생이 백범 김구같이 범의 기상을 이어받은 분이 분명하다는 예감에 빠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날 백기완 선생이 진한 황해도 사투리로 우리에게 던진 말씀은 뜻밖에도 정치나 역사에 관한 것이 아니라 민속문화에 관한 것이었다. “젊은이들이 탈춤에 관심 갖고 운동을 한다고? 거 아주 근사하구나야. 그런데 말이야, 지금 와서 전수합네 하는 탈춤 이거는 관아의 아전들이나 했던 것이고 진짜 민중의 탈춤, 마당굿은 따로 있디.” 처음 듣는 견해인지라, 나는 조심스럽게 선생께 질문했다. “마당굿이라구요? 진짜 탈춤, 마당굿은 무엇이며, 어떻게 다릅니까?” 그러자 선생은 그 자리에서 민족문화에 대한 선생의 생각을 포효하듯 꺼내놓으셨는데, 그것은 상상도 해보지 못한 참으로 놀랄 만한 시각이었다.

“요즘 어디 탈춤을 보면 맨 처음 먹중이 나와서 춤추지 않네? 춘정을 못 이겨 나왔다고 하면서 드러누워 꿈틀거리는데, 그기 다 가짜야. 원래 그기 멍석말이춤이야. 멍석말이가 뭐이냐 하면 양반 지주 놈들이 말 안 듣는 머슴을 멍석에 말아 패 죽이는데, 원한 품고 죽은 머슴이 참나무 짝짝 갈라 터지는 소리를 장단 삼아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몸부림이 멍석말이춤이디. 요새 살풀이춤이라고 하는 거, 그것도 다 기생춤으로 변질된 거이야. 액은 쫓고 살은 푼다고들 하지마는, 살풀이춤은 본래 살을 뽑아내는 몸부림이디. 적이 쏜 화살이 어깨에 박히면 꿈틀하면서 그 살을 잡아 뽑아내고, 등에 와서 박히면 다시 그 화살을 잡아 뽑아내고…… 이렇게 맺힌 건 풀어내고 박힌 건 뽑아내는 동작이 살풀이춤이라고. 우리 춤의 근원은 꿈틀거리는 몸부림이디. 그리고 그런 몸부림의 판을 일구어내는 것이 ‘마당굿’이야. 양반 아전들한테 붙어서 알랑대는 기 아니고 그 억압을 까부숴서 현상을 타파하는 민중의 판이 ‘마당굿’이디.”

대학가에서 이제 막 탈춤을 발견하고 탈춤운동을 처음 시작하였으며 아직 마당극·마당굿이라는 용어마저 생겨나지 않았던 시기에, 민속학자도 아닌 백기완 선생의 일갈(一喝)은 전혀 예기치 못한 충격이었다.

 

쇠뿔이

1973년 12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영구집권 유신체제를 획책하던 삼엄한 시기, 칠흑 같은 판을 돌연 갈라치며 자신을 옥죄고 있던 쇠사슬을 끊고 나선 ‘쇠뿔이’가 있었으니 바로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이었다. 장준하와 백기완을 잡아들이려고 군사독재정권은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하였다. 유신독재의 서막이면서 동시에 종막을 예고한 단말마의 국소(局所)라!

이 시기와 관련하여 백선생은 자신의 자서전이랄 수 있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한겨레출판 2009)에 다음과 같은 매우 역설적인 글을 남겼다.

 

‘유신막틀(독재)’이라는 게 나온 날부터 어쩐 까닭인지 보는 사람마다 내 얼굴에 무슨 새뜸(소식) 같은 밝빛이 서린다고 했다. 만나기만 하면 “좋은 일이 있느냐, 아니면 주머니가 두둑한가 보지, 왜 그렇게 훤해” 그랬다. 하지만 나는 “왜냐”는 내 말은 아니 했다. 속으로만 맞대(대답)를 했다. ‘유신막틀’, 그것은 박정희의 마지막 타들(상여) ‘마주재비’다.(279면)

 

백기완 선생의 눈에는 박정희의 소위 ‘유신독재’가 종신집권 획책에 눈먼 단말마의 발악으로 보였다는 뜻이요, 때문에 유신독재와의 싸움은 딱 한짱만 붙어도 박정희를 ‘마주재비’(마주 잡아 들고 나가는 들것) 들것에 실어 저세상으로 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얼굴에 어려, 그래서 훤해 보였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마지막 싸움엔 반드시 피를 보아야 하므로 박정희의 약점 급소를 곧바로 들이쳐야 하는바, 선생이 장준하 선생을 앞세워 구상한 계획이 바로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이었다. 그리하여 당대의 재야 어른들 서른명의 서명을 받아 1973년 12월 24일 저녁 종로 기독교청년회관(YMCA)을 치고 들어가 선언문을 낭독함으로써, “무달(침묵)까지 삼키던 썩은 웅덩이”(283면)에 돌멩이를 던져 결정적으로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백기완은 1974년 1월 장준하와 함께 유신 불법 긴급조치 1호 위반자로 체포되어 쇠고랑을 차면서, 역설적으로 자기를 옥죄고 있던 쇠사슬을 끊고 스스로 해방을 일구는 사내 ‘쇠뿔이’로 등장하였다.

 

장산곶매

유신의 압제가 계속되던 1979년 무렵, 백기완 선생의 책 한권이 어렵게 세상에 나온바, 책 제목이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였다. 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형식으로 쓰인 이 책을 읽고 받은 감동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하룻밤을 꼬박 새워 책을 읽고 난 후에도 가슴은 마구 두근거렸고 정신은 말짱해오기만 했으니까…… 아! 우리 민족에게도 대륙이 있었구나! 우리를 갈라놓은 분단의 높은 벽이 우리의 감수성조차 이렇게 왜소하게 만들었구나! 오호, 우리가 ‘여자’와 ‘딸’ ‘아내’를 낮춰 생각했지만 ‘여장부’라는 여성의 위대함이 있었구나!

무엇보다도 그 책에서 우리를 강타한 것은 황해도에 구전되어온 ‘장산곶매’ 옛이야기였다. 장산곶매 이야기는 그 무렵 작가 황석영이 한국일보에 야심 차게 연재하고 있던 대하역사소설 『장길산』 첫머리에 소설 전체의 주제를 상징하는 프롤로그 형식으로 기록되어 이미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바 있는데, 비로소 날것 그대로 원전을 접한 감동은 소설과는 또 달랐다. 날짐승 중 으뜸인 매, 그중에서도 최고 으뜸 장수매인 장산곶매가 대륙으로 사냥을 나섬에, 떠나기 전날 밤새 부리질을 하여 자기 둥지를 부순다는 이야기는 유신독재정권과의 한판 싸움을 위해 자신의 안락과 일상을 버려야만 하는 우리에게 결단의 시간을 재촉하며 가슴을 후비고 들어왔다.

그런데 정작 내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잠을 못 이룬 것은 그다음 이야기 때문이었다. 물 건너 대륙에서 엄청나게 큰 날개를 가진 독수리가 쳐들어왔는데도 마을사람들이 모르고 잠들어 있는 동안 장산곶매 혼자 밤새 그 독수리와 맞서 싸워 겨우 물리친 후 피투성이가 되어 벼랑 위 낙락장송에서 지친 몸을 쉬고 있는데, 어디서 피냄새를 맡은 구렁이가 나타나 나무를 감고 기어올라가 장산곶매를 공격하거날, 마을사람들이 뒤늦게 알고 장산곶매더러 빨리 날아오르라고 소리를 지르며 꽹과리를 쳐댔으나 웬일인지 날개만 퍼덕일 뿐 날아오르지 못하더니 하릴없이 구렁이에게 당하고 말았것다. 알고 보니 장산곶매가 어릴 적에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을 지켜줄 매라고 발목에 끈을 매어 표시를 해놓았는데 그만 그 끈이 나뭇가지에 걸려, 지친 장산곶매가 그걸 끊어내지 못하고 결국 날아오르지 못했던 것…… 그 대목을 읽으면서 내가 밤새 뒤척였던 것은 그 우화에 내재한 은유 때문이었다. 분단정부 수립 직전 동족상잔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몽양 여운형 선생과 백범 김구 선생이 동족에 의해 피살된 것이 바로 그 운명의 끈 아니던가?

이후 ‘장산곶매’는 전설이 아닌 현실에서 민중의 분노와 결단, 저항과 비상(飛翔)의 표상이 되었다.

 

쇳소리

1979년 10월 26일 독재자 박정희가 그의 오른팔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비명에 간 뒤, 그해 12월 어느 날 명동 YWCA 강당에서 혼례식으로 위장한 민주재야 인사들의 집회가 있었다. 이른바 ‘ YWCA 위장결혼식사건’이다. 당시 보안사령관으로 합동수사본부장을 겸하고 있던 전두환과 군부집단은 이 사건의 주모자로 백기완 등을 지목하였고(사실 백선생은 이날 감옥에서 막 풀려나온 직후라 주모자가 될 수 없었다), 백선생은 보안사로 끌려가 여러달 감금되어 갖은 고문과 악행을 당하였다. 12·12사태와 광주에서의 살육과 항쟁 기간 내내 감옥에 갇혀 있다가 소위 5공화국이 출범되고 나서야 겨우 풀려난 선생은 거의 빈사 상태였다. 80킬로그램 나가던 몸무게가 40킬로그램으로 줄었으며, 선생은 하루에도 몇번씩 의식을 잃고 신음하곤 하였다.

나는 그 무렵 동양텔레비전방송국(TBC-TV) 피디로 재직하면서 스승이신 정권진 명창께 판소리를 전수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백선생의 소식을 듣고 장충동에 있는 낡은 적산가옥 이층집으로 병문안을 갔다가 선생의 참혹한 모습에 마음이 너무 아파 자주 댁에 들르게 되었다. 한번은 의식이 오락가락하시는 선생님 곁에 그냥 오래 앉아 있기가 무료하여 그동안 수련한 판소리 심청가 중에서 한 대목을 들려드렸는데, 누워 계시던 선생님이 불현듯 의식을 회복하고 벌떡 일어나시는 것 아닌가? 이날부터 선생님의 쾌유를 위한 일종의 ‘소리치료’가 한동안 계속되었는데, 어느 날 의식을 꽤 회복하신 선생님이 내 소리에 대한 평을 이렇게 하셨다.

“진택아, 네 소리를 듣고 내가 정신이 많이 돌아왔어. 기런데 말이야, 소리에는 쇳소리가 들어 있어야 돼. 쇳소리가 뭐이냐 하면 오래도록 노동으로 단련한 사람들, 배고픔과 고통을 수없이 겪어본 사람들 몸에 배어 있는 소리야. 진택이 너는 혼자서 수련은 했어도 노동 단련이 없고 배고픔과 고통을 겪어보질 않아서 쇳소리가 없는 게야.”

놀라우리만치 일관된 민중적 관점이었다. 판소리에서 가장 높이 치는 성음에 수리성·통성·철성 등이 있는바 쇳소리란 바로 철성을 말하는 것. 수리성은 득공의 결과 목이 칵 쉬어서 나오는 소리요, 통성은 타고난 기세를 뱃심으로 내지르는 소리라 대충 알고 있었지만, 철성이 어떤 소리인지는 나도 잘 모르고 있었던바…… 백선생은 철성을 노동의 땀과 피와 고통과 눈물이 쌓여 응축된 분노, 그 분노를 삭여 내지르는 성음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백선생의 시 중에 「전지 요양의 길목에서」라는 시가 있다. 이 시를 비감하게 또는 힘차게 읽어보면 ‘쇳소리’가 소리에만 아니라 시에도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쇳소리’로 외치는 비장과 분노야말로 가장 감동적인 시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비나리—묏비나리

백기완 선생의 시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 대표적인 투쟁가요로 자리매김한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라 할 수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항쟁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산화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들불야학 후배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담은 노래굿 「넋풀이」 카세트테이프 맨 마지막에 실려 있는 노래이다. 이 테이프 제작의 실질적 총 기획 및 대본 연출은 당시 광주에 거주하던 작가 황석영에 의해 이루어진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로 시작해 ‘산 자여 따르라’로 끝나는 그 비장한 가사는 백기완 선생의 미발표시 「묏비나리」의 핵심 구절을 노랫말로 차용했음이 나중에야 밝혀졌다.

백기완 선생이 글쟁이(작가·저자)로 입문한 것은 앞서 소개한 1979년의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인즉, 백선생은 46세의 뒤늦은 나이에 작가 또는 저자로 등장한 셈이다. 그런데 백선생의 시(詩) 입문은 그보다도 더 늦은 나이인 1982년에야 이루어졌다. 그 과정을 돌아보면서 나는 백선생 시의 특징으로서 ‘비나리’라는 성격에 주목하게 되었다.

백선생은 ‘우리말 지키기’의 으뜸이(으뜸가는 사람)이다. 선생은 시를 ‘시’라 하지 않고 ‘찰’이라고 일컬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중 문익환 목사 대목을 보면, 백선생은 장준하 선생 장례식에서 그의 동무 문익환 목사를 처음 만나 호형호제하면서 지내게 되었는데, 문목사가 감옥 가기 직전 백선생에게 건넨 몇편의 시를 창비 염무웅 주간에게 전할 때 ‘찰’이라는 말을 발상해낸 것으로 보인다. 사실은 문익환 목사도 늦깎이 시인인데, 백선생은 문목사의 시를 읽자마자 ‘맑은 찬샘이 찰랑찰랑 넘치듯 찰찰 넘치는 시상(詩想)’에 감흥받았다. 이후 백선생은 시는 ‘찰’로, 시인은 ‘찰니’로, 시집은 ‘찰묵’으로 고집스럽게 일컬은바, 좀 억지스러운 느낌은 있지만 그 발상이 대단히 신선 탁월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허나 정작 백기완 선생의 시는 ‘찰’이라기보다는 ‘비나리’로 일컫는 것이 훨씬 합당하다. 이를 증빙하는 대표적인 시가 바로 「묏비나리」이다.

1979년 말 YWCA 위장결혼식사건으로 체포된 백선생은 모진 고문 끝에 투옥되었고, 그 직후 80년 5월 광주에서 엄청난 학살과 이에 마주한 처절한 항쟁이 일어났음을 감옥 안에서 들었다. 고문과 투옥의 여파로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던 백선생은 스러져가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혼자 힘으로 일으켜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리하여 병상에 드러누운 채 광주의 학살과 투쟁에 더한 자신의 통한과 분노와 염원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첫 줄을 지어 흥얼거리고, 다음 줄을 지어 되뇌어 읊조리고, 이를 다시 추리고 모아 되풀이 웅얼대고 외치고 새기면서 드디어 한편의 시를 완성해냈으니 이 시가 바로 「묏비나리」이다.

 

맨 첫발

딱 한발띠기에 목숨을 걸어라

목숨을 아니 걸면 천하없는 춤꾼이라고 해도

중심이 안 잡히나니

그 한발띠기에 온몸의 무게를 실어라

 

아니 그 한발띠기에 언땅을 들어 올리고

또 한발띠기에 강바닥을 들어 올려

저 살인마의 틀거리를 몽창 들어 엎어라

 

(…)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굽이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

 

(…)

 

이 썩어 문드러진 세상

하늘과 땅을 맷돌처럼 벅, 벅,

네 허리 네 팔뚝으로 역사를 돌리다

마지막 심지까지 꼬꾸러진다 해도

언땅을 어영차 지고 일어서는

대지의 새싹처럼

 

젊은 춤꾼이여

딱 한발띠기에 일생을 걸어라

 

백기완 선생은 자신의 시를 스스로 낭송하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그는 낭송하기 위해 자신의 시를 외운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가 글자로 적혀 세상에 나왔을 때는 이미 백선생 자신이 그 시를 줄줄 외고 있던 때이다. 백선생은 시를 글자로 지은 것이 아니라 입으로 흥얼거려서, 끊임없는 읊조림으로, 가슴 속 외침과 절규로 줄기찬 염원과 바람을 담아 그 비념을 쌓고 쌓아 빚어낸 것이니, 그의 시는 과연 ‘비나리’였다. 사람이 사람한테 사람을 불러일으키는 미적 계기, 그것이 ‘비나리’이다.

 

썽풀이춤

1987년 남영동 치안본부에서 저질러진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폭로되면서 전두환 군부독재의 아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유신헌법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는 국민적 항쟁은 6월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고, 그 와중에서 연세대 학생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한열군의 장례식이 있던 날 현직 서울대 교수인 춤꾼 이애주는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한열의 죽음을 애도하고 영령을 위로하는 한판 춤을 추었는데, 춤의 기세가 우리 민속사나 무용사에 전례가 없는 파격적인 형세였다. 그 춤을 살풀이춤이라고 부르기에는 그 사위와 모양새가 같지 않고, 해서 일부 언론에서는 그 춤을 일컬어 ‘시국춤’이라고 명명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춤을 현장에서 지켜보셨던 백기완 선생은 얼마 뒤 모인 자리에서 그 춤을 ‘썽풀이춤’이라고 칭하였다. 처음 듣는 용어였지만, 듣는 순간 ‘썽풀이춤’이야말로 이애주가 춘 그 춤을 일컫는 가장 적확한 용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썽풀이춤’은 ‘한풀이춤’ ‘살풀이춤’과는 어떻게 다른가? 나는 그것이 ‘분노의 미학’에 관련된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대한 분노, 시대에 대한 분노가 솟구쳐서 온 세상 온 시대를 움켜쥐고 잡아 흔들어 질곡을 깨트리는 처절한 몸부림, 그것이 ‘썽풀이춤’인 것이다.

백선생은 그날 같은 자리에서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하였다.

“혁명이 질곡의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는 게야!”

 

새뚝이

1987년 12월의 대선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과제를 남겼다. 6월항쟁의 성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였으나 김대중 김영삼 두분이 모두 출마함으로써 그동안 생사를 같이하며 투쟁해왔던 재야진영이 대선 대응노선 차이로 분열하게 되었다. 한쪽은 김대중 선생이 좀더 진취적이고 역량이 크신지라 그분을 ‘비판적으로’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다른 한쪽은 온건·단순한 김영삼 총재가 먼저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안전할 수 있으니 두분이 어떤 식으로든 단일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대선 날짜는 점점 다가오고 백척간두(百尺竿頭)! 장대 끝에 올라선 위기라. 일각에서 민중후보를 독자적으로 내어 후보단일화를 강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해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인대회가 열린 날, 행사장인 명동 YWCA 강당에 긴급 전단이 나돌았다. ‘백기완 선생을 민중후보로 추대하자!’ 분위기가 뒤숭숭할제 바로 앞서 축사를 하시던 내빈께서 민중후보 추대는 누군가의 공작일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우려하였다. 다음번 축사는 백선생 차례였다. 연단에 나선 백선생은 비장한 분위기로 연설을 시작하였다. “여러분, 방금 어느 인사께서 이 시점에 민중후보를 추대하는 것은 누군가의 공작일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공작이 틀림없습니다.” 순순히 비판을 시인하는 듯하던 백선생이 돌연 목소리를 높여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여러분, 이 백기완이를 민중후보로 추대한 주체는 바로 민중입니다. 다른 누구의 공작도 아닌 바로 민중 자신의 공작입니다.” 건곤일척(乾坤一擲)! 목숨을 걸고 진검으로 겨뤄야 하는 단판 승부! 아무도 예기치 않았던 ‘새뚝이’의 등장으로 일순 장내가 조용해지면서 정적이 잠시 흘렀다.

87년 대선 시기에 나는 민중 대통령후보 백기완의 특별보좌관을 맡았다. 요즘 대선처럼 수백명 명함 찍어 돌리는 특보단이 아니라 단 한명밖에 없는 진짜 특별보좌관이었다. 다만 나는 거기에 백기완 후보의 운전기사이자 수행비서를 겸해야 했다. 민중후보 진영에 자동차라곤 내가 가진 포니엑셀 한대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군부독재 집권세력은 민중후보 진영을 ‘좌경’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선거본부로 쓰고 있는 진관동 기자촌 선생 댁에 협박전화들이 걸려오곤 해서 백선생도 그런 일들이 적잖게 신경에 거슬리는 듯했다. 물론 후보조직 안에는 진보적 노동단체 일부가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좌경으로 몰려야 할 이유는 없었다.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는 아무리 좌경해도 남북을 통틀어 볼작시면 중도우파밖에 되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후보 자신이 좌니 우니 하는 따위에 개의치 않았고, 선생 자신의 언표를 빌리면, 좌우 문제가 아닌 누가 옳고 누가 그르냐 하는 문제만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군부독재세력의 이념 시비를 적절히 방어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런 가운데 대학로 대규모 집회에 무려 10만여명의 청중이 모여들었다. 문자 그대로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 자칭 광대인 나는 단상에서 사회를 맡았고, 순서상 분노의 감정보다는 풍자의 묘수가 먼저 필요하다고 느꼈다.

“여러분, 저 군부독재세력이 우리 민중후보를 좌경이라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좌경이 대체 뭡니까? 난폭한 운전사가 핸들을 갑자기 우측으로 꺾으면 승객들은 모두 좌로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극우 세력에게 운전을 맡기면 우리 국민은 모두 좌경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똑바로 서 있으려면 저 극우 독재 운전사를 바꿔쳐야 합니다. 가자! 백기완과 함께 민중의 시대로!”

청중들 반응은 열화 같았고, 그후 민중후보를 좌경으로 모는 언동은 수그러들었다.

87년 대선정국에서 민주진영 양김 후보의 분열을 막지 못한 백선생은 선거 이틀 전 피눈물을 머금고 사퇴하였으며, 선거 결과는 예측한 그대로 참담한 패배였다.

87년 6월항쟁의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해 12월의 대선 패배는 우리 정치사에 엄청난 피해와 좌절을 남기게 되었으니, 하나는 영호남 간 배타적 지역감정의 심화요, 다른 하나는 친일·독재·수구세력의 여전한 잔존(殘存)이다. 87년 대선정국의 ‘돌연한 새뚝이’였던 백기완 선생은 역설적이게도 이로부터 30년이 지난, 이른바 ‘촛불혁명’ 시기에도 ‘거리의 투사’ ‘백발의 투사’로 앞장서야 하는 자신의 책무를 마다할 수 없었고, 그리하여 백기완 선생은 우리 시대의 ‘영원한 새뚝이’ ‘지칠 줄 모르는 젊음’ ‘꺼지지 않는 촛불’로 남게 되었다.

 

이야기꾼

백기완 선생은 통일꾼이자 불쌈꾼이고, 비나리꾼이자 이야기꾼이다. 사실은 노래도 정말 잘 부르신다. 팔순이 다 된 무렵 서울대 문화관에서 있은 ‘노래에 얽힌 백기완의 인생’이라는 공연에서는 흘러간 노래들을 정치적·사회적·문화적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유행가가 아닌 ‘시대의 노래’로 들어올리는 빼어난 시각을 보여줌으로써 2천명이 넘는 청중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바 있다. 백선생의 노래솜씨는 ‘분노의 감정을 삭이고 삭여 끝내 비애의 정서로 치환해내는’ 연금술에 비유할 수 있다.

하지만 백기완 선생의 진면목은 민중적 ‘이야기꾼’이라는 점에 있다. 이야기의 내용도 탁월하거니와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 또한 탁월하다. 백선생의 대담프로그램을 라디오로 들었다는 어떤 청중은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넋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강약, 완급, 고저, 냉온…… 상상할 수 있는 수법은 모조리 동원되어 사람의 마음을 쥐락펴락하였다”라고 소감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만약 ‘판소리’ 아닌 ‘판이야기’에도 예능보유자를 인정한다면 백기완 선생이야말로 이 부문의 첫번째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어야 마땅하다.

백기완 선생의 이야기 내용은 주로 민중적 전형성을 지닌 인물 또는 동물에 관한 소재들과 민중이 염원하는 이상향에 관한 주제들이다. 영웅설화의 민중판이라고나 할까? 질곡의 늪에 빠진 세상에 샛별처럼 나타나 현상 타파의 계기를 일구는 전형적 인물 ‘새뚝이’, 자기를 옥죄고 있던 쇠사슬을 끊고 스스로 해방을 일구는 사내 ‘쇠뿔이’, 부당한 상대에 고개 숙이지 않고 목을 뻣뻣이 세워 앞만 보고 가는 사내 ‘곧은목지’ 등은 대륙적이면서 민중적 전형성을 지닌 대표적 인물들로,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 까뮈의 시지프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보다 훨씬 더 우렁차고 역동적이다.

‘장산곶매’ 이야기는 생사를 결단하고 싸움터에 나서는 전사·의사·열사의 전형상을 은유한 설화요, ‘이심이’ 이야기는 착하고 힘없는 민중들이 힘을 합치면 무지막지한 지배계층의 폭력도 이겨낼 수 있다는 예언적 설화라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골굿떼 이야기’는 이밥에 고깃국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새세상을 염원하는 민중의 꿈을 대변한 설화일 터이며, ‘찬우물 이야기’는 아무리 마셔도 마르지 않고 샘이 솟는 땅, 생명이 용솟음치고 평화가 넘치는 이상향을 그린 설화로 읽힌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부당한 압제로 인해 깨져나간 민중의 삶과 고통에 분노하고 그 삶과 꿈을 다시 불러일으켜 세우는 ‘불쌈(혁명)의 미학’이 깔려 있다.

 

노나메기

1987년 이후 백기완 선생의 사상과 생애를 한마디로 응축한 말은 ‘노나메기’이다. ‘노나메기’란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여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벗나래(세상), 니나(민중)들의 바랄(소망)’을 뜻한다.

나는 이 글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불쌈꾼 백기완의 한살매를 더듬어보았으나 1987년까지밖에 다루지 못하였고, ‘불쌈꾼’이라기보다 ‘새뚝이’로서의 백기완을 그리는 데 그치고 말았다. 햇수로만 따져보더라도 이는 백기완 선생 한살매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못한다.

1987년 이후 선생은 이 땅의 핍박받는 사람, 차별받는 사람, 소외받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더 낮은 벗나래로 자신의 몸과 마음과 생각을 옮겨 사셨다. 나는 계급적 한계와 체력적 한계로 불쌈꾼 백기완 선생을 곁에서 더 모시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노나메기’ 세상을 염원한 이 시기, 불쌈꾼 백기완 선생에 대한 치열하고 처절했던 기억 또는 체험은 선생과 함께한 또다른 이들이 전해주기를 기대한다. 굳이 한 사람을 추천한다면, 우리 시대 비나리꾼의 계승자 송경동 시인의 이야기도 들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