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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경미 金京眉
1959년 서울 출생.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쉿, 나의 세컨드는』 『고통을 달래는 순서』 등이 있음. lilac-namu@hanmail.net
나,라는 이상함
새소리가 싫은 것
잦은 이사와 기차는 좋지만
둥근 산책과 등산복이 싫은 것
가만히 있는 건 유리창처럼 근사한 일
유리창 옆에 혼자 있는 건
산꼭대기 구름처럼 높은 일
독시체르* 같은 이름
어딘지 지독한 느낌
말하지 않고도 말하는 그 악기의
손자국 같은 부푼 뺨
슬픔에 담갔다 꺼낸 것들은 안심이 된다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이들은
무조건 믿을 만하다
양말을 한쪽만 신는 것
2개는 너무 많거나 아프리카처럼 너무 뜨겁다
높은 굽이 좋은 것
땅과 알맞게 떨어져 걸어야 애정도 생긴다
죄와 벌쯤이어도 괜찮다
나뭇잎들의 성격은 해마다 4개쯤이고
망치와 못 틈에 끼인 내 성격은
오늘은 7개에서 내일은 2개로 줄었다가
3개를 버려 지금은 마이너스다
당신은 몇개를 발휘하고 몇개를 휘발시켰는지
이 행복이 다 실패지 뭐겠는가 포기하다가도
사실 더 이상한 존재가 있으니
배와 비행기이다
어디든 가고 싶다고
쇳덩이가
물 위를 걷고 허공을 날다니
더 이상한 존재는 물고기들
물속에서 익사하지 않다니
다들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나만 빼놓고 다들 지독하다니!
알약은 절대 못 삼켜
사람도 가루를 내야만 먹는 나인데
--
* 티모페이 독시쩨르(Timofei Dokshitser, 1921~2005): 우크라이나 출신의 트럼펫 연주자
절반과 두배
영화 절반이 넘도록 예고편인 줄 알고
대충 봤다
분명 궁중 정원풍의 한정식집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정통 빵과 수프의 양식 레스토랑이었다
베니스가 포함된 줄 알고 떠난, 이거 다 실화인데
정말 실제상황인데, 이태리엔 로마만 포함이었다
나는 대개 어디서도 잘 포함되지 못한다
우정이거나 사랑인 줄 알고 비싸게 구매할수록
뜬구름이다
긍정과 낙관의 개똥은 환불도 안된다
외로울 땐 옷가게엘 가서 다른 색깔은 없냐고 묻는다
그게 몇달치 집밖 대화와 처세와 사교의 다인데,
세상 어디에도 딱 맞는 사이즈는 없어요
세상 어디에도 딱 맞는 디자인은 없어요
옷가게 주인은 불친절하다
제대로 살기 시작한 게 오늘 오후 4시부터라서
‘다행’의 목록이 달랑 낱장 한페이지
12포인트 절반 분량도 안되는 낱장
한장인 게
떨어지면 절대 되줍지 못한다는 달랑 한장인 게
너무 도박꾼의 오후 같은 게
수치스럽게도
트러블과 트래블의 알파벳이 뒤바뀐 간판
국제선 상공의 비행기 안에서 쌍욕을 나누면서
취객아저씨 두명이 멱살잡이 직전인데
열두시간 붕 뜬 허공에서 계속 싸울까
나중엔 화해를 할까
밀폐된 비행기 안
두가지 다 해도 안해도 멋쩍겠지
땅에서도 늘 멋쩍은 사람은
출생과 죽음으로 막힌 붕 뜬 비행기
밀폐의 붕 뜬 허공과
내내 다투는 탓일까
화해를 안해서 내내 어색한 걸까
두 발끝이 어색한 저녁
옷가게 주인의 불친절이 맞다
착각을 필두로 딱 맞는 건 아무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