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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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都鍾煥

1954년 충북 청주 출생. 1984년 『분단시대』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고두미 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부드러운 직선』 『해인으로 가는 길』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사월 바다』 등이 있음.

djhpoem@hanmail.net

 

 

 

출항

 

 

태풍이 밤새 서해의 섬들을 훑고 지나갔다

어떤 집은 외벽이 떨어져 나가고

어떤 집은 지붕이 날아가 처참한 내면이 다 드러났다

가지 꺾인 나무가

뿌리 뽑힌 나무를 내려다보고 있다

결박된 밧줄 잘 풀어지지 않지만

다시 출항 준비를 해야 한다

비안개에 섞여 밀려오는 게 두려움인 걸 알지만

또 길을 떠나야 한다

키를 넘는 파도가 밀려왔다 가면

다시 밀려오고

사나운 빗줄기 몰아친 뒤 며칠 지나지 않아

또 태풍이 몰려오는 일이 반복되는 항해가 될 것이다

낯선 섬들을 만나고 오래된 도시들을 지나갈 것이다

이방인들처럼 보이는 이들과 만나며

익숙지 않은 관습과

경계하는 시선들을 접하게 될 것이다

의심하는 이도 있고 미워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적국의 병사와 악수를 할 때도 있고

이교도들의 기도를 들어야 하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많은 여정의 충돌 속에서 지혜로워지고

생경한 경험들이 생을 더 풍요롭게 해주길 기원한다

무엇보다 낮엔 뜨겁고 밤엔 시린 바람 속에서

고양되는 어떤 것들이 정신의 일부가 되어주길 바란다

뱃전에서 미끄러지면 한순간에 죽음의 늪으로 떨어지듯

모든 시간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간의 연속이지만

다시 또 생애를 걸고 떠나는 이 항해가

치열하고 절박한 생의 시간으로 축적되길 바란다

우리의 항해와 그 기록들이

새로운 세계를 설계하고

더 많은 상상을 하게 되는 출발이 되면 좋겠다

갈등의 등에 올라타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보다

갈등을 푸는 게 실력임을 알게 되고

이견이 있고

차이가 있고 수시로 폭우가 쏟아져도

우리가 한배를 타고 간다는 것

조급해하지 말자는 것

모든 일을 다 해결할 전지전능한 지도는 없다는 것

우리도 부족하고 불완전하다는 것

그럼에도 유능하고 실력 있는 선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래서 잘 나이 들어가는 뱃길이어야 한다는 것

겸허하게 늙은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사투

 

 

일몰의 시간이 왔다

하늘 가득 청색 잉크빛이었다가

먹물이 잉크에 스미듯 캄캄해지고 있다

일몰에서 일몰 이후의 시간으로 바뀌고 있다

한 사람의 일생은 그 자체로 한 시대다

한 사람의 생이 저문다는 것은

그와 함께 여기까지 온 한 시대가 저문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병상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사투의 시간을 지켜보는 하루의 안쪽은

끈적끈적하다

그 고통이 곧 내가 감당해야 할 벌이라는 걸

나는 온몸으로 안다

 

막바지 전투가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것은

유월 열이틀부터 휴전되던 날까지였다

화살머리고지 백마고지 공작새능선 이런 이름의

이삼백 고지를 빼앗았다 빼앗기기를 되풀이하던 시간

고지마다 한번에 수백수천명이 죽어나가던 처절한 시간을

아버지는 다시 통과하고 있다

올여름처럼 그때도 땡볕 더위와 폭우가 반복되었을 것이다

거기다 매일 포탄이 쏟아졌을 것이다

그 진흙 구덩이 참호 속에서 벌이던 사투의 시간

그런 시간을 아버지는 다시 지나가고 있다

며칠이 멀다 하고 생과 사의 능선을 오르내리고 있다

이십대 청년이었던 그때는

고지전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으나

이번 여름의 사투에서는 이기지 못할 것임을

아버지도 알고 있다

 

식민의 땅에서 아버지는 태어났다

수만평 농토는 이미 속절없이 빼앗기고 난

속수무책과 무기력의 대지 위에서

아버지는 굶주림과 싸웠다

초봄이 오기 전부터 부황이 들어

몸이 누렇게 부어오르던 어린 시간은 참혹하였다

이른 봄의 풀과 쑥과 나싱개는 채 자라기도 전에

꺾여나갔고 자란 것들도 빈약하였다

그 빈약한 어깨 위에 지게가 지워졌고

돌 날라 제방 쌓는 공사장에 나가 막노동을 했고

끼니때마다 허기와 싸웠다

가혹한 절대빈곤의 소년기였다

아버지의 맏형은 이십대에 징용으로 끌려가 죽었고

아버지의 이십대가 오자 전쟁이 났다

보도연맹으로 끌려갔다가 처형 직전에 살아 왔는데

뒤이어 들어온 인민군에 끌려갔고

거기서 도망쳐 나왔다가 유엔군에 배속되어

전쟁터를 오르내렸다

도처에 적이었다

동료들 시체 옆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의 그 모질고 악착스러움을

본능처럼 살에 새기는 일이었다

삼년 내내 처절하였다

 

휴전이 되고 난 뒤에도

싸움은 여전하였다

도처에 폐허였다

폐허 위에서 다시 살아남아야 했으므로

절박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생존을 위한 싸움은

후방부대의 지원도 포사격도 없는 각개전투였다

총을 내려놓았으므로 맨손뿐이었다

맨손으로 살아남아야 했으니

실패가 기다리고 있었다

실패와 패전을 반복하게 하면서 세상은

아버지를 이기고 돌아온 전사가 아니라

패잔병 취급했다

아버지도 강퍅해졌지만

세상은 더 모질었다

 

실패로부터 도주하려고 몸부림치지만

도주가 곧 방황인 날들과

기약 없는 하루하루

내일은 살아남을지 알 수 없는 날들이 이어지자

빈곤은 오래 입은 옷처럼 몸에 걸쳐져 있었다

가난과 싸워 이기지 못하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나는 그런 아버지와 싸웠다

대물림되는 궁핍이 싫었고

암울한 청춘의 날들이 미웠다

아버지가 모진 세상과 싸우는 동안

나는 나 자신과 싸웠고

아버지가 노동으로 싸우는 동안

나는 실존이라는 관념과 싸우는 것으로

아버지의 날들과 맞섰다

경제적 재기가 목표인 아버지와

전혀 다른 목표를 세워 아버지를 거역했고

아버지가 요구하는 현실적인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내 삶이 되었다

나는 늘 아버지가 소망하는 것과

다른 선택을 하는 것으로 아버지를 배반했다

아버지의 불행은 그래서 끝이 없었고

아버지와의 말 없는 불화는 뿌리 깊었다

내 운명이 어긋나고 어긋나는 것을

아버지와 아버지의 시대로 인한 것이라 여겨

원망 또한 가슴 깊은 곳에 우물처럼 고여 있었다

 

산소호흡기에 빨간불이 들어오며

경고음이 울린다

진작 이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은

내 편협한 서정 때문이었으리라

내가 내 숙명의 골방에서 문을 걸어 닫고

상처에 매몰되어 끙끙대는 동안

아버지 생의 하반신은 얼마나 불편이 깊었을까

흡인성 폐렴을 치료하기 위한 기구들이 입안에 주입되어

말을 할 수 없게 된 아버지가

백지에다 내가 죄가 많다고 마지막 말들을 쓸 때

나는 내가 더 죄가 많다고 말했어야 했다

아버지가 모시던 하느님의 후손들 손을 끌고 와

화해를 부탁하고

통회하며 무릎 꿇었어야 했다

 

그 모진 싸움은 운명과의 싸움이었다고

아버지와의 싸움이 아니라

아버지도 나도 가혹한 운명과 싸운 것이라고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결국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고

운명을 받아들이고 끌어안고

싸움 말고도 다른 길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상처와 뉘우침과 회한이 이리 깊지 않았을 것을

왜 좀더 일찍 알지 못했을까

 

빨간 기계음이 또 울린다

많이 늦었다

밤의 깊은 공간 속을

경고음이 곡선을 반복해서 그으며 지나가고 있다

가난이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가난한 시대를 끌어안고 싸우던

아버지의 한 시대가 함께 저물고 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 말을

아버지가 들을 수 있을 때

이 말을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