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소설

 

 

김유담 金裕潭

1983년 부산 출생. 201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탬버린』, 장편소설 『이완의 자세』 등이 있음.

neverend1130@hanmail.net

 

 

 

안(安)

 

 

엄마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은 A병원

큰집 오빠가 보내온 문자메시지였다. 갑자기 날아든 큰엄마의 부고가 당혹스럽기만 했다. 발신자인 사촌오빠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사촌 올케언니를 주소록에서 검색했다. 오빠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집안 행사 자리에서 전화번호를 받아둔 기억이 났다. 큰엄마는 새아기와 윤미 모두 같은 서울에 있으니 자주 보고 연락하고 지내면 되겠다고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 큰엄마 앞에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그후로 언니와 연락한 적은 없었다.

새언니는 그때 내 전화번호를 저장하지 않은 눈치였다. 발신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네, 그런데 누구시라고요?”

“언니, 저 윤미요. 기환오빠 작은집 사촌동생이요.”

“아, 네. 아가씨.”

“큰엄마 어떻게 되신 거예요? 이게 무슨 소리인지…… 진짜 돌아가신 거예요?”

“네, 맞아요. 그저께 어머님이 위독하시다는 연락받고 오빠가 급하게 내려갔어요.”

차분하고 담담한 말투였다. 언니와는 달리 나는 믿기지 않는 소식에 호흡이 가빠지고 말이 빨라졌다.

“위독이요? 가, 갑자기요? 제가 한달 전에 통화했을 때만 해도 길게 말씀도 하시고, 괜찮으셨는데요. 코로나 좀 잠잠해지면 제가 한번 내려간다고도 했는데, 이럴 수가 있는 건가요?”

“그러게요. 갑자기 그렇게 되신 것 같아요. 뇌졸중이 왔다는데 저도 자세한 건 몰라요.”

“뇌졸중요? 언제요? 쓰러지신 건가요? 한달 전까지만 해도 진짜 멀쩡하셨거든요. 언니는 마지막으로 통화한 게 언제였어요?”

새언니는 대답 없이 잠깐 머뭇거렸다. 잠시 후 그녀가 목소리를 깔며 내게 되물었다.

“아가씨, 제가 시어머님이랑 통화한 내역까지 아가씨한테 보고드려야 하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갑자기 이렇게 되셨다니 너무 당황스러워서요.”

“제가 의사도 아닌데 갑자기 악화된 연유까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동안 코로나 때문에 요양병원 면회가 안 됐잖아요. 오빠도 그저께 연락받고 내려갔는데 코로나 검사 결과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어제 오후에 겨우 얼굴 뵈었대요. 방호복 입고서라도 임종 지킨 게 다행이죠. 저도 지금 준비해서 내려가는 중이에요. 장례식장에서 봬요.”

나는 핸드폰을 손에 든 채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임종, 장례식 같은 단어를 내뱉는 언니의 말투가 지극히 건조하고 사무적이라 통화를 하는 동안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격한 감정이 전화를 끊고 나서야 몰려왔다. 큰엄마는 나에게 엄마나 마찬가지였다. 씻으러 욕실에 들어가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회사에 나가 급한 업무를 처리하고 휴가를 낸 후 A시로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엄마의 전화가 아니었더라면 한참을 더 울었을 것이다.

“큰엄마 소식 들었지? 너 그렇게 울고 있을 줄 알았다. 나 죽을 땐 안 울어도 큰엄마 죽었다는 소식엔 세상이 무너지지?”

“엄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큰엄마 어떡해? 너무 불쌍해.”

나는 큰엄마라는 말을 뱉자마자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말이다. 복 없는 양반…… 정신 사나우니까 그만 울어. 여기 와서 실컷 울 텐데 미리 힘 뺄 일 뭐 있어. 공서방도 같이 오니? 지금 옆에 있어?”

“아니, 나 혼자 갈 거야. 요즘 우리 따로 지내.”

“결혼이 애들 장난이니? 무른다고 그게 물러질 일이냐고.”

“엄마, 그만.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내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

“니가 늘 그런 식이지. 엄마 말은 무시하고 너만 잘났잖니.”

사실 엄마는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어려서부터 나는 엄마 기준에서 한참 모자란 딸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기준을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상위권의 성적을 받아와도 올백이 아니면, 전교 1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엄마 앞에서 나는 늘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처럼 몸을 움츠렸다. 아들 없이 딸만 하나 낳은 엄마는 내가 아들보다 잘난 딸이 되길 바랐다. 여자라서 차별받거나 제약받는 세상이 아니라고,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될 수 있다고 말해놓고도 내가 성에 차지 않는 점수를 받아오면 이 험한 세상에서 여자가 자기 앞가림하며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며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한다고 몰아붙였다.

“의대나 약대, 꼭 전문직이어야 해. 아무도 너를 만만하게 볼 수 없어야 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여자도, 아니 여자일수록 능력이 있어야 해.”

이과 적성이 아니라 의대나 약대는 어려울 것 같다고 해도 엄마는 교차지원 가능 학교 목록을 들이밀며 이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면 네 인생은 끝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나는 의대나 약대에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열심히 공부했다. 엄마가 정해준 곳까지는 아니라도 내가 원하는 학교에 갈 정도의 성적은 거두었다. 서울 소재의 사립대 사회학과에 원서를 내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차라리 집에서 다닐 수 있는 지방 교대에 가라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너는 그동안 엄마가 하는 말을 귓등으로 듣고 넘긴 거니? 무조건 안정적인 직장이 있어야 한다니까.”

나는 결국 엄마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로 왔다. 등록금을 내주면서도 엄마는 내게 격려가 아닌 저주의 말을 쏟아냈다. 이제라도 전문직이나 안정적인 직장을 찾지 못한다면 네 인생은 글러 먹은 거라고, 내 말을 듣지 않은 것을 나중에는 결국 땅을 치고 후회할 거라는 엄마의 말을 귓등으로 들은 거였다면 차라리 좋았을 것이다. 엄마가 어린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던 많은 말들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고여 있었다. 그 고인 말들은 쉽게 흘러나가지도 않고 썩은 물처럼 출렁거렸다.

엄마는 A시에서 20년 넘게 수학전문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P시에서 일본 기업을 주거래처로 하는 해운회사를 운영했던 아버지의 사업이 고꾸라진 직후, 엄마와 나 둘이서만 아버지의 본가가 있는 A시로 왔다. 처음에 엄마는 일본으로 돈을 벌러 간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만 A시에서 기간제 교사로 일하며 버틸 생각이었다고 한다. 결혼 전 수도권 지역의 고등학교에서 수학 교사로 근무했던 엄마는 교직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결혼과 동시에 일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남편의 사업 실패 후 졸지에 가장이 된 그녀는 고작 적성 문제 따위로 정년이 보장된 학교를 뛰쳐나온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엄마는 큰아버지의 소개로 A시에 있는 중학교에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게 되면서 큰집 근처로 나를 데리고 이사 왔다. 여섯살 난 나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학교에 나가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작 나를 돌본 것은 엄마의 시어머니가 아닌 손위 동서, 그러니까 나의 큰엄마였다.

2년 후 아버지가 일본에서 빈털터리로 돌아왔을 때 엄마는 앞으로 A시를 쉽게 떠날 수 없음을 자명하게 깨달았다. 그녀가 기간제로 근무 중인 학교에서는 아이까지 딸린 기혼의 여교사를 정식으로 채용해줄 생각이 없었으므로, 계약 종료 후 엄마는 학원을 차렸다. 그 당시만 해도 A시에는 제대로 된 수학전문학원이 없었다. 엄마는 사범대 졸업장과 교사 경력을 내세워 학생들을 모집했다. 아버지는 학원 봉고차를 몰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하교 후 큰집으로 가서 시간을 보냈다.

큰집은 어린 내 눈에는 위압감을 느낄 정도로 넓고 큰 집이었다. 방 두칸짜리 연립주택이었던 우리 집과 달리 방이 네칸에 마루도 널찍한 단독주택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거주하는 가족 수에 비해 너무 비좁은 곳이었다. 당시 큰집에는 할머니, 큰아버지 부부,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명의 사촌오빠, 그리고 결혼하지 않은 막내삼촌까지 같이 살고 있었다. 그 많은 식구들의 끼니와 빨래를 챙기고 집 안 청소를 하는 것은 오로지 큰엄마의 몫이었다. 그 와중에 작은집도 챙겨야 했다. 큰집 사람들은 우리를 작은집이라고 불렀다. 할머니는 큰엄마를 큰애, 우리 엄마를 작은애라고 부르며 큰 사람이 작은 사람을, 큰집이 작은집을 돌보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큰엄마는 학교에서 돌아온 작은집 조카를 먹이고 씻기며 돌봤고, 작은집 식구들의 저녁식사까지 챙겨야 했다. 어느 해 겨울에는 해산한 막내고모까지 갓난아기를 데리고 와 몸조리를 했다. 추운 겨울, 기저귀를 하얗게 삶아 빤 후 언 손을 불면서 빨랫줄에 널던 큰엄마의 모습을 기억한다. 항상 커다란 솥에 국을 끓이느라 가스불 앞에 오래 서서 땀을 흘리던 큰엄마의 얼굴을, 다리를 벌리고 앉아 붉은색 고무대야에 한가득 깍두기를 담그던 큰엄마의 앉음새를, 스테인리스 들통에 뜨거운 물을 끓여서 내 머리를 감겨주고 목욕을 시켜주던 손길도 기억한다. 손발톱을 깎아주며 혹시나 생채기가 생기지나 않을까 집중하던 눈빛도. 어떻게 그 모든 일을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고 할 수 있었던 걸까.

 

큰엄마에게 나를 맡겨놓고도 엄마는 별로 고마워하지 않았다. 큰집에 올 때마다 남편 잘못 만나 이게 무슨 고생이냐며, 돈은 안 벌어 와도 괜찮으니 학원에 빚쟁이 찾아오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다며 앓는 소리를 했다. 그럴 때면 할머니와 큰아버지는 딴청을 피웠고, 큰엄마가 엄마를 달랬다. 서방님도 잘해보려고 그런 거라고, 동서가 조금 참고 기다려주면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말하며 큰엄마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 날이면 엄마는 집에 돌아와 나를 붙들고 하소연을 했다. 큰엄마 때문에 늘 자신만 나쁜 사람이 된다며, 형님에게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고 했다. 그런 재주라면 엄마 역시 만만치 않았다. 나야말로 큰엄마가 아닌 엄마 손에서 컸다면 미치지 않고서는 못 배겼을 것이다. 엄마는 늘 내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뿐이라고 했지만, 나를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인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대학 졸업 후 언론고시를 준비하다가 작은 인터넷 언론사에 들어갔을 때 엄마는 겨우 그런 델 다니려고 그 고생을 했냐며 나를 타박했고, 공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에도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빨리 결혼하려 하느냐고, 경력을 쌓아 메이저 언론사로 이직한다더니 역시 너는 빈말만 요란하다며 엄마 특유의 빈정거리는 말투로 쏘아붙였다. 세속적인 기준으로만 본다면 공은 내게 과분한 신랑감이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내가 아까워 죽겠다고 했다. 딸 결혼에 보태줄 수 있는 게 없어서 괜한 어깃장을 놓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얘, 내가 수학 선생이야. 나는 계산기 안 두드려봤겠니. 어떤 결혼이든 그건 여자한테 손해야, 이 맹추야.”

내 결혼식 날 엄마는 식장 입구에 침울한 얼굴로 서서 손님들을 맞다가 예식이 시작하자마자 혼주석에 앉아 화장이 다 번지도록 울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기구한 사연이 있어 보일 정도로 서럽게 울었기 때문에 나는 결혼식 내내 굳은 얼굴로 양쪽 혼주석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봐야 했다.

“엄마 그만 좀 울어, 제발.”

본식이 끝나고 가족사진을 찍기 전 엄마에게 눈짓으로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니 발로 지옥불 걸어 들어가는 거니 나중에 다른 사람 원망하지 마.”

내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춘 채 끝까지 독설을 내뱉는 엄마의 말에 그간 묵혀왔던 설운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콧날이 시큰거리고 눈가가 따가워지려는 그 순간 내 옆으로 큰엄마가 다가와 등을 토닥이며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면 드레스를 입은 채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우리 미야, 윽수로 이쁘네. 이렇게 이쁘니 사랑받고 살겠다. 표정이 와 그라노? 신부는 웃어야 된다.”

큰엄마가 두툼한 손으로 부케를 들고 있는 내 왼팔과 손등을 연신 쓸어내렸다. 내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옅은 웃음을 보일 때까지.

 

*

 

공과 결혼하면서 나는 12년간의 자취 생활을 청산하고 방이 아닌 집에서 살게 됐다. 공이 부모의 도움을 받아 마련한 뉴타운의 28평대 아파트는 내가 살아본 집 중에서 가장 쾌적하고 아늑한 공간이었다. 공이 자신의 명의로 된 아파트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와 결혼한 건 아니다. 하지만 아파트가 없었더라면 공과 사귄 지 6개월 만에 결혼을 결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전셋집이라도 마련할 돈을 모을 때까지 결혼을 미룰 수밖에 없었을 테고 그사이 연애 기간이 길어지면서 관계가 지지부진해졌을 수도 있다. 공을 만나기 전 겪었던 몇번의 지난 연애가 그랬듯이.

공과는 우연한 계기에 술자리에서 만났다. 문화부 선배가 자신이 GV행사 사회를 보는 독립영화 예매가 너무 저조하다며 와서 자리를 채워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영화관에 찾아간 날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관은 한산했다. GV까지 마쳤을 때 관객석에는 나와 공을 포함해 다섯명 남짓한 사람들만 남아 있었다. 감독이 끝까지 남아준 관객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원한다면 다 같이 뒤풀이에 가자는 제안을 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공과 합석을 하게 됐다. 공과 나는 서로 옆자리에 앉았는데, 내가 사회자인 박기자와 선후배 사이라는 말이 나오자 놀란 얼굴로 물었다.

“기자분이셨어요?”

“네. 왜요?”

“저는 그냥 저처럼 일반인인 줄. 기자처럼 안 보이세요.”

“기자도 일반인인데요.”

그날 나는 공과 명함을 교환했다. 공은 생리대와 휴지를 만들어 파는 제지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학창 시절엔 씨네필이었고, 지금은 ‘다양성 영화’를 혼자 보러 다니는 것을 취미로 삼은 직장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다양성 영화라는 단어를 기사가 아닌 실제 입말로 내뱉는 사람을 처음 봤고, 그 자리에서 크게 웃어버렸다. 공은 그 웃음을 자신에 대한 호감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이후 우리는 몇번 더 만나다가 정식으로 사귀게 됐다. 주말마다 종로나 광화문에서 만나 영화를 보고, 맥주나 와인을 곁들인 저녁식사를 하며 함께 본 영화에 관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다. 나는 공과 함께하는 시간이 좋았다. 대학 시절 전공 공부에는 손을 놓고 영화만 주구장창 보느라 학사경고를 받은 것이 삶에서 유일한 일탈이었다고 고백하며 후회막심한 표정을 짓는 그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성실하고 반듯하면서도 영화를 보는 시선만큼은 섬세하고 날카로운 그에게서 매력을 느꼈다. 공은 안정감을 주는 상대였다. 삼십대에 접어들면서 물불 가리지 않는 뜨거운 연애보다 내 일과 일상을 풍요롭게 지탱해주는 관계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처럼 대화가 잘 통하는 남자를 만나기도 드물다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공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그를 놓치기 싫은 마음에 결혼을 서둘렀던 것 같기도 하다.

 

지옥불로 걸어 들어간다는 엄마의 악담은 결혼생활을 하는 내내 귓전에 자주 맴돌았다. 지옥불까지는 아니지만, 엄마가 걱정한 것이 무엇인지, 엄마가 말리고 싶어했던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피부로 와닿게 느끼고 있었다. 결혼 후 우리 부부는 토요일마다 한시간 거리의 공의 본가에 가서 하룻밤 자고 왔다. 신혼여행 후 첫 주말에만 그렇게 하려던 참이었는데, 어쩌다보니 매주 가는 것이 주말의 일과가 되어버렸다. 시모는 식단을 공지하듯 다음주 메뉴를 말해주며, 자연스럽게 다음 주말을 기약했다.

“이번주에는 소고기를 먹었으니 다음주에는 해산물이 어떻겠니. 연포탕을 해놓을 테니 먹으러 와라. 다음주 금요일에 장을 봐서 밑반찬도 새로 해둘 테니 가져가고.”

친정과 도보 십분 거리에 사는 공의 누나도 토요일 낮이면 남편과 세살 난 아이를 데리고 왔다. 매주 토요일마다 어른 여섯에 아이 하나가 6인용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점심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면 그들이 내놓는 밥그릇과 국그릇만 해도 각각 일곱개씩 열넷에다가 반찬그릇과 냄비와 프라이팬, 물컵 등을 합치면 씽크대 개수대가 넘쳐날 정도의 설거지 거리가 쌓였다. 나는 밥을 먹고 난 직후 앞치마를 두르고 바로 설거지를 시작했는데, 종종거리며 설거지를 끝내면 그다음에는 과일과 차를 내놓을 차례였다. 남겨진 빈 과일 접시와 포크, 커피잔을 씻고 나면 다시 다음 끼니가 돌아왔다. 여섯명의 성인과 아이 하나가 한 공간에서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 종일 씽크대 앞에서만 서 있어야 하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먹고 치우고, 먹고 치우고, 먹고 치우고, 음식을 준비하는 건 나와 시모의 몫이었고 먹는 것은 모두 함께지만 치우는 건 며느리인 나 혼자만의 몫이었다. 내 목에 두른 앞치마가 마치 죄수에게 씌운 칼처럼 묵직하게 느껴졌다. 나는 사극에 나오는 죄수처럼 똥머리를 틀어 올린 채 씽크대 쪽으로 고개를 떨구고 부엌일을 했다. 나 외의 다른 가족들이 소파에 앉아 과일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동안에도 허리 한번 펼 새가 없었다. 다른 식구들의 눈을 피해 틈틈이 공을 노려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발이었다. 내 눈치를 보며 공이 설거지라도 할라치면 시모가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말렸다. 대체 결혼 전에는 이 모든 설거지를 누가 한 것인지 공에게 물었다.

“주로 누나가 많이 했지. 누나 임신하고 아기 낳은 뒤로는 못하지만.”

주말마다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오는 공의 누나는 언제나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조카는 엄마와 잠깐이라도 떨어지면 자지러지게 울었다.

“올케, 미안해. 내가 같이 해야 하는데.” 공의 누나는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공의 가족 중에서 그런 말이라도 해주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매주 금요일 저녁이 되면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호흡이 가빠졌다. 주말이 다가오는 게 겁이 났다. 평일 내내 격무에 시달리다가 주말은 통으로 시가에 뺏기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그런 걸 일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주말마다 시가에서 설거지를 하고 그 집 씽크대와 가스레인지를 반짝거릴 정도로 닦아내느라, 정작 살고 있는 신혼집은 청소할 시간조차 부족해 묵은 먼지가 쌓여가는 방에서 잠을 청하면서 그런 의문이 더 커져갔다.

결혼 직후부터 나는 공과 자주 다투었다. 시가에 가기 싫다는 내게 공은 외동으로 형제 없이 외롭게 자라 가족들이 모여 밥 먹는 기쁨을 모르는 거라고 말했다. 나는 형제는 없었지만 외롭게 자라지는 않았다. 대가족이 모여 밥 먹는 기쁨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나는 그런 것을 어려서부터 봐왔고, 좋아했다. 큰집에 모여들던 친척들의 환한 얼굴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띠게 되고, 접시 위에 산처럼 쌓여 있던 큰엄마의 음식을 생각하면 금세 입에 침이 고였다. 그 왁자지껄하고 따스한 온기가 지금도 내 피를 돌게 하는 것 같다.

할머니가 정정하던 시절 큰집에서는 명절 차례를 포함해 일년에 열번쯤 제사를 지냈다. 제사나 할머니 생신날 할머니가 낳은 사남매 내외와 일곱명의 손자 손녀들이 모두 모여 상을 펴고 둘러앉아 밥을 먹던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둘째 며느리인 엄마는 제사상 준비도, 생신잔치 음식 준비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제사상이든 생일상이든 준비가 모두 끝나고 상이 차려질 무렵 나타나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밥을 먹었다. 엄마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일어나 설거지를 돕다가 다과와 술상이 차려지기 시작하면 학원에 나가봐야 한다며 바쁘게 자리를 떴다. 그런 엄마를 아버지는 모른 체하며 형제들과 둘러앉아 술을 들었다. 사촌들과 놀고 싶으니 큰집에 더 있다가 가자는 내 등짝을 세게 내리치며 나를 끌고 집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오던 엄마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왜 큰집에 갈 때마다 일분도 더 머물기 싫어했는지, 나는 결혼을 하고 나서야 엄마의 마음을 절절히 이해하게 됐다. 동시에 어린 딸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면서 신발조차 제대로 꿰어 신지 않고 현관문을 나서던 엄마의 뒷모습을 망연하게 바라보던 큰엄마의 표정과 눈빛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최근 들어 유난히 그때의 장면이 자주 떠올랐고, 음식이 잔뜩 차려져 있던 대가족 밥상의 풍경을 곱씹고 곱씹게 됐다.

 

공은 취재 현장에서 밤을 새우는 일도 불사하는 내가 ‘고작’ 설거지가 힘들다고 이렇게까지 인상을 쓰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공에게 내 감정을 ‘설명’해야 한다는 사실에서부터 좌절감을 느꼈다. 머릿속에 그려온 결혼생활과 실제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주중에 각자의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함께 잠들고, 주말에는 시내로 나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며 데이트를 한 후에 헤어지지 않고 다시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삶을 꿈꿨을 뿐이다. 공도 그것을 원한다고 했다. 서로의 삶을 더 사랑할 수 있게 하는 부부가 되자는 약속은 아주 쉽게 허물어졌다. 심지어 공은 그것이 허물어졌다는 것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애 시절 매주 즐겼던 영화나 뮤지컬 한편 보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 거냐며 따져 묻는 내게 공은 시가에 다녀와서 일요일 저녁에 영화를 보러 가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시가에서 1박 2일을 보내고 돌아온 일요일 저녁에는 영화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싫어서 저녁조차 거르고 침대에 누워 있는 일이 잦았다. 내가 성난 얼굴로 대답을 하지 않자 공이 “그럼 내가 엄마한테 말해서 이번주만 빠지는 걸로 얘기할게. 허락해주실 거야”라고 말했을 때 그게 왜 허락씩이나 받아야 하는 일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더이상 싸우기 싫은 마음에 그러기로 했다.

공의 본가에 가지 않은 첫 주말의 토요일, 나는 결혼 후 처음으로 늘어지게 늦잠을 잤다.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니 시내 중심가로 나가는 것도 귀찮아졌다. 마을버스를 타고 집 근처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가서 요즘 가장 흥행한다는 영화를 봤다. 영화의 제목도, 내용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주말에 우리끼리 시간을 보내며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다는 게 중요했다. 일요일에는 둘이서 대청소를 했다. 원래는 집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않고 빈둥거리겠다는 게 계획이었는데 종일 집에 있다보니 곳곳에 보이는 먼지를 닦아내고 싶어졌다. 미뤄둔 이불 빨래도 했다. 침대 시트와 이불을 세탁기와 건조기에 차례대로 넣고 돌렸다. 간만에 맞은 평화롭고 여유로운 주말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건조기에서 갓 꺼낸, 온기를 고스란히 품은 이불을 몸에 감은 채 침대에 누워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눈을 감았다. 이만하면 괜찮은 주말이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주말 동안 재충전을 했으니 내일부터 출근해 다시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들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 순간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전화의 발신인은 시모였다. 공의 엄마는 내게 주말 잘 보냈느냐고, 오늘 어딜 갔느냐고 물었다. 왜 공이 아닌 내 번호로 전화를 걸었는지 좀 의아했지만 대놓고 싫은 티를 내지는 못하고 어딜 간 게 아니라 밀린 청소를 하느라 좀 바빴다고 대답했다.

“두 식구 코딱지만 한 살림에 청소가 밀릴 게 뭐가 있다고, 그럼 종일 집에 있으면서 여기 와보지도 않았던 거니?”

공의 엄마는 내게 서운하다고 말했다. 매일 보던 아들 얼굴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보겠다는 게 무슨 큰 욕심이냐고도 했다. 나는 공에게 눈짓을 보내며 전화기를 넘겼다.

“엄마, 윤미도 힘들어. 평일 내내 직장에서 시달렸는데 주말이라도 좀 쉬어야지.”

“우리 식구 됐으면 자주 보고 어서 정 붙여야지. 힘들면 여기 와서 쉬면 되지, 내가 밥도 다 해주는데 힘들 게 뭐가 있니? 요즘 시댁이 어디 시댁이냐? 우리 시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요즘 시어머니들은 다들 며느리 눈치 보고 산다.”

시모의 목소리가 전화기 밖으로 고스란히 들려왔다.

그후로 나는 주말 당직에 자주 지원했다. 내가 출근하는 주말에는 공만 혼자 본가에 다녀왔다. 그런 날이면 공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공은 주말 출근으로 피로한 나를 붙들고 자신의 부모님은 나쁜 분들이 아니라고, 내가 그것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나 역시 그분들이 나쁘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공이 자신의 가족들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길게 설명하면 할수록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나는 공에게, 공의 식구들에게 공격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 나는 나쁜 며느리인 거냐고, 나는 공에게 되물었다. 공은 그것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말꼬투리를 잡으며 서로를 물어뜯었다. 서로를 이어줬던 것들, 우리가 함께 사랑한 시간과 장소들이 공격의 빌미가 됐다. 결혼 후 같이 영화 한편 보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 거냐고, 씨네큐브에 마지막으로 가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나 하느냐고 내가 따지듯 묻자 공은 영화가 무슨 대수냐고, 씨네큐브 못 간다고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하느냐고 응수했다. 급기야 서로에게 매력을 느끼게 만들었던 상대의 취향마저 공격의 대상이 됐다. 공은 내게 오즈 야스지로오를 좋아하면서 부모님의 깊은 정은 헤아리지 못한다고 비난했다. 나는 켄 로치를 좋아하는 공에게 일상의 차별에는 그리도 둔감하면서 사회 부조리에 대한 고발에 열광하는 게 얼마냐 위선적인 줄 아느냐고 비꼬았다.

공은 처음에는 나를 달래보려 하다가 나중에는 ‘공평’이라는 단어를 꺼내 들었다. 부모님이 이런 집을 마련해주셨는데 그 정도는 우리가 하는 게 공평하다는 말에, 나는 ‘그 정도’에 해당하는 가사노동과 감정노동이 대체 얼마만큼인지를 가늠할 수 없었다. 내가 평생 월급을 모아도 살 수 없는 집에 대한 댓가라고 생각하면 내 남은 생의 모든 노동력을 지불해도 모자랐다. 공은 그럴수록 더 잘해드려야 하는 거 아니냐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거라고 고압적으로 말했다. 공의 발언은 얼핏 들으면 제법 논리적인 것처럼 들렸지만 ‘더 잘해야 한다’는 당위의 문장 앞에 주어는 생략되어 있었다.

“부모님이 주말에 자식들이랑 모여 밥 먹는 게 가장 큰 낙이시라는데 그게 그렇게 힘들어? 엄마가 나 집안일 하는 거 눈 뜨고 못 보겠다고 하시니 어쩔 수 없잖아. 대신 우리 집에서는 내가 더 많이 할게. 조금만 참아주라, 자기야.”

달래듯 말하는 공에게 내가 물었다.

“나만 참아야 하는 거야? 그럼 너는 뭘 참니?”

“나도 힘들어. 내가 중간에서 얼마나 눈치 보는 줄 알아?”

공이 울상을 지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이건 공평하지 않았다.

공은 당장 힘든 일을 생각하지 말고, 더 큰 걸 봐야 한다고도 했다. 이를테면 우리가 살고 있는 뉴타운의 아파트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야경 같은 것들. 우리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을 떠올리라고 말했다.

“윤미 너 정말 배부른 소리 한다. 이 집에서 나가고 차라리 우리 힘으로 자유롭게 살자고? 우리 자유대로? 우리 둘만 벌어서 서울에서 변변한 집 한칸 가지는 게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니? 너는 그렇다 쳐. 그러면 우리 아이는? 나중에 아이 키우는 환경을 생각한다면 여기 떠나자는 소리 못하지. 내가 이 이야기는 아껴두고 천천히 하려고 했는데…… 지금 부모님 사시는 잠실 아파트도 결국 나중에 누구 거 될 거 같아? 그거 앞으로 재개발되면 시세 차익이 엄청날 텐데 누나 주실 거 같아? 절대 아닐걸. 나는 나중에 우리가 잠실 들어가 살고, 지금 우리 사는 집으로 재테크 잘해서 그거 다 우리 아이에게 물려줄 생각이야. 우리 부모님처럼.”

공이 바라는 삶이 나는 쉽사리 그려지지 않았다. 아버지 재산을 공이 물려받고, 다시 공의 아이에게 그것을 물려주는 삶. 아마도 (아직 존재 여부조차 확정할 수 없지만, 만약에 그런 아이가 생긴다면) 그 아이는 내가 낳은 아이일 테고 공씨 성을 물려받게 되겠지. 그들이 부(富)와 성(姓)을 대물림하는 동안 나는 무엇을 얻는 거지? 공의 할머니가 공의 어머니에게 물리고, 공의 어머니가 내게 물리는 삶, 그러면서도 요즘 여자들은 옛날에 비해 팔자가 늘어졌다는 평가를 윗세대 여성에게 받는 삶…… 그것은 대물림이라기보다는 ‘되물림’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나, 아니면 되풀이나 되갚음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나는 뒷덜미를 세게 물린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큰엄마는 내가 성품이 착하기 때문에 결혼해서 사랑받고 잘 살 거라고, 좋은 남편 만나 행복하게 살라는 말을 여러번 했다. 아마도 그것은 큰엄마가 해줄 수 있는 최상급의 축복이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녀는 내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시가에 가는 날에 맞춰 고속버스 당일특송 서비스로 이바지 음식을 보내왔다. 상견례 때 양가 부모님은 예단과 이바지 등 허례허식은 일절 생략하기로 합의했고, 그것은 나와 공 역시 바라던 바였다. 큰엄마가 내게 의논 한마디 없이 보낸 택배 박스를 뜯었을 때 그 안에는 아이스박스를 색색깔의 보자기로 한번씩 더 싼 보따리가 총 여섯개나 들어 있었다. 한꺼번에 들지도 못하고 주차장을 여러번 오가며 옮겨야 할 만큼 많은 양이었다. 시부모는 말로는 뭘 이런 걸 보내셨냐며 부담된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내심 기분이 좋은 눈치였다. 가족들이 모두 둘러앉아 곱게 동여맨 보자기 매듭을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시모는 과일과 떡, 얼린 생선과 한우 고기가 담긴 보따리 하나하나에 반색하는 표정을 짓다가, 마지막 아이스박스를 풀어 전복장과 장조림, 젓갈 등 큰엄마가 직접 만든 반찬이 정갈하게 도자기 단지에 담긴 것을 보고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시모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보따리를 풀 때마다 사진으로 남기기까지 했다.

“친구들에게 보여주려고, 우리 며느리 친정에서 보낸 이바지 음식이라고. 내 주변에서 이런 이바지 음식 받은 사람 없을걸. 요즘은 그런 거 다 생략하니까.”

그 말에 시부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제대로 된 집안에서는 챙길 건 챙기는 법이지.”

공의 부모님이 기뻐하는 모습이 싫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바지를 안 해왔으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환대받고 인정받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큰엄마에게 시부모님이 몹시 좋아하셨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어른들이 좋아하셨다니 다행이다. 너그 엄마가 법도를 모르니 내라도 챙기야지.”

큰엄마는 내 전화를 반가워하는 와중에도 엄마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엄마와 큰엄마가 서로 대놓고 갈등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나를 중간에 두고 상대방에 대한 험담을 하는 것은 오래된 행태였다.

큰엄마가 미운 동서의 딸아이를 어떤 마음으로 돌보았는지, 그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한 후에도 왜 이토록 곡진하게 챙기는지 그 마음을 나는 모른다. 그러나 큰엄마 덕분에 내가 배곯지 않고, 정에 굶주리지 않은 아이로 컸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안다. 엄마 역시 언제나 내게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고 있다. 엄마는 늘 내게 더 큰 꿈을 가지라고, 내 삶에 한계나 제약을 둘 필요는 없다고 가르쳤다. 나는 큰엄마의 댓가 없는 보살핌과 엄마의 무한한 기대를 받으며 자랐다.

말하자면, 나는 두 엄마의 합작품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나는 어른들 다과상을 내면서 사과 껍질을 깎지도 않고 내놓는 건 어디에서 배웠냐는 시모의 물음에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큰엄마와 엄마 모두 항상 사과를 껍질째로 잘라 내놓았으니까. 나는 평생 사과 껍질을 깎지 않고 먹었다. 큰엄마는 할머니께 사과를 드릴 때도 껍질을 깎지 않았다. 시어른 다과상에 사과를 이렇게 내놓는 법이 어디 있느냐는 시모의 호통에,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집에서는 이렇게 먹어요……”

“앞으로는 그러지 말거라. 어른 다과상에는 껍질을 예쁘게 깎아놓은 과일만 내놓는 거란다.”

시모는 얼굴을 돌려 공의 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혹여나 시댁에 가서 과일 이렇게 깎아내지 말거라. 친정 욕한다.”

시모의 말이 내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나는 굳은 얼굴로 사과 접시를 돌려받았다. 과도를 쥐고 사과 껍질을 깎는 와중에 손이 떨려서 칼날이 자꾸 미끄러졌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 말이 잊히지 않았다. 시모의 말을 곱씹고 곱씹을수록 소화가 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나를 윽박지르던 시모와 그 상황을 말간 얼굴로 바라보던 시누이를 떠올리면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나 자신에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다.

진심으로 억울하고 궁금한 마음에 큰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어른들께 내놓는 사과는 반드시 깎아드리는 게 법도이냐고, 진짜 그게 맞고 우리가 틀린 거냐고. 내 주변에서 큰엄마만큼 법도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큰엄마는 대답 없이 한참 웃기만 했다. 내가 대답을 채근하자 큰엄마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미야, 어른들이 시키는 기 다 옳은 기다. 따지지 말그라. 사과 껍데기 그거 깎으면 되지 그기 뭐가 힘드노.”

큰엄마는 별일 아니라며,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웃어넘기라고도 했다. 큰엄마 특유의 인자한 웃음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나는 그 웃음소리를 좋아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큰엄마를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이튿날에도 마음이 풀리지 않아 엄마에게 전화로 시가에서 겪은 일을 털어놓았다. 엄마와 같이 시모의 험담을 하면 기분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나보다 더 길길이 뛰며 화를 내는 엄마의 모습에 당황했다.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감히 남의 집 귀한 딸을 잡아? 안 봐도 눈에 선하다. 돈 좀 있다고 유세 떨면서 식모 취급하는 거잖아. 그러게 내가 뭐랬니. 넌 엄마 말 안 들어서 후회하게 될 거라고 했지. 니가 능력이 없으니 그렇게 하대받는 거라고. 의대나 약대를 갔어야지. 의사 며느리를 봤으면 그 집에서 그렇게 했겠니?”

엄마의 논리가 이상하게 전개되자 나는 항변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엄마,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의사가 아니라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나를 예뻐하시는데 편하게 생각하셔서 그런 거야. 그렇다고 하대나 식모 취급까지는 절대 아니고…… 다들 좋은 분들이셔.”

나는 어느새 엄마 앞에서 공의 집안사람들을 옹호하고 있었다. 설명이 길어질수록 더 말이 꼬였다. 나중에는 그들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데 그저 나 혼자 속상해하고 있을 뿐이라는 취지의 말까지 나와버려서 스스로 깜짝 놀랐다. 감정이 상한 엄마는 내 결혼에 대해 온갖 부정적인 말들을 쏟아냈고, 우리 모녀는 결국 마지막에 말다툼을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괜한 말을 꺼냈다는 후회가 들었다.

며칠 후 엄마가 카카오톡으로 종편 건강프로그램 동영상이 재생되는 인터넷 링크를 하나 보내왔다. 의학 박사가 나와 사과 껍질의 효능과 사과를 껍질째 먹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영상이었다.

시어머니한테 보여줘. 사과는 껍질째 먹는 거라고, 그게 더 몸에 좋다고 말해드려.

나는 그저 웃었고, 따로 답신은 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지만 엄마나 큰엄마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내가 시가에서 겪은 일로 속상해할 때마다 남편은 그럴 일이 아니라고, 별거 아닌 일로 너무 예민하게 군다고 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제삼자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지만 친구나 동료들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건 내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꺼려졌다. 젠더 이슈와 성평등 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시각의 기사를 쓰는 기자인 내가 정작 시가에서는 주말마다 설거지를 하느라 녹초가 된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대신 결혼 준비를 하면서 가입했던 인터넷 까페에 들어가 비슷한 사례가 없는지 찾아보곤 했다. 예비신부와 기혼여성들을 위한 그 까페에는 시모나 시부에게 상처를 받은 에피소드를 공유하며 의견을 구하는 글이 많았다. 게시판에는 내가 겪은 일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비상식적인 결혼생활 사연이 비일비재했다. 나는 매일 밤 까페에 접속해 기혼여성들의 고민 상담 글을 읽었다. 그런 이야기는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모두가 강도는 다르지만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에 묘한 위안을 얻기도 했다. 인터넷 까페에 올라오는 고민 상담 글을 중독된 것처럼 읽어가면서 일종의 패턴을 발견하게 됐다. 자신의 고통을 강하게 호소하는 글의 대부분은 시가에서 경제적으로 지원을 받은 적이 없음을 강조하고 맞벌이 여부와 소득 수준에 관한 정보를 꼭 밝혔다. 그것이 상식과 비상식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도 된다는 듯이.

참고로, 집값은 반반이고 맞벌이인데 소득도 제가 더 많아요.

굳이 참고 사실 필요 없네요. 남편보다 더 많이 버는데 할 말 하고 사셔도 될 듯요!

시어머니가 해준 것도 없는데 바라는 것만 많네요. 완전 염치없는 거 아닌가요.

참지 마세요. 뭐가 모자라서 그러시나요. 이 댓글, 남편도 꼭 보여주세요.

나는 ‘유부 고민 상담 게시판’의 사연과 수십개의 댓글까지 샅샅이 읽으면서 두통에 시달렸다. 익명의 회원들을 일일이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신혼집의 집값을 절반씩 부담하지 못하면, 맞벌이더라도 남편보다 소득이 낮거나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전업주부라면, 부당하고 비상식적인 일을 겪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결혼이 그런 정량적인 계산으로 성립되는 것이라면 내가 감당해야 하는 수고와 부담은 대체 어느 만큼인지도 차라리 누가 정확히 알려주길 바랐다. 나는 내 고민을 담은 글을 여러번 썼다가 업로드하지 않고 지웠다. 결혼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던 나 자신의 잘못이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안에서 스스로를 책망하는 목소리가 커질수록 이 모든 일이 내가 돈 많이 버는 전문직이 아니라서, 내가 능력이 없어서라는 엄마의 목소리까지 겹쳐졌다.

 

*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보이지 않았고, 아버지는 조문객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눈에 익은 친척들의 얼굴이 여럿 보였다. 코로나 시국임에도 아버지의 사촌, 오촌, 육촌 등 먼 친척까지 모두 걸음을 해줬다. 그들 중 큰엄마가 해주는 밥을 안 얻어먹은 사람이 없었다. 장례식장을 찾은 친척들은 큰엄마의 음식 솜씨가 얼마나 좋았는지,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컸는지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상찬했다. 큰엄마 덕에 집안에 큰소리 한번 안 나고 평안했던 거라고, 아까운 분이 가셨다고, 영정사진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3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큰엄마는 집에서 노모를 모시며 병구완을 했다. 지난해 파킨슨병을 진단받은 큰엄마가 제일 먼저 했던 말은 할머니를 먼저 보내드린 후라서 다행이라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평생 김씨네 맏며느리 역할만 하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며느리 역할에서 해방된 큰엄마에게 이렇게 짧은 시간밖에 없었다는 건 지나치게 가혹하지 않은가. 울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아무도 소리 내어 울지 않는 분위기라 억지로 눈물을 참았다.

큰엄마의 여동생이 눈물이 뒤범벅된 얼굴로 장례식장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큰엄마와 몹시 닮은 얼굴에 덩치는 큰엄마보다 왜소하고 목소리가 앙칼졌다. 큰엄마의 동생은 빈소에 놓인 영정사진을 보자마자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발을 구르며 엉엉 울었다. 큰엄마와 똑 닮은 사람이 땅을 치고 곡을 하는 모습이 낯설기는 했지만 어쩐지 후련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나도 그녀와 함께 크게 소리를 내어 울어버렸다. 큰엄마의 동생은 나를 끌어안은 채 한참을 울었다.

“하이고, 니가 작은집 조카 딸이구나아. 나도 얘기 많이 들었다. 우리 언니가 어찌나 자랑을 했다고. 서울 가서 기자 한다고. 어려서부터 그렇게 똑똑하고 야무지고. 우리 언니가 딸이 없어서 니를 진짜 딸처럼 생각하더라. 요즘 아이들답지 않게 어질고 착하게 커갖고 시집가서 시어른들한테도 그래 잘하고 사랑받고 산다고 언니가 맨날 자랑을 하더라. 매주 주말마다 시댁에 가서 하룻밤 자고 온다고, 요즘에 그런 새댁이 어디 있노. 우리 언니한테도 아들, 며느리보다도 더 자주 전화하고 마음 많이 써준다고. 고맙다 고마워. 아이고, 불쌍한 우리 언니. 언니도 딸을 낳았어야 했는데 요즘 세상에 아들은 소용이 없는 기라.”

그 순간 큰집 오빠들과 올케언니의 표정이 굳었다. 나는 그들의 눈치를 보며 큰엄마의 동생이 부여잡은 내 손을 슬그머니 뺐다. 큰엄마의 동생이 빈소에서 나와 테이블에 앉자 새언니가 밥과 국을 내왔다.

“이모님, 많이 드세요.”

큰엄마의 동생, 그러니까 언니의 시이모는 조카며느리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답조차 하지 않은 채 계속 내게만 말을 걸었다. 그외에도 새언니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집안 어른들의 눈빛을 상을 치르는 내내 느낄 수 있었다. 아무도 대놓고 언니에게 비난을 퍼붓거나 부정적인 말을 하진 않았지만 낌새와 분위기로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는 공격이었다. 나는 그런 분위기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친척들이 우리 엄마를 바라보던 눈빛이었으니까. 남들의 시선에 전혀 개의치 않았던 엄마와는 달리 새언니는 피로하고 주눅 든 얼굴이었다. 언니는 속에서 올라오는 어떤 감정을 억지로 참고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음과는 다른 종류의 감정처럼 느껴졌기에, 내 입장에서는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튿날 오후, 손님이 없는 틈을 타 빈소 안쪽에 마련된 수면실에서 잠깐 눈을 붙이던 참이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큰집 형제들끼리 큰 소리로 다투는 소리에 깼다. 조의금을 두고 분쟁이 생긴 모양이었다.

“딴 건 몰라도 나랑 니 형수 회사 사람들한테 받은 조의금은 우리가 챙기는 게 맞지. 우리가 나중에 갚아야 하는 빚이나 마찬가지인데 그 돈을 내놓으라고?”

“그 두군데에서 온 부조금이 제일 많은데 그거 빼면 장례비는 누가 해결하고?”

“니가 해결하면 될 것 아니냐. 그동안 엄마 병원비도 내가 다 냈는데. 마지막으로 아들 노릇 한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뭐? 아들 노릇? 그러는 형은 아들 노릇 했나?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형이랑 형수가 한 게 뭐 있는데?”

작은오빠가 화를 내자 큰오빠도 발끈했다. 급기야 형제들은 멱살까지 잡고 드잡이를 했다. 그 광경을 본 큰아버지가 소리를 질렀고, 새언니는 불편한 얼굴로 자리를 떴다. 밖이 깜깜해질 때까지 새언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저녁 시간이 되자 조문객이 몰려들었다. 코로나 때문에 손님이 별로 없을 거라 생각해서 도우미를 몇명 부르지 않았다는데 A시는 확진자가 적은 지역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손님들이 꽤 있었다. 3년 전 할머니 장례식처럼 줄을 서서 조문을 하는 정도는 아니라도 최근 서울에서 보았던 장례식보다는 상대적으로 조문객이 많은 편이었다. 장례식장 직원이 상주를 찾으며 음식 추가 주문 여부를 물었지만 오빠들은 조문을 받느라 바빴고, 새언니는 전화조차 받지 않아 결국 내 임의대로 음식을 주문했다. 서빙할 사람이 모자라 나와 몇몇 사촌들이 저녁도 먹지 못한 채 손님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다.

밤 아홉시가 다 되어서야 새언니가 장례식장에 나타났다. 상복을 입은 채로 돌아다니다가 동네 사람들 눈에 띈 건 아닌지 염려스러웠다. 나는 새언니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언니, 어디 가셨어요? 계속 문상객 몰려드는데 자리 그렇게 비우시면 안 돼요. 친척들이 찾으셨어요.”

내 딴에는 언니가 어른들에게 또 싫은 소리를 들을까봐 속삭이듯 말했는데 언니에게는 내 말이 바로 그 싫은 소리였던 모양이었다. 내 말에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언니의 표정을 보고 괜한 소리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손님들이 좀 뜸해져서 혼자 밥을 먹고 있는데 새언니가 내 앞에 앉아 말을 붙였다.

“어머님이 아가씨를 진짜 딸처럼 생각하신 거 같아요. 문상 온 어머님 친구들이 그러시는데, 아들 며느리보다는 조카딸 자랑을 많이 하셨대요.”

“그랬대요? 우리 큰엄마, 언니도 많이 예뻐하셨어요.”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우리 결혼할 때 어머님이 저를 딸처럼 생각하겠다고 하시긴 했는데, 그렇지만 아가씨도 결혼생활 해봐서 알잖아요.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한다는 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소리인지.”

“네, 그래도 큰엄마는 다른 시어머니들에 비해 시집살이 안 시킨 편 아니에요? 워낙 남한테 싫은 소리 못하는 분이시라.”

“그게 꼭 싫은 소리를 들어야 시집살이인가요? 아가씨도 결혼했으니 며느리 마음 알잖아요.”

“네, 그렇죠.”

나는 더이상 대꾸하지 않고 수저를 바쁘게 놀리며 밥을 먹는 데만 집중했다. 언니는 자리를 뜰 생각을 하지 않고, 턱을 괸 채 내가 밥 먹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가씨, 저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아가씨네 집값 많이 올랐죠?”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세요?”

“왜라뇨, 부러워서 그러죠. 요즘 서울에 아파트 있는 사람들만 살판난 세상이잖아요. 그 집 결혼할 때 시댁에서 해준 거라면서요.”

“그 얘기는 어디서 들으셨어요?”

“저도 다 듣는 귀가 있는데 그게 무슨 비밀이라고요. 저희는 결국 작년에 경기도로 이사 갔어요. 거기서도 집 못 사고 전세 살아요. 이번 생에 내 집을 가질 수나 있을까 모르겠어요. 아가씨 너무 좋겠어요. 저도 그런 시댁이면 문지방이 닳도록 오가죠. 주말마다 가는 게 대수겠어요. 저라면 매일 아침저녁 문안 인사도 가능해요.”

나는 언니의 말을 들으면서 밥알을 천천히 씹었다. ‘그런 시댁’이라는 말이 묘하게 가슴을 후벼 팠다. 나는 그 말이 꽤 모욕적이라 느꼈는데 그것이 내 결혼생활에 대한 모욕인지 아니면 언니의 시댁, 그러니까 내 친가에 대한 모욕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나는 우리 집안이 별로 대단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고, 그에 대한 별다른 애착이나 자부가 없는 사람이라 여겼는데 새언니의 그 말만큼은 그냥 듣고 넘기기 어려웠다. 나는 숟가락을 놓고 새언니를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언니, 지금 여기가 어딘지 몰라요? 시어머니 장례식장에서 하실 이야기는 아닌 거 같네요.”

언니는 내 표정이 험악해지자 새초롬하게 입을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분한 기분이 사그라들지 않아 빈소로 향하는 그녀의 뒤통수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언니는 그런 시댁이 아니라서 시모가 죽어가고 있는 동안에도 안부 전화조차 하지 않았다는 소리인가, 고인을 욕보여도 유분수가 있지. 그녀를 돌려세워놓고 말조심하라며 호통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순간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는데, 나이 어린 내가 새언니에게 삿대질을 하며 화를 낸다고 해도 이곳에서는 그것이 용인될 거라는 사실이 갑자기 무서워졌다. 나는 새언니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남은 밥을 국에 말아 입에 떠 넣었다. 음식이 목에서 잘 넘어가지 않았다.

 

발인제를 지내고 화장장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새언니와 말을 섞지 않았다. 친척들 중에 그걸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쪽잠을 자고 새벽부터 일어나 바삐 움직이느라 모두들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나 역시 온몸이 묵직하고 눈꺼풀이 감겨왔다. 몸을 가누기 힘든 피로가 몰려들면서 슬픈 감정을 잠식해버리는 기분이었다. 더이상 울 힘도 없다는 생각이 들 무렵, 큰엄마의 여동생이 화장장 장내가 울릴 정도로 목청을 높여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생만 하다 간 우리 언니, 불쌍한 사람. 남의 집 맏며느리 역할만 하다가 좋은 날은 누려보지도 못하고 갔네. 아이고아이고. 불쌍한 우리 언니.”

큰엄마의 여동생이 언니의 관을 끌어안고 오열했다. 장례 기간 내내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큰집 오빠들도 모친의 관이 화로로 들어가는 광경 앞에서는 몸을 떨면서 흐느꼈다. 나는 화장장에서 울지 않았다. 큰엄마 동생의 울음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민망하고 괴로운 마음이 커졌다. 큰엄마가 평생 동안 겪어온 고생의 목록에 내가 차지하는 비중도 적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지난해 파킨슨병을 진단받은 큰엄마는 스스로 요양병원에 들어가겠다고 먼저 말을 꺼냈다. 아직 초기라 충분히 집에서 일상생활이 가능한데 왜 시설로 들어가려고 하느냐고, 아들들이 반대했지만 큰엄마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주방에서, 살림에서 놓여나고 싶다고, 남이 해주는 세끼 밥 먹고 편히 쉬고 싶다는 큰엄마를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자신의 병이 빠르게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아차린 것 같다. 말년에 암 투병을 했던 할머니의 병시중을 오래 들면서 큰엄마는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건강할 때까지만 살다 가는 게 소원이라고, 절에 갈 때마다 빈다고 했다.

나는 요양병원에서 지내는 큰엄마에게 종종 안부 전화를 했다. 어떠시냐고, 식사는 잘하고 계시냐고 전화를 걸어 물을 때마다 큰엄마는 목소리를 들려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큰엄마는 꽃꽂이도 배우고, 그림도 배우면서 즐겁게 지내고 있다고 들뜬 목소리로 그곳에서의 일상을 들려줬다. 병이 진행되면서 말이 느려지고, 발음이 어눌해지기는 했지만 대화를 나누고 의사소통을 하는 데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통화를 이어가곤 했다.

한달 전 큰엄마와의 마지막 통화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공과 별거 중이라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공서방의 안부를 묻는 큰엄마에게 거짓말하기가 싫어서 그냥 얼버무렸더니, 큰엄마는 부부싸움이라도 했느냐며 웃었고, 남자는 아무리 커도 아이나 다름없다며 공을 이해해주라고 말했다. 늘 듣던 소리였다. “너는 니 엄마랑은 다르니까. 나를 보고 배운 착한 아이니까”라고 덧붙인 마지막 말 또한 한두번 들어온 소리도 아니었는데, 그날따라 너무 거북하게 들렸다. 그녀의 착각을 깨뜨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공과 별거 중이며, 이혼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큰엄마는 놀란 기색을 보이며 더 길게 이야기하려 들었지만 내 쪽에서 급히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후로 몇번 더 전화가 걸려 와도 받지 않았다. 큰엄마는 문자메시지를 여러번 보내기도 했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했고, 내 마음을 돌리고 싶어했다. 그녀에게 받은 마지막 메시지는 보름 전의 것이었다.

미야, 큰엄마 말 들어라. 나 하나 불편하면 모두가 편하고 웃게 된다. 결혼해서 여자는 그런 마음으로 살면 되는 거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 같지만 다 안다. 다른 사람들이 안 알아주면 부처님이라도 알아주신다.

큰엄마다운 말이었고, 그건 큰엄마가 한 말이라서 힘이 있는 말이었다. 나는 큰엄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아서, 큰엄마 덕에 모두가 편했다는 것 또한 봤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된 말이라고, 잘못된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큰엄마 아닌 사람들이, 나를 큰엄마처럼 살게 하고 싶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큰엄마라고 하더라도 나에게 그렇게 살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나는 더이상 큰엄마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아픈 큰엄마 앞에서 그런 선언을 할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 소식은 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큰엄마가 평소 바람대로 조카딸이 좋은 남자 만나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세상을 떠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나는 장례식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공은 나를 편하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집안의 경조사를 핑계로 주말이 아닌 주중에도 시가에서 호출을 받는 일이 잦아지면서 내가 일에까지 지장을 받게 되는 상황을 토로하자 공은 회사를 그만두는 게 어떻겠느냐고, 나를 편안하게 해주고 싶다고 했다.

“윤미 너 회사 다니기 싫다며. 매일 아침마다 출근하기 싫다고 몸을 뒤틀었잖아. 그렇게 힘들면 회사를 그만두고 좀 쉬는 게 어때? 주중에는 보고 싶은 영화도 보고 책도 보고 지내다가 주말에만 부모님 댁에 다녀오면 스트레스가 덜하지 않을까. 주말마다 우리 집 가느라 너 쉬지도 못한다고 불만이 많았잖아.”

공은 나를 진지하게 설득하려 들었다. 앞으로 아이도 낳아야 할 텐데 야근이 잦은 기자 일을 계속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쉬면서 편안하게 지내라는 말을 선심 쓰듯이 하는 공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문이 막혔다. 나는 제대로 반박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저으며 싫다는 의사만 표현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저버릴 만큼 그 일이 그렇게까지 중요하니?”

공이 상처받은 얼굴로 물었다.

그때서야 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공의 얼굴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아니, 그 일을 포기할 정도로 너를 사랑하지 않아.”

 

*

 

장례식이 끝나자 친척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엄마와 나, 단둘이 남았다. 마침 발인이 금요일이라 나는 주말까지 A시에서 이틀 더 머물기로 했다. 서울로 대학을 가면서 떠난 고향집은 그대로였고, 엄마 역시 변한 게 없었다. 나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큰엄마의 장례를 치르면서 변함없이 여일한 삶이 감사하고 다행하다 여겨졌다.

“너희 아버지는 큰아버지 걱정된다고 당분간 큰집에서 지내겠대. 원래 마누라나 딸은 본체만체하고 본인 형제들 챙기는 건 선수시잖냐.”

아버지 험담을 시작하려는 엄마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내가 선수를 쳤다.

“엄마, 배고파. 뭐 먹을 거 없어?”

“삼일 내내 집을 비워서 먹을 만한 게 딱히 없는데. 라면 끓여줄까?”

“좋지, 계속 장례식장 음식만 먹었더니 라면이 당기네.”

엄마는 부엌 찬장에서 삼양라면 두봉지를 꺼냈다. 엄마는 옛날부터 삼양라면을 가장 좋아했다. 아버지를 포함해 큰집 식구들은 신라면만 먹었다. 엄마와 큰집 식구들은 라면 취향부터 맞지가 않았다. 나도 라면만큼은 햄 맛이 나는 삼양 취향이었다.

“라면 보니까 큰엄마 생각나. 큰집에서도 라면 진짜 많이 먹었는데…… 엄마, 근데 그거 알아? 큰엄마 내가 삼양라면 제일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따로 끓여준 적은 한번도 없었어. 오빠들이랑 똑같이 신라면 먹으라고. 어린 마음에도 그건 서운하더라.”

“그랬어? 그 형님이 그렇다니까. 이타적인 척하지만 이기적이야.”

나는 피식 웃었다. 예전에는 엄마가 큰엄마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할 때면 괴로운 마음이 들었는데, 장례까지 모두 치른 마당에도 큰엄마를 책잡을 건수가 생기자 눈을 빛내는 엄마의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그거 외에는 큰엄마한테 서운한 거 아무것도 없어. 고마운 마음이 더 커.”

엄마가 자신의 그릇에 담긴 라면을 집어 내 그릇으로 옮겨주며 넌지시 물었다.

“엄마한테는 고마운 거 없냐?”

“많지.”

“뭔데?”

“되게 많다니까. 그중에서도 가장 고마웠던 건 엄마가 내가 기자 되는 거 반대하면서도 언론고시 준비하는 동안 생활비 보내준 거? 지금 생각해보면 고맙다기보다는 미안하기도 하고…… 그때 그렇게 욕하면서도 왜 지원해준 거야?”

“니가 하고 싶다며. 너는 하고 싶은 거 못하고 살면 병나는 성격이야. 나 닮아서.”

“엄마, 있잖아, 공민수가 나 회사 관두래. 돈 벌지 말고 집에서 편하게 살림만 하고 살래.”

“공서방 미친 거 아냐? 내가 너 가르치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지가 뭔데 너를 주저앉혀?”

“엄마도 맨날 그랬잖아. 나 지금 다니는 회사 마음에 안 든다고, 기자 때려치우라고 할 땐 언제고?”

“그건 다른 일 하라는 거지. 아예 일을 하지 말래?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너 지금이라도 로스쿨 가는 건 어때? 의사가 못 됐으면 변호사라도……”

“엄마, 제발 그만해. 난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사는 게 좋아. 그래서 말인데 나 진짜 이혼할까봐. 계속 이렇게 시달리다 병날 거 같아.”

엄마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윤미야, 이혼해.”

“엄마 진심이야? 나 진짜 해.”

나는 눈을 크게 뜨며 재차 물었다. 엄마가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그럼 그동안 말한 건 가짜 이혼이었냐.”

“이혼하지 말라고 펄펄 뛰며 말릴 땐 언제고.”

“말린다고 니가 안 하겠냐. 니가 언제 내 말 들었다고. 내 말만 들었어도 너 그렇게 안 됐어.”

“또 그 얘기야? 내가 의대 못 간 거 아직도 속상해?”

“의대 가라고 한 건 너 어디서든 대우받고 싫은 거 안 하고 살았으면 해서 그런 거였어. 난 우리 딸이 눈물 빼고 가슴에 멍들면서 사는 거 싫어.”

“엄마,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엄마도 나한테 상처 주고 눈물 나게 한 건 만만치 않거든?”

“야, 그건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지. 나야말로 너랑 니 아버지 때문에 흘린 눈물 모으면 수영장도 짓겠다.”

엄마와 다투면서도 내가 엄마를 많이 닮았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거나 말거나 혼자서도 씩씩한 엄마를 보면서 나 역시 공과 헤어진 후에도 그럭저럭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엄마의 삼우제까지 지내고 서울로 오는 길에 공의 전화를 받았다. 장례 기간에도 메시지가 몇번 왔지만, 답을 하지 않고 있던 터였다. 나는 공에게 큰엄마의 부고를 전했다. 공은 왜 이제야 말을 한 거냐며 화를 냈다.

“너는 끝까지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구나.”

“엄마도 아니고 큰엄마인데 뭘. 조카사위가……”

“네가 큰어머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아는데 이건 아니지.”

정말 그 마음을 알까, 공이?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엄마와 큰엄마를 각기 다른 결로 사랑하면서도 결국 똑같이 지긋지긋해하는 마음에 대해, 그는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큰엄마도 이해하실 거야.”

나는 피로한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전화를 끊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더이상 공에게 내 삶에 대해, 나를 둘러싼 사람들에 대해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다.

“정말 이해해주실까? 다른 친척들은 뭐라고 안 하셔?”

“그렇다니까. 아무도 상관 안 해. 끊을게. 나 너무 피곤해. 우리 당분간 서로 시간 가지기로 한 거잖아. 내가 다시 연락할 때까지 연락하지 말아줘.”

빈말이 아니라 큰엄마는 공이 장례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오히려 사회생활 하는 남자가 처 백모 장례 치르느라 휴가를 낸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할 사람이다.

하지만 큰엄마는 죽어서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큰엄마의 십분의 일에도 가닿지 못할 일들을 견디지 못하고 공과 헤어지려는 이유를 돌아가신 큰엄마는 끝끝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큰엄마의 큰마음으로도 그것만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건 큰엄마와는 달리 내가 너무 작은 사람이라서, 내 그릇이 그것밖에 안 되는 거였다고……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다. 나는 그것이 내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는 내가 공부를 덜 해서, 고소득 전문직이 못 된 탓이라고 했고 큰엄마는 내가 공부를 너무 한 게 문제라고 했다. 심지어 공의 엄마는 내가 친정에서 제대로 못 배우고 자라 이 모양이라고 했다. 나는 그들의 말이 모두 틀렸다고 생각했지만 일일이 바로잡기는 어려웠다. 큰엄마 안금자, 친엄마 정은주, 공의 엄마 윤혜숙까지 세 엄마의 삶과 부딪히면서 지금의 내가 되었고, 나는 그저 그들과는 다르게 살기로 결심했을 뿐이다.

 

나는 결혼한 지 2년 만에 공과 헤어졌고, 공의 집에서 나왔다.

처음 이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는 편하게 살면서 호강에 겨운 줄 모른다는 소리를 들었고, 이혼 과정에서는 혼자만 편하려고 모두를 불편하게 만든 여자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나는 전세 대출을 받아 새로운 방을 얻었다. 최대한도로 대출을 받았기 때문에 결혼 전에 혼자 살던 집보다는 넓고 쾌적한 편이었고, 공과 살던 신혼집에 비하면 누추하고 협소했다. 지금 내가 예전의 나보다 나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 편안해졌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지난 주말, 종로에 영화를 보러 나갔다가 우연히 공을 만났다. 공의 가족들은 이제 더이상 토요일마다 모여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만찬을 즐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공은 여전히 우리가 이혼한 결정적인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넌 어때? 이제 편해졌니?” 공이 내게 물었다.

“나라고 마음이 편하진 않아.”

나는 공에게 잘 지내라는 인사를 하며 짧게 손을 흔들었고, 영화관 쪽이 아닌 반대편으로 등을 돌려 천천히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