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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좌담
다시 동학을 찾아 오늘의 길을 묻다
김용옥 金容沃
철학자, 한의사, 고려대 정교수 역임. 최근 저서로 『동경대전』 1~2권, 『노자가 옳았다』 『나는 예수입니다』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중용 인간의 맛』 등이 있음.
박맹수 朴孟洙
역사학자, 원불교 교무, 원광대 총장. 저서 『생명의 눈으로 보는 동학』 『개벽의 꿈, 동아시아를 깨우다』, 공저서 『동학으로 가는 길』 『조선의 멋진 신세계』 『백년의 유산』 등이 있음.
백낙청 白樂晴
『창작과비평』 명예편집인, 서울대 명예교수. 최근 저서로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 『2013년체제 만들기』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등과 『백낙청회화록』 1~7권이 있음.
백낙청(사회) 먼저 오늘 좌담에 함께해주신 두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도올 선생은 원래 에너지가 넘치시지만 그래도 정말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계신데 좌담에 와주셔서 감사드리고요. 박맹수 선생은 원불교 교무로서 법명이 윤철(允哲)이고 학산(學山)이 법호지요. 지금 원광대 총장직까지 수행하고 있어 누구보다 바쁘실 텐데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창비에서 이런 좌담을 기획하게 된 계기는, 도올 김용옥 선생께서 두권짜리 『동경대전』(통나무 2021)을 내셨죠. 그야말로 대작인데, 이를 계기로 우리가 동학을 재인식하는 건 물론이고 동학이 대결했던 사상적인 유산이라든가 시대현실을 살펴보고 이어서 오늘의 상황까지 좀 폭넓게 논의해보고자 합니다.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두분도 인사 겸 간단한 소회랄까, 이 좌담에 기대하시는 바를 짤막하게 말씀해주시죠.
박맹수 저는 1955년생인데요, 대학생 시절에 『창작과비평』과 ‘창비신서’의 세례를 받으면서 사상 형성을 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 도올 선생님이 하바드대 유학 마치고 와서 쓴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민음사 1985)를 읽고 받은 지적 자극은 과장해서 말하면 세세생생 잊을 수 없을 정도였고요. 세계적 석학으로 꼽히는 두분을 모시고 말석에 끼게 된 것을 과분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평소 궁금하고 듣고 싶었던 내용을 많이 여쭈어서 우리 후학들에게 큰 지침이 될 수 있는 자리로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왔습니다.
김용옥 저는 우선 우리가 이 한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본질적 진화를 의미한다고 봐요. 과거에 만나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렇게 만나고, 의사소통을 하고, 그리고 대중을 향해서 심오한 주제를 진지하게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문명의 생명력, 그 창조적 전진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백선생님께서 도올은 정통적인 학문 수련을 받은 사람인데 우리나라 학계에서 상당히 배척하는 인상이 있고, 이런 자리를 통해서라도 어떤 역사적인 자리매김을 다시 해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저는 눈물겨울 정도로 감사했습니다. 역사적 평가는 역사 그 자체의 몫이겠지만, 지금 제가 느끼는 이런 감격이 창비를 읽는 젊은 문학도·사상학도들에게 참신한 영감(靈感)을 던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동경대전』과 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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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제가 도올께 그런 말씀을 드린 건 사실이에요. 도올 선생은 추종자도 많고 독자도 많지만 주류 학계에서는 일부러 담을 쌓다시피 하고 있는데, 창비가 힘이 큰 데는 아닙니다만 이렇게 함께 논의하는 자리를 통해 조금 돌파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동경대전』 1, 2권은 각기 ‘나는 코리안이다’와 ‘우리가 하느님이다’라는 부제가 달렸고 김용옥 ‘지음’이라 되어 있습니다. 단순한 번역과 주석서가 아니고 독자적인 내용을 많이 담은 책이라는 뜻이지요. 우선 1장 「서언」을 읽으면서 저는 소설 읽는 것처럼 재밌었어요. 「동경대전」(이하 김용옥 저서는 『동경대전』으로, 동학의 창시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의 경전은 「동경대전」으로 표기함—편집자) 초판본을 입수해 비정(批正)을 하고 여러 새로운 사실을 밝혀놓았는데, 하여간 그 경위가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이 책을 쓰시기까지의 긴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나 지금의 소감을 간략히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용옥 저같이 고전학 수련을 받은 사람한테는 초판본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제가 수학한 동경대의 중국철학과는 아주 엄밀한 훈고학적인 훈련을 시키는 곳이었기 때문에, 저는 초판본의 문헌학적 의미에 관해 다각적인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경대전」을 공부하려고 보니까 초판본이 없었어요. 이게 2009년에나 발견이 되는데, 제가 평생 동학의 스승으로 모신 표영삼(表暎三) 선생님도 인제경진초판본을 결국 못 보고 돌아가셨습니다. 후학으로서 입수된 초판본을 봤을 때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눈물이 쏟아져 나오고,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데 이렇게 늦게 나타나느냐고 원망도 했죠. 우선 이 초판본에 대해서는 철학적 해석은 둘째 치고, 하드웨어적인 사실이 중요합니다. 초판본이 나타나기 전까지 이것은 무비판적으로 그냥 목판본으로 알려져 있었어요.
팔만대장경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지만 목판인쇄라는 것은 우선 경판이라 불리는 나무판을 만들어야 하고, 그 위에 글이 적힌 창호지를 뒤집어 붙여서 한 글자 한 글자 끌로 파내야 하니까 엄청난 공력과 시간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동경대전」은 거의 모든 판본이 목판본이 아니라 목활자본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굉장히 중요해요. 목판본과 달리 목활자본은 나무판을 준비할 필요가 없고, 개별 활자를 수시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목판본처럼 전체를 나무판 위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계속 해판을 하며 두세개의 인판만으로도 전체를 인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매우 간편하게 단기간에 인쇄가 가능한 것이지요.
그런데 여태까지 목판본이라고 주장해왔던 사람들은 이런 단순한 사실에 무지합니다. 그리고 수정되어야만 하는 오류를 오류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학이거든요. 사계의 전문가들을 총망라해 의견을 듣고 우리나라 과거 인쇄사의 상식에 비추어 고증되어야만 하는 과학적 사실인데도 생각을 바꾸려고 하지 않아요. 답답할 뿐입니다.
박맹수 후학으로서 서너가지 큰 인상을 받았는데요, 우선 앞으로 동학사상 및 한국학 연구가 도올 선생님의 『동경대전』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로 일대사건이라는 점입니다. 판본학의 어떤 전범이랄까 모범을 이 역작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문헌비평이나 사료비판이라 할 수도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후학들이 잘 따를 거라고 봅니다. 또 하나는 선생님의 동학 연구는 반세기 이상에 걸치죠. 고려대 학부 시절부터 이미 박종홍(朴鍾鴻)·최동희(崔東熙)·신일철(申一澈)과 같은 1세대 동학 연구자분들의 세례를 받아 문제의식을 가지고 계셨고, 반세기간 그 화두를 놓지 않고 이번에 집대성하신 겁니다. 선생 개인에게도 대단한 학문적 성취고 우리 한국사의 커다란 성취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끝으로 제 전공은 근대 한국사상사에서 동학부터 증산교, 원불교, 민중운동인데, 동학이란 다른 말로 하면 조선학이고 국학이고 한국학입니다. 그런데 이를 연구하고 그 문제의식으로 한국사회를 진보시키려 했던 우리의 수많은 선배들이 피를 흘리고 희생됐죠. 이번에 『동경대전』이 나옴으로써 조선학을 하려고 했고 조선을 제대로 세우려 했던, 피 흘리며 돌아가신 수백만 영령들을 위한 참된 진혼곡을 올려주셨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백낙청 멋있는 말씀이네요. 제 짧은 지식의 범위 안에서도 『동경대전』은 도올의 저서 중에서도 특별한 것 같아요. 판본학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판본학이라는 건 비단 한국학이나 동양학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굉장히 중시합니다. 영문학에서도 판본학의 전통이 상당히 탄탄한데 우리나라에는 그게 참 드물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도올 선생의 다른 책들에서도 판본 얘기가 나옵니다만 이번처럼 선행 연구를 하나하나 실명으로 시시비비를 가린 예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참 새로운 작업을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비평적인 안목이 없는 문학자들은 사실 판본학도 제대로 못한다고 봐요. 옳은 감정(鑑定)이 나오기 어렵거든요. 그런 점에서도 참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김용옥 한가지 말씀드릴 건 『동경대전』 제1권은 「대선생주 문집(大先生主文集)」(동학의 창시자 수운의 일대기를 기록한 책)이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대선생주 문집」에도 판본학적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도원기서(道源記書)」라는, 필사본으로 전해져온 책을 동학의 역사를 말해주는 가장 권위있는 책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대선생주 문집」은 제가 새로 발견한 문헌이 아니라 원래 있었던 것인데, 사계의 연구자들이 「대선생주 문집」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장 권위있다고 맹신되어온 「도원기서」보다 「대선생주 문집」이 더 오리지널한 것이라는 사실에 엄밀한 인식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도원기서」의 전반부가 원시자료인 「대선생주 문집」을 참고해가면서 재구성된 문헌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죠. 「대선생주 문집」은 후대에 만들어진 「도원기서」보다 훨씬 더 리얼한 인간 수운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대선생주 문집」에 나타난 수운의 모습을 『동경대전』 1권에 놓음으로써 사람들이 그의 저서를 알기 전에 그 인간을 알 수 있게 해준 겁니다. 『맹자(孟子)』의 「만장 하(萬章 下)」에 이런 말이 있거든요. “독기서(讀其書)” 책을 읽는다면서 “부지기인(不知其人)” 그 책을 쓴 그 사람을 모른대서야 “가호(可乎)” 그게 될 말이냐. 사실 「동경대전」을 읽으려면 수운이라는 인간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이를 정확한 텍스트를 통해 알려줘야겠다, 이러한 독서법적 작전이 이번 『동경대전』 프로젝트의 핵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박맹수 제가 부연설명을 드리자면 도올 선생님이 「대선생주 문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번역 주석을 하셨습니다. 그전에도 여러 이본들을 대여섯분이 검토한 적이 있어요. 이번에 도올 선생님이 엄청나게 비판한 김상기(金庠基) 선생님이 1960년대에 최초로 하셨고, 그뒤에 국사편찬위원장을 하셨던 이현종(李鉉淙) 선생님, 그리고 조동일(趙東一)·표영삼 선생님이 하셨고, 말석에 박맹수·윤석산(尹錫山) 등이 있습니다. 이런 기존의 연구를 도올 선생님이 개벽을 시켜버렸습니다.(웃음) 찬성이나 지지·공감을 떠나 굉장히 논쟁적인 문제제기를 하셨기 때문에 「대선생주 문집」의 이번 주석 번역이야말로 동학의 개벽을 일차로 이뤄내셨다 하겠습니다.
백낙청 내가 듣기로는 학산님께서 동학을 연구해온 젊은 후학들을 데리고 세미나도 하셨다는데, 도올이 확 뒤집어버리고 개벽해버린 점에 대해 반응이 어때요?
박맹수 책이 나오자마자 4월 중순부터 강독모임을 구성해서 이 잡듯이 읽고 있습니다. 반응은 아주 극과 극, 천양지차입니다. 이거야말로 전범을 보여주었다는 열렬한 의견이 3분의 2고요, 좀 까다로운 연구자들은 논쟁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거시적으로 엄밀한 판본 검토와 정치한 주석 작업을 통해 동학 연구에 있어 하나의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한 부분에는 전면적으로 공감하고 있습니다만, 세부적인 데는 조금 논란이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만 예를 들면 인제경진판이 경진년(1880년)에 인제에서 간행한 건데,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간기(刊記)가 없습니다. 간행 연도나 장소가 없죠. 그런데 계미중춘판은 1883년 음력 2월에 나왔다는 명확한 간기가 있어서 역사학적으로는 좀더 신빙성을 둘 수 있고 강조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입니다.
김용옥 1880년판이 초판본이고, 계미중춘판은 1883년에 목천에서 간행됐어요. 초판은 백부를 찍었는데 여러 조직에서 나누어 가졌기 때문에 초기부터 민간에서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에 비해 1883년 목천판은 좀더 많은 부수가 인출되었습니다. 그리고 중춘판 이후로 목천이 경전 간행의 중심지가 되면서 계미년에 간행된 판본들이 권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초판본에 간기가 없다는 건 무슨 말이냐?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이걸 독립된 하나의 경전으로 간행한다는 의식이 없었다는 것이죠.
최초의 인출자들이 기획했던 것은 수운의 글과 삶 모두를 포괄하는 대규모의 문집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그러한 포괄적인 문집을 간행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돈과 시간이 없었죠. 그래서 수운의 행장(行狀)에 해당하는 「대선생주 문집」을 빼버린 거예요. 그래서 「동경대전」은 어떤 의미에서는 잡저(雜著)라고 할 만한 몇개의 논문을 모은 간략한 서물이 되고 만 것이죠. 거기에 시나 편지, 의례절차에 관한 글을 보탰고요.
3년 후에 목천판을 낼 때는 「동경대전」을 경전으로서 정본화하자는 생각에 내용을 첨가하면서 분량과 체재를 갖추었고, 그때 비로소 간기를 집어넣은 것이죠. 1883년의 목천판, 경주판에서 내용이 첨가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로서는 고마운 일이지요. 그런데 그 사실을 빙자하여 「동경대전」의 초고가 구전에 의한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가설을 세우는 어리석은 학인들이 많아요. 첨가라고는 하나 기본을 이루는 경전은 변화가 거의 없습니다. 모든 판본이 하나의 모본(母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진판과 목천판을 비교하면서 경진판이 더 부실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판단입니다. 두 판본에서 겹치는 텍스트를 두고 면밀하게 대조를 해보면 경진판의 내용이 훨씬 더 정확하고 엄밀합니다. 다시 말해서 초판본의 권위는 절대적이라는 것이죠. 이것은 저의 사견이 아니라 사계 대가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플레타르키아’와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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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동경대전』에서 또 큰 대목을 형성하는 게 독자적으로 쓰신 「조선사상사 대관(朝鮮思想史大觀)」이라는 논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 키워드는 ‘플레타르키아’(pletharchia)라는 말이에요. ‘플레타르키아’와 민주주의 문제는 오늘 우리가 끝 대목에서 더 다루고 싶은 주제입니다만, 여기서 도올 선생께 질문하고 싶은 건 왜 하필이면 이 어려운 희랍어를 가져오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김용옥 우선 사람들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지요. 새로운 생각을 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말을 만드는 게 훨씬 유리하지요.(웃음) 하이데거(M. Heidegger)도 그런 작전을 많이 폈죠. ‘플레타르키아’에서 ‘플레토스’(plēthos)는 다중을 가리킵니다. 여기에 ‘아르키아’를 붙였습니다. ‘데모크라티아’(demokratia)에서 ‘크라티아’는 다스린다는 의미이지만, 사실 데모스(demos)가, 다시 말해서 민(民)이 직접 주체가 되어 다스린다는 건 역사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았거든요. 결국은 소수가 다스리는데 민의 뜻을 반영하고, 다수의 삶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한다는 겁니다. 실상 희랍어에서 이 데모크라티아는 굉장히 나쁜 말이에요. 경멸적인 냄새가 배어 있지요.
백낙청 반대하는 사람이 욕하느라 만든 말이죠. 우중이 다스린다는 의미로.
김용옥 그런데 이 민주주의라는 말 때문에 다들 우선 동양사상을 깔봅니다. 너희들은 민주주의 전(前)단계의 왕정구조의 정치 형태밖에 없다는 거죠. 인류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라는 걸 해본 적도 없는데 말이죠. 그래서 ‘데모크라티아’라는 말 자체가 엉터리다,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미국의 대표적인 정치학자 로버트 달(Robert Dahl)도 미국 헌법이 과연 민주적이냐 하는 문제를 제시했고, 오늘날에도 선거인단 같은 문제로 추태가 벌어지는데, 미국 헌법을 만든 사람들 자체가 미국 사회가 앞으로 어떻게 갈지에 대한 정확한 비전이 없었다는 거예요. 아주 편협한 문헌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불교학의 대가인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가 지적한 대로, 민주주의 그 말 자체가 매우 독단적인, 나쁜 신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저는 동의합니다. 민주주의는 편견을 자아내는 명언종자(名言種子)라는 것이죠. 민주라는 명언종자의 업식에 집착되어서 그 말 한마디로 모든 건강한 담론이 불식되어버린다는 것이죠. 그래서 민주라는 언어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 동양사상에도 서양보다도 더 지고한 이념의 민본사상이 있어왔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죠. 서구처럼 왕권을 제약하는 의회를 만든다든가 하는 제도적 방식으로 민본을 실현하지 못했을지라도, 우리의 정치 형태 내부는 좀더 세밀하게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플레타르키아’라는 말을 만든 거죠.
백낙청 그 취지에는 공감합니다. 세계가 민주주의라는 걸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는 말씀도 맞고요. 그런데 저는 미국 헌법을 하는 사람들이 미국의 장래에 대해 아무 비전도 없었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민주주의는 분명 안 하겠다는 의식을 가지고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다수가 지배할까봐 삼권분립도 철저히 하고, 대통령 간접선거 하고, 상·하원 분리시켜놨잖아요? 민주주의를 할 수 없게 설계를 잘했고 그게 한동안은 잘 작동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제는 옛날식으로 진짜 책임있는 엘리트들이 하는 과두정치조차 아니고 돈 위주로 돌아가는 과두정치가 됐어요. 그러면서도 옛날하고 다른 건 오히려 지금은 민주주의를 내걸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실현 안 됐다는 것은 동감인데, 플레타르키아에서 ‘아르키아’(archia)가 ‘원리’라는 의미 아니에요? ‘다중원리’라는 의미니까 ‘민본원리’ 내지 ‘민본성’으로 번역해도 같은 말인 것 같습니다. 다만 과거에는 이를 실현할 여러 메커니즘이 부족했고 또 상하질서가 엄격한 가운데 민본사상이라고 하면 민주가 아니라 군주나 정부가 백성이라는 양떼를 잘 이끌어주고 위해주는 그런 체제였지요. 그걸 확 뛰어넘은 게 동학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굳이 ‘플레타르키아’라는 말을 안 쓰더라도 우리 동양에 원래 민본원리가 철저했는데 유교국가는 수직적인 민본주의였으나 동학에 와서 비로소 수평적인 민본주의로 바뀌었다, 그렇게만 말해도 충분하지 않나 싶어요.
김용옥 저도 선생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이고요, 그래서 요새는 ‘플레타르키아’라는 말은 많이 쓰지 않습니다.(웃음) 민본이라는 말만 해도 민주라는 말보다 더 깊은 의미를 전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민주의식의 양보를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고요.
박맹수 2004년에 『도올심득 동경대전』(통나무)에서 이 용어를 우선 쓰셨잖아요. 후학의 입장에서 그 글을 읽고 느꼈던 소감은 용어의 정확성을 떠나서 민본성이라는 관점으로 동학의 핵심을 잡아내려고 하는 것만큼은 독보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민본의 뿌리를 맹자의 사상에서, 우리 조선에서는 정도전(鄭道傳)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찾으셨습니다. 이것이 동학으로 이어져왔다고 볼 때, 선생님이 쓰신 것처럼 동학은 ‘땅적인 것’이죠. 조금 공부해보면 바로 실감이 오는데, 역시 동학의 본질을 드러내려면 민본성에 주목을 해야 하고, 그런 점에서 ‘플레타르키아’라는 용어를 통해 조선사상사의 민본의 역사와 전통이 동학에서 꽃피워졌다고 보는 관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백낙청 도올도 얘기하셨지만 단군 신시(神市)의 홍익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게 민본사상이에요. ‘플레타르키아’라는 말로 전부 포괄해버리기에는 동학에서 그 민본사상이 평등사상과 결합하는 전환점이 너무 중요한 것 같아요. 그전에는 위에 있는 사람이 밑에 있는 백성을 잘 돌봐준다는 것이었고, 사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나 실학자들도 기본적으로는 그랬죠. 그런데 동학에 와서는 종전의 수직적인 플레타르키아에서 수평적인 플레타르키아로의 일대전환을 이룩합니다. 요즘에는 수평주의 자체가 새로운 신(神)이 되어버린 면이 없지 않지만 동학은 그와는 다른, 도력의 상하를 존중하는 수평적 민주주의였습니다. 민주주의 문제 또한 또다른 의미의 민주주의를 우리가 개발하고 개념을 발전시켜야겠지요.
김용옥 제가 말씀드리고자 했던 것은 ‘플레타르키아’라는 말은 포기해도 되는데, 우리다운 새로운 기준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새롭게 규정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아무리 훌륭한 제도에서 뽑힌 대통령도 세종만 한 인물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거든요. 세종은 철저한 민본이 있단 말이에요. 세종처럼 다양한 인재를 출신에 관계없이 적재적소에 쓴 지도자를 세계사에서 만나기 어렵습니다. 글자까지 새로 만들었으니까. 당대 지식인들의 모든 언어체계, 그 특권이 붕괴되는 거대한 도전을 왕이 스스로 한다는 것, 오늘날의 어떤 정치인도 그와 비슷한 발상조차 못하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민본 전통이라는 걸 깔보고 과소평가해선 안 됩니다.
수운, 서양 문명과 치열하게 대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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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제가 이번에 「동경대전」, 또 「조선사상사대관」을 읽으면서 실감했던 한가지는 수운 선생이야말로 철저히 서학과 대결하고 서양과 대결했던 분이라는 점입니다. 서학이 처음 들어왔을 때 다산의 작은형 정약종(丁若鍾) 같은 사람은 거기에 푹 빠지지 않습니까. 반면에 정약용은 처음에 빠졌다가 나오잖아요. 그뒤로 늘 서학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했겠지만 그의 치열성은 유교 경전 재해석에 투입됐고 서학과는 그렇게 치열하게 정면으로 맞붙진 않은 것 같아요. 다른 한편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에 이르면 서양에 대한 지식도 훨씬 많고 개방적이지만 치열하게 대결하고 싸워야 할 대상이라는 인식은 비교적 희박했던 것 같고요. 그런데 수운 선생은 정말 치열하게 대결했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도올의 지적에 제가 또 공감한 것은 이게 수운이라는 한 개인이 구도(求道)의 과정에서 천주교나 서학과 씨름한 것만 아니라, 이 대결과 극복이 그야말로 세계사적인 사건이라는 점이에요. 그 부분을 독자를 위해서 설명을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김용옥 과거 조선왕조에서도,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새로운 문명에 대한 반응은 엄청 빠르고 본질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천주실의(天主實義)』(1603년 겨울에 간행된 이딸리아 선교사 마떼오 리치Matteo Ricci의 신학논쟁서)만 해도 발간된 몇년 후에 바로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분석의 대상이 되거든요. 17세기 초에 이미 이수광(李睟光)·유몽인(柳夢寅)이 『천주실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한 세기가 지난 후에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비교적 중립적인 시각에서 소개합니다.
그러나 성호의 제자 중에 신후담(愼後聃)·안정복(安鼎福) 같은 사람들은 매우 치열하게 마떼오 리치의 논리를 비판하고 나섭니다. 서학의 이러한 논리는 근원적으로 문제가 있다, 마떼오 리치는 그들의 상제관이 『시경(詩經)』 『서경(書經)』에 다 천명되어 있는 것이라 말하지만 우리의 유학은 이미 『시경』 『서경』 시대에 이런 문제들을 다 극복했기 때문에 냉철한 공맹(孔孟)사상이 나온 것이다, 어찌 천당 지옥을 이야기하는 통속불교의 아류에도 못 미치는 이런 유치한 이론을 가지고 조선의 정신문화를 공략한다 하느냐? 신후담이나 안정복은 자기 주변 사람들이 서학에 빠지는 걸 참 애처롭게 생각했거든요.
수운의 삶에 등장한 을묘천서(乙卯天書)라는 것도 서학을 접하게 되는 루트와 관련하여 다양한 가능성이 있지만 역시 『천주실의』와의 대결에서 기독교 신관의 문제점을 파악한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수운도 처음에는 서학을 받아들여서 우리 민족을 개화시킬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안 해본 사람이 아니에요. 굉장히 개방적인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수용하고 그것을 우리 민중의 현실에 적용해보려고 해도 이건 말이 안 된다, 이걸 가지고 우리 민중을 가르칠 수는 없다고 본 거죠. 당시 우리의 긴박한 문제는 양반과 상놈의 구별, 적서차별 같은 것이었죠. 이런 사회구조적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평등관이 확보되어야 하는데 천주학은 이런 인간평등에 대한 제도적 노력은 하지 않고, 오직 제국주의적 침략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고 수운은 예리하게 간파한 것이죠.
수평적 ‘플레타르키아’의 핵심인 인간평등관은 오로지 인간과 신의 평등이 전제되지 않으면 달성될 수 없다고 그는 서학의 문헌들을 읽으면서 통찰했습니다. 천주학의 수직구조를 간파했습니다. 19세기 중엽에 이미 이런 발견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인류의 정신사에 유례가 없습니다. 이를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민족이 이미 고조선시대로부터 홍익인간의 이념을 내세웠고, 신라시대의 화랑정신, 최치원이 말하는 현묘지도(玄妙之道), 고려제국시대의 다양한 사유,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 그리고 조선조의 주자학이 내면화되어 퇴계의 이발(理發)사상으로 발전하는 과정, 영남유학에 깔려 있던 엄밀한 상식주의가 배경이 되었다고 보아야겠지요. 수운은 인류 오만년의 정신사를 융합시킨 상징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백낙청 아까 치열하게 대결했다고 하신 안정복 같은 분들은 공맹사상이 다 해결하고 있는데 이제 와서 뭐 그러냐 하는 식이었죠. 치열성이 모자랐던 겁니다. 수운은 문제를 제대로 넘어서려면 공맹사상으로는 안 된다는 게 아주 철저했던 분 아닙니까.
박맹수 기존의 공맹지도를 넘어설 수밖에 없는 두가지 정도가 수운에게 깔려 있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하나는 역사적 사료에 따른 이야기인데 수운이 재가녀의 아들로 태어났잖아요. 재가한 여자의 아들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문과에 응시할 수 없죠. 수운이 수양딸로 삼았다는 주씨 할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잠들기 전에도 계속 책을 읽고 일찍 일어나서 또 책을 읽고, 저렇게 책을 많이 읽는 분은 처음 봤다고 해요. 재가녀의 자손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없던 개인적 고뇌가 기존의 유학을 뛰어넘는 하나의 동기로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또 하나는 사상적 대결과 관련된 부분인데요, 열여섯살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집에 불 나고 가정이 버틸 수 없으니까 처가살이를 하게 돼요. 그러다가 장삿길로 떠돌아다니게 된 게 아마 1840~50년대일 겁니다. 이때 조선사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냐면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신유박해(1801)부터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까지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고, 향촌사회에서는 부녀자라든지 평민층에 천주교가 몰래 퍼지면서 전통적인 사회의 분화가 일어났어요. 또한 수운이 전국 각지를 유랑하던 시기는 1811년 홍경래의 난 이래 농민봉기가 빈번히 일어났을 때이고 이후에도 1862년의 임술민란을 거쳐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민란의 시대’라 불릴 정도로 민중봉기가 빈발하게 됩니다. 제가 대학원 시절 조선 후기의 천주교회사를 연구하는 친구와 같이 공부했는데 수운 선생의 구도행각, 장삿길 여정이 천주교의 비밀 신앙촌이 형성된 곳하고 완전히 겹치더라고요. 이미 널리 퍼져 있던 광범위한 서학 서적들을 섭렵했을 거라고 봅니다. 그게 동기가 되었다고 보고, 결정적으로 도올 선생 말씀하신 대로 젊은 시절엔 서학에 좀 끌렸던 것 같아요. 그게 어디서 확 바뀌느냐면 제2차 중영전쟁 당시 1858~59년 영·불 연합군의 북경 침입. 한양의 양반들이 성경, 십자가 들고 도망갔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엄청난 충격을 준 사건인데, 중국의 몰락 또는 중화주의의 한계를 실감하는 동시에 서양 열강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면서 서학과의 결별도 일어난 게 아닌가 합니다.
김용옥 아편전쟁만 아니라 홍수전(洪秀全)의 태평천국(太平天國)운동도 그렇죠. 중국과 한국의 본질적인 차이를 논한다면, 태평천국과 동학의 차이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태평천국이라는 건 타락한 기독교가 무당신앙화된 민속종교의 한 형태입니다. 태평천국 내에 천부하범(天父下凡)이니 천형하범(天兄下凡)이니 하는 신들림의 풍속이 있었습니다. 천부하범은 양수청이, 천형하범은 소조귀가 독점하고 있었죠. 권력 내부의 투쟁이 이런 샤머니즘의 폭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태평천국 집단은 처참하게 분열되고 말았죠. 수운은 이러한 통속종교의 폐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기독교를 도입하게 되면 이런 저질적인 종교현상이 민중에 확산되고 또다른 권력구조가 인간을 억압하게 된다는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는 신비체험을 끝내 부정했습니다. 「대선생주 문집」에 신비로운 조화에 관한 하느님과의 대결이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백낙청 도올 선생은 서양의 천주교만 아니라 유일신 신앙과 그 철학적 배경이 되는 플라톤 이래의 이원론적 철학을 넘어서는 것이 지금도 세계사의 과제라고 주장하시는데, 그 과제를 수운이 이미 수행했죠. 그건 단지 중영전쟁을 보고 서세(西勢)에 저항해야겠다는 차원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서세의 위협을 가장 심각하게 느낀 사람은 나중에 위정척사파로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수운은 처음부터 공맹이든 불도든 선도든 수명이 다했다고 보고 그야말로 새로운 무극대도를 찾아 나섰던 거 아니에요? 그런데 유일신교 신앙의 경우에도 명제화된 신조(creed)와 사람들의 실제 신앙생활로서의 믿음(faith)을 구별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독실한 교인들은 사도신경(使徒信經, Apostles’ Creed)을 다 외우고 신봉하고 그러실 텐데, 그렇게 외우는 신조하고 실제로 그 사람이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느냐는 다를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서양 사람들이 엉터리 신조를 믿고 있다는 것만 가지고 간단히 처리될 문제는 아니라는 취지의 질문이에요.
김용옥 캘리포니아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의 존 캅(John Cobb) 교수라고 있어요. 화이트헤드 철학에 기반하여 과정신학(process theology, 화이트헤드 A. N. Whitehead의 과정철학에서 발전한 신학)을 만든 사람 중 하나인데, 화이트헤드를 완전히 소화하고 복잡한 책들을 많이 썼어요. 그분과 대담한 적이 있는데, 제가 기독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니까 저한테 간결하게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기독교 신학이니 화이트헤드 철학이니 하는 것이 있지만, 결국 궁극적 메시지는 ‘사랑’ 이 한마디로 귀결된다, 질투하고 징벌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 이런 말이었어요.
백낙청 그렇더라도 저는 솔직히 그냥 사랑해라 한마디로 해결될 성질은 아닌 거 같아요.
김용옥 제가 이 말씀을 드릴 때 중요한 것은 초기 가톨릭의 포교전략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빠리외방선교회가 주축이 되어 포교가 이루어졌지만 그들은 자체적으로 만든 교리 이론서적을 가지고 있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빠리외방선교회는 매우 제국주의적 독단주의가 강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문화는 모두 저열하며 박멸되어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초기 가톨릭이 들어올 적의 문헌들은 대부분 제수이트(Jesuit, 예수회)의 신부들이 만든 것인데 이들은 비교적 타문화에 대해 관용적 자세를 지녔습니다. 제수이트가 포교의 주축을 이루었다면 조상숭배, 즉 제사에 관한 터무니없는 금령들도 강요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회 이론서들도 예수의 삶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천주의 존재 증명이 그 핵심 테마였습니다. 예수라는 사랑의 심볼은 사라지고, 만유의 창조자이며 지배자인 천주에의 복속만이 주테마가 되었지요.
백낙청 그래서 서양의 유일신 신앙이나 주류 철학에 대해 비판을 하는 건 반드시 필요한데 실생활에서는 그들이 실제 삶을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을 살피는 게 필요하지 않겠냐 하는 게 한가지 생각이고요. 또 하나는 니체(F. Nietzsche)가 플라톤과 호메로스가 대척점에 있다고 했듯이 플라톤 이후의 철학이 못하는 걸 호메로스는 하고 있다는 건데, 서양의 문학이나 예술, 음악 전반을 본다면 철학의 한계를 보완하는 작업이 끊임없이 이루어졌어요. 그래서 로런스(D. H. Lawrence) 같은 사람은 플라톤 이래 문학과 철학의 분리를 두고 ‘철학은 메말라버리고 소설은 흐물흐물해졌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진짜 훌륭한 작가들은 사유와 감정을 결합하는 작업을 죽 해왔습니다. 로런스는 그게 그냥 작품만 잘 써서 되는 일이 아니고 말하자면 다시 개벽을 해야 한다는 데까지 가게 됩니다. 영문학에서는 로런스 외에도 개벽사상가라는 명칭에 부합하는 사람이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같아요. 이런 흐름도 우리가 동시에 감안해야지 서양을 너무 쉽게 정의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김용옥 저도 지금 서양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얘기하고는 있지만, 말씀하신 대로 우리나라의 20세기는 서양을 배우자 하는 열풍 속에서 살아온 역사였습니다. 그 에너지가 철학적인 사유의 폭으로만은 안 생겼을 거예요. 서양의 문학, 드라마, 영화 등을 통해서 상당히 질 높은 휴머니즘이 우리에게 유입됐기 때문에 우리가 아직도 서양에 높은 점수를 주는 거거든요. 그래서 특히 영문학을 공부하신 입장에서 말씀하시는 그러한 문명의 다면적 성격은 우리가 상당히 깊게 새겨봐야 할 문제죠.
박맹수 백선생님께서는 당신의 저서 얘기를 못하시는 거 같아요. 도올 선생님은 동양의 개벽사상가를 세계적으로 드러내는 『동경대전』 역작을 내셨고, 제가 볼 때 백낙청 선생님은 서양의 개벽사상가 로런스를 드러내셨습니다. 저희들의 무지를 깨는 의미로 어떻게 로런스에 주목을 하셨고 개벽사상가로 볼 수 있게 됐는지 말씀을 좀 해주시면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김용옥 개벽사상을 깊게 공부하는 사람들이 볼 때 개벽사상가라고 규정할 정도의 래디컬한 세계관이 로런스한테 과연 있겠는가, 백선생님께서 좀 과하게 평가하시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도 배제하기는 어렵단 말씀이죠.
백낙청 서양에도 주류 철학이나 유일신교 내지는 그 폐해에 휩쓸린 문학이나 예술의 전통이 있고요. 그러다가 자본주의시대로 들어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블레이크가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 시대의 시인인데 개벽에 준하는 변혁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로런스는 그후에 1차대전을 겪고 서양 문명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안 되겠다 싶어서 전세계를 돌아다니죠. 로런스에 대해서는 제가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창비 2020)에서 굉장히 정성을 들여서 해놨으니까 그걸 읽어주시면 될 것 같고요.(웃음) 개벽사상이라는 개념 자체에 동의 안 하면 몰라도 로런스를 그렇게 부를 수 있겠다는 생각은 충분히 하실 것 같아요. 세월이 흐르면 이해할 독자들이 많아질 거라고 믿습니다.
천지는 아는데 귀신을 모르는 서양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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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도올 선생이 서양의 주류 흐름에 맞서는 사상가들을 네명가량 언급하신 걸로 기억합니다. 스피노자(B. Spinoza)에 대해서는 그가 초월적인 유일신앙처럼 말도 안 되는 얘기는 안 하지만, 데까르뜨 이원론이나 스피노자 일원론이나 표리를 이루고 있다고 비판하셨더라고요(1권 261면). 니체에 대해서는 1권 280면 이하에 길게 나오는데, 니체가 그야말로 서양의 가치관을 완전히 뒤집어놓겠다고 나온 사람 아니에요? ‘모든 가치의 전도’ 같은 표현도 쓰고요. 그렇지만 로런스가 보기에는, 저도 동의하는데, 니체는 기독교의 틀을 제대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에요. 그 틀 안에서 뒤집었다는 것이죠. 화이트헤드에 대해서는 도올이 노자 강의 마지막 편에(「노자 101: 노자와 수운과 화이트헤드가 하나다」, 유튜브 도올TV 2021.4.21.) 노자와 수운과 화이트헤드를 같은 급으로 이야기하시는데 과연 그런가 조금 의아했어요.
김용옥 화이트헤드가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 1929)의 제일 마지막 장인 「신과 세계」에서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화이트헤드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구태여 신이라는 개념을 설정해서 당신의 체제를 설명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비판이 많이 있습니다. 저도 거기에 어느정도 동의하고요. 다시 말해서 화이트헤드의 사유는 과정이라는 현상 그 자체에 대한 일원론적 사유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이원론적인 설명 방식을 취한다는 것이죠. 현실적 계기와 영원적 객체의 이원성, 그리고 세계와 신의 대립적 성격 속에 교묘하게 변형된 플라토니즘이 들어 있다는 비판도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백낙청 저는 신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동경대전」을 보면서 어떤 대목이 화이트헤드한테도 딱 적용된다고 생각했느냐면 상제가 서양인들 얘기하면서 “지천지 이무지귀신(知天地而無知鬼神)”이라고 합니다. 천지는 아는데 귀신을 모른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납득이 안 되는 말이지요. 서양이야말로 야훼라는 최고의 귀신을 받들고 있고, 또 유령이나 악귀도 많으니까요. 그런데 이 말 속의 귀신은 도올도 강조하듯이 무슨 실체가 아니잖아요. 화이트헤드는 저도 굉장히 존경하고 많이 배웠는데, 역시 천지는 알고 귀신은 모르는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화이트헤드가 『이성의 기능』(The Function of Reason, 1929)이라는 책에서 우주에 두가지 상반된 힘이 있다고 하는데, 물리적 우주는 쇠퇴해가고 있고 반면에 생물학적 진화를 추동하는 상향 흐름이 있다고 했지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있는 천지, 유(有)의 세계에 머문 분석이지요. 말할 수 있는 도는 늘 그러한 도가 아니(道可道非常道)라는 노자식 개념은 없는 것 같아요. 하이데거의 경우는 제가 도올 선생 글이나 강의에서 언급하신 걸 많이 보았지만 조금 헷갈리더라고요. 어떤 때는 하이데거가 ‘존재자’(Seiendes, 복수는 Seiende)와 ‘das Sein’ 자체를 구별한 것을 굉장히 중시하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하이데거 역시 ‘유치무쌍한’ 서양 철학의 일부라고도 얘기하시는데 그에 대해 여쭤보고 싶어요.
김용옥 저는 화이트헤드 이름을 젊을 때 듣고 흠모한 나머지 『과정과 실재』를 사서 평생을 읽었는데 아직도 전모가 파악되지 않습니다. 완고한 사실(stubborn fact)을 말한다고 하면서 정말 난해한 언어를 중첩해가거든요. 도대체 왜 그렇게 어렵게 문장을 쓰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항상 읽을 때마다 계발성이 있어요. 뭐 하나를 건지게 되지요. 그러니까 저는 화이트헤드를 서양 사상가로서는 성인의 반열에 오른 아주 희귀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화이트헤드는 전통적 의미의 초월을 말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심성의 깊이가 엄청나요. 존재의 문제를 존재 밖에서 추구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성인이라 말할 수 있지요. 인품도 훌륭했던 것 같습니다. 화이트헤드의 저술 중에서는 『관념의 모험』(Adventures of Ideas, 1933년)이야말로 가장 계발성이 높은 작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양인들 중에는 내가 보는 방식으로 화이트헤드를 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아요. 화이트헤드 본인은 동양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었습니다. 그의 저서 곳곳에 동양사상을 좀 깔보는 언급이 많아요. 그러나 그의 사상의 핵심은 동방사유의 전통 속에서 조망할 때 더 큰 가치가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앞으로도 해석의 여지가 많은 훌륭한 사상가로 저는 인지하고 있습니다.
백낙청 20세기 최대의 철학자 중 한분이죠. 그런데 기본적으로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닌 그런 경지에 대한 사색이라기보다는 역시 서양 철학자답게 유의 세계를 깊이 탐구한 분 같아요. 아까 스피노자 얘기 나왔지만 요즘 스피노자 다시 유행하는 것도 서양 철학에서 그 문제를 돌파 못해서 같아요. 유의 세계를 철저하게 파헤치는 게 서양 철학의 미덕이라면 미덕이고 거기서 과학이 나오는 건데, 스피노자야말로 유의 세계에 집착해 그것만 가지고 씨름을 하지 노자 또는 동학에서 탐구한 경지를 아예 배제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김용옥 선생님의 말씀은 깊게 새겨봐야 할 명언인 것 같습니다. 서양 사상이 아무리 일원론적인 현상의 과정을 강조하고 어떠한 실체적인 세계나 초월적인 세계를 거부한다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현상적인 유의 세계에 대한 논리적 성찰이라는 것이죠. 논리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관념성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아요. 노자나 우리 동학에서 보여지는 포괄적인 사유, 즉 화해론적인 사유를 결하고 있다는 것이죠.
수운의 지적 성장과정에 영향을 준 주자학만 해도 단순히 주리(主理)·주기(主氣)와 같은 단면적 규정성으로 접근할 수 없어요. 주자는 형이상학적 세계와 형이하학적 세계를 동일한 화해론적 장 속에서 보고 있어요. 기 속에 리가 있고, 리 속에 기가 있는 것이죠.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존재하는 수많은 논리적 모순이 이런 화해론으로부터 우러나온 명제라는 것을 사람들이 너무도 몰라요. 인도유러피안의 주부-술부적 사유와 주어가 철저히 무화되는 동방인의 술부 중심의 세계관이 결합된 고도의 철학체계라는 것을 사람들이 너무도 인지하지 못해요.
수운은 유무상생(有無相生)의 노자적 세계관과 주자가 말하는 이기론적 세계관의 모든 가능성을 온전하게 구현한 사상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우리의 사상을 구성한다고 하면 서양 사상가들의 논리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요. 또다시 그들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게 되니깐요.
백낙청 그런데 저는 서양 사상가 중에서 하이데거는 좀 다르다고 봐요.
박맹수 제가 조금 끼어들까요? 독자 입장에서 보면 지금 왜 두분이 화이트헤드와 하이데거로 격론을 벌일까 궁금할 것 같거든요. 저는 결론적으로 보면 동학이 이들을 뛰어넘고 있다는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럼 동학에서 그걸 뛰어넘는 논리가 뭐냐 할 때 불연기연(不然其然, ‘그렇지 아니함’과 ‘그러함’을 연속적·상호 개방적으로 사유하는 동학의 인식 논리)으로 보고 계신지 하는 궁금증이 하나 있습니다. 동학이나 원불교가 뛰어넘은 부분에 대해 좀더 설명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백낙청 하이데거 얘길 하면 더 풀리는 면이 있을 겁니다. 하이데거가 존재하는 것들인 존재자를 ‘자이엔데’(Seiende)라 하고 ‘자인 그 자체’(das Sein selbst)와 구별하는데 이걸 우리가 ‘존재’라고 번역하면 ‘존재’나 ‘존재자’나 다 존재하는 것처럼 들려요. 저는 이 지점에서 하이데거가 다른 철학자와 결정적으로 구별된다고 봅니다. 기존의 서양 철학을 비판하는 니체도 ‘존재’(Sein)라는 개념은 모든 것에 다 적용되는 개념이니 아무 내용이 없는 공허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 Sein이야말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면서도 모든 것에 다 걸린다고 하지요. 이 말을 서양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를 못해요. 신을 부정하면서 결국 Sein이라는 이름으로 더 신비한 최고의 존재자를 다시 만들어내는 것 아닌가 의심하기도 해요. 그런데 노자나 동아시아 사상으로 풀면 훨씬 알기가 쉽거든요. ‘자인 그 자체’라는 것은 노자가 도법자연(道法自然), 곧 도가 자연에 바탕한다고 할 때의 자연, 그러니까 ‘스스로 그러함’의 의미예요. 도올 선생이 누누이 강조하듯이 이때 자연은 실체가 아니라 ‘스스로 그러하다’를 명사화한 표현일 뿐인데, ‘스스로 그러함’이 모든 존재자에 해당하면서 그 자체는 실체가 아니라는 그 점을 서양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어합니다.
김용옥 ‘도법자연’이라는 노자적 사유의 궁극을 이해 못하면 하이데거의 ‘자인’(Sein)도 이해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결국 이전의 어떠한 서양의 사상가도 그걸 이해하는 차원에는 미치지 못했어요. 모든 존재자의 ‘있음’은 아주 평범한 형이하자인 동시에 가장 심오한 형이상자라는 사실, 그 사실은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 ‘스스로 그러함’은 무칭지언(無稱之言)이며 궁극지사(窮極之辭)라는 것, 이러한 포괄적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어요.
결국 관념의 폭력에 플라톤으로부터 화이트헤드까지 다 시달리고 있는 것이죠. 동학, 즉 우리 사상의 심오함을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가장 큰 원인은 기독교가 서양인들과 서양을 흠모하는 모든 한국인들에게 너무나 뼛속 깊이 구조적으로 이원적인 사유를 집어넣어놨기 때문에 아무리 거기서 헤어나려 해도 안 되는 겁니다. 현재 우리 한국어 자체가 서양 언어화되어 토착적 사유를 상실시키고 있는 것이죠.
백낙청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제가 다른 식으로 풀어볼게요. 도올 책에서 힌트를 받은 건데, 인도유럽어족의 언어에는 주부와 술부라는 게 명확하잖아요. 그러다보면 진리를 무엇이냐 아니냐, 맞냐 틀리냐 하는 명제상의 진위 문제로 한정하게 되고 실재하는 신에 대한 신앙, 그리고 이원론적 철학 등과 다 연관됩니다. 불교도 원래는 인도에서 나와서 인도유럽언어를 사용했지만, 도올 선생이 불교에서는 주부라는 걸 아예 해체해버렸다고 주장하셨잖아요(1권 291면). 주부가 연기(緣起)작용에 따른 허상이지 독자적인 실체성이 없는 거 아니에요? 인도유럽어족의 언어가 갖고 있는 철학적인 문제점을 주부를 해체하는 방식으로 처리한 거죠. 그런데 하이데거는 또 방식이 달라요. 하이데거는 온갖 술부 중에서 be 동사라는 술어의 독특성에 주목합니다. 우리한테는 없는 동사인데, 사실 영어의 be 동사, 독일어의 sein 동사는 ‘~이다’라는 뜻과 ‘있다’라는 뜻이 뒤섞여 있고 보어가 붙지 않으면 ‘~이다’는 아무런 내용도 없거든요. 그런데 하이데거는 be 동사가 갖는 그 특이성을 존재자나 실체가 아니고 그렇다고 니체가 말하는 것처럼 공허한 개념도 아닌 ‘스스로 그러함’과 같은 뜻으로 해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점은 노자와 통하지요. 다만 불교하고도 다르고 노자하고도 구별되는 하이데거의 특이함은 ‘스스로 그러함’도 역사성을 띤다고 본 것이에요. be라는 술부의 실제 의미가 역사적으로 달라진다고 하는 것이 원불교나 수운 선생이 말하는 시운(時運)에 대한 인식하고 통하는 면인 것 같습니다.
근대주의와 근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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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조선사상사 대관」 첫머리에 중대하게 제시하신 문제가 근대와 근대성입니다. 그것은 서양의 근대주의와도 관련이 있지만, 한국에서도 그러한 근대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전에 동학이 그것과는 다른 길을 제시했고, 그러면서도 위정척사 같은 완고한 입장은 아닌 길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일단 사라진 게 동학농민혁명의 패배죠. 그 결과로 개화파, 척사파의 양자 구도만 남다보니까, 척사파에 훌륭한 분이 많았지만 그야말로 시운에 비추어서 게임이 안 되잖아요. 나라가 망하고 나니 척사파는 거의 근거를 잃고 그후로는 개화파도 대다수가 근대주의 일변도가 된 것 같아요, 우리 사회가. 다만 제 생각에 근대라는 개념 자체가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는 건 조금 지나치지 않나 합니다. 소위 5단계 역사발전론이라든가 ‘근대성’을 둘러싼 관념적 논의와 별도로 근대라는 역사적인 실체는, 서양에서 먼저 자본주의가 발달되면서 지금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닥쳐서 살고 있는 그런 근대의 존재는 인정을 하고, 이걸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고 넘어설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되지 않을까요.
김용옥 불교식으로 말하면, 하나의 언어적 방편으로서의 ‘근대’라는 것은 어떻게 설정을 해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근대적 인간이 뭐고, 근대적 제도가 뭐고, 근대적으로 우리가 산다는 게 뭐냐 하는 문제로 들어가면, 필연적으로 그것은 서양의 이성주의와 관련이 됩니다. 이성주의의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데까르뜨 이래로 죽 내려오는 과학 이성이고, 양화(量化)된 이성이고, 도구화된 이성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현실태는 우리 삶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구조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근대성을 아무리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해도 그 말을 하는 동시에 서양적 논리가 우위를 점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근대성 논의에 있어서 항상 방어를 해야 하고, 서구적 근대의 기준에 의하여 우리 역사의 반성을 촉구하게 되고, 그래서 ‘전근대’니 하는 우리 자생적 역사에 대한 비하도 생겨나게 됩니다. 근대라는 말이 사실은 알고 보면 너무나 저열하고, 우리에게는 한 맺힌 언어에요. 이놈의 근대라는 걸 폭파시켜버리지 않는 한 우리 조선 대륙의 고조선으로부터 내려오는, 우리 고유의 사유가 살아날 수가 없다, 이게 제가 20대부터 아주 뼈저리게 투쟁했던 문제입니다. 백낙청 선생님의 말씀이 일단 서양의 근대를 방편적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보자라는 것을 의미한다면 저는 단호히 거부하겠습니다.
박맹수 어떻게 보면 한국사의 근 백년간의 병폐를 도올 선생님이 『독기학설』(통나무 1990)로 격파하셨습니다. 해방 이후 한국사학의 과제는 식민사학의 극복이었죠. 그 핵심적 내용은 우리에게 자본주의 맹아가 있었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 맹아가 실학파에서 나왔다고 보고 개화파와 실학파의 연관성을 추구하는 연구들이 많았는데, 결국은 그게 서구적 틀이었습니다. 서구적 틀도 제대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 일본을 통해서 굴절되고 잘못된 근대주의를 받아들인 것이고, 이를 통해 우리가 60년대에 민족주의 사학을 연구하면서 불필요한 실학논쟁도 일어나고 했습니다. 이제는 외재적 잣대로 우리 국학이나 한국학을 하는 시대는 끝났고, 내재적이고 자생적이며 주체적인 잣대를 통해서 어떻게 보면 격파된 새로운 근대를 추구해야 한달까요.
백낙청 그런데 우리가 근대주의를 제대로 격파 못하는 중요한 이유는 근대를 이야기할 때 우리말의 ‘근대’를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서양의 모더니티(modernity)라는 용어를 표준으로 삼고 얘길 해요. 서양 언어가 우리보다 나은 점도 있고 못한 점도 있지만 이 지점에서는 굉장히 저개발된 언어입니다. 우리말에는 근대가 있고 근대성이 있고, 근대와 현대가 다릅니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모더니티라는 말 속에 근대, 현대, 근대성, 현대성 다 들어 있어요. 그래서 그 개념을 가지고 이야기하다보면 헷갈리기 마련이고요. 자본주의가 만든 이 세상을 근대라고 규정하면 이 근대를 어떻게 할지는 그야말로 우리가 죽고 사는 문제인데 서양의 모더니티라는 개념을 가지고 어떤 때는 현대 얘기했다가 어떤 때는 근대 얘기했다가 또 어떤 때는 근대성 얘기했다가 하면서 핵심에 다다르지 못하고 소모적인 논의만 한단 말이에요. 게다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근대성’은 무엇인지로 이야기가 되면 도올 선생 말씀대로 서양 따라가는 길밖에 안 된단 말이죠. 반면에 모더니티를 ‘현대성’으로 이해하면 오늘을 사는 인간이 오늘에 충실하다는 의미로 ‘현대적’이어야 한다는 게 당연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서양을 안 따라가는 건 좋지만, 서양에서 발생한 자본주의가 지금 전지구를 지배하고 있고 이게 거의 빼도 박도 못할 우리 현실이라는 데서 출발하지 않고 자꾸 멋있는 얘기만 해서는 안 되지 않겠나. 근대라는 건 지금 전지구를 거의 전일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체제라고 봅니다. 그러나 전근대는 나라마다 다 다릅니다. 동아시아의 전근대가 다르고 서구의 전근대가 다르며, 미국에 전근대가 있다면 그건 원주민 사회이죠. 그러니까 각 나라의 전근대를 획일화하는 것은 거부해야 하지만, 자본주의에 의해 이미 상당부분 획일화되어 있는 근대라는 현실에서 논의가 출발해야 하지 않느냐는 얘기예요.
김용옥 우리의 삶 속에 이미 근대라는 개념이 들어와 있으니, ‘근대’라는 용어를 놓고 정밀하게 그 외연과 내연을 논의하자는 데는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선생님이 말씀하신 하이데거의 존재론으로 예를 들면, 하이데거가 존재자로서의 세계인식을 비판하는 가장 원천적인 측면이 그의 테크놀로지 논의하고 물립니다. 소위 과학 이성, 그리고 과학기술이 가져온 인류 문명의 변화와 구조 속에서 ‘자이엔데’적인 모든 것이 도구화·개별화·실체화되어 논의되는데, 그것은 근원적으로 존재의 왜곡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존재’라는 시각에서는, 사실 근대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지는 거예요.
무엇 때문에 우리가 구태여 ‘근대’니 ‘전근대’니 ‘포스트모던’이니 하는 따위의 소모적인 개념 논쟁을 하고 있느냐? 이거예요. 우리 삶의 양식의 통시적 변화가 있을 뿐, 그것을 어떤 개념 속에 끼워 넣을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죠. ‘근대’라는 개념 자체가 가치론적 강압성을 가지고 있어 정의로운 논의가 불가능합니다. 민주의 이상은 있을 수 있으나 근대라는 이상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미 근대는 사악한 것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근대는 너무 조작적입니다. 존재 그 자체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시간에 대한 개념적 폭력을 거부해야 합니다.
백낙청 하이데거를 열심히 읽고 사유한다든가 동학 공부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자본주의라는 현실이 사라지지 않거든요. 그래서 저는 근대에 한편으로는 적응하면서 근대를 극복해나가는 이중과제, 두개의 동시적인 과제라는 접근법을 주장해왔는데요. 어쨌든 하이데거의 ‘기술시대’론에 대해서도 저는 해석이 좀 다릅니다. 하이데거가 근대 기술의 폭력에 대해선 굉장히 신랄하지만 기술도 진리를 드러내고 존재를 드러내는 하나의 방편이라고 봐요. 그런데 바로 그 점을 망각하게 만드는 게 근대 기술 특유의 위력이고 폭력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사유 능력을 회복하는 게 중요한 거고요. 그래서 근대세계가 배제하는 사유와 지혜를 훨씬 먼저 더욱 선명하게 얘기한 노자한테서 배우고 우리 전통에서는 수운한테 배워야지요. 그리고 원불교의 개벽사상에서도 배우면서 극복해나가야 합니다. 아무리 개판세상이라도 여기서 살아남아 그걸 극복하는 작업을 해야죠. 실제로 도올 말씀대로 사람들이 다 적응하면서 극복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런 의식을 분명히 가지고 하는 사람은 참 드물어요.
수운과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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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지금까지 우리가 동학 얘길 많이 했고 또 더 할 겁니다만, 동학을 계승하는 종교들이 있잖아요. 천도교는 직접적으로 종통을 이어받은 교단이고, 원불교는 직접적인 계승관계는 아니지만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 대종사의 언행록인 「대종경(大宗經)」을 보면 수운 선생의 뒤를 이었다는 의식이 분명히 있어요. 이제 원불교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이건 학산님에 대한 배려이기도 합니다. 학산이 원광대 총장인데다가 원불교 교무인데 밖에 나가서 동학만 잔뜩 띄우고 돌아왔다고 하면 교단 내에서 정치생명이 좀 위태롭지 않겠어요?(웃음) 그래서 내가 과제를 하나 드리겠는데, 원불교와 동학의 상통점과 차이점을 좀 간략하게 요약해주시면 어떨까요.
박맹수 동학과 원불교의 차이는 교조인 수운 선생과 소태산 선생을 중심으로 비교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운 선생은 부친 근암공을 통해 가학(家學)·퇴계학(退溪學)적 전통이 아주 탁월하시죠. 그 퇴계학적 계보에 대해서는 도올 선생님께서 『도올심득 동경대전』(이 책의 내용은 모두 신간 『동경대전』 1권에 실렸음—편집자)에서 아주 명쾌하게 정리하시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학문적 기반이 소태산에 비하면 상당히 탄탄하셨죠. 그런데 2대 교주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선생은 좀더 평민에 가깝고 큰 학문적 기반은 없는 편입니다. 반면에 원불교의 경우 소태산 선생은 농민의 아들이죠. 아버지가 빈농이었고, 깨달음을 이루기 전의 학문적 기반은 서당에 이삼년 다닌 정도입니다. 그걸 보강한다고 할까요, 2대 정산(鼎山) 송규(宋奎) 종법사가 흥미롭게도 퇴계학을 계승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퇴계학이 동학으로도 원불교로도 이어진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운데, 아무튼 이렇게 교조의 학문적 기반에서는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학은 동(東)에서 서(西)로, 경주에서 발상이 되어 호남에서 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원불교는 반대로 호남에서 시작해 퍼져가는 지역적 기반의 차이도 있어요. 또 하나 시대상황을 놓고 보면 수운 선생은 아직 조선왕조가 명맥은 유지하며 희망이 있는 시대를 사셨다면, 소태산은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큰 절망의 시대를 사셨습니다. 제 표현으로는 태극기가 마음대로 휘날리는 날 한번을 못 보고 돌아가셨다,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공통점은 제가 쓰는 말로 ‘개벽파’라는 것이죠. 동학부터 증산교·대종교·원불교 등 땅적인 것, 민중적인 것에서부터 새로운 세계를 열려고 했던 개벽파라는 전통을 볼 수 있습니다. 공통적으로 개벽사상을 강조하고 있고요. 또 흥미로운 것은 여성평등사상입니다. 이미 동학에서 수운 선생이 두 노비 중 한 사람은 수양딸, 한 사람은 며느리 삼은 전통이 있습니다. 또한 2대 교조 해월 선생이 1889년에 내칙(內則)·내수도문(內修道文)을 선포해서 여성들 가운데 도통한 수도자가 많이 나올 거라고 했고요. 원불교도 정식 출범하기 전에 남녀권리동일을 선언했고, 초기부터 최고의결기구에 남녀 동수가 참여하게 했습니다. 이렇듯 한국적 양성평등사상이 공통되게 일관됐다고 보입니다. 세번째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측면인데요, 동학과 원불교는 모두 아래로부터의 사상이죠. 아래로부터의 운동, 도올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 민적인 것, 땅적인 것. 아마 이게 조선 후기, 일제강점기에 우리 한반도 역사의 터닝포인트가 아닌가 싶습니다. 역사에서 객체로 취급되어왔던 민초들이 역사의 주체로 자각하면서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 동학에서 원불교로 일관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사상적 기반을 놓고 보면, 보통 유불선 삼교합일사상이 바탕에 깔려 있다고 얘기되죠. 종교학적·철학적 접근에서 전통의 계승과 극복의 바탕에 유불선 삼교합일사상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하나를 더하자면 서양 문명에 대한 수용과 이해가 동학과 원불교에서 공통되게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꼽는 공통점으로서는 개벽의 기점과 출발을 조선 땅, 한반도에서부터 시작했고 그것을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역사학에서는 동학을 초기적 내셔널리즘의 원형이라고도 하는데, 수운 선생이 「용담유사(龍潭詞)」(‘龍潭詞’의 한자 표기에 관해서는 『동경대전』 1권 424~25면 참조—편집자)에서 “아국운수(我國運數) 먼저 한다”라는 말씀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소태산 선생의 경우는 일제강점기 엄혹한 시절에 “금강이 현세계하니(金剛現世界) 조선이 갱조선한다(朝鮮更朝鮮)”고 했어요. 비록 식민지 지배하에 있지만 조선이 어변성룡(魚變成龍)이 되어간다는 표현, 이를 통해 한반도 땅을 토대로 해서 개벽을 추구하려고 했던 공통점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김용옥 역시 수운과 소태산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 두 사람이 산 시대가 부과하는 문제의식의 차이와 상통한다고 봐요. 수운의 대각(大覺)은 1860년의 사건이었고 박중빈의 대각은 1916년의 사건이었으니까 56년의 시차가 있습니다. 수운은 왕조체제의 붕괴를 리얼하게 감지하면서 보편적인 보국안민의 테제를 구상해야만 했으나 박중빈은 그러한 긴박한 정치사적 과제보다는, 이미 무너진 국가의 폐허 속에서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가, 궁극적으로 삶의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깊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수운은 민족 전체의 운명을 대상으로 하는 혁명적 사상가였다면, 소태산은 작은 규모에서 출발하는 로컬한 공동체운동가였습니다. 사상적으로 보면 창조적 사유에 있어서는 수운이 더 치열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운에게는 서학과의 대결이 있으나 소태산은 그런 대결이 없습니다. 소태산에게는 만유를 한 체성으로, 만법을 한 근원으로 보는 포용성이 두드러집니다.
그러나 소태산의 위대성은, 수운이 이론 정립의 생애 3년의 격렬한 체험을 우리 민족에게 남기고 순도한 것과는 달리, 작은 깨달음이지만 그걸 실제로 공동체운동으로 구현시키고, 인간세를 개혁하는 구체적 모델로 제시했다는 데 있습니다. 양자는 지향점이 달랐어요. 소태산의 정관평(貞觀坪, 영광군 백수읍 길룡리 소재의 갯벌을 개간한 땅. 1918년 1차 방언공사) 공사만 해도 당시로서는 유례를 보기 힘든 매우 획기적인 사업이었습니다. 일원상의 진리를 구체적으로 땅 위에 펼친 것이죠.
여성 문제만 해도 소태산은 수운의 비전을 더 래디컬하게, 더 구체적으로 구현했습니다. 수운은 대각 후 여자 몸종 두명을 해방시키고 하나는 수양딸로 삼고 하나는 며느리로 삼았습니다. 소태산은 교역자로서 여성의 위상을 온전한 인간으로서 높여놓았습니다. 원불교의 역사는 실제로 이 정녀님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죠. 원로 정녀님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토록 여성을 천대하던 시절에 제복 입고, 교육받고, 깨끗하게 절도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그 모든 것이 감격이었다고 해요.
결론적으로 원불교의 모습은 토착적 소박미에 있는데, 현재 원불교는 그 소박한 아름다움을 잃어버리는 방향에서 관념적인 장대함이나 권위주의적 허세를 과시하는 측면이 너무 강해요.
백낙청 반론권을 보장합니다.(웃음)
박맹수 소태산은 1891년에 태어나서 1943년 53세에 돌아가셨는데 28년간 공적 생애를 살죠. 대각을 한 1916년이 공적 생애의 기점인데, 그전의 삶에 대해서는 도올 선생님의 견해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대각 이전에는 사회적 경험이나 학문적 경험 같은 기반이 거의 없었죠.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것은 대각 이후의 사상적인 섭렵이라든지 사회활동, 시국관이나 법설 등을 분석해보면 그것은 수운이 못 따라온다, 저희는 그렇게 봅니다. 그건 「대종경」이라는 법설로 나와 있으니 대각 이후의 삶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백낙청 저는 학산 말씀 중에 일부는 동의하고 일부는 동의 안 합니다. 대각 이전에도요, 그의 경험이 그렇게 소박한 것만이 아니고 어떤 면에선 수운하고 굉장히 비슷해요. 수운이 주유팔로로 10년간 행상 길을 돌아다닌 것보다 기간은 짧을지 몰라도 소태산 또한 구도를 위해 돌아다니거든요. 정확한 행선지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시절이 그야말로 식민지 시기이고 또 갑오농민혁명이 실패하면서 특히 전라도 땅에서 무수히 사람이 죽었잖아요. 그 땅을 중심으로 여러해를 다녔으면 수운이 장사하면서 밑바닥 삶을 파악한 것하고 닮은 면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학산은 대각 전에는 소박한 삶을 살았다고 인정하셨는데 나는 그렇지 않을 거다, 몇년 사이지만 볼 것 다 보고 겪을 것 다 겪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형수(金炯洙) 작가가 쓴 『소태산 평전』(문학동네 2016)에 그 시절의 일부가 매우 실감나게 그려져 있기도 하지요. 대각 이후의 법설이 얼마나 뛰어나냐 하는 건 우리가 따로 검토할 문제인데요. 「동경대전」을 보면 수운한테 배우겠다고 몰려온 제자들을 가르치니까, 사람마다 글씨는 왕희지같이 쓰고 시를 한번 지었다 하면 아주 뛰어났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사람이 도를 깨치면 비록 학문이 짧은 사람이라도 확 달라지는 게 있다고 봐요. 소태산도 느닷없이 달라진 게 아니고 대각을 함으로써 한마디 들으면 열마디를 알게 되고, 「금강경」 「동경대전」 등 여러 종교의 경전을 죽 섭렵을 하잖아요. 주막집에 앉아 있는데 선비들이 벌이고 있는 쟁론을 저절로 다 알아듣겠더라 그런 얘기도 나오고요. 해탈한 사람은 우리가 좀 다르게 봐야 하지 않나 싶어요.
물질개벽과 정신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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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사실 원불교 안에서 지금 이 자리에 나와 계신 박교무님이나 소수를 빼면 동학 공부를 안 하고 동학을 몰라요. 『원불교 전서』(원불교 교서들을 아우른 종합 경전)에는 ‘불조요경’이라 해서 원불교 경전에 버금가는 것으로 보는 불경이나 조사(祖師)들의 글을 모아놓은 것들이 있어요. 저는 「동경대전」도 『전서』에 들어가야 한다고 봐요. 원불교의 개교표어가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것 아닙니까. 저는 이것이 수운의 다시개벽과 이어진다고 봅니다. 물론 소태산은 대각하고 나서 자신이 깨달은 내용과 과정을 보니 석가모니 부처님이 밟으신 길을 따라간 것 같다, 불법을 주체 삼아서 새 회상을 만들겠다고 했지만, 그뒤 내놓은 개교표어는 불교적인 표어가 아니거든요.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것은 다시개벽사상을 이어받은 것이고, 「정전(正典)」의 첫 단어가 ‘현하’(現下)예요. 그게 과거의 불교하고 다른 점이죠. 수운이 시국을 바라보면서 공부하고 깨쳤듯이 소태산도 시국에 대한 반응으로 개교를 한 겁니다.
김용옥 저는 원불교 사람들을 향해 개교표어의 문제점을 지적해왔습니다. 개교표어에 우선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적 분열이 전제된다면 이것은 원불교의 일원상 진리에 위배된다는 거죠. 왜냐면 물질이 개벽되었으니 정신도 개벽하자는 건 물질 세상, 즉 기차나 자동차나 공장이 들어서며 우리의 물질적 환경이 변해가고 있는데 이런 변화에 발맞추어 정신도 개벽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밖에 없거든요. 결국은 물질개벽을 당연한 선진(先進)으로 놓아두고 정신이 따라가자는 얘기가 되는데 이렇게 되면 개교의 동기를 말하는 논의 자체가 불균형의 편협한 논의가 되고 말아요.
사실 소태산의 대각 시기, 즉 일제강점 초기의 상황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물질은 개벽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물질환경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세인들이 말하는 물질개벽은 인간을 억압하는 병적인 변화입니다. 20세기로부터 우리가 진짜 개벽해야 하는 것은 물질이었습니다. 물질과 분리된 정신의 개벽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러한 개벽은 일종의 유치한 개화기 콤플렉스에 지나지 않는 것이죠. 개화기 때 밀려드는 물질적 변화에 대해서 우리도 빨리빨리 정신개벽을 이룩해서 선진국가가 되자 하는 식의 따라잡기 표어가 된 것이죠. 그렇게 해서 원불교는 결국 물질개벽은 과학이나 사회체제에 주어버리고 자신들은 앉아서 마음공부만 한다는 식의 고립된 자기합리화를 일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불교는 물질개벽의 선두에서 외치는 사회참여가 부족하게 되었고, 또한 역사에 뒤처지는 종교가 됐습니다. 기독교는 매우 유치한 정신적 교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질개벽에 앞장섰기 때문에 인류의 선진종교가 된 것입니다.
백낙청 원불교 교단의 현재 문제점에 대해 많은 부분을 정확하게 지적해주신 듯한데, 표어 자체는 저는 달리 해석하거든요. 첫째는 정신개벽이라는 건 석가모니 때부터 죽 하던 깨달음의 공부지만 소태산은 물질개벽이 되니 그걸 뒤따라가자는 게 아니고, 물질이 개벽되면서 잘못하면 우리 다 망하게 됐으니까 그에 상응하는 정신개벽을 하자고 한 것이에요. 그런 점에서 수운 선생의 다시개벽하고 통한다고 말하는 거고요. 그런데 아마 원불교 안에서도 물질과 정신의 이분법으로 해석하는 분들이 많을 거예요. 그게 바로 도올이 개탄하신 20세기의 근대적 개념에 오염된 용법인데 소태산은 그렇지가 않죠. 정신이라는 게 물질에 반대되는 ‘정신적’ 실체가 아니에요. 정신을 정의한 내용이 「정전」의 교의편(敎義編) 삼학(三學) 1절에 나오는데 “정신이라 함은 마음이 두렷하고 고요하여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라고 하잖아요. 이때 정신은 실체가 아닌 어떤 ‘경지’예요. 그런 정신은 서양에 없는 개념입니다. 정신 대 물질이라는 서구식 이분법으로 말한다면 서양의 자본주의사회라든가 과학문명 또한 엄청난 정신적인 작업을 수반하는 문명이지, 그게 무슨 잘 먹고 잘살고 편하게만 살기 위한 게 아니잖아요? 얘기 나온 김에, 제가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모시는사람들 2016)에서도 쓴 표현입니다만 다시개벽을 후천개벽이라 부르는 것은 도올 선생이 여러번 질타하셨어요. 나는 도올이 선천·후천의 도식화를 비판하는 것이 중요하지, 도식화를 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후천개벽으로 하든 다시개벽으로 하든 문제는 안 될 것 같고요. 수운의 개벽사상엔 선천·후천 개념이 이미 들어 있지 않나요. 상제가 수운을 만나 ‘개벽 후 오만년에 나 또한 공이 없었는데 이제 너를 만났으니……’라는 식으로 말씀하시거든요(「용담유사」 ‘용담가’). 그게 이전 시대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은 아니지만, 지금의 시점에서 상제님이 볼 때 내가 아직 제대로 이뤄놓은 게 없고 너를 만나서 비로소 처음으로 하게 됐다는 의미죠. 이미 여기서 선천·후천이 갈리는 겁니다. 물론 선천·후천이 두부 자르듯이 잘려서 어느 시점이 지나면 선천이 저절로 후천이 된다고 보는 것은 배격해야 하는데, 수운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해월의 법설을 보면 선천·후천, 심지어 선천개벽·후천개벽 얘기가 다 나와요.
김용옥 도식적·단계적 획일주의에 기초하여 역사 변화의 결정론을 주장하지 않는 한 언어적 방편은 다 용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선천·후천 논의에 의하여 그러한 개념적 장치가 없었던 수운과 해월의 사상마저 그러한 도식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해월의 설법에 나오는 선천·후천은 맥락이 좀 다르게 쓰였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20세기의 종교적 논의에 의하여 각색되었습니다. 해월의 위대함은 그 삶의 실천에 있습니다. 그는 내칙·내수도문 등 몇개의 우리말 문장 이외에는 거의 직접 글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하여튼 백선생님의 말씀을 자세히 상고해보면 모든 방면으로 깊게 생각하시고 다각적인 시각의 넓이를 가지고 긍정적으로 포용하시기 때문에 제가 감히 토를 달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한 포인트는 명백합니다. 수운은 천지개벽 이래 삼황오제의 출현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의 연변(演變)을 모두 긍정합니다. 공자도 나왔고 수많은 군자들이 천도와 천덕을 밝혀 인간이 누구든지 지극한 성인의 경지에 이르도록 길을 닦아놓았다는 것이죠. 이러한 수운의 역사관에는 선·후천의 대비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혁명은 ‘다시개벽’인데, 다시개벽은 오로지 오늘 여기의 명료한 시대인식에서 우러나온다고 주장합니다. 지성(至聖)의 길을 열어놓았는데도 오늘의 현실은 모두 각자위심(各自爲心) 하고, 불순천리(不順天理) 하고, 불고천명(不顧天命) 하는 위기의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공동체 윤리의 상실,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위기 상황이 다시개벽의 요청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운의 ‘다시개벽’은 종교적인 표어가 아니라 역사적 현실의 분석을 바탕으로 한 보국안민(輔國安民)의 테제입니다.
그러나 선·후천의 개념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수운·해월과 연루시키는 오류를 지적하는 것뿐입니다. 선·후천은 고전에 없는 말인데 송대의 소강절(邵康節)이 상수학적 역학관을 새롭게 수립하면서 도입했고, 우리나라에서는 수운보다 한 세대 늦게 활약한 일부(一夫) 김항(金恒)이 『주역』 「설괘전」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여 정역팔괘도를 새롭게 그리면서, 기존의 『주역』적 세계관을 뒤엎는 정역(正易)을 창조합니다.
우리나라의 선·후천이라는 말은 모두 김일부라는 매우 독창적인 역학사상가에 의하여 시작되었고 이것을 대중종교의 중심개념으로 만든 사람이 강증산(姜甑山)이라는 매우 영험이 깊은 종교가였습니다. 강증산은 김일부를 1897년에 만났고, 1909년 김제 구릿골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천지공사(天地公事)를 계속했습니다.
원불교에서 선천·후천이라는 말을 쓴다면 그것은 김일부의 사상이 강증산을 통하여 원불교에 영향을 준 것입니다. 그것은 수운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원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며, 신비적 이적을 교리에 담지 않습니다. 나중에 음세계·양세계라는 말을 만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선천개벽세는 전체가 음세계가 되어 컴컴한 밤이 되고 후천개벽세는 전체가 양세계가 되어 환한 낮처럼 광명한 세상이 될 것이니 그것은 너무 유치하고 독단적인 세계인식 아니겠습니까? 동방사상도 이렇게 결정론적으로 도식화되면 요한계시록을 외치는 휴거파 기독교와 다를 바가 없어집니다.
백낙청 그 말씀엔 동감인데, 수운 선생도 이제까지 오만년간 온갖 성현들이 나온 것은 인정을 하지만 다시개벽을 해서 벌어질 이후의 세상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해월신사법설(海月神師法說)」은 선천개벽은 물질개벽이고 후천개벽은 인심개벽이다,라고 했더군요. 여기서 말하는 물질개벽이란 물질 세상이 열린 원래의 천지개벽이고, 후천개벽은 사람의 마음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불교 개교표어에 나오는 물질개벽은 그거하곤 달라요. 옛날에 천지개벽하던 물질적 개벽이 아니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세상의 변화를 말하는 거죠. 나는 그 변화의 원동력은 자본주의라고 보고,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소태산이 그 시골구석에서 전세계의 시운을 읽었다고 봐요. 지금은 자본주의 세상이고 물질이 개벽되는 세상이니까 거기에 상응하는 정신개벽 또는 해월의 문자로 인심개벽을 이루지 못하면 우리 다 망한다 하는 뜻이기 때문에, 나는 그 개교표어야말로 불교보다 동학 쪽에서 이어받은 거라고 봅니다. 다만 동학과 두가지 큰 차이점이 있는데, 하나는 불교를 주체로 삼았잖아요? 불교를 주체 삼으면서 따라오게 된 윤회설, 인과법칙 등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게 과연 사상적 진전인지 아닌지는 점검해봐야죠. 수운은 유불선을 결합한다고 했지만 뿌리는 유교에 있어요. 활동 중에 스님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도 불법이 그 사상에서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소태산은 유불선을 통합하면서도 불법을 중심에 세우겠다고 했으니 그에 따르는 여러 논리적·철학적 또는 실천적인 문제들이 있지요. 또 하나는 도올 책을 보면 수운을 두고 “종교를 창시한 사람으로서 종교를 거부한, 이 지구 역사에서 유일한 신인간”이라는 말씀을 하시고(1권 26면) 또 “종교 아닌 종교를 개창”했다는 점을 굉장히 강조합니다(34면). 원불교도 어떤 의미에서는 기존의 것하고는 완전히 다른 종교로 출발했는데, 다만 종교 아닌 종교를 만든다고 하면서도 교단 조직을 만든 거란 말이에요. 물론 수운도 조직을 만들긴 했지만 그건 일종의 사회운동 조직 아닙니까? 소태산은 교단 조직을 만들고 출가제도를 만들었거든요. 이 출가제도라는 게 교단의 지속성과 효율성을 위해서는 굉장히 유용하지만, 다른 종교와 비슷하게 흘러갈 위험이 커지는데 저는 이걸 지금 원불교 교단이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고 봐요. 소태산의 가르침에서 많이 후퇴한 거죠. 여기 교무님이 계시지만 교무들이 일종의 특권계급, 더 심하게 말하면 카스트화가 되어왔어요. 소태산뿐 아니라 정산 종사의 삼동윤리(三同倫理)는 모든 종교가 근원에서 같다고 할 뿐 아니라, 나아가 모든 종교와 비종교 활동가들이 한 일터 한 일꾼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원불교 안에서 출가의 특권을 인정 안 한 건 물론이고 심지어는 비종교인도 한 일터 한 일꾼이라고 했어요. 그 말씀대로 하면 교무들 입장에서는 죽을 지경이죠. 교단에서 낮은 임금으로 봉사를 하고 여성들은 결혼도 안 하고 정녀로 살면서 헌신을 하는데 아무 특권이 없고, 출가와 재가가 동등하고 오직 법위(法位)의 차이만 인정한다고 했으니까요. 유일한 보상은 인생의 네가지 요도(要道) 중 ‘공도자 숭배’라는 조항인데 이것도 공도자를 출가자로 한정시키지는 않지요.
박맹수 굉장한 딜레마인데요, 저희가 원불교학과에서 수학할 때 법사님들로부터 원불교의 가르침, 소태산의 가르침을 90퍼센트 이상 제대로 실천하려면 견성(見性)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을 귀에 따갑게 들었습니다. 깨쳐야 한다는 말씀이죠. 출가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요. 달리 말하면 자기 상(相)을 벗어던질 수 있는 경지까지 가야 된다는 말씀을 무수히 들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원불교 전문교역자들이 초발심(初發心), 또 평생 가지고 살아가는 영원한 화두를 못 넘으니까 이런 현상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용옥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난 저는 젊은 시절에 원불교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어요. 대학 시절에 이미 동학을 먼저 접했죠. 동학에 매료되고 워낙 애착을 느낀 사람으로서 나중에 원불교를 알았기 때문에, 원불교를 순수하게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됐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제가 원광대를 다니게 되면서 원불교를 이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관련된 책들을 많이 읽었죠. 사실 저는 원광대 학부 6년을 다녔기 때문에 원불교 교학개론도 한 과목 들었어요. 그런데 한의대생인 나에게 교학대학(교무지망생이 다니는 곳)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강의를 요청했습니다. 낮에는 한의대 학생 노릇 하고 밤에는 교학대학 1~4학년 학생들 전원에게 강의를 했습니다. 당시는 아마도 교학대학 최전성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대단했어요. 종교와 철학 전반에 관해 매우 계발적인 강의를 했습니다. 내 인생의 영원한 낭만으로 남아 있어요. 총장 선생님의 요청으로 본관에서 수백명의 학생·교직원을 상대로 특별강연을 했는데, 그 강연의 제목이 ‘원불교는 상식의 종교다’라는 것이었죠. ‘상식’이란 항상스러운 식(識, vijñāna)을 말합니다. 상식보다 더 보편적이고 위대한 의식은 없습니다. 종교는 상식을 깨는 것인 양 생각하는데 원불교는 상식을 궁극적인 가치의 근원으로 생각합니다. 인류에게 이런 종교가 없습니다.
제가 한의대를 들어가려고 일곱개의 대학을 다 탐색해보았습니다. 모두 부담스러워했지요. 그런데 원광대는 “당신 같은 워킹 딕셔너리가 우리 학교에 제 발로 굴러들어오겠다는데 마다할 일이 무엇이냐?” 하고 대환영의사를 표명했습니다. 물론 편입시험을 봐서 정식으로 들어갔습니다만 원불교의 전폭적인 이해와 지원이 있었기에 제가 무사히 6년의 시련을 마치고 한의사 국가고시까지 합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원불교는 나에게 아무런 요구를 한 것이 없습니다. 그냥 나를 편하게만 해주었습니다. 원불교의 사람들은 대체로 인간 됨됨이가 모두 개방적이고 겸손해요. 동학이 지닌 아주 철저한 상식의 바탕을 계승한 종교입니다.
나는 증산도도 훌륭한 우리 민족의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강증산의 깨달음도 30만의 우리 민중이 일제의 총구 앞에 쓰러져가는 피비린내 나는 동학혁명의 현장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왜 증산도가 ‘해원’이니 ‘상생’이니 하는 것을 강조하겠습니까? 결국 민중의 원을 풀어주기 위해서 천지공사를 새롭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단지 강증산이라는 현실적인 인간을 상제로 파악하는데, 그 인간으로 강세한 상제의 상징적 의미를 보편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항상 왜곡된 무속으로 빠져버리고 말 위험이 있습니다. 상제(신)는 인격화되고 존재자화되면 상식의 보편적 지평에서 이탈합니다.
하여튼 우리나라 20세기의 사상적 흐름은 서양적 언어, 종교, 문학, 철학에 보조를 맞춘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고등문명입네 하는 것들이 다 허상에 불과한 것이고, 실상 민중의 아픔을 보듬은 것은 바로 이런 개벽종교들이었다는 것이죠. 한국의 아카데미즘은 20세기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허상만을 쫓아왔습니다.
백낙청 교무님도 잘 아시겠지만 「대종경」의 변의품(辨疑品)에서 개벽의 순서를 수운, 증산, 소태산으로 이야기합니다(변의품 32장). 다른 제자들은 증산에 대해서는 말이 많더라고 했어요. 증산의 특징은 조직을 전혀 안 만들었잖아요. 그러다보니 그 양반이 돌아가시고 나니까 제자들이 사분오열되어 싸우는 폐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소태산은 뭐라 그러냐면 ‘그 사람이라야 그 사람을 안다. 장차 사람들이 더 깨치고 원불교가 더 드러날수록 증산을 높이 평가하게 될 것이다’라고 얘기했지요(31장). 그러니까 개벽의 물꼬를 튼 분은 수운이고, 동학전쟁을 거치면서 피 흘리고 참담해졌을 때 기운을 돌려놓은 분이 증산이고, 소태산은 자기가 그걸 계승해 더 완전한 경지에 이끌었다는 자긍심을 갖고 있는 거죠.
박맹수 그럴 수밖에 없죠. 무엇보다 시대상황이. 물질개벽에 대한 이해도 소태산 시대에 와서 더 정확해지고요.
백낙청 그러니까 물질개벽이라는 걸 내 식대로 이해하면 소태산 때 그 인식이 더 깊어지는 건 당연해요. 나는 원불교학자들이나 원불교 교무님들 일반에 대해 갖고 있는 불만이, 물질개벽에 대한 연마를 안 해요. 일종의 화두로 잡고 물질개벽이 무엇인지 궁리하고 거기에 대응할 수 있는 정신개벽을 해야겠다고 하는 게 아니라, 물질개벽은 근사한 말로 떼어놓고 정신개벽만 하자고 하니 아까 도올이 비판하신 대로 그냥 수양 공부만 하게 됩니다.
박맹수 일종의 이원론처럼 된다든지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처럼 물질개벽과 정신개벽을 나누는 것에 대해서는 도올 선생님도 80년대부터 아주 통렬하게 비판하셨는데요. 실제 제가 원불교학을 점검해보니까 90퍼센트 이상의 연구자들이 그런 이분법적 도식에 빠져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의 원불교학 연구자들은 그걸 뛰어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극복되지 않을까 합니다.
김용옥 제가 처음부터 얘기한 것은 원불교는 출발부터 공동체적 삶의 재건을 주축으로 했다는 것이죠. 대각을 이론적으로 발전시켰다기보다는 사회운동으로서 실천하고 대각의 효험을 실증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이죠. 거기에는 정말 ‘플레타르키아’가 있었지요. 다중이 참여해서 실천적 장을 만들어갔으니까요. 결국은 앞으로 원불교가 우리 사회의 변화나 지향해야 할 비전 같은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영향력 있는 사회적 메시지를 부지런히 내어야 합니다. 종교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상부상조하자는 현실적 목표에 있습니다.
이러한 제생의세(濟生醫世)를 위하여 원불교는 과감하게 사회운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지금은 옛과 달라 종교가 고차원의 사회운동을 정밀하게 해나갈 수 있는 다양한 메커니즘을 확보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몸만 사리면서 마음공부에 매달린다면 원불교는 타락한 불교의 아류도 되지 않습니다. 원불교는 실상 불교가 아니에요. 불교는 뭐니 뭐니 해도 반야사상이 그 핵이고, 반야의 핵은 무아(無我)이고 공(空)입니다.
그러나 원불교의 핵심은 사은(四恩: 천지은, 부모은, 동포은, 법률은)에 있습니다. 사은이란 무엇이냐? 인간존재를 ‘은’으로 규정한다는 것이죠. 은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관계’를 의미합니다. 즉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독립된 실체일 수 없으며, 관계망 속의 일항목입니다. 존재는 생성이며, 생성은 관계없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은 중에 천지, 부모, 동포는 하나의 항목입니다.
장횡거(張橫渠)의 「서명(西銘)」에 건을 아버지라 칭하고, 곤을 엄마라 칭하는데, 그 건과 곤에서 태어나는 만물은 나와 대지의 탯줄을 공유하므로 동포라 칭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천지와 부모와 동포는 결국 상즉상입(相卽相入)의 일체(一體)입니다. 풀잎 하나도 나의 동포이며 경외의 대상이라는 자각이 없으면 일원상의 진리는 구현될 길이 없습니다. 하물며 같은 민족 동포의 아픔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법률은은 문명의 질서에 관한 것이죠. 그러니까 원불교는 고조선으로부터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사유를 계승한 토착적인 세계관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사은은 소박한 사상이기 때문에 위대하고 유니크한 진리입니다. 원불교의 매력은 현란한 레토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소박미에 있습니다.
백낙청 사은사상이 굉장하다는 말씀까지 이끌어냈으니 박교무님은 안심하고 귀가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웃음) 다만 원불교가 ‘사은사상’을 제창함과 동시에 ‘공(空)’ 사상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은 더 음미할 대목 같아요.
동학과 촛불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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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동경대전』에 워낙 여러 이야기를 해놓으셨기 때문에 할 얘기가 이렇게 많아졌는데요, 보통 3·1운동의 배경에 동학이 있다는 것은 대개 인정을 해요. 그리고 촛불혁명이 백년 전의 3·1운동까지 이어진다는 정도도 대개 수긍을 합니다. 그런데 동학에서 촛불혁명까지 연속성이 있다고 하면 그건 너무 멀리 가는 거 아니냐, 동학을 너무 과대평가한 거 아니냐 생각하는 사람도 더러 있거든요. 그것을 도올이 예견하셨는지 『동경대전』의 서문 「개경지축(開經之祝)」을 보면 “동학혁명은 지금도 진행중이다”라고 나온단 말이에요. 이런 문제를 우리가 좀 구체적으로 검증을 해보면 좋지 않겠나 합니다.
김용옥 검증이라는 말은 어폐가 있습니다. 그것은 검증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나라 20세기 역사교육의 부실함이 지적이 되어야겠지요. 우리나라 역사 중에 20세기 역사야말로 가장 왜곡이 심한 이념 분탕질이니깐요. 동학 이후의 우리 민족의 모든 사상적 움직임이나 사회적 운동이 동학과 관련되지 않은 게 없거든요. 30만명의 민중이 피 흘리고 목숨을 잃은 그 역사는 단절되려야 단절될 길이 없습니다.
그 정신은 침묵 속에서 더욱 활성화됩니다. 3·1독립만세혁명이나 그 이후의 즉각적인 임시정부의 성립, 공화제 선포, 독립운동가들의 활약, 건준의 성립, 이후의 인민위원회의 활약 등등 이 모든 것이 동학이라는 거대한 민족체험을 떠나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반드시 동학의 뿌리를 언급했어야 했습니다.
촛불혁명은 이전의 민주화운동과 양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70~80년대의 반군사독재 민주화투쟁은 반드시 지도자그룹이 있었고 이 그룹이 민중을 의식화시키고 리드해나갔습니다. 오늘날 정치인의 대부분이 이 의식화운동에서 태어난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촛불혁명은 그런 지도자그룹이 없습니다. 민중이 주체가 되어 정의로운 에너지가 분출한 사건입니다. 그것은 동학혁명이 고부에서 터져나간 사건과 매우 유사한 양태의 사건입니다.
백낙청 수평적인 ‘플레타르키아’ 운동이죠.
김용옥 백선생님께서는 촛불혁명을 저의 책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통나무 2019)에서 언급하고 있는 ‘반야혁명’과도 비교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지적해주신 바 있습니다만, 양자에 유사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만큼 우리 민중의 ‘플레타르키아’ 의식이 깊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반야불교 즉 대승불교는 싯달타의 종교가 아니라 보살의 종교입니다. 스스로 싯달타가 되겠다고 갈망하는 보살들의 종교입니다. 광화문에 쏟아져나온 사람들이 모두 이런 보살들이었습니다. 촛불혁명의 양상은 민중의 총체적인 분노의 폭발이었습니다. 최순실과 같은 역행보살의 역할도 있었지만, 동학혁명과도 같은 잠재력이 항상 우리 역사에 내재한다는 것을 과시한 사건이라고 보아야겠죠.
박맹수 역사 교육, 현대사 교육 잘못되었다는 말씀에 저는 ‘폭풍공감’하고요. 실제 동학농민혁명을 30년간 연구하면서 남한 전체와 일본까지 발로 뛰어 사료를 발굴해보면, 최근 들어 중요한 학설 하나가 바뀌었습니다. 당시 일본군 후비보병 19대대, 약 800명이 들어와서 조선을 짓밟거든요. 우금치에서 전면전을 하죠. 그런데 새로 밝혀진 게 본대가 우금치에 못 와버립니다. 뒤에서 게릴라전을 하는 동학농민군들 때문에요. 그래서 이건 과거식으로 실패한 전쟁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리고 그 일본군 대대장은 승진은커녕 좌천이 됐어요. 고향까지 가서 기록을 찾아보니까, 자기는 공을 세웠는데 승진도 안 되고 좌천되어 제대했다며 죽을 때까지 말썽을 일으키며 살았다고 해요. 미나미 코시로오(南小四郞)라는 인물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알았던 동학농민혁명이 실상과도 다르고, 지금 교육도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저는 동학농민혁명에서 촛불까지 이어지는 일관성 있는 바탕이 두가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비폭력 평화 정신입니다. 우리 동학군은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긴 것을 으뜸으로 삼는다, 어쩔 수 없이 싸우더라도 사람 목숨은 해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행진하면서 지나갈 때는 민폐를 절대 끼치지 않는다, 효자·충신·열녀·존경하는 학자가 사는 동네의 십리 이내에는 주둔하지 않는다(「대적시 약속 4항」). 그리고 병든 자는 치료해주고, 항복한 자는 받아들이고, 굶주린 자는 먹여주고, 도망간 자는 쫓지 않는다(「12조 계군호령」). 그 당시 특파원들도 이런 농민군의 규율을 칭찬해요. 동학농민군을 가장 비판했던 매천(梅泉) 황현(黃玹)조차 「오하기문(梧下紀聞)」에서 동학농민군 측의 처벌은 인간적이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동학의 비폭력이 3·1운동, 그리고 2002년 효순이 미선이 미군 장갑차 사건 촛불집회, 2016년 촛불집회로 이어집니다. 세계 사람들이 가장 놀란 게 비폭력 평화잖아요. 저는 그 뿌리가 동학농민군의 12개조 기율 등에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동학혁명도 3·1운동도 철저히 민(民)이 주체가 되어서 일어난 거죠. 3·1운동 때 가장 마지막까지 독립을 외쳤던 사람은 민족대표 33인이 아니고 노동자, 농민, 학생들입니다. 평민, 평범한 대중들이었죠. 촛불혁명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명확히 다른 게 있는 것 같아요. 동학혁명은 왕조체제 자체를 부정하진 않죠. 보완하려고는 하지만 실패로 끝났고. 3·1운동은 국내외 여러군데의 예닐곱 임시정부를 하나로 통합해서 상해임시정부를 탄생시키죠. 좌우가 하나가 되어서요. 저는 3·1운동은 그 결실로써 민주공화제인 상해임정을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절반의 성공이라고 보고, 2016년은 우리가 완전히 성공한 거니까 본질적인 차이가 있지만, 바탕에 흐르는 정신은 동학혁명에서부터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백낙청 저는 촛불혁명이 지금도 진행 중이기 때문에 완전한 성공을 이야기하기는 이르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동학농민전쟁 이전에 수운과 해월의 동학이 있었고, 거기서부터 연속성이 있다는 건 저도 절대적으로 동감합니다. 우리 역사를 보면 그런 동학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 여건이 촛불혁명에 와서 드디어 마련되었다고 봐요. 이전에도 물론 정신은 면면히 이어지지만 그때까지는 조직 없이 민들의 대대적인 운동을 하기가 어려웠고, 정권을 뒤엎는 성공으로 말하자면 4·19는 완전히 성공한 건데 그게 지속되질 못했죠. 6월항쟁이 그후에 처음으로 성공했고 지속성을 지닌 민주화인데, 그때도 전체적으로 어떤 기율을 가진 조직은 없었으나 운동권들의 조직이나 김대중·김영삼 두분의 조직을 가지고 움직였습니다. 요즘 소위 586이 욕먹는 이유가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그때 자기들이 조직을 주도하고 지도했던 그 꿈에서 여전히 못 깨어나고 있는 이들이 많은 거예요. 촛불혁명이 동학하고 또 가까워지는 면이, 저는 의제도 그렇다고 봐요. 첫째, 이제까지 민중항쟁에서는 남녀평등 문제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성평등 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었고, 2016~17년 항쟁의 여파로 미투운동도 벌어지며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그 시원이 사실은 동학이거든요. 기독교인들은 자꾸 기독교가 여성 교육도 시키고 이것저것 해서 남녀평등 사상을 가져왔다고 하는데, 물론 그런 공헌이 있었지만 성경이나 교리 자체를 보면 평등 종교가 아니에요. 그런데 동학은 그게 뚜렷했고, 그것이 상해임시정부 헌장에도 명시되어 있죠. 또 과거의 우리 민주화운동하고 달라진 게 생태계와 기후위기 문제입니다. 그 해법을 사실은 동학이나 원불교에서 찾아야 되는데, 아직도 그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서양의 생태이론·생태주의에 빠져 있으니까 원만한 사상이 안 나오고 있다고 봐요. 또 하나가, 촛불항쟁 당시에 큰 이슈로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남북문제에 커다란 전기를 마련한 거 아닙니까. 지금 남북관계가 교착상태라고 하지만 2018년 이루어진 엄청난 변화는 그대로 남아 있거든요. 앞으로 더 진전되면 그야말로 우리가 어변성룡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87년 6월항쟁만 해도 운동권에서는 자주통일을 굉장히 강조했지만, 어디까지나 분단체제라는 틀 안에서 남한만의 변화를 일으켰지 분단체제를 크게 바꿔놓지를 못했어요. 물론 그때 벌어졌던 통일운동과 자주화운동의 기운을 타고 노태우 대통령이 북방정책을 하고 남북기본합의서도 만들고, 또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의 돌파가 있긴 했습니다만, 분단체제라는 틀을 못 깼거든요. 그걸 깰 수 있는 기회를 촛불항쟁이 만들어줬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그런 항쟁이 반야혁명인 동시에 동학혁명이라는 표현은 참 적절한 거 같아요.
김용옥 우리나라의 생각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선생님만큼 한 민족으로서의 북한 동포를 품에 안고 생각하는 사상가가 없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 같으신 분이 활동하고 계시는 동안 온전한 남북 화해가 이루어져야 할 텐데, 문재인정부가 출범할 때부터 남북문제에 본격적으로 올인했던 것만큼 마무리 시기에도 구체적인 성과물을 내주기를 갈망합니다. 미국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 해도 미국을 뒤받으면서 설득할 수 있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대미관계에 있어서 너무도 비굴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을 상식으로 알고 있어요.
저는 사상가이니까 주제를 좀 래디컬하게 설정합니다. 백선생님처럼 마음이 곱지를 못해요.(웃음) 근대의 문제만 해도, 근대라는 개념을 방편으로 해서 근대를 극복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근대라는 개념 그 자체를 파괴하고 새로운 원점을 창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원시공산제, 봉건제, 자본제…… 이런 개념보다는 보다 단순하고 유용한 개념이 ‘왕정이냐, 민주냐?’ 하는 설정이라는 것이죠. 단군 이래 구한말까지 관통하는 권력의 형태는 왕정입니다. 이것은 전세계의 역사가 다 똑같아요. 왕정에서의 민주체제로의 변화는 모두 최근 한두 세기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래서 수운이 “개벽후 오만년”이라는 말을 쓰는 겁니다. 개벽후 오만년이 지나 비로소 민주적 혁명의 가능성이 생겨났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민주를 말해도 그것은 50년 정도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고, 보수세력들은 5만년의 관성을 등에 업고 설치는 것입니다. 프랑스혁명도 루이16세의 목을 잘랐다고는 하지만 그뒤 2백년의 시행착오를 거쳐도 민주가 정착되었다고는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동학사상의 역사적 의의는 진정한 민주의 민족사적 원점을 이미 19세기 중엽에 우리 민족의 자생적인 사유에 기초하여 창출했다는 데 있습니다. 동학의 인내천사상은 프랑스 인권선언의 사상을 원천적으로 뛰어넘는 것입니다.
우리의 촛불혁명은 동학혁명의 연속적 흐름을 다시 21세기적으로 꽃피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피어나고 있는 과정의 출발입니다. 끊임없이 좌절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승리하고야 만다는 신념을 견지해야 합니다. 수운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루에 꽃 한송이 피네. 이틀에 꽃 두송이 피네. 삼백육십일 지나면 꽃 또한 삼백육십송이 피겠지.(一日一花開, 二日二花開。三百六十日, 三百六十開。)”
백낙청 해월의 선천·후천 얘기하고 원불교에서 얘기하는 것의 공통점 하나는 후천시대가 시작되면 세상이 일단 더 어지러워진다고 했어요. 나는 해월의 그 대목을 보면서 놀랐는데, 당시가 갑오년 이후인데도 앞으로 만국병마가 와서 다투는 큰 환란이 있을 것이라고 했죠.
김용옥 해월은 후천개벽을 얘기하지는 않았고, 단지 ‘현도(顯道)’의 시기, 다시 말해서 동학의 현창할 시기를 제자가 물은 것에 대하여 답한 것입니다. 그때 해월은 세가지를 제시합니다. “1)산이 다 검게 변하고 2)길에 다 비단이 깔리고 3)만국의 병마가 우리나라 강토에 들어왔다가 물러나는 시기이니라!” 산에 식목이 잘 되었고, 길에는 다 아스팔트가 깔렸으니까, 남은 것은 외국 군대가 이 땅을 떠나는 시기이겠죠. 참으로 통찰력 있는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백낙청 그후에야 제대로 된 개벽세상이 된다고 했는데, 아직 완전히 물러가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소태산 대종사도 비슷한 얘기를 하세요. 그때도 일제하의 어려운 시절인데 앞으로 ‘돌아올 난세’에 대비해서 너희한테 얘길 해주겠다고 하는 대목도 있고(「대종경」 인도품 34), 또 앞으로 한번 큰 전쟁을 치르겠지만 그것만 넘기고 보면 다시는 그런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어요(실시품 10). 6·25 얘기 아니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선천·후천으로 딱 갈라지는 게 아니라, 후천시대가 시작될 때를 원불교에서는 선·후천 교역기(交易期)라고 하는데, 이게 한참 지속되면서 사람들이 더 고생할 거라는 거지요.
김용옥 그걸 말세(末世)라 하지요, 말세! 그런데 증산도에서는 그때 바로 천지공사를 다시 하게 된다고 말하지요.
증산도의 훌륭한 점은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한다는 사실입니다. 세계의 신들을 다 모아놓고 다시 교육시켜 통일신단의 조화정부를 구성한다는 것이죠. 천지의 판을 다시 짜겠다는 이 발상 속에는 우리 개벽사상의 주체성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증산도의 천지공사도 천지와 인간의 이상을 실현하는 궁극적 주체를 인간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만 언급해두겠습니다.
조선 민중이 추구하는 사상적·정서적 갈망을 칸트철학이니 비트겐슈타인 운운하는 상아탑의 인간이 충족시킨 것이 아니라, 이런 종교적 천재들이 충족시켜주었다는 이 명백한 사실을 우리 지성인들이 반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민간종교니 신흥종교니 민족종교니 하는 저열한 개념을 떨쳐버리고 우리 민족 스스로의 종교로써 세계 민중을 설득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종교에는 고등종교와 저등종교의 개념이 성립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인간을 등쳐먹는 종교 야바위꾼들만 있지요.
백낙청 지금 시국에 대해선 할 말들이 많지만 대선 후보 경쟁이 어떻고 하는 얘긴 할 거 없고, 큰 흐름을 긍정적으로 보시고 그 핵심을 잡아주셔서 충분히 이야기되었다고 봅니다. 끝으로 학산님 한 말씀 하시고 도올 선생도 추가하고 싶은 말을 들려주시죠.
박맹수 저는 다시 헌사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굉장히 흥미로운 몇가지 요소들이 있습니다. 문사철(文史哲)이 만났는데 모두 개벽파인 것 같아요. 역시 개벽파는 자기개벽, 이웃·타자 개벽, 사회개벽, 문명의 개벽까지 이루려는 게 특징이 아닌가 합니다. 전통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이사병행(理事竝行)이죠. 공부와 이론과 실천을 병행하는. 그런 특징들이 저희 대담에서 묻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30년대생 어르신, 40년대생 어르신, 저는 50년대생 청년인데요. 뭐랄까, 선배 세대들이 나와서 이웃과 세계와 문명을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 생각하는 내용들이 조금이나마 드러난 것 같습니다. 기본 의무는 다 한 것 같고, 이런 대담이 여러차례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삼대에 걸쳐서 공을 쌓으리라는.(웃음)
김용옥 무엇보다도 오늘 제 간절한 소망은, 저도 나이가 적지는 않습니다만, 우리 백선생님께서 건강하게 오래 사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선생님을 꼭 이런 자리에서가 아니라 예를 들면 술자리 같은 데서 편안하게 뵙고 싶기도 합니다. 대학교 시절의 친구처럼 가볍게 만난다면 백선생님의 말씀 이상의 술안주가 없을 것 같아요. 건강이 허락되신다면 한잔이라도 마시며 여유있게 대화를 나누면 좀더 재미있지 않을까 합니다.
백낙청 감사합니다. 제가 술을 많이는 못합니다만 좋은 사람 만나면 합니다. 오늘 우리 좌담의 제목이 ‘다시 동학을 찾아 오늘의 길을 묻다’인데 상당히 부응한 것 같아요. 동학은 워낙 우리 교육이 잘못되어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데 이번에 도올 선생이 역작을 내신 것을 계기로 훨씬 많이 알려졌고, 그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나름대로 좀더 깊이있는 공부를 했다고 생각해요. 촛불혁명은 사실 특별한 학교 공부가 필요한 게 아닌 바로 우리 시대의 사건인데도 요즘 보면 촛불혁명 얘기하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언론들도 촛불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각자 얘기하고 있고요. 심지어는 촛불항쟁 때 주도자는 없었지만 집회 관리를 한 시민단체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도 거의 다 잊어버렸어요. 그런데 60대 이상의 늙은이들이 모여서 그걸 한번 되새기고, 그것이 동학으로부터 이어지는 자랑스러운 전통이고 현재 진행 중인 현황이라는 점에 적어도 우리 셋이 합의했다는 것만 해도 큰 의미가 있고 오늘의 수확이 아닌가 합니다. 감사합니다. (2021.7.23. 후즈닷컴 스튜디오)
* 이 글은 좌담의 내용을 참여자들이 수정·보완한 것이며, 유튜브 TV창비 및 도올TV에서 원본 영상을 시청할 수 있다(2021년 9월 게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