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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손보미 孫寶渼

1980년 서울 출생. 2009년 『21세기문학』 신인상,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그들에게 린디합을』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맨해튼의 반딧불이』, 중편소설 『우연의 신』,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 『작은 동네』 등이 있음.

shoutspring@naver.com

 

 

 

불장난

 

 

“남자들이란 항상 골칫거리지.”

남자애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놀이에 대해 말하자 그녀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에 나는 의구심을 느꼈던 것 같다. 혹은 그녀가 진짜 의도를 숨기고 있다고 여겼거나. 그때 나는 열두살이었고, 여자애들끼리 모여서 시도 때도 없이 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남자애들은 더러워. 바보, 멍청이들, 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어. 모조리 다. 발언 속에 포함된 경멸은 언제나 진실된 것이었다. 그들—남자애들—에 대해 우리가 지나치게 몰두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즐거움과 흥분은 어디까지나 이야기를 나누는 행위 자체에서 기인한 것이지 이야기의 대상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아, 아니다. 그런 건—혐오의 대상에게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 중 하나였다.

내가 그녀의 말에 의구심을 느꼈던 이유는, 그 말을 한 사람이 다름 아닌 그녀라는 사실,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그녀는 운전 중이었고, 과속 방지턱을 넘어가는 동안에도 속도를 줄이지 않아서 우리의 몸은 차 안에서 꿀럭, 하고 요동쳤다(차 안에서 안전벨트를 매지 않아도, 어린아이들을 카시트에 앉히지 않아도, 어른들이 아무 데서나 담배를 피워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런 시절이 분명히 존재했다). 조심성 없는 운전 습관 때문에 그런 일은 빈번하게 발생했지만, 그녀는 한번도 내게 괜찮냐고 물어본 적이 없었다. 나를 덜 걱정해서가 아니라, 그녀에게는 그 정도 물리적 충격이 그다지 크게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럴 것이라고 지레짐작해서였다.

그녀의 운전 습관은 나이가 든 후에도 여전했다.

“그때, 장모님 운전 실력이 총알택시 기사 뺨쳤다니까. 나 토할 뻔했어.”

몇달 전 나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는데, 우리가 아직 부부였던 시절, 남편이 아무런 맥락도 없이 갑자기 그때의 일을 끄집어낸 적이 있다. 나는 좀 의아했다. 그는 그녀가 운전하는 차를 딱 한번 타봤을 뿐이었다. 칠년 전, 그러니까 우리가 결혼을 하기도 전의 일로, 처음으로 그가 우리 부모님 집을 방문한 날이었다. 그는 토요일 오후에 고속철도를 타고 서울에 왔다가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돌아가는 것으로 일정을 짰다. 주말 내내 시간을 내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는 아니었다. 아, 물론 그는 바빴다. 언제나 그랬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기획재정부 소속 공무원이었다. 대기업에 취직한 친구들과 비교하면 일의 강도는 비슷한데 연봉은 형편없다고 그는 자주 말했다. “그냥 대기업에 들어갈 걸 그랬어.” 실수했다는 듯한 표정과 자책하는 듯한 말투 속에는 자신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었다는 자신감, 그리고 최종 선택에 대한 만족감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그는 진짜 감정을 숨길 의도가 없었다. 그건 그가 말하는 방식일 뿐이었다. 그는 그게 허위의식이나 가식과는 상관이 없다고 믿었고, 매너—하나의 형식이라고만 생각했다. 나는 그게 그의 고질적인 특질은 아니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저 미숙하고 순진한 부분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식으로 받아들였다 할지라도, 그와 결혼하지 않을(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이유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하튼 그날 일정을 그렇게 짠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은 아니었고, 어디서 하룻밤을 자야 할지 그가 끝내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혼도 하기 전인데 여자친구의 부모님 집에서 잠을 자는 건 이상하다고 여겼다. 그 당시 나는 직장 근처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내 오피스텔에서 자면 되잖아?” 그는 내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나는 너네 부모님을 만난 날 밤에 너와 같은 방에 머물고 싶지 않아.”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근처 호텔서 혼자 자는 것도 이상한 것 같아. 그런 건 얼빠진 자식들이나 하는 짓인 것 같거든. 자기는 어떻게 생각해?”

그날, 저녁식사 자리에서 나와 그는 아버지와 그녀의 맞은편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처음에 그녀는 다소 긴장한 것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곧 그런 분위기는 사라졌다. 그녀는 활력이 넘치는 모습으로 친근하게 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별말 없이 그를 지그시 바라보고만 있었다.

늘 그랬다. 손님들이 집에 오면 늘 그랬다는 말이다.

열살 때의 이사—내 생애 첫번째 이사였다— 이후로 가끔 아버지의 회사 동료, 부하 직원, 대학 동창 부부가 집으로 초대되었다. 일회성인 경우도 있었고, 오래도록 지속된 경우도 있었다. 부부 동반 모임! 처음 손님이 집에 오던 날, 낮부터 부산스럽게 준비를 하며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말을 몇번이나 반복했었다. (순전히 남편 때문에) 생판 처음 만나는 여자 어른들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어떤 여자들—보통은 아버지 부하 직원의 아내들—은 대충 분위기를 맞추다가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남몰래 나에게 미소를 보내기도 했고, 어떤 여자들은 열성적이고 과장된 포즈로 친밀하게 굴었다(남자 어른들은 여자 어른들 사이에 흐르는 이런 미묘한 기류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관심이 없거나, 혹은 애써 무관심한 척했다). 무언가 언짢다는 듯이 신랄하고 인색하게 굴며 안주인의 흠집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이런 경우, 그녀들의 남편은 아버지와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 나조차 알아차릴 지경이었건만, 그녀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시종일관 생글거리다가 맥락도 없이 내게 말을 걸곤 했다. “우리 딸, 잘 먹고 있어?” 그녀는 이름 대신 꼭 우리 딸,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경우, 식사가 끝나갈 때쯤이 되면 신랄하고 인색한 기운은 맥없이 사그라들고, 심지어 어떨 때 그들—여자들—은 마치 아주 오랫동안 알아온 친구 같아 보였다.

그녀와 아버지는 손님이 오기 전, 어떤 역할을 맡을지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녀는 끊임없이 말을 하고 매력을 발산하며 관심을 끌고, 아버지는 시종일관 점잖은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관심을 골고루 나누어준다. 아버지는 과묵하게 굴었지만 적절한 때 재치있는 농담을 던질 줄 알았다. 아버지는 이런 말을 했다. 아내는 내 진정한 대변인이야, 우리는 이심전심이야, 나는 말을 할 필요조차 없어, 기타 등등. 숭배하는 듯한 아버지의 목소리 주위로, 그전까지 마구 흩어져 있던 자신감과 권위의 편린들이 한꺼번에 일렬로 줄을 서는 것 같았다. 그러면 그녀는 양쪽으로 늘어뜨린 자신의 기다란 머리카락을—마치 아버지와의 사이를 갈라놓는 장벽이라도 된다는 듯— 아버지와 맞닿지 않은 어깨 쪽으로 모조리 넘겨버리고는 아버지의 팔에 자신의 팔을 밀착시켰다. 나는 항상 그걸 못 본 척했다.

평소에 아버지는 전혀 과묵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버지의 대변인도 아니었고, 아버지의 마음을 다 아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건 더더군다나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아버지가 왜 그토록 시시콜콜하게 원하는 것을 끊임없이 말해야 했단 말인가? 주말 동안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서 그녀에게 이것저것 요구했다. “나 물이 마시고 싶은데”라든지, “리모컨이 내 가까이 있으면 좋겠는데”라든지, “저녁은 일곱시 십분 전에 먹고 싶어” 등등. 이상하게도 아버지의 태도에서는 요구사항을 하달하는 사람의 권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조바심과 초조함, 흐릿한 열의 같은 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 요구사항을 군말 없이 들어줄 때도 있었지만, 이렇게 말할 때가 더 많았다. “그게 정말 지금 당장 필요한 건지 다시 생각해봐줄래요?” 그러면 아버지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한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결국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 말이 맞아.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아닌 것 같아.”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그녀는 약간 극적으로 두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럴 줄 알았다구요.”

그러므로 아버지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은 한번도 원하는 것을 입 밖에 낸 적이 없다고, 그럴 필요조차 없다고 말할 때 나는 좀 의아한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말들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던 것 같다. 심지어 나는 아버지가 특별히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중에, 사춘기의 폭풍 한가운데 서게 되었을 때, 나는 아버지의 온갖 시시콜콜한 행동들을 떠올리며 머릿속 재판을 거행했지만,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가 보여준 그런 태도는 절대 심판대에 오르지 않았다.

손님들과 식사가 얼추 마무리되면 아버지가 내게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라고 했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면 아버지가 찬장 깊숙이 숨겨둔 양주와 작은 잔들을 꺼내리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 앞에서 술 마시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흡연가였지만 우리 집에는 재떨이가 없었고, 라이터나 담배가 내 눈에 띈 적도 거의 없었다(다른 집에서는 아버지가 집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게 아주 일상적이었다). 길거리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로 차고 넘쳤다. 함께 걷다가 그런 사람들을 목격하면 아버지는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식당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목격하면 어떻게 했는가? 아버지는 두 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눈을 가린다—아버지의 커다란 두 손이 급박하게 내 눈앞에 드리워진다.

티브이 드라마에서 남녀가 포옹하는 장면이 나오거나, 외국 영화에서 키스를 나누는 주인공들이 등장할 때에도 아버지는 내 눈을 가렸다. 그런 세계—하지만 그게 어떤 세계란 말인가?—가 나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겠다는 듯이. 하지만 그것—접근금지가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아버지의 바람대로 되었다면 그때 내가 그들이 술을 마시리라는 사실, 그들이 담배를 피우리라는 사실, 그들이 특별한 (아이들 앞에서는 절대 말하지 않을) 단어들을 내뱉으리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었겠는가? 접근금지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알지 못했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내가 그 세계를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몰랐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하지만, 그만 들어가서 자라는 아버지의 말에 나는 언제나 군말 없이 따랐다. 부인들은 꼭 한마디씩 거들었다. “아휴 착하기도 해라.” 그런 말을 들으면 머리 위로 벌레가 기어가는 기분이 들었고 소름이 돋았다. “동생이 갖고 싶지 않니?” 이런 질문을 받을 때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보통은 여자 어른 중 한명이 질문을 던졌고, 나머지 어른들은—여자 남자 할 것 없이—안 그런 척하면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들은 애가 아직 어려서 그렇다고 말했다.

 

열한살 때 이런 일이 있었다. 그날, 나는 손님들이 있는 식탁을 떠나 세수와 양치질을 한 다음, 곧바로 방으로 돌아가 불을 껐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어둠 속에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지는 않았다. 눈을 감으면 진짜로 잠들어버릴 수도 있었으므로(이미 그런 경험이 몇번 있었다). 내가 잠들었는지 그녀가 확인하고 가면 나는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방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밖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려고 애를 썼다. 집 구조상으로 보면 내 방은 식당과 가장 먼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내 귀에 도착하는 건 적당히 뭉쳐지고 굴려진 음파들의 덩어리에 불과했지만, 어렴풋이 감지되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고, 나는 느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나를 정말로 매혹시켰던 것은 내가 금지당하는 대상이라는 사실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접근금지 딱지가 붙어 있다는 것, 그러니까 아버지가 그 딱지를 ‘그런’ 세계가 아닌 나 자신에게 붙여놓았다는 것. 나는 어둠 속에서 내 신체 전부가 거대한 귀가 되었다고 상상했다. 신체는 언제나 정신을 지배하는 법이어서, 그런 상상이 작동되기 시작하고 나면, 나는 그 흐리터분한 덩어리 속에 독자적인 음절들을 경계 짓고, 하나씩 차례대로 골라잡을 수 있었다. 쾅, 하고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소리, 무언가가 쏟아지는 소리, 냉동실에서 꺼낸 얼음을 통에 붓는 소리, 사람들의 뭉개지는 말소리. 그러다가 나는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내 아내는 내가 원하는 걸 말하지 않아도 모두 다 알아차린단 말이야.”

음파들의 덩어리 속에서 특정한 지점을 건져 올리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아버지는 엉성한 발음이긴 하지만 쩌렁쩌렁하게 집 안이 울릴 만큼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은 아버지가 자주 했던 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는데도 낯설고 이상한 느낌을 품고 있었다. 과묵함을 뚫고 나오는 권위나 자신감도 찾아볼 수 없었고, 평소에 집에서 그녀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때처럼 성마른 조급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의 목소리에 뒤이어 무모하게 무언가를 잔뜩 헝클어뜨리는 듯한 웃음소리가, 키득거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들었는데,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게 웃음소리(그중에서도 그녀의 웃음소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길을 걷다가 구멍에 쑥 빠지는 것처럼 웃음소리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바깥에서는 갑작스러운 정적이 감돌았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들이 그 시각 방 안에 잠들어 있을 이 집의 어린 딸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는 얼른 침대로 가서 누웠다. 눈을 감은 채로 어른들 중 누구라도 나를 보러 오기를 원했다. 내가 그들의 말을 엿들은 적이 없다는 것을 보증해주기를 바랐다. 보증. 그래, 나는 그것을 바랐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나를 보러 오지 않았고, 그 사실 때문에 나는 다소 처참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번쩍, 하고 눈을 떴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방금까지 꿈을 꾼 것 같은데,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부엌으로 간 나는 텅 빈 식탁 위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실망감을 느꼈다(대체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설거지통은 깨끗했고, 그릇과 술잔들도 이미 다 찬장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그 모든 것들이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치워진 것이다. 나는 거실 한가운데 서서 그녀와 아버지가 함께 잠들어 있을, 그러니까 꽉 닫힌 안방 문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나는 일부러 침대 위로 엉금엉금 천천히 기어 올라갔다. 그때, 문득 조금 전 꾸었던 꿈의 일부가 떠올랐다. 사실 일부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내가 떠올린 것은 그저 꿈속에서의 나의 모습, 그것뿐이었다. 나는 거대한 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거대한 귀에 손과 발이 달려 있었는데, 꿈속의 나—거대한 귀는 아주 조잡하고 초라하며, 볼품이 없었다.

그 조잡하고 초라하고 볼품없는 귀가 꿈속에서 어떤 소리를 들었는지 꿈 밖의 (더이상 거대한 귀가 아닌) 나로서는 기억해낼 재간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손님들이 집을 방문하는 일은 점차 줄어들었다. 교류가 완전히 끊어진 건 아니었지만 어느정도 시들해진 건 사실이었다. 그녀가 몸이 아프다는 말을 달고 살던 시기도 바로 그즈음이었다. 병원 검진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도 그녀는 자신의 백혈구 수치를 걱정하거나 족저근막염이나 부비동염 같은, 그 당시의 나로서는 들어본 적도 없고 어떤 식으로 아픈 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병명을 들먹였다. 주말마다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우리는 병원으로 갔다. 내가 집에 있겠다고 하면 그녀는 우리 모두 함께 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병원 앞에 도착하면 보란 듯이 내게 말했다. “넌 차 안에 있어.” 나는 뒷좌석에 앉은 채로 그들이 함께 병원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걸 지켜보아야만 했다.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언제나 그녀가 운전을 하겠다고 우겼다. “몸을 좀 써야겠어.” 어불성설이었다. 집에 걸어가는 편이 훨씬 낫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는 퇴직한 후로 일년에 한두번쯤, 그녀와 둘만의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왔다. 집에서 아버지가 시시콜콜한 요구사항을 늘어놓으면 그녀가 그 요구사항의 가불가 판정을 내리는 일은 계속되었다. 적어도 내가 그 집을 나와서 따로 살기 전까지는 그랬다. 둘 사이를 흐르던 극적이고 무엇인가 샘솟는 듯한 기운은 사라졌지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진지한 아버지의 표정과 야릇하게 씰룩거리는 그녀의 눈썹은 그대로였다.

그날, 그를 처음으로 우리 집에 데리고 간 날, 끝도 없이 질문 세례를 던지는 그녀와 입을 다문 채 그를 바라보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그들이 그 옛날, 손님들과 머물던 식탁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아버지와 그녀가, 나와 그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특정한 시기를 반복해보려는 공모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의구심. 내 머릿속으로 이미 주름이 잔뜩 파인 아버지의 얼굴과 주름이 파였다는 표현이 아직은 어울리지 않는 그녀의 얼굴이 마주하고 킬킬거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런 장면이 일단 떠오르고 나자, 그들이 실제로 그런 공모를 했느냐 마느냐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내 상상력 때문에 짜증이 났다. 그랬다. 상상력, 언제나 그게 문제였다.

기차표를 예매해놓았다고,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고 그가 말했을 때, 그녀는 미래의 사윗감을 택시에 태워서 보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좋은 생각이네. 당신이 운전을 하면 되겠네.”

아버지는 한번도 그녀가 운전하는 차에서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마치 평소 확고하게 지니고 있던 ‘안전함’이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아버지 신체 기관의 반응이 그녀의 운전 스타일에 맞추어 새롭게 조정되는 것 같았다.

마력. 그런 식으로 알게 모르게 타인의 신체—마음을 조종하는 그녀의 능력을 나는 마력이라고 불렀다.

그날, 그녀는 사십분은 걸릴 거리를 이십오분 만에 주파했다. 그는 그녀가 운전하는 차를 처음 타본 사람들이 어정쩡하게 내뱉는 말, 예컨대 “운전을 정말 잘하시네요” 혹은 농담하듯 “와, 진짜 너무 험하게 운전하시네!” 따위의 말은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정신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끝까지 사윗감으로서의 예의를 지켰다. 나는 그녀와 아버지에게 돌아가라고, 그를 배웅하고 바로 내 집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기차역에 둘만 남았을 때, 그가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장모님 연세가 어떻게 되신다고 했지?”

그후로 그는 한번도 그녀의 운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는데 몇년이나 지난 후에야 불쑥 그런 말을 꺼낸 것이다. 장모님의 운전 실력이 총알택시 기사 뺨친다고. 나는 그때 뭐라고 했는가? 그즈음 나는 남편이 하는 말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으려고, 그저 농담처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쓸데없이 뺨을 왜 쳐?” 그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도 나는 궁금하다. 그는 그저 재미있는 일화를 불현듯 떠올린 것에 불과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운전 습관을 계속 마음에 품고 있다가 이때다 싶은 시점에 의도적으로 내게 던진 것일까? 그런 식으로 장모의 무신경하고 성급한 부분을 내 앞에 들이밀면서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당신은 정말 무신경해. 장모님을 닮아서 그런가봐. 피는 못 속이잖아.

정말로 그런가? 아니면 (그가 내게 자주 하는 말처럼) 내가 모든 것을 너무 극적이고 과장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아버지에게 “다시 생각해봐줄래요?”라고 말하며 눈썹을 움직이던 그녀처럼?

 

하지만 여기에는 두가지 오류가 있다. 무엇보다 그녀는 무신경하지 않았다. 경솔한 부분이 있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경솔하다고 표현하지도 않을 것이다. 대범하다는 표현은 어떨까? 아니면…… 무모하다고? 그랬다. 그녀는 무모했다. 오래전, 그녀는 자신보다 열두살이나 많은 남자, 그것도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에 다니는 아홉살짜리 딸의 아버지—유부남—와 열렬한 사랑에 빠졌었다. 이게 바로 두번째 오류였다. 아홉살짜리 딸, 그게 바로 나였다. 그러니까, 그녀와 나는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인 것이다.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 그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분히 의도된 나의 오류이다.

아버지와 사랑에 빠졌을 때 그녀는 스물일곱살이었고, 초등학교에 부임한 지 몇년밖에 되지 않은 초짜 교사였다. 일년 동안 이어진 둘의 사랑은 비밀로 부쳐지다가 내가 열살이 끝나갈 무렵 꼬리가 밟혔다. 그러고 한달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학교를 그만뒀는데, 자의적인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공식적인 처벌이나 조치의 결과였는지는 모르겠다. 사람들은 그녀가 내 담임 선생님이었다고 알고 있었지만, 사실 그런 적은 없었다. 심지어 나는 학교에서 그녀의 얼굴을 본 적도 없었다. 나중에 벌어진 일들을 고려하면 그녀가 내게 학교 선생으로 각인된 적이 없다는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와 결혼한 이후로 자신이 한때 선생이었다는, 그런 비슷한 말도 꺼내지 않았다. 하다못해 내 학업에 도움을 주려는 그 어떤 시도조차 한 적이 없었다. 자신의 과거가 마치 이제는 효용을 다한, 징그러움만 남은 허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뒤로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흘러갔다(혹은 그렇게 보였다). 특별한 소란도 없이(이것 역시 그렇게 보였다는 의미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혼을 했고, 그다음 해 1월 말에 그녀가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결혼식 같은 세리머니도 없이 아버지와 그녀가 법적인 부부가 된 후, 원래 거주지에서 꽤 거리가 있는 동네로 이사를 했다. 내가 전학을 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 되었다. 사실 이 모든 사안—이혼, 재혼, 이사, 전학—들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이루어졌다. 이전부터 어머니와 아버지는 주말부부였는데, 아버지의 불륜 사실이 발각되자마자 나는 어머니가 주중에 머물고 있던 지방으로 보내졌기 때문이었다. 둘의 주말부부 생활이 시작된 건 내가 일곱살 때, 어머니가 지방에 있는 대학에 전임 교원으로 채용되고서부터였다. 어머니의 짐을 옮기던 날, 아버지와 함께 교수 아파트에 함께 갔던 기억이 난다. 임시거처. 처음에 그곳을 그렇게 부른 건 어머니였고(“여보, 여기는 임시거처일 뿐이야”), 그후로 아버지와 나 역시 그곳을 그렇게 부르곤 했다(“엄마, 내일 임시거처에 안 가면 안 돼? 우리 집에 함께 있으면 안 돼?”)

아버지의 불륜이 들통나고 내가 그곳에 머물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더이상 임시거처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이제부터 여기가 내 집이야.”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겨울방학이 끝나고도 나는 계속 어머니 집에 머물러야 했다. “이건 네 부모가 함께 결정한 일이야.” 이혼한 이후 어머니는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마다 그런 식으로 아버지와 자신을 엮어서 삼인칭으로 부르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좁고 긴 구멍에 끼어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압박감은 아니었고, 굳이 설명하자면 곤란함에 가까웠다. 내가 좀더 나이가 들었을 때에는 어머니가 단어 하나하나에 집착하고 끝도 없이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창피한 마음이 들었다.

봄방학이 끝나기 며칠 전, 어머니는 이제 많은 것들이 바뀌게 될 거라고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했다. “엄마는 너에게 사과하고 싶지 않구나. 사과를 받고 싶다면 네 아빠에게 받으렴.” 하지만 단호한 태도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곧바로 어머니는 이렇게 덧붙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영원히 너의 엄마야.”

내가 열두살이었던 여름에, 일년 동안 외국의 대학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도 어머니는 공항에서 똑같은 말을 했다.

나는 영원히 너의 엄마야.

“너네 엄마는 야망이 있는 여자였어.” 이혼 직후,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해 그렇게 말하곤 했다. 비난하는 투는 아니었던 것 같다. 다만 ‘야망’이라는 단어와 ‘여자’라는 단어를 한 문장에 둘 때, 아버지는 영원히 출입을 거부당한 대륙에 몰래 발을 디디는 중인 사람처럼 보였다. 긴장되고 조심스럽지만, 그러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듯한 태도. 발언을 한 직후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끼겠지만, 곧이어 자신이 느끼는 감정 때문에 어리둥절해지고 말 것이다(아니다, 아버지는 한번도 어리둥절해하지 않았다). 물론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발언도 있었다. “난 너네 아빠한테 미리 다 이야기했었어. 그 대학에 지원할 거라고. 그후에는 거기에 가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니네 아빠는 알았다고, 나를 응원한다고 했어. 그런데 내가 채용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니까 뭐라 그랬는지 아니?” 어머니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이어갔다. “‘뭐라고?’ 이러는 거야.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처럼! 니네 아빠는 내가 거기에 채용될 거라고 눈곱만큼도 믿지 않았던 거야!” 어머니의 분노나 증오 속에는 아버지의 배덕보다는, 자신을 ‘진심으로’ 지지한 적이 없으면서 그런 척했다는 사실이 훨씬 더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서로에 대한 노골적인 언급은 이혼 직후 한동안 불타오르다가 서서히 사그라들었고 결국에는 꺼져버렸다. 한톨의 불씨도 남지 않았던 것 같은 어느 날, 오랫동안 품고 있던 궁금증을 해결하지 않고는 안 되겠다는 듯, 뜬금없이 불쏘시개를 꺼내든 건 그녀였다. 그녀는 내게 어머니의 집이 어떻냐고 물었다. “텔레비전이 없어요.” 그 말을 듣자, 그녀가 대답했다. “아, 나 너네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아.” 비하나 빈정거림의 기미는 없었다. 그녀는 정말로 뭔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았고 다시는 어머니의 집에 대해 묻지 않았다. 만약 어머니의 집 거실에 소파가 없다는 말까지 했다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어머니의 집 거실 중앙에는 커다란 책상이 하나 있었다. 사실 나는 그게 식탁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머니는 그걸 언제나 책상이라고 불렀고, 나에게도 그렇게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의자는 베란다의 커다란 통창을 향해 있었다. 창밖으로는 높게 자란 나무들이 가지를 사방으로 뻗고 있어서 여름방학 때는 눈부신 초록을, 겨울방학 때는 앙상한 가지를 볼 수 있었다. 안경을 쓰고 머리를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어머니는 책상 앞에 앉아서 두꺼운 책을 읽고, 포스트잇을 붙이고, 연필로 표시하고, 컴퓨터 자판으로 무언가를 계속 썼다.

사람들은 내가 그 시기에 무척 혼란스러웠거나 상처를 받았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내가 느낀 혼란스러움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런 방식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어머니는 일을 할 때마다 내가 읽을 책을 주었다. 책이라면 아버지와 그녀가 사는 집에도 많았다. 종류는 달랐다. 아버지 집에는 주로 동화책이나 추리소설 전집이 있었지만, 어머니는 나를 위해 백과사전이나 만화로 된 역사책을 사두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책은 귀신이나 미스터리를 다룬 책들이었다. 하지만 두 집, 그 어디에도 내가 원하는 책은 없었다. 한번은 —열한살 때의 일인데— 요절한 러시아 발레리나의 일대기를 다룬 책을 사달라고 그녀에게 요청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그때 세탁실에 앉아서 손빨래를 하는 중이었고 나는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아서 말했다. “러시아 발레리나의 사랑을 다룬 책이에요.” 나는 일부러 ‘사랑’이라는 단어를 강조하고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녀는 손빨래를 멈추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을 뿐이다. “그런 책에는 아무런 교훈이 없잖니.” 나는 순순히 물러났다. 어쨌든 내게는 어머니가 있었으니까. 어머니는 내가 책을 사달라고 한 사실에 만족스러워해서, 곧바로 함께 서점으로 갔다. 하지만 표지를 봤을 때는 고개를 흔들며 의구심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다…… 네가 읽기에는 너무 부적절한 것 같구나.” 나는 전혀 부적절하지 않다고, 어머니를 설득시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어린 여자애가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내용인데? 발가락이 너무 길어서 토슈즈를 신기도 힘들었지만 결국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되는 이야기라고!” 서점 한가운데에 서서 이런저런 설명을 늘어놓는 동안 나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책을 사줄 어른이 남들의 두배(물론 정확히 두배는 아니었다. 1.5배!)나 마찬가지인데, 왜 나는 원하는 것을 하나도 가질 수 없단 말인가? 왜 이들은 내게 이렇게 얕은수를 쓰게 만든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자,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그리고 이게 내가 느끼는 혼란스러움과 상처의 정체였다.

 

전남편은 내가 그 모든 변화를 극적인 갈등 없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그는 ‘비정상적’이라고 했다). 부모님이 주말부부를 하는 동안, 그리고 이혼을 한 후, 내가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는 사실에도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놀라워했다. 어머니가 지방에 내려가 있는 동안 아버지와 생활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정말 그랬다. 출근 시간이 내 등교 시간보다 한시간 정도 빠른 아버지 때문에 일찍 학교에 도착해서 빈 교실에 머물러야 하는 것도, 하교 후에 집으로 와서 도우미 아주머니가 차려준 점심을 먹고 혼자 이 학원, 저 학원을 다니는 것도. 저녁에 집에서 혼자 숙제를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어머니와 통화를 하는 것도(어머니는 내게 자신의 수업일정표를 주었고 통화할 수 있는 시간을 알려주었다) 모두 익숙했다. 물론, 나는 얼른 주말이 되기를,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바랐고 어머니는 한번도 빠짐없이 돌아왔다.

주말 아침에는 예외 없이 모두 다 늦잠을 잤고, 아침식사는 늘 걸렀다. 어머니가 요리를 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요리를 한 것도 아니었다. 라면을 끓여 먹거나, 치킨이나 피자, 분식이나 중국음식을 시켜 먹었다. 음식을 주문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는 미묘한 신경전이 있었는데, 나중에서야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에게 오기를 부리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누가 먼저 배달 음식에 질리는지 두고 보자고”). 하지만 어머니가 근무하는 대학의 방학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런 긴장감과 배달 음식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어머니가 직접 요리를 했기 때문이다. 6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 요리뿐만 아니라 모든 집안일은 어머니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어머니는 앞치마를 매고 아버지가 출근하기 전에 먼저 일어나서 아침식사를 만들고, 나를 깨웠다. 다 함께 식사를 한 후에 출근하는 아버지를 배웅했다. 어머니는 매일 장을 봤고 식재료를 남기는 일도 잘 없었다. 나는 저녁마다 어머니가 식사를 만드는 걸 도와야 했다. 하기 싫다는 기색을 조금이라도 보이면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너도 같이 먹을 건데 조금은 돕는 게 낫지 않아? 그게 억울해?”

그런 단어를 쓴 적도 없는데, 언제나 어머니는 억울하냐고 물었다. 어머니와 내가 애써 저녁식사를 준비했는데 아버지가 직장 동료들과 술을 마시느라 늦게 귀가하는 경우도 있었다(어머니가 없을 때에는 그런 일이 절대 없었다). 그러고 나면 며칠 동안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는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내가 제일 원하지 않았던 건, 외식을 하기로 되어 있는 전날에 아버지가 늦게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 당시 가끔 토요일 저녁에 나비넥타이를 맨 직원이 서빙을 해주는 레스토랑에 식사를 하러 나갈 때가 있었는데, 나는 거기에 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던 것이다.

내가 여덟살이었던 때, 여름방학이 시작된 그 주에 아버지는 토요일날 외식을 하러 나가자고 말했고 나는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금요일 밤에 아버지가 늦게 귀가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새벽까지 목소리를 낮춘 채 계속 다투었다. 토요일 아침 나는 둘 사이에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걸 알아차렸지만 애써 모르는 척을 했다. 혹시라도 어머니나 아버지 둘 중 한명이 홧김에 외식을 취소할까봐 내내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 둘의 싸움이 아니었다. 오전부터 내리던 부슬비가, 오후에는 장대비가 되더니 결국엔 사나운 비바람으로 변한 것이었다. 내가 고집을 부린 탓에 외출이 취소되진 않았지만, 아파트 현관에서 주차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바람 때문에 우산은 어디론가 날아가버렸고 우리는 흠뻑 젖은 채로 차에 올라야만 했다. 운전대를 잡은 아버지의 손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서 자동차 시트를 적셨다. 전면창으로는 마치 물폭탄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와이퍼는 힘겹다는 듯이 구슬픈 소리를 냈다. 빗줄기 너머 거리의 모습은 분간이 되지 않았고, 급기야 천둥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우르르쾅쾅쾅, 천둥소리가 날 때마다 누군가 내 심장으로 바위를 집어던지는 것 같았다. 퍼붓는 빗줄기와 온몸을 때리는 듯한 천둥소리, “이래도 꼭 가야겠어?”라는 어머니의 물음에도 물러서지 않았던 나는, 라디오에서 동부간선도로를 통제한다는 소식이 흘러나왔을 때, 더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한 후,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비에 고스란히 노출된 채로 아파트 현관까지 뛰어 들어갔다. 아파트 현관 센서등은 켜지지 않았고, 엘리베이터도 작동하지 않았다. 그동안 아파트 전체가 정전이 된 것이었다. 물을 뚝뚝 흘리며 힘겹게 어두운 계단을 올라가서(우리 집은 5층이었다) 드디어 당도한 집 안은 어두컴컴했고, 서늘하다 못해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어머니가 가져다준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닦는 동안(“꼼꼼히 닦아. 여름 감기에 걸리지 않게” 어머니가 말했다) 아버지는 라이터를 켜서(그게 아버지가 내 앞에서 라이터를 켠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었다) 이곳저곳을 뒤지다가 양초를 찾아냈다.

양초 세개.

식탁에 모두 둘러앉자, 아버지는 양초에 불을 붙이고 접시 위에 촛농을 떨어뜨려 초를 세웠다. 접시 위에 나란히 세워진 세개의 촛불은 황포한 비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며 울부짖을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렸다. 천둥번개가 번쩍이며 어둠을 가르는 초여름 밤, 도시는 악랄한 방식으로 침식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무서워.”

내가 말하자, 어머니는 나를 꼭 안아주었다.

“창문이 부서질 것 같아.”

“괜찮을 거야.”

아버지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머니가 양초를 하나 들고 냉장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양파나 당근, 파 같은 채소와 복숭아와 자두 몇개. 아버지는 생당근을 씹었고 나는 복숭아와 자두를 하나씩 먹었지만, 아무것도 먹지 않았을 때보다 상황이 더 나빠진 것 같았다.

“배고파.”

아버지가 냉동실에서 냉동만두를 발견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전자레인지가 작동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다려봐.”

자신만만하게 (또다시) 라이터 불에 의지해서 창고로 간 아버지는 휴대용 버너를 가지고 왔지만, 이것 역시 무용지물이었다. 부탄가스가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냉동실을 더 뒤져보았다. 그리고 냉동실 안쪽에서 언제 적 것인지 알 수 없는 떡국 떡을 발견했다.

“이게 왜 여기에 있어?”

어머니가 기가 찬다는 듯이 말했고 아버지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머니는 젓가락으로 떡 하나를 집은 후 양촛불 위에다가 데우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래서 되겠어?”

아버지의 빈정거림이 무색하게, 양촛불 위의 떡은 서서히 구워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어머니는 찬기가 가신 떡을 내 입으로 넣어주었다. 여전히 딱딱한 감이 남아 있었지만 나는 곡물의 고소한 맛을 느끼며 떡을 꼭꼭 씹어 넘겼다. 어느새 아버지도 젓가락을 가지고 와서 떡을 다른 양촛불 위에 굽기 시작했다.

“나도 해보고 싶어.”

“위험해서 안 돼.”

아버지가 말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떡을 구워서 번갈아가며 나에게 먹여주었고, 간간이 자신들의 입에도 집어넣었다. 도시에 미친 듯이 비가 쏟아지고, (조금 과장하자면) 전봇대도 뽑아버릴 것 같은 바람이 베란다 창문을 계속 흔드는 동안, 우리 가족은 별말도 없이 서로에게 몸을 딱 붙인 채 떡을 굽고 있었다. 가끔 하늘이 무너져내릴 것처럼 천둥번개가 치거나, 창문의 덜컥임이 지나치게 심각해졌지만 우리는 모두 떡을 굽고 씹는 데에만 열중했다. 그때. 어디선가 훌쩍거리는 소리가 났다.

“엄마, 울어?”

“울어? 왜?”

아버지가 놀라서 묻자, 어머니가 여전히 훌쩍이며 대답했다.

“아, 지금 너무 행복해서 그래.”

그 말은 진실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정말로 그 순간 행복했을 것이다. 어둠 속, 미약한 촛불을 앞에 두고, 두려움을 애써 숨긴 채로 떡을 씹으면서, 어머니는 가족의 유대감, 자신이 진정으로 있어야 하는 곳에 있는 것 같다는 안정감을 느꼈을 것이다. 어머니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말로 내뱉기도 싫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을) 복합적인 감정들이 한순간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어머니는 그날, 그 모든 감각들이 하나의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 역시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정전과 비바람과 천둥소리를 뚫고 자신에게 도달한 안도감과 해방감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그것이 자신이 선택한 삶이며 정해진 기간이 이곳을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그 모든 것을 완수할 수 있었다는 사실 역시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훗날 자신이 머물고 있던 공간을 임시거처가 아닌 ‘집’이라고 마침내 지칭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이날을 어떤 식으로 떠올렸을까? 떠올리긴 했을까?

 

배덕의 찌꺼기와 흉허물을 피해서(놀랍게도 어느정도는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새로 살게 된 아파트의 이름은 정우맨션이었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은 기다란 복도 세개가 중앙의 원형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약간 특이한 구조의 아파트였다. 각층 복도 끝에 있는 두꺼운 철문을 열고 나가면, 외부 계단을 이어주는 층계참이 있었다. 층계참을 둘러싼 벽의 높이는 내 가슴 정도였다. 외부 계단은 9층의 작은 옥상과 꼭대기층인 25층의 큰 옥상까지 이어졌다. 우리 집은 3층이었다. 나는 가끔 철문 밖, 층계참으로 나가서 도로로 지나가는 자동차를 바라보거나, 벽에 기대어 쭈그려 앉아 있곤 했다(그러면 밖에서는 내가 보이지 않았다). 옥상에 올라가본 적은 없었다. 옥상뿐만 아니라 아예 다른 층에는 가본 적이 없었다. 거주하지 않는 층에 가면 누군가 벌컥 문을 열고 내게 소리칠 것만 같았다. “너, 여기 층에 사는 애가 아니잖니? 너는 불청객이구나?”

내가 ‘맨션’의 뜻을 물었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고급스럽다는 뜻이야.” 어머니의 대답은 이랬다. “허울 좋은 말이지 뭐.” 그녀가 (잠깐 동안이었지만) 어머니의 집에 관심을 가졌던 것과 반대로 어머니는 그 집—아버지와 나와 그녀가 살던—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언급을 안 하게 된 이후에도 어머니가 가끔 그녀에 대해 말할 때는 있었다. “정말 어리석은 여자야. 대단치도 않은 남자 때문에 직업까지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직업을 버린다는 건 삶을 버린다는 거나 마찬가지야.” 이런 말 속에는 그녀에 대한 비난보다는 내게 교훈을 주고 싶다는 의도가 다분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나를 보며 경고하듯이 말했다. “남자에 미치면 여자가 그렇게도 되는 거다. 알겠니?” 아버지가 이 말을 들었다면 이중으로 분노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그녀를 모욕한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내 앞에서 그런 표현—남자에 미치다—을 사용했다는 사실 때문에.

아버지와는 다른 관점이긴 했지만, 나도 어머니의 말이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했다. 직업을 버린다는 게 어떻게 삶을 버리는 것과 같을 수가 있단 말인가. 동시에, 바로 이게 (그녀가 운전하는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남자들이란 항상 골칫거리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의구심을 가졌던 이유였다. 그녀 자신이 바로 남자에 미친 여자였기 때문에. 그녀라면 남자애들에 대해 다른 식으로 말하리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리고 (드디어) 솔직히 고백하건대 그녀가 그 말을 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이 오직 의구심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내가 5학년 때, 우리 반에는 숙직실을 청소하는 여자애들 그룹이 있었다(어떻게 그애들이 숙직실 청소를 도맡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애들 이외에는 아무도 숙직실 앞을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마치 그 장소가 그애들에게만 허용된다는 무언의 규칙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애들 무리는 여섯명 정도였다. 그 그룹에서 중심이 되는 애의 이름은 양우정이었다. 양우정의 얼굴은 작고 동그랬으며, 안경을 쓰고 있었다. 눈, 코, 입이 오밀조밀한 편이었고,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어서 전체적으로 시원시원한 인상을 주었다. 양쪽 귀에는 작고 반짝거리는 스터드 귀걸이를, 왼쪽 손목에는 가죽으로 된 시계를 차고 있었다. 형광색 모자를 색깔별로 몇개나 가지고 있었고, 수업시간이 되면 모자를 벗어서 가방걸이에 걸어두었다. 모자를 쓰지 않는 날에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곱슬머리를 묶어서 위로 바짝 틀어 올려 묶거나, 길게 땋아서 늘어뜨렸다. 양우정과 어울리는 다른 애들 모두 액세서리를 했고, 형광색 모자와 색깔이 들어간 스타킹을 가지고 있었다. 양우정은 기가 죽는 법이 없었다. 그 당시 담임선생님은 삼십대 후반의 여자였는데, 달갑지 않다는 듯이 우리를 대했고 항상 어딘가 불만스러워 보였다. 수업시간에 열의 없이 던지는 선생님의 질문에 양우정은 매번 손을 번쩍 들었다. 대개는 틀린 답이어서, 선생님은 깐깐하고 쌀쌀맞은 태도로 대답했다.

“틀렸어, 하지만 잘했다.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건 어쨌든 용감한 일이니까.”

양우정은 하나도 민망해하지 않았고,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시간에는 늘 틀린 대답을 했지만 나는 양우정이 우리와 다르다고, 그러니까 우리가 모르는 어떤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양우정이 무엇을 알고 있단 말인가? 이를테면, 우리가 가지고 놀고 있는 공기를 남자애들이 낚아채서 달아나거나 고무줄을 끊어버리면 우리는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쳤다.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새된 목소리와 붉어지는 볼. 하지만 양우정은 남자애들의 장난에 우리처럼 반응한 적이 없었다. 학기 초에 남자애들이 괜히 양우정 곁을 얼씬거리며 이런저런 장난을 쳤을 때, 양우정은 시시하다는 듯이 그애들을 비웃었다. 분노하거나, 아연실색했다는 기색도 없이, 그저 맹렬하게 조롱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누군가 양우정의 브래지어 끈을 잡아당겼을 때, 그애는 냉정한 표정으로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내 브래지어를 잡아당기면 니 기분이 좋아져? 그런 거니? 그게 그렇게 좋으면 너네 엄마 것도 잡아당겨보지 그러니?”

양우정은 싸늘하다 못해 너무 우아해서 기품이 느껴질 정도였다. 마치 여왕님처럼, 그러니까 죄인의 무릎을 꿇리고 그걸로도 모자라 장갑으로 뺨을 찰싹찰싹 때리는 여왕님처럼. 결국 시간이 지나자 남자애들은 양우정 무리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게 되었다. 평정심. 양우정은 그걸 유지할 줄 알았다.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닌가?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는 못했다. 나는 그런 건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타고나는 여자들이 있고 그들은 선택받은 존재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나와 친구들은 못하는데 양우정(과 그애의 친구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또 있었다. 성숙한 남자들과 어울리는 것. 물론 당시의 나는 ‘성숙하다’라는 단어는 떠올리지 못했다. 그때는 그저 이렇게만 표현했다. 중학생 오빠들. 어느 날, 방과 후에 고무줄놀이를 하려고 운동장 구석에서 (남자애들이 끊어먹은) 고무줄을 이리저리 연결하며 남자애들에 대한 성토(남자애들은 더러워. 바보, 멍청이들, 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어. 모조리 다)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친구들 중 한명이 목소리 톤을 바꾸고는 은근하게 말했다. 얘들아, 나 양우정 봤어, 걔네가 중학생 오빠들이랑 노는 걸 봤다구. 대단한 비밀의 전달자라도 된다는 양, 마음껏 으스대면서. 뒷이야기가 너무 궁금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애가 으스대는 것에 적당히 장단을 맞추어주고는 고무줄을 한쪽으로 던져두었다. 그런 후, 그애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모여섰다. 돌이켜보면 매번 그랬다. 남자애들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 어디서고 어떤 식으로든 할 수 있었다. 밥을 먹다가, 화장실을 가다가, 고무줄놀이를 하다가, 수업시간에 쪽지를 주고받다가 기타 등등. 하지만 양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목소리를 낮추고, 하던 일을 멈추어야 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면 언제 그런 것에 관심을 두었냐는 듯이 원래 하던 일로 돌아갔다. 그랬다. 다들 돌아갔다. 그게 핵심이었다.

그애는 부모님과 시내에 나갔다가 양우정 무리가 중학생 오빠들과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먹고 있는 장면을 봤다고 했다. 중학생이라고 해봤자 그저 두세살 차이에 불과했지만, 그 차이가 우리에게는 숫자로는 도저히 환산할 수 없는, 현실을 넘어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학교 안에서는 겨우 한살 많을 뿐인 6학년들이 어른인 것처럼 거들먹거리며 다녔고 실제로 6학년들이 야! 하고 우리를 부르기라도 하면 오금이 저렸다. 진짜 어른들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어른 흉내를 내는 가짜 어른 앞에 서면 정말로 그런 마음이 들었다.

“중학생 오빠들이랑 걔네랑 뭘 하고 있었는데?”

내 질문에 그애는 히죽 웃으며 우리를 둘러보았다. 무언가 대단한 걸 보기라도 한 걸까? 나와 다른 친구들은 숨을 죽이고 그애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그애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뽐내듯이 말했다.

“날라리짓 하고 있던데?”

다른 친구가 숨을 몰아쉬면서 가로채듯 물었다.

“날라리짓? 그게 뭔데? 뭐 어떤 거?”

“손잡고 뽀뽀하는 거!”

친구들 사이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대체 왜?). 내가 물었다.

“양우정이 중학생 오빠랑 손잡고 뽀뽀하는 걸 봤어?”

잠시 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그애는 머뭇거렸지만, 어쨌든 뽐내는 말투는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애는 나를 나무라듯이 말했다.

“아, 햄버거집에서 누가 뽀뽀를 하냐? 남들이 못 보는 곳에서 하는 거지.”

우리를 감싸고 있던 팽팽한 열의가 한순간에 느슨해졌다. 몸을 딱 붙이고 만들었던 원의 간격이 실제로도 벌어졌다. 누군가 실망했다는 듯 말했다.

“별것도 아니잖아.”

“별게 아니라고?”

그애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별게 아닌 건 아니었다. 나는 어른 없이 시내에 가본 적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헐거워진 우리의 원을 다시 긴밀하게 만들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애는 한숨을 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러다가 임신을 할 수도 있어.”

임신,이라는 말에 자동적으로 우리의 몸이 서로에게 딱 붙었고 빈틈은 사라졌다.

“너네 엄마가 그렇게 말했어?”

내가 물었다.

“아니. 이건 나 혼자 생각해낸 거야.”

“임신이라니!”

“우웩.”

역겹다는 듯이 우리는 고개를 흔들었지만 곧이어 영문도 모르는 채로 웃음이 터졌다. 햄버거를 먹는 것과 임신이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런 식의 결론—임신과 우웩—에 다다른 것이 무척 흡족했다. 그즈음 우리 사이에서 임신이라는 단어는 그런 식으로 (우리가 절대 알지 못할 성과 관련된) 사안을 이어 붙임과 동시에 절단 내는 식으로 사용되곤 했다(물론 우리 자신이 임신의 결과로 태어났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후로도 양우정 무리가 중학생 오빠들과 함께 있는 모습은 여기저기서 목격되었고, 그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우리는 하던 일을 멈추고 몸을 딱 붙이고 선 후 원 모양을 만들었다. 양우정은 친구들과 같이, 때로는 혼자 중학생 오빠들과 어울렸다. 햄버거 가게와 지하상가의 옷가게, 편의점, 놀이공원에서(그리고 우리는 ‘새 옷’과 ‘임신’과 ‘우웩’, ‘바이킹’과 ‘임신’과 ‘우웩’을 연결한 후에야 이야기를 끝냈다), 그리고 심지어는 숙직실에서.

“숙직실이라고?”

어느 날, 학교 앞 문방구로 향하던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근처 골목으로 우르르 들어가서 원을 만들고 섰다. 양우정 무리가 숙직실을 청소하는 동안, 중학생 오빠들이 어른들 몰래 그곳으로 들어가서 함께 티브이를 보고 음악을 듣는다는 거였다.

“어깨에 손을 올리기도 하고, 손을 꽉 잡고 있기도 하고.”

“그걸 누가 봤는데?”

“옆 반 내 친구가. 한번만 본 것도 아니라고 했어. 여러번 봤다고 했어.”

“숙직실로 들어간 사람들이 중학생 오빠들인 걸 어떻게 알아?”

다른 친구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그 정도에서 입을 다물었겠지만, 그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니 친구가 그전에 양우정이 중학생 오빠들이랑 있는 걸 봤어?”

그애는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그건 아닐걸.”

그 남자애들이 중학생이라는 걸 알려면 그들은 교복을 입고 있어야 했다. 나는 그들이 교복을 입은 채로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학교의 정문에는 경비실이 있었고 경비 아저씨가 상주하고 있었다. 경비 아저씨가 아니더라도, 초등학교 운동장에 교복 입은 남자 중학생들 몇명이 어슬렁거리는 걸 어른들이 못 봤을 리가 없었다.

“사복을 입고 있었나보지!”

사복을 입고 있었다면 얼굴도 모르는데 그 남자애들이 (발육이 빠른) 초등학생인지, 중학생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럼 넌 내 친구가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그날, 내 집요한 질문 때문에 우리는 숙직실과 ‘임신’과 ‘우웩’을 연결시키지 못했고, 원을 둘러싼 기운은 흐지부지해져버렸다. 원을 풀고 어색하게 골목을 서성거리며 빠져나가는 친구들 사이에는 아쉬움, 그리고 나에 대한 마땅찮음이 맴돌았지만 골목을 나와서 문방구를 향해 걸어가는 동안 양우정과 관련된 사안들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희미해져갔다. 그리고 문방구에 도착해서 진열대 위에 빽빽이 놓인 과자들 앞에 섰을 때에는, 양우정에 대한 사안들—나에 대한 못마땅함도 포함해서—은 완전히 힘을 잃은 후였다. 친구들은 바구니를 하나씩 들고 과자를 고르는 데에 정신이 팔려버렸다. 그러니까, 그애들은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그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친구들이 각자 구입한 여러 종류의 불량식품들을 나눠가며 맛보는 동안에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내 머릿속에는 양우정과 중학생 오빠가 끊임없이 떠오르고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중학생 오빠를 어떻게 떠올린단 말인가? 그런 일이 가능한가? 가능했다. 나는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서 서로의 팔을 비비고 있는 (긴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늘어뜨린) 양우정과 중학생 오빠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장면을 절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리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친구들 중, 떠올린 장면을 감추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아이가 나 말고 또 있을까? 없을 것 같았다. 그애들은 아무런 문제도 없이 자신의 상상을 사방팔방 떠들 수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그애들은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양우정이 중학생 오빠들과 손을 잡는 걸 상상해봤어! 뽀뽀할 땐 서로를 껴안았겠지? 내가 떠올린 장면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잘것없었지만,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불경하다고 느껴졌다. 용서받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발설할 수 없는 장면을 품고 있는 게 나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이 조여드는 것 같았고 화가 났다. 누구에게? 왜? 알 수 없었다.

 

여름방학이 다가오자, 우리를 속박하던 질서의 일부분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담임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자주 자율학습을 시켰고, 방과 후가 되면 청소를 다 하고 가라는 말만 남기고 제일 먼저 교실을 떠났다. 체육시간에 체육선생님은 우리에게 피구 경기나 줄넘기를 시키고 교무실로 들어가버렸다. 나는 가끔 수업에 동참하지 않고, 스탠드에 가만히 앉아서 멍하니 운동장을 바라보곤 했다. 교복을 입은 중학생 오빠들이 정문을 지나 운동장을 어슬렁거리며 가로지르는 모습을 그려보면서. 숙직실은 건물 중앙 로비를 통과하여 뒤쪽 공터로 이어지는 통로의 구석에 있었다. 나는 상상 속에서, 신발을 신은 채 중앙 현관으로 저벅저벅 들어가는 중학생 오빠들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상상 속에서 나는 양우정과 양우정의 무리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여느 날처럼 체육선생님이 피구 경기를 시키고 사라진 날, 나는 일찌감치 공에 맞아 죽은 후에 반 아이들로부터 멀리 떨어져나왔다. 아이들이 피구에 열중하는 동안 나는 학교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중앙 현관을 통과하지 않고 건물을 크게 돌아서 뒤쪽 공터로 갔다. 여름이었는데도 해가 잘 들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무언가 쏟은 건지, 땅바닥이 축축해 보였다. 곳곳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콘크리트 덩어리, 종이상자들, 쇠꼬챙이(그런 게 거기에 왜 있단 말인가?) 등등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공터의 가장 안쪽에 커다란 소각장이 있었는데, 겉면에는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었고 안에는 타다 남은 종이와 쓰레기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근처로는 담배꽁초들이 버려져 있었다. 그곳을 둘러보다가 문득, 중학생 오빠들이 정문을 사용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뒤쪽에 있는 초록색 철문은 대개 잠겨 있었지만 일주일 두어번, 소각장에서 불을 피울 때는 열어두곤 했으므로. 나는 철문을 하릴없이 밀어보았고(하지만 열리지 않았고), 소각장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숙직실 쪽으로 가보았다. 상단에 작은 반투명창이 달린 낡은 목재 문. 문은 (예상했다시피) 잠겨 있었다. “남자들이란 항상 골칫거리지.” 어째서였을까? 그 순간 갑자기 그녀의 말이 떠오른 것은? 그녀가 지칭한 ‘남자들’ 속에는 아버지도 포함된 것일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친구는 내가 숙직실과 관련된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친구들이 전달해주는 양우정에 대한 이야기에서 허점을 발견하면 애가 탔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나는 양우정에 대한 소문들이 완전무결한 사실, 조금의 공백도 없이 완전한 진실의 모습을 하고 있기를 바랐던 것 같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것. 그래, 내가 바란 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사방에는 오후의 여름해가 내리쬐고 있었고, 저 멀리, 공에 맞아 소리를 지르는 같은 반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 속에는 양우정의 것도 섞여 있었으리라.

여름방학을 일주일 정도 앞둔 날, 친구들과 집으로 향하다가 나는 교실에 책을 두고 온 것 같다고, 다시 갔다 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무슨 책이냐는 질문에도, 같이 가주겠다는 말에도,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에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요새 정말 이상해! 우리가 싫어졌어? 다른 친구가 생겼어? 너랑은 절교야!” 나는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정문으로 들어간 나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 건물을 빙 돌아서 뒤쪽 공터로 갔다. 그날은 소각장에서 쓰레기를 태우는 날이었고, 초록색 철문도 열려 있었다. 나는 낑낑거리며 철문을 닫은 후(대체 왜?), 여전히 쓰레기를 태운 연기와 매캐한 냄새를 품고 있는 소각장을 지나 숙직실 쪽으로 갔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나는 숙직실의 낡은 목재 문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고는 문에 귀를 바짝 댔다. 마치 내 몸이 거대한 귀가 된 것처럼. 문 너머,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분간할 수 있는 소리들이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팝송, 간헐적인 박수 소리, 가끔씩 내지르는 탄성들. 이윽고 나는 문에서 귀를 뗐다. 그저 귀를 뗐을 뿐인데, 아주 조금만 멀어졌을 뿐인데, 그 모든 소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같았다.

나는 손잡이를 힘껏 잡아당겼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눈앞에 펼쳐진 건, 숙직실 안의 그들이 아니라, 또다른 낡은 목재 문이었다. 나에게는 첫번째 문을 열 배포는 있었지만 두번째 문을 열 배포까지는 없었던 것 같다. 두개의 문 사이에 끼인 나. 들어가는 것과 나가는 것. 둘 다 너무 손쉬운 일이었건만, 나는 누군가 밧줄로 꽁꽁 묶어서 거기에 던져놓은 것 같은 무력감, 선택권을 잃어버린 듯한 박탈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진짜’ 숙직실 문이 열리고, 내 앞에 양우정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나는 안도했다. 양우정은 내가 나가야 할지 들어가야 할지 판결을 내려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사람이었으므로. 양우정은 문을 조금만 열고 서 있었다. 음악 소리가 들려오다가 갑자기 툭 끊였다. 양우정의 긴 머리카락은 마구 헝클어졌고, 인중에는 땀이 고였으며, 숨이 찬지 약간 헉헉거리고 있었다.

“너…… 여기서 뭐하는 건데?”

양우정은 문을 조금 더 열고는 바깥으로 몸을 더 내밀었다. 그애는 반팔 셔츠를 걸쳤는데 한쪽 어깨가 드러난 채였고, 아래에는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청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방 안쪽에서는 열기가, 흐릿하지만 분명한 열기가 느껴졌다.

“왜? 뭐야? 누군데?”

누군가 문을 활짝 열었다. 방은 예상했던 것보다는 컸는데, 길고 좁은 형태의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노란색 장판과 촌스러운 벽지가 보였고, 가구라고는 작은 텔레비전과 좌식 책상과 작은 장롱이 전부였다. 그리고 탈탈거리며 돌아가는 작은 선풍기.

중학생 오빠들은 없었다.

양우정과 양우정의 친구들뿐이었다. 숙직실 청소를 도맡아하는 그애들. 원래도 멋쟁이들이었지만, 그 안에 있는 그애들의 차림은 멋스러운 걸 넘어서 약간은 요상해 보일 지경이었다. 이상한 모양으로 틀어 올려서 묶었거나 머리통에 딱 달라붙게 오일로 빗어 넘긴 머리카락, 머리통을 덮고도 남을 커다란 리본, 발목까지 내려오는 (누가 봐도 어른용인 것 같은) 기다란 꽃무늬 원피스, 허벅지가 드러나는 짧은 바지와 배꼽이 드러나는 크롭티…… 양우정은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말했다.

“들어와.”

마침내 판결이 내려졌고, 나는 순순히 따랐다. 방 안의 다른 무리들로부터 놀라움과 적대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엉거주춤 방 안으로 들어온 나는 구석의 장롱에 붙어 섰다. 방의 구조상 더 좁은 벽에 커다란 전신 거울이 걸려 있는 게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대체 이런 게 왜 여기에 있는 걸까? 하지만 그걸 누구에게 물어본단 말인가? 이들조차 이곳의 주인이 아닌데. 양우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경쾌하게, 박수를 한번 쳤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무얼 시작한단 말일까? 그애들은 여전히 겸연쩍다는 듯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가 양우정이 자신감 넘치게 거울이 걸린 벽의 맞은편으로 가자 일제히 그곳을 바라보았다. 진지하게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던 양우정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렸고, 드러난 어깨 쪽의 셔츠를 좀더 내렸다. 그 바람에 한쪽 쇄골의 아래 부분이 완전히 드러났다. 양우정이 그러는 동안 방 안을 감돌던 어색함은 점점 옅어졌다. 다른 애들도 자신의 옷차림과 머리 모양을 가다듬기 시작했고, 양우정의 뒤쪽으로 슬금슬금 모여들어서 일렬로 섰다. 누군가가 (아까 흘러나오던) 음악을 틀었다. 감미로운 목소리의 남자 가수가 부르는 팝송의 리듬에 맞춰 양우정은 두 손을 각각 양쪽 허리에 얹은 후, 엉덩이를 좌우로 움직이며 다리를 길게 뻗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동안에도 절대 거울 속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는 않았다. (거리가 멀지 않았기 때문에 금방) 거울 앞에 도달한 그애는 포즈를 취하며 이리저리 자신을 비추어 보다가 반대편으로 몸을 휙 돌린 다음 고개만 살짝 돌려 마지막으로 거울 속 자기 자신과 눈을 맞추었다. 그런 후에 아까처럼 엉덩이를 흔들며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마치 그 좁고 촌스럽고 낡은 방은 패션쇼 런웨이고, 자신은 모델이라도 된다는 듯. (가상의) 런웨이를 침범하지 않으려 애쓰며 어수선하고 산만하게 벽에 다닥다닥 일렬로 붙어 서 있던 다른 애들도 자신의 차례가 되자 한명씩 진지하고 거만한 표정으로 포즈를 취하며 걸어 나갔다.

그건 너무 처량하고, 궁색 맞고, 우스꽝스러운 흉내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애들은 음악에 맞추어 걸어 나갔다가 걸어 들어오는 것에 열중했다. 음악의 템포가 바뀌면 걸음걸이도 달라졌다. 방 안의 공기는 뜨겁고 탁해졌고, 모호하고 순진무구한 흥분이 떠돌았다. 그애들의 이마와 목덜미, 그리고 팔뚝에 땀방울이 맺혔다. 나는 땀에 젖은 양우정의 셔츠가 상체에 딱 달라붙어서 가슴의 굴곡이 드러난 것을 볼 수 있었다. 음악에 맞추어 계속 걷던 애들 중 한명이 스텝이 꼬였는지 넘어질 뻔했고, 웃음과 탄식, 박수가 터졌다. 그애들은 아무리 힘이 들어도 절대로 멈추지 않겠다는 서약서라도 쓴 것처럼 비틀거릴지언정 쉬지 않고 음악에 맞추어 거울 속 자기 자신과 눈을 맞추며 걷고 또 걸었다.

드디어 음악이 끝났을 때, 모든 어설픈 흉내가 끝났을 때, 나는 내 얼굴과 목덜미, 겨드랑이 역시 땀으로 젖었다는 것을 알았다. 내 볼이 열기로 붉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길고 숱 많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털며 양우정이 다가왔고, 다른 애들은 호기심과 심란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나와 양우정을 바라보았다.

“어때, 너도 해볼래?”

나는 하얀색 반팔 셔츠와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옷을 고르는 건 전적으로 어머니의 역할이었다.

“셔츠를 벗어봐.”

양우정이 말했다. 셔츠 안에 민소매 티를 입고 있긴 했지만, 가족이 아닌 누군가의 앞에서 옷을 벗어본 기억은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나는 순순히 그애의 말을 따랐다. 그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제야 (그때까지도 여전히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내 노란색 민소매 티를 보고 양우정은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 말했다.

“앞부분을 바지 속에 넣어줘.”

양우정은 내 민소매 티의 앞부분을 바지 안에다 집어넣고 뒷부분만 삐져나오게 했다. 바지 밑단을 접어보라고 말했는데, 내가 하는 모습이 시원치 않아 보였는지 양우정은 직접 무릎을 꿇고 내 바지 밑단을 접어주었다. 그애의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동안 나는 어떤 존재가 내 몸을 완강하게 움켜잡고 집요한 힘으로 이리저리 흔드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는 두 발바닥에 힘껏 힘을 주었다. 별일도 아니라는 듯, 두 손을 털고 일어난 양우정은 손수건을 내 머리에 둘러서 헤어밴드처럼 묶어주었다. 양우정의 손길이 아주 조금만 닿았을 뿐인데도, 나는 그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울 앞에 가서 서봐.”

그건 하나도 어려운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멋지게 포즈를 잡고서, 음악이 끝날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고, 바들거리거나 넘어지지 않으며 걷는 것도 내게는 쉬운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열번이라도, 백번이라도, 천번이라도 그 궁색한 (가상의) 런웨이를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발 멈추어줘!라는 애원을 들을 때까지, 아니 그런 애원을 듣는다 해도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오, 그래, 양우정이 애걸복걸해도 멈추지 않을 테다! 커다란 전신 거울 앞에 서서, 거기에 비친 나—머리 위로는 화려한 손수건을 두르고, 팔과 가슴 윗부분을 훤히 드러내고, 멋들어지게 밑단을 접은 바지를 입고 있는—를 바라보며 나는 뽐내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느새 그애들 중 한명이 음악을 틀었고, 숙직실 방 안으로 기타와 드럼의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팝송의 반주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내 허벅지 옆부분을 두드리며 신중하게 박자를 맞추었다. 발을 내디딜 적절한 타이밍을 찾는 게 중요했다. 반주가 끝나고 남자 가수의 달콤한 목소리가 시작됐을 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손가락으로 박자만 맞추고 있었다. 대체 왜? 마치 땅에 발바닥이 붙박인 것 같은 느낌, 온몸이 마비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손가락만 제외하고. 나는 손가락으로 박자를 맞추는 것을 멈출 수도 없었다. 저주에 걸린 걸까? 하지만 누가 내게 저주를 건단 말인가? 이상한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 모든 것들이 식은 죽 먹기처럼 여겨졌었는데, 갑자기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풍경의 의미가 반전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이제 내가 걸어 나가는 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고, 그건 세상 다른 그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진실인 것 같았다.

“걸어야지!”

음악을 뚫고 양우정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양우정의 말투에는 실망의 기미도, 격려의 의도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즐거움. 그뿐이었다. 숨길 수도 없고 숨길 의도도 없는, 냉혹할 정도로 순수한 즐거움. 그애는 한번 더 소리쳤다.

“걸으라니까!”

그러자 다른 애들도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걸어! 걸어! 걸어!

반복되는 단어는 나 대신 박자를 맞추려고 허공에 발을 디디는 중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박자를 맞추고 있던 손가락을 드디어 멈출 수 있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서 바깥으로 통하는 첫번째 문을 열었다. 신발에 급하게 발을 밀어넣은 후, 두번째 문도 열어젖혔다. 숙직실 바깥으로 나와 한참을 걸어 나왔을 때, 나는 놀라움을 느꼈다. 그 와중에도 내가 가방과 벗어놓은 셔츠를 챙겨 나왔다는 사실 때문에. 저주와 형벌을 깨뜨리고 도망치는 데 성공한 것 때문에. 아닌가? 그 반대인가? 치밀한 계획이나, 용기, 혹은 배포 따위도 없이 도망친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저주인가? 세상이 무너져내릴 것 같던 그 순간에도 챙겨 나와야 하는 걸 나는 조금도 잊지 않았다. 잊지 않은 것—그 사실 때문에 나는 굴욕감을 느꼈다.

저 멀리, 뒤에서 양우정이 소리쳤다.

“정말 한심하다! 최악이야!”

나는 그제야 내 머리 위에 여전히 양우정의 손수건이 둘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걸 벗어서 소각장에 던져버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난 영원히 너의 엄마야,라는 말을 남긴 어머니가 (일년 예정으로) 외국 대학으로 떠난 게 바로 그해 여름의 일이다. 나는 이 소식을 어머니의 출국 이틀 전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출국일은 방학식 전날이었다. 그날 아버지는 나를 학교에 보내는 대신, 한시간가량 운전을 해서 공항까지 데려다주었다. 공항에서 어머니는 겨울방학이 되면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라고 말했다. “너네 부모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어.” 나는 저 멀리, 멀뚱거리며 앉아 있는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다음 날 아침, 나를 깨우러 온 그녀에게 몸이 아파서 학교에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있어서 그녀는 내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불을 끌어내리려고 애쓰면서 물었다.

“안 더워?”

나는 이불을 꽉 잡고는 땀범벅이 되어서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방학식 날인데, 친구들이랑 안 놀아?”

일찍 수업이 끝나는 방학식 날에는 오후 내내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노는 게 일종의 원칙이었다. 하지만 그즈음 학교에서 나는 외톨이 신세였다. 친구들의 원성을 뒤로하고 학교로 돌아간 이후로 나는 따돌림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양우정 무리는 원래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고, 그날 이후로도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심지어 양우정의 손수건에 대해서도 일언반구 없었다. 너의 몸에 닿은 것은 내게 필요 없어. 나는 양우정의 손수건을 버린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그걸 가지고 있었다 한들 내가 뭘 할 수 있었을지 알 수 없었다. 양우정 무리가 조소를 보냈거나 업신여기는 기색을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손수건을 내놓으라고 말했다면 나는 자존심이 덜 상했거나,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덜 느꼈을 것이다.

그녀는 그런 내 상황을 조금도 몰랐다. 오래도록 이불 바깥에서 아무런 반응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이불을 목 부근까지 끌어내렸다. 그녀는 침대 옆에 서서 미심쩍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한번 쉬었다.

“그래, 아빠에게는 비밀로 하자. 하루 정도 일찍 너만의 방학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진 않으니까.”

그녀는 아프다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다만 전날, 어머니가 떠난 것 때문에 내가 낙담했으리라고, 그러므로 기분을 맞춰줄 필요가 있겠다고 여긴 것 같다. 물론 그건 사실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떠난 것 때문에 실망했다. 게다가 나는 방학 때 어머니 집에 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방학 때만이라도 내 자신이 전혀 다른 곳에 속해 있길 바랐다. 그게 내게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리고 (그녀는 믿지 않았지만) 몸이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며칠 전부터, 밤마다 무언가가 흉곽을 옥죄는 것 같이 답답했고,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그녀(나 아버지)에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는 배 안 고프냐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방에서 나간 후, 나는 이불을 다시 얼굴까지 끌어올리고 잠에 들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외출을 한 후였다. 식탁 위에는 그녀가 남겨놓은 메모가 있었다. 아무렇게나 죽 찢은 노트, 지나치게 대충 흘려 쓴 글씨. ‘제발 밥은 남김없이 다 먹어라.’ 식탁 위에는 랩을 씌워둔 호박죽이 있었다. 나는 안방으로 가보았다. 안방문은 (언제나 그렇듯) 닫혀 있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살 때 안방의 문은 항상 열려 있었고 원할 때마다 드나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용건이 있으면 노크부터 했다(실질적으로 따져본다면 노크를 한 적조차 별로 없었다).

커다란 침대 위에는 하얀색 시트가 깔려 있었고, 폭신해 보이는 이불은 반으로 접은 채였다. 동침하다. 나는 그 단어를 떠올렸다. 안방 옆 작은 베란다로 통하는 통창이 활짝 열려 있었는데, 베란다에는 커다란 초록색 잎이 가득한 화분들이 몇개나 늘어서 있었다. 약간 과장하자면 마치 정글처럼. 어머니는 화분을 키우지 않았다. 가끔 생화를 화병에 꽂아두긴 했다. 화장대 거울에 비친 나를 애써 외면하면서 그녀의 화장품들을 이것저것 만져보다가, 그다음에는 옷장을 열어서 이것저것 살펴보았다. 주위는 적막했고, 무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직전의 완강하고 고집스러운 침묵 같은 것이 느껴졌다. 밖으로 나온 나는 거실 베란다로 갔다. 거실 베란다와 안방 베란다는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어져 있었다. 그녀는 거실 베란다에는 화분 대신 작은 원형 테이블과 의자 두개를 들여놓았다. 나는 베란다 위쪽 창문을 열고, 의자에 두 발을 올린 채 무릎을 모아 쭈그리고 앉아서 저 멀리 놀이터를 바라보았다. 나에게 절교 선언을 한 친구들 중에는 정우맨션에 사는 애들이 있었고 그애들은 방학 내내 놀이터를 점령할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또다시 흉곽이 옥죄이는 느낌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창문을 닫고 시선을 거실 쪽으로 둔 채 테이블 위에 머리를 댔다.

소파 아래에 무언가가 있었다.

무언가가 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소파 앞으로 갔다. 소파 앞에 엎드린 후, 그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일부분이 반짝이는, 작은 물체를 끄집어냈다. 왜 이게 여기에 있는 걸까? 나는 그걸 손에 들고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그건 아버지의 라이터였다. 기름이 반쯤 남은, 연두색 싸구려 라이터. 아버지의 라이터를 본 건, 몇년 전 정전이 된 날 밤에 이어 두번째였다. 나는 라이터를 내 방, 속옷 서랍 가장 아래에 숨겨두었다.

그날 저녁, 몸이 아프다고 (이건 거짓말이었다) 말하고 일찌감치 침대에 누운 나는 어둠 속에서 라이터가 거기에 떨어져 있었던 이유를 따져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라이터를 거기에 숨겨둔 것일까? 소파 밑이 무언가를 숨기기에 적당한 장소인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숨긴 게 아니라 실수로 잃어버린 것일까? 그런 물건—내 앞에 절대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물건—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잃어버릴 수가 있는 걸까?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런저런 가능성을 다 따져봐도 남는 결론은 하나였다. 아버지가 말도 안 되게 허술했다는 것. 나는 아버지의 그 허술함 때문에, 나를 라이터에 노출시킨 그 어설픈 무신경함 때문에 화가 났고, 서글픈 기분마저 들었다.

다음 날, 아침밥도 먹지 않고 늦은 시간까지 침대에 누워 있는 나에게 그녀가 와서 한마디 했다.

“꾀병 좀 그만 부려. 너가 그러고 있으면 내가 욕을 먹는 거야.”

이 집에서 누가 그녀를 욕한단 말인가?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그녀는 문을 쾅 닫고 나갔다. 나는 그녀가 외출할 때까지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내게는 계획이 있었다.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났을 때 그제야 나는 침대 밖으로 빠져나갔고, 한번도 쓰지 않은 (내가 가지고 있던 것 중 가장) 두꺼운 스프링노트를 책장에서 꺼냈다. 그런 후에는 숨겨놓은 아버지의 라이터도 꺼냈다.

부엌에는 이번에도 그녀가 차려놓은 식사와 메모가 있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밥은 좀 먹어라, 제발. 나는 일단 스프링노트는 식탁 위에 올려두고, 그녀의 메모와 라이터를 들고 싱크대의 개수대 앞에 가서 섰다. 개수대 안은 텅 비어 있었고, 물기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엄지손가락으로 라이터의 부싯돌을 돌렸다. 처음에는 잘 되지 않았지만, 곧 탈칵 소리와 함께 불길이 솟았다가 사라졌다. 나는 부싯돌을 돌리는 게 익숙해질 때까지 몇번 더 반복해보다가 마침내 그녀가 남긴 메모지에 불을 붙였다. 무언가가 타들어가는 건, 생각만큼 너저분하거나 혼란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다. 불길은 종이의 가장자리부터 야금야금 그을리게 만들었고(그녀의 글씨가 거꾸로 사라져갔다),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냄새. 종이가 모조리 타버릴 때까지 절대 놓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열기를 견디지 못한 나는 종이를 개수대 안으로 집어던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불길은 한순간에 불쑥 타오르는가 싶더니 곧 (내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사그라들었다. 이번에는 스프링노트의 종이를 몇장 찢어서 한꺼번에 불을 붙였다. 처음에는 잠잠하게 타오르던 불길이 순식간에 (아까보다 더 심하게) 화르륵 하고 치솟았고, 깜짝 놀란 나는 (이번에도) 종이를 개수대 안으로 집어던졌다. 그러고 재빨리 수도꼭지를 틀었다. 그러자 불길은 힘을 발휘한 적도 없다는 듯이 일순 꺼져버렸다. 남은 재와 종잇조각들이 물길을 타고 배수구 안으로 흘러들어가는 걸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물이 없는 곳으로 가야 해.

처음에는 베란다를 떠올렸다. 하지만 우리 집은 3층이고 바깥에 있는 누군가에게 발각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나는 노트와 라이터를 챙겨서 집 밖으로 나갔다. 아파트 복도 끝, 외부 계단의 층계참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았다. 정작 그곳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너무 손쉽게 들락날락할 수 있는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터를 주머니에 집어넣은 나는 층계참 벽에 기대어 섰다. 여름의 기운을 고스란히 흡수한 시멘트의 열기가 등으로 전달되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서 강렬한 태양빛 사이로 끝도 없이 위로 이어진 것 같은 계단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계단을 걸어 올라가기로, 내가 거주하지 않는 층을 통과해서 9층 옥상까지 가기로 마음먹었다.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점점 숨이 가빠오고 뒷덜미가 땀으로 젖어갔지만, 견딜 만하다고, 포기하면 안 된다고 나 자신을 다독거렸다.

9층 옥상의 문은 잠겨 있었다.

내려가야 할까? 닫힌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주머니 속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던 나는 25층, 진짜 옥상까지 올라가봐야 한다고 느꼈다. 돌이켜보면 그건 합리적인 결정은 아니었다. 9층 옥상의 문이 잠겨 있는데 (더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25층 옥상의 문이 열려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까지 이런저런 가능성을 신중하게 고려하던 나는 그 순간에는 그런 당연한 사실조차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나는 엘리베이터를 탈 생각도 하지 못했다.

25층 옥상 문 앞에 도달했을 때, 두 다리는 후들거리고, 머리통은 뜨거웠고, 온몸은 땀투성이였다. 시뻘게진 얼굴로 숨을 헉헉거렸지만 그러한 신체적 반응 이외에, 별다른 심사숙고나 망설임은 없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저 손잡이를 돌렸을 뿐이다. 그러자, 문이 열렸다. 나는 당황하지도 흥분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25층 옥상은 정우맨션의 이어진 (세개) 동의 꼭대기에 모두 걸쳐져 있어서 규모가 상당했고, 통로 문은 총 세개였다. 내가 사용한 문은 왼쪽에 위치한 것이었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세개의 문 중 그 어느 것도 잠겨 있지 않았다. 심지어 가운데 문은 꽉 닫히지 않도록 사이에 벽돌을 몇개 끼워둔 채였다. 옥상 문 앞에 서서 거대한 공백 같은 하늘을 바라보던 나는, 이 세상에 종말이 왔고 살아남은 건 나 자신뿐이라는 착각에 빠졌다. 하지만 그것은 금방 빠져나와야 하는 착각, 망상에 불과했다. 옥상 안으로 걸어가니까, 저 멀리 도시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높은 건물들의 스카이라인과 버스가 다니는 도로가 이어진 길, 다닥다닥 붙은 낮은 건물과 그 너머 산의 능선 같은 것들. 난간대에 다가갔지만 내 어깨 정도의 높이여서 바로 아래를 바라볼 수는 없었다.

옥상 위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이 꽤 많았다. 안테나와 지팡이 모양의 우수관들, 거대한(정말로 거대해서 마치 건물처럼 보일 정도였다) 굴뚝 몇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환풍기……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왔다가 멈추었다가를 반복했다. 위쪽은 지상보다 바람이 더 많이 부는 것일까? 열기를 품은 바람이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불어와서 내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날렸다. 정신을 쏙 빼놓는 것 같은 뜨거운 바람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햇살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있었다. 나는 거대한 굴뚝이 만들어놓은 그늘 안으로 들어갔다. 직사광선은 피할 수 있었지만 살갗의 뜨거움은 여전했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팠다. 그녀가 남겨놓은 (그리고 내가 태워버린) 메모가 떠올랐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밥은 좀 먹어라, 제발. 그제야 내가 그때까지 들고 있던 노트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땀 때문에 손에 잡힌 스프링 부분이 미끌거렸고, 그걸 놓치지 않으려고 (무의식적으로) 지나치게 꽉 잡은 탓에 손바닥에는 스프링 자국이 나 있었다.

나는 굴뚝 벽을 마주한 상태에서 쭈그리고 앉기로 했다. 그렇게 해야 바람을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웅크리고 앉아서 스프링노트에서 찢은 종이를 한손에 쥐고 다른 쪽 손에 든 라이터의 부싯돌을 돌렸다. 바람 때문인지 불이 붙지 않았고, 이마를 타고 내려온 땀방울이 자꾸 눈을 찔렀다. 바닥에 놓아둔 스프링노트의 종이가 바람에 날려서 촤라락 넘어갔다. 나는 부싯돌을 돌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잠시 후 겨우 붙은 불은 잠깐 타올랐다가 금방 훅, 하고 꺼졌다. 라이터에 불이 붙는다 해도 다른 손에 들고 있는 종이가 바람에 날리는 통에 제대로 불을 붙일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종이를 한쪽 발로 밟고 있다가 라이터에 불길이 타오르는 순간 재빨리 종이에 갖다 대기로 했다. 몇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종이에 불이 붙었는데, 솟아오르는 불길 때문에 나도 모르게 종이를 밟고 있던 발을 떼버렸고, 불이 붙은 종이는 바람에 날려 허공으로 솟아올랐다가 금방 재로 변하면서 땅 위로 내려앉았다. 나는 타다 남은 종이가 떨어진 곳으로 뛰어갔지만 거기에 도착하기도 전에 종이는 또다시 바람에 날아갔다. 나는 가만히 서서 옥상 너머로 날아가는 종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주 짧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분명히, 불길은 허공에서 살아 있었다.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여름의 오후에 내가 열기에 열기를 더한 거라고, 그건 아주 대단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허공에서 맹렬하게 타오르던 불! 그 장면은 내 눈앞에서 선명하고 집요하게 계속해서 다시 떠올랐다. 다시 해봐, 다시 해봐, 하고 나를 부추기는 것처럼, 온 사방에서 기타 소리와 드럼 소리가 두드러지는 팝송의 전주 부분이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나는 다시, 굴뚝의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노트의 종이를 찢어내고 라이터의 부싯돌을 튕겼다. 발로 밟은 종이에 불이 붙으면, 어느 순간 바람에 날아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온몸은 땀범벅이 되고, 매캐한 연기 때문에 끊임없이 기침이 나고, 목이 마르고, 어지러웠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날아가며 타들어가는 종이를 보다가 문득 내 자신이 화상 한번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불길은 절대 내 신체나 정신에 위해를 끼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불을 피우는 동안 나는 그 어디도 아프지 않았다. 바로 지금 나는 모든 것—수치심과 굴욕감, 이물스러움과 꼴사나운 천진함 기타 등등—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 바로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하다. 이것이 내가 무모하고 치명적이게 타들어가는 종이를 보며 끝도 없이 머릿속으로 되뇐 말이었다.

그해 여름, 나는 그렇게 틈만 나면 옥상으로 올라가서 불장난을 했다.

 

내가 했던 불장난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는 아니고, 중학교 2학년이었던 가을에 시에서 소방당국과 함께 대대적인 불조심 관련 글쓰기 대회를 개최한 적이 있는데, 바로 그때의 일이다. 보통 글쓰기 대회는 각 학교 대표들을 백일장 장소로 한날한시에 모이게 했는데, 이때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각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대회를 시행하게 했다. 시의 담당 부서에서 각 학교에서 온 작품들을 모아서 심사한 후 상 받을 세명을 선정하는 식이었다(이후로 이 대회는 없어졌다). 그전까지 나는 제대로 된 글을 써본 적이 없었다. 글뿐만 아니라 교내에서 열린 각종 대회—그림이든 표어든 포스터든 뭐든—에 제대로 참가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불조심 글쓰기에 대해서도 별다르지 않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마감을 하루 앞둔 날 밤에 샤워를 하다가 문득, 불장난에 대한 글을 써서 제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마땅히 내가 해야 하는 일, 의무사항, 거부할 수 없는 본분처럼 느껴졌고, 심지어는 조급증이 날 지경이었다. 물줄기를 맞으며 나는 써야 할 문장들을 거의 다 떠올렸고, 그날 밤이 새도록 열두살 여름, 옥상에서 했던 불장난에 대해 낱낱이 썼다.

놀랍게도 그 글은 학교 대표글 두개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시 전체에서는 은상 수상작으로 결정이 되었다(우리 학교의 다른 글은 아무 상도 받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 거부감을 가진 건 (당연하게도) 아니었지만 전혀 짐작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는 점에서 다소 곤혹스럽긴 했다. 선생님들은 내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 특히 국어선생님은 (수업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기를 기대하며) 질문을 던지곤 했는데, 대부분은 내가 답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나는 우쭐거리고 싶은 마음과 당혹감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하지만 곧 나는 나만의 방식을 찾아냈다. 특별히 고민을 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국어선생님이 내가 답을 알지 못하는 질문을 던질 때마다 나는 수줍어서 입을 뗄 수 없다는 식으로 웃어 보였고, 우연찮게 아는 게 나오면 용기를 내는 중인 척하며 우물쭈물 대답을 했다. 국어선생님은 내가 답을 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달 후, 전교생 조례시간에 나는 단상으로 나가서 상을 받았다. 교실로 돌아왔을 때 담임선생님은 나를 교탁 앞으로 불렀다. 선생님은 내가 상을 받게 된 상황을 누구보다 즐겼는데, 거기에는 아무런 선입견도 없이 내 글을 선택한 자신의 안목과 권위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내가 솔직하고 진솔하게 글을 썼다고 말했다. “좋은 글에는 진정성이 담겨 있고, 밝은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걸 알아볼 수 있단다.” 어쨌든 그날의 주인공은 나였고, 이날만큼은 마음 놓고 우쭐거릴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 앞에서 너가 쓴 글을 한번 읽어보렴.”

어째서였을까? 이 말을 들은 순간 내 머릿속은 하얘지는 것 같았다. 우쭐거리고 싶은 마음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고, 그 글을 읽고 싶지 않다는 생각 말고 다른 걸 떠올릴 수 없었다. 절대로 피하고 싶은 것, 진저리치게 거부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다름 아닌 바로 그것—그 글을 내가 소리 내어 읽는 것이었다. 내 생각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선생님은 심사위원들의 손을 거쳐 다시 돌아온 (다소 너덜너덜해진) 원고지를 허공에 대고 흔들었다. 영원히, 죽을 때까지 내 눈앞에서 그 원고지를 자랑스럽게 흔들어댈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서. 나는 패배한 병사처럼 무기력하고 비참한 마음으로 원고지를 받아 들었다.

“어서 읽어봐.”

선생님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기대감이 감돌았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원고지 첫장부터 눈으로 훑었다. 그랬다. 거기에는 그 시절 내 불장난이 기록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라이터를 우연히 발견한 일부터 시작해서 옥상에 올라가서 종이를 태운 것. 나중에는 옥상에 있는 벽돌을 모조리 가지고와서 나만의 조그마한 소각장을 만들고 그 안에 종이를 쑤셔 넣고 불을 붙였던 것, 태울 만한 종이가 모자라서 참고서까지 모조리 태워버렸던 것까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장난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미니 소각로에 종이를 마구 넣고 태우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경비 아저씨가 고함을 치며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너무 놀라서 활활 타오르는 불을 그대로 둔 채 달아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우리 집이 있는 3층까지 단숨에 뛰어내려왔다. 경비 아저씨에게 얼굴은 들키지 않았다. 그후, 옥상 문은 잠겼다. 나는 더이상 불장난을 할 수 없었다. 경비 아저씨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만약 그때 들키지 않고 불장난을 계속했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

이건 사실이 아니다.

그해 여름, 25층 옥상으로 올라가 나만의 작은 소각로를 만들고,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끝도 없이 종이를 집어넣고, 그 불길과 연기가 시멘트 벽돌의 구멍 사이로 피어오르는 것을 지켜본 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지만, 경비 아저씨 때문에 도망친 적은 없었다. 경비 아저씨뿐만 아니라, 내가 그곳에서 불장난을 한다는 사실은 끝까지 그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았다. 그녀나 아버지는 내가 참고서를 다 태워먹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를 못했다(교과서를 안 태운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불장난을 끝내고 나면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샤워를 하며 불장난의 흔적을 모두 사라지게 만들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함께 식사를 하고, 티브이를 보거나 방에 들어가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쟤는 나를 미워해요.” 그녀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야, 쟤는 자기 엄마에게 화가 난 거야.” 그리고 마지못해 인정한다는 듯이 덧붙였다. “그리고 나에게도.”

내가 그들에게 화가 났었나? 처음에는 화가 났을지 몰라도, 그런 감정들은 점차 불장난의 열기 앞에서 힘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다만, 나는 화난 기색을 유지하는 게 나의 불장난을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여겼다. 일종의 징크스처럼? 그래, 징크스처럼. 불장난을 하기 위해 25층까지 올라갈 때 엘리베이터를 절대 이용하지 않았던 것처럼. 불장난을 하는 동안 배가 고프고 어지러운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 아침밥은 절대 먹지 않았던 것처럼. 손바닥에 스프링 자국이 날 수 있도록 노트를 아프도록 꽉 쥐고 있었던 것처럼.

그렇다면, 그해 여름방학이 끝날 즈음에 불장난이 막을 내린 것은? 사실이다. 원래부터 기름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던 라이터의 불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힘을 잃어갔고, 때로는 아무리 부싯돌을 힘차게 돌려도 불길이 화라락 치솟지가 않게 되었다. 나는 라이터가 소모품이라는 사실, 주기적으로 교체된다는 사실, 기름이 닳아 없어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처음에는 애가 타는 것 같았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분한 마음이 들었으며, 나중에는 짜증이 났다.

하루 종일 비가 와서 옥상에 올라갈 수 없었던 날, 나는 침대 위에 누워서 그녀가 외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남아 있을 아버지의 무신경한 허술함의 흔적을 찾아서 집 안 구석구석을 뒤져볼 계획이었다. 또다른 라이터를 찾으면 다시 한번 더 아버지를 원망할 계획이었다(한번 그런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 두번은 왜 못 하겠는가?).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노크도 하지 않고 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분통을 터트리듯이 이렇게 말했다.

“얘, 이번 방학에 너가 엄마 집에 못 가고 여기에 있어야 해서 너만 실망한 게 아니야. 나도 실망했어.”

나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나는 너보다 훨씬 더 실망했어. 정말이야.”

처음에는 영문을 알 수 없었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속이 후련하다고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때, 나는 그녀의 어떤 부분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저 자신의 경험을 관통해야만 세상을 명료하게 인지할 수 있는, 그리고 한번 결론을 도출하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절대 수정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람. 그녀는 자신이 경험한 것 (이면이 아니라)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는 기꺼이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후로도 나는 지속적으로 옥상에 올라갔지만, 내 마음속 거의 모든 영역에 깃발을 꽂은 것 같았던 불장난의 기세는 어쩐지 조금씩 약화되더니, 어느 순간 푹 하고 고꾸라졌다. 나는 땡볕 아래, 옥상 난간대에 등을 기대고 내가 만들어놓은 작은 소각로를 바라보며 라이터의 부싯돌을 튕기는 시늉을 했다. 가끔씩은 벽돌로 디딤대를 만들어 거기에 올라선 후, 난간대 바로 아래 펼쳐진 아파트 마당을 바라보기도 했다. 주차된 자동차, 아파트 정문 너머 가게들, 지나다니는 사람들…… 모두 장난감처럼 보였다. 아무리 더운 날이어도, 놀이터에서는 언제나 아이들이(내 절교한 친구도 포함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연속된 행위가 아니라 분절되는 움직임처럼 보여서 나는 몇번이나 눈을 비비곤 했다. 마지막으로 불장난을 한 게 언제였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옥상에 올라간 건? 그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라이터 기름을 모조리 다 소모하지는 않았다. 나는 (약간은 과잉된 감정상태로) 작은 상자를 구해서 (미약하지만 여전히 기능이 살아 있는) 라이터를 넣어둔 후 자물쇠를 걸어두었다. 이런 생각을 한 기억이 난다. 양우정의 손수건을 그런 식으로 경솔하게 버려서는 안 되었다고, 그것 역시 이런 식으로, 스스로 봉인해뒀어야 한다고.

여름방학이 끝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외톨이로 지냈다. 흉통이 조이는 느낌, 토할 것 같은 기분, 수치심과 굴욕감도 여전했다. 방과 후에 혼자 숙직실로 내려가서 문에 가만히 귀를 대고 있을 때가 있었지만, 그해가 끝날 무렵에는 그런 것—다른 이들의 방문에 귀를 대는 것— 자체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덧붙일 수도 있으리라. 나는 타인의 방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내 방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훨씬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게 사실일까? 그 당시 나를 가장 놀라게 했던 건, 불장난에서 느꼈던 그 아연실색할 만큼의 쾌감과 과민할 정도의 선명한 감정들, 분명히 실체를 가지고 있었던 그 감각들(불장난과 관련된 그 모든 기승전결!)이 그저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허상? 아니다. 허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았고, 앞으로의 삶에 항구적 영향을 끼치리라고 호들갑스럽게 기대했던 순간들이 그저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나는 어쩌면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마음을 가다듬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반 아이들 앞에서 더듬더듬거리며 가까스로 (진실과 거짓이 교묘하게 섞인) 글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입은 바짝 말랐고, 손은 꼴사납게 덜덜 떨렸으며, 자꾸 기침이 나왔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생님은 충고하기 시작했다.

“좀더 크게 읽으렴.”

“좀더 천천히 읽으렴.”

“좀더 또박또박 읽으렴.”

나는 주눅이 들었고 선생님의 요구사항과는 정반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더이상 들어줄 수 없다는 듯, 마침내 선생님이 최후통첩을 하듯 말했다.

“이리 줘, 내가 대신 읽어줄게.”

나는 아무 말 없이 원고지를 꽉 잡은 채로 고개를 돌려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안 주고 뭐 하냐는 눈짓을 했다. 글을 직접 읽는 것보다 더 피하고 싶은 게 있었다면 이 글이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사방팔방으로 공개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내가 쓴 글의 내용을 듣는 것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그 순간 내가 피하고 싶은 최악의 고통이었다. 최악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는 자포자기만으로는 택도 없었다. 하나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다른 고통을 견뎌야 하는 것은 필수적인 사항이었다(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행위란 말인가?). 그러므로 나는 있는 힘껏, 그러니까 죽을힘을 다해 내 글을 읽어야만 했다. 그것이야말로 내게 내려진 형벌이었다. 무엇에 대한 형벌이란 말인가? 글을 다 쓰고 났을 때, 내가 느꼈던 만족감을 기억했다. 그 글이 다른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리라는 기대 때문에 안도했던 걸 기억했다. 한때의 굴욕을 손쉬운 안도와 거짓으로 무마하고자 했던 시도에 대한 형벌.

이상했다. 갑자기 내 안에서 기묘한 자신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선생님은 완전히 무시하고, 원고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목소리를 키우고, 또박또박하고 천천히, 내 글을 읽어 내려갔다. 손의 떨림은 잦아들었고, 바짝 마른 입안은 침으로 부드러워졌다. 기침도 나오지 않았다.

“옳지, 이제 좀 잘하는구나.”

선생님은 또다시 경솔하게 끼어들었으므로. 나는 잠시 멈추어야 했다.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한 후, 다시 글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떤 식으로? 원고지에 쓰이지 않은 부분들을 즉흥적으로 채워 넣으면서! (원래 글에는 없었던) 싱크대에서의 불장난과 25층까지 걸어 올라가는 동안 비 오듯 쏟아지던 땀에 대해, 그 여름 내가 잃어버린 몸무게와 옥상의 자세한 풍경에 대해, 그리고 기타 등등에 대해. 선생님은 놀란 것 같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를 내버려두었다. 글의 막바지에 나는 이런 문장을 추가했다. 정우맨션의 25층 옥상에 작은 소각장과 불탄 종이의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리라고.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추저분하고 난잡하게. 그래서 언젠가는 그게 꼭 발각되기를 원한다고. 누군가 우리 집의 초인종을 누르고 불장난한 아이를 찾으러 왔다고 말하기를 바란다고.

나는 원고지를 덮었다. 선생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반 아이들은 어리둥절해하며 내 얼굴과 선생님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세상의 비밀 하나를 알게 되었다고 느꼈다. 누구도 가닿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도달했다고. 그 세계는 터무니없으면서 치명적이고 느긋하면서도 통렬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내 마음속에 꼭꼭 새겨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그런 생각은 시간이 흐른 후에 착각, 기만, 허상에 불과하다는 판명이 날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때때로 삶에서 가장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건, 바로 그런 착각과 기만, 허상에 기꺼이 내 몸을 내주는 일이라고. 그런 기만과 착각, 허상을 디뎌야지만 도약할 수 있는, 그런 삶이 존재한다고. 언젠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돌이켜보는 눈 속에서 어떤 사실들은 재배열되고 새롭게 의미를 획득한다. 불가피하게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며, 허구가 사실이 되고 사실이 허구가 되는 그런 순간들! 그러므로 이 여정 자체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돌이켜보는 눈의 진짜 용도가 될 것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내가 나중에서야 하게 될 생각이었고, 그날, 소리 내어 「불장난」을 다 읽어낸 나는 고개를 뻣뻣이 들고 아이들을 둘러보며 선생님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선생님은 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자, 박수.”

성의 없고 산만한 아이들의 박수 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번에야말로 마음껏 의기양양해하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