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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한국 근대를 살아냈을 뿐

기억과 현재성의 예술로서 『아버지에게 갔었어』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저서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21세기 한반도 구상』(공저), 역서 『필경사 바틀비』 『우리 집에 불났어』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공역) 등이 있음.

kiwookh@gmail.com

 

 

1. 기억과 현재성

 

신경숙의 신작 장편 『아버지에게 갔었어』(창비 2021, 이하 『아버지』)를 읽으면서 새삼 눈에 띄는 것은 작품 곳곳에 깔려 있는 크고 작은 기억들이었다. 이 기억들 중에는 아버지가 ‘나’의 글을 읽고 “별것을 다 기억한다”(『아버지』 49면, 이하 면수만 표기)라고 했을 때의 ‘별것’과 잠 못드는 밤 ‘나’가 펼쳐든 『그날들』에서 사진작가가 언급한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어떤 것” 혹은 “다시는 나타날 수 없는 그런 순간”(50면)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적잖은 기억들이 작가의 전작에서 등장한 바 있지만 새로운 서사와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런 기억들의 생생함은 어디서 생겨나는 걸까. 선형적인 시간관에서 기억의 서사는 과거의 영역을 다루며 현재와의 단절을 전제로 전개되지만, 신경숙 소설에서 기억은 과거에 속하는 완결되고 고착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현재의 시간대에서 벌어지는 ‘동사(動詞)’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이 점은 글쓰기에 대한 고민과 그 지난한 과정을 소설의 핵심적 일부로 통합하는 그의 ‘메타픽션’적이고 ‘생성적’인 작법을 통해 수시로 강조된다. 가령 『외딴방』(전2권, 문학동네 1995)의 ‘나’는 육년 전 하계숙과 희재언니 등과 함께했던 시절을 두고 “내게는 그때가 지나간 시간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낙타의 혹처럼 나는 내 등에 그 시간들을 짊어지고 있음을, 오래도록 어쩌면 나, 여기 머무는 동안 내내 그 시간들은 나의 현재일 것임을”(1권 85면) 느낀다. 이렇게 현재로 남아 있는 과거와 그것을 끌어내는 기억을 문학의 속성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현재성을 오래 생각해본다. (…) 미래소설이나 가상소설이라고 처음부터 작정을 해둔 게 아니면 글쓰기는 결국 뒤돌아보기 아닌가. 적어도 문학 속에서는 지금 이 순간 이전의 모든 기억들은 성찰의 대상이 되는 거 아닌가. 오늘 속에 흐르는 어제 캐내기 아닌가. 왜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지금 내가 여기에서 무얼 하려고 하는지 알기 위해서.(1권 86~87면, 강조는 인용자)

 

이때 ‘현재성’이란 선형적인 시간대의 실증적 현재가 아니라 개별자의 삶과 존재에 지금 생동하는 것, 시간이라기보다 존재의 떨림이다. 글쓰기가 “오늘 속에 흐르는 어제 캐내기”가 되는 차원에서 기억은 이를테면 ‘과거도 현재도 아닌 그 중간쯤의 시간’에 속할 것이다. 작가는 ‘기억’을 이렇게 현재성과 연동시켜 문학의 본질적인 속성으로까지 조명하지만, 기억의 한계 역시 분명히 인식한다. 가령 ‘나’는 “〔희재〕언니의 진실을, 언니에 대한 나의 진실을, 제대로 따라가”기를 염원하면서 “내가 진실해질 수 있는 때는 내 기억을 들여다보고 있는 때도 남은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도 아니었어. 그런 것들은 공허했어. 이렇게 엎드려 뭐라고뭐라고 적어보고 있을 때만 나는 나를 알겠었어. 나는 글쓰기로 언니에게 도달해보려고 해.”(1권 248면)라고 말한다. 이는 기억을 “공허”한 것으로 재규정한다기보다, 기억이든 사진이든 완결·고착된 재현물의 한계에 맞닥뜨릴 때 “뭐라고뭐라고 적어보”는 글쓰기라는 창조적 과정을 통해 그 한계를 돌파할 수 있으며 현재성을 구현할 수 있다는 뜻일 듯싶다.1

한 개인의 기억에 이런 한계와 불완전한 면이 있음에도 어째서 현재성의 예술에 요긴한 자원이 될 수 있는 걸까. 생활고에 몰려 한편의 영화만 더 만들어보기로 한 「미나리」(2020)의 감독 정이삭은 어떻게 새로운 시나리오를 쓸 것인지 고민하던 끝에 윌라 캐서(Willa Cather)의 『나의 앤토니아』(My Antonia, 1918)를 발견하게 된다. 한 소년의 네브래스카 농장에서의 성장기를 그린 이 소설은 아칸소 농장에서 자란 그의 마음에 속속 와닿았다. 처음에 이를 각색해 시나리오를 쓰려 했던 감독은 “감탄하기를 그치고 기억하기 시작했을 때 내게 삶이 시작되었다”는 캐서의 발언에 영감을 받아 자기 삶의 ‘기억’으로 영화를 만들기로 한다.2 자신이 어린아이일 때—영화 속 데이비드의 나이일 때—어땠는지를 써내려간 결과 그는 80개가량의 기억들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것만으로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고 ‘뭐라고뭐라고 적어보는’ 것에 해당하는 배치와 편집, 연기와 연출의 과정을 거쳐야 했을 것이다. 어쨌든, 만약 이 기억들 대신 자신의 기존 작품처럼 ‘개념있는’ 서사를 활용해서 ‘제작된’ 각본을 사용했더라면 이렇듯 생생한 영화로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경숙의 이번 장편 『아버지』는 작가의 삶에서 끌어올린 이런 기억들을 활용하되 기억이 지닌 한계를 직시하고 돌파하려는 분투의 결과물이라고 여겨진다. 이 글에서는 ‘개별자’로서의 한 비평가에게 이 소설이 왜 중요하게 느껴지는지를, 즉 기억이 어떻게 현재성의 예술인 작품을 일구어 역사를 써내는지를, 아버지의 진실에 닿기 위해 ‘뭐라고뭐라고 적어보는’ 직관과 성찰이 어찌하여 ‘나’ 자신의 진실에 닿게 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아버지와 ‘나’의 재회의 시간

 

『아버지』에서 서사의 중심축은 일인칭 화자인 큰딸 ‘나’와 아버지 사이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현재는 교통사고로 불시에 딸을 잃은 ‘나’가 노년의 아버지가 울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랜만에 J시(정읍)의 고향집을 찾아가 병든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나’는 딸의 죽음으로 인한 상심으로 부모와의 만남을 피해왔지만 오년의 세월이 흐른데다가 엄마가 병원 치료를 위해 상경하는 바람에 홀로 된 아버지의 곁에 있기로 한다.

아버지와 단둘이만 있는 터라 현재 시간대의 서사가 진행되는 중간중간 등장하는 과거의 시간도 대체로는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기억들은 J시의 집에 당도하기 전부터 ‘나’에게 찾아든다. 중학교 졸업 후 고향을 떠나기 전 ‘나’가 아버지 가게에 찾아가지만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졌을 때, 중학생이던 ‘나’가 대흥리 다리에서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29면)의 아버지와 마주치고 외면했을 때, 서울 이주 후 ‘나’가 J시의 역으로 자신을 마중 나온 아버지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고 집으로 달려갔을 때의 기억이 그것이다. 이 기억들은 시기와 정황이 다르지만 모두 ‘나’가 간직한 아버지의 여러 모습이다. 주목할 것은 이런 기억이 사실적인 이야기이자 동시에 ‘정동(情動)’적인 장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첫번째 기억에서 작별의 상황은 처음에는 “내가 J시를 떠나오던 날 집에서 나와 아버지에게 작별인사를 하려고 그 가게에 갔었다. 가게에 도착해서 늘 그랬던 것처럼 그 늘어뜨려진 고무줄을 모아 잡고 아버지, 불렀는데 아버지가 안에서 나오기 전에 기차역으로 가는 버스가 가게 앞 신작로에 도착했다. 밤이었다. 그 버스를 놓치면 기차역까지 걸어가야 했다. 걸어서 기차역에 도착해본들 기차가 출발한 다음일 것이다”(16면)처럼 사실적으로 서술되다가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정동이 점점 고조되면서 ‘장면’(scene)화한다.

 

혹여라도 버스가 출발해버릴까봐 나는 어두운 가게 안쪽에 대고 아버지, 나 가요…… 소리치고는 뛰어서 버스에 타버렸다. (…) 아버지는 가게에서 막 뛰쳐나와 한쪽 발엔 슬리퍼를 한쪽 발엔 고무신을 끼어 신고 손을 흔들지도 어쩌지도 못한 채 나를 태운 버스를 쳐다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가 방금 붙잡았다가 세차게 놓아서 그때까지도 흔들리고 있던 검은 고무줄 옆 어둠 속에 서 있던 아버지의 실루엣.(17면)

 

여기서 ‘고무줄’은 이전에 “아버지에게 돈을 달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질 않아 애꿎은 그 고무줄만 잡아당기고 있을 때”(15~16면)의 기억을 감안하면 ‘나’의 안타까운 마음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나’의 애타는 마음과 아버지의 망연자실한 모습이 선연하게 대비되어 제시되는 이 기억의 장면에는 제임슨(F. Jameson)이 리얼리즘 소설 내부의 모순적인 두 요소로 지적한, ‘서사적 충동’(narrative impulse)과 ‘정동’ 혹은 ‘장면적/생생함의 충동’(scenic impulse)이 불가분으로 어우러져 있는 듯하다.3 이 기억의 서사/장면은 그 자체로도 인상적이지만 『외딴방』의 ‘나’가 자기 발바닥에 쇠스랑이 박힌 채 태연히 누워 있는 장면과 연동되어 상징적인 울림을 준다. 그 무렵(1970년대 후반) 정읍을 포함한 한국의 농촌지역은 서울과 주요 도시들의 급속한 산업화를 뒷받침하는 배후지로 전락하고 있었고 그때만 해도 딸에게 고등교육을 시키는 농가는 드물었다. “헤어지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는 관계에 봉착할 때면 그때 그 신작로에서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던 절박한 내 목소리가 북소리처럼 둥둥둥 머릿속에 울린다”(16면)는 고백에서 드러나듯 아버지와 헤어지는 것이 안타까워도 여성으로서는 농촌을 떠나 도회로 공부하러 가는 것만이 “앞으로 나아갈 길”이라는 ‘나’의 확신은 쇠스랑만큼이나 날카롭고 강한 것이다.

J시에 당도한 ‘나’는 회색 앵무새 ‘참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버지와 재회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순간적인 기억상실에다 수면장애, 우울증 등의 복합적인 질환을 앓고 있음을 알게 되고 “밤마다 어딘가에서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아버지를 찾아다”(59면)니게 된다. 그렇지만 오년 만에 아버지와 단둘이 있게 된 이 시간은 ‘나’가 아버지라는 몸과 존재에 다가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헐렁해진 허리를 껴안고 팔짱을 끼고 손을 잡아 계단을 오르며, “자냐?/네, 자요./잔다면서 대답을 허냐?/그러게 말이에요, 어서 주무셔요.”(63면) 하고 두런두런 말을 주고받는 시간인 것이다. 또한 아버지의 지난날들의 노동과 숨결이 깃들어 있는 장소와 물건을, 헛간과 우사와 농기구를, 웅과 낙천이 아저씨가 살던 우사 옆 폐가에 딸린 방을, 그 속에 있는 나무궤짝을 ‘나’ 홀로 찾아보고 만져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 주된 서사의 흐름 간간이 서로 연관된 두가지 기억의 끈이 끼어든다. 하나는 ‘나’의 잃어버린 딸에 대한 기억이다. 가령 함께 시장에 생선 사러 갔다가 회색 앵무새가 따라오는 것을 보고 “앵무새가 엄마 따라쟁이야”(41면)라고 명랑하게 소리치던 딸의 기억이 스치는데, “딸을 잃고 나니 모든 일에 경계선이 사라졌다. 웃을 일도 따질 일도 지킬 일도 무의미해졌다. 오늘도 내일도 어제도 그저 덩어리진 채 흘러갔다”(67면)는 심경 변화도 함께 상기된다. 또 하나는 작가가 되고팠던 ‘나’의 열망과 등단 시절에 관련된 기억이다. 대학 졸업 후 ‘나’는 출판사에 취직해 서로 다른 역자가 나누어 번역한 책의 내용을 말이 되게끔 기워 맞추는 일을 하는데, 출근길이면 회사의 계단에서 도로 내려가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한다. 하지만 ‘나’는 퇴근 후 독서실에 가서 무언가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고, ‘어디다 뒀던가’로 시작되고 ‘삶에는 기습이 있다’라는 문장이 들어 있는 데뷔작이 탄생된다. 고향의 아버지한테 전화를 걸어 등단 소식을 알렸더니 좋은 일이냐고 물었고, ‘나’는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고요, 제가 꼭 하고 싶은 일이에요, 아버지”(69면)라고 답한다. 그랬던 ‘나’가 지금은 “니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잘하고 있냐?”(68면)라는 아버지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딸을 잃은 어미의 마음을 짐작하는 아버지는 “벌써 육년이 흘렀구나. 너무 오래 붙들고 있으면 그아도 갈 길을 못 가고 헤맬 것잉게 (…) 붙들고 있지 말어라. 어디에도 고이지 않게 흘러가게 둬라”(92면)라고 속 깊은 충고를 한다. ‘나’는 그 말에 울컥하지만, 딸을 놔줄 마음 상태가 아니었고 마음처럼 글도 만신창이 상태였다. 그래서 아버지의 물음에 속으로 “나는 하고 싶어서 쓰는 게 아니라 살고 싶어서 쓰는 것 같아요”라고 대답하며 “아버지, 나는 부서지고 깨졌어요. 당신 말처럼 나는 별것이나 쓰는 사람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나는 그 별것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해요”라고 절규한다(93면). 이렇게 상호 연관된 두 기억의 끈을 따라가면, ‘나’가 딸을 잃은 엄마로서뿐 아니라 작가로서도 산산이 “부서지고 깨”진 상태로 아버지 곁으로 찾아왔음이 분명해진다. 중학교 졸업 후 도시의 근대적인 삶을 열망하여 결연하게 떠나왔던 고향에, 아버지 곁에, 빈 몸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3. 아버지의 과거의 시간

 

아버지의 과거의 시간이 나타나는 통로는 화자인 ‘나’의 기억만이 아니다. 아버지 자신이나 엄마와 고모 같은 집안의 누군가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담기기도 한다. 큰오빠와 아버지가 주고받은 편지와 엄마, 작은오빠, 박무릉의 구술도 요긴하게 활용된다. 이렇게 다양한 통로와 방식의 활용은 ‘아버지의 진실’에 닿기 위한 ‘나’의 예술적 분투의 일환이랄 수 있다. 그런데 그 길목에서 만난 아버지는 ‘나’가 전에 ‘알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가 고백처럼 젊은 날에 우리들의 먹성이 무서웠다고 한 말”의 충격으로 “처음으로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아버지의 소년 시절을, 아버지의 청년 시절을 생각해보게” 된다. “전염병으로 이틀 사이에 부모를 잃은 마음을, 전쟁을 겪을 때의 마음을, (…) 짐작이 되지 않았다.”(197면) 왜 그런가를 자문하자,

 

나는 아버지를 한번도 개별적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도 그제야 깨달았다. 아버지를 농부로, 전쟁을 겪은 세대로, 소를 기르는 사람으로 뭉뚱그려서 생각하는 버릇이 들어서 아버지 개인에 대해서는 정확히 아는 게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아버지가 간혹 조부를 원망하며 학교에나 보내주실 일이지, 했던 혼잣말이 무겁게 다가왔다.(197면)

 

“뭉뚱그려서 생각하는 버릇”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그것이 어떤 정형화된 유형, 즉 상투형을 만들어내어 사람들 각각의 고유한 개별성을 가리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농부” “전쟁을 겪은 세대” “소를 기르는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그런 ‘뭉뚱그려진’ 범주의 일원으로만 인식되고 감각될 때 ‘아버지 개인’의 개별성의 차원은 쉽게 소거되고 만다. 가령 조부에 대한 아버지의 원망에는 학교 교육에 대한 아버지 ‘개인’의 남다른 열망이 깃들어 있다. 이런 개별성의 감각과 인식은 삶의 문제이자 예술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물의 개별성이 체감되지 않으면 재현 대상이 과거에 있건 현재에 있건 현재성의 예술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4

아버지가 한 개별적 인간으로 보이면서 ‘나’에게 또 하나의 깨달음이 도래한다.

 

나는 (…) 갑자기 또 깨달았다. 내가 평소에 나의 아버지에게서, 보통 아버지라고 할 때 으레 따라붙는 가부장적인 억압을 느끼지 않고 엄마보다 아버지를 다정히 여기며 살아온 것은 아버지의 내면에 도사린 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는 것을. 무섭고 두려운 게 많은 아버지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방식으로 세상과 대적해왔다는 것도.(198면)

 

“보통 아버지라고 할 때 으레 따라붙는 가부장적인 억압을 느끼지 않고 엄마보다 아버지를 다정히 여기”는 경우는 예외적일 것이다. 그런 만큼 그것이 “아버지의 내면에 도사린 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나’의 해석이 얼마나 타당한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 중에는 가난의 무서움도 있고 가족의 목숨을 삽시간에 앗아간 전염병의 공포도 있고, “난리도 그런 난리는 없었”(115면)을 한국전쟁 중의 끔찍했던 일들도 있다. ‘나’의 해석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이런 두려움의 진상이 무엇이며, 그것이 한 존재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제시해줄 필요가 있다.

아버지의 삶에 맨 처음 크나큰 영향을 미친 것은 전염병이었다. 전염병으로 어린 나이에 세 형을 잃고 장남이자 종손이 된 아버지는 몇년 후 전염병—1946년의 콜레라로 짐작된다—으로 부모마저 잃게 되어 열네살에 고아가 된다. 이 시절 이야기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버지가 외가에서 생계를 도모하라고 준 송아지의 코청을 뚫고 코뚜레를 거는 장면이다. 소년은 “코청을 뚫어 코뚜레를 걸어놓으면 송아지는 꼼짝없이 자신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집의 운명에 자신이 따를 수밖에 없듯이”라고 생각하며 “소가 되어가는 중인 송아지와 자신의 처지가 같”다고 여긴다(98면). 문제의 장면은 이렇다.

 

결박당한 송아지는 커다란 눈망울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막 떠오른 아침 햇빛이 송아지의 눈에 어룽졌다. 소년이 다가가자 송아지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 소년은 송아지의 고통을 덜어주려면 정확하게 한번에 뚫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코뚜레 끝을 불에 달궈 소독을 마친 후에도 망설이자 작은아버지가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으나 소년은 코뚜레를 내주지 않았다. 내 송아지이니 내가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으므로. 소년은 눈을 크게 떴다. 땅을 딛고 있는 발바닥에 힘을 주었다. 결박당한 송아지의 코청에 코뚜레의 날카로운 끝을 박고 힘을 주었다. (…) 소에게 코뚜레를 걸었던 얘기를 하는 아버지의 숨소리가 나지막해졌다. 말 못하는 짐승한티 내가 그리했고나.(99~100면)

 

열다섯 소년의 심경이 선연하게 그려지는 이 장면에서 아버지는 더이상 ‘아버지’가 아닌 ‘소년’이다. 그리고 송아지와 소년의 두려움이 숨결처럼 뒤섞이고 공유되는 듯한 이 장면에서 소년은 코뚜레가 뚫려 꼼짝달싹하지 못할 삶에 결박되는 ‘소’이기도 하다. 여기서 소년은 오롯이 자신에게 맡겨진 삶의 책임 앞에 벌거벗고 선, 존재가 된다.

개인의 운명을 집안의 운명과 일치시키는 이 대목은 ‘나’의 아버지가 학교 교육을 통한 도시적·근대적 삶으로 나아가려는 열망을 접고 농촌의 전통적인 삶을 받아들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한 세대 후 자신의 큰딸이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근대화되는 도시로 떠날 때와 방향은 반대지만 삶의 분기점에서의 결정적인 선택이기는 마찬가지인 순간이다. 소설은 이렇게 부녀의 삶이 교차하는 지점을 포착하고 대조함으로써 한국의 굴곡진 근대를 복합적 시선으로 조명할 수 있게 하고, 그럼으로써 기억 서사를 평면적으로 재생하는 기존의 관습적 가족 서사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아버지가 근대화의 뒤안길인 농촌에 남게 되었다고 근대화의 시간을 비껴간 것은 아니다. 자신은 누리지 못한 학교 교육을 자식들에게 권장하여 육남매 모두에게 대학 교육을 시켰을 뿐 아니라, 엄마의 구술에서 나타나듯 1970년대 품종개량운동이라든지 경운기·트랙터의 도입 등 농촌근대화 정책에 적극 호응하기도 한다. 1980년대 중반의 소값 파동 때는 소몰이투쟁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근대화 반대를 뜻하는 것이 아님은 1990년대 전후 한 대기업 해외건설현장에서의 삶을 상세히 알려주는 큰아들의 편지에 대한 반응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국 농촌에 이어져온 전통적인 덕목을 실천하는 사람인 까닭에 근대화의 길로 매진하지는 못하며, 때론 그것과 어긋나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아버지가 소학에서 사서삼경에 이르는 유교 경전을 통해 배운 전통적인 고전 교육과 정읍을 비롯한 호남지역에 광범위하게 스며 있는 동학 및 그 후속 종교들—천도교, 증산교, 원불교—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다. 이 점에서 집안의 어른이자 이야기꾼인 고모의 차천자(차경석) 이야기는 주목할 만하다. 집안의 땅이 쪼그라든 것도 ‘나’의 증조부와 조부가 강일순(강증산)과 그 제자 차천자를 따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차천자는 입암면 대흥리에 대형 보천교 교당을 짓고 신도들에게 인장과 교첩을 팔았는데, 그걸 사려고 사람들이 “먼지가 일게”(87면) 몰려든 것을 두고 고모는 “동학도 패허고 나라도 뺏기고 지댈 데가 없어농게” 그런 허황된 일이 일어났다고 하면서도 그때의 “새 세상을 바라는 마음”만큼은 부정하지 않는다(86면). 고모는 어린 조카들에게 “동학도 새 세상 세우는 일도 거듭거듭 결실 없이 끝났시도 여그 땅이 그런 기운을 지닌 땅”이라고, “너그는 좋은 기운을 받아 다사롭게 살라고” 이른다(87면).

아버지의 삶에 근대식 교육과 다른, 근대적 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이런 전통 교육과 기운, 관점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직접 언급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한창 소를 키우던 무렵 이웃의 웅과 낙천이 아저씨를 받아들여 우사 옆 거처에 살게끔 해준 일화는 특기할 만하다. 말귀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웅에게 송아지 한마리를 주고 ‘웅이의 송아지’라고 반복해서 쓰게 하고 그것으로 팻말을 만들어 송아지 목에 걸게 하는데, 책임과 소유의식을 불어넣고 글쓰기를 통해 한 사람을 개별자로 세우는 이런 ‘자력양성(自力養成)’의 방식은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배려의 차원을 넘어선다. 웅과 낙천이 아저씨를 받아들인 이유가 전쟁 통에 진 빚이나 신세를 갚으려는 보은이라는 것도 우연이 아닌 것이, 그것이 유교와 불교, 동학이 공유하는 핵심 덕목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인생에 전염병보다 더한,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한국전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쟁 통의 일들은 처음에는 아버지의 육성과 ‘나’의 소감이 간간이 뒤섞인 채 서술되고(104~17면), 4장에 가서야 ‘박무릉’의 구술—정확히 말하면 4장의 다른 구술들과 달리 ‘나’가 현장에 있는 상태에서 진행되는 구술 인터뷰—을 통해 더 깊은, 어두운 면이 조명된다(292~324면). 초반에 나오는 이야기만으로도 인민군 ‘제6사단 사람들’이 J시를 점령한 후에 벌어진 일련의 일들이 얼마나 참혹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의 작은아버지들이 살해당하고 아버지 자신은 군대 징집을 피하기 위해 ‘큰봉’이라는 사당지기에게 손가락이 잘리기도 한다. ‘나’는 “아버지의 뇌가 잠을 자지 않는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 전쟁 중에 아버지의 손가락이 잘리던 순간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뇌를 잠 못 들게 하는 게 꼭 그 순간인 것만 같아서”(111면)라며 그때의 경험이 아버지에게 트라우마로 남았을 가능성을 전한다. 여기서는 장성 사람 박무릉은 언급만 될 뿐, 구체적인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박무릉의 구술 전에 등장하는, 아버지 인생에서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사건은 김순옥과의 인연이다. 여기서 4·19라는 역사가 아버지의 삶과 비스듬히 만나는 방식도 주목할 만하다. 아버지는 1960년 4월에 서울에 왔다가 한때 차천자를 따랐던 백반집 주인을 만나고 그의 대학생 딸 김순옥을 정치 깡패들로부터 구하며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나중에 김순옥과 그의 아버지가 용공분자로 몰려 백반집이 풍비박산 나서 다시 입암으로 내려오게 되니, 그들 가족에게 동학/보천교에서 4·19—용공분자로 몰리는 때는 5·16 이후로 추측된다—로 이어지는 아픈 역사의 끈은 이어진다.

아버지의 삶을 정면으로 관통한 것은 박무릉의 구술에 나타나는 한국전쟁기의 비정한 역사로서, 소설 후반의 긴장감을 한층 더 끌어올린다. 박무릉이 ‘나’에게 구술한 이야기의 핵심에는 자신과 아버지가 장성 갈재의 빨치산 셋에게 포로로 잡혀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라는 강요를 번갈아 당하는 상황이 놓여 있다. 박무릉이 도망가는 아버지를 쏘라는 강요를 거부하자 아버지에게 박무릉을 낭떠러지 아래 시체구덩이 속으로 굴리라는 협박이 가해진다. “나는 피를 뒤집어쓰고 쓰러진 채 그들이 자네 아버지에게 나를 계곡 밑으로 굴리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네. 그러지 않으면 너를 쏘겠다,고 하더군.” 박무릉은 “자네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했을까? 그들의 지시대로 시체들이 쌓인 계곡 밑으로 나를 굴렸을까?”라고 자문한 후에 “그때 일은 자네 아버지를 다시 만나서도 묻지 않았네”(317면)라고 덧붙인다.

박무릉과의 인터뷰는 한국전쟁기의 참혹한 상황을 밀도있게 담아내면서도 자신과 아버지, 심지어 ‘나’와 관련된 크고 작은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풀어낸다. 누구보다 지적이지만 다리가 잘려 오랜 세월 갇혀 살아온 한 인간이 오랜만에 대화 상대를 만난 양 다양한 소재와 터치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쏟아내며 활기 띤 구술을 이어간다. 아버지가 수배당한 셋째 아들을 데리고 찾아왔을 때라든지 아버지와 함께 철도청 임시직 시험 준비를 하던 때의 이야기를 소상하게 들려주기도 하지만, 여름날 너무 더워서 죽어버리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게 하는 단풍 들 때 복자기의 ‘야발진’ 자태며 계수나무 잎사귀에서 나는 “다디단 냄새”(304면)를 언급하기도 한다. 이런 감각적 묘사는 시체 썩는 냄새의 압도적인 후각적 충격을 묘사할 때 절정에 달한다. 가령 시체구덩이에 대해 “공포도 공포지만 당장 냄새를 참아낼 수가 없었”음을 토로하면서 “눈이고 코고 귓구멍이고 구멍 뚫린 곳에서 고름이 줄줄 새어나오는 것 같아 자꾸만 팔소매로 얼굴을 훔쳤어. 그때 맡았던 냄새를 내가 어찌 잊겠나”(314면)라고 말할 때가 그렇다. 앞서 거론한 서사와 정동의 긴장 속에 그때의 절박한 상황이 후각으로 집중되는 온몸의 감각으로 실감되면서 시각 중심의 사실주의 재현의 평면성을 훌쩍 벗어난다.5

차천자의 서자라고도 알려진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과 관련된 일화들도 이야기의 재미를 더할뿐더러 고모의 차천자 이야기로부터 시작된 동학/보천교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느낌을 준다. 차일혁은 고복수, 황금심을 단원으로 둔 가극단—전옥의 백조가극단으로 추측—을 빨치산의 위협으로부터 구출하고는 부대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공연을 요청해서 “어이없게도 방금 전까지 총탄이 오고 간 갈재의 산속에서 가극단의 공연이 벌어”(310면)지고 화엄사 소각 명령에도 꾀를 내어 화엄사를 지켜내기도 한다. 박무릉은 자신의 죽은 고양이를 묻어달라는 부탁과 함께 ‘나’에게 간곡한 청을 한다. “삵은 삵을 알아보네. 자네가 이 집에 들어섰을 때 알았네. 자네는 이미 한번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살아야 하니 자네도 힘겹겠네만, 사람으로는 내 인생의 하나뿐인 동무가 자네 아버지네. 아버지가 자네 옆에 있게 해주소. (…) 자네 얘기도 하고 아버지 얘기도 좀 들어줘. 달리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여러번 죽어봤을, “기습으로만 이루어진 인생”(323면)을 살아온 박무릉이 ‘나’를 “이미 한번 죽은 사람”으로 정확히 알아봐주는 이 만남은 여태껏 알려지지 않았던 아버지의 삶 가장 밑바닥층의 어둠이 드러나면서 ‘나’가 아버지에게 결정적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이기도 하다. 박무릉의 구술 대목은 황석영의 「한씨 연대기」(1972)와 조갑상의 『밤의 눈』(2012)을 연상시키며 그 못지않게 한국 근대사의 핵심적인 지점을 무섭도록 깊숙이 파고든 느낌이다.

 

 

4. 매듭이 풀리다

 

박무릉은 이십몇년 만에 아버지를 만났을 때 “그립고 반갑고 그런 마음이라기보다 매듭이 풀리는 느낌이었”다고 토로한다. 무슨 매듭일까? 그간 아버지가 자신의 행방을 알고 있었을 텐데도 찾아오지 않는 것에 대해 “서로를 구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만나서 뭐 하겠나”(297면) 하고 이해하면서도 속으로는 그 순간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의식의 표면에서는 납득된 사안이지만 마음속 깊이 맺힌 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매듭이 만나자마자 풀렸기에 박무릉은 그때 갈재에서의 일을 묻지 않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매듭을 푼다. ‘무릉이 형’에게 보내는 마지막 연하장에 “다시 만낫을 때 갈재의 골짜기에서 뭔 일이 잇었는지 캐묻지 않아 감사햇습니다”라고 쓴다. 그러고는 “내가 갈재에서 형을 골짜기 아래로 미러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살어오는 동안에 그들이 나에게가 아니라 형의 귓부리에 총을 대고 잇엇다면 형은 나를 어찌햇을까를 자주 생각햇”음도 실토한다. 그 오랜 세월 아버지를 괴롭혔을 속엣것을 드디어 털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일생을 형을 돌보겟다”는 마음속 맹세를 지키지 못하게 되었음을 미안해하며 “모든 거슬 다 알고도 일생 동무를 해주어 고마웠습니다”라고 글을 끝맺는다(394면).

딸을 잃은 ‘나’의 경우는 어떤가. ‘나’의 마음속에 매듭이 단단히 맺혀 있음은 열쇠가게 남자와의 싸움 장면에서 인상적으로 드러난다. ‘나’는 그가 복사해준 열쇠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자 환불을 요구하는데, 그는 전액을 주지 않고 오히려 “소설가라더니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거짓말을 한다며 심보를 그렇게 쓰니 딸이 사고를 당한 거라고”(347면) 비난한다. 그러자 ‘나’는 손에 쥔 열쇠들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면서 “당신, 평생 저 안에서 열쇠나 복사하면서 살아!”라고 소리치는데, 그때의 심정은 “흘러내리는 코피를 손바닥에 받아 훅 뿌리는” 듯했다(348면). 열쇠가게 남자의 언행이 욕 들을 만했으나, 피를 뿌리는 심정으로 저주의 말을 토해낸 것은 딸의 죽음으로 인한 깊은 슬픔과 죄책감이 마음의 매듭으로 남아 있음을 드러낸다.

묶여 있던 ‘나’의 매듭이 풀리기 시작하는 것은 대흥리 다리에서 폭우로 불어난 물의 소용돌이와 흰 거품들이 나를 향해 돌진하면서 “여태 살던 대로 계속 살 거야? 외치는 것만 같았”(368면)던 순간에 찾아오지만, 매듭이 완전히 풀리는 것은 어느 날 산에서 “현실 속의 사람이 아닌 듯”(403면)한 할머니들을 만났을 때이다.

 

옆에 있던 할머니가 쟈가 누구라고?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넝뫼 양반 큰딸이구먼. 쟈가 콩알만 할 때부터 헛간에 들어가 책에 코를 박고 있더마는 낭중에 글씨 쓰는 사람이 되었다덩만. (…) 한 할머니가 아, 니가 갸구나, 하고 난 뒤였다. 햇빛 속의 유령 같은 할머니들이 내 주위로 모여들며 이마를 맞대고 내 기색을 살피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마디씩 내뱉으며 수다스러워졌다.

—오래 슬퍼하지는 말어라잉.

—우리도 여태 헤맸고나.

—모두들 각자 그르케 헤매다가 가는 것이 이 세상잉게.

할머니들은 내 곁으로 바투 다가와서 손을 잡고 어깨를 만지고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두드렸다. 앙상한 손가락들인데 머리에 어깨에 등에 닿는 느낌이 부드러웠다. 나는 산보를 하다가 할머니들에 에워싸여 느닷없는 위로를 받고 있었다. 내 마음에 팬 것들이 흐릿하게 뭉개지는 느낌이었다. 밤마다 문질러 내 손바닥에 실킨 내 뺨도 할머니들이 쓸어주어 부드러워진 느낌이었다. 문득 열쇠집 남자에게 내 말이 너무 심했다고 사과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403~404면)

 

소박한 말투와 몸짓, 순정한 마음이 환하게 드러나서 비현실의 느낌까지 주는 “햇빛 속의 유령 같은 할머니들”의 위로의 말과 어루만짐으로 마침내 “내 마음에 팬 것들이 흐릿하게 뭉개지는 느낌이” 든다. 매듭이 완전히 풀리고 매듭 자국에 팬 상처까지 아물기 시작한 듯하다. 이 대목은 앞서 거론한 서사적 충동과 장면적 충동 간의 긴장까지 훌쩍 넘어서며 비현실인 듯 생생한 현실로 다가온다. 하필 이 지점에서야 매듭이 온전히 풀리는 것은 소멸을 바로 앞에 둔 존재들이 ‘나’에게 “너도 잘 마치고 와라잉”(404면) 하고 마치 동네 마실 가듯 죽음을 범상하게 대하는 그 무심한 해방의 느낌 때문이 아닐까. 목숨 있는 생명의 불가피한 소멸 앞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살려내는 언어의 빛이 환하다.

아버지는 가족들 각자에게 유언과 유물을 남기고 마지막으로 “살아냈어야”라고 “용케도 너희들 덕분에 살아냈어야”라고 소박하게 말하지만(416면), 사실 그는 그때그때 주어진 조건 속에서 자신과 가족, 친구와 이웃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 그건 훌륭한 삶이었다. 그리고 그 삶은 근대화를 열망하면서도 오로지 돈과 권력 쪽으로 나아가는 근대주의에는 거리를 두는 것이기도 했다. 한국의 농촌에서 태어난 한 평범한 사람의 일생을 그린 이 소설은 J시(정읍)라는 구체적인 장소와 ‘나’가 아버지라 부르는 한 개별자의 생애를 실감케 하면서 현재적인 생생함을 획득한다.

한국의 굴곡진 근대를 특이한 방식으로 조명한 것도 뜻깊다. 특히 박무릉과 아버지가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도록 강요받은 상황은 상징적인 차원에서 분단체제의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효과마저 있다. 아버지가 자신을 밀었는지 아닌지를 묻지 않는 박무릉과 자신이 밀었음을 실토하면서 묻지 않은 데 고마움을 표하는 아버지 사이의 상호교감 속에 ‘분단체제’라는 매듭이 풀리는 듯하다. 김순옥의 집안을 박살 낸 4·19와 5·16, 무전여행하던 둘째를 간첩으로 오해받게 만든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셋째로 하여금 박무릉의 거처에 숨게 만든 1979년 12·12 쿠데타 등은 분단체제의 여전한 위력을 보여주되 아버지의 삶을 정면으로 타격하지는 않고 지나간다.

예술적인 면에서도 『아버지』는 풍부한 사실적 서사들과 함께 ‘의식의 흐름’과 연동되는 장면적 충동(정동)을 구사함으로써 양자의 긴장 속에서 사실주의적 재현의 평면성을 넘어선다. 그런가 하면 정동/장면적 충동으로 서사를 파편화시키는 포스트모던한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사실주의와 모더니즘의 회통을 통한 리얼리즘 혹은 현재성의 예술이라고 부름직하다. 이 소설의 모든 것이 최상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큰오빠와 아버지 간의 곡진한 편지는 둘의 살가운 관계와 아울러 1990년 전후의 한국 대기업자본주의의 현장을 보여주는 효과가 있지만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젊은 세대인 ‘아들의 아들의 말’의 구술이 그렇게 와닿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물과 장소의 개별성을 살리면서 서구 근대의 단자화된 개인이라든지 전근대/근대/탈근대의 도식적인 모델에 의지하지 않고 한국의 근대 속의 개인과 가족과 공동체를 생생하게 되살리는 데 성공한다. 『외딴방』에 비해서도 뒤지지 않는 걸작 장편이라고 생각된다.

 

 

5. 글을 맺으며

 

장편 치고도 무척 풍부한 텍스트를 다루면서 제대로 논하지 못한 것도 많다. 그중 가족제도와 가족애, 그리고 아버지의 지위와 역할에 관련된 문제가 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신경숙 소설은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적인 가족이 와해되는 양상을 그 가부장적 요소를 비판하는 동시에 가족애 자체는 긍정하는 균형적인 입장에서 그려냈다.6 그런데 이번 소설의 가부장주의 비판은 『엄마를 부탁해』(창비 2008)와 다른 방식이다. 말하자면, 페미니즘에서 흔히 부재하거나 비판 대상이 되는 정형화된 아버지상과 다른 ‘개별자로서의 아버지’를 드러냄으로써 그 당자에게도 가부장적 가족제도가 부담이자 구속이기도 한 면을 조명하는 방식이다. 이런 중도적인 입장은 가족애라든지 모성이나 부성(父性)에 대해서 종종 회의적이며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한 최근 소설들의 흐름과는 결이 다르다. 이 부분은 급변하는 현실—농촌의 대가족, 도시의 핵가족을 거쳐 지금은 일인가구와 비혼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그간 페미니즘의 담론은 확산되었지만 여성차별은 여전한 현실—에 비추어 활발한 토론이 필요한 지점이라 여겨진다.

이 소설이 조명하는 인간과 생태환경/자연의 관계라든지 생명친화적 감수성의 예들이 풍부하고 의미심장한데도 논의하지 못해서 아쉽다. 신경숙 소설은 개인에게나 공동체에나 자연과의 관계가 우리 삶의 본질적인 요소임을 느끼게 해주지만, 이번 장편은 역사적인 대비를 곁들이면서 더 심화된 인식을 담아낸다. 한때 소들의 숨결로 가득했던 우사는 텅 비어 있고 푸르렀던 논밭은 방치되고 노인들만 남겨진 황량한 풍경은 농촌의 생태환경마저 급속히 무너지고 있음을 일러준다. 가족과 공동체의 문제, 노년의 삶과 돌봄의 문제와 더불어 소설에 제시된 생태환경의 문제는 팬데믹과 기후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삶의 방식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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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억은 착오나 왜곡에서 자유롭지 않은 재현방식이기도 하다. 『아버지』에서 ‘나’의 아버지는 자기가 산낙지를 좋아하면서도 ‘나’가 산낙지를 좋아한다고 단정하는데, ‘나’는 “이렇게 왜곡되는 것이 기억인데 내가 사실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들을 계속 믿어도 될까”(62면)라고 자문한다.
  2. 인용된 캐서의 발언(“Life began for me, when I ceased to admire and began to remember”)에는 당대 최고 작가들의 작품을 감탄하기보다 자신의 유년의 삶을 기억하면서 비로소 자기만의 작품을 쓸 수 있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Lee Isaac Jung, “Some unusual guidance is behind writing ‘Minari.’,” LA Times, 2021.2.22.
  3. Fredric Jameson, The Antinomies of Realism, London: Verso 2013, 1~44면 참조. 제임슨의 정동 중심의 리얼리즘에 대한 필자의 비판적 독해는 졸고 「사유·정동·리얼리즘: 촛불혁명기 한국소설의 분투」, 『창작과비평』 2019년 겨울호 25~28면 참조. 제임슨은 리얼리즘 소설에서 정동이 서사를 밀어내고 파편화시켜 결국에는 소설의 관점(point of view)마저 파괴할 것으로 예측하지만, 이 소설의 경우는 두 요소가 팽팽한 긴장을 이루면서 정동 덕분에 기억이 생생한 떨림의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포착된 듯한 효과를 준다.
  4. 작가의 단편 「모여 있는 불빛」을 중심으로 ‘고유한 개별자’의 중요성을 논한 글로는 백지연 「비평의 질문은 어떻게 귀환하는가: 신경숙 소설과 90년대 문학비평 담론」, 『사소한 이야기의 자유』, 창비 2018, 98~105면 참조.
  5. 이 점에서 시체 썩는 냄새(시취 屍臭)가 구술의 현장에서 미묘한 방식으로 등장하는 것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초면의 ‘나’가 계속 멀찌감치 서 있는 걸 보고 박무릉이 “왜 그 나무 아래서만 서 있소?”(303면)라 하고, 잠시 후에도 “계속 거기 서 있을 건가? 내가 갈 수도 없고 참……”(305면)이라고 하는데, ‘나’가 이런 결례를 범하는 것이 고양이 시체 썩는 냄새 때문임이 암시된다. 박무릉이 전쟁 중에 맡았을 시체 썩는 냄새에 비할 바가 아닐 텐데도 ‘나’는 되도록 멀리 서 있고 싶은 것이다. “저 가엾은 생명을 묻어주고 가게나”로 끝나는 이 대목(324면)은 시체 썩는 냄새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면서 “내 무릎 가까이까지 와 기척을 내던 유일한 숨”이자 “함께 살던 내 동무”였던 고양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애도의 장면으로서, 아버지가 ‘참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장면과 조응한다.
  6. 이에 관해서는 졸고 「가족의 재구성: 가부장제와 근대주의를 넘어서」, 『오늘의 문예비평』 2012년 봄호 참조. 이 글에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비롯하여 권여선, 김이설, 김애란, 공선옥의 장·단편을 살펴보았는데, 아버지에 대해 김이설의 소설이 적대적이라면 권여선의 작품은 공감과 냉소 사이를 오가는 것이었다. 최근 들어서도 황정은의 『연년세세』(창비 2020)에서 보듯, 한국 근대의 가부장적인 흐름을 비판적으로 탐사·조망하는 주목할 만한 소설화 작업이 시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