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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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安姬燕

1986년생.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elliott1979@hanmail.net

 

 

 

히스테리아

 

 

나에겐 누군가를 살해한 심증이 있다

 

방문을 열면 한 무리의 검은 개들이 서 있고

 

나는 다시 방문을 닫으면서 생각한다 방안에는 텅 빈 캔버스가 있다

 

이것은 누구의 외투입니까 이 책은 어떻게 끝납니까

해바라기가 그려져 있다

내 손이 한 일이 아닙니다 나는 막 신발을 고쳐 신고 문밖의 개들을 따라가려던 중이었어요

캔버스를 뚫고 나온 해바라기가 발목을 휘감아 오르기 시작한다

 

밖에서 문을 닫아거는 소리가 났다

개들이 시끄럽게 짖어댔고

온 방을 뒤덮을 만큼 거대해진 해바라기가

입을 벌린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를 어디로 실어가려는 것입니까 이 방은

누구의 몸속에서 출렁이는 기억입니까

 

화염을 뚝뚝 흘리면서 녹고 있는

 

나는 얼음처럼

눈동자가 갈라지는 소리를 들었다

 

눈앞에는 텅 빈 캔버스가 있다

 

 

 

접어놓은 페이지

 

 

나의 목동은

양의 목을 내려치고 있다 양들이 휘청거리다 쓰러진다

 

너는 새하얀 것을 믿니 여기 새하얀 것들이 쌓여 있어

목동은 양의 발목을 잡아끈다 돌을 쌓듯 양을 쌓아

새빨간 성벽을 만든다

 

밤 그리고 밤

목동은 미동도 않고 서 있다

그 고요가 숲의 온 나무를 흔들 때

여름의 마지막 책장은 넘어가고

 

다시 밤은

부리가 긴 새들을 키운다

두 눈을 찌르러 올 것이다

 

얼마나 멀리 온 발일까

벽에 걸린 그림자를 떼어내도

벽에는 그림자가 걸려 있고

 

얼마나 오래 버려진 책일까

첫 장을 펼치기도 전에

모래알갱이가 되어 바스러지는

 

목동은 구름처럼

양들이 평화롭게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가볍고 포근한

 

심장을 찌르러 오는 빛

 

나의 목동은 부신 눈을 비비며 서 있다

언덕 너머에 진짜 언덕이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