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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박동억 朴東檍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황야는 어떻게 증언하는가: 2010년대 현대시의 동물 표상」 등이 있음.

suncanon@naver.com

 

정지아 鄭智我

소설가.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 소설집 『행복』 『봄빛』 『숲의 대화』 『자본주의의 적』 등이 있음.

jiajeong@hanmail.net

 

황인찬 黃仁燦

시인. 시집 『구관조 씻기기』 『희지의 세계』 『사랑을 위한 되풀이』 등이 있음.

mirion1@naver.com

 

 

황인찬 안녕하세요. 가을호 문학초점 사회를 맡은 황인찬입니다. 오늘 자리에 함께하신 분은 정지아 소설가와 박동억 문학평론가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직접 만나지 못해 이렇게 온라인으로 좌담을 진행하게 되었는데요, 사람을 대면하기 어려운 요즘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두분 모두 정말 반갑습니다.

 

정지아 안녕하세요. 소설 쓰는 정지아입니다. 오랜만에 서울 구경, 서울 사람 구경을 하나 설렜는데 이번에도 코로나 때문에 좌절되었네요. 오랜만에 동료들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박동억 좋은 작품들을 읽는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온라인으로나마 두분을 처음 뵙게 되어 반가운 마음인데, 함께 문학작품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더욱 기쁩니다.

 

 

최은미 『눈으로 만든 사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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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최은미 세번째 소설집 『눈으로 만든 사람』으로 시작해보면 어떨까 해요. 6년 만의 소설집인데요, 공들인 시간 덕분인지 작품들의 밀도가 참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사실 이 소설들을 읽는 내내 너무 힘들었습니다. 소설에서 말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무척이나 강렬하게 다가와서요. 정리된 과거의 일들이 아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져오며 소설 속 ‘나’를 구성하고 또 구속하고 있기도 하죠. 그것이 너무 실감나게 그려져 읽고 있는 저조차 숨이 막혀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야말로 육박해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박동억 저도 소설집이 묶여 나오길 기다리던 작가였습니다. 작품들을 모아서 읽으니까 말씀하신 ‘육박해온다’는 느낌이 더욱 강했습니다. 특히 최은미가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답이 없는 감정들, 사회적인 가치를 부여받지 않는 감정들이죠. 예컨대 「보내는 이」에서 남편의 퇴근을 기다리며 “알알하고 허망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20면)는 시간이라고 말하거나, 아이가 열한살이 되도록 버리지 못했던 모유팩들을 “윤이까지도 다 동결돼 있는 여섯 개의 덩어리”(33면)라고 표현할 때, 허공이나 얼음과 같은 시간을 견디는 삶의 자세를 잘 감각화하고 있습니다. 소설집 전반에서 어린 시절 겪은 성폭력의 트라우마, 여성의 막막한 삶의 감각, 중단할 수 없는 그리움과 애도의 문제 등을 다루는데, 수록작들이 소재를 공유하면서도 때론 피해자의 시점에서, 때론 목격자의 시점에서 주제에 깊이 파고들어가고 있습니다.

 

정지아 ‘육박해온다’는 표현을 하셨는데, 저는 이전 세대의 소설에 익숙한 사람이라 그런지 소설이란 당연히 이 정도로는 육박해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번 소설집에서 제가 가장 놀랐던 것은 작가의 변화였어요. 사실 육박해오기로 따지면 전작 『목련정전』(문학과지성사 2015)이 더 강했다고 봅니다. 『목련정전』의 세계, 고통으로 닫혀 있어 오로지 고통으로만 순환하는 세계, 그 결정론적인 세계관에 압도당하며 읽었는데, 이번 소설집에서는 『목련정전』의 신화적 상상력이 현실적 상상력으로 옮겨온 지점들이 눈에 띄었어요. 우선 단순하게는 아홉편 모두 ‘지금 여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그렇고요. 「눈으로 만든 사람」에서 주인공 강윤희는 어린 시절 작은아버지로부터 성추행을 당하고, 그 상처 때문에 남자들과 제대로 관계를 맺지 못하는데 결말에서 새로운 생명의 잉태를 받아들이게 돼요. 실제 임신한 건 아니고 암시일 뿐이지만요. “피임을 하지 않았다는 걸”(130면) 알게 된 마지막 문장으로부터 『목련정전』의 생명 부정이 이미 긍정으로 나아갔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한 작가가 이렇게 빨리 변화할 수 있는가, 작가가 그야말로 도약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앞으로 어떻게까지 변화해갈 수 있을까 궁금해져요.

 

황인찬

황인찬

황인찬 표제작인 「눈으로 만든 사람」은 친족 성폭력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가해자의 아들을 잠시 집에 들이는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을 텐데, 소설집 전체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도 생각됩니다. 결코 떨쳐낼 수 없는 과거의 기억이 현실의 삶과 어떻게 얽히는지, 그리고 그 폭력이 어떻게 대(代)를 넘어서까지 영향을 미치는지, 그런 모습들이 생생하고 설득력 있게 그려집니다. 가해자가 강윤희에게 용서를 비는 장면에서 “그때 내가 너한테”(125면)라는 말을 하는데, 이 대목에서 강윤희는 ‘그때’라는 말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가해자에게 그것은 과거의 한순간, ‘그때’의 일이지만, 강윤희에게는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져오는 일이니까요. 또 「운내」는 ‘운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기억을 성인이 된 ‘나’가 회상하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마찬가지로 과거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강하게 구속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과거가 끊임없이 현재화되는 것이 이 소설집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어요.

 

박동억 작품을 읽다보면 그 상황에서 ‘나였으면 어떨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눈으로 만든 사람」에서 가해자인 작은아버지 강중식이 강윤희에게 변명하는 장면은 이 소설집에서 가장 끔찍한 장면인데, 끝까지 자신의 불행만 연민할 뿐이죠. 그런데 강중식이 그의 아들 강민서를 돌보아달라고 맡길 때 윤리적 고뇌는 발생합니다. 다섯살 때 소아림프종 판정을 받고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 아이를 용서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꺼림칙한 존재, 혹은 강윤희가 자신의 딸과 단둘이 두어서는 안 될 남자로서 바라보게 됩니다. 마치 작가가 독자에게 저 아이, 자신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범죄자의 자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질문하는 듯해요. 또한 「내게 내가 나일 그때」 등의 작품을 통해서 작가는 가해자를 고발하는 순간도, 가해자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듣는 것도,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도 결코 해답이 되지 않는 장면들을 제시합니다.

 

정지아

정지아

정지아 「눈으로 만든 사람」과 「운내」는 두 작품 모두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연결된 고통과 상처의 이야기이지만 『목련정전』이 고통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면, 「운내」에서는 여성들의 연대로 나아가는 모습이 보여요. 「눈으로 만든 사람」에서 윗세대가 저지른 죄를 아랫세대가 벌받는 듯한 구조 역시 『목련정전』과 상당히 흡사한데 사실은 죗값을 치르고 있는 아이를 통해 주인공이 오히려 자기의 상처를 위로받는 이야기이고요. 아이가 고통받고 있는 사실에서 위로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바라봐주는 아이의 순수하고 따뜻한 시선을 통해서 위로를 받죠. 고통은 현존하고 있지만, 결국 산다는 것이 어쨌건 상처가 흉터가 되고 자국이 되고 그것이 나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면, 그런 극복의 과정까지를 이 소설들이 담고 있다고 봅니다. 「운내」나 「美山」(미산) 같은 작품이 가지는 밀도 역시 특별해요. 주인공이 유년 시절을 보낸 ‘운내’라는 공간에 대한 묘사나 고향을 허공에 출렁다리가 걸려 있었던 산마을로 설정하는 등 신화적 상상력이 발휘되고, 신화적 공간으로 들어갈 때 최은미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 나오는 것 같아요.

 

 

박동억

박동억

박동억 여성의 막막한 삶의 감각을 재현하는 작품은 결이 또 조금 다르게 다가옵니다. 「11월행」은 템플스테이를 함께 간 여성 삼대 이야기로 특별한 갈등이 드러나지 않지만, 핵심은 어머니의 역할을 타성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은형에게서 아무런 욕망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갈등도 존재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누구라도 좀 떠올리고 싶었지만 아무도. 꿈속에서 보고 싶은 사람이 한 사람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에 은형은 충격을 받았다”(299면)라는 서술에서 무작정 흘러가는 삶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막막함이 잘 드러나 있어요. 그 막막함을 벗어나기 위해서 「여기 우리 마주」의 은채 엄마는 자신의 공방에 집착하고, 「보내는 이」의 ‘나’는 반대편 아파트에 사는 진아씨의 흔들리는 창문을 보면서 자신의 삶을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폭력을 주제로 한 작품의 경우에는 여성들이 성폭력을 당한 과거의 경험 때문에 비틀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부모로서 자신을 교정해야 한다는 이중억압에 시달리고 있어요. 「나와 내담자」나 「내게 내가 나일 그때」의 인물들은 아이가 나를 닮을까봐, 아이가 나에게 영향을 받을까봐 그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정상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힙니다. 가족이나 의사도 교정을 강요하고요.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제게는 이런 부분이 가장 괴롭게 와닿았습니다. 그런데 날이 선 고통을 달래듯 「美山」에서는 죽은 동생을 향해, 「점등」에서는 사랑했던 이를 향해 끝까지 당신을 잊지 않고, 당신이 사랑했던 장소와 사람들을 더듬어보며 애도하고 그리워하겠다는 자세를 그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그리움의 자세와 마주할 때 독자를 어루만져주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황인찬 과거를 축으로 삼아 종적인 구조를 이루는 소설군과 현시점의 여러 일들을 두루 살피는 횡적인 구조의 소설군으로 나눠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한가지 재미있는 점이라고 한다면 「눈으로 만든 사람」 「운내」 등 과거를 축으로 삼아 한 인물의 기원을 살펴보는 작품의 경우에는 작품 속에서 연대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반면, 「여기 우리 마주」 「보내는 이」 등 신화적 기원이 없는 작품이랄지 현실을 횡적으로 살피는 작품의 경우에는 연대의 가능성이 현실 앞에서 좌절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작가에게 연대라는 것은 과거를 마주하는 일을 통해서 발견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두분 말씀 들으며 해보게 됩니다.

 

 

손원평 『타인의 집』(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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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이어서 손원평의 『타인의 집』으로 넘어가볼까요. 많은 독자들이 기다렸을 작가의 첫번째 소설집이죠. 발표지면을 보면 앤솔러지나 기획 단행본에 수록되었던 작품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소재나 색깔 면에서 다양한 작품이 묶였어요. 이런 다채로움이야말로 첫 소설집이 전할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박동억 작품이 크게 두갈래로 나뉘어 있습니다. 순서상 앞에 수록된 작품들은 여성 화자를 중심으로 한 내적 갈등이 주를 이루고, 뒤로 갈수록 세대 갈등이나 젊은 세대의 박탈감 같은 것이 두드러져요. 「4월의 눈」 「괴물들」 「zip」과 같은 앞의 작품들은 화자의 태도가 위악적이거나 혹은 화자를 신뢰할 수 없다는 암시를 주기도 합니다. 특히 「괴물들」은 무능력한 남편을 대신해 가족을 부양하는 어린이집 보육교사이자 사춘기 쌍둥이의 엄마인 ‘나’를 중심으로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집과 가족 그리고 여성의 내면을 그리는데요, 화자가 어린이집 아이의 목을 조르는 상상을 하기도 하고, 작품 내내 화자를 괴롭힌 쌍둥이 아들의 메모(“아빠를. 죽일 거야. 오늘, 저녁. 우리 손으로.” 42면)가 결말에 이르러 허구로 밝혀지기도 하죠. 이처럼 화자를 순수하게 현실을 묘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환상을 보고 있는 사람으로 암시하는 장치들이 육아나 가사노동 등 여성이 처한 실제 문제를 환기할 때는 설득력을 약화시키기도 합니다. 저는 그보다 뒤에 수록된 작품을 훨씬 더 흥미롭게 읽었어요. 표제작 「타인의 집」은 주인공이 구축 아파트 전셋집에 집주인 몰래 불법 월세 입주자 중 한명으로 들어가며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지요. “자본의 생리”(148면)를 읊는 전세입자 ‘쾌조씨’나 건당 50원으로 ‘나’의 방에 딸린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을 해온 ‘재화언니’와의 일화는 우스꽝스러워서 더욱 씁쓸합니다. 이처럼 젊은 세대의 개인주의적 성향을 생생하게 묘사한 작품이나 「아리아드네 정원」처럼 SF적 장치 안에서 세대 갈등을 효과적으로 다룬 작품들이 흥미로웠습니다. 전반적으로는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사회적인 문제와 갈등들을 선택하고 그려내는 시도, 말하자면 소설의 기획력 자체가 좋았고요.

 

정지아 이야기를 잘 만들고 주제를 관통해내는 힘은 분명히 있는데 여성 화자의 불안한 심리를 다룬 작품들은 밀도가 다소 낮다는 아쉬움이 앞섭니다. 저 역시 「타인의 집」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어요. 그리고 이 소설집 전반에 걸쳐 ‘집’이라는 것의 개념이 요즘 세대에서는 완전히 바뀌었구나 하는 감상이 들었습니다. 70~80년대를 살아온 세대에게 집이란 바깥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곳이었거든요. 물론 그 공간 안에서 무수한 폭력과 차별이 행해지고 있었지만 바깥의 고통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집은 지켜내야만 하는 공간이었죠. 근데 이 소설집에서의 집은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어요. 「괴물들」의 ‘나’는 무능한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지고 육아를 도맡으며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나머지 아이들이 남편을 죽일 거라는 환상을 만들어내죠. 「zip」의 주인공 역시 집에서 도망치기 위해 결혼을 선택했지만 결국 남편이 뒤에서 하는 말은 “어차피 그 여자는 몰라”(81면) 따위의 말입니다. 왜 이렇게 그려졌을까를 고민해보면 역시 세대의 문제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권 감수성이 높아지고 사회가 발전하면서 여성 문제, 성소수자 문제가 대두된 것처럼, 예전에는 내밀한 폭력이 일어나던 공간, 그러나 밖에 나가서는 절대 말하면 안 되었던 비밀의 공간이 이제 폭로되기 시작한 거죠. 인간의 마지막 사생활의 영역에서도 폭력과 차별을 없애려는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돌이켜보니 요즘 젊은 작가들의 많은 소설에서 집이라는 공간이 비슷하게 등장해요. 개인적으로는 대다수 작품이 엇비슷한 점은 조금 답답하다 생각하지만, 보이지 않던 것에 주목하게 되는 세상이 도래했다고 분명히 느껴집니다.

 

황인찬 저는 「타인의 집」을 그야말로 공감하면서 읽었어요. 틈만 나면 네이버 부동산에 들어가서 전세는 얼마고 매매는 얼마인지 찾아보고, 난 앞으로 얼마를 벌어야 집을 구할 수 있을지 생각하거든요.(웃음) “이런 집을 사는 거”가 “목표”(157면)라는 말이 참 허황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실 젊은 세대 모두가 실제 천착하는 고민이기도 할 것입니다. 누군가가 집을 소유하면 다른 누군가는 상대적으로 가난해지는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일시적으로나마 연대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것은 얼마나 헛되고 무의미한가 질문을 던지면서 약간은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이 작품의 재미있는 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가벼운 냉소가 작품을 더욱 현실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타인의 집」 「상자 속의 남자」 등 작가가 포착하는 인간상은 그야말로 소시민적이라고 할 만하고, 그 행동 원리도 비교적 투명한데, 그렇게 그려진 인물들이야말로 정말 우리 곁에 있는 누군가, 그리고 어쩌면 우리 자신이기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외에 조금 다른 결을 가진 소설도 있습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나 「열리지 않은 책방」 같은 경우에는 문학을 통해서 무엇을 행할 수 있는지 혹은 이 세계를 재현하는 일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읽으셨나요.

 

박동억 저는 「상자 속의 남자」나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결말로 가면서 교훈적인 메시지를 남기려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열리지 않은 책방」은 자신만을 위한 책방과 책이라는 소재가 흥미로웠지만 설명적으로 다가왔고요. 고민을 하게 만드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이 작품들은 작가가 결론을 먼저 제시하고 있어, 이야기를 밀고 갈 때의 흥미가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시들해져버렸어요.

 

정지아 작가의 장기는 문학을 직접적으로 다룬 작품보다는 다른 작품들에서 더 발휘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젊은 세대의 냉소와 연대, 동시에 연대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는 모습을 그릴 때, 가령 「타인의 집」을 보면 세 들어 사는 처지는 같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도 문간방과 화장실 딸린 방으로 계급이 나뉘죠. 타인에게 곁을 주지 않는, 희망 없는 요즘 세대의 중요한 특징을 다룰 때 더욱 풍부한 이야기가 펼쳐져요. 「아리아드네 정원」 역시 노인 인구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새로운 세대들이 앞 세대를 밟지 않고는 나아갈 수 없는 명제를 환기하면서 요즘 세대가 느끼는 좌절감, 상실감이 어떤 것일까 고민을 던져주고요. 반면에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는 맥이 조금 빠지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누구나 쓸 수 있는 얘기를 이렇게도 저렇게도 쓰는 것, 삶의 반복되는 이야기를 결국 제각기 알아서 쓰는 것이라는 마무리니까요. 또한 문학이 주는 모종의 위로를 담았다고 보이는 「열리지 않은 책방」도 다소 추상적이고 단순하게 다가왔습니다. 다만 손원평은 다양한 소재를 능숙하게 다루는 작가임은 분명합니다. 충분히 자기 세대의 특성을 다룰 줄 아는 젊은 작가이니 다음 소설집이 훨씬 좋지 않을까 해요. 첫 소설집으로는 충분히 자기 존재감을 증명했다고 보입니다.

 

황인찬 저로서는 소설집 전반의 냉소가 지시하는 현실이, 현실적인 만큼 또 익숙하게 느껴진다는 점이 아쉽기도 합니다. 분명 우리 삶에서 문제적인 지점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지만, 그다음으로는 도달하지 않은 채로 끝나버리는 것 같달까요. 그런데 사실 다른 사람들도 제시하지 못하는 결론이나 해결책을 작가에게, 그것도 첫 소설집에 바라는 것은 과한 요구인 것 같고요. 이 넓은 관심사와 재치 있는 이야기들이 어디로 나아갈지 계속 지켜보고 응원하고 싶습니다.

 

정지아 냉소와 좌절을 꼭 연대로 극복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냉소가 더 깊어지는 것, 삶 전체나 나아가 세계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가는 것도 한 작가만의 개성일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조금 더 멀리 나가도 되지 않을까, 겁먹지 않고 발을 내디뎌봐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임국영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자음과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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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임국영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요. 읽으면서 제가 작가와 비슷한 문화경험 속에서 자란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작품에 나오는 만화나 게임, 에피소드 등 많은 부분이 저의 어린 시절과 상당히 겹쳐 있습니다.(웃음) 근래 2000년대를 돌이키는 작품들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이만큼이나 제 이야기 같은 소설은 흔치 않아 참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박동억 저 역시 구체적 체험을 떠올리면서 읽었어요.

 

정지아 고스톱 외에는 게임이라는 것을 한번도 해본 적 없는 저로서는 두분이 구체적 ‘실감’을 가지고 읽었을 때 조금 다른 독서를 했으리라고 짐작합니다.(웃음) 결론은 재밌게 잘 읽었어요.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문학의 위기입니다. 저는 이 소설집을 읽으며 ‘문학이란 무엇인가?’ 계속 고민했어요. 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90년대부터 있었던 것 같은데요, 제 세대에서 문학이라는 것은 모든 다른 예술에 영감을 주는 장르였습니다.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를, 드라마를, 연극을 만들고 누군가 그걸 보고 그림을 그리고, 국민들이 뿌시낀(A. Pushkin)의 시구 몇개 정도는 암송하던 시대였죠. 그런 맥락에서 이 소설집은 문학이 하위 장르로 전락한 시대에 소설을 꿈꾸는 사람의 이야기로 다가왔습니다. 애니메이션과 게임이 소설을 쓰는 영감을 주고, 마치 격언처럼 팝송 가사를 가져와요. 그런 면에서 문학이 어디까지 추락했는가를 절실하게 느끼면서 읽었어요.(웃음)

 

박동억 제게는 편하게 읽힐 만한 소재를 다룬, 그리고 향수를 많이 느끼게 하는 작품이라는 게 첫인상으로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과거를 열심히 상기하는 것에서 끝난다면 소설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과거가 지금 현실과 타협하고 있는 나를 침입해오는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이때 과거로 돌아간다는 의미는 단순히 추억을 떠올리는 차원이 아니라, 퀴어와 같이 중요한 문제들을 정교하게 다루고 있어요. 현재는 억압되어 있는 퀴어로서의 실존은 과거의 추억과 같이 놓여 있지만, 과거를 회상하며 갑자기 현재의 나를 뒤흔들어놓습니다. 이를테면 「코인노래방에서」에서 남성인 ‘나’는 여성인 ‘연인’에게 학창 시절에 남자를 좋아했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 사랑이 실패했으며 종교를 빌려 자신의 정체성을 억눌렀다는 사실까지도 말이죠. 여기서 회상은 ‘나’가 다시금 퀴어로서의 정체성을 현재로 이끌어내고, 이성애자로서의 정체성과 갈등하도록 만드는 장치가 됩니다. 이처럼 퀴어라는 정체성 문제에 시간성의 문제를 포개어 실존을 고민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가 앞으로 쓰려는 작품들이 무척 기다려져요. 또 「코인노래방에서」에서 굉장히 인상 깊었던 구절을 하나 덧붙이고 싶습니다. 주인공이 과거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나니까 연인이 “네가 스스로 비참한 사람이라고 실컷 고백하고 나면 그런 너를 좋아하는 나는 뭐가 되는 걸까”(73면)라는 질문을 던져요. 말하는 자의 비참함과 동시에 듣는 자의 비참함을 생각한다는 것, 그런 까닭에 믿을 만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황인찬 어떤 점에서는 최은미와 대비되는 방식으로 시간을 인식하는 작가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이 선정한 소재가 어떻게 말하면 시의적절한 흐름을 잘 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2021년 우리는 이른바 ‘레트로’ 혹은 ‘뉴트로’라는 이름으로 이십여년 전의 것들을 끊임없이 소환하여 다시 향유하는 시절을 보내고 있는데,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질문해볼 수도 있겠고요. 앞서 문학의 몰락을 말씀하셨는데, 세계에 대한 감각 자체가 21세기를 기점으로 크게 변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겁니다. 말하자면 이 텍스트가 갖는 기원적 세계라는 것은 최은미의 경우처럼 존재 전체를 강하게 쥐어 잡고 놓아주지 않는, 그런 세계가 아니죠. 훨씬 더 가볍고 헛되다고 해야 할까요, 더 자본 친화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테고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의 결말 서술이 재미있었습니다. 어른이 된 수진은 게임이나 만화에 예전처럼 열광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그것들이 자신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기에 ‘덕질’을 놓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리메이크된 그 시절의 만화들, 혹은 후속작들을 보면서 예전처럼 재미있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죠. 요즘 서브컬처 시장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기도 한데요, 이미 성공한 적 있는 과거의 작품을 다시 활용하는 겁니다. 저도 몇편인가는 찾아서 보기도 했는데, 소설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과거의 영광은 없었”(45면)습니다. 여기에는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어내는 힘 자체가 불경기로 인해 사라져버렸다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겠죠. 다시 불러들인 과거의 것들을 마주하면 묘한 기분이 들어요. 텍스트는 여전히 꿈과 희망과 사랑과 정의를 담고 있는데 지금 시점에 되풀이될 때 이 꿈과 희망은 사그라지고 무력화됩니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는 과거의 문화적 경험들을 경유하여 나의 성장을 살피는 성장담이지만, 결말에 이르러서는 어른이 되었다는 의미에서의 성장이라기보단 어떤 퇴조나 몰락을 쓸쓸하게 확인하며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말하려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정지아 문학의 몰락은 같이 글을 쓰는 작가로서의 고민이었고, 언급했다시피 저는 무척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그러니까 게임을 하는 세대인데 각기 먼 곳에서 온라인으로 접속하는 게임이 아니라 나란히 앉아서 하는 세대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고, 손원평 소설과는 조금 다른 지점에서의 ‘요즘 세대’로 보입니다. 아직 좌절을 모르는 세대라는 인상도 있지만 그보다 주목된 것은 ‘관계 맺음의 조심스러움’이었어요. 마지막 작품인 「추억은 보글보글」에서 어린 도진과 원경은 각기 가정이 해체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나 둘은 서로 그에 대해 묻지 않죠. 견디다 못해 자신의 상처를 도벽으로 해소하는 원경을 보고 분노한 도진이 욕을 퍼붓기도 합니다만 그 분노는 폭력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어쩌면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의 주인공들은 슬픔 없이, 상처 없이 살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선험적으로 받아들인 듯해요. 밖으로 토해낼 수 없는 슬픔이 있고, 누구나 그런 슬픔을 갖고 있으리라는 것을 말이죠. 그래서 차마 서로에게 묻지 못하죠. 그저 나란히 앉아 게임을 할 뿐. 이게 세대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정도 작가가 의도한 지점이 있다고 읽혀요. 제 세대는 얼굴을 마주 보고 주먹다짐을 하면서라도 무엇인가를 해냈다면, 이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무엇인가를 함께 바라보는 세대구나. 성정체성에 대해서도 아주 수줍고 조심스럽게 그러나 자연스럽게 얘기를 꺼내고요. 이런 부분에서 부드럽고 따뜻하고 다정한 동시에 경쾌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죽음과 폭력이 가득한 최근의 작품들 사이에서 자기만의 위치를 가지고 있어요. 재치도 있어서 글이 술술 잘 읽히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저는 이 작가의 장편소설이 읽고 싶더라고요.

 

박동억 ‘다정하다’는 말이 정말 적절한 것 같습니다. 「추억은 보글보글」에서 친구의 죽음이라는 사건의 무게감이 크고 원경이라는 인물이 느꼈을 죄책감 역시 어마어마했으리라고 짐작되는데 그런 부분을 다정하게 소설 안에서 다루고 있어요. 작가가 이 인물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배려가 느껴집니다. 줄곧 인물들을 평가하거나 결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여요.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는 “수진은 어린 시절 늘 붙어 다니던 그 이상한 친구가 앞으로도 떠오를 것 같다고 예감했다”(46면)라고 마무리되면서 성인이 되어서도 BL(boy’s love, 남성 간의 연애를 그린 장르물)소설을 쓰는 수진의 욕망을 섣불리 부정하지 않습니다. 「코인노래방에서」에서도 ‘나’와 ‘연인’이 어떤 고민을 하는지 여실히 표현하고 있을 뿐이고, 「추억은 보글보글」에서도 도진의 죽음을 무심하게 방관한 원경을 탓하기보다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주력합니다. 아울러 보면 작품 전반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관계에 대한 향수 같습니다. 어린 시절의 우정, 좀더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던 감각과 같은 것들이 나이를 먹어가며 점점 사라지고 닫히는데, 이런 감각이 조심스럽지만 일반적으로 저희 세대가 공유하고 있다고 보이기도 합니다.

 

황인찬 요즘 세대라 하지만 사실 이 소설집이 다루고 있는 것들은 2021년 지금 기준으로 ‘아날로그 감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웃음) 당연한 얘기지만 비대면의 시대를 겪고 있는 지금 십대들의 관계 맺기나 혹은 세계에 대한 감각 같은 것들이 참 많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새삼 하기도 했습니다. 이 세대들이 소설가가 되면 또 어떤 이야기들이 펼쳐질지도 궁금합니다.

 

 

고영서 『연어가 돌아오는 계절』(천년의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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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이제 시집으로 넘어가볼까요. 고영서 시집 『연어가 돌아오는 계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2004년 광주매일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의 세번째 시집인데 과거, 특히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억과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삶에 대한 이야기가 두드러지는 시집입니다.

 

박동억 1부에서 5·18을 어떤 마음의 자세로 기억하고 있는지 그린다면, 2부에서는 그 복판에 있었던, 또 유가족으로 남겨진 여성의 트라우마를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부와 4부에서는 광주 정신을 상당히 넓게 가져가고 있어요. 광주를 넘어서 세계, 글로벌 차원까지 확장해나가는 모습입니다. 최근 젊은 작가들이 광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자기 자신의 위치를 훨씬 조심스럽게 고민하는 것 같습니다. 오성인 시인이 『푸른 눈의 목격자』(문학수첩 2018)에서 광주를 비교적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만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시인의 가족이 5·18의 희생자이자 가해에 부지불식간 일조하기도 했던 이중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죠. 대부분의 젊은 시인들은 피해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도 어렵게 느끼기 때문에 스스로를 방관자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이 시집은 5·18을 겪은 사람의 목소리를 대신 내는 듯한 작품도 있고 무척 직접적이에요. 이를 1990년대나 2000년대의 방식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시대의 재현 방식에 비추었을 때 오히려 새롭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정지아 저는 1부와 4부의 시편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바닥을 쳐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감성들이 좋았어요. “긍께 느그들은 삥아리 때 삐악삐악 허지 말고 장닭이 되야 갖고 콱, 찍어 부러”(「그때 그 돌멩이 하나」)같이 정말 생생한 삶으로부터 길어올린 말들이 있거든요. 삶의 표면을 훑는 정도가 아니라 삶이라는 깊은 강의 바닥을 찍고 올라온, 그러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언어들이 보여서 무척 좋았습니다. 시인도 아마 5·18을 일정 부분 경험한 듯 보이는데, 지금에 와서 왜,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고민을 많이 한 것 같아요. 그렇기에 여태까지 주변부로 다뤄진 여성의 목소리를 담아내려고 노력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시대와 어떻게 호흡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 역시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단지 광주뿐 아니라 소외된 계층의 여성의 이야기로 확장되어서 읽히기도 했고요. 그런데 3부와 4부에서 팔레스타인이나 고려인을 다룬 시편들이 어떤 의미에서 쓰였는가는 충분히 공감했지만 깊이와 무게의 측면에서는 어쩔 수 없이 1, 2부에 비해 떨어지지 않나 싶었습니다. 동료 작가로서 광주의 현재적 확장이란 무엇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인류 보편의 자유와 평화라는 거대 서사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인가 자문하기도 했습니다.

 

황인찬 말씀해주신 것처럼 5·18을 어떻게 감각하고 기억하고 나아가 어떻게 더 말할 수 있는지가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한 고민입니다. 저는 「아마조네스 여인들처럼」이 인상 깊었는데, 당대적인 문제의식을 통해 광주를 현재화하면서 다시 이해하려는 접근이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광주출정가에 “내 몸은 더러워도 내 피는 깨끗해”라는 성매매 노동자의 목소리를 겹쳐 인용하는 부분에서, 우리가 광주를 어떤 방식으로 또다시 사유하고 확장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강하게 읽혔습니다. 시인에게 있어 그 확장은 지역을 넘고 국경을 넘기도 하죠. 다른 곳에서의 비극을 통해 이곳의 비극을 재의미화하고, 이곳의 비극을 이해함으로써 다른 곳의 참혹함에 깊게 공감합니다. 가령 1975년 시인 김남주가 문을 연 서점을 경유하여 해남, 체코와 슬로바키아로까지 연결되는 식입니다.(「서점, 카프카」) 5·18의 흔적을 돌아보는 한편, 확장하는 특별한 시집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광주라는 큰 주제의식에 포섭되지 않는 시편들이 오히려 약하게 읽히기도 했습니다. 만약 다른 시집에서 봤다면 좋은 서정시라고 생각했을 텐데 말이죠. 아마 시인도 시집을 묶으며 고민이 많았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럼에도 이 서정이 남아 있는 것은 역사와 현실을 삶 속에서 감각하는 ‘나’ 없이는 그 모든 거창한 확장과 사유가 무의미하리라는 시인의 판단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박동억 처음에는 광주에 대한 인식을 전혀 하지 못하고 1부의 시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했어요. 결이 부드럽고 잘 정리되어 있는 서정시라고 생각했고, 전체적 구성을 파악한 이후에 더욱 아름답게 느꼈습니다. 가령 2부의 「이팝꽃」 같은 작품은 과거에 고봉밥을 투사들에게 나누던 순간과 현재 망월동 묘지의 묘비에 이팝꽃이 올려져 있는 모습을 정갈한 이미지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서정시들을 광주랑 연관 지어서 읽었을 때 더욱 아름다워지는 면도 있습니다. 5·18에서 조력자나 유가족, 희생자로만 재현되어 왔던 여성을 투사, 열사로서 재현하는 부분도 인상 깊었어요. 시대적으로 의의 있는 작업이라는 말씀에도 동의합니다. 3부와 4부에서 너무 넓게 광주를 확장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지만 인류의 참혹이라는 측면에서 5·18을 제2차 세계대전부터 지금의 난민 문제, 노동 문제와 포개어 생각하는 것은 2000년대 시의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시인이구나 싶었습니다.

 

황인찬 한편으로는 광주라는 기억을 가지고 현재 이 삶을 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쓰인 시도 눈에 띕니다. 이를테면 4부에 실린 「밥 한 공기, 공기 한 줌」 같은 경우, “내가 너에게 먹이는 밥/네가 나에게 불어 넣는 숨//우리는 어떤 인연으로 모녀(母女)인가”라고 하지요. 모녀 관계가 단지 혈연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으로 읽히는 대목입니다. 「손톱이 꽃잎 모양으로 휜다」 역시 현실에 대한 가벼운 스케치 같으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말하기를 하고 있습니다. 파스를 잘라서 아픈 손가락에 붙여가며 일을 해야 하는 삶과 그 손에서 꽃을 발견하는 장면까지는 사실은 익숙하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다음에 “노동이라 하면 무거워지고/놀이라 하면 가벼워지는//그 찰나의 부딪침”이라는 구절이 나와요. 지금 나의 삶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깊이 고민한 흔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의 저변에는 분명히 광주에 대한 기억과 재현의 문제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지아 방금 말씀하신 여기 내 삶의 자리,와 같은 부분이 우리의 삶과 광주를 어떻게 연관 지어야 할지에 대한 핵심을 일러주는 것 같습니다. 딸과의 이야기나 자기 노동의 이야기로 돌아올 때 훨씬 더 절실한 공감을 줘요. 광주를 직접적으로 얘기하거나 외연을 확장하는 방식 말고도 광주를 기억하는 우리들의 오늘에 더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황성희 『눈물은 그러다가 흐른다』(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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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황성희 네번째 시집 『눈물은 그러다가 흐른다』를 이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습작하던 시절, 시인의 첫번째 시집 『앨리스네 집』(민음사 2008)을 읽고 어떻게 시를 이렇게 쓰지, 어떻게 말을 이렇게 하지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번 시집 역시 말하기의 강렬함, 화자와 목소리 사이의 밀접성 같은 것이 빼어나게 읽히는 시집이었어요. 어떻게 읽으셨어요?

 

박동억 시집 전반에 걸쳐 어조를 일관적으로 가져가는 부분이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반어와 역설도 두드러지고요. 또 주방에서 소일하는 순간에도 자기 자신을 관조하는(「자물쇠가 천직인 사람」) 이런 자세들이 아이러니스트(ironist)라는 표현과 무척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까지 삶을, 세상을,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문법을 구축하는 게 놀라워요. 사람이 살다보면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무언가는 소중하게 여기게 되는데 특히 가족을 호명하는 시에서까지 그러한 시선을 끈질기게 가지고 가는 데서 시인이 가진 세계관이 철저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집의 마지막에 「단념」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놓아둔 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고양이는 고양이에 관한 의문을 키우지 않는다”라는 진술은 근본적으로 존재는 자기 존재를 회의할 수 없다는 한계를 명시하는 구절인데, 이러한 한계를 명시하는 것, 그리고 이 작품을 시집의 마지막에 둠으로써 아이러니를 완전한 구성으로서도 표현하고 있다는 점, 여기에서 시인의 투철함이 느껴져요.

 

정지아 말을 다루는 발칙함이 통쾌하기도 하고, 도발적인 삶의 태도가 면면이 묻어나는 시들이 굉장히 흥미롭고 유쾌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왜 태어나는지 모르고 왜 사는지 모르지만 살아내야 하죠. 그 자체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요?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데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고, 부모의 유전자를 받아 세상에 왔지만 그들에 대해 잘 모르고, 내 유전자를 받아 세상에 온 자식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황성희의 시에는 우리 삶의 이러한 어쩔 수 없는 아이러니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냉정한 시선이 느껴집니다. 「개의 복수」에서 나는 아마도 남편일 그에게 “그가 개라는 것을 처음 알려주”죠. 그리고 “자기 어머니 때문에 말이 된 사람”의 전화를 받습니다. 그 말은 나에게 “사람이 된 지 올해로 몇 년째냐고 묻”고요. 이처럼 세상과 타인과 나까지도 부정할 수 있는 것이 황성희의 힘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황성희는 거기 멈추지 않는 것처럼 보여요. “사랑이며 행복 같은 이 세계의 사탕발림이 또 없다/아무 보람 없이도 지우개는 잘만 닳지 않는가/나도 지우개가 될 수 있었다/손모가지가 둥글둥글 유순하게 닳아갈 수 있었다”(「지우개부심」)라고 말하거든요. 아이러니한 세상을 부정하는 것도 자신을 부정하는 것도, 사실은 둥글둥글 유순하게 닳아질 수 없다는, 그러지 않으리라는 주체적인 선언처럼 읽힙니다.

 

황인찬 정말 ‘솔직하다’는 말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발화가 특징인 시인이죠. 자기부정의 언어가 주조를 이루는데도 시를 살펴보면 결코 자기혐오로 기울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부정 속에서 흔들리는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기까지 한데, 이런 말하기는 정말 쉽지 않거든요. 어떤 의미에서는 정제되지 않은 언어라고 할 수도 있고, 반대로 매우 순도 높은 언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까지 그대로 드러내는데도 시가 무너지지 않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시인의 기교 없는 기교에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저 또한 시인이지만, 황성희 시인이 보여주는 경지가 참 경이롭고, 따라 하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웃음)

텍스트 안에서 나타나는 일관된 형상도 흥미롭습니다. 이를테면 “개가 개를 빠져나간”(「무식한 비닐봉지」)다거나 “팔 속에서 팔이/찰랑찰랑거린다”(「콧물에 대한 신념」)라는 구절이 그렇고요. 존재 그 자체로 있으면서도 존재 자체를 벗어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끊임없이 그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 동어반복적인 말하기가 시인이 스스로를 인식하는 방식이면서 세계하고 관계 맺는 방식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나로 존재하는데 나로 있을 수가 없어서 계속 바깥으로 튕겨나가게 되는 상태. 다만 시가 안정을 찾고 시로서 성립되기 위해서는, 중첩된 혼란을 정제하고 그 혼란 가운데 어느 면을 중점적으로 보여줄지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데, 황성희의 경우 그 상태 전체를 다 포괄적으로 말해버립니다. 그래서 일견 시가 산만해 보이는데 한발짝 물러서서 텍스트를 바라보면 사실 굉장히 안정된 상태예요. 저는 이런 점이 무척 신기합니다. 비슷한 세대의 다른 시인들이 보여준 주체의 겹침, 혹은 분열과도 분명히 달라요.

 

박동억 좀더 부연해보자면 자기부정이나 체계를 냉소하는 정신이 2000년대 이전 시에서 더 많이 보이기는 하지만, 이전의 방식은 세상을 냉소하는 자기 자신을 우뚝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이른바 ‘진정성’이라든가 ‘실재에의 열정’이라든가 해서 결국 주체로 되돌아오게 되는데, 황성희는 본인 안에 있는 그 진정성조차 냉소적으로 철저히 부정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2000년대 이후 주체관에 회의하는 정신, 부정의 정신도 더 극렬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뭐랄까, 좀더 색다른, 그러니까, 연필, 공책, 이런 거 말고, 미사일, 난민, 이런 거 말고,”(「의심하는 주특기」)라고 말하는 시인은 ‘미사일’이라는 전쟁의 도구와 ‘난민’이라는 참상을 상품과 함께 나열하면서, 세계를 환영이나 소비물로 격하시키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없는 목격자」와 같은 시에서는 더 나아가서 “속아도 속아도 계속 믿고 싶은, 지금 내 눈앞의 이 순간 같은 것, 지금 이 순간의 내 얼굴 같은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현존조차 확고한 대상이 아닌 믿음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글쓰기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를테면 내가 아닌 다른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다”(「지우개부심」)라는 실천은 술어적으로만 가능한 것이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죠. 그의 시가 언어적 형식으로 가능한 존재론이라면, 그 가능성을 극단까지 몰고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황인찬 「의리의 지우개」에서 “평생아! 짐만 되던 평생아! 너의 생각이 곧 너는 아니야. 추상은 가장 손쉬운 회피. 그러니까 나는 식탁과 놀고, 강아지와 놀고, 역사는 조금 어렵지만, 어쨌든 나도 역사니까,”라는 구절이 인상 깊었습니다. 시인이 자신의 쓰기 행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대목이었어요. 나는 손쉽게 추상으로 후퇴하지 않겠다, 사물에 대해 말하고, 생물에 대해 말하고, 역사에 대해 말하겠다, 그리고 그것들이야말로 나 자신에 대해 진정으로 말하는 일이다,라는 식인 거죠. 이 시의 끝부분 역시 흥미롭습니다. “발소리 빼곡한 유령선아. 나는 결코, 저 사거리를 잠식하는 투명한 나무의 거대한 뿌리와는 만나지 않겠다.”라는 문장은 너무나 분명하게 김수영에 대한 의식이 엿보이기도 해요. 이 시를 읽으면서 어쩌면 현재 가장 김수영에 가까운 글쓰기를 하는 것은 황성희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자기부정의 방식도 그렇고 아이러니를 다루는 방식도 그렇고요.

 

박동억 저 역시 「의리의 지우개」의 말씀하신 부분을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시인은 존재론적 시간과 역사적 시간 사이의 갈등을 드러내는 진술과 내가 무엇을 만지고 있는지 등을 인식하는 존재론적 진술들을 자주 병치하고 있는데, 그것이 역사적인 층위와 실존적인 층위를 일관되게 냉소하는 철저한 작법이라고 느꼈거든요.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대영빌라야. 허공으로 가득찬 502호야. 발소리 빼곡한 유령선아. 나는 결코, 저 사거리를 잠식하는 투명한 나무의 거대한 뿌리와는 만나지 않겠다.”라고 말할 때, ‘지금 이 순간의 대영빌라’라는 현존에 기대어 ‘거대한 뿌리’로 표상되는 역사나 이념과 단절할 것을 선언합니다. ‘김수영에 가까운 글쓰기’라는 말은 이러한 정신을 무엇에 기대어 규정할 것인지, 고민을 더해주는 인상 깊은 표현입니다.

 

 

최지은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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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마지막으로 최지은 시집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2017년에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인의 첫 시집이에요. 첫 시집이란 그간의 삶을 비롯하여 그 삶에서 출발한 쓰기가 어디로 도달할지 시사하기도 하는지라 이야기할 것들이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박동억 요즘 젊은 시인들 시 중에서는 드물게 굉장히 다정하다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소설 이야기에서 나온 것처럼 집이라는 모티프가 추억 속에서든 현실에서든 상당히 부정적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집에서 가족은 관계의 문제나 죽음이라는 아픈 체험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립고 다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합쳐지고 싶은, 온기가 있는 형태로 불려서 눈길이 갔습니다. 집이나 가족, 태몽이라는 모티프가 나타날 때마다 미각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되는 것 역시 큰 특징 중 하나예요. 추억을 만진다기보다 추억을 삼킨다는 표현이 적절한 것 같습니다. 가족을 추억하거나 사춘기를 상기할 때 ‘자두’의 이미지가 그러하고(「칠월, 어느 아침」), 학창 시절의 ‘사탕’이(「여름」), “나눠 마시는 물 한잔의 밤”(「벌레」)이 그러합니다. 바슐라르(G. Bachelard)는 『공간의 시학』(동문선 2003)에서 ‘모든 둥근 것은 애무를 부른다’라고 말했는데, 이 표현이 시집의 이미지를 아우를 때 적절한 단서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엇보다 추억을 떠올린다는 표현보다 ‘삼킨다’라는 표현을 빌릴 때, 이 시들이 어떤 간절함과 통증에 기대어 쓰였는지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정지아 시에 대해 일천한 저 역시 다정하다, 섬세하고 여리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상실한 것에 대한 그리움, 상처만 남은 집으로 끊임없이 회귀해가는 마음 같은 것들이 가슴에 오래 남습니다. 시집 초반에는 잠겨가는 물의 이미지가 등장해 그게 꿈으로 연결되고, 꿈속에서만 행복을 발견하고 겨우 견뎌낼 수 있다가 끝으로 가면서 처음으로 사랑, 타자와의 관계가 등장하는 듯한 구성도 좋았습니다. 첫 시집이라 그런지 내면의 상처를 딛고 이제 막 발길을 떼는 듯한 인상을 받았고 첫걸음을 걷는 아기를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마음으로 시집을 읽었어요. 아주 냉정하게 보면 시가 다소 반복적이고 겹치는 이미지들도 있어 지루한 감도 없지는 않았지만 시인을 놓고 생각해보면 그 상처가 평생 내 존재의 근원인데 그로부터 한발을 떼기가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어요. 그런데 이와 별개로 저는 요즘 시나 소설에서 생활의 감각이라는 것이 꽤 많이 줄어들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데, 사실 관념에 앞서 사람을 튼튼하게 세우는 것은 생활일 수밖에 없습니다. 최지은 시인도 이제 막 걸음을 떼기 시작하였으니 생활에도 몸을 담그고 그것을 그 찬찬하고 다정한 언어로 형상화시킬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황인찬 말씀처럼 반복적인 면이 있지요. 가족, 근원, 상처와 같은 주제들이 여름, 숲, 꿈, 물 등 다양한 이미지를 거느리면서 반복적으로 펼쳐집니다. 그러면서도 그 다양한 기억과 이미지들이 굉장히 추상적으로, 실체가 약한 것으로 읽히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게 이 시집의 특징처럼도 보입니다. 4부의 「영원」에서 어떤 연은 아예 “고장 난 시곗바늘이 같은 자리를 반복하고 있었다.”라고 말하며 “여름”이라는 시어를 스무번 반복하다가 “멍청한 여름”으로 마무리돼요. 이 시가 끝날 때도 “휴가는 끝났고 나는/다시 그곳에 돌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원이 되어가는 시간 속에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스스로가 안에 계속 갇혀 있음을 의식하고 있는 모습이 보여요. 이 약한 실체의 이미지들, 그리고 갇힌 세계를 암시하는 반복들은 세계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 잘 드러나는 흥미로운 지점이기도 합니다. 시집의 제목처럼 봄밤은 끝나가고, 시계는 같은 자리를 가리키고 있을 뿐이고, 세계는 반복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도 시는 세계를 표현하기엔 터무니없이 짧죠. 시집의 제목에서 전망 없는 세계에 대한 시인의 절망이 의미심장하게 표현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처음 시를 읽으면서는 이 반복들이 시의 긴장을 떨어트리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 계속 읽으면서 반복을 통해 보다 선명하게 전달되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동억 저는 전진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어요. 시를 통해 자기 자신의 상처를 조금씩 조금씩 꺼내면서 전진하다가 4부에 이르러 “나는 자살 유가족입니다”(「너 홀로 걷는 여름에」)라고 명징하게 직설할 수 있는 지점까지 나아가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앞서 설명한 이미지들처럼, 시인은 자신의 상처를 다독이면서 열매 같은 것으로 농축해나가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러니까 이 시집에서의 반복은 어쩌면 상처를 마주하기 위해 필요했던 과정이기도 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황인찬 또 시집의 특이한 점이라고 해야 할까요, 시인만의 특징이라고 해야 할까요. 요새 읽은 시들 중에 이렇게까지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이 보이지 않는 시는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웃음) 아무리 다정하거나 섬세하게 말하는 시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 뭔가를 부정하는 태도가 어느정도는 들어 있기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이 시집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는 거예요. 시인이 의도적으로 부정의 영역을 은폐하고 있나 혹은 그것이 미적 기획의 일부인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한가지 특징은 보기 드물게 가족에 집중하는 시집이기도 하다는 점인데요. 그 때문인지 시선이 자주 과거를 향하고, 내면적이라는 인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에 반해 외부에 대한 인식은 추상적으로 뭉뚱그려져 있어요. 첫 시집인 만큼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것이 참 중요한 일이긴 하겠지만, 저로서는 다소 아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정지아 시를 통해 짐작하면 엄마는 자신의 사랑을 찾아서 나를 버리고 떠났고, 아버지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어요. 그런데도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에는 원망이 없어요. 저는 이 점이 좋습니다. 시인이 주목하는 것은 떠난 자들로 인해서 남겨진 슬픔, 그 슬픔에 잠식당한 채 한 시절을 살아낸 사람이란 말이죠. 상처의 치유가 꼭 분노의 폭발이나 대갚음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각기 상처를 녹이는 방식들이 있을 거예요. 이 시인은 슬픔에 온전히 자신을 담그고 완전히 젖음으로써 그 슬픔을 견뎌내는 방식을 택한 것이죠. 저는 그 자세가 곱고 예뻐 보이고요.

 

박동억 시집에, 특히 가족이나 자기 실존을 대하는 시인의 자세에 윤리적인 비범성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부정의 대상이 마음속에 있겠죠. 하지만 그것을 말하지 않는 데에 비범성이 있다고 보여요. 다만 “내 마음/천사의 속삭임 쪽으로 한껏 기울여//깨끗한 물 한모금 머금어봅니다”(「십이월」)라는 문장처럼 최지은의 시는 ‘깨끗한 물’의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는 아픔 안에서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시인이고, 미워한다고 말하는 대신 견딜 수 있다고 말하는 시인이며, 잃었다고 말하는 대신 다시 간직할 수 있다고 말하는 시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 「미래에게」라는 시가 다른 시들과 다르다고 느껴졌던 건 시에서 말씀하신 ‘부정’이 언뜻 비쳐서예요. 광장이나 캠페인 같이 사회라는 반경으로 시야를 넓히는 듯 보이다가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고 믿는 확신을 내비칩니다. 하지만 이런 환멸은 좀 막연하게 느껴지기도 하거든요. 구체적인 분노라기보다는 거리에 대한 막연한 환멸감 같은 것이 말이에요. 어쩌면 시인은 가족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놓고 다른 주제를 확장해나가는 데는 조금 서툰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정지아 저는 모든 작가의 글이 사회를 향하여 나아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실존 안에서 이제는 과거의 슬픔이 아니라 새로운 슬픔을 맞닥뜨려나갈 것이고, 예민한 감각으로 생활의 영역에서 자기 실존을 충분히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시인이 변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황인찬 윤리적인 비범성이라는 말이 저에게는 각별하게 들립니다. 시인이 선택한 것이라는 뜻이겠죠. 그렇게 생각하고 읽어보면 한층 더 대단하게 느껴지는 시집이기도 해요.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느린 발걸음과 곡진한 말하기의 시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첫 시집 이후에 시인이 대체 어디에 도달하게 될지 그야말로 궁금해집니다. 정지아 소설가의 바람처럼 변하지 않을 것인지, 혹은 숨겨놓았던 칼을 꺼내 들 것인지 말이죠. 오늘 이 자리는 이쯤에서 정리하면 어떨까 합니다. 긴 시간 동안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분의 말씀을 듣고 많이 배울 수 있어 좋았습니다.

 

정지아 오랜만에 젊은 작가들과 최근의 작품을 얘기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시골에 틀어박혀 사니 이런 시간이 귀하거든요. 젊은 작가들이 멀게 느껴진 적도 있었는데, 세대 간의 거리가 알고 보니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아 반가웠습니다. 오늘 읽은 작품들도 그 거리를 좁히는 데 큰 도움이 된 것 같아 감사하다는 말 남깁니다.

 

박동억 코로나로 인해 방 안에서 문학을 읽고 쓰는 작업만을 하다보니 나란히 모여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감각과 멀어지곤 합니다. 오늘은 문학을 홀로 음미하는 대상으로 대하지 않고 문학이 어떠한 시선과 마음의 교차로가 될 수 있는지 다시금 확인했던 것 같습니다. 직접 뵙지 못해서 아쉽지만 두분과 풍성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

 

황인찬 곧 다시 얼굴을 뵙고 인사드릴 수 있는 날이 빨리 온다면 정말 기쁘겠습니다. 무엇보다 건강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2021.7.20. ZOOM 어플리케이션)